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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과천시니어코칭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차누나
<에세이>
8만 시간의 여정, 그 공식을 찾아서
차 갑 수
나의 은퇴는 가정경영과 돈벌이에서 손을 뗀 그 후부터로 정의한다. 집안일과 바깥일을 병행 하느라 많이 힘들었다. 자식 넷을 독립시키고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 마쳤다. 생활전선에서의 긴장감이 풀려 홀가분했다. 몸과 맘이 자유로웠다. 하여 그동안 소홀했던 지인을 만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리고 두 해쯤 지났을까, 점점 일상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사는 것이 시들하고 중심이 흔들렸다. 처음의 여유와 짜릿하던 기분이 사라져 갔다. 현실이 두려워지고 우울해졌다. 나 자신의 노후가 숙제로 불거졌다. 뭔가 새로운 일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야 잘 살았다 할 수 있을까?
내 목숨의 시간을 고민하고 방황하던 그 무렵, 복지관이라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나도 복지문화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라는 기대감이 스쳤다. 사실 내가 노인이란 생각을 전혀 가져본 적이 없던 때다. 현관에서 기웃거리다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물었다. 육십 세 이상이면 회원 자격과 더불어 여러 교양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단다. 어쩜 내가 찾던 곳이 여기었나 싶었다. 즉시 등록하고 나오는데 발걸음이 가뿐했다. 8만 시간의 여정, 그 길로 진입하기 위한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인생 종반부를 함께 할 문화공간으로 짐작되었다.
일단 시간표를 받고 평생을 꿈으로만 감추어 둔 문예창작과 합창을 선택했다. 등록만 했을 뿐인데 의욕과 기운이 솟았다. 나도 몰랐던 나를 복지관에서 발견한 듯했다. 강당에 인생 선배님들이 계셨다. 백발이 성성한 칠팔 학년이 대부분이다. 낯선 길목에 첫발을 내딛고 잠깐 서성대며 가슴이 뛰었다. 은퇴 이후 노년 사회로의 첫 출발 선상이었다. 그 동안 가족이란 울타리는 참으로 큰 배경이었다. 그들은 나를 울게도 웃게도 하는 마술사였다. 자식들과 별거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부턴 나의 삶을 풀어내야 할 순번이 됐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다.
실버인력뱅크를 이용해 복지사와 일자리 상담을 하던 중, 마침 국사편찬위원회를 소개받았다. 포쇄실에서 여자인력을 구한다는 것이다. 얼른 신청서를 제출했다. 접수번호 1번이다. 복지사 차를 타고 일터를 방문했다. 그 날의 감회는 지금도 흥분되고 새롭게 한다. 그 일을 시도하고 나에게 박수를 쳤었다.
복지관을 노크하면 어떤 일이든 연결 되었다. 젊은 시절의 미련을 내려놓고 눈높이를 낮추면 일은 사방에 있었다. 무엇보다 적응하는 자세가 첫째였다. 개인의 성향을 파악하여 일을 선별해 주었다. 그들이 권하는 복지대책을 따르고 신뢰하길 참 잘 했었다. 복지관에서 찾은 일자리가 큰 수확이었다. 한국이 복지국가였음을 실감했고 지금도 여전히 자랑스럽다.
삶이란 젊으나 늙으나 연습 없는 싸움터에서 이겨내야 하는 특별한 목표였다. 노인 일자리 참여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출퇴근한지 5년째다. 늘 즐거웠다. 사회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받아 그리 좋을 수 없었다. 참여자들에게는 자존심을 드높여 주는 반면에 소속 기관에서는 고효율의 노인 일자리 창출을 통해, 행정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내가 소속된 포쇄실은 국가에서 영구 보존되어야 할 온갖 역사적인 책과 사료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다. 그 느낌이 특별한 감흥으로 와 닿곤 한다. 일하는 노인이 당당하고 아름답다는 걸 실감한다. 내가 하는 일이 작은 일 같지만 결코 작지 않은 큰일이라는 자긍심이 생겼다. 보람으로 충만했다. 처음엔 일이 좀 서툴었지만 이젠 정착 되었다. 國史 史料 글씨 원본이 다칠까 소중하게 다룬다. 먹물향이 금방이라도 번질 것 같은 중요한 책을 정리 한다. 귀한 경험이 엔돌핀을 돌게 했다. 자칫 쓸모없는 노인이 될 뻔 했는데 실버파워를 발휘하며 인생의 빛깔을 뉴 실버로 채색했다. 또한 역사에 대한 개념이 새롭게 인식되어 어찌나 유익한지 모른다. 사료 하나하나를 다룰 때마다 대한의 반만 년 유구한 전통이 소중했다. 국가의 존폐 위기가 도래하지 않는 한, 노인 참여자들 손을 거쳐 깨끗이 정돈된 책들은 국사관 책고에 길이길이 보존된다. 직속 팀장님의 친절함은 매우 감동적이다. 마치 어머니를 대하듯이 자상하다. 모르는 것은 잘 가르쳐 준다. 그리고 복지사들 도움 또한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나 미소로 대해주고 상냥함이 진심으로 크나큰 힘이 되었다.
노인은 하릴없이 빈둥대지 않으면 다행한 일이다. 일터로 걸음을 옮기면 그 신선하고도 벅찬 행진에 뜨거운 氣運이 온몸으로 번진다. 세상의 신호등이 파란불 일색으로 다가온다. 이런 일자리가 내 몫이 된 건 황홀함 그것이었다. 은퇴 이후를 보상받듯이 다시 일상을 활기차게 변화시켰다. 열심히 오래오래 하고 싶다. 일을 하니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진부하지 않아 좋다. 내게 국사관은 노후 인생을 이끌어 준 빛나는 은빛 성장판이다.
내 인생 계획표에 이런 대목이 들어 있다. 자식들을 놓고 죽을 수 없다고, 일기를 쓰겠다고. 또 노래와 여행의 유혹을 물리치지 않겠다고. 내면에서 외치는 그것들 때문에 숨통이 트이곤 했었다. 고급스럽게, 후회 없는 나날이길 바랐다. 앞으로도 8만 시간의 목록을 써 내려가는데 있어 결격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임을 천명한다. 홀로 세상 짐을 짊어지고 생존하는 일, 자식들 진로와 밥벌이에 묶여 지지고 볶던 은퇴 전은 분명 한바탕의 굿판이었다.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뎌 왔을까. 지난날의 아픔을 내려놓으니 나날이 휴식이고 천국이 따로 없었다.
꾸준히 낙서하며 자신을 정화시키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모 여성 단체로부터 어린이 편지쓰기 지도를 함께 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그 일을 봉사로 알고 무조건 수락했다. 그리고 첫날 수업을 마쳤는데 하얀 봉투를 건네준다. 일에 대한 예우라며 몇 장의 지폐가 들어 있었다. 뜻밖의 경제까지 챙겨주니 금상첨화다. 돈과 일은 찰떡궁합이고 잘 늙는 대책 중 최고의 덕목이다.
또 어느 날은 ○○주부학교 어머니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편지쓰기 강의를 했다. 제때에 공부를 못하고 늦게나마 시작한 어른들이었다. 오월의 마지막 월요일, 그들 앞에서 가슴이 저려왔다. 용기를 내신 분들께 숙연했다. 매스컴에서만 대하던 그 분들을 현장에서 피부로 느꼈다. 눈빛이 내게로 쏠리며 귀를 쫑긋 세우신다. 공부하는 걸 자식들이 모른다며 절대 알리지 않을 거란 말씀이었다. 마치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숨어서 공부하는 것 같다. 당당해도 부끄럽지 않을 분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들인데, 학교 다니는 걸 감추고 싶어 하신다. 말을 글로 옮기는 일이 제일 어려워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셨다. 받침 하나, 글자 하나에 희열을 감추지 못하는 순진한 표정이시다. 이 분들이야 말로 ‘8만 시간의 에세이’를 위한 분들이 아닐까 싶다. 여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렇듯 공부하며 늙어가는 모습이 훌륭했다. 오늘 수업을 마치고 나는 짧으나마 칠판에 편지 한 통을 분필로 쓰며 진심을 남기고 왔다.
“오늘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반가웠습니다. 자녀들을 사회의 발전과 성장에 기여시켰으니 여러분께선 훌륭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자식들 먹고 입고 가르치는 것 때문에 미루었던 공부를 이제라도 시작하신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현재의 나이에서 앞으로 살아야 할 삼십년을 염두에 두시고 부지런히 공부하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는 삶의 마지막 아름다움입니다. 삶의 완성을 향해 가는 여러분, 힘내십시오. 아자아자 화이팅! 젊은이는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살지만 지금 여러분은 시간 밖에 없는 시간의 재벌이십니다. 시간이란 놈을 붙들고 하고 싶은 맘껏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이 익어가는 시절을 충분히 행복해 하십시오.”
내가 쓴 편지를 지우지 말라 하시며 한 자 한 자 옮겨 쓰신다. 두고두고 읽을 거라 하신다. 강사로 갔다가 오히려 그 분들로부터 사명감을 얻어 왔다.
젊은 강사들과 합류하며 행여 나이 앞에 주눅이 들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젊은이에게 없는 장점이 내게는 분명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육십 여년을 근면 정신으로 쌓은 재산이 그것이다. 노익장을 인증시키면 된다. 가치 있는 일을 창출하는데 있어 남녀노소가 무슨 상관인가. 일이란 8만 시간으로 가는 노후 대책 중 최고의 자산이다. 어쨌든 건강하게 잘 늙어가자.
내가 안으로 거느린 삶이 근심 되어 앞이 캄캄했던 적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미로 같은 인생길을 하나하나 헤쳐헤쳐 오늘까지 왔다. 시멘트 벽 같은 길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나의 자존감이다. 노후 설계도를 그릴 때도 그랬다. 계획이 생각으로만 그치면 거기서 멈춰버리고 만다.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고 나니 쓰던 달던 맛이 우러났다. 인생이란 무대는 순간순간이 오직 한 번뿐이다. 1막 1장을 놓치면 절대 회귀하지 않기 때문에 놓칠 수 없는 극장이었다.
남편이 천직으로 여기던 교직을 너무 일찍 놓아버린 아쉬움이 컸었다. 지금 내 나이는 그의 교직 정년을 훌쩍 넘긴 세월 앞에 섰다. 시간을 갉아먹지 말고 생을 창출하는 사람으로 숨 쉬고 싶었다. 지금처럼 자신의 생명력을 증명하는 이유를 만들어 가면 좋을 일이다.
단절된 교단의 인연을, 남편을 대신해서 좀 더 연장해보라는 하늘의 명이었을까. 나도 어릴 적 꿈이 선생이었는데, 어떤 이는 이미 성취하여 시시한 일일 수 있지만 그 꿈에 못 미친 나는 영영 이루지 못할 줄만 알았었다. 편지강사가 된 후 인생은 더욱 묘미가 있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 그것은 나이와 무관함을 입증했다. 앞으로도 여력을 다해 8만 시간의 대열에 차질 없을 것을 믿는다.
일만 하면 재미없다. 틈틈이 노래도 부르고 여행도 즐긴다. 어머니 합창단에 합류했다. 목청은 써야 녹슬지 않고 폐활량이 커진다. 노래는 기다림, 그리움, 지치지 않는 첫사랑 같다. 노래와 여행은 내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도와주는 취미고 자양분이다. 주인공으로 사는 방식이다. 평정심을 찾아주고 인생 물음표에 해답을 주곤 한다. 텅 빈 방을 등신불처럼 지켜온 스물 두 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사람이어서 외로웠고 유령 같은 외로움을 노래와 여행, 일손으로 물리쳤다. 벌써 시민회관에서의 정기 연주회가 4년째다. 높낮이의 소리를 모아 관객의 가슴에 감동을 전달하면 합창은 성공이다. 나와 자식과 이웃이 소통하여 조화를 이루듯이, 공동의 작업을 통해 타인과 타인 사이의 사회성을 배운다.
일하며 틈틈이 양념 같은 여행을 떠난다. 엊그제 무주구천동의 빼어난 풍류를 즐겼다. 하늘 아래 더 가야할 산천 산하가 있음은 축복이었다. 우리의 지도 따라 야금야금 밟아 먹자. 여행도 인생의 목표다. 내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궁색하지 않게 살아갈 이유 중 하나다. 그래, 지금처럼만 여생이 순탄하기를 빌었다. 그냥 이대로 걷다보면 8만 시간의 여정은 무난하리라 내다본다. 여행은 내 영혼을 춤추게 하는 환호성, 그것이다.
최근에 불혹과 지천명, 시니어 강의를 신청했다. 정원 30명 중 내가 최고령자다. 팔구십 앞에 육십은 분명 청춘이다. 미래를 준비함에 있어 소홀할 수 없는 나이다. 매번 들을 때 마다 신체 감각 기관이 바짝 일어선다.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 없는 긴장감이 돈다. 수명 100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신세계에 빠졌다. 뇌세포에 특별한 영양제를 투입하는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작았던지 돌아보게 한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아왔을까.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곤란에 처한 친구에게 멘토링을 해 주었다. 나를 믿고 따랐던 친구의 생활이 활짝 펴지는 걸 보며 뿌듯했었다. 더듬어 보니 세 사람에게 생의 어떤 전환점에 기여했었다. 그 후, 한 친구는 십 년 넘게 김장을 보내 준다. 어떤 친구는 간혹 그 지방 특산물을 택배로 보낸다. 또 한 후배는 가끔씩 나를 불러내 점심을 산다. 아는 길을 인도하지 않으면 죄악이라 했다. 내공의 힘을 전달해 가치를 생산했었다. 시니어 과정은 봉사를 실천하라는 공부다. 상대존중 등등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배웠다. 성격분석 중에 햇살 같은 깨우침도 얻었다. 인생의 원망이나 분노 같은 가려움은 덧내지 말라고. 치유의 일침을 맞았다. 생각의 조화 즉, 세상더러 변하라 말고 내 생각부터 바꾸어야 했다. 타인의 단점이 장점으로 보이기 시작하며 쌓였던 해묵은 고름이 씻기어 나갔다.
‘멀리 보고 던진 돌이 멀리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요양보호사자격증을 선물처럼 또 염두에 두었다. 차근차근 실행하자. 야간반에 신청했다. 한국이 점점 고령화 사회로 치달리고 있다. 실습과정에서 환자들 뵈면, 나이 들수록 장애자 아닌 사람 없고 시한부 생명 아닌 사람이 없었다. 8만 시간의 여정 속에 ‘요양사’를 추가해 위대한 사업으로 미리 점찍어 두었다. 오직 건강만이 미래다. 그 중 ‘老老케어’가 바람직하다. 노인은 노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행복은 느끼는 자의 몫이라 했다. 비록 젊은 기력은 소진되어 간다 해도 일을 향한 추진력은 놓지 않으련다. 노년, 그 황금의 시간을 인생의 적기로 삼고자 한다. 신념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성공이다. 은퇴 후, 노인으로 입성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며 여기까지 온 나를 사랑한다. 고민하던 숙제를 해결해 기쁘다. 살아온 날이 감격스럽고 또한 살아내야 할 날도 밝을 것을 믿는다.
시간이 神이다. 나는 8만 시간의 여정, 그 노년의 즐거운 공식을 찾았다.
서녘으로 해가 기운다. 황혼의 노을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끝-
(원고지 25매 분량임)
첫댓글 - 모든시니어가 본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