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이 필요한 세상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지난주 영국 런던의 24층 고층 그렌펠타워에서 대형화재가 났습니다. 58명이 사망했고 아직도 실종자가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한국판 세월호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지시가 대형참사를 불러왔다는 지적입니다. 잘못된 매뉴얼과 그릇된 지시는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킨 사건입니다. 그 아파트는 서민들이 어렵게 살던 곳이라는 보도를 접하면서 마음이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약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구조적 위험요소들이 많다는 것에 속이 상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 의원이 총기에 피격당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생각이 다르면 적이 되고, 그 적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폭력적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탄식의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억울한 죽음과 피눈물나는 아우성의 소리들이 과연 언제쯤 잦아질까요? 과연 그런 세상이 올까요? 이런 저런 속마음을 털어내어 보아도 그분의 답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삶 그 자체이기에 대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시스템이 병이 들고, 권력의 폭력이 인간의 부패와 굴종을 강요하고, 자유를 억압한다면 예언자처럼 불의함에 대하여 외쳐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든 나의 작은 손을 펴서 약한 자 곁으로 다가가 손잡아 주는 일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에서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비교경쟁하며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는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 자신 안에 머무름이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된 듯 합니다. 오늘 주님은 그 머무름을 위하여 기도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의 세가지 경건행위를 새롭게 재설정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자선과 기도, 금식의 행위는 자기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의 자기 과시적, 자기 욕망적 태도에 대하여 위선자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왜곡된 기도의 모습을 장소의 개념을 통하여 극명하게 대비시켜놓습니다. 회당과 큰 길모퉁이이냐? 골방이냐? 예배당안에서 신자라고 불려지는 곳이나 남들이 다 보이는, 자신을 선전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골방을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타인의 시선으로 내가 오염되고, 타인의 평가를 기대하는 장소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골방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골방 : 정주의 공간
골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골방은 정주stabilitas 의 장소입니다. 정주란 자기를 견지하고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 뿌리를 내려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의 성장을 위한 공간이 바로 골방입니다. 자신 안에 머물기 위한 신성한 공간입니다. 베네딕트 수도회를 창설한 베네딕트 성인Sanctus Benedictus de Nursia,480- 543은 정주, 자신에게 머무름이 자기가 살던 민족 대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몰락해가는 시기에 불안과 초조, 끊임없는 변덕을 치유하는 처방이라고 보았습니다.<안셀름 그륀, 정하돈 옮김,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분도출판사:2005), 29>
우리의 문명은 멈출 수 없는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삶이 복잡하고 급변하다 보니 우리의 마음은 더욱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연은 절대로 우리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주입하지 않습니다. 자연이 펼치는 장면은 부드럽게 천천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미디어는 급속한 장면의 전환을 통하여 우리의 눈을 자극하고 우리의 뇌를 과부하상태로 만들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주의력 결핍과 과잉행동장애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불안증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두려움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의 기반의 흔들림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는 골방에서 정주가 필요합니다.
오랜 전 들은 이야기라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융에게 어떤 목사가 심리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실제 당시에 융의 내담자들은 목사와 신부들이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융은 그에게 한 방에서 8시간동안 기다리게 하고서 Stop, Look within and Listen 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도 동일하게 8시간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다음번에도 8시간 동안 기다리게 했습니다. 융의 처방은 혼자 있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외형적일에만 몰두하고, 자신의 내면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의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멈추고, 자신을 드려다 보고, 내면의 소리에 귀울이는 그곳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 닫음 : 분리
주님은 골방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문을 닫으라고 주문합니다. 문은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지점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꿈이나 민담, 또는 성서에서 문은 바로 다른 차원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문을 지나는 것은 또 다른 장소로의 이행의 통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문 닫음은 외부 세계로부터 내부세계로의 진입을 하며 밖의 세계를 차단하고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문닫음은 집단적 가치체계나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내가 입고 있던 껍데기를 벗고 너 혼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네게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고, 때로는 누추하게 여겼던 그 옷을 다 벗어내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고독해져라, 스스로 고립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극적 내향화입니다. 폴 틸리히는 사람이 고독함으로써 종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니체는 최종적인 고독을 아는 사람은 최종적인 사물들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고독을 통해서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게 되고, 최종적으로 나를 하나님께 귀착시키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골방의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Cella est coelum”, “골방은 하늘입니다”. 골방은 하나님 앞에 나의 거친 감정과 불안을 토하며 이야기하고 주고 받는 곳이요, 하나님의 현존이 가득 찬 하늘을 가리킵니다. 또한 "Cella est valetudinarium", “골방은 치료실입니다”고 찬양했습니다. 자신 안에 일어나는 격동과 외로움, 두려움, 슬픔, 고통을 발견하고 건강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골방입니다. 여러분! 골방은 자기 인식을 위하여 내 안에 머무르는 홀로 있음의 공간이자 시간입니다. 그 안에 집단적인 소리, 내안의 온갖 부정적인 소리를 닫고 하나님이 내 안에 침투하시도록 내 전존재를 개방하는 여백입니다. 내 깊은 곳에서 하늘이 열리고 치료가 일어나고 변환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 골방에서 머무름으로 진정한 나를 만나고 하나님과 다시 묶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 마음의 조현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의 기도의 모습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명령을 통하여 기도가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제시합니다.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신에게 억지로 무언가 하도록 강제하며 조르기 위해서입니다. 진심이 없으면서 형식적으로 가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을 많이 하고 아름다운 온갖 좋은 말을 동원하고, 오랜 시간 해야지 자신의 원하는 욕망이 성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7b). 주님은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왜일까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8). 여러분! 기도를 한다는 전제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깊은 필요를 아신다는 깊은 신뢰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신뢰가 없다면 그 앞에 설 이유가 없습니다. 신뢰의 기초 위에 있기 때문에 빈말을 되풀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자 도덕경 23장에 희언자연希言自然이란 말이 있습니다. 잊지 말고 새기자 하면서도 이 말을 담지 못하고 삽니다. 말이 적은 것이 자연이라는 뜻입니다. 왜 희언자연인지를 바로 뒷문장에서 설명합니다. 고표풍부종조故飄風不終朝, 취우부종일驟雨不終日。숙위차자孰爲此者? 천지天地。그러므로 회오리 바람은 새벽부터 아침까지 불지 않고, 소나기는 온종일 내리지 않는다.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하늘과 땅이다. 노자는 다음 구절에서 “하늘과 땅도 그런 부자연스러운 일을 오래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인간은 어떻게느냐”고 반문합니다.(고종사어도자동어도故從事於道者同於道, 덕자동어덕德者同於德, 실자동어실失者同於失) 말이 많은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닙니다. 무언가 요식행위로 억지로 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할 뿐입니다. 자연스러움이란 하나님과 조화로움 안에 있는 것이요, 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전체인격의 중심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중국의 선교사였던 리하르트 빌헬름이 들려주는 레인메이커rainmaker이야기가 있습니다. 빌헬름이 살던 중국 어느 지방(청도)에 극심한 가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별의 별 방법(기우제, 스님을 모셔와 불공, 신부님을 모셔야 기도)을 다 써 봤지만 할 수 없어서 비를 오게 하는 사람을 모셔왔습니다. 빌헬름은 이것을 아주 흥미있게 보고 그 비를 오게 하는 사람이 오기를 거기서 조심스럽게 기다렸습니다. 그는 가마를 타고 왔는데 아주 체구가 작고 깡마른 노인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가마에서 나오면서 공기를 끙끙 냄새 맡더니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청하기를, 마을 밖에 작은 오두막에 혼자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사흘동안 레인메이커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더니, 사흘이 지나고, 갑자기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만 오는 것이 아니라 때 아닌 눈까지 펑펑 내렸습니다.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빌헬름은 그에게 가서 어떻게 비가 오고 눈까지 내리게 되었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레인메이커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눈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눈을 내리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기에 대해 설명을 하지요, 나는 사람들이 질서(order)속에 사는 곳에서 왔답니다. 그들은 도Tao와 일체되어 살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 와보니 사람들이 질서를 벗어난 걸(out of Order)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 도착하자 난 그들에게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도(Tao)와 일체가 될 때까지 혼자 머물러 있었고, 그 후에 눈이 내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란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말을 많이 하고 요란하게 행동을 해서 신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것입니다. 요란스런 삶을 멈추고 하나님의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면 거기에 우리 자신의 변모 뿐 아니라 밖에도 무언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염되고 왜곡된 내 자신을 숨김없이 내어놓고, 나를 우주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기 깊이로 내려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면 교만과 명예의 옷을 입고자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고 몸부림치느라 다 누더기가 된 옷은 하얗게 단장된 옷으로 변화됩니다. 그곳에서 외면하고, 억압해왔던 열등한 그림자를 대면하고 그것을 드리면 나에게 가장 귀한 황금빛친구로 새로운 변환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자신의 깊이로 내려가 기다리는 것임을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한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고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과정입니다.<김기석, 마태복음와 함께 예수를 따라 (두란노:2016) 77.> 삶을 살아가면서 느슨해질 때는 조이고, 너무 팽팽해질 때는 풀어주는 조현의 과정입니다.(schizo:split, phrenia:mind) 마음의 조율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도시의 현란한 불빛과 거대한 빌딩과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만듭니다. 숨가쁘게 달려야하는 세상은 나의 존재를 상실하고 곁에 있는 이들을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런 세상에서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우리의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마음을 조율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평화와 기쁨, 정의로움이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연주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