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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기종 | 스핏파이어 | P-47 썬더볼트 | P-51 무스탕 | F-80 슈팅스타 | 미그-15 | F-86 세이버 |
최대 속도 | 605km/h* | 697km/h | 703km/h | 965km/h | 1,033km/h** | 1,091km/h** |
* 스핏파이어는 가장 많은 숫자가 생산된 Mk. V 기준
* 세이버와 미그-15의 최대속도는 5,000m~7,000m 사이에 고도에서 측정한 속도임.
위에 표는 몇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 프로펠러 전투기와 제트 전투기의 속도의 차원은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미그-15가 한반도 상공에 등장했을 때 이를 상대해야 하는 P-51 무스탕 전투기 조종사들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의 공중전을 해야 했는가는 최대 속도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똑같은 제트 전투기이지만 후퇴익이 아닌 1자형 주익을 사용한 슈팅스타조차도 후퇴익의 세이버와 미그-15와 무시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1자익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F-80 슈팅스타는 록히드社가 제작한 최초의 제트 전투기입니다. 하지만
1자익의 채택은 성능의 한계를 자초하여 매우 짧은 활동 기간을 기록하고
세이버 전투기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세째, 세이버와 미그-15는 최대 속도만 놓고 봤을 때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라이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누가 진정한 강자인가는 좀 더 아래 설명을 진행하면서 답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왜??? 세이버와 미그-15는 비슷하게 생겼을까요?
세이버 전투기와 미그-15 전투기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설계되고 생산되었지만 이상하리만큼 그 모양이 비슷합니다. 그 이유는 후퇴익을 적용한 이 두 전투기들의 설계가 동일한 원형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2차대전 루프트바페의 최초의 제트 전투기 Me 262의 뒤를 이을 차세대 제트기는 포케불프(Fw 190 생산 회사로 유명하지요.)가 개발 중이던 Ta 183의 설계도를 입수한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 후퇴익 전투기의 원형으로 삼아 세이버와 미그의 설계를 시작한 것입니다.
(포케불프 Ta 183 도면, 나치는 이 차세대 제트 전투기를 풍속 시험용 모형까지
만들었을 때 독일이 항복을 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미국과 소련은 후퇴익 연구
자료 일체를 손에 쥐게 되었고 결국 냉전 시대 양대 강국은 제트기 연구에 있어서
동일한 출발선에서 경쟁을 시작하게 된 셈입니다.)
(Bf 109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루프트바페의 주력 전투기 Fw 190을
설계했던 포케불프社에 쿠르트 탕크는 Ta 183을 개발하는 도중에
독일이 패망하자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여 후퇴익 제트기의 개발을
아르헨티나 공군을 위한 전투기 개발로 이어가게 됩니다. 위에 도면은
시제기 제작까지 마쳤던 아르헨티나 공군의 Pulqui II입니다.
아르헨티나는 개발까지 완료된 이 세계 최초의 후퇴익
전투기를 생산하기 위한 충분한 생산 능력과 자금이 부족했던 탓에
양산 단계 직전에서 프로젝트를 취소해버립니다. 탕크 교수는 1960년대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메서슈미트社에서 연구를 이어갑니다.)
(1951년 북한 공군 미그-15)
한국전쟁 - 미그-15와의 숙명의 대결
세이버는 1949년 미공군 제1 전투 비행단 소속 제94 편대에 첫 배치가 되면서 공식 전투기로 등록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공군은 우선적으로 세이버보다 일찍 미공군에 배치되었던 1자형 주익의 제트 전투기 F-80 슈팅 스타과 F-84 썬더 제트를 P-51 무스탕과 함께 한반도에 공군 임무에 투입했습니다. 전쟁 초기에 하늘에서는 북한 공군의 야크 3, 야크 9 그리고 야크 11과 같은 소련제 프로펠러 전투기를 상대로 미공군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해 11월 은빛 찬란한 후퇴익의 미그-15가 등장하자 당시 전쟁에 투입된 미공군 전투기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이 신형 제트 전투기에게 우위를 점할 수 없었습니다.
11월 1일 최초로 압록강 너머 중국 영토에서 날아오는 6대의 미그-15를 발견한 P-51 무스탕은 기체가 중국 공군 마크로 되어있어서 중국 공군의 전투기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 미그기는 스탈린의 소련 공군에서 북한 김일성의 붉은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지원해준 전투기들로써 최고 실력의 소련 공군 조종사들이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미그-15가 등장한 후에 미공군의 전투기들은 물론 천하 무적의 폭격기로 명성을 얻고있던 B-29조차 미그의 공격에 격추되는 손실을 입게 됩니다.
("슈퍼 포트리스"(超 공중요새) B-29 폭격기. 일본 원폭 투하 폭격기로 유명한 무적의 폭격기는
한국 전쟁에서 공산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미공군은 서둘러 본토에서 F-86 초기형으로 구성된 3개 편대가 한국 전쟁에 투입되기 위해서 도착합니다. 1950년 12월 13일 제4 전투요격 비행단에 배치된 최초의 세이버 전투기들은 압록강 서쪽 상공에 미그 통로(MiG alley)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12월 17일 최초로 미그 사냥에 나섭니다. 일부러 미그에게 당시 "호구"로 찍혀있었던 F-80 슈팅스타 편대의 대형으로 비행을 하였고 위장 무선 교신으로 미그를 유인했습니다. 이런 유인 방법이 통해서 만주 중공군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미그 편대가 출현하였습니다. 세이버와 미그의 첫 공중전에서 미공군 브루스 힌턴 소령이 최초의 미그 격추 기록을 세우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최초의 미그 격추 기록을 세운 미공군 브루스 힌톤 대령(좌))
한국전쟁 공중전의 클라이맥스 - 미그 앨리 (MiG Alley)
1953년 7월 휴전까지 평안북도 평안북도 청천강 이북에서부터 압록강 이남 사이의 좁은 지역에서 세이버와 미그의 격렬한 공중전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처음 전장에 출현한 공산 측의 미그-15는 소련 조종사들이 중공군 복장으로 조종하고 있었고, 기체에는 북한 공군 마크를 그렸던 것은 소련군 공식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후 1951년부터 중공군 소속 미그도 한반도 상공에 출격했고, 1952년부터는 북한 공군 소속 미그도 간간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산 측 공군의 주력은 사실상 정체를 숨기고 있던 소련 64 전투 비행단이었습니다.
공산군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비밀리에 투입한 소련 공군 조종사들이 노출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기본적으로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 좁은 지역에서만 주로 활동했습니다. 미군 공군 기지가 위치한 일본이나 한반도 38선 남쪽을 공격할 의지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도 압록강 북쪽 중국 영토 내의 기지는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제3차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산군들은 중국 영토 내인 만주에 자리잡은 안전한 성역에 기지를 두고, 미군기들이 압록강 부근으로 출동할 때만 이륙해 요격을 시도하곤 했습니다.
(위에 원형에서 압록강 이남 지역이 미그 앨리라 불리면서 세이버와 미그의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지던 지역입니다.)
결국 미국의 폭격기와 전폭기들은 북한 전역에 폭격을 감행했으나, 양측 전투기끼리의 공중전은 오로지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의 좁은 지역에서만 주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 기묘한 공중전이 벌어지는 지역을 ‘미그기의 통로(MiG Alley)’라고 불렀습니다.
(미그 앨리라고 불리는 지역의 상공에서 벌어진 세이버와 미그의 공중전)
미그 앨리에서는 수십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뒤엉켜 수시로 격렬한 공중전을 벌였다. 전투는 대부분 공산 측의 미그 전투기가 속도가 느린 미국의 B-29 같은 폭격기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세이버와의 공중전으로 넘어가게 되곤 했습니다.
미그는 미공군의 폭격기만을 노릴 때도 있었고, 주변의 세이버와 같은 호위용 전투기를 먼저 공격할 때도 있었습니다. 공중전의 규모는 비교적 커서 1951년 5월 20일에는 세이버 36대와 미그 50대가 미그앨리에서 격전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한국 전쟁 중에 미그-15에 격추된 미공군 91 폭격 비행단 소속 B-29 폭격기의 잔해)
1951년 6월 22일부터 공산 측은 폭격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세이버 전투기와의 공중전을 노리고 출격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미 공군은 1951년 말에는 무려 100대가 넘는 미그 대편대가 미그 앨리에 동시에 출현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에 발표한 미국의 공식 전사에 따르면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F-86은 MiG-15 792대 혹은 793대를 격추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미국이 제공작전 중 손실한 전투기의 수는 직접적인 공중전에서 격추당한 58대를 포함해 총 79대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공식 전과는 무려 1대10의 비율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냉전 종식 후 소련군 출신 참전자들이 미 공군의 전과는 과장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자들의 논문이나 참전용사들의 개별 증언으로 공개된 구소련 측 주장을 요약하면 소련 공군의 손실은 335대이고, 전과는 전투기를 이용한 격추만으로 1097대라고 돼 있습니다.
(미공군 존 글렌 소령의 세이버 전투기와 미그-15가 공중전을 시작하는 상황을 그린 그림.
글렌 소령은 전쟁중 3대의 미그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세울 뿐만 아니라 훗날 60년대 미국
우주 비행사로 미국 국민들에게 영웅이 된 인물입니다.)
중공군 측 공식 기록에 나오는 주장으로는 미군기 330대 격추, 95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돼 있습니다. 자신들의 피해는 피격 항공기 231대, 손상 입은 항공기 151대라고 설명하면서 어디까지가 격추된 사례인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구소련과 중국의 전과 주장은 전투기와 폭격기를 합산한 수치이고, 미국 측이 밝힌 내용은 전투기 손실이어서 직접적인 비교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미국이 실종 조종사 탐색 차원에서 2000년대 중엽 이후 공식 공개한 한국 전쟁 당시 미 공군 손실 전투기 목록을 보면 세이버 기종만 215대에 달하였습니다. 전투·비전투 손실을 어떻게 구분할지, 모순되는 자료를 어떻게 평가하고 연구할지에 따라 앞으로 전과에 큰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연구자들이 러시아 국방성 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자료들을 보면 소련 64항공군단도 예하 사단들의 전과 보고를 의심했습니다. 심지어 “과장 보고는 범죄적 태만”이라고 표현한 사례도 발견될 정도였습니다. 소련군 전과도 과장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중공군의 전과도 예전부터 과장으로 유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기록들만 보더라도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대부분 세이버가 미그에 우세를 점했다는 점에는 소련이나 중공도 이의를 달기 쉽지 않은 사실입니다. 특히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미공군이 한반도 상공에 제공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은 굳이 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의 기록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세이버는 미그보다 강할 수 있었을까?
미그-15에 대해서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은 당시에 냉전시대 개막과 함께 공산진영의 맹주였던 소련은 미국 못지않게 우수한 항공 지식과 기술이 축적하였고 후퇴익의 경우 미국이나 소련 모두 똑같은 나치 독일의 "참고서"를 가지고 만든 제트 전투기가 세이버와 미그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기간 중에 이 라이벌의 대결에서 세이버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을까요??.....
첫번째 이유는 조종사들의 훈련의 차이였습니다.
미공군의 세이버의 경우 상당수가 2차대전 말기에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비록 프로펠러 전투기였지만 실전 경험을 쌓은 조종사들이 포함되었고 실제 조종사 훈련 면에서도 미그를 조종했던 소련,중공 그리고 북한 공군 조종사들보다 훨씬 우수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에 미국 본토에서 F-80 슈팅스타로
제트 전투기 비행 훈련을 받은 미공군 조종사들)
두번째 이유는 미군 조종사들이 정신력 면에서도 적들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공격적이었습니다.
미공군 지휘부는 가능하면 불필요한 교전으로 아군 세이버 전투기의 손실을 피하도록 "교전 수칙"을 만들어서 조종사들에게 준수하도록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자부심이 충만한 대부분의 미공군 조종사들은 미그가 발견되기만 하면 먼저 공격을 하여 격추시켰고 심지어 세이버에 탑재된 교전 기록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서 없애버림으로써 상부로부터 교전 수칙을 위반했다는 증거를 없애버리는 조종사들의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이런 정신력의 근원은 2차대전때 미공군의 전신인 미육군 전투 비행대(USAAF)에서부터 P-51 무스탕,P-47 썬더볼트 그리고 P-38 라이트닝 전투기들을 조종하였던 선배들이 유럽과 태평양 상공에서 당시 유럽 최강의 루프트바페 조종사들과 대등한 공중전을 벌이면서 시작된 자부심과 자신감의 결과였습니다. 반면 소련은 2차대전 내내 루프트바페 에이스들이 엄청난 격추 기록을 수립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호구"였고, 중공과 북한의 공군 조종사들은 충분한 경험을 가질 수 없었던 일천한 역사의 공군들이었던 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세이버 전투기가 비록 초기에는 미그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성능의 열세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등하거나 더 뛰어난 성능을 가지면서 미그와의 성능의 차이는 확연하게 벌어지게 됩니다.
1953년 F-86E 세이버의 등장은 음속 돌파에 있어서 당시 미그-15에 비해서 훨씬 안정적인 성능을 보였습니다. 반면 미그는 그때까지도 마하 0.92에 이르렀을 때 불안정한 비행을 보였는데 이런 최대 속도의 차이가 가뜩이나 우수한 실력의 미공군 조종사들이 본격적으로 미그를 제압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F-86E형이 미그를 압도하는 획기적인 발전의 예는 바로 이때부터 레이더와 컴퓨터가 연동하는 거리 측정식 조준 장치를 장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써는 놀라운 성능인 최대 1,300 미터 앞에 목표물을 조준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공대공 미사일이 아직 없었던 초기 제트 전투기들의 경우 공중전의 방식은 기관총과 기관포 사격에 의존하는 프로펠러 전투기 공중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다만 전투기의 속도만 훨씬 더 빨라졌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조준장치는 세이버 전투기가 더 많은 숫자의 미그를 격추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한국 전쟁 초기에 미그에 성능면에서 열세라는 사실이 처음 알려지자 노스아메리칸社는 즉각적으로 미그-15를 압도할 수 있는 엔진(J47-GE-27)을 개발하여 탑재하여 보다 강력한 파워를 확보하는 한편 주익의 설계를 변경 (끝부분을 3인치 길게, 앞부분을 6인치 길게 연장)한 결과 기동성을 향상시켰습니다. 결국 중고도 이상의 고도에서는 미그-15에 비해서 전혀 뒤지지 않는 성능을 갖게 되었는데 새로운 주익을 가리켜서 조종사들은 "6-3 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F-86F가 등장한 이후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그-15는 더 이상 세이버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대 이상의 적기(미그와 그외 적기들)를 격추시킨 미공군 조종사는 모두 11명입니다. 전원이 F-86 세이버 전투기 조종사들이었으며 그들이 격추시킨 적기의 대부분은 미그-15였습니다.
프로펠러 전투기의 공중전이 주종이었던 2차대전 중에는 100대가 넘는 격추 기록을 갖고 있는 루프트바페 에이스들이 수두룩했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왜 그런 격추 기록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공중전에 있어서 2차대전때와 교전 방식이나 조건이 전혀 틀렸습니다. 2차대전 때는 서부전선에서 "나 잡아잡수"라고 주간에 수십대씩 등장하는 연합군 폭격기들이나 동부전선에 눈 먼 "호구" 소련군 조종사들이 나타나서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의 격추 기록을 급상승시켜주었습니다만 한국전쟁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고, 전쟁의 기간이 어쨌든 2차대전 기간보다 짧았고 교전 횟수도 훨씬 적었던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었지만........ 추가로 교전에 나서는 세이버나 미그 모두 정말 한대 격추시키기 쉽지 않은 무지하게 빨라진 속도의 제트 전투기이다보니 불과 2~3년 되는 기간동안 조종사 한사람이 적 제트 전투기 10대 이상을 격추시켰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세이버 전투기는 엔진뿐만 아니라 다양한 개선을 거듭하면서 발전된 후속 버전을 개발합니다. 특히 아래 "세이버 패밀리"의 가계도를 보면 F-86D/G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세이버 전투기의 의미
1세대 제트 전투기에서 2세대 제트 전투기로 넘어가기 전에 F-86 세이버는 비록 2차대전 당시 프로펠러 전투기들간의 전투처럼 기관포와 기관총을 위주로 하는 공중전의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마하에 이르는 엄청난 속도로 교전을 하는 제트 전투기 시대의 성공적인 첫 걸음을 내디딘 기종이었습니다. 후에 60년대부터 베트남과 중동의 하늘 위에서 본격적인 공대공 미사일 위주의 공중전을 주도하는 팬텀, 미그 후속 버전, 미라쥬 전투기들과 같은 차세대 전투기들은 전혀 새로운 양상의 전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후 대한민국 공군과 세이버 전투기
1950년 전쟁 발발 직후에 미국은 대한민국 공군에게 P-51 무스탕 전투기를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전쟁 기간 내내 공산측 미그와의 대결은 미공군의 세이버가 맡아서 해왔습니다. 하지만 전쟁 후에 우리 공군도 세이버 전투기를 미국으로부터 인수 받아서 자주 국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됩니다.
(F-86D 세이버는 상당히 대폭적인 설계 변경으로 얼핏 봐서는
F-86A나 F-86E/F가 주익의 사이즈 변경은 있었다고 해도 쉽게
외형상 구별하기 어려운 반면 F-86D는 확연히 바뀐 모습이었습니다.
F-86A/E/F가 주간 전투 중심의 사양이었던 반면 F-86D는 기수에 야간
전투를 위한 레이더 돔을 설치하여 야간 폭격 기능을 강화하였습니다.
실제 F-86 다른 기종들보다 기체의 크기도 커지고 공용 부품이 고작
25%밖에 안되는 "별종"이었지만 그리 성공적인 기종은 못되었습니다.)
(F-86D는 캐노피 구조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대한민국 공군은 1955년부터 40대의 F-86D를 도입했으며, 이후 북한공군이 IL-28 경폭격기를 도입하자 야간 폭격을 막기 위하여 F-86D가 추가로 도입되었습니다. 단 F-86D는 더 뛰어난 전천후 요격기인 F-4가 도입되면서 일찌감치 퇴역했습니다. F-86D에 적용한 마이티 마우스 공대공 로켓용 사격관제시스템은 성능이 불안정하고 비용에 비해서 성능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성공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공군도 F-86D를 운용하였습니다.)
반면 F-86F는 F-4, F-5가 도입된 이후로도 지상공격기로 80년대까지 꾸준히 쓰이다 서서히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미그-15, 17과 유사한 비행특성을 가지고 있다 보니 가상적기로는 쓸만했고, 그래서 90년도까지 소수가 운용되다가 퇴역했습니다.
(대한민국 공군 F-86F 세이버)
(우리 공군의 F-4 팬텀 전투기 도입은 한국전쟁에서 최고의 영웅이었던 세이버 전투기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멀어져가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세이버는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제공권
장악에 있어서 절대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활을 수행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1964년 당대 최고 스타였던 신영균,최은희,최무룡,남궁원 주연의 "빨간 마후라"
이영화의 소재가 바로 한국 전쟁이었고 F-86F 전투기가 등장합니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전체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더군요.... ^^)
(1964년 "빨간 마후라"(신상옥 감독) 클라이맥스 부분 - 앞에 1분 정도 건너 뛰면 공중전이
시작됩니다. 지금부터 50년전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꽤 웰메이드 전쟁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대한민국 공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 비행단이었던 제 10전투비행전대가 실제로 수행했던 작전들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극화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52년 1월 15일 단행됐던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입니다. 평양 대동강 동쪽 10Km 지점에 설치된 승호리철교는 전쟁기간 중 북한군이 중동부전선으로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요충지였습니다.
당시 우리 공군은 F-86 세이버가 아니라 P-51 무스탕을 조종하였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세이버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실제 승호리 철교 폭격을 맡았던 미공군이 수십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고 그 임무가 우리 공군에게 넘어오게 됩니다. 작전 책임자였떤 김신 대령(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은 미공군의 고공 폭격 방법이 이 경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저공 폭격을 시도하였습니다. 너무 저공인 탓에 폭격 후에 폭발한 폭탄 파편이 기체 하면에 박힐 정도의 위험한 시도였지만 우리 공군의 독자적인 작전은 성공하게 됩니다. 실제 대한민국 공군 전사에 빛나는 작전을 실화로 영화화한 이 작품은 당시 공전의 히트를 치며 흥행에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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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모델이 세이버와 미그인데 김작가님께서 글을 올려주셨네요 저도 세이버의 뜻을 이제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요 ㅠㅠ
세이버는 매끈한 멋이 있고 미그는 뚱뚱하지만(?) 나름대로 멋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세이버 매일 퇴근할 때 마다 봐요 세이버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지나 다니거든요 그래서 더욱 친숙한지 모르겠습니다.
동영상 자료까지 해서 잘 봤습니다. 김작가님 화이팅~~~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주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네요. 하지만 꾸준히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제 작품이 자주 김준만님 글에 출현을 하네요. 부끄럽습니다.^^
세이버의 뜻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이렇게 개발사등을 알아가는것도 모형하는 재미이고 도움이되지요.
잘 읽었습니다.
항상 키위맨님을 비롯한 핵심 고수님들의 작품은 정말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미국의 주거 환경은 겨울에 실내 기온이 워낙 춥다보니 모델링 작업보다 따뜻한 방에서 자판 두들기는 일에 더 매진하게 되네요. 요즘에 휴머니스트님의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 반성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