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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磵公 年譜-5
번역과 해설/羅千洙(나주목 향토연구회 부회장)
□ 萬曆四十六年戊午, 光海君 十年, 三十五歲(만력사십육년무오, 광해군 십년, 삼십오세)/1618년 무오년 광해군 10년, 서른다섯 살이 되다,
春侍通政公患侯(춘시통정공환후)/봄에 통정공의 환후에 시중들었다.
時沉疴二載有奇湯藥不掇(시침아이재유기탕약불철)/때는 2년간 지병으로 기이한 탕약을 가리지 않고 썼으나
危谻斷斷指(위갹단단지)/위독해지자 斷指를 斷行 하였다.
夏四月二十七日丁通政公憂/여름인 4월27일에 아버지의 喪을 당하였다.
喪禮一遵朱子家禮沙溪先生備要(상례일준주자가례사계선생비요)/상례는 오로지 주자 가례와 사계선생의 喪禮備要를 따랐으며
六朔枕苦水糜無鹽柴毁骨立(육삭침고수미무염시훼골립)/여섯달 동안 결코 누워 자지 않았으며 물과 죽만 먹고 소금을 먹지 않았으며 바짝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五月第三子任生/5월에 셋째아들 任이 태어났다.
五月初二日己丑午時(오월초이일기축오시)/5월초2일 기축일 오시이다.
九月行襄禮于王考府君墓下結廬侍墓/9월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묘 아래에 장사를 지내고 여막을 지어 시묘하였다.
時葬禮適從權(시장례적종권)/장례를 지낼 때 그때그때의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알맞게 변통하여 알맞게 하였으며
是月安窆于先王考護軍公墓下丁向原(시월안폄우선왕고호군공묘하정향원)/이번 달에 조부 호군공 묘 아래 정향원으로 편히 하관하였다.
結廬墓側兄弟同處朝暮環哭(결여묘측형제동처조모환곡)/묘 곁에 여막을 지어 형제가 같이 거처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돌아가면서 곡을 하였다.
蔬糲經朞三年一不到私(소려경기삼년일불도사)/변변하지 못한 음식으로 지내기를 朞年이나 三年이 되도록 한번도 私家에 이르지 않았으며
朔望入城以慰慈親勸令家人極致甘旨(삭망입성이위자친권령가인극치감지)/삭망 일에만 城에 들어와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고 집안 식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보내어 권하기를 다하였다.
金市西題墓廬東壁曰永慕(금시서제묘여동벽왈영모)/김시서가 墓廬의 동쪽 벽에 쓰기를 永慕라 하였고
西壁曰終慕(서벽왈종모)/서쪽 벽에 쓰기를 終慕라고 하였다.
作記文見集選(작기문견집선)/기문을 지었으니 남간집선을 보라.
聞師睡隱公訃(문사수은공부)/스승 수은공께서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왔다.
五月初六日(오월초육일)/5월초6일이다.
<해설>
◯患侯(환후)는 患候와 같은 뜻, 웃어른의 병을 높이어 일컫는 말,
◯沉疴(침아)는 고질병, 지병
◯危谻(위갹)은 위독
◯丁憂(정우)는 어버이의 상사(喪事)를 당함
◯柴毁(시훼)는 바짝 마르다, 여위다, 앙상하다
◯從權(종권)은 그때그때의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알맞게 변통함,
◯蔬櫔는 蔬糲의 誤記 같다.
蔬糲(소려)는 야채와 현미, 변변하지 못한 음식
◯家人은 하인, 한집안 식구,
◯永慕와 終慕의 풀이
永慕는 평생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다, 죽을 때까지 어버이를 잊지 않음,
終慕는 그리움이 끝이 없다는 말,
市西의 終慕堂記 마지막 표현에 “終身孝慕 曷有其極 玆以之名其堂曰終慕” 즉 죽을 때까지 사모함이 어찌 끝이 있으리요. 그래서 그 堂을 이름 하여 終慕라 하였다.
□ 萬曆四十七年己未, 光海君 十一年, 三十六歲(만력사십칠년기미, 광해군 십일년, 삼십육세)/1619년 기미년 광해군 11년, 서른여섯 살이 되다,
四月行常事(사월행상사)/4월에 일상적인 일을 행하였다.
□ 光宗貞皇帝泰昌元年庚申, 光海君 十二年, 三十七歲(광종정황제태창원년경신, 광해군 십이년, 삼십칠세)/1620년 경신년 광해군 12년, 서른일곱 살이 되다,
四月行詳事(사월행상사)/4월에 자세한 일을 행하였다.
六月禫(육월담)/6월에 禫祭를 지냈다.
七月服闋(칠월복결)/7월에 상기(喪期)가 끝나 상복을 벗었다.
<해설>
◯禫祭(담제)는 대상을 지낸 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
□ 熹宗哲皇帝天啓元年辛酉, 光海君 十三年, 三十八歲(희종철황제천계원년신유, 광해군 십삼년, 삼십팔세)/1621년 신유년 광해군 13년, 서른여덟 살이 되다,
春著鄕校東齋上樑文(춘저향교동재상량문)/봄에 향교 동재 상량문을 지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閏二月遭再從叔監察公德潤服(윤이월조재종숙감찰공덕윤복)/윤2월에 재종숙 德潤公의 喪을 당해 服을 입었다.
□ 熹宗哲皇帝天啓二年壬戌, 光海君 十四年, 三十九歲(희종철황제천계이년임술, 광해군 십사년, 삼십구세)/1622년 임술년 광해군 14년, 서른아홉 살이 되다,
元日作貞則復元箴(원일작정칙복원잠)/정월 초하루에 貞則復元箴을 지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五月第四子倬生(오월제사자탁생)/5월에 넷째 아들 倬이 태어났다.
五月初九日甲辰辰時(오월초구일갑진진시)/5월초9일 갑진일 진시이다.
著司馬齋上樑文(저사마재상량문)/사마재 상량문을 지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해설>
◯貞則復元箴(정칙복원잠)은 곧으면(貞) 근본(元)이 회복된다는 警戒의 글
□ 熹宗哲皇帝天啓三年癸亥, 仁祖大王元年, 四十歲(희종철황제천계삼년계해, 인조대왕원년, 사십세)/1623년 계해년 인조대왕원년, 마흔 살이 되다,
二月五子仁生(이월오자인생)/2월에 다섯째 아들 仁이 태어났다.
二月二十日(이월이십일)/2월20일이다.
三月倡復聖母疏議(삼월창복성모소의)/3월에 國母의 상소 논의가 다시 창도 되었다.
時先倡母后復位之疏議(시선창모후복위지소의)/때는 모후 복위에 대한 상소의 논의를 먼저 창도하여
與道內金東準高弘達諸人治疏上京(여도내금동준고홍달제인치소상경)/도내 김동준과 고홍달 등 여러 사람이 상소를 다듬어 상경하여
倡改王而退(창개왕이퇴)/다시 창도하였으나 왕이 물리쳤다.
夏被除慶基殿參奉(하피제경기전참봉)//여름에 경기전 참봉에 제수 되었다.
時朝廷擧遺逸白江李公敬輿薦于朝除參奉(시조정거유일백강이공경여천우조제참봉)/때는 조정이 유일을 천거하라고 하자 白江 李敬輿가 조정에 참봉으로 제수할 것을 천거하였다.
謝恩不就職(사은부취직)/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직을 취하지 않았다.
秋迎長子俊婦(추영장자준부)/가을에 큰아들 俊의 부인을 맞이하였다.
珍原朴氏生員濬哲女/진원 박씨 생원 준철의 따님이다.
<해설>
◯白江 李敬輿는 1585(선조 18)~ 1657(효종 8)대의 인물로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광해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다시 기용되어 부수찬·부교리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扈從)하고, 이어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뒤 부제학·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을 사수할 것을 주장했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에 오른 뒤, 이조참판·대사성·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2년 명나라 선박과 몰래 무역하는 것을 묵인하고 청나라 연호인 숭덕(崇德)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하여 심양에 억류되었다. 이듬해 은(銀) 1,000냥을 바치고 풀려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돌아온 뒤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후에도 청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지목되었다. 1644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청 황제가 "경여가 전에 죄가 있는 것을 사면하여 내보내기는 했으나 벼슬을 승진시켜 정승을 삼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다시 억류되었다. 1645년 세자가 청의 황제에게 상소하여 풀려나 귀국했다. 이해 소현세자가 변사하여 세자책봉문제가 대두되자 '경상(經常)의 도(道)'를 주장하며 세손(世孫:소현세자의 아들)을 지지했으나, 인조는 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듬해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가 소의 조씨(昭儀趙氏)를 저주했다고 하여 사약을 받게 되었을 때, 이에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1648년에는 삼수(三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면서 풀려나와 다시 중용되어, 1650년(효종 1) 영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뒤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54년 영풍군(寧豊君) 식(湜)이 세자책봉을 청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갔을 때 그의 근황이 보고되기도 했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 봉암사(鳳巖祠), 흥덕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
다. 저서로 〈백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李敬輿가 인조 즉위년에 南磵을 遺逸로 천거하여 경기전 참봉에 제수하려 했다.
李敬輿와 南磵이 상호 교유했던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입장이 같았으며, 광해군의 폐정을 正論으로 썼던 文科 답안지 사건도 李敬輿는 들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南磵을 특별히 참봉에 제수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후 인조11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李敬輿가 부임해 왔기에 더욱 친해졌을 것으로 본다.
□ 熹宗哲皇帝天啓四年甲子, 仁祖大王二年, 四十一歲(희종철황제천계사년갑자, 인조대왕일년, 사십일세)/1624년 갑자년 인조대왕1년, 마흔한살이 되다,
二月聞逆适擧兵叛馳倡義檄/2월에 역적 이괄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고 들려서 창의 격문을 전파하였다.
正月二十二日逆适以平安兵使與龜城府使韓明璉(정월이십이일역괄이평안병사여구성부사한명련)/정월 22일 역적 평안 병사 이괄과 구성부사 한명련이
謀反直向犯京(모반직향범경)/ 반역을 꾀하여 곧바로 서울로 침범하니
始聞急警發檄道內畧曰(시문급경발격도내략왈)/처음 급한 경보를 듣고 격문을 도내에 보냈으니 이르기를
彼逆适負天地邜/卵/育之恩(피역괄부천지석/란/육지은)/저 역적 이괄은 천지에 알을 품듯 길러준 은혜를 저버리고
肆陞梁吹主之毒(사승양취주지독)/방자하게 들보에 올라가 주인에게 독을 불고 있습니다.
又曰(우왈)/또 이르기를
當於十六日整旅啓行爲諸道倡云(당어십육일정여계행위제도창운)/이 달 16일에 군사를 정돈하여 길을 떠나니 여러 도에서는 앞장서 주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는데
餘見集選/나머지는 남간집선을 보라.
聞大駕幸公州與靈光郡守元斗杓議討賊之策(문대가행공주여영광군수원두표의토적지책)/임금이 탄 수레가 다행히 공주에 있다고 들어서, 영광군수 원두표와 적을 토벌함 계책을 논의하였다.
書畧曰(서략왈)/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國有大變軍與方急宮軍外(국유대변군여방급궁군외)/나라에 큰 변란이 있어 軍은 바야흐로 급하므로 宮을 지키는 軍 외에
加抄別隊直赴行在(가초별대직부행재)/예비로 뽑은 별대는 행재소로 직접 가고
則急調義兵卽當繼援云(칙급조의병즉당계원운)/그리고 급히 調發한 의병은 마땅히 후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聞慈殿至完府董督義旅(문자전지완부동독의여)/임금의 어머니께서 전주부에 이르렀다고 들었으며, 의병대를 독촉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初十日李公元翼奉慈殿至完府/초10일 이원익공이 받들어 임금의 어머니가 전주부에 이르렀는데
道內臣民尤切奔問之擧/도내 관원과 백성들이 더욱 절실히 급히 달려가 안부를 여쭙고 물었다.
會兵公館布告慈殿敎文/공관에 모인 병사들에게 布告하여 임금의 어머니께서 敎文를 내렸다.
十三日敎文畧曰(십삼일교문략왈)/13일 임금이 내리던 글에 대략 이르기를
嗟爾八方忠義之士(차이팔방충의지사)/아, 너희 팔방에서 충의에 찬 선비들이여
皆我祖宗及先王敎育之人/모두 나의 조종이나 선왕이 가르친 사람들이니
當此危難爾等各出義兵穀/마땅히 이 위난에 너희 등이 각각이 의병과 곡식을 내어
急急來救云/매우 급히 와 구원하였느니라.
聞大駕還都罷義旅(문대가환도파의여)/임금의 수레가 환도한다고 들어서 의병대를 파하였다.
十一日元帥張晩先鋒(십일일원수장만선봉)/11일 장만 원수가 선봉이 되고
鄭忠信再從叔宣傳德憲戰于鞍峴(정충신재종숙선전덕헌전우안현)/정충신, 재종숙 선전관 덕현께서 안현 전투에서
适敗走就斬二十二日(괄패주취참이십이일)/이괄이 패하여 도주하였는데 22일 붙잡아 목을 베었다.
上還都湖南義兵遂罷(상환도호남의병수파)/임금께서 환도하자 호남의병은 일을 마치고 파하였다.
答義廳募穀通文/義廳의 募穀 통문에 답하다
時自靈光郡義廳分定九大邑(시자영광군의청분정구대읍)/때는 영광군 의청에서 9대읍에 나누어 정한 바
定有司付屬邑馳通募穀(정유사부속읍치통모곡)/정한대로 관리는 부속 읍에 모곡에 대해 뒤좇아 통문 하였다.
故二十三日答文畧曰(고이십삼일답문략왈)/그러므로 23일 답문에 대략 이르기를
官廩軍儲罄竭無餘(관름군저경갈무여)/官의 창고는 군량이 탕진되어 여분이 없습니다.
當此板蕩之時(당차판탕지시)/이처럼 국정이 문란할 때는
可不効治(가불효치)/가히 다스리는데 힘쓰지 못하겠지만
埃之補云(애지보운)/조그마한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幼學鄭如龍姜鳳覽李榮廷李完廉公弼羅海崙李宗吉生員吳挺男進士羅海鳳生員吳以健等(유학정여룡강봉람이영정이완염공필나해륜이종길생원오정남진사나해봉생원오이건등)/幼學 鄭如龍, 姜鳳覽, 李榮廷, 李完, 廉公弼, 羅海崙, 李宗吉, 生員 吳挺男, 進士 羅海鳳, 生員 吳以健 等입니다.
爲募義穀有司(위모의곡유사)/모의곡 유사가 되었다
本州有司爲十七員(본주유사위십칠원)/본주의 모의곡 관리는 17명이다.
見募義錄(견모의록)/모의록을 보라
聞林戚丈觀海殉節作輓(문임척장관해순절작만)/친척되는 어르신 관해 임회가 순절하였다고 들어서 輓詞를 지었다.
秋中別試(추중별시)/가을에 별시에 합격하였다.
謝林石村公惠送寄韻/임석촌공의 은혜에 사례하며 詩賦를 보냈다.
時石村爲黃海監司送布墨作詩以謝/황해 감사 石村이 布와 墨을 보냈기에 사례의 詩를 지었다.
<해설>
◯邜育之恩은 卵育之恩인것 같다. 필자가 수정 해석코자 한다.
卵育之恩은 알을 품듯 길러준 은혜
◯加抄別隊(가초별대)는 예비로 뽑은 별대,
◯完府(완부)는 전주부,
◯董督(동독)은 감시하며 독촉하고 격려함,
◯奔問(분문)은 급히 달려가 안부를 여쭘
◯敎文(교문)은 임금이 내리던 글,
◯軍儲(군저)는 군량의 저축, 軍糧,
◯罄竭(경갈)은 다 써버리다, 탕진하다, 고갈하다
◯埃之補(애지보)는 보탬이 없지는 않다.
◯募義穀(모의곡)은 의병에게 필요한 곡식을 모우는 것,
◯林戚丈觀海(임척장관해)는 친척 되는 어르신 觀海 林檜를 말한다.
1562년(명종 17)∼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 증좌승지 임정수(林貞秀)의 아들이며, 중부(仲父) 임길수(林吉秀)에게 입양되었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林檜의 아들이 任得說으로 林檜의 선대가 나성군의 손녀사위
그래서 林戚丈觀海(임척장관해)라고 표현한듯하다
林檜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도성을 침범하므로 박영서(朴永緖)‧마우현(馬佑賢)과 함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안역(慶安驛)싸움에서 전사하였다.
◯林石村(임석촌)은 石村 林㥠(임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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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師睡隱公訃(문사수은공부)/스승 수은공께서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왔다.
五月初六日(오월초육일)/5월초6일이다."
수은집(睡隱集) 附錄 [挽詩]편에 羅應瑞 海鳳의 시가 있다
원문/나해봉
번역/ 나천수
格者論之曰(격자론지왈)/가지각각 사람들이 논하기를
天應殺善人(천응살선인)/하늘도 선인을 죽인다 하더라.
先生遽如許(선생거여허)/수은 선생이 어째서 이리되었는가.
此說豈非眞(차설기비진)/이 말이 어찌 참말이 아니란 말인가.
漠漠元無信(막막원무신)/원래 소식이 없어 막막하였는데
蒼蒼果不仁(창창과불인)/과연 하늘이 인자하지 못함이 창창하구나.
呼穹穹轉邈(호궁궁전막)/하늘에 호소한다고 하늘이 더 멀어지랴.
血淚目盈巾(혈루목영건)/피눈물만 눈에 가득하구나.
강항 수은의 영정
첫댓글 아래 시가 수정이 안된 것이네!
수정했습니다.
?邜育之恩은 卵育之恩인것 같다. 필자가 수정 해석코자 한다."
규장각 원문에도 ?邜育之恩로 ...돌아누울 석
邜育을 승정원일기에서 검색 해보면 卵育으로 검색 된 것으로 보아 卵育이 맞을 것 같다....
'夏被除慶基殿參奉(하피제경기전참봉)//여름에 경기전 참봉에 제수 되었다.
時朝廷擧遺逸白江李公敬輿薦于朝除參奉(시조정거유일백강이공경여천우조제참봉)/때는 조정이 유일을 천거하라고 하자 白江 李敬輿가 조정에 참봉으로 제수할 것을 천거하였다.
謝恩不就職(사은부취직)/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직을 취하지 않았다.'
1623년 경기전 참봉을 백강께서 추천했군요
秋迎長子俊婦(추영장자준부)/가을에 큰아들 俊의 부인을 맞이하였다."
준 1608~1677인데 16세에 장가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옛날에는 16세가 장가는 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