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준 선수
그 시절 지방에서의 전국대회, 제9회 전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
어떠한 일은 함에 있어 첫 번째 순간은 항상 기억에 남는 법이다. 나 역시 탁구협회에 몸담은 이후 처음으로 참여했던 제9회 전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를 가장 잊지 못한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소풍 전날 밤처럼 얼마나 가슴이 설레이고 기대가 되던지. 그리고 대회에 참여해서는 힘들었지만 새로운 느낌들이 있어 좋았을 뿐만 아니라 탁구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특히나 1960년대는 지방 탁구가 지금보다 활성화되고 우세한데다, 지방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될 경우 환영식을 비롯한 대회 준비 및 열기가 참으로 대단했다. 때문에 1년에 한 두 번은 꼭 통례로 치러지게 되어있던 지방에서의 전국대회는 그야말로 볼거리가 많아 대회 관계자들은 항상 기대를 잔뜩하고 내려가던 시절이었다. 또한 각 분야별로 조직위원회 등을 구성하는 등 대회 진행 역시도 세밀하여 배울 점들이 많았다.
1963년 4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9회 전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는 부산 대청동에 위치한 동광초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지금이야 전국대회라 함은 당연히 그 지방에서도 가장 큰 체육관에서 치러지지만 여건이 여의치 못해 학교 강당에서 치러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때는 구덕체육관이 세워지기 이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탁구대 8대를 놓으면 공간이 빠듯해 펜스도 놓지 못한 정도였고, 관중들 역시도 마땅히 앉을 곳이 없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종일 서서 보기 일쑤였다. 또한 경기중 관중들이 볼을 주워 선수들에게 전해주는 모습은 예사이고, 관심을 집중시키는 경기라도 펼쳐지면 관중들이 중앙으로 몰려들어 여간 정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많은 관중들을 정리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아 초년병인 나로서는 절절 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는 여건일 뿐이고, 지방 탁구인들의 탁구에 대한 열의가 대단해 순간 순간 맛깔스러운 준비들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지금도 흐뭇하게 기억되고 있다.
제9회 전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를 생각하면 내가 처음으로 참여했던 지방에서 열린 첫 전국대회라는 것 말고도 하이라이트 경기였던 산업은행 대 조흥은행의 여자단체전 경기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당시의 산업은행이라 함은 기라성 같은 선수들로만 구성(대부분 국가대표들로만 이루어졌다)되어 10여년 이상 한국 여자탁구의 패권을 잡아 온 강팀이었다. 반면 조흥은행은 그해 2월 배화여고 졸업생들로 창단을 하여 종별대회에 쳐녀 출전을 한 완전 신생팀이었다. 두 팀의 전력만 놓고 보더라도 당연히 산업은행이 우승하리라 여겼을 것은 뻔한 일. 그런데 예상을 위업고 조흥은행이 산업은행을 3대2로 이겨 대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4단1복으로 치러진 경기에서 처음 두 점은 예상대로 산업은행이 잡았으나, 복식에서 조흥의 쌍둥이 자매 신문자.신명자 조가 산업의 에이스 황율자.이신자 조를 2대1로 이기자 경기장 안은 초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네 번째 단식에서도 조흥의 신문자 선수가 산업은행의 이경희 선수를 잡아 2대2 동점이 되었고, 마지막 단식에서 조흥의 최화자 선수가 산업은행의 황율자 선수를 이겨 역전승을 이루가 경기장은 삽시간에 날 리가 났다.
더욱이 양 팀의 부산지점 직원들이 동원, 열띤 응원전을 벌이다 경기가 예상과 뒤바뀌자 펜스를 밀치고 들어가는 통에 당황한 나는 관중들을 정리하느라 얼마나 고역을 치렀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고역스러웠던 순간이 내게는 크게 기억된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그 시절 탁구인들에게는 이러한 추억들이 향수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추억은 그 시대 사람만 공유할 수 있은 것이므로.
그 시절 지방에서의 전국대회Ⅱ, 제18회 전국도시대항탁구대회
제9회 전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 이듬해인 1964년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7월 4일부터 7일까지 열린 전국도시대항탁구대회가 제주 시민회관 개관식과 겸해서 치러졌는데, 그 먼 제주에서 개최하게 된 동기는 이러했다.
우선 6.25 동란 때 이경호. 원영호. 박광덕. 김두현. 등과 같은 원로탁구인들이 제주로 피난, 후배들을 키워 1960년대의 제주 중.고 탁구가 전국을 휩쓸 정도로 육성해 놓은데다, 강재량 전 대한탁구협회 회장과 당시 한일은행 제주지점장이었던 김방훈 씨의 탁구열기가 대단하여 대회 개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지방대회라고는 하나 교통수단부터 여느 곳과 달라 나는 마치 해외로 원정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제주 땅을 밟아보는 것도, 비행기를 타보는 것도 난생 처음인지라 마냥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 기대로 제주에 도착하자 공항과 부두 주변에 밴드를 동원해 놓고 선수단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각 시도팀과 제주지역 각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던 터라 환영식이 더욱 대단했으며, 이로인해 선수들의 사기도 북돋아졌다.
또한 제주 시민회관 개관식과 겸해 개최된 만큼 개회식이 끝난 후 밴드를 앞세운 전 선수단이 시내 곳곳을 시가행진, 제주 시내 전체가 환영인사와 더불어 축제의 한마당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저녁마다 각 기관에서 선수단 파티를 곁들인 오락 시간을 가져 대회 기간 내내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던 것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어지고 있다.
협회를 퇴직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많은 대회를 치러왔으나 제주에서의 그 대회처럼 대대적이고 활기를 띤 대회는 드물며, 대회 운영면에 있어서도 배울 점들이 많았다. 가끔씩 요즘도 그와같은 분위기 속에서 대회가 치러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아울러 참고로 당시 대회 전적을 적어보기로 한다.
남자부 우 승 : 서울 여자부 우 승 : 서울
준우승 : 부산 준우승 : 부산
3 위 : 목포, 제주 3 위 : 제주
이달준 선수에 대하여
‘이달준’. 강원도 태생의 키가 작고 오뚝이처럼 탁구를 쳐 늘 인상적이고, 유남규 선수처럼 쇼맨십도 꽤 있었으며, 60년대 국내 종합 랭킹 1위였던 사람이다. 특히 스핀이 무척이나 빨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탁구인들이라면 그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당시의 탁구인에게 인상적인 선수였었다. 나 역시도 그가 내 탁구 추억 속에서 큰 비중으로 남아있어 그에 대한 기억을 이쯤해서 더듬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를 떠올리면 나는 그 얘기부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영국 국제탁구진흥회(Word Table Tennis Promotites Limited)의 초청을 받고(즉 영국 흥행사와 전속계약을 맺음) 대한체육회에 파견신청서를 냈는데 그만 부결이 되고 만 일이다.
그같은 제의를 그가 받게 된 것은 1964년 4월부터 6개월간 3년 동안 세계 순회경기에 나서게 되었는데, 1960년 인도 아시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각광을 받자 그쪽으로부터 제의가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좋은 일이었고, 다른 선수들에게도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으나 대한체육회가 반대의 입장을 보인 것이다.
협회는 그를 영국에 파견시키게 되면 그해 9월에 있을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의 출전이 불가피한 것과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전향되는 것은 안된다 라는 문제로 장시간 이사회에서 논란을 빚기도 했으나 먼 앞날을 내다볼 때, 특히 국제적인 기술을 습득하는데 좋은 기회라 판단하고, 그를 파견해 줄 것을 대한체육회에 승인을 요청했었다.
이에 대한체육회는 「① 초청단체의 정체가 불분명하고 ② 주급 70%를 받는다는 점에서 프로에 가깝다 ③ 3년간을 초청 측과 계약하여 아마추어 선수로서의 자격을 제한받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이유를 내세워 부결시키고 만 것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마추어와 프로의 관계를 유난히 따지던 시절이었으므로 사실 그 같은 승인요청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헛수고를 감수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영국으로 출발한다며 협회로 인사를 왔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자초지종을 묻자 대한체육회를 통해서는 영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수속을 밟아 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것이었다.
그후 영국 국제탁구진흥회에서 1년 정도 활동하다가 미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미국여성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다는 소물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영주권을 얻은 후 이혼을 했다는 소문도 더불어 있었으며, 신탁은행의 박혜자 선수와 국내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1981년 라스베가스에서 전미오픈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을 때 선수단과 함께 그의 집에 초청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비단 그 때 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대회가 있을 때면 우리 선수단을 꼭 집으로 불러 밥 한 끼라도 따뜻하게 지어 먹이는 고마운 탁구선배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미국 전 지역을 다니며 탁구용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비록 몸은 멀리 외국에 있으나 늘 탁구를 고향처럼 생각하고, 그와 관련된 일을 하며 즐거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