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1대 태조실록(왕건)
3.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고려 건국

시간이 흐르면서 후삼국 구도는 완전히 굳혀지는 듯하였다. 하지만 태봉에서
내분이 일어나 이들간의 관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왕건의 활약으로 태봉은 후삼국 구도를 주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왕건의
지위도 점차 격상되어 913년에는 파진찬 겸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왕건의 지위가 시중에 이르자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궁예는 변덕이 심한 편이었고 성격도 포악했다. 왕건은 궁예의 그런 성격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변방을 다니며 세력을 형성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변방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건의 간청에 따라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궁예 (후고구려,마진,태봉의 왕)
왕건이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 하면서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론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궁예는 왕건을 급히 소환하여 선수를 쳤다.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궁예는 평소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떠벌이곤 하였다.
터무니없는 독심술을 근거로 그는 이미 수백 명의 장수와 신하들을 죽인 상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역모죄로 몰려 죽었다. 궁예의 처벌은 가혹했다. 심지어는
여자의 음부를 불에 달군 쇠방망이로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도록
하는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태를 수도 없이 목격한 왕건은 궁예의 느닷없는 역모설에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왕건은 그런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대처했다. 이때의 상황을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그때 궁예는 처형시킨
자들로부터 몰수한 금과 보믈,가재도구 등을 점검하고 있었다.
태조를 보자 그는 성난 눈으로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이 말이 사실인가?'
이 말에 태조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태조는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에 궁예가 다구치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 보리라.'
궁예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렀다.
이때 최응(崔凝,898-932년.궁예 밑에서 한림랑.왕건 즉위후 총애를 받아 광평시랑등
주요관직을 지내고 사후에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는 인물)이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태조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이 말을 듣고 태조는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하였다.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태조의 이 말에 궁예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궁예는 이렇게 말하면서 곧 금은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굴레를 태조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
[고려사]는 왕건이 이렇게 거짓으로 모반 계획을 인정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궁예는 처음부터
왕건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하면서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궁예의 이 같은 행동은 왕건에게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던 차에 흥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하였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유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으로 향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
왕건이 군사를 몰고 왕성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는 변복을 하고 왕성을 몰래 빠져나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산야를 전전하다 허기를 이기지 못해 남의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 들켜 강원도 평강에서 살해되었다.
918년 무인년 6월 병진일, 왕건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고려라는 명칭은 고려 건국 당시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고려는 어원적으로
볼 때 고구려와 다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그것은 쉽게 확인된다.
'고(高)'는 한자어에서 높여서 부르거나 또는 미칭(美稱)으로 덧붙일 때 쓰는
접두사에 지나 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뜻이 없다.굳이 뜻을 붙이려고 한다면
'위대한', '숭고한, '고씨의'등의 형용사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구려(句麗)'는 고구려어로 성,읍,고을 등을 의미하는 '흘' .'골' .'구루'등을
음차한 것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줄임말이거나 '구루'에 대한 한자식 표기로 볼
수 있다.
고려와 고구려가 고구려에 대한 같은 명칭이라는 사실은 고려 건국 이전의
일을 다루고 있는 [편년통록]의 왕건 조상들에 얽힌 설화에서도 확인된다.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 태조왕건의 할아버지로 고려왕조 설립 후 의조
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으로 추존된다)이 배를 탔을 때 중국인들이 그를 향해
이미 ' 고려인이라고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 역사서들도
고려와 고구려를 같은 나라로 표기하고 있으며,일연의 [삼국유사]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볼 때 코리아(Corea)나 꼬레(Cure) 등의 알파벳식 명칭도
고려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시대에
이미 고구려는 고려라는 이름으로 인도나 티벳뿐만 아니라 중국 서쪽 세계에
알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이름으로 인식한 가운데 인도 계통 승려인
마라난타나 묵호자가 중국을 거쳐 불교를 전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간
사실을 통해서도 이는 증명된다. 또한 고려 성립 이전에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755년)가 사라센 군대를 맞아 싸울 때 그가 고려인(또는 고구려인)이라는
사실이 아라비아 세계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높다.

4. 고려 건국에 반대한 인물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 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馬軍將軍.馬軍=騎兵.말을 타고 싸우는 군사.
마군장군은 기병부대의 지휘관.보군步軍,해군海軍) 환선길(桓宣吉, ?∼918년.
고려건국공신으로 태조의 심복으로 정예군을 이끌었으나 반역해 처형됨) 이었다.

마군장군 환선길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환선길의 역모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 하여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을 침입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이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복병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을 받아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이들 형제 이외에도 청주 출신들이 역모를 도모하기도 했다. 청주 출신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을 비롯하여 배총규, 강길, 아차, 경종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청주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이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역모 혐의가 탄로나자 이들은 모두 도망하였는데, 배총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붙잡혔다. 왕건은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지만 청주 출신 수하 현률
이 왕건을 만류했다.
현률은 역모 일당 중 경종이 매곡(보은) 성주 공직의 처남이라고 밝히면서 만약
그를 죽이면 공직이 반기를 들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공직의 반란을 막기 위해
서라도 역모 혐의자들을 죽이지 말고 회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왕건은 현률
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놓아주려 하였다.
하지만 마군대장군 염상(廉湘,왕건을 도와 고려건국한 개국1등공신으로 재상반열에
오름)이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선다. 염상은 경종이 이미 오래 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에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비책이었다. 매곡 성주 공직의 아
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아들을 데려을 것을 지시했다.
볼모를 데려간다는 것은 곧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
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올 뜻한다. 왕건은 염상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
을 모두 죽이게 된다.
왕건을 위협한 또 한 사람은 웅주(熊州=공주) 성주 이흔암이었다.
이흔암(伊昕巖, ?∼918년 태조1. 고려 전기 반란을 꾀하였던 인물.궁예의 마군대장군
馬軍大將軍)으로서 웅주熊州성주였던 인물)은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자
웅주성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상경한다. 이 때문에 응주는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마군대장군 웅주성주 이흔암
이흔암은 원래 궁예 집권 말기에 장수가 되어 웅주를 점령하고 그곳 성주로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궁예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고 궁예 또한 그를 매우 총애했다. 따라서
그는 궁예를 쫓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왕건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왕건은 이흔암의 그런 태도가 무척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가 웅주성을 포기한 것에 대해
문책하지는 않았다. 한때 같은 장수였던 그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기에는 명분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형대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
염탐꾼의 말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 텐데‘하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 하고 그 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흔암의 역모사건은 조작된 흔적이 역력하다. 이흔암이 역모계획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왕건은 궁예의 측근인 그가 철원에 머무르면 민심이 동요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보는 저잣거리에서 그의 목을 베게 했다. 이흔암 입장에서
보면 왕건은 섬기던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역적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왕건 밑에서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가 웅주성을 포기하고 철원으로 돌아온 것도 바로 그런 의미였다. 만약 역모를
도모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웅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는 편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안전지대인 웅주성을 버리고 홀홀단신
철원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그가 전혀 역모할 뜻이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흔암 사건은 철원 지역의 정서가 왕건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왕건이 도성을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겨간 것도 바로
이러한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