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약, 접근성 높여도 모자랄 판에
‘경구피임약 전문의약품 전환’시 발생할 문제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박희정
지난 7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긴급피임약(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고, 경구피임약(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는 내용을 포함한 의약품 재분류안을 발표하면서 뜨거운 논쟁이 일고 있다. 이 분류안이 시행되면 응급피임약은 의사의 처방 없이도 일반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게 되며, 반대로 현재 시판 중인 경구피임약은 모두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이 가능해진다.
이권이 걸린 대한약사회와 대한의사회가 재빠르게 공식입장을 내고 전면전에 나섰다. 약사회는 사전피임약과 사후피임약을 모두 일반의약품으로, 의사회는 둘 다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 조치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해 환영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경구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한 것에 대해서는 “여성의 건강과 의료 접근권, 삶의 질을 저하시킬 수밖에 없는 정책”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그동안 큰 문제없이 일반의약품으로 사전피임약을 이용해오던 여성들도 식약청의 이번 조치에 크게 반발하는 모습이다.
50년간 세계에서 사용된 피임약, 안전성 높아
▲ 국내에서 50년간 일반의약품으로 판매되어온 경구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겠다는 식약청의 발표에 그동안 큰 문제없이 사전피임약을 이용해오던 여성들도 크게 반발하는 모습이다. © 일다
식약청은 사전피임약이 “장기간 복용”하며 “여성 호르몬 수치에 영향을 미치고, 혈전증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며 “투여금기 및 신중투여 대상이 넓어 복용 이전에 의사와 상담 및 정기적 검진이 권장되는 의약품”이라는 점을 전문의약품 전환이유로 들었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캐나다 등 의약선진외국 8개국에서 모두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환근거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전피임약의 경우, 국내에서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사용되어 왔다. 피임 목적뿐 아니라 생리주기 조절, 여드름 치료 등으로도 많이 이용되어 왔던 만큼 여성들은 식약청의 전문의약품 전환 조치에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다수다.
살림의료생협 가정의학과 의사 추혜인씨는 “식약청이 사전피임약의 부작용을 새삼스럽게 과장하는 것에 대한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식약청이 제시한 이유가 50여 년간 일반의약품으로 사용되었던 사전피임약을 이제 와서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할 만큼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한약사회는 사전피임약이 “지난 50여 년간 전 세계에서 사용돼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된 제품”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사전 경구피임제는 여성호르몬(합성 에스트로겐) 함량을 1일 용량 20-30㎍(마이크로그램)으로 줄인 저용량제제이므로 안전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주장이다.
또한 미국 등 식약청이 예로 든 의약선진국에서도 최근에는 이러한 저용량제제의 시판과 더불어 사전 경구피임제의 일반의약품 전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경구피임약에 대한 접근성 떨어뜨려선 안돼”
무엇보다 여성단체들은 사전피임약의 전문의약품 전환이 사전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릴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는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이 “특히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로 인해 병원에 가기 힘든 여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번 분류안이 통과되면 진료비 부담과 함께 기존의 경구피임약 가격이 약 3배 가량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현재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진료비 부담은 저소득층이나 학생들에게 사전피임약에 대한 문턱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여성들은 매번 처방을 받기 위해 산부인과에 가야 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호소한다. 육아, 미용 등 여성회원 중심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사전피임약의 전문의약품 전환에 반대하는 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산부인과에서 느끼는 불편감, 불필요한 검사 추가 등 불신도 한몫을 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의 경우 부담감은 더 크다. 혼인관계에 있지 않은 여성의 성관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 때문이다.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는 “비용과 접근성의 문제로 수많은 여성들이 사전 피임약을 복용하는 대신 사후 응급피임약에 의존하게 된다면, 이는 여성의 건강과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의 사전피임약 복용율은 약 2.5%정도에 불과하다. 소위 ‘의약선진국’들이 전문의약품으로 처방하고 있음에도 사전피임약 복용율이 20∼40% 정도인데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콘돔 사용율도 매우 낮다. 우리나라의 콘돔사용률은 20~30%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피임이나 성관계 자체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한국 문화 때문이다. 피임지식에 무지해 질외사정이나 주기법 등 실패율이 매우 높은 방법으로 피임을 운에 맡기는 사람들이 많고, 이로 인해 인공임신중절율도 높은 상황이다.
식약청의 의약품 재분류안 발표에 부담감을 호소하는 여성들은 바로 기존에 사전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던 2.5%에 속하는 여성들이다. 접근성을 높여도 모자랄 판에 현재 수준에서 더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행위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피임약 논란과 관련해 오는 15일 2시 반부터 여의도에 위치한 화재보험협회 강당에서 공청회를 개최한다. 식약청은 이날 공청회에서 모아진 의견과 7월 6일까지 접수된 의견들을 종합한 후,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자문 등을 거쳐 7월말 재분류안을 확정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