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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국적
요약 BC 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도가의 창시자.
노군 또는 태상노군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도덕경>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이 쓴 <사기>의 노자전이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의 만남은 매우 유명하며,
이 이야기에 못지않은 유명한 전설로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이야기가 있다.
노자(Laotzu)
개요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또는 담(聃).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도덕경(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은 〈도덕경〉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도교가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당(唐:618~907)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생애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古縣) 여향(術鄕) 곡인리(曲仁里: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
사람으로 주(周:BC 1111경~255)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못지않게 유명한 전설은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이야기이다.
그는 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주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상편·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한 〈도덕경〉이다. 그리고 나서 노자는 그곳을 훌쩍 떠났고, "아무도 그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노자가 서쪽으로 간 사실과 〈도덕경〉을 저술한 점을 언급한 뒤에 사마천은 가끔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초(楚)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어서 책 15권을 저술하여 도가의 정신에 대해 서술한 바 있는데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주나라의 태사(太史)이며 위대한 점성술가인 담(儋)이 진(秦:BC 384~362)의 헌공(獻公)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초인(超人)의 장수를 믿었기 때문에 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매우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뒤에 생겨난 전통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로는 BC 4세기경에 활약했던 장자(莊子)가 노자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로 사마천은 그가 은군자였음을 들었다. 은군자인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속세를 떠난 은자는 늘 있어왔다. 〈도덕경〉의 저자(또는 저자들)는 생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이지만, 그같은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도덕경〉은 1명의 저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내용 가운데는 공자 시대의 것도 있지만 다른 내용은 훨씬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BC 300년경에 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의 저자가 태사 담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사기〉에 나오는 노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술이 신빙성있다고 보고 노자의 생애가 BC 4세기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자의 가계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에 이(李)라는 가문이 스스로 도교의 성현인 노자의 후예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자가 실제로 존재했었는가를 조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없다. 노자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보다 특정형태의 성인집단(聖人集團)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인으로서의 전설
〈사기〉의 노자전과 기타 오래된 문헌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기술을 제외하고도 2세기 이후부터는 노자에 대한 성인전(聖人傳)이 여러 편 저술되었다.
이같은 전기는 도교의 형성사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후한(後漢:25~220)시대에 노자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고 때로는 황제도 그를 숭배했다. 그뒤 종교계에서 성전(聖典)의 계시자이며 인류의 구세주인 노군(老君)으로 추앙되었다. 노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처의 기적적인 탄생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노자의 어머니는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노자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또다른 신화는 노자의 성(姓)이 생겨난 유래를 설명한다. 노자는 오얏나무[李木] 아래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오얏을 의미하는 이(李)가 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신화는 도교신앙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신화에 따르면 노자는 역사상 여러 명의 다른 인물이 되어 지상에 내려와 통치자들에게 도교의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된다.
2번째 신화는 노자의 서행(西行:함곡관으로 간 것) 이야기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 신화 속에서 부처는 바로 노자라고 간주된다. 3세기경 불교의 포교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같은 이야기를 조작하여 위경서(僞經書)가 씌여졌다. 〈노자화호경 老子化胡經〉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에서 불교는 도교의 아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대 정부는 빈번히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노자라는 인물은 모든 계층에게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유생들에게는 존경받는 철학자였고, 평민들에게는 성현이나 신으로, 도교 추종자들에게는 도(道)의 화신이자 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들 가운데 하나로 숭배되어왔다.
사상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도덕경〉을 통해 볼 때,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僞自然)에 있으며, 그것이 '도'(道)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여기서 '무위'는 우주론적 정향을 지향하는 것, 즉 부자연스런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위자연의 구체적인 의미를 말한다면 '사실 자체의 바탕 위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자체란 다름아니라 노자에게 있어서는 자연이요, 도(道)요, 기(氣)요, 변화이다.
그리고 무위란 그 바탕 위에 서서 떠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도가와 도교
| 주요 제자백가 사상가 노자 | 老子 | ||
| 출생 | 기원전 571년 추정 | |
| 초 고현 여향 곡인리[1] (現 안후이성 보저우시)[2] | ||
| 사망 | 기원전 471년 추정 (향년 100세) | |
| 진 농서군 일대 (現 간쑤성 임조현) | ||
| 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도덕경》 |
|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으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 붙일 수 있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도덕경》 |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제자백가의 시초격인 인물로서, 당대 최초로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道)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 인물이다. 대표 저서로는《도덕경》[4]이 있으며, 이 때문에 도가의 창시자로 불린다. 후한 말기 이후 종교화된 도교에서는 노자를 신격화하여 태상노군이라고 부른다.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하여, 여러 전설이 전해져오고 그런 연유로 노자로 추정되는 고대 인물들도 많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 뿐이다. 사기의 열전의 <노자한비열전> 기록에 의하면, 노자는 초나라의 고현(苦縣) 여향(厲鄉) 곡인리(曲仁里) 출신으로, 춘추시대 주나라에서 왕립 도서관장, 또는 왕실 문서고 관리관 비슷한 직책을 지냈다고 한다.[5]
공자가 주나라에 잠깐 머무를 때, 노자에게 찾아가 예(禮)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노자와 공자는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남겼는데, 이게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난다. 노자는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답하며 비판했다고 한다.
"그대가 말하는 사람들은 그 육신과 뼈가 모두 이미 썩어버리고 단지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오. 또한 군자는 그 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아가지만, 때를 못 만나면 이리저리 날려 다니는 쑥대처럼 굴러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오. 내가 듣기에 뛰어난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숨겨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군자는 훌륭한 덕을 간직하고 있으나 외모는 어리석게 보인다고 들었소. 그대의 교만한 기색과 탐욕, 태도를 꾸미는 것과 지나친 욕망을 버리도록 하시오. 그런 것들은 모두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말할 것은 단지 이것뿐이오."
공자는 노자를 만난 후 돌아와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구절은 대체로 공자가 노자를 두고 자신이 가진 제한된 인식을 초월하는 식견을 가진 인물로서 높이 평가한 대목으로 해석된다.[6]
"새가 잘 날아 다닌다는 것을 나는 알고, 고기가 잘 헤엄치는 줄 알며, 짐승이 잘 달리는 줄 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줄로 잡을 수 있으며, 날아다니는 것은 화살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에 이르러서는 나는 능히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나보니, 그는 용과 같았다."
노자는 주나라에서 오래 거주하다가, 주나라가 쇠퇴해지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을 떠났다. 노자가 관문[7]에 이르자, 관문의 책임자인 윤희(尹喜)가[8] "선생님께서 앞으로 은거하시려 하니, 귀찮으시더라도 저를 위해 저서를 남겨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노자가 윤희에게 5000자로 된 책을 전수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도덕경'이라고도 불리는 《노자》이다.
노자는 관문 밖으로 나가서 종적이 묘연해졌고, 그 후로 아무도 그의 최후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혹은 200여 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노자가 도를 닦아 수명을 양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에 노자의 실존에 대한 여러 주장이 있다면서, 몇가지 설을 소개했다. 먼저 초나라 사람이었던 노래자(老萊子)가 노자라는 일각의 주장을 언급하면서, "15편의 저서를 남기어 도가 사상의 효용을 논하였으며 공자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고 기록해 두었다. 또는 주나라의 인물인 태사담(太史儋)[9]이라는 사람이 노자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하면서, 그가 진(秦)헌공을 만나서 "진나라와 주나라가 통합되었다가 500년 후에 나뉘어지고, 갈라진 지 70년 후에 패왕이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러한 일련의 주장을 모두 나열하면서, "세상에는 그 진위 여부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결론 짓는다.
사마천이 사기 열전에서 서술한 것처럼, 노자의 실존은 매우 불분명하다. 노자의 정체에 대한 논의는 사마천의 사기가 세상에 알려진 이래 수 천년 동안 있어왔으나, 뚜렷한 결론은 없다. 가장 핵심적인 논쟁은 노자와 태사담, 노래자와의 관계이다. 사마천 본인 조차도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써놓았을 정도이다. 어쨌든 이러한 불분명한 기록 때문에 노자가 실체가 있는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고, 가공의 인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심지어 도덕경이라는 저작물이 한참 후대인 한나라 시대에 편집되고 창작된 텍스트라는 주장도 학계에서 꽤 오랫동안 강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1993년에 후베이성에서 기원전 4세기 중반~기원전 3세기 초 시기로 추정되는 초나라 무덤에서 노자 도덕경의 사본인 '곽점본' 죽간이 발굴되면서, 일단 해당 주장은 완전히 기각되었다.
어쨌든 노자를 실존 인물로, 또한 도덕경도 노자 및 그 후대의 여러 인물들이 편집하고 변형시킨 텍스트로 보는 의견도 있고, 반대로 도덕경은 동시대 다른 문헌인 논어 등과 달리 '텍스트의 중심 축'이 없기 때문에 노자를 실존 인물로 볼 수 없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한편 중국 의고학자 고힐강은 '노자는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의 저자명이며, 도덕경은 집단 창작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했으며, 역사학자 곽말약은 아예 '도덕경은 관윤(關尹)이 기록한 텍스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공자와 대담한 사람은 노자이지만 관윤(關尹)을 위해 책을 저술한 사람은 태사담이라는 주장, 노자라는 사람과 도덕경 텍스트는 완전히 별개라는 주장, 노자, 태사담, 노래자 등이 모두 도덕경 텍스트 편집에 참여하였다는 주장 등 여러 의견이 있다.
일단 사기 열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태사담(太史儋), 노래자(老萊子)와 관련하여 있어왔던 노자 실존에 대한 일련의 주장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노자와 태사담(太史儋)은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의 근거[10]
노자의 자인 '담(聃)'과 태사담의 이름인 '담(儋)'의 음(音)이 같고, 한자 사용의 관습상 음이 같은 글자는 얼마든지 통용할 수 있다.
노자는 주(周)나라의 수장실지사(守藏室之史)였고, 태사담은 주나라의 태사(太史)였는데,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주나라 왕실의 사관(史官)이었다.
노자는 함곡관(函谷關)을 넘어 서쪽으로 갔다는 전설이 있고, 태사담은 진(秦)나라에 가서 헌공(獻公)을 만났는데, 이는 동일하게 서쪽으로 이동한 일이다.
'노자와 태사담(太史儋)은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주장의 근거[11]
노자는 공자와 거의 같은 시기인 춘추시대 말기 인물인 반면, 태사담이 등장한 시기는 공자 사후 129년이 흐른 뒤이므로, 이는 기원전 350년경인 전국시대 중엽이다. 즉, 두 사람은 약 200년의 시간적 괴리가 있다.
노자의 사상을 이은 장자의 생몰 연대는 태사담이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 그런데 장자의 텍스트를 보면, 노자의 실존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노자와 태사담은 별개의 인물이다. 특히 장자의 직접적 저작으로 알려진 <내편>을 보면, 노자의 실존에 대한 내용이 여러번 나온다. 만약 노자와 태사담이 동일 인물이거나, 허구의 인물이라면, 장자가 이를 밝혀 놓았을 것이다.
특히 장자 <내편> 양생주에는 노자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장자가 노자를 태사담과 구분된, 엄연한 실존 인물로 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사마천은 노자의 일생에 대해서는 열전에 따로 기록해 놓았지만, 태사담에 대해서는 진나라와 주나라의 운명에 대해 예언했던 것만 사기 이곳저곳에 여러번 인용해 놓았을 뿐, 그의 신상이나 일생에 대한 다른 정보는 기록해 놓지 않았다.
'노자와 노래자(老萊子)가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의 근거[12]
노자와 노래자는 모두 초(楚)나라 사람이며,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노래자가 저술한 책 15편은 도가 철학에 대한 것이다.
노자(老子)의 '老'는 성(姓)이 아니라 '오래 살았다'는 뜻이다. 즉, '노자'는 '나이 많은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써,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닐 수 있다.
초나라에서는 '李(이)'자를 쓸 때 위쪽의 '木(나무 목)' 대신 '來(올 래)'를 썼는데, 이것이 옮겨지는 과정에서 '萊(명아주 래)' 자로 굳어진 것이다. 즉, 고문자학 관점에서 볼 때, '노래자(老萊子)'는 '노이자(老李子)'가 초나라 방언으로 표기된 또 다른 이름이다.[13]
사기의 <중니제자열전>에 보면, '공자가 주나라의 노자와 초나라의 노래자를 존경했다'는 서술이 나온다.
'노자와 노래자(老萊子)는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주장의 근거[14]
사기 열전 내용을 보면, 노자는 도(道)와 덕(德)의 뜻(道德之意)을 설명한 5000자의 책을 지었지만, 노래자는 도가의 쓰임(道家之用)을 설명한 15편의 책을 서술했다고 되어있다. 두 텍스트의 분량과 주제는 완전히 다르다.
노자는 주(周)나라 중앙 정부의 고위 관료인 사관(史官)으로 일하던 사람이지만, 노래자는 초나라의 은자(隱者)로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제왕으로부터 수차례 관직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모두 사양하고 몽산(蒙山) 기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사람이다.
노래자는 나이 일흔 살에도 효(孝)를 실천하기 위해 늙은 어버이 앞에서 아이의 옷을 입고 춤을 추며 재롱을 부려 희채오친(戱綵娛親)이라는 사자성어를 남긴 주인공인데, 이는 노자의 철학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이다.
한편, 위에 언급된 대로 1993년에 기원전 4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초나라 무덤에서 노자 도덕경 사본인 '곽점본' 죽간이 발굴되면서 논의의 새로운 국면이 발생하였다. 이 곽점본 죽간은 기존에 알려져 있던 도덕경 판본에 비해 약 40% 분량에 불과한 2000자 정도였는데, 이는 사마천이 사기 열전에서 표현한 '5000자' 텍스트와는 달랐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다양한 가설이 생겼다. 이를테면, 노자와 태사담이 각자의 텍스트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즉 노자가 도덕경의 원형이 되는 2000자 텍스트를 지었고, 태사담이 노자의 텍스트를 이어 받아 5000자 텍스트를 지었으며,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파악하고 있던 도덕경 텍스트는 바로 태사담이 노자의 텍스트를 개정한 5000자 버전이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통용되어 온 바로 그 도덕경이라는 것이다.[15]
3. 서적 노자(老子)
자세한 내용은 도덕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당나라 황실이 노자의 후손을 자처하고 그의 부모와 노자 본인을 황제(皇帝)로 추존함으로서 본인의 가문도 황가(皇家)가 되었다.
모후(母后): 선천태후(先天太后) 익수씨(益壽氏) - 당현종 추존.
아내: 불명
황자: 이종(李宗)
황손: 이주(李注)
황증손: 이궁(李宮)
잉손: 이가(李假) - 이궁의 현손(4세손).
운손: 이해(李解) - 이가의 아들.
노자의 사상은 '억지로 하려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놔두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마음가짐과 '이름을 알리려하지 말고 혹시라도 명성을 얻더라도 위상이 커질수록 자신을 낮추어야 된다'는 공수신퇴(功遂身退)의 처세술이라 할 수 있다. 명성이나 재물을 가득 채우면 이후에 잃어버릴 일만 남게 된다고 하여 '비어 있음'을 강조하였고,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미추(美醜)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인데 이를 굳이 구분해서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하였다. 노자는 어떤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비웃을 것이라 하였는데, 노자는 도리어 '뛰어난 재주는 오히려 서툴게 보인다'고 말하면서, 비웃음을 받지않으면 도(道)라 하기 부족하다고 하였다.
또한 노자는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고 말한다. (上善若水) 물은 조건없이 모습을 바꾸며 손쉽게 적응한다. 또한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데로 흘러가 거기에 머물며, 약하고 순할지언정 공격해도 꿈쩍 않는다. 물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다. 이렇기에 물을 소중히하고 존중하며 물처럼 살면 인생 전체의 행복이 크다고 주장했다.
왕필본으로 대표되는 《노자》는 일반적으로 반 유가적이면서 역설적인 격언을 담은 문헌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는 특히 《장자》가 갖는 성격과 연동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출토 문헌은 그러한 이해에 대하여 의구심을 던져주고 있다. 가령 왕필본의 "絶聖棄智, 民利百倍(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로움을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란 문장이 "絶智棄辯, 民利百倍(지식을 끊고 변론함을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라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으며[16], 왕필본의 "國家昏亂, 有忠臣(국가가 혼란해져야 충신이 생긴다)"란 문장도 "邦家昏亂,安有貞臣(나라가 혼란해지면 어디에 바른 신하가 있겠는가)"으로 바뀌어 있어 반유교적인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17] 오늘날 이러한 문제는 학자들 중에서 치열하게 토론되고 있는 중이나, 지금까지 이해했던 노자의 모습은 최초의 노자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를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기초하여 《노자》의 사상에 대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언어, 개념, 인식의 상대성을 강조하고, 서로 대립되는 것들의 관계에 주목한다. 특히 강함, 단단함, 높음, 그리고 채움에 대비하여 약함, 부드러움, 낮음, 비움, 그리고 겸손함을 강조한다. 억지로 그리고 작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함을 반대하고 명예와 이익에 대한 추구 그리고 지나친 욕망 등을 비판하고,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하여 일이 자발적 또는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게끔 함을 주장한다. 통치자의 욕심으로 인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결국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피해가 되니, 통치자는 헛된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통치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명령과 법률을 시행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문장이 있다. 또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맞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오래 사는 것이라는 문장도 있다. 이렇게 통치자와 관련된 구절이나 유, 무에 대한 구절들에 주목하여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왕필 등이고, 뒤의 '오래 사는 것'(장생불사)에 주목하여 양생론적, 종교적으로 보는 쪽이 하상공 그리고 도교의 노자에 대한 해석 그리고 입장이다. 이밖에 노자의 정치 철학은 소국과민(小國寡民)이다. 이는 나라는 작게 하고 백성은 적게 하라는 말로써, 노자는 원시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여긴다.
간과되기 쉬운 사실은 노자의 사상은 유가나 법가와는 확연히 다른 수단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치자가 지향해야 할 바를 논한다는 점이다. 노자 사상의 이른바 양생론적 측면을 주목하는 입장에서는 노자 사상의 이러한 통치 규범적 측면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강했으며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도가적이라고 묶이게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도덕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18]과 장자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 등을 종합하여 노자의 상대성, 자연, 부드러움 등에 대한 태도가 결국 부드러운 형태의 통치술을 논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라고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특히 한비자의 해로 부분이나 황로학파 등은 노자가 유가, 법가, 묵가 등보다도 더 섬세한 고도의 통치술을 이야기한다고 보았으며 이 때문에 후대의 왕필본에서는 이게 권모술수에 대한 서술인지, 자연적 원리에 대한 서술인지 애매하게 읽히는 부분들이 나온다. 실제로 이렇게 애매한 몇몇 부분들은 죽간본에는 없다. 다만, 죽간본에 있는 부분들만 놓고 봐도 유가와는 대비되는 통치 기술서로 읽을 여지가 없는 게 아니다. 이런 면을 보면 왜 한비자가 노자에 주석을 달았고 병법가나 무술가들이 은근히 노자에서 영감을 얻거나 비유를 들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한 초기, 특히 한문제는 '무위지치의 도'라고 해서 노장사상의 이념으로 국가를 통치했고 그의 부인인 효문황후 때문에 한무제 초기까지도 통치이념으로 남았다. 억지로 의도를 내비치면 상대가 반발할 것까지 미리 예상하고 시의적절한 때에 몇 수 앞을 읽어 행동하는 교활한 통치자나 전략가야말로 도에 맞추어 사는 사람일 수 있다.
병법서에서도 거국적인 외교술을 다룬다. 격투기나 무기술에서도 음양수라고 해서, 실로 허를 치고, 허로 실을 치며, 허를 드러낸다. 도덕경을 이러한 맥락으로 읽을 가능성도 충분이 있음이 도덕경의 묘미이다. 당연하지만 말 그대로의 자연에 가까운 사회를 이상사회로 긍정적으로 평하는 학자들은 노자를 '권모술수를 담은 책'이라 부름을 싫어한다. 둘 다 노자를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 읽은 관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른 제자백가의 사상서들과는 달리 시적 운율이 중시되어 상당히 많은 구절에 압운이 되어 있고, 역사상의 고유 명사가 단 하나도 출현하지 않는다. 저작 연대나 작자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실제 도덕경 텍스트를 보면, 지배자 계급이나 지식인 계층을 위한 지침서의 성격이 강하게 느껴진다.[20] 도덕경에서 드러난 노자의 사상은 '백성들을 시켜 억지로 뭘 하려고 하지 말라'는 '무위자연'[21]과, '권력과 재산을 더 가지려고 무리하게 애를 쓰지 말라'는 '공수신퇴'[22]로 요약된다. 이는 《노자 도덕경》이 백성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장에서 쓴 처세술이라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 '남을 가득 채우려고 하지도 말고, 나를 가득 채우려고 하지도 말아라'는 뜻이며,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힘을 '매번' 100% 쓰지는 말라는 의미가 된다.[23] 즉, 100% 수준의 인생의 꼭대기(peak)를 만들어 놓으면 몸이 위태로워지고 앞으로 내려갈 일밖에 없으므로, 7~80%의 힘으로 오래가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라는 것이다. 그러니 권력을 잡고 부와 명예를 얻었다 싶으면 자리에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고, 가진 게 많다면 주변에 적당히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고 노자는 조언한다. 이것이 장자의 텍스트와는 크게 다른 점인데, 노자가 권력의 현명한 운용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장자는 반대로 아예 아나키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노자의 사상적 계승자로는 장자나 열자를 거론한다. 다르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크게 보면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여기기도 한다. 장자는 노자의 주요사상 중 상대주의[24]를 극대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노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바로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이다. 한비자는 노자가 주창한 '천지'와 '자연'의 개념을 국가의 정교한 법률 체계와 같이 규정하였는데, 실제 한비자 텍스트를 보면 노자의 도덕경 텍스트를 매우 상세하게 인용하고 해설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발전시키는 모습이 나타난다.
설화에 따르면 노자가 관령 윤희에게 글을 남겼다고 하지만, 사실 노자는 학문이나 책 자체를 그가 주장하는 도에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아주 몹쓸 것으로 여겼다. 도덕경만 봐도, 이미 책읽고 공부한 '학자'라는 인간들을 평범한 백성들을 상대로 현혹하고 선동이나 하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하는 '인위'에 맞서 도를 거스르지 않는 방법은 백성이 무지하고(無知) 바라는 게 없는 것(無欲), 즉 무위라 봤다. 참고로 여기서 무지(無知)는 기존의 서술과 같이 무식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나 작위적인 것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근현대적인 의미의 작위라는 것도 부족한 설명으로, 노자의 '무위'에서 핵심이 되는 관점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 판단할 기준을 두지 않는 것'이다.
노자가 서쪽으로 떠나 인도에 도착해 펼친 가르침이 불교가 되었다는, 이른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시기에 퍼지기도 했다. 도교의 도사들은 이를 가지고 자신들이 불교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청정법행경》이라는 위경을 지어 공자는 유동 보살(광정 보살)의 환생이고 노자는 가섭 보살의 환생이라는 삼성화현설(三聖化現說)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 불경을 번역하는 번역가들이 중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교 등을 비롯한 중국의 토착 사상에서 비롯된 용어들을 여럿 차용하여 번역했기 때문이다. 실제 불교가 중국으로 본격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인 오호십육국시대 때 불경을 번역한 쿠마라지바는 직역을 피하고, 중국인들에게 친숙한 용어와 개념을 차용하거나 창작하여 최대한 의역을 하였다.
물론 당연하게도 노자와 석가모니는 서로 사상이 다르다. 노자의 사상은 무위자연과 공수신퇴 등이 핵심인 반면, 석가모니의 사상은 사성제와 팔정도가 핵심이다. 다만, 불교의 공 사상만이 노자의 사상과 비슷한데, 공(空) 사상은 인도 불교 고유의 사상이기 때문에, 노자와 불교의 선후를 구별하려고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25]
당나라의 추존 황제이기도 하다. 당나라 때 도교를 숭상한 당나라 황제들은 노자가 같은 이씨라는 이유로 조상이라고 윤색했고, 당현종은 노자를 아예 황제로 추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를 이용한 패드립도 있었는데, 당태종에게 법림(法琳)이라는 승려[26]가 도교와의 분쟁 문제로 잡혀와서 심문 받다가 '폐하가 노자의 후손이라고 하시는데, 노자의 아버지가 절뚝거리며 귀는 어둡고 눈은 흐리기에 처가 없어, 나이 칠십에 이웃집 노비와 간통하여 노자를 얻었다는 것은 아십니까? 그리고 폐하가 노자의 후손이 아니며 농서 이씨 출신이 아니란 것은 모두가 아는데 왜 사실을 숨기시는 겁니까?' 라고 말하자 당태종이 분노하여 범림을 죽이려다 추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고 하며, 이때 노자는 공자를 위선자라고 비판했으나, 공자는 오히려 노자를 범접할 수 없는 용같은 존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법가가 유가와 도가를 동시에 까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이제이적 이야기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한비자의 책을 보면 도가의 처세술을 설명하면서, 유가의 고리타분함을 까는 글들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도가가 당대 제자백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은 사실이기에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 역시도 적지 않다.[27]
'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명'같이 말장난 같이 들릴 수 있는 말을 많이 했는데[28] 그 이유는 당시엔 책이 비쌌기 때문에 말을 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해 말에 운율을 넣었고, 이게 중국어의 특성과 합쳐지며 그 효과가 한층 극대화되었다. 그래서 번역된 노자의 말이 아닌 원문은 문학적으로 매우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며, 한국어로 볼 때와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도덕경에서 이를 느껴보고 싶다면 한문으로 낭송하며 읽기를 권한다.
중국의 SNS '시나 웨이보'에서 발표한 중국인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중국인' 명단에서 3위에 들어갔다. 1위 공자, 2위 시황제, 4위 채륜, 5위 한무제, 6위 마오쩌둥, 7위 맹자, 8위 수문제, 9위 주자, 10위 덩샤오핑, 11위 사마천, 12위 한고제, 13위 장자, 14위 당태종, 15위 장중경, 16위 이사, 17위 송태조, 18위 주문공, 19위 굴원, 20위 동중서, 21위 홍무제, 22위 석도안, 23위 염민, 24위 장건, 25위 상앙이다.# 우스갯소리로 노자가 3위를 한 건 세속의 번뇌를 다 잊고 탕핑하고 싶다는 솔직한 욕망이나 선협물처럼 신선 되기 아니냐는 드립이 있다.
중국에서 우주의 만물에 대해 최초로 생각한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고 이름지었다. 이러한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라 하며,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도'라고 설명한다.
<사기> '신한노장열전'에 따르면 본명은 이이(李耳), 자는 담(聃)이다. 도교의 태상노군 전설에도 이씨라고 나온다. 노자(老子)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후 선천태후의 뱃속에서 70년을 태아 상태로 있다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옆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를 나의 성씨로 해 주시오'라고 요구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이 오얏나무 '李'(리)가 되고, 이후에 성장하면서 귀가 컸기 때문에 이름은 '耳(귀 이)'자가 되었다. 중국의 설화집인 《태평광기》에 따르면 본명은 이중이(李重耳) 자는 백양(伯陽)으로 초나라 고현 곡인리 사람이라고도 전해진다.
현대 일부 학자들은 노자의 성씨가 노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학자 카오헝(高亨)은 저서 《노자전전증(老子傳箋證)》 에서 춘추시대에는 노씨성이 있었으나 이씨성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노자의 본래 성은 노(老)라고 주장했다.노자의 성씨가 李인가 老인가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윤리와 사상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장자Chuangtzu , 莊子노장, 老莊, 남화진인, 南華眞人, 남화노선, 南華老仙
| 장자 莊子 | Zhuangzi | |
| 본명 | 장주 莊周 |
| 별칭 | 남화노선, 남화진인[1] |
| 봉호 | 미묘원통진군(㣲妙元通真君)[2] |
| 출생 | 기원전 369년? |
| 송나라 몽[3] | |
| 사망 | 기원전 286년 (향년 82~83세) |
| 사망지 불명 | |
| 직업 | 철학자 |
| 종교 | 도교 |
| 萬物齊同.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장자(莊子)》 |
| 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 천지는 나와 더불어 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다. 《장자(莊子)》 |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본명은 장주(莊周)이고, 자는 자휴(子休)이다. 전국시대 송(宋)나라 몽(蒙) 출신으로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맹자와 동시대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한때 칠원리(漆園吏)라는 말단 관직에 있었으나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노자와 사상이 비슷하나, 노자는 '공을 이루면 뒤로 물러나야 위험이 없다', '백성들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지마라'는 정치술에 가까운 반면, 장자는 정치를 떠나 세속을 초탈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장자에도 정치술이 있긴 있다. 하지만 장자 사상의 핵심은 '어떤 것을 이래 볼 수도 있고 저래 볼 수도 있으니,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자연을 따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자'는 것이지, 노자처럼 '통치자는 일을 많이 만들지 말고 욕심을 줄여야 된다'는 식의 정치적 조언은 아닌 것이다.[4]
『장자』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삶은 '맞다 or 아니다' 중 하나로 정해지지 않으며, 두 개의 상반된 가치는 마치 하나로 이어진 도르래와 같아서, 둘을 나누어서 단정하지 말고 큰 하나로 보아 상황에 맞게 조절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은 생각에 머물러서 옳고 그름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따지지 말고, 하늘을 뒤덮는 대붕처럼 크게 생각해서 너그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면, 추한 사람도 인기가 많을 수 있으며, 장애를 가진 사람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5]
장자의 사상을 최대한 쉽게 요약하자면 '관점주의(perspectivism)'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장이나 여희같은 미녀를 두고 남자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녀들을 보자마자 물속 깊이 들어가 숨는다"는 장자의 말처럼, 우리의 판단은 모두 각자의 처지에 따른 것이므로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할 수는 없다. 오리발이 짧은지, 학의 목이 긴지,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사물 간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내 관점'에만 집착하지 말고 '상대의 관점', 심지어 '사물의 관점'에서도 사건을 살펴보자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다.
장자 제2편에 나오는 '엷은 그림자'와 '본 그림자'의 대화[6]는 사물의 의존성과 연관성을 묘사하는데,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존재의 바탕이자 움직임의 근원에 절대적인 개념인 도(道)를 도입할 필요성을 나타낸다. 결국 선악, 미추, 고저, 장단 등의 것들은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인 까닭에, 변화무쌍한 상대적인 개념을 인생의 길잡이로 삼으면, 그 인생 또한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조삼모사의 일화도 사건의 본질이 하나임을 깨치지 못한 원숭이들이 사물의 양면을 파악하지 못하고 당장의 입장에 따라 자신의 관점을 바꾸는 어리석은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호접지몽의 이야기도, 물아일체의 신성함이나 인생무상 같은 것의 호소를 추구했다기보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듯이 가상과 실재의 구분은 모호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하는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것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일까? 일단 장자는 "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은 도가 아니다"고 말한 노자의 노선을 따른다. 한마디로 절대 진리는 말이나 문자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한쪽만을 절대시하는 독선에 빠지지 않고 양쪽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분별지(分別知)를 초월해야 하며, 좌망(坐忘: 앉아서 잊는다)과 심재(心齋: 마음을 가다듬다)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를 잃어버린 상태(吾喪我)에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유롭게 노닐다 보면 그것이 곧 양생이 되고, 처세의 도가 된다는 것이다.[7] [8]
당대 사상가들이 대부분 성인(聖人)의 권위를 빌리거나 지배 계층에게 조언하는 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풀어나간 데 비해, 장자는 특이하게도 동물, 자연물, 또는 이름없는 민중(백정, 수영하는 사람, 수레 만드는 사람 등)이나 하급 관료와의 대화 등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물론 장자의 일화에는 공자나 양주 같은 이들과 대화하며 이들보다 더 큰 통찰력을 보여주며 대화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그마저도 권위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것에 가깝다.
이후 장자의 사상은 중국의 선불교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유명한 고사론 호접지몽, 조삼모사[9]가 있다. 그 외에도 대붕이나, 포정해우[10], 혜시[11]와의 대담 등이 대표적인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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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莊周)와 그의 사상을 계승한 제자들과 장자의 후학들의 사상을 기록한 책.
지금은 상당 부분이 소실된 상태다.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내편 7편, 외편 28편, 잡편 14편, 해설 3편 총 5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사기(역사책)에 따르면 10여만 글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 유통되고 있는 판본은 4세기에 곽상(郭象)[12]이 일관성이나 글의 질을 기준으로 내편 7장 외편 15장 잡편 11장, 총 33장으로 추린 것이다. 보통 내편의 7장은[13] 많은 부분이 장자 본인의 저작으로 여겨지고 있고, 외편과 잡편은 후대의 인물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4]
기존의 틀에 박힌 이분법적인 사고로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에 적힌 활자가 이해가 안 될 수 있다.[15] 심지어 같은 장자 안에서도 읽다 보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서술마저 보인다. 그러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장자를 독해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비논리같은 장자의 책이 일정한 논리구조를 바탕으로 저술되었음을 알게 된다. 문학적인 가치 역시 큰 편이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도 이분법 사고의 해체를 논한 장자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6] 이런 요소는 이 책에 대한 비평학적인 부분에서도 예외가 아니며, 가령 이분법적인 사고 하에서는 장자가 도가의 형이상학적 부분을 촉진했다는 점과 도가의 현실주의에 집중했다는 점이 서로 충돌하여 모순을 빚는 듯하나 장자를 올바르게 독해한다면 이러한 이분법은 이 책을 독해하는 데 있어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징으로는 간결한 단어와 문구로 주로 사상을 해설했던 노자의 도덕경과는 달리, 풍부한 우화와 각종 비유로 자신의 사상을 설명했기 때문에 한자 자체가 생소한 것이 많고 또한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분량에서도 노자 도덕경의 20배가 넘는다. 보면 장자가 하는 말에 혜시가 트집을 잡거나 말꼬리를 잡다가 관광당하는 패턴이 많은데, 장자가 "그 친구 머리는 좋은데 재능을 낭비한다."라며 확인사살을 하기도 한다. 물론 혜시와 장자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절친이었고, 혜자가 죽었을 때 장자가 허무감을 느낀 것에 관련한 에피소드도 있다. 참고로 혜시 역시 명가 사상의 주요 인물로, 당대 논리학의 거두였다. 동아시아권에서는 보기 드문 연역론자. 현재 혜시의 저서는 남아있지 않은데, 장자 외에도 한비자, 순자, 여씨춘추, 전국책에서도 혜시의 사상을 조금 엿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전국시대를 포함해 이전 시대의 역사적, 인문학적 거물들을 탈이분법적 사고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진 인물로 각색하여 예화에 출현시켜 흥미를 유발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공자와 안회의 대담. 하지만 사실 장자에 나오는 공자는 썩 대우가 좋지는 않다. 많은 일화가 공자가 이러이러하는데 다른 사람이 이러이러하니 공자의 사상이 잘못됐다는 식의 이야기. 뭐 유명인을 등장시켜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의외로 장자가 공자를 높게 평가하는 일화도 있는데, 우언편에 혜시가 공자는 아직도 지식 때문에 마음고생 하고 있냐고 묻자 장자는 공자가 이미 그런 경지를 넘어섰으며 자신은 도저히 공자에 미칠 수 없다고 하기도 했다.
장자 소요유편의 유명한 첫 구절이다. 시작부터 굉장히 난해하고 은유적인 내용이라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대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
'일반적인' 관점에선 가을에 가늘어지는 짐승의 털은 매우 작고, 태산은 매우 크며, 요절한 아이는 일찍 죽었고, 팽조는 매우 오래 살았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는 어디까지나 틀에 박힌 사고방식으로,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관점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작은 벌레의 입장에선 짐승의 터럭도 크게 느껴질 것이요, 우주에 나가서 지구를 내려본다면 태산은 매우 작을 것이며, 하루살이가 보면 요절한 아이도 장수한 것이고, 지질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낱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그 시간은 찰나와 같을 것이다. 즉 모든 기준은 상대적임을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 역시도 아름답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쓸 데가 없다는 무용(無用)이야말로 관점을 좀 달리 생각하면 크게 쓰일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장자의 생각은 다음의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온 몸이 뒤틀릴 정도로 심한 곱추를 보면 보통 사람들은 '저런 놈이 사람 구실이나 하고 살까' 하고 혀를 끌끌 차거나, 아니면 동정 내지는 연민의 정을 느끼기 마련인데 장자는 여기서 지리소라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몸이 심한 불구여서야말로 부역에 끌려가지 않고, 정부에서 구휼(救恤)을 할 때 이득을 보는 등 언뜻 보면 쓸모 없어 보이는 존재가 됨으로써 쓸모없는 것도 관점을 바꾸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장자에는 특히 이런 류의 우화가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장자의 이런 일화들을 '남들 눈 밖에 나는 짓 하지 말고 튀지 않게 살아야 장생한다'는 식의 처세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장자라는 책 자체가 워낙 해석의 방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일화는 사실 '똑같이 7개의 도토리를 주는데 그것도 모르고 아침에 많이 주니 눈 앞의 득만 보고 좋다고 하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말하고자 하는 얘기일 수도 있으나 다르게도 해석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조삼모사 문서 참고.
이 일화는 단순히 인생무상, 일장춘몽 등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다르게도 해석이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은 호접지몽 문서 참고.
유가와 도가 사상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있는 우화이다. 유가 사상에서는 인(仁)과 의(義)를 대전제, 수학을 예로 들면 공리와 같은 것으로 두고 논리를 전개시키는 반면, 이는 도가적인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인위(人爲)에 지나지 않고, 인의와 같은 것은 오히려 사람의 본성을 기만하는 개념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다만, 겸애(兼愛)는 묵자의 이론인데 유교를 공격하는 데 쓰이다니, 장자도 헷갈린 듯 보인다. 일단 묵가는 따지자면 일종의 유가의 후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어차피 묵가의 겸애와 유가의 별애는 시작과 과정이 다르지 결국 인위를 써서 온 세상 사람들이 잘 지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도가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라고 봤을 수도.
이 일화에서 소개되는 공자와 노자가 만나서 대화를 나눈 일이 사기의 공자세가, 노장신한열전 등에서도 확인이 되므로, 적어도 공자와 노자가 만났다는 것 자체는 실제 있었던 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우화적인 내용이 많은 장자의 특성상 대화 내용도 이와 같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에 적당히 살을 붙여서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사기에 따르면 이때 공자와 노자가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남겼는데, 공자는 노자를 "용과 같이 변화무쌍하여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칭송하고, 반대로 노자는 공자를 "뼈같이 썩어 문드러진 궤변으로 무장한, 겉만 그럴싸한 인간"이라는 식으로 공자의 면전에서 비난했다고 한다.
혼돈의 몸에 구멍이 없었던 것을 보고 불편해할 거 같아서 통념에 따라 인위(人爲)를 가해 구멍을 내 주었더니 더 편히 살기는커녕 죽어 버렸다는 얘기. 사람을 억지로 어떠한 기준에 맞추지 말고 난 그대로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 혹은 혼돈을 사람이 아닌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 상태', 즉 자연 그 자체로 보아서 자연에 인위를 가하는 순간 자연은 스러져 버린다는 은유적인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장자의 자연관, 인생관이 명확하게 나타나는 우화이다. 당연히 장자가 아내의 죽음을 기뻐했던 것은 아니고, 삶과 죽음이 본시 자연의 일부이자 순환의 일부분이니 누군가가 우리 곁을 떠나간다하여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장자의 대미를 장식하는 우화.[35] 위 장자의 처의 죽음과 더불어 장자의 자연관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장자는 이렇게 자기 자신이 자연의 일부분이고, 자연과 함께 살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막연한 공포마저도 초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요약 장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저서 <장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중국 불교의 발전과 중국의 산수화와 시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자는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다.
인생은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며,
도 안에서는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이 없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환경, 개인적인 애착, 인습, 세상을 낫게 만들려는
욕망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장자>는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편(1~7권)은 대부분 장자 자신이 지은 것이 분명하지만,
외편(8~22편)과 잡편(23~33편)은 그 자신이 쓴 것도 일부 있는 듯하나
대부분 위작으로 보인다.
장자(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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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본명은 장주(莊周).
그가 쓴 〈장자〉는 도가의 시조인
노자가 쓴 것으로 알려진 〈도덕경 道德經〉보다 더 분명하며 이해하기 쉽다.
장자의 사상은 중국불교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의 산수화와 시가(詩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록으로 본 장자의 생애
후대의 학자들이 가장 뛰어난 장자 연구가로 평가한
서진(西晉)의 곽상(郭象 : ?~312)은 장자의 저작에 처음으로 주석을 달았고,
장자의 위치를 도가사상의 원류로 끌어올렸다.
불교, 특히 선(禪) 불교의 학자들도 장자의 책을 많이 인용했다.
이러한 장자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한대(漢代)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 ?~BC 85)은 그의 〈사기〉 열전(列傳)에서
장자의 생애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전국시대 송(宋)나라의 몽(蒙 :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상추 현[商邱縣])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주(周)이며, 고향에서 칠원(漆園)의 하급 관리를 지냈다.
그는 초(楚)나라 위왕(威王 : ?~BC 327) 시대에 활동했으므로,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존경받는 유교사상가인 맹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열전에 의하면 장자의 가르침은 주로 노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장자가 다룬 주제가 훨씬 광범위하다고 한다.
장자는 자신의 문학적·철학의 천부적재능을 발휘하여
유가와 묵가(墨家 : 謙愛說을 주장한 묵자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반박했다.
또한 유가의 가르침을 반박한 어부(漁父)·도척(盜
)·거협 등을 썼으며,
상상으로 지어낸 〈외루허 畏累虛〉·〈항상자 亢桑子〉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장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저서 〈장자〉(〈남화진경 南華眞經〉이라고도 함)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장자〉는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4세기에 읽히던 〈장자〉는 53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그 이후 수많은 판본이 나왔으며 〈장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때문에
본래의 내용이 불분명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자〉 내편(內篇 : 1~7권)의 7편은 대부분 장자 자신이 지은 것이 분명하지만,
외편(外篇 : 8~22편)과 잡편(雜篇 : 23~33편)은 그 자신이 쓴 것도 일부 있는 듯하나
대부분 위작(僞作)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장자〉의 내편과 외편에 나오는 일화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일화로 본 장자의 인품
장자는 이 일화 속에서 개인의 안락함이나 대중의 존경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예측불허의 괴팍한 성인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의복은 거칠고 남루했으며 신발은 떨어져나가지 않게 끈으로 발에 묶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비천하거나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친한 친구인 혜시(惠施)가 부인의 상(喪)을 당한 장자를 조문하러 와서 보니,
장자는 돗자리에 앉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장자에게 평생을 같이 살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의 죽음을 당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자,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내가 죽었을 때 내가 왜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아내에게는 애당초 생명도 형체도 기(氣)도 없었다.
유(有)와 무(無)의 사이에서 기가 생겨났고, 기가 변형되어 형체가 되었으며,
형체가 다시 생명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이제 삶이 변하여 죽음이 되었으니
춘하추동의 4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내는 지금 우주 안에 잠들어 있다. 내가 슬퍼하고 운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슬퍼하기를 멈췄다."
장자의 임종에 즈음하여 제자들이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려고 의논하고 있었다.
이것을 들은 장자는 "나는 천지로 관(棺)을 삼고 일월(日月)로 연벽(連璧)을,
성신(星辰)으로 구슬을 삼으며 만물이 조상객(弔喪客)이니 모든 것이 다 구비되었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고 말하면서 그 의논을 즉시 중단하게 했다.
이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 매장을 소홀히 하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땅속에 있으면 땅속의 벌레와 개미의 밥이 된다.
까마귀와 솔개의 밥을 빼앗아 땅속의 벌레와 개미에게 준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위와 같은 장자의 기괴한 언동은 그의 숙명론에 대한 깨달음과 직결되어 있다.
장자에 의하면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
즉 도(道)로 통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장자의 도관(道觀)
장자는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다. 인생은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며,
도 안에서는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며 사람들은 이 상태가 저 상태보다
낫다는 가치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환경,
개인적인 애착, 인습, 세상을 낫게 만들려는 욕망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장자는 관리생활의 번잡함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나라의 재상직을 거절했다.
그의 인식에 대한 철저한 상대성은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나비의 꿈'(胡蝶之夢)에 잘 나타나 있다.
"언젠가 나 장주는 나비가 되어 즐거웠던 꿈을 꾸었다.
나 자신이 매우 즐거웠음을 알았지만, 내가 장주였던 것을 몰랐다.
갑자기 깨고 나니 나는 분명희 장주였다. 그가 나비였던 꿈을 꾼 장주였는지
그것이 장주였던 꿈을 꾼 나비였는지 나는 모른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음은 틀림없다.
이것을 일컬어 사물의 변환이라 한다. "
〈장자〉에서 모든 경험이나 지각의 상대성은 '만물의 통일성'(萬物齊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장자는 도가 없는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받자 장자는 개구리와 개미,
또는 그보다 더 비천한 풀이나 기와 조각,
더 나아가서 오줌이나 똥에도 도가 깃들어 있다고 단정했다.
도가 어디에나 있다는 단정은 그뒤에 중국불교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이와 유사한 예를 들어 아무리 미천한 것에도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장자야말로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도를 깨친 위대한 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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