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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출발 | 바둑도 두면서 |
우리가 탄 페리는 어느덧 스페인의 타리파 항구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짐 검사를 하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차에 작은 짐만 남기는 것이 좋단다.
트렁크를 모두 들고 내려서 입국심사를 받고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 일행이 탄 페리에도 몇 명의 젊은 모로코 인들이 스며들었나 보다.
우리 현지가이드가 2명이나 수갑을 찬 채 끌려갔다고 했다.
우리가 항구를 막 벗어나려 할 때 철조망에 매다려 절실하게 외쳐대는 젊은이 3명을 보았다.
내가 마지막 나오는 터라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갈려면 언덕을 넘어 한참을 올라가야하고 우리 일행은 떠나고 있고 어찌할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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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파 항구에 도착한 우리 일행 | 타리파 항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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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파 항구 | 항구에서 대기 중 |
버스를 타고 스페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코르도바는 이미 관광을 했으므로 바로 그라나다로 간다.
긴 시간 여행이 되므로 현지가이드가 코르도바와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과 스페인에 얽힌 강의를 시작한다.
강의한 내용을 인용하여 소개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로망스]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기타연주가인 타레가.
그는 신체적인 문제 때문에 생의 마지막 9년 동안 손톱이 아닌 손끝의 살로만 현을 튕기는 새로운 기타연주를 개발했다.
이것이 트레몰로 주법이다.
이 주법으로 연주하여 그 신비로움과 애절함을 더하는 것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이 곡은 그가 그라나다를 방문했을 시 접한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받은 감동을 기타로 옮긴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작곡가의 개인적인 사건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1896년 타레가는 그의 제자인 콘차 부인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고심끝에 사랑을 고백했으나 그녀는 타레가의 사랑을 거부했다.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이 알함브라 궁전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달빛이 드리워진 이 궁전의 아름다움을 따라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며 이 곡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트레물로 주법으로 연주한 '로망스'도 사랑을 그리며 노래한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내의 핵심인 나사르궁은 입장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시간에 맞추어 가야 입장이 가능하고 여러 곳을 볼 수 있다고 무척 서둘렀다.
점심시간도 아까와 10유로씩 주고 휴게실에서 사먹기로 하였다.
휴게실에서 시간은 30분의 주어졌으므로 주문하는 곳으로 갔다.
마침 현지가이드가 있어서 추천을 부탁했더니 하몽을 넣은 샌드위치를 시켜주었다.
하몽은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건조시킨 것으로 생고기와 다름없었다.
정말 맛있어서 우리 일행과 나누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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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에 걸려있는 하몽 | 생고기와 다름없는 하몽 |
우리 현지가이드가 피카소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가이드의 설명과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를 이용하여 소개한다.
[피카소]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남부의 항구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화가로 주로 정물화를 그렸으며 어린 피카소를 화가로 교육시켰다.
피카소 아래로 두 딸이 태어나자 생활이 어려워졌다.
아버지는 ‘라 코루나’라는 한적한 포구마을로 미술선생자리를 얻어 이사를 한다.
이 곳에서 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수업을 받았다.
피카소가 14살이 되던해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남을 인정한다.
그림도구를 모두 피카소에게 물려준 후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해 아버지가 큰도시인 바르셀로나로 전근을 가게 되어 모두 이사를 한다.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서 특별허가를 받아 상급반에 입학한다.
이 때 자격심사를 하는데 보통 아이들이 한 달 걸려 그릴 그림을 단 하루에 그려 제출했다고 한다.
드디어 16세의 나이로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곧 전통을 모방하는 교육에 염증을 느껴 학교생활을 등한시 하게된다.
그리고 플라도 미술관에서 거장들과 자유롭게 어울린다.
실망한 부모님으로부터 학자금이 끊기기도 했다.
19살에 피카소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연다.
그 해 피카소의 친한 친구가 실연의 절망감으로 권총 자살을 한다.
친구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고, 그 충격은 그림에 반영되었다.
1901년부터 4년 간 피카소는 청색만을 고집한다.
청색은 하늘의 색이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색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의 색이란다.
이시기를 피카소의 청색시대라고 한다.
1904년 피카소는 몽마르트 세탁선에 정착했다.
거기서 그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여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곧 친해졌고 얼마 후 페르낭드는 그의 아틀리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로 피카소의 그림에서 더 이상 청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행복했다. 하루하루 끼니와 땔감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그 둘은 행복했다.
페르낭드의 쾌활함 덕분에 그의 화폭은 점점 밝아져 갔다. 피카소의 그림은 이제 장밋빛 그림이 된다. 이 무렵 그의 그림에는 곡예사들이 자주 등장했다.
이시기를 피카소의 황색시대 혹은 장미시대라고 한다.
피카소는 젊은 시절 전통을 무시하고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 후 중견이 되자 어느덧 아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닌가!
절치부심한 피카소는 말년에 어린이들과 어울리며 어린이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려 노력한다.
다시 보이는 대로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 입장시간에 맞추고자 열심히 지중해 고속도로를 달렸다.
저 멀리 지브로울터 섬이 보인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있는 곳으로 스페인에 있는 영국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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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보이는 지부로울터 섬 | 저 멀리 보이는 지부로울터 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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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져가는 지브로울터 | 눈덮인 네바다산 - 그라나다에 거의 도착했나보다 |
알함브라 궁전을 관람하기 전에 가이드의 강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관람하면서 설명하기 어려우니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역시 가이드의 설명과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를 이용하여 내용을 소개한다.
[알함브라 궁전]
이슬람예술의 최고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건물이다.
현재 스페인 지역에 있었던 서고트왕국은 711년 이슬람 옴미아드왕조의 침입을 받아 붕괴되었다.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를 넘어 프랑크왕국도 노렸으나 732년의 투르푸아티에 싸움에서 패배한다.
이 패배로 이베리아반도로 물러났으며, 그 후부터 8세기 동안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였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동안 산업이 발전하였는데, 당시의 이슬람의 문화·기술 수준이 서유럽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궁전은 스페인의 남쪽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를 한눈으로 바라보는 구릉 위에 세워져있다.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왕조인 나스르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후반 건설을 시작했다.
나스르왕조는 그리스도교의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영역을 잃어갔다.
그러다가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의 가톨릭 부부왕에 의하여 1492년 정복되었다.
서서히 기운을 잃어가는 이슬람왕조가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이토록 훌륭한 건축물을 세운 것이다.
마치 죽은 자 에게 마지막 화장을 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은 '중세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 '이슬람 건축의 최고 걸작' 등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이 궁전은 그러한 찬사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다른 유럽의 궁전들처럼 거대함, 보석장식, 그림장식 등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우상숭배를 금지한 이슬람 교리에 따라 내부 장식을 식물과 기하학적인 디자인으로만 구성하였다.
그래서 소박하지만 환상적인 모습이다.
'아벤세라헤스의 방', '왕의 방', '두 자매의 방'에서 볼 수 있는 모사라베라고 부르는 종유석 장식.
왕의 공식 접견실인 '대사의 방'의 아라베스크 무늬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물이 귀한 땅에서 살아온 이슬람교도들의 오아시스에 대한 열망은 곳곳에 연못과 분수를 만들어 놓았다.
왕의 여름 별궁에서는 아치형으로 물을 뿜는 분수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다.
가장 뛰어난 중정으로 손꼽히는 아라야네스의 안뜰은 정확한 대칭구조를 이루는 건물 중앙에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나스르왕조의 마지막 왕인 보압딜이 두 왕에게 도시를 넘겨주는 조약을 맺는다.
그가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알함브라궁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곳은 '한탄의 언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사벨여왕이 궁전을 정복하고 파괴하려했으나 너무 아름답고 훌륭하여 그대로 보존하였다 한다.
멀리 눈덮인 네바다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라나다에 거의 온 모양이다.
가이드는 시간이 아슬아슬하다며 부지런히 걷기를 원한다.
나중에는 뛰다시피하여 간신히 시간에 맞추어 알함브라 궁전의 나스루궁에 입장하였다.
[나사루 궁전 - 왕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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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수아르(왕의 집무실) 입구 | 왕의 집무실 - 기도실 벽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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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집무실 - 기도실 천정 |
왕의 집무실 - 바르카(조각배)의 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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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집무실 - 정의의 방(재판하던 곳) | 왕의 집무실 - 신하들의 대기소 |
[코라레스 궁전] - 각국 대사를 접견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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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아네스 중정의 연못 | 중앙의 건물은 아레아네스 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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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들의 방 - 천정 | 대사들의 방 - 벽면 |
[라이온 궁전] - 여인들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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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방 - 벽면 | 공주의 방 - 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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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자매의 방 - 천정 | 여인들의 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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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 중정의 분수 | 라이온 궁의 분수 정원 |
[헤네랄리페 궁전] - 여름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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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키아의 안뜰 - 잔잔한 연못 | 아세키아의 안뜰 - 잔잔한 연못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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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키아의 안뜰 - 분수 정원 | 여름궁전 - 바깥 정원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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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궁전 - 바깥 정원 | 여름궁전 - 바깥 정원 |
알함브라 궁전의 기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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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사바 요새 - '카스바의 연인'의 어원 | 알바이신 지구 - 이슬람인들이 살던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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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성당 | 궁전 입구의 사진틀에서 한 컷 *^^ |
지상 낙원 같은 알함브라 궁전 관람을 마치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오늘 밤에는 플라맹고 공연 관람이 있다.
플라맹고 공연 관람을 위해서 1인당 40유로를 지불 했다.
[플라맹고]
집시, 정확한 혈통은 알려져 있지 않고 언어학적으로 산스크리트 계통임이 밝혀졌다.
다만 11세기 인도 북부에서 이슬람의 침략을 피해 고향을 떠난 종족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서도 정착민들은 집시들을 반기지 않았다.
‘우물에 독을 넣는다’, ‘아이를 유괴한다’는 소문들은 그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정착하려 하면 재산을 빼앗기거나 추방당했다.
심지어 기독교 사회에서는 악마의 상징이나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몰려 화형당하거나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던 집시들은 한 지역의 물품을 다른 지역에서 파는 떠돌이 박물장수가 됐다.
이들은 춤과 노래로 사람들을 모으고 물건을 팔았다. 절도는 물론 매춘도 서슴지 않았다.
삶이 어려워지면 예술문화는 내면적 성숙을 가져오는 법이다.
집시들은 유랑민 특유의 향수어린 정서와 한이 섞인 음악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스페인이 아랍으로부터 독립전쟁에 돌입하자 집시들은 스페인의 편에 선다.
이후 800년 간 아랍 지배를 받던 스페인이 독립하자 집시들은 큰 탄압 없이 스페인에 거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집시들은 정열적인 플라멩코를 만들어낸다.
안달루시아에 정착한 집시들은 손가락을 퉁겨 소리를 내거나, 손뼉을 치고 발을 굴러 박자를 맞추는
기교적 성향의 즉흥적인 춤과 음악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스페인에 만연한 아랍문화와 가톨릭, 유대인들의 문화가 융합되었다.
화려함이 더해져 플라멩코가 완성된다.
집시들은 강렬하고 역동적인 춤인 플라멩코에 삶의 애환과 분노를 녹여냈다.
플라멩코에는 기타가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플라멩코는 플라멩코 칸테(노래), 플라멩코 바일레(춤), 플라멩코 토게(기타 연주) 등 세 가지를 통틀어서 이야기된다.
플라멩코에서 기타 연주자는 주어진 주제에 의하여 자유롭게 즉흥연주를 하는데 이를 ‘팔세타’(Falseta)라고 한다.
여기에 내적으로 플라멩코를 지배하는 강력한 ‘기’인 ‘두엔데’(Duende)가 작용하여 깊고 감정적인 플라멩코 토게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플라멩코 음악을 흡인력 있게 만드는 요인이다.
여기에 관중들의 ‘올레’(추임새)와 춤꾼들의 다양한 동작과 연기, ‘센티미엔토’(위엄있고 슬픈 표정)가 어울려 플라멩코가 완성된다.
집시의 한이 만들어낸 플라멩코는 이제 집시만의 문화를 넘어 스페인이 자랑하는 민속 예술의 하나가 됐다.
우리 현지가이드는 플랑맹고 공연을 보면서 화려하고 신나는 음악을 넘어서 집시들의 한을 느껴보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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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맹고 공연 | 플라맹고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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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맹고 공연 - 밸리댄스 | 플라맹고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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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본, 중국, 서양인 등 다양한 관중이 있었다 |
플라맹고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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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관중은 일본인들 | 플라맹고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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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맹고 공연 | 플라맹고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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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맹고 공연 | 플라맹고 공연 - 짚시들의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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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오늘도 이부장님 덕분에 아름다운 곳 여행을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