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이 선조 3인 중 하나로 숭배하는 치우(아래 사진 왼쪽). 옆은 황제와 염제다. 치우의 한자 뜻은 39벌레 같은 놈39. 한민족의 동이족이어서 상소리로 부르다 90년대 중반 동북공정 때 입장을 바꿨다. 위 글자는 39화삼조당39, 중국인 세 조상을 모신 곳이란 뜻이다. 사진=우실하 교수 | |
#장면1 2010년 4월 21일 저녁, ‘카자흐스탄의 날’ 개막 행사장인 서울 호암아트홀. 공항에서 곧바로 온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며 연단에 올랐다. 그는 “한국과 카자흐스탄은 가까운 형제의 나라”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이 대통령은 박수를 쳤다.
#장면2 2009년 9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중심의 정부청사. 청사를 둘러싼 도로가 칭기즈칸로다. 칭기즈칸로는 이내 ‘서울의 거리’로 이어진다. 주위의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손님들이 “두(동생이라는 뜻)”라며 누군가를 부른다. 종업원을 찾는 것이다. 종업원들은 손님을 ‘아흐(Ax:형)’라고 부른다. 한국의 식당에선 손님과 종업원들이 서로 ‘아제’ ‘언니’ ‘이모’ ‘고모’ 등으로 부른다. 의제가족(擬制家族) 호칭이다.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왜 한국을 형제라고 했을까. 몽골은 왜 한국에서처럼 남을 가족 호칭으로 부를까. 문제를 푸는 열쇠 중 하나가 DNA 접근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한국인 주류가 알타이(카자흐ㆍ몽골) 등에서 내려온 북방계라고 한다. 한림대 의대 김종일 교수는 2004년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한국ㆍ몽골ㆍ일본인이 유전적으로 높은 연관성을 보인다”고 했다. 2009년 12월 인간게놈연구회(HUGO) 아시아지역 컨소시엄은 아시아 73개 민족의 염색체를 조사해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현생인류는 남아시아를 거쳐 아시아 5개족인 오스트로네시안, 오스트로아시안, 타이카다이, 후모민, 알타이족으로 분화됐다고 했다. 한국인은 알타이계에 속하며 만주ㆍ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고 이들 일부는 이웃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서울대 서정선 교수도 “한국인은 북방계 후손”이라고 했다. 역사 이전 한국인의 이동은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유입되는 남방계 ▶알타이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내륙이나 초원길을 거쳐 유입하는 북방계의 두 갈래지만 북방계가 7대 3으로 많다. 한국의 대표적 무속연구가 서정범 교수는 “한국인들의 집단무의식의 기저에도 북방 DNA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했다.
북방 DNA는 역사시대에 긴 기록을 남긴다. 삼국유사는 『고기(古記)』를 인용해 이렇게 썼다. “하느님(환인)이 여러 아들 가운데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의 산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이를 신시라 일렀다.” 중국의 『사기』에서 풍백·운사·우사는 치우(蚩尤)의 신하로 기록돼 있다. ‘환웅=치우’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치우’는 ‘버러지 같은 놈’이란 욕이다. 중국의 쉬쉬성(徐旭生) 교수는 1940년 ‘치우는 동이족’이라고 고증했다. 치우는 맥족의 수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국의 『상서(尙書)』에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오랑캐들)’이란 말이 나온다. 만은 남쪽 지방 사람, 맥은 황하 북방 거주민으로 고대 한국인의 조상이다. 한자로 야생 고양이를 뜻하는 맥의 현지 발음은 ‘모’ 또는 ‘솨(화)’ ‘쉬(허)’로 추정된다. 쇠(철) 또는 해라는 뜻이다. 맥족은 BC 7세기 선진문헌(진나라 이전 문헌)에 산시(陝西)·허베이(河北) 거주인으로 처음 나타난다. BC 5세기 산시(山西), BC 3세기 쑹화(松花)강 유역으로 남하했다. 역시 한민족의 선조인 예는 BC 6~3세기 저작물로 추정되는 『관자』에 처음 나타났다. 예는 ‘똥’이란 뜻의 한자지만 현지 발음은 ‘쉬(휘)’ 또는 ‘쇠’에 가깝다. 맥과 같은 뜻이다. 한자로만 보면 예맥은 ‘똥 고양이’다. 중국은 북방민족을 지독히도 욕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예맥이 고대에 건설한 대표적 나라가 고조선과 부여다. 부여는 고구려와 상당 기간 공존하며 예맥 문화권을 유지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왕의 도장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새겨져 있다고 했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맥과 동일시하고 후한대에는 고구려를 맥과 동일시했다(『후한서』 화제기). ‘부여는 본래 예의 땅’이라고도 했다(『후한서』 동이전). 또 “예ㆍ옥저ㆍ고구려가 본래 (고)조선 땅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예맥의 나라 부여ㆍ고구려ㆍ백제ㆍ몽골ㆍ일본 등의 기원이 된 국가는 ‘까오리’다.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를 세운 동명은 금와왕(金蛙王:금개구리)의 시녀가 낳았다. 금와왕은 까오리의 국왕이며 동시에 알타이인의 시조로 나온다. ‘까오리’는 고리(槁離), 콜리(忽里:Khori), 고구려, 고려 등으로 나타나지만 발음은 까오리로 수렴된다.
러시아 알타이 공화국의 바르나울 공항에서 퉁구르, 톱스키를 거쳐 알타이의 중심 벨루카봉으로 가는 길.
‘벨루카’는 “언제 어디서나 정상의 하얀 만년설을 볼 수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한역하면 태백산(太白山)이다. 전형적인 알타이 마을들엔 성황당ㆍ절구ㆍ맷돌 등이 낯익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비교언어학자인 스타로스틴(Starostin) 박사가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한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알타이어에는 닭·말·밥·옷 등 우리말과 같은 단어가 4000여 개 이상이다. 벼농사 관련어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북방계다.
고리(까오리)와 고조선을 뿌리로 세워진 알타이계 나라는 한반도에는 고구려·백제(남부여)·신라·고려·조선 등이고 만주 몽골 지역에선 부여·북위ㆍ발해ㆍ요ㆍ원·금·청 등이다. 일본도 알타이계-부여계 나라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이지린은 중국의 정사인 25사와 『수경주』 『전국책』 등을 토대로 60년대 고조선 옛 땅이 현재의 베이징 인근에서부터 요하까지라는 사실을 문헌으로 철저히 고증했다. 한국 사학계도 최근에야 이를 받아들여 고조선 중심지가 초기 요하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북방 DNA를 공유했기 때문에 고려와 몽골의 연대는 특이했다. 1218년 12월 두 나라는 요나라(거란족)를 격퇴하기 위해 연대했다. 당시 조충 장군과 몽골 카치온(哈眞) 장군은 의형제를 맺으며 “천년의 행복으로 두 나라는 영원한 형제가 됐다. 만세 뒤 우리 아이들이 오늘을 잊지 않도록 하자”고 했다. 원 세조 쿠빌라이칸은 막내 딸을 충렬왕에 시집 보내고 고려와 결혼동맹을 통해 세계 지배를 했다.
조선 초까지 이어진 북방 DNA, 성리학에 밀려 소멸
윤은숙 경북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tongalak@hanmail.net | 제182호 | 20100905 입력
『용비어천가』 86장에는 “어린 이성계가 말을 타고 활을 쏘아 여섯 노루와 다섯 까마귀를 떨어뜨리고 비스듬한 나무를 넘어서 다시 말에 올라탔다”는 기사가 나온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고 물구나무를 선 채, 좌우로 바꿔가며 말을 옮겨 타는 몽골의 마상 무예를 연상케 한다. 이성계의 뛰어난 말타기 실력엔 그의 가문이 가진 몽골적 속성이 반영돼 있다.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穆祖)는 지금의 연변자치주에 있는 오동(斡東)을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에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인 옷치긴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남경(南京, 지금의 연길) 일대를 지배하는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직위를 받았다. 이후 조부 이행리(翼祖)가 1300년에 쌍성 등지의 다루가치가 된 이래 이춘(度祖)→이자춘(桓祖)→이성계로 이어지며 직위를 세습해 왔다. 부얀테무르(이춘), 울루스 부카(이자춘) 라는 몽골 이름도 썼다.
이춘의 아들들의 이름은 타수푸카, 울리제이 부카였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도 몽고의 고려 지배 기구인 쌍성총관부가 있던 영흥부(회령)였다.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백년간 그들은 몽골제국의 몽골국인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과 유사했다.
특히 이성계는 1362년 몽골 최고 군벌 세력인 나가추의 고려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도 친병 1000여 명을 동원해 몰이사냥, 우회전술과 산악전 등의 방식으로 적군을 격파하는 등 몽골적 특성을 발휘했다. 이런 특성은 조선 초기 북방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돼 요동 정벌론이나 신기전 등의 무기 개발로 연결됐다.
몽골 제국의 몰락이라는 국제정세를 꿰뚫으며 신흥 사대부와 손잡고 1392년 창업된 이성계의 조선왕조는 친명사대(親明事大)를 표방했지만 실은 북방 유목 제국적 전통을 견지했었다. 초기 조선조는 스키토ㆍ시베리안 북방민족사적 정통성을 담아낸 신왕조라고 재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후 조선조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성리학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