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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스라엘은 공군을 창설한지 1년도 안되어 세계 각국의 유태인들로부터 유입된
풍부한 자금으로 우수한 무기들을 구매하였는데 11월에는 미국제 P-51 무스탕도 등장
하여 아랍 공군 대비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게 됩니다.)
아랍군은 1948년 6월 18일 이스라엘 서쪽 해안에 위치한 하이파에서 남쪽으로 좀 더 내려가 위치한 텔아비브까지 남북 고속도로를 봉쇄하였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이 도로를 점령하기 위해 7월 8일 공격을 개시했지만 당시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작전 계획과 유리한 위치에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아랍군으로 인해서 탈환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에 이스라엘군은 쇼터 작전(Operation Shoter)라고 명명된 새로운 작전을 전개하여 재탈환 시도를 하게 되는데 휴전 발효 1주일 전이었습니다. 하이파 시 남쪽에 위치한 "리틀 트라이앵글"이라 불리는 지역이 공격의 타겟이었는데 이작전의 목표는 이곳에 아랍의 최종 거점을 탈환하는 것이었습니다. 7월 24일에 1차 공세에서 여전히 강력한 아랍군의 저항으로 퇴각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재차 공격을 시작하면서는 보다 강력한 포 지원과 공군의 폭격을 진행하면서 기갑 부대까지 동원하여 밀어붙힌 결과 드디어 아랍군을 격퇴하고 목표 지역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 공세에서 3개 아랍 마을이 점령되었고 60명의 아랍군 전사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아랍측 발표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이 이과정에서 아랍 마을들에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는데 이스라엘은 이런 주장을 일축했습니다. 국제연합은 이 사건을 조사하였으나 학살을 입증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의 결과로 텔아비브와 하이파를 연결하는 도로는 이스라엘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아랍이 설치한 도로 상에 장애물들도 모두 제거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이파와 하데라 해안을 연결한는 철도도 복구되게 됩니다.
확연히 우세해진 이스라엘 군 (1948년 10월 15일 ~ 1949년 3월 10일)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여러 나라들로 구성된 아랍군들은 내부 분열이 발생하고 집결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반면에 이스라엘군은 전쟁 초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병력과 강력한 무기들로 무장이 되어서 두번째 휴전이 끝난 후에 시작한 세번째 교전 기간에서는 압도적인 이스라엘의 우세가 전개됩니다.
이스라엘군은 일련의 작전들을 진행하면서 그동안 아랍군들이 점령했던 지역들을 탈환할 분만 아리나 기본적으로 애초에 1947년 국제연합이 구획했던 지역보다 이스라엘이 점령해가는 지역들이 더 넓어진 탓에 이제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더 넓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초조해진 아랍군 UN의 휴전 협정을 위반하고 이스라엘군 공격하다.
10월 22일이 되자 국제연합과 애초에 양진영이 합의했던 세번째 휴전이 발효되어야 했는데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크게 타격을 입었던 아랍군은 휴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격을 개시합니다. 휴전을 위반하고 아랍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이스라엘군도 방어를 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스라엘 보병 카르멜리 여단은 33명의 전사자와 40명의 부상자를 발생하였고 갈릴리 북쪽에 마나라와 미스개브 앰 두곳을 연결하는 도로가 아랍군에게 점령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에 이런 아랍군의 휴전 협정 위반을 항의합니다.
10월 24일 이스라엘군은 히람 작전(Operation Hiram)을 통해서 갈리리 북부의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고 그곳에 주둔하던 아랍 해방 부대와 레바논 부대를 레바논으로 퇴각시키고 시리아 군을 격퇴하는 성공을 거둡니다. 모쉬 카르멜 장군이 이끄는 4개 보병 연대는 많은 숫자의 아랍 마을들을 점령하면서 쉬지않고 60시간 동안 공격을 가했고 이 전투로 아랍군은 400명 전사에 550명이 포로가 된 반면 이스라엘군측은 경미한 손실만 입게 됩니다. 일부 전쟁 포로들은 이스라엘군 병사들에 의해서 즉결 처형이 당하기도 했습니다.
50,000여명의 팔레스타인 아랍 난밈들이 레바논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남은 아랍 민간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역에서 이스라엘군에 대항해 무력 저항을 하기도 하였으나 이런 저항도 이제는 너무나 강력해진 이스라엘군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10월말에 이스라엘군은 갈리리 주변 지역 전체를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는 이스라엘 북동쪽 전부를 점령했다는 의미가 되며 더 이상 북부 전선에서 레바논 군을 포함한 아랍군들의 저항을 제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13개 레바논 마을을 점령하면서 레바논 영토 일부까지 점령해버립니다. 이런 과정에서 두명의 이스라엘 장교들이 60명이 넘는 전쟁 포로들을 즉격 처형해버리는데 이 두 장교는 훗날 이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아랍군의 휴전 위반 후에 전개된 북부 전선에서의 전투의 결과는 이스라엘군의 압도적인 승리와 함께 레바논 영토까지 점령하는 추가 이득을 볼 정도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둡니다.
남부 전선 진행 상황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 남부 내륙에 위치하였습니다.
(사해 서쪽에 네게브 지역 (븕은 화살표) - 바로 그 중심에 비르셰바가 위치하였습니다.)
10월 15일 이스라엘 군은 네게브 서쪽에서 요압 작전(Operation Yoav)을 진행합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남부 지역 해안을 따라 주둔하고 있는 이집트군 제1진과 남부 내륙 도로를 타고 북진하였던 이집트 제2진 부대들 사이를 공격하여 고립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강력한 이집트 군은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서 파죽지세로 남쪽 국경에서 북쪽으로 진격해 올라왔었습니다. 이제 아랍군들보다 훨씬 강력해진 이스라엘군은 북쪽과 마찬가지로 남쪽에서도 이집트군을 와해시켜서 점령된 지역을 탈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작전의 결과로 남부 지역에서 광활한 네게브 사막 전지역을 점령하였는데 이때부터 영국과의 갈등이 시작되게 됩니다. 원래 전체 네게브 지역은 영국이 이집트와 요르단에게 넘겨준 지역들었고 비록 그 당시에 영국의 식민지는 아니었다고 해도 불과 1년 전에 식민 통치국이었던 영국이 이집트와 요르단에게 "하사하신" 땅이었는데 "깡패"와 같은 이스라엘이 거침없이 빼앗아버린 셈인 것입니다.
어쨌든 성공적인 요압 작전의 결과 이집트군의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고 순식간에 양쪽 부대들 모두 방어가 취약해지는 형세가 되어버립니다. 고립된 서해안 쪽 이집트군은 쫓기는 입장이 되어 이집트 본국에서 보내온 해군 군함으로 철수할 계획을 세우지만 이것마져도 4척의 이스라엘 군함이 서해안 주요 항구인 아쉬켈론에 포격을 가하면서 이집트군 1진의 철수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립니다.
10월 19일 아쉬켈론 앞 바다에서 결국 이집트 해군과 이집트 해군과의 해상전이 벌어집니다. 교전의 형태는 양쪽 공군의 공중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 고속정이나 소형 군함들끼리 해상 전투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해상전은 인근 가자 지역 해안과 마즈달 해안에서도 벌어졌는데 공중 지원 나온 전투기들끼리 즉각적인 공중전으로 확대되곤 하였는데 이경우 일방적인 이스라엘 공군의 우세로 끝나곤 하였습니다.
비록 이집트나 이스라엘이나 공군이 발족한지는 얼마 안되었지만 조종사의 능력에 있어서는 이미 언급했듯이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경우 2차대전 중에 실전 경험을 쌓은 에이스급 베테랑들이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는 일념으로 이스라엘로 달려와서 공군기의 조종간을 잡았으므로 전투기 성능 차이는 거기서 거기였다 하더라도 전투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루디 아우가르텐, 미국 출신 유태인으로써 2차대전 중에 미육군 37 비행단 소속으로 P-47 썬더볼트를 몰고
3대의 루프트바페 Bf 109를 격추시킨 후에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이스라엘 공군에 자원 입대하여 공군
지휘관으로써 역량을 보인 동시에 2대의 이집트 전투기를 격추시켰습니다. 에이스 자격의 요구 조건인
5대 격추를 두 전쟁에 참전하여 충족시킨 희귀한 경우입니다. 물론 중동전에서는 그가 탄 전투기는 Bf 109의
파생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체코제 아비아 전투기였고 그가 격추시킨 이집트 전투기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측
전투기였던 스핏파이어였습니다.)
게다가 11월에는 2차대전 최강의 전투기라 평가받는 미제 P-51 무스탕까지 구입하여 이스라엘은 불과 몇달 만에 중동 지역에서 최강의 공군력을 보유한 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2차대전 말기에 등장한 미제 P-51 무스탕은 프로펠러 전투기로써는 어떤 전투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강의
성능과 전투력을 갖춘 걸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외에 유태인들의 엄청난 자금력 덕분에 공군을 조직한지
6개월도 안되어 바로 이 최강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뛰어난 조종사들까지 확보하여 아랍의 어느 나라의 공군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강의 위치로 올라서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남부전선 중앙에 위치한 전략적인 요지 비르셰바를 이집트에게서 재탈환하였고 그 과정에서 120명의 이집트 군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10월 22일에는 이스라엘 해군 특수부대(코만도)가 이태리제 MT 쾌속정 3척을 사용하여 이집트의 지휘선과 기뢰제거선 각 1척을 기습하여 침몰시키는 전공을 세웁니다.
(2차대전 중에 이태리에서 딱 20척만 만들어서 사용했던 MT 모터 보트 중에 4척을 구입하였는데
10월 22일에 단 3척의 1인용 모터 보트를 사용한 코만도 부대가 이집트 지휘선과 기뢰제거선 총 2척을
기습하여 침몰시키는 전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중에 기관총을 장착한 지프 차량을 타고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코만도 특수부대)
11월 9일에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군이 점령하고 있던 타가르트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슈몬 작전)를 준비하였는데 실제로는 제대로 저항도 하지않고 이집트군이 항복을 해버렸습니다. 이미 병사들 개개인들에게 명분도 뚜렷하지 않고 자기 나라의 집권자의 일방적인 명령으로 전장에 동원된 군인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목숨을 걸고 결사적으로 이스라엘군과 싸워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게 되자 의외로 순순히 투항해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군의 경우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2차대전 중에 겪었던 홀로코스트와 같은 끔찍한 상황으로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하였고 이런 병사들간에 정신 자세의 차이는 일단 아랍 진영 군인들이 수세에 몰리게 되자 무력한 항복이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랍 진영의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참전국의 지도자들조차 이웃 동맹국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인해서 아랍군들의 단결력이 점점 와해되가고 있었습니다.
뭘 해도 이기는 이스라엘군
12월 5일에서 7일까지 3일간 네게브 지역 서쪽을 점령하기 위하여 아싸프 작전을 개시하는데 선봉은 기갑부대였고 이어서 골란 여단이라 불리는 보병 부대가 뒤를 따랐습니다. 이집트군은 이스라엘군의 진격에 대항하여 반격을 시도했지만 2회에 걸쳐 실패하였는데 두번째 실패의 경우는 이집트군의 움직임이 이스라엘 공군 정찰기에 의해서 미리 간파당해서 선수를 빼앗긴 결과입니다. 이 작전에서 약 100명의 이집트군이 전사하고 5개의 탱크가 파괴되었는데 반면 이스라엘측 손실은 고작 5명의 전사와 30명의 부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2월 22일 이스라엘군은 남부 전선에 남아있던 이집트 군을 아예 몰아내버리기 위한 호레이 작전을 전개하게 되는데 네게브 지역 전체에서 이집트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이지역을 이스라엘군이 점령해버린다는 목표였고 이작전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이집트군들을 남부 국격 밖으로 몰아내게 됩니다.
(1949년 3월 움 라쉬나쉬 지역을 점령한 후에
잉크를 사용한 수제품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는
이스라엘군의 이 사진은 1차 중동전쟁의 가장
대표적인 사진들 중에 한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
일단 1월까지 남부 전선에서 전챙 초기에 이집트군에게 점령 당한 지역의 획복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지역을 점령하여 사실상 영토를 넓힌 셈이 된 이스라엘군은 1달간의 신중한 작전 계획을 거쳐서 3월에는 네게브 남부 지역(요르단 영토)을 점령하기 위한 야심찬 우이다 작전( Operation Uyda)을 개시합니다. 하지만 이미 이지역에서도 아랍군의 이렇다할 저항을 받지 않고 무혈 입성을 거듭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마을들을 점령해가게 되는데 이미 그동안에 이스라엘군의 강력한 공세로 대부분의 아랍군들은 이스라엘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퇴각을 해버린 것입니다. 드디어 3월 10일에 작전의 최종 목표인 홍해 근처에 있는 움 라쉬나쉬 지역에 도착한 이스라엘군들은 잉크로 만든 이스라엘기를 게양하면서 승리를 자축하였는데 이 순간이 사실상 1차 중동 전쟁의 종료를 의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영국을 적으로 만들다!
첫번째 오인 공격 사건
잠깐 1948년 11월에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이 그동안 침략군이었던 아랍군들을 동부전선과 남부,북부 전선에서 마구 밀어붙히고 국경으로 쫓아내기 시작하던 상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국 출신에 이스라엘 공군 지원 조종사 웨인 피크가 조종하던 P-51 무스탕은 갈릴리 지역 상공에서 영국 공군 소속 비무장 정찰기 드 하빌랜드 모스키토 (제 13 비행단 소속)을 만나서 격추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무스탕의 기관포는 목재로 만든 허약한 기체의 모시키토 전투기의 엔진부에 명중했고 순식간에 날개가 부러지면서 2명의 영국 공군 조종사들은 탈출한 기회도 없이 지면에 충돌하여 폭발해버렸습니다.
(1948년 11월 이스라엘 공군의 첫번째 오인 공격의 희생물이 된
영국 공군 소속 드 하빌랜드 모스키토 전투기)
두번째 오인 공격 사건
1949년 1월 7일에는 정찰 목적으로 마찬가지로 영국 공군의 4대의 스핏파이어 FRf8 (208 비행단 소속)가 정찰 비행 중에 불과 15분 전에 5대의 이집트 공군 스핏파이어가 공중 폭격을 했던 이스라엘군 수송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폭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인 이스라엘 군 수송 차량들을 발견한 영국 공군 편대는 사진 촬영을 위해 피폭 지역을 저공 비행으로 접근하였는데 이스라엘 지상군은 방금 끔찍한 이집트 공군의 폭격을 받은 후에 또다시 이집트 공군기가 폭격을 가하러 오는 줄로 잘못 판단하게 됩니다. 수송대를 호위하던 이스라엘군 셔먼 탱크 기갑병은 포탑에 장착된 기관총으로 접근하는 스핏파이어에게 사격을 가했고 사진 촬영 중에 방심하던 영국 공군기는 순식간에 연기를 뿜으며 지상으로 추락하여 폭발합니다. 두번째로 접근하던 스핏파이어는 다행히 경미한 타격을 입고 급히 고도를 상승하여 도망갔습니다. 추락한 정찰기 외에 살아남은 3대는 이번에는 이집트군의 폭격 사실을 무전으로 보고 받고 날아온 이스라엘 공군 소속 2대 스핏파이어와 마주치게 됩니다. 미국과 캐나다 출신 유태인 지원 조종사들이 조종하던 이스라엘기 역시 이들 영국기들을 이집트 공군기로 오인하고 즉각 사격을 가하여 3대 모두 격추되면서 한명의 조종사는 전사하고 둘은 부상을 입었지만 생존하게 됩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4대의 영국 공군기 중에서 몇대는 아예 비무장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수상 데이비 벤 구리온에게 이 오인 사격이 보고되자 그는 은밀히 이사건을 축소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영국군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고 분노하여 향후 영국 공군기가 이스라엘 공군기를 마주치는 경우 즉각적으로 공격을 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영국은 이스라엘과 전투 상황을 선포한 셈이었고 이스라엘에 체류하고 있는 모든 영국인들은 즉각 이스라엘 밖으로 나올 것을 권고하게 됩니다.
(1949년 1월 이스라엘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한 영국 공군 정찰 편대
조종사들의 장례식 장면)
아랍군과 전투하기도 바쁜 이스라엘군에게는 엉뚱하게 당시에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들 중에 하나였던 영국과의 군사 충돌이 초 읽기에 들어간 것을 깨닫고 매우 당황하게 됩니다. 이스라엘군은 만약에 보복 공격으로 영국군이 이스라엘 공군기지를 공습하거나 아군기를 공격할 때는 반격을 한다는 지침을 내리지만 실제 2차대전에서 영국군이나 영연방 출신(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남아공....) 소속으로 참전했거나 영국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미군 출신 조종사들은 이런 상황에 반발해서 영국군과의 전투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공군기지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공군의 이스라엘 공군기와 교전이나 공군 기지 공격은 다행히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비록 만나면 싸운다는 지침은 있었으나 가능한 마주치지 않도록 서로 가까운 위치에서의 비행을 피했던 탓입니다. 다만 영국 외교부는 이스라엘 정부에게 이번 오인 공격에 대한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국제연합이 1948년 12월부터 시작한 이스라엘과 아랍간에 평화 협정의 논의가 진행되면서 흐지부지 끝나게 되는데 하지만 평화 협정의 합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도리어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군사적인 위협으로 인해서 아랍 진영이 더이상 침략을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 되어 주변 국가들은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영토를 일부 빼앗기는 손실까지 입으면서 전쟁은 일단 중지되게 됩니다.
전쟁의 결과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1차 중동전쟁의 규모와 양쪽 사상자의 규모, 간단히 말해서
개전초기에 이스라엘은 3만명의 병력이었으나 전쟁 종료 시점인 1949년 3월에는
12만명에 육박하는 대군으로 증가됩니다, 반면 아랍군은 개전 당시에 3만명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이스라엘 대비 크게 병력의 우위는 없었으나 대신 무기 면에서는
초기 이스라엘이 비교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개월 후
이스라엘은 병력은 물론 무기의 수준에 있어서도 아랍 전체 군사력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바뀌었습니다. 양쪽 전사자의 숫자를 합하면 14,000~20,000명이 넘는
규모에 이르게 됩니다.)
유일한 승자 이스라엘
전쟁의 결과를 가장 심플하게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결국 전쟁 전에 국제연합이 아랍인에게 준 땅의 일부도 이스라엘에게 빼앗겼고 당시에는 이스라엘도 아랍에도 속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지역은 아랍인과 이스라엘이 나눠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훨씬 늘어났고 아랍인은 줄어든 셈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구획안 대비하여 약 30% 이상의 땅이 더 생긴 것이고 팔레스타인(아랍인)은 국제연합이 애초의 줬던 실질적인 거주 가능 지역의 78%를 빼앗긴 셈입니다.
전쟁 종료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확인 받기 위해서 주변 국가들 (이집트,레바논,요르단,시리아)과 협정을 맺게 됨으로써 현대 이스라엘 개국의 골격을 세우는 작업을 끝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1차 중동전쟁은 그후 이곳에서 벌어질 혼란과 살육의 전주곡이었고 이제부터 사막의 바람을 뜷는 이스라엘군과 중동 국가들의 2차,3차,4차 중동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소수의 깡패 집단이나 식민지 보안대 수준의 조직들이 모여서 개국과 함께 군대라는 모양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리고 불과 몇달만에 12만명에 육박하고 최강 무기를 보유하고 게다가 주변 아랍 국가들의 젊은이와는 비교도 되지않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진 더이상 어느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ABBA 노래 중에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히트곡이 있습니다. 물론 ABBA 노래 가사의 내용과는 맞지 않는 스토리지만 이스라엘의 급성장으로 인하여 하룻 강아지로 보고 떼거지로 덤벼들었던 아랍 열국들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차라리 전쟁을 시작하지 않은 만 못한 상황으로 곤두박질쳐버렸고 불과 몇개월만에 만만치 않은 깡패 짱으로 커버린 이스라엘은 불과 1년 전까지만해도 갖고 싶어도 갖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단 한번의 전쟁으로 얻게 된 셈입니다. 중동에 돌아온 유태인의 국가는 앞으로 훨씬 더 커다란 혼란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살벌한 전쟁 얘기 말미에 아름다운 ABBA의 추억의 명곡 한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주문 해놓은 점심 식사가 나와버려서, 음식이 입으로 제대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흘리며 '괴물'의 완성과정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이제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겉으로는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전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학살이 숨겨져 있는 살육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탱크의 계보를 시작하기 앞서서 4차례의 중동전쟁 이야기를 끝내놓고 전개해나가려고 합니다. 제글이 여러 프라모델러들께 현대전 탱크와 전투기 사전 지식을 위한 좋은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제 게시판들이 효력을 발휘하게 될 때 많은 분들의 제작기 속에서도 고증에 관한 대화들이 포함될거라 믿습니다. 어차피 프라모델 취미는 역사속에 한장면을 우리 손바닥위에서 창조하는 취미이니까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12.06 14:5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12.07 00:46
잘봤습니다. 다음 글도궁굼합니다. 또한 모형세게의 스케일이 커지고 있습니다. 김작가님 덕분 입니다! ^^
감사합니다. 요즘 폭풍 제작기 잘 보고 있습니다.
형님은 어쩌다가 세계를 누비고 다니시게 된건지..... 그 거대한 그림자가 이제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글쟁이 본능이 보통이 아니십니다.저는 무식이 무기인 사람인지라
잡글들 쓰기를 좋아하는데...형님은 지식으로 무장한 산지식인지라 큰 산 같습니다. 모형에 키위맨형님이 있다면 그 지식의 산에 준만형님이 계세요. 우리 까페의 자랑입니다.
힘내서 재밌는글 쉬엄쉬엄 올려 주시고요..... 늘 별 도움 못되는 주인장이 마음속깊이 이게시판을 빛내주고 있는 형님을 좋아합니다.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천만에요.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항상 관심을 갖는 분야에 구덩이를 파듯.깊이 깊이 들어가서 발견한 정보를 마음대로 발췌하고 내 방식으로 정리 편집해서 올리는.글일 뿐입니다. 외국에 모델러 사이트는 고증에 대해서도 전쟁 역사에 근거한 깊이있는 토론들이 이루어지더군요. 그런 탓에 이런 글들을 올리는 것입니다.
미국이 돈이 없어서 그런지 동북아에 다시 괴물을 만들어 통제를 하려는것 같아 좀 걱정스럽습니다.
허! 그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