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대혁명의 평가 ♣ 참고 자료 ; 김민제 ;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 역민사 요약 작성 ; 이재익
프랑스 혁명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전통주의가 잘 알려진 혁명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라면 수정주의는 부정적 시각으로 평가를 하는 것을 말한다. 1970년대에는 이미 마르크시즘이 서양에서 쇠퇴하였고 러시아 혁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또한 증폭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확대되었다. 이 글은 그러한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수많은 유산을 한마디로 함축하면 자유(自由) 평등(平等) 박애(博愛)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허울 좋은 명분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이상(理想)은 숭고(崇高)하였으나 현실은 이상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 바스티유 감옥
프랑스혁명 2백주년을 맞이했을 때(1989) 많은 서방 국가들이 축제 기분에 들떠 있었던 반면에 그 혁명의 허실과 부정적 측면을 고발하는 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 허실 가운데 하나가 바스티유 감옥이다. 혁명의 서막이었던 바스티유 감옥 함락은 너무도 극적인 사건이었다. 바스티유 하면 많은 반체제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는 음험한 감옥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감옥 함락으로 얼마나 많은 불쌍한 죄수들이 석방되었는가? 단 일곱 명이었다. 네 명은 사기꾼이었고, 두 명은 정신병자. 나머지 한 명은 가족의 요청으로 구금되었던 사람이었다. 그 죄수들 중에는 두 사람의 귀족이 있었는데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 후작으로 음란방탕으로 갇혀 있었고, 다른 한 죄수는 파리의 극장에서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휘파람을 분 불경죄로 투옥된 역시 바람기 있는 아우구스틴 후작이다. 민중편에 들어 민주운동을 하다 잡힌 투사나 전제정치의 희생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범이 없었던 바스티유는 혁명도발을 위해 조작된 상징적 이유밖에 없다고 파리 정치연수소의 비노크 교수는 말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수지(收支)>란 책에서 역사학자 르네 세디요는 혁명의 수지타산에서는 분명히 적자를 보았다. 고 하며 혁명진행중의 인명살상을 들고 있다. 이를테면 혁명 후의 공포정치 기간중 파리에서만 하루 최고 1천3백 명이 살해되고 있다.
◉ 혁명의 원인
요즘의 프랑스 혁명을 보는 시각은 장기적인 원인보다는 단기적인 원인 구명에 집중되어 있다. 삼부회의 평민출신 의원으로 혁명초기를 지도했던 미라보는 라파예트와 함께 혁명 초기의 거물이 되었고, 파리 시민의 인기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구상은 입헌왕정(立憲王政)의 입장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그 때문에 점차로 자코뱅파(派)의 좌파와 결별하고 궁정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는 귀족이란 용어에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구제도)을 정통주의는 장기적으로 보고 수정주의 학자들은 단기적인 원인에서거나 단지 우연한 사건에 의해 발생했다고 본다. 한 시대 뒤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이 거꾸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해석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민중계급이 프랑스 혁명에서 차지했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구제도란 단어는 1790년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을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구제도와 같은 용어로 혁명 이전의 사회가 가지고 있던 성격을 구성해 낸 것은 시대착오적인 오류임에 틀림없었다. 헛소문도 혁명을 창조하는데 커다란 몫을 담당하였다. 신문 언론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 데에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거꾸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신문들은 프랑스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 이념문제
과거에 프랑스 혁명이 이성을 숭배하는 계몽사상이라는 위대한 이념에서 연유했으며 지식인들은 계몽사상에 의하여 지적으로 자각하였고 우매한 민중들을 이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시켜 결국 민중들이 봉기하여 혁명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그러나 프랑스를 혁명을 이끌어 낸 것은 계몽사상이 아니라 인류사회 어느 곳에나 있는 매우 보편적인 생각에 단지 개혁적인 사고가 보태진 것에 불과하였다.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었던 사람들은 계몽사상의 주역이 아니었다. 계몽사상의 선도자들은 왕이나 귀족들의 연금에 기대어 생활했고 계몽 절대군주론을 옹호하였다. 볼테르는 루이14세를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이성을 강조하여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하는 경향을 보였다. 루소의 사상은 널리 보급되어 있지 못했다. 루소는 1778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글은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쟈코뱅 혁명지도자들의 손에 의해서 공화정 필요성을 강조한 글로 선언되었다. 이념은 혁명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왕(루이16세)이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힘이 약해졌고 그런 가운데 사회적인 문제가 노출되어서 혁명이 발생하였다. 자유주의적인 태도는 혁명에 가담했던 군중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을 반대했던 귀족들이 가지고 있었다. 혁명은 오히려 귀족들이 먼저 시작하였고, 이념보다는 혁명과정에서 의외로 나타난 변수들 즉 전쟁, 애국심, 정치엘리트들의 상황에 대처했던 행동이 혁명을 이끌어 갔다. 프랑스 혁명은 이념이 없는 혁명이었기에 결국 실패로 종지부를 찍었다.
◉ 길로틴
길로틴은 혁명을 원하는 사람들의 적이었던 귀족들만 죽이고,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지는 않았는가? 처형된 사람들 중 단 10%만이 귀족이었고 나머지는 귀족과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다. 혁명의 적은 길로틴으로만 처형되었는가? 길로틴으로 처형된 사람은 비율로 보아 소수였고, 대부분은 사적인 구타, 익사, 총살 등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기요틴에서 죽은 사람만 전국적으로 1만 7천명이요, 약식처형이나 옥사한 사람만도 3만5천명이나 된다. 한데 혁명 희생자를 직업별로 보면 당연히 많았어야 할 귀족(8-9%)이나 성직자( 6-7%)는 별로 많지 않고 오히려 죽지 않았어야 할 민중인 노동자(31%), 농민(28%)이 대거 희생당했던 점으로 보아 혁명 2백주년을 맞이하여무고한 시민이 다수 학살당한 이날을 축하해야 할 날이 아니라 애도해야 할 날이라 하여 연일 애도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 혁명을 이끈 폭도들
한 세기 이상 마르크시스트의 생각에 고무된 역사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적 자본가들의 힘이 성장한 결과로 발생했다고 해석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부르주아가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를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을 이끈 것은 부르주아도 아니고 이념으로 무장한 엘리트도 아니었다. 혁명주도 세력은 폭도들이었다. 이 폭도들은 혁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부 급진적인 선동가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혁명이 발생하는데 반드시 필요했던 물리적인 힘을 제공하였다.
◉ 자코뱅 공포정치
공포정치를 자행했던 국민공회의 자코뱅들은 지방주의자들을 반혁명적인 존재로 간주하였고, 지방주의를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적인 정책들을 관철하려고 노력하였다. 자코뱅의 지도자 로베스피엘이 죽인 사람의 숫자는 학자에 따라서 4천명에서 12만5천명사이를 오가고 있다. 그 혁명의 영웅은 인간 대량학살을 최초로 시작한 자였다. 17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쿠데타가 일어나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자코뱅지도자 생쥐스트는 1793년에 상황의 힘이 우리가 과거에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고 당시 상황을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혁명의 이상을 가장 극적으로 설파한 그는 22세 되던 해 발생한 혁명에서 단 한차례 연설로 지도자가 되었으나 27세에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 의하면 루이 16세는 악한 왕은 아니었다. 악한 왕이 여서가 아니라 단지 왕이었기 때문에 죽어야 했다.
◉ 너무도 큰 혁명의 대가 희생
혁명은 너무나 많은 피를 요구했다. 혁명은 프랑스인만 200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나폴레옹 전쟁에서서 100만 명이 넘는 프랑스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박애를 주장했던 혁명은 박애와 인간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사람의 목숨을 대량으로 빼앗아 갔다. 프랑스 내에서 테러로 약 4만 명이 사망했고, 대외전쟁에서 약 1백만 명이 죽었다. 1차대전희생자와 거의 맞먹는 숫자이다.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재판을 받을 때 한 변호사가 판사에게 당신은 지금 한 위대한 학자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있소 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판사는 공화국은 학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소 라고 대답하였다. 민중의 벗 마라는 10만 명을 죽일 것을 요구하였다. 마라도 또한 폭력의 희생물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기간중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가장 잔인했던 살육행위는 방데에서 일어났다. 방데에서는 20만 명의 주민들이 반혁명 분자로 몰려 학살당하였다. 혁명군은 방데에서 군사적 목표물뿐만 아니라 농작물, 가축, 심지어 삼림 등의 모든 것을 말살하였다. 낭트의 학살에서는 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켜 죽었다. 인권선언은 현란한 수사학적 언어에 불과하였다.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어떤 죄악이 저질러졌는가 라고 롤랑은 탄식하였다.
◉ 잔인한 마르세예즈 가사
프랑스 혁명이 근대 국민주의와 애국심을 탄생시켰다는 이유에서 혁명의 근대성을 주장하는 것도 잘 못된 견해이다. 애국심은 이미 중세 잔 다르크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국가(國歌) 라마르세예즈의 가사는 너무나 잔인하다. 라마르세예즈라는 명칭은 당시 전국에서 파리로 모여든 의용군 중 마르세유로부터 온 일단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파리로 진군해온 데 연유하며, 마르세유군단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79년에 정식 국가로서 채택되었다. 전제정을 몰아낼 피에 물든 깃발 …… 진군하자, 진군하자 그들의 더러운 피가 우리의 들녘을 흠뻑 적시도록… 그래서 최근에는 가사를 바꾸자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 파괴된 예술품
문화대국 프랑스가 문화적으로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은 바로 프랑스 혁명당시 전래 문화재를 대량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창조정신을 왜곡시켰던 점이다. 문화를 사랑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프랑스 혁명은 지울 수 없는 악몽이었다. 혁명가들은 예술품을 귀족 전유물로 생각했고 예술품을 파괴하는 것을 구제도를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이유에서 혁명에 참가했던 폭도들은 프랑스에서 전래되고 있던 예술품들을 대량으로 파괴하였다. (1790년 6월 이전에 예술품파괴 행위를 반달리즘이라고 한다.) 그 뒤에 예술품을 보존해야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루브르박물관이 1793년 문을 열었다. 정통주의자들은 이것을 혁명의 성과로 본다.
◉ 비기독교 정책
혁명기간 동안 전개된 반기독교화 운동은 계몽시상의 영향이다. 교회 학교 도서관 대학 궁전 및 예술품의 파괴, 신앙에 관계된 기념물이 대량 파괴되었다. 이성숭배 신앙은 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타났던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국면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1789년에는 카톨릭주의와 왕권이 서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795년에 이르러 교회와 국가는 법에 의해 분리되었고 혁명 정부는 교회가 보유했던 토지를 국유화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많은 교회를 폐쇄하였다. 사제들은 직위를 박탈당하거나 잠적했고 국외로 도피하였다. 젊은 여성이 신전의 새로운 신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심지어는 100살 된 여인이 여신의 화신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혁명정부의 비기독교 정책은 혁명 당시에만 존재했던 일시적인 정책이었고 결국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1814년에 카톨릭은 프랑스 국교가 되었다.
◉ 누구도 원치 않은 방향으로
프랑스 혁명은 혁명이 진행되면서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이상한 길로 나아갔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고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치닫고 있던 혁명은 결국 아무도 이성적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혁명 이전 사회로 회귀하였다. 나폴레옹 몰락 후 왕정은 복고되었다. 혁명이 끝났어도 복고되지 않았던 것은 혁명기간 중에 능욕 당했던 인간성이었다. 혁명직후부터 프랑스를 실제로 이끌고 나아갔던 힘은 이념도 정치도 설득도 아니었다. 그 힘은 오로지 테러에 있었다. 의심을 품은 자 기회주의자 중도파 과격파 등이 길로틴으로 차례로 끌려 나갔다. 오늘 처형을 주도했던 자는 내일 숙청되고 그 숙청을 주도했던 자도 곧 숙청되었다. 매일 매일 생활이 아슬아슬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음미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떨어질 비극이 하루하루 유예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혁명기간중 언론의 자유는 극히 제한되었다. 자코뱅은 파리 신문들을 검열을 가하였고, 로베스피엘은 언론의 자유에 반대하였다. 혁명정부가 봉건제도 폐기선언을 한 후에도 극적인 토지 소유권 이전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는 농민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는 농업정책에 관한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토지재분배와 토지 공유를 거부하였던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혁명을 통해서 실제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세디요는 이만한 대가를 치르고도 과연 혁명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혁명에 연루되어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7명의 죄수를 석방하면서 혁명을 시작한 5년 뒤에는 공화국은 40만 명의 죄수를 감옥에 가두고 있었다. 역사의 흐름은 시계추의 움직임에 비유할 수 있었다. 시계추가 좌측으로 많이 움직여 가면 갈수록 다음 동작에서 그 시계추는 우측으로 그만큼 멀리 움직여 갈 것이다. 혁명이 사회적인 흐름을 과격하게 좌측 급진적 개혁쪽으로 옮겨 놓았다면 혁명 다음 세대에서는 혁명에 대한 역작용으로 사회적인 흐름은 혁명에 의해서 좌측으로 옮겨간 만큼 우측 보수 쪽으로 움직여 갈 것이다
◉ 혁명이 끝난 시기는 언제인가?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시작되었으나 혁명이 끝난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단기적인 시각으로 보면 로베스피에르의 퇴진과 나폴레옹의 등장이 혁명의 끝을 의미하겠지만 장기적인 시각으로 보면 혁명의 끝은 1870년대였다. 정통주의자들은 나폴레옹이 혁명의 이상을 없애버린 점보다는 오히려 혁명의 이상을 집행하고 계승했던 점을 강조한다. 수정주의자들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혁명의 이상은 사라졌고, 혁명이전의 과거로 회귀한 것이 혁명의 종말이었다고 주장한다. 만일 폭력을 동반하는 계급투쟁이 프랑스 혁명의 과업이라면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1789년의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혁명이 끝난 뒤 혁명기간 동안에 무엇을 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자 시에예즈는 나는 생존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너무나 비극적인 대답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