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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사진. 글 : 寫眞家 德岩 張漢基)
195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영화 산업은 가설극장으로 일관하던 시대였다. 당시는 흑백 위주의 8밀리 영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내용 면에서도 주로 일제에 항거하는 약소민족의 설움을 한 풀이 식으로 다루었거나, 민족혼을 일깨우려는 독립투사들의 지하운동 이거나, 아리랑 같은 우리민족 고유의 사상을 은유적으로 다룬 영화들로서 그 시대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서울을 비롯한 몇몇 대도시를 제외 하고는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영화나 연극이나 악극단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요즘처럼 영웅시 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으며, 그들은 우마차에 가설극장을 설치할 천막과 영상 장비를 비롯한 공연 준비물들을 싣고 방방곡곡 찾아다니며 유랑 생활을 하여야 했다. 영화의 상영도 시골 장터나 읍 면 소재지 등에 가설극장을 설치하고, 확성기를 통하여 영화 상영을 선전 하였으며, 동리 입구 벽보판이나 구멍가게의 유리창마다 선전용 포스터를 부착 하거나, 관련 배우가 직접 마이크 앞에 나와 육성으로 광고를 하기도 하였다.
가설극장이라는 것은 대형 천막을 설치하고 출입구에서는 건장한 청년들이 입장료를 받고 있었으며, 행여라도 몰래 숨어 들어가는 아이들이라도 있으면 천막 밖으로 끌어내어 혼을 내어주곤 하는 역할을 함께 담당하고 있었다. 가설극장의 대형 천막 안에는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좁은 공간에 수용 할 수 있도록 바닥에 앉아서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영화를 관람하기 위한 여성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앉을 방석을 지참하는 사례를 종종 볼 수가 있었다. 이따금 지방 유지라도 초청하는 경우에는 천막 좌우 가장자리에 간의 의자를 배치하여 관람 할 수 있게 배려 한 것이 상석 관람석이 되었다. 천막 내부의 전면은 대개 건물의 벽면을 이용 하여 하얀 천으로 된 스크린을 설치하고 10여 미터쯤 뒤쪽에서 영사기를 비춰주는 방식 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가의 검열이 극심했던 시기여서 영화의 주요 분분이 잘려 나가는 것은 보통 이었으며, 영화 상영 도중에도 내용이 절정으로 치닫는 때에 필름이 끊겨져 관객의 아쉬운 탄식의 소리를 듣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또한 당시 어린이들은 대부분 연소자 관람 불가 사유로 입장이 제한되어,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은 가설극장 주변을 서성이며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내용을 상상만으로 느끼다가 영화가 종반으로 향할 때쯤 천막의 휘장을 거두게 되면 그때야 슬그머니 뒷자리로 가서 반 토막 관람을 하곤 하였다. 이따금 홍길동 같은 건전 영화의 경우는 초등학교 에서도 일 년에 한두 차례 학교 강당에서 초청상영으로 전교생이 단체 관람을 하는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의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그 후 1960년대 에는 중소 도시에도 극장이 설립되고, 한국영화의 보급도 확대되어 점진적으로 정착된 관람 시스템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를, 영화배우들도 국민들의 의식속에 스타라는 위치로 자리잡기 시작한 신문명의 도입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에는 영상 기술도 진일보하여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이라는 문구가 극장가 곳곳에서 관객을 끌어 들이기 시작 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해외의 유명 영화들이 수입 보급되어 해외 영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대로 볼 수 있다.
아마도 필자의 기억으로도 이 시기에 관람한 영화들이 지금껏 가장 기억에 남는 대작들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로 영국, 프랑스, 이태리 등 유럽을 무대로 한 영화 이거나, 헐리우드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벤허, 십계, 로마 제국의 멸망, 엘시드, 스팔타카스 등, 카크-다그라스가 스크린을 휘어잡던 종교 영화 이거나, 중세 유럽의 노예의 반란 등의 영화였거나, 역마차, 황야의 무법자, 황야의 은화일불, 석양의 건 맨, 등 총잡이의 대명사로 알려진 존웨인을 필두로 한 서부영화였거나, 숀-코넬리가 등장한 007시리즈의 첩보영화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빛을 본 영화들이었다. 가끔은 홍콩이나 중국 등지에서 하늘을 나는 신출귀몰한 영상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며 인기몰이를 하던 소림무술의 신비스러움이나, 현대판 무술의 달인이었던 이소룡 이나 성룡 등이 활동하던 영화 등도 이 시기에 주로 제작 되었으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며 영화 팬들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한참 인기몰이에 열을 올렸던 우리나라의 멜로물 영화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드디어 우리영화의 살길을 찾기 위하여 영화 배급의 궤터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해외영화의 수입을 줄이고 우리영화의 보급을 확대시키는 퀘터제는 바로 국내 영화인들의 살길찾기 운동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면서 세계의 모든 문화는 급격하게 변화되었으며, 그 동안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던 일반 대중들의 의식이, 컴퓨터의 인터넷과, 휴대폰을 이용한 통신의 발달로 인해 닫혀있던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하였으며, 그 위력은 과히 상상을 초월한 메가톤급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 의사의 영역은 선택의 범위를 넘어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시대로 바뀌게 되었으며, 기존에 만족하지 않고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도전자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 하였다.
세기의 변화는 거센 물결로 들이닥쳐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로 재편하게 되었으며, 내부에서 고객의 처분만 바라며 애국심에 호소하던 시대는 물건너가고, 새로운 시각의 세계적인 추세의 경향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에, 영화라고 예외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에 도전장을 던진 몇몇 영화감독들은 세계 영화계에 도전을 시작한 것이 드디어 하나 둘 성과로 이어져 2002년 임권택 감독이‘취화선’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제59회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이창동 감독이 ‘오아시스’로 감독상과 신인배우 상을 받은 것을 시발점으로 한국 영화가 세계 시장에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국 영화는 1990년대 말부터 매년 세계3대 영화제에 진출하여 경쟁 부문에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2004년 9월 11일 제61회 베니스 영화제에서도 김기덕 감독이 신작‘빈집’을 출시하여 영광스러운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그 전해 2월에는 '베를린 영화제'에서‘사마리아’로 감독상을 수상한 이래, 한 해에 세계3대 영화제에서 두 번이나 감독상을 받아, 세계 영화계에 실력파 감독으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2003년 5월에는 박찬욱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올드보이' 로 그랑프리를 수상하여, 한국 영화가 세계3대 영화제에서 모든 주요 부문상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특히 김기덕 감독의 경우는, 1996년 데뷔 이후 8년 동안 무려 11편의 영화를 제작 하였으며, 한국 영화계에서는‘이단아’로 지목 받을 정도로 정통성을 벗어난 제작 방식과,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최저 제작비와, 최단기간 촬영을 실현하는 등, 많은 미스터리를 남기고 있다. 200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빈집’은 불과 13일간의 촬영으로 기존 국내 제작 영화의 10%에 불과한 최저의 제작비를 투입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빈집’은 무성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주인공들에게 많은 대사를 주지 않았으며, 이미지의 힘으로 의사소통을 모색한 새로운 탐구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는 후 평도 있다. 대사를 자막으로 표현 해야 하는 한국 영화의 불리함을 예리하게 반전시킨 효과를 함께 거둔 예견된 성과였다고 하겠다.
시사회에서도‘유머나 사랑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평과,‘후반부의 영화가 시(詩)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등, 시사회 관객들의 아낌없는 찬사가 김기덕 감독의 제작의 변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아 마음 흐뭇함을 느끼기도 했었다.‘엽기 감독’‘이단아’라는 별칭은, 정통성과, 학력, 경력, 인맥 등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화려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김 감독에게 덧씌워진 멍에와 같은 것 이었을 것이다. 그는 결코 그러한 주변의 냉소에 굴하지 않고‘작가 주의’‘작품 주의’를 표방하며, 세계 시장을 겨냥한 전략이 주효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진정한 자존심을 보여준 영화인으로 평가 될 것이다. (LENSE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