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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인물 |
백 길(白 吉) | 자(字)는 태초(太初), 정남장군(征南將軍)을 역임. |
백 정(白 靖) | 삼중대광우간의대부(三重大匡右諫議大夫). |
백입승(白立昇) | 당나라 서주대도독 대윤 금자광록대부(徐州大都督 金紫光祿大夫). |
백 상(白 尙) | 자(字)는 여화(汝和), 애장왕시대 한주태수. |
백 영(白 永) | 시호(諡號) : 문원(文元), 당나라 첨의사 금자광록대부, 패강장성(浿江長城) 삼백리 구축. |
백연복(白延福) | 시호(諡號) : 충정(忠正), 어사대부 대도독부마(御史大夫 大都督駙馬). |
| 고려시대 인물 |
백 탁(白 卓) | 병부시랑(兵部侍郞), 고경문 해독(古鏡文 解讀). |
백사유(白思柔) | 호(號)는 퇴은(退隱), 시호(諡號) : 문정(文正), 한림학사(翰林學士) 간의대부 영주어사(永州御使). |
백사홍(白思弘) | 상장군(上將軍)을 역임. |
백사청(白思淸) | 태복경(太僕卿) 증 삼중대광대부. |
백 휘(白 揮) | 자(字)은 경열(慶悅), 호(號)는 포주(浦洲), 시호(諡號)는 청헌(淸獻), 16세에 장원급제하여 내봉감(內奉監)을 지내고, 목종(穆宗)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源君)에 봉해졌으며, 문종(文宗)때 평장사(平章事)가 되고 문명이 높았다. |
백광우(白光宇) | 병부외랑을 지냈다. |
백광신(白光臣) | 고려의 문신. 판비서성사,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수태위(守太慰)로 치사한 최당(崔 )과 그 아우 수태부(守太傅) 선(詵) 및 태복경(太僕卿)으로 치사한 장자목(張自牧)등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유유자적했다. 희종 초에 최충헌(崔忠獻)이 문사들을 모아 시부(詩賦)와 화운(和韻)으로 회합을 열었을 때 불려가 그 등차(等次)를 매겼다. |
백간미(白簡美) | 자(字)는 신보(愼甫), 호(號)는 월곡(月谷), 시호(諡號)는 정민(貞愍), 광록대부 판병부사(判兵部事) 감수국사(監修國史) 대장군(大將軍) 보국사 등 6조에 걸쳐 벼슬을 지내고 영해(寧海)로 낙향하였다. 문종이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
백행미(白行美) | 형부시랑(刑部侍郞)을 지냈다. |
백가미(白可美) | 태자사부(太子師傅)를 지냈다. |
백가신(白可臣) | 1096년 하정사(賀正使)로 요나라에 다녀오고 1100년에 송나라 철종이 죽자 조위사로 갔다가 귀국할 때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가지고 돌아왔다. 태자태보 내사령 겸 지어사대사가 되고 평장사에 이르러 치사하고, 홍주로 낙향 노후를 보냈다. |
백이정(白이正) | 1247(고종 34)∼1323(충숙왕 10). 충선왕 때의 유학자.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彛齋).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문절(文節)의 아들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 1275년(충렬왕 1) 문과에 급제,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겸하였고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298년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세자를 왕으로 삼고, 8월에 왕을 불러가자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燕京)에서 10년간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주로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고, 귀국할 때 정주(程朱)의 성리서적과 주자의 《가례 家禮》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뒤 후진양성에 힘써서,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이곡(李穀)·이인복(李仁復)·백문보(白文寶)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으며, 도학과 예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하여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라 할 수 있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전승되었고, 이제현은 이색(李穡)에게, 이색은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으로 이어졌다. 선조 때 김제남(金悌男)·최기남(崔起南) 등이 송경(宋京)에 서원을 세워 안향·권보(權溥)와 함께 배향하기로 경기사림(京畿士林)과 논의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였지만,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진주의 도통사(道通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신도비 등이 남아 있다. 유고로는 〈연거시 燕居詩〉·〈영당요 詠唐堯〉·〈한벽루 寒碧樓〉·〈여홍애집구 與洪厓集句〉 등의 시구가 전해지고 있다. 이재 백이정선생과 난곡사 |
백천장(白天藏) | 호(號) : 묵와(默窩),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문과에 등과하여 정당문학을 역임하고 원나라에 유학하여 한림학사ㆍ이부상서ㆍ우승상에 올랐다. 귀국후 수원백에 봉해지고 85세에 서거하셨다. |
백문보(白文寶) | 자는 화부(和父), 호(號) : 담암(淡菴), 시호는 충간(忠簡) 충숙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겸열을 거쳐 우상시가 되었다. 공민왕때 전리판서ㆍ밀직제학 등을 역임하고 뒤에 세자사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에 봉해졌다. |
백인경(白仁景) |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
백 장(白 莊) | 자(字)은 명윤(明允), 호(號)는 정신재(靜愼齋), 진사로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이부전서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원주 치악산으로 들어가 은거햇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조가 불렀으나 거절하여 해미로 유배되었다. |
| 조선시대 인물 |
백 회(白 繪) | 보성현감 좌익원종공신 2등공신 |
백대선(白大璿) | 자는 군옥(君玉), 조선시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
백 공(白 ) | 자는 경사(景思), 조선시대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
백상화(白尙華) | 연안군수 밀직부사 |
백정화(白正和) | 어모장군 명천부사 |
백사수(白思粹) | 1454년(단종 2) 문과에 급제한 후에 장단부사, 예빈시부정, 승문원참교 등을 지내고, 1455년(단종 3)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백귀선(白貴璇) | 조선시대 부성부원군에 봉해졌다. |
백정수(白精粹) | 자는 소화(素和), 조선시대 부사를 지냈다. |
백익근(白益瑾) | 자는 여용(汝用), 조선시대 참의를 지냈다. |
백익견(白益堅) | 호는 성화(成化), 조선시대 세자사부를 지냈다. |
백명항(白命恒) | 조선시대 도승지를 지냈다. |
백인성(白仁盛) | 자는 치서(致瑞), 시호는 충장(忠莊), 조선시대 방어사를 지냈다. |
백인걸(白仁傑) | 1497(연산군 3) - 1579(선조 12) 조선의 유학자.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 세자사부 익견(益堅)의 아들, 인호(仁豪)의 아우. 조광조의 문인.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금강산에 입산, 그후 돌아와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 예조좌랑 남평현감 호조정랑 지평 헌납을 역임했다. 1545년(명종 원년) 을사사화 때 윤원형 등 소윤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 1551년 풀려나와 오랫동안 고향에 은거하다가 윤원형이 죽자 복직, 1567년(명종 22) 71세의 나이로 교리가 되었다. 선조 때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 동지경연사 동지의금부사를 겸임,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들을 논핵하다기 사임했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군비강화를 강조했다.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났다. 남평의 봉산서원, 파주의 파산서원에 제향, 초시(初諡)는 충숙(忠肅), 개시(改諡)는 문경(文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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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무(白仁武) | 조선조에 임원부원군에 봉해졌다. |
백인국(白仁國) | 1530(중종 25)∼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덕첨(德瞻), 호는 족한당(足閒堂).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당(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해박씨(寧海朴氏)로 첨정(僉正) 의원(義元)의 딸이다. 처음에는 종조숙부(從祖叔父)인 심(琛)에게 수학하였고 뒤에 이천계(李天啓)·김언기(金彦璣)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성일(金誠一)·남치리(南致利) 등과 학문적인 교류가 있었다. 1571년(선조 4) 천거에 의하여 선교랑(宣敎郎)에 제수되었고, 그해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574년 진잠현교관(鎭岑縣敎官)이 된 뒤 평해(平海)·연일(延日)·고령(高靈)·김해 등지의 교관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권전(權銓)과 합세하여 축산(丑山)에서 적을 격파하는 한편, 외아들인 민수(民秀)를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보내 참전하게 하였다. 권춘계(權春桂)·유성룡(柳成龍)·황응청(黃應淸)·안여지(安汝止)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만년에는 후진교육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 《족한당문집》이 있다. |
백인영(白仁英)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화(彦華). 익장(益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경남(崔慶男)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식년문과에 갑과 2등으로 종제 인걸(仁傑)과 함께 급제하였다. 1539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41년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이 되었다. 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대사헌 정순붕(鄭順朋) 등과 함께 윤임(尹任)과 윤원형(尹元衡)의 죄과를 비호하는 데 앞장섰으며, 곧 다시 내자시정(內資寺正)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어 종실인 봉성군(鳳城君)의 죄를 들어 멀리 찬배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같은 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 시독관(侍讀官)이 되어 과거시험을 감독하였으며, 곧이어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다. 1547년 군자시정(軍資寺正)이 되었는데, 왕명으로 평안도의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549년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고, 1553년 내섬시정(內贍寺正)이 되었으며,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우승지를 역임한 뒤 도승지가 되었다. 그 뒤 1564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
백흥종(白興宗) | 조선시대 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
백유양(白惟讓) | 1530(중종 25) - 1589(선조 22) 조선의 문신. 자는 중겸(仲謙), 부사(府使) 인호(仁豪)의 아들이며, 인걸(仁傑)의 조카이다. 1572年(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1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이어 강원도어사(江原道御使),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지내고 1588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 1589년 병조참판·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인자하였으며 사정(邪正)의 시비를 가려낼 때에는 의논이 강직하여 남에게 굴하지 않아서 명망이 두터웠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아들 수민(壽民)이 정여립의 형 여흥(汝興)의 딸을 아내로 삼았던 탓으로 연좌되어 사형당하자 사직하였다. |
백유함(白惟咸) | 1546(명종 1) - 1618(광해군 10) 조선의 문신. 자는 중열(仲悅), 대사헌 인걸(仁傑)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찬(安璨)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정자(正字)·박사·부수찬·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1583년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李珥)가 죽자 그도 당쟁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龍仁)의 농장에 내려가, 그곳에 있는 백운암(白雲庵)에 들어가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평정되자 다시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헌납이 되자 역적 정여립 등과 사귄 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인물들을 갈아치우도록 소를 올려 시행되었다. 다시 이조정랑을 거쳐 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주장에 동조하다가, 정철이 물러나자 그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흥으로 옮겨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의주로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직제학으로 복직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을 조달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동분서주하면서 윤승훈(尹承勳)과 함께 군량미 2만석을 조달하였고, 이어서 정주에서도 많은 군량미를 모았다. 그 해 10월 성균관사성이 되어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직하였다. 1593년 함경도에서 왕자를 왜군에게 잡히게 한 황정욱(黃廷彧)을 탄핵하였다. 1594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황주목사로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잘 어루만져 치적을 남겼다. 1596년 우리나라의 실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군(護軍)이 되어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를 접반하였다. 정응태는 그에 대한 접대가 소홀함을 난문하면서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나라의 체통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조선이 한낱 왕국에 불과한데,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묘호(廟號)를 사용하고 있음은 황제를 능멸히 여기는 행위가 아니냐는 트집이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조선왕의 묘호는 국초부터 당당히 사용하여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광해군초에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에 고향 용인(龍仁)에 방환(放還)되었다가 1617年(광해군 9) 신원(伸寃)되어 개성(開城)에서 죽었다. |
백맹동(白孟冬) | 자는 자홍(子洪), 조선때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
백충언(白忠彦) | 자는 언지(彦之), 호는 상의당(尙義堂), 조선시대 좌랑장을 지냈다. |
백수장(白壽長) | 자는 팽조(彭祖), 1498年(연산군 4) 과거(科擧)에 급제,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功)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정해군(貞海君)에 봉(封)해졌다. |
백민수(白民秀) | 자는 기원(起元), 호는 술고당(述古堂),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學者)였다. 16세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문위세(文緯世)와 함께 의병거사(義兵擧事)를 합의하고 수백(數百)의 장정(壯丁)을 이끌고 좌의장(左義將) 최경회(崔慶會) 군(軍)과 합세하여 장수(長水)지역에서 크게 승리(勝利)하였고, 금산(錦山)으로 달려가 권율(權慄)장군을 도와 이치(梨峙)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도 문세위와 합세하여 경북 용담(龍潭) 등지에서 많은 왜적을 죽이고, 전공(戰功)을 세웠다. 선무훈(宣武勳)에 책록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되었다. |
백상영(白尙瑛) | 자는 윤미(潤美), 호는 영천(寧川), 조선 때 선전관을 지냈다. |
백응상(白應祥) | 자는 성서(聖瑞), 호는 여재(旅齋), 조선시대 예빈시 부정을 지냈다. |
백몽표(白夢彪) | 자는 성서(聖瑞),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한 후에 선전관을 거쳐 동래판관을 지내고, 어모장군 오위도총부에 재직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
백세흥(白世興) | 1630(인조 8)∼1699(숙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가원(可遠), 호는 율은(栗隱).원발(源發)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경훈(慶薰)의 딸이다. 1652년(효종 3)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복상(服喪)문제로 상소를 올리려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귀향하여 학문연구에 힘썼다. 1675년(숙종 1) 문과에 급제, 봉상시 겸 성균관학유(奉常寺兼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 그 뒤 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성균관전적 등을 지냈다. 1678년 이후에는 해남현감·강진현감·평해현감 등에 재임하면서 검약한 생활과 애민정신(愛民精神)으로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는 《율은문집》이 있다. |
백광홍(白光弘) | 1522(중종 17)∼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아버지 세인(世仁)과 어머니 광산김씨의 장남으로 장흥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아우 광안(光顔)과 광훈(光勳) 및 종제 광성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1549년(명종 4) 28세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55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정자로 임명되고, 1553년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 뒤 1555년 봄에 평안도평사가 되어 〈관서별곡〉을 지어 그곳의 생활상과 자연풍물을 읊었다. 이듬해 1556년 가을에 병이 들어 벼슬을 내놓고, 귀성하는 도중 음력 8월 전라북도 부안에서 객사하였다. 천생자질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며 행실이 올바른 성품이었다. 자라면서 이항(李恒)에게서 학업을 배우고, 김인후·이이·신잠·기대승·임억령·정철 등과 같은 당시의 대문장가들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특히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08년(순조 8)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기봉집》이 있다. |
백광훈(白光勳) | 1537(중종 32) - 1582(선조 15) 조선의 시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세인(世仁)의 아들. 박순(朴淳)의 문인. 어려서 시재(詩才)가 있어 13세 때 상경(上京), 양응남(梁應南), 노수신(盧守愼)등에게 사사(師事)했다. 1564年(명종 19)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山水)를 즐기며, 시서(詩書)에 열중했다. 1572年(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써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사신을 감탄케 했다. 1577年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 예빈시(禮賓時),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당시의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성당(盛唐)의 시풍(詩風)에 들어갔다 하여, 삼당(三唐)으로 불렸다. 명필(名筆)로도 알려졌는데 특히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1590年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백광안(白光顔) | ? - 1592(선조 25) 조선의 무관. 호는 풍암(楓巖), 시호는 충민(忠愍), 태인(泰仁)출신. 일찌기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1589年(선조 22) 북청판관(北靑判官)을 지내고 1592年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집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주(公州)에 달려가 군대를 해산하려는 이광(李洸)의 마음을 돌이켜 그와 함께 전주(全州)에 가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용인(龍仁) 전투에서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모충사(慕忠詞)에 제향(祭享)되었다. |
백광조(白光祖) | 조선의 무신. 첨절제사(僉節制使) 광종(光宗)의 종제(從弟). 1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 1627年(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용골성(義州龍骨城)에서 적을 무찔러 수문장(守門將)이 되고, 1630年 가도(假島)의 유흥치(劉興治)가 의주를 침공할 때 이를 섬멸하였으며, 1636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공을 세워 훈련주부(訓練主簿)가 되었다. 1639年 초선장사(抄選壯士)로 사신을 따라 심양(瀋陽)에 가서 사재를 털어 포로로 잡혀간 수천 명의 동포를 구해서 귀국케 하고 만호(萬戶)를 거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
백 형(白 珩) | 자는 중온(仲溫), 조선시대 어모장군을 지냈다. |
백응희(白應希) | 자는 광삼(光三), 호는 우산(又山), 1586년(선조 1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수문장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싸움터에서 죽었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백현룡(白見龍) | 1556(명종 11) - 1622(광해군 14) 조선의 학자. 자는 문서(文書), 호는 성헌(惺軒), 고려의 정당문학(政堂文學) 문보(文寶)의 후손. 이황(李滉)의 문인.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등과 학문 교유(交遊)가 있었다. 1592年(선조 25) 임진왜란때 영해(寧海)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위, 난이 끝난 후 벼슬을 바라지 않고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전심, 1543年(중종 38) 67세에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다. 운산서원(雲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성헌집》이 있다. |
백진남(白振南) | 1564(명종 19) - 1618(광해군 10) 조선의 시인. 자는 선명(善鳴), 호는 송호(松湖), 광훈(光勳)의 아들. 15세때 사학(四學) 과시(課試)에 시부(詩賦)로써 뛰어나 이이(李珥)도 보고 이를 칭찬할 정도였다. 1590年(선조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97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진중(陣中)으로 피란했다. 명나라 장군 계금피(啓金皮), 승덕(承德)등이 그의 시를 보고 크게 찬탄했다. 1606年(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에 관반(館伴) 유근(柳根)의 천거를 받아 백의(白衣)로써 사신을 영접했다. 문장과 필법(筆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주지번은 그의 필적을 보고는 절찬하며 소중히 간직했고, 주지번의 필적을 선사받기도 하는등 서로 교의가 두터웠다. |
백거의(白居毅) | 조선시대 의병(義兵)이다. |
백광종(白光宗) | 조선의 무장. 거간(居簡)의 아들. 1627年(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의주용골성(義州龍骨城)에 들어가 참모가 되어 의병(義兵) 5천을 모집, 극력 방위하여 많은 적을 살상한 공으로 그 곳 수령(守令)이 되었다. 가도(가島)의 유흥치(劉興治)가 1만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의주에 내습하자 이를 무찌른 후 유흥치를 살해했다. 그후 조총(鳥銃), 궁시(弓矢), 창검(槍劒)등을 제조하여 변방 경비에 대한 공으로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승진 이어 김유의 천거로 아이진첨절제사(阿耳鎭僉節制使)가 되었다. 순조때 의주의 용현사(龍峴祀)에 제향(祭享)되었다. |
백홍제(白弘悌) | 1572(선조 5) - 1646(인조 24) 조선의 용사(勇士), 효자(孝子). 자는 여순(汝順), 우윤(右尹) 천민(天民)의 손자. 의(義)를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는 협기(俠氣)와 강용(强勇)으로 알려졌다. 1592年(선조 25) 임진왜란 때 적을 피해 노모(老母)와 함께 산중에 들어갔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어 적선(敵船)속에 끌려갔으나 적의 칼을 빼앗아 배 안의 왜적을 모두 죽이고 포로로 잡혀있는 70여명과 함께 귀국, 이 공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가 되었다. |
백수회(白受繪) | 1574(선조 7) - 1642(인조 20) 조선의 문신. 자는 여빈(汝彬), 호는 송담(松潭), 임진왜란 때 포로로 9년간 일본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후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여러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 : 1623)후 예빈시참봉(禮賓侍參奉),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 양산(梁山)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백대형(白大珩) | 1575(선조 8) - 1623(인조 1) 조선의 문신. 자는 이헌(而獻), 수종(守宗)의 아들. 1591年(선조 2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듬해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이 되고 1599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북평사(北評事), 형조좌랑(刑曹佐郞), 감찰(監察),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등을 지냈다. 광해군때 희천군수(熙川郡守), 형조정랑(刑曹正郞), 황해도 관찰사,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
백시구(白時耉) | 1649(인조 27)∼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덕로(德老). 원진(元振)의 아들이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다가 1680년(숙종 6)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684년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북로(北路)의 봉수(烽燧)를 조사하여 허술한 곳을 수축하게 하였다. 이어 초계군수가 되어서는 교육정책에 힘썼으며, 1708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717년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절도사로 있을 때 군기들을 잘 수선하여 갖추어두고 병사들의 훈련에 힘써 국방에 주력하였다. 경종이 즉위하고 김일경(金一鏡) 등이 정권을 잡자, 노론의 구신들을 몰아낼 때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기로소(耆老所)에 백금을 빌려준 일이 있는데 이 일로 반대파에 의하여 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았다. 김일경·목호룡(睦虎龍) 등에 의하여 신임사화가 일어날 때 이를 기화로 김창집(金昌集)의 죄상을 조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문에 단호히 불복하였다. 결국 고문에 못이겨 옥사하였으나, 뒤에 1741년(영조 17) 영조가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태우고 탕평책을 쓸 때에 그의 관직을 복구하고 몰수하였던 재산도 후손에게 돌려주었으며 호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유저(遺著)로는 《충장부군시고 忠莊府君詩稿》 1책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
백종걸(白宗杰) | 1800(정조 24)∼1876(고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긍첨(兢瞻), 호는 지산(止山).한성부좌윤 경해(慶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통덕랑(通德郎) 득서(得瑞)의 딸이다. 김익환(金益煥)에게 수학하였다. 1831년(순조 31)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에 임명되었고, 1835년(헌종 1) 출륙(出六)되어 전적(典籍)에 승진되었다. 그 뒤 예조정랑·사직서영(社稷署令)·지평(持平)·병조정랑 등을 거쳐 1839년 문천군수(文川郡守)가 되었다. 1846년 내직(內職)으로 돌아와 다시 병조정랑 등을 거쳐 1855년(철종 6)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가 되었고, 1861년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어 부호군이 되고 병조참지를 거쳐 병조참의에 승진되었다. 1868년(고종 5)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사직,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지산문집》이 있다. |
백원의(白元義) | ? - 1627(인조 5) 조선의 무장.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 옥강만호로 의주의 남성장이 되어 포대 3백여명으로 수많은 적을 살상하여 적으로부터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화살이 떨어져 백병전으로 싸우다가 전사했다. |
백원항(白元恒) |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문신.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진생(眞生)의 아들이다. 일찍이 안향(安珦)으로부터 “뒷날에 반드시 귀현(貴顯)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1279년(충렬왕 5)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1311년(충선왕 3) 선군(選軍)을 둘 때 지언부사(知언部事)로서 별감사(別監使)가 되었다. 이때 사복영사(司僕令史)를 매를 쳐서 죽인 것으로 영흥도(靈興島)에 귀양갔다. 뒤에 풀려나 전교령(典校令)이 되었고, 1314년(충숙왕 1) 윤신걸(尹莘傑)·윤선좌(尹宣佐) 등과 함께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진강(進講)했다. 1317년 총부전서(摠部典書)로 동고시관(同考試官)이 되어 진사(進士)를 뽑아 홍의손(洪義孫) 등을 급제하게 했다. 1321년 밀직사(密直使)가 되었다가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으며, 그해 박효수(朴孝修)와 함께 상왕 충선왕의 환국을 요청하는 글을 써서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보냈으며, 또 옹인(饔人) 한만복(韓萬福) 등이 충숙왕의 비(妃) 복국장공주(복國長公主)의 사인(死因)이 왕의 구타에 의한 것이라는 진술이 무고임을 밝히는 글을 써서 원나라 중서성에 보냈다. 그 해 김순(金恂)·윤석(尹碩) 등과 함께 상왕 충선왕의 신임을 받고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 거만(鉅萬)의 부(富)를 누리던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을 귀양보냈다. |
백세준(白世俊) | 자는 군식(君式), 조선시대 판관을 역임하였다. |
백문진(白文晋) | 자는 화국(華國), 호는 양우재(養愚齋), 조선시대 선전관을 지냈다. |
백후채(白後采) | 자는 덕현(德顯), 호는 연거처사(淵居處士), 조선시대 학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
백호인(白灝寅) | 자는 윤집(潤集), 호는 난정(蘭汀) 조선때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
백남규(白南圭) | 1884(고종 21)∼1970. 한말의 의병. 자는 성삼(成三), 호는 운암(雲庵). 경상북도 예천출신.일찍이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안동진위대 부위를 지냈다. 1907년 한국군이 강제해산당하자 경상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00명을 거느리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때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鳳復寺)에서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을 만난 뒤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이 되었다. 그 해 7월 제천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도선봉장(都先鋒將)이 되었고, 8월에는 모두령(毛頭嶺)·유수산, 문경의 갈평 등지에서 크게 승전하였다. 9월에는 영월 사리치(寺里峙)에서 선유원(宣諭員) 홍우석(洪祐錫)의 100여명의 수비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1908년 6월 이강년이 적에게 붙잡히자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김상태(金尙台)로부터 의병 1지대를 분급받아 서벽·내성·아산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2월 죽산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1918년 상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잡혀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
백홍인(白弘寅) | 자는 자행(子行), 호는 세심당(洗心堂), 1905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할 것을 결의, {포고(布告) 8도 사민서(士民書)}를 남도(南道) 제읍(諸邑)에 배포(配布)하고 제주도(濟州道)로 가다 발각되어 장흥헌(長興憲)에 수감(收監)되었다. 그 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문인(門人) 40여명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의거(義擧)할 것을 획책하다가 웅치순검청(熊峙巡檢廳)에 수감되었다. |
백성기(白性基) | 1860(철종 11)∼1929. 조선 말기의 무신. 자는 효천(孝天), 호는 소송(小松). 한성부판윤 겸 경연특진관 남익(南益)의 아들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고종 19)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관로에 오르기 시작해서 같은해 무과에 급제한 뒤 승진을 거듭하여 승선(承宣)·철산부사(鐵山府使)·내금위장(內禁衛將)·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경상좌도병마절도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고, 1895년 갑오개혁 때 제정된 육군계급제도에 따라 참장(參將)에 임명된 뒤 군부협판·갑산관찰사(甲山觀察使)·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평리원재판장 및 군법기초위원을 지냈다. 독립협회 활동시에는 간사부에 소속되어 활동한 개화파 무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신식 군제 설치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개편으로 인해 군정의 문란함이 극도에 달하게 되자 1900년 군정교구(軍政矯구)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고종이 원수부(元帥府)에 실시토록 영을 내려 일련의 군제 정비가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육군법률 317조가 1900년 9월 제정되면서 육군법원이 설치되는 등 군사법제도가 완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한 이후 육군법원장·원수부군무국총장·기록국총장·검사국총장·평안북도관찰사·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말 경무사(警務使)를 겸하고 있던 중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상민배(商民輩)를 탄압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임당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때 민영환(閔泳煥)과 함께 극간(極諫)하였으나 대세의 흐름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을 깨닫고 수원(水原)으로 퇴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