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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빈교회20년사 자료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성빈교회의 20년
(1) 여명기
달란트회와 성빈회
해방 이후 한국교회사의 얼룩진 역사인 1959년 한국 장로교의 양대 교단(통합, 합동)으로 분열된 10여 년 후 계명대학 운영권을 둘러싼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측) 경북노회의 분규가 한창이던 1970년대 초 그 소용돌이의 현장인 계명대학에서 신학과 교회에 관심 있는 소수의 학생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들이 <달란트회>를 조직하여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바람직한 교회상을 꿈꾸던 중 1974년 유신독재 정권 체재하의 민주화 투쟁과정이 간간이 전개되던 즈음 암울한 시대를 바라보고 좌시할 수 없어 기독 청년들로서 그 당시의 가두시위 방식이 아닌 매주 화요일에 있었던 교내 채플 시간 중 달란트회 주관으로 10월 23일 구국기도회를 가졌는데, 그것이 연유가 되어 달란트회가 강제 해체되었다. 학교 당국으로선 문교부와 정보기관의 사주로 도리가 없었겠지만 그 당시 경북노회 분규의 계명대 측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명해 온 달란트 회원들의 주된 의견들이 재단(학교)측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일 수도 있었다.
당시 지도 교수였던 교목실장(이후 한국신학대학으로 옮김) 이장식 목사가 지어준 <성빈회>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달란트회는 순수한 신앙과 신학을 표방하며 개혁적인 교회를 꿈꾸며 연구와 기도를 계속하며 학교 내에서 학교 밖으로 나와 대구 제일교회에서 성경공부를 계속해 오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참 교회상을 구상하였다. 현 교회가 소홀히 하고 있는 대사회적인 사회사업 센터 역할을 염두에 두고 성빈 양로원, 성빈학교, 성빈학사(学舎), 성빈재활병원 등을 건립하기 위해서 회원 각자가 각기 처한 곳에서 십일조를 모아 적금하기로 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의 모범을 구현하기로 하였다. 당시 회원들의 기금으로 신학공부를 해서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김제민 형제가 교역자로 봉사하기로 하고 1980년 1월 첫 주일을 교회 창립일로 정하고 예배 처소를 위해 1979년 6월 6일 김호희 형제 결혼식 날 건축헌금을 작정했다.
당시 회원들은 대부분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이었고, 일부 회원들은 졸업을 해서 교사로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긴 했지만 큰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상당한 어려온 형편이었다. 그러나 매년 여름과 겨울에는 정기적으로 수련회를 열어 성경 연구를 통해 미래 교회를 위한 자질 함양에 정진해 왔으며, 기도용 회원 패넌트를 제작하여 탁상용으로 사용했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서정욱 형제가 작사작곡한 성빈회가를 제창하기도 했다.
성빈회가
(1절)
젊을 때에 부름 받은 한 거룩한 가난의 무리
진리 사랑 높은 뜻을 생명 걸고 따르려 하네
(2절)
어두워진 이 세상서 우리 할 일 그 무엇이랴
십자가의 복음 위해 용맹하게 싸우려 하네
(후렴)
주 예수 우리 회장 그의 길 우리의 길
기도로 굳게 뭉친 성빈 동지회
1973년 달란트회로 시작된 이래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일부 회원들의 견해차로 교회 창립에 적극 참여하지 못함으로 사기가 저하된 채 교회가 시작되었다.
1980년 1월 교회창립에 즈음한 설립 취지문에 그 당시의 미래를 향한 교회상이 표현되어 있다.
1. 우리는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한다.
2. 우리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따라서 신앙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 하며 역사화 한다.
3.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신앙의 인물을 기르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그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 줄 수 있도록 힘쓴다.
4. 우리는 하나이 되라 하신 예수의 뜻을 따라 교파주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과 자유로운 교제를 가짐으로서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한다.
5. 우리는 가난한 민중과 함께 아픔을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
6. 우리는 진리를 거스리는 교권, 정권, 그리고 어떠한 세력에도 과감히 싸울 것을 선언한다.
7. 우리는 어느 시대에서나 교회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출애굽을 감행한다.
8.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둠의 세력이 지어내는 모든 죄악을 향하여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며 사회정의를 외친다.
9.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나 평등한 백성임을 믿으며 어떠한 차별도 배격한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는다.
1980. 1. 6
창립예배
성빈교회 주보 제1권 제1호 성빈회 일부 회원들의 소극적인 참여가 있었으나, 남은 회원들을 중심으로 각고의 노력으로 대구시 동구 신암동 4구 333-1번지에 위치한 이층 약 25평에 사택용 방 2칸을 포함해 예배당을 계약금 100만원을 지불하고 전세 600만원에 계약하고 1980년 1월 6일 오후 3시에 80명이 모여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주로 성빈회원들의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이었고 성빈회의 고문이었던 구의령 선교사(William A. Grubb)가 ‘새로운 공동체’ 제하의 설교를 하였고 2년간 당회장으로서 성례전을 담당했다. 기도는 노의령 선교사, 축도는 계명대 교목실장 최성찬 목사가 맡았다. 특송으로 성빈회원들의 성빈회가 제창이 있었다. 조원제 선생이 경과보고를 할 때는 감격의 눈물을 흘려 참석 교우들의 눈시울을 또한 적셨다. 저녁 찬양예배는 7시에 10명이 모여 마 5:13-16을 본문으로 ‘세계 속에 선 성빈교회’ 제하의 담임 교역자인 김제민 전도사의 첫 말씀이 선포되었다. 첫 주보의 교회 소식란에는 “헌금은 모든 인간적인 사고를 배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고려하여 헌금함을 사용합니다”라고 안내되어 있었는데 그 관행이 오늘날까지 지켜왔고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몇몇 교회에서만 시도되고 있어서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모범이었다고 여겨진다.
성빈(聖貧)의 의미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마음이 가난한 자’이며 이는 아무나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에 속한 것으로 교회가 국가 사회를 위하여 믿음으로 봉사하고 살겠다는 사람의 마음이며 곧 예수님의 삶과 마음이 성빈이라고 이장식 목사는 이름이 지어진 동기를 밝혔다
초기 교인 구성
창립 멤버들의 인맥을 통해 피라미드식으로 성빈교회의 주춧돌이 된 교우들이 기억난다.
김호희 선생(현 미국 나성성빈교회 목사)의 신학교 친구인 위한규 집사(현 YJ유통 대표)가 서울에서 대구로 와서 창립예배 전에 교회당 커튼을 설치해서 안온한 예배 분위기를 창출했다. 그 이후 위 집사는 커튼, 방석 등을 수시로 교체할 때마다 도맡아 헌물했으며 복현동 성전 건축 완공 때까지 초대 건축위원장이었던 고 김원석 장로에 이어 건축위원장을 맡았다.
김상환 선생(현 캐나다에서 목회사역 중)은 대명동에서 노모를 모시고 예배에 참석했으며 약혼자인 이순천 선생은 영주 동산여중 교사로 있으면서 십일조를 보내왔고, 두 처제(이승옥, 이동순)들도 고등부 예배에 출석시켰으며, 김경민 그리고 영주 동산교회 김 장로님 자제들인 김신선, 김신애, 김의태 삼남매들도 출석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경민(현 대구YMCA 사회부장)은 성빈교회 최초의 고등부 학생이었다.
정재열 선생(현 영남신학대학 신대원 재학)은 당시 문경 동로중학교 교사로서 교회 창립 이후 동생 정재기(당시 영남 신학교 재학)를 참여시켰고, 이듬해부터 정재기 전도사가 교육전도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또한 종제인 정재용(심혜숙) 집사, 정재화(녹원교회 사모), 정석주(포항여고 교사) 남매가 출석했다.
군복무 중이었던 서정렬 선생(현 대전신학대학 교수)의 동생 서순향은 동산병원 간호사로 있으면서 동료, 후배들을 인도했고 그 중 석명자 양은 김상환 선생이 인도한 김상일 선생(당시 계명대 직원)과의 결혼으로 성빈교회 CC(Church Couples) 1호가 되었다.
이승렬 집사는 포항 영일고 교사로 있으면서 매주 대구로 와서 첫해 주일학교에 봉사했고, 이듬해 대구 동국고로 직장을 옮겨서 학급 학생들을 교회로 출석하게 하여 몇몇은(박창욱, 박종식, 손장호 등) 학생회 임원직까지 맡았다.
성빈교회 배가운동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조원제(김신애) 집사는 모친 홍위숙 권사와 쌍둥이 두 딸(은래, 안래)과 함께 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 당시 선산 장천 오상고에서 영천 금호고로 옮겨 교사로 있으면서 동료 교사들에게 어떻게 감동시켰는지 성빈교회의 사업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구제사업에 일익을 담당하여 백미 20Kg씩 매달 헌물한 무명의 교사들도 있었다. 또한 조 집사 친구 신태문 집사(동심교회)도 물심양면으로 참여했다. 또 잊을 수 없는 선배는 중앙교회 이태길 집사(현 미국 거주)인데 강대상 밑바닥(단상)을 나무로 목공 작업하며 집에서 쓰던 난로 등 집기들을 가지고 와서 큰 힘이 되었다.
최순홍 선생은 영일 장기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건축헌금을 보내왔고, 동생 최유화 선생은 충남 보령, 아산 등지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십일조를 보내왔으며, 최신한 선생(현 한남대 교수)은 군 복무 중에 있었다. 그 부모님인 신광교회 최칠석 장로(박남순권사)로부터 그리고 신광교회 여전도회로부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박승호선생(현 서울여대 교수)은 서울대 대학원 재학 중에 김필연 집사와 그녀의 딸 이문옥(현 서울가톨릭대 교수), 이문숙 자매들을 통해서 헌금을 보내왔고 박승호 선생은 첫해 오르간(리드)을 기증하기도 했다.
초창기 교인들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담임 교역자인 김제민 전도사의 가족들이었다. 고 김원석 장로와 손순희 집사 그리고 김전도사의 동생 김경애 선생이 멀리 군위 우보에서 매주 예배에 참석했다. 대전의 누님 가족과 동생인 부산 온천제일교회 김성애 사모, 봉화에서 교사로 있었던 김현애 선생으로부터도 헌금이 왔다. 김 전도사의 친구로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던 김광수 집사도 오랫동안 헌금을 보내왔다.
그리스도교 신학대학 유춘락 선생, 한국신학대학 이장식 교수(현 케냐 장로교 신학대학 교수 선교사), 계명대 김태한 장로(현 명예총장)로부터 늘 관심과 지도 그리고 헌금도 보내 왔다. 김 전도사 신학시절 봉사하던 서울 효동교회(유부웅 목사 시무)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헌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당시의 교회 활동은 개척교회 이층 상가건물이라 지역주민들이 안온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찾아오는 형태보다 담임 교역자의 대외적인 활동을 통한 사회선교의 역할이 큰 몫을 차지했다. 이현공단 야간학교의 교사 수련회를 본 교회에서 담임 교역자가 인도했고, 대구지역 한국기독학생연맹(KSCF) 수련회 장소로 교회를 개방했으며, 대학생선교합창단 성경공부 지도를 담당하는 등 대외활동을 통해서 성빈교회를 찾는 타 교회 소속 교우들이 상당히 많았다. 대구제일교회 청년회장을 역임한 담임교역자의 인맥으로 많은 청년들의 방문과 헌금봉헌이 있었다.
교회운영위원회
장로교의 간판을 걸고 교회가 창립이 되었고, 협동장로 1명, 협동권사 1명, 서리 집사 5인을 제직으로 임명했지만 교인 전체 인원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폭넓은 의견 수렴을 학면서 교회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 교회운영에 관심이 있는 성도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교회운영위원회”를 매월 첫 주에 정기적으로 열었다.
제직임명 동의서 1호 교회운영회 청원서 1호 담임교역자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 직영 신학대학인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성빈교회의 교단 선택을 1981년 3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경북노회(3노회로 분립되기 전)에 가입하기로 결정을 함에 따라 통합 교단 직영 신학대학인 영남신학교에 편입학을 해서 학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성빈교회 태동 이전부터 신학적인간적 조언을 많이 받았던 이장식 목사께는 미안한 점이 있었지만, 초기 교인들의 정서상 통합측 교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선교와 봉사
성빈교회의 이름에 걸맞게 초창기부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서 왔는데 매월 마지막 주일은 구제주일(봉사주일, 선교주일)로 정하고 신암동 일대 빈민 가정들을 직접 방문하여 쌀 10kg 한 부대씩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이를 계기로 현재까지 도시빈민 가정들을 대상으로 구제해왔다. 1981년 성탄절 헌금은 평소에 돕던 열 가정과 배영석 청년을 위해 사용되었는데 배영석 청년의 형이 교역자를 찾아와서 울면서 우리 아버지가 나 몰라라 버린 제 동생을 제발 도와달라고 애원하면서 구제의 손길을 요청했었다. 1982년 1월 4일 안타깝게도 결핵으로 사망하여 교회에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아마도 그의 형은 하나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느꼈으리라.
이러한 구제 선교에 관심을 가진 국내외 성도들이 격려와 헌금을 보내왔다. 특히 미국에서 신윤옥 사모의 가족들을 통해서 그리고 동양선교교회에서도 계속 헌금을 보내왔다. L.A 소망교회 소망반 어린이들이 구제헌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또한 담임교역자의 활동으로 <갈릴리 선교회>를 조직하여 교도소 재소자들을 방문하여 상담하고 갱생보호 활동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선교회비를 작정하기도 했다. 그 후 미전향 장기수를 면담하면서 전도하던 일화를 자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김일성을 향한 일편단심의 믿음(?)을 우리들의 신앙과 비교하면서 측은한 마음과 함께 일면 그들의 돈독한 신념을 엿볼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부흥선교대회 팜플렛 1면 (1981.12.27-30) 부흥선교대회 안내장 (1981.11, 강사: 고영근목사) 1981년 당시 교회의 선교목표는 <1. 성인 교인 120명, 2. 모든 모임 다 참석, 3. 신. 구약 성경 한번 읽기 4. 1인 1명 전도>였는데, 예배 때마다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서 베드로가 설교할 때의 당시 120문도(사도행전 1:15)를 생각하면서 전도 목표수로 기도 제목으로 삼았다. 1981년 12월 27일에서 30일까지 고영근 목사(목민선교회 회장)를 강사로 부흥선교대회를 열었는데 “기독교인의 나아갈 길”이라는 책자를 비롯해서 문서선교로 당시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을 향한 호소력 있는 메시지로 알려져 있었던 분으로 유신 체재 하에서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던 예언자적인 목회자의 모범이었던 분이었다. 구제와 전도에 관한 에피소드 가운데 장기(신장) 이식 수술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지금도 감옥에 가라 하면 또 갈 수 있어도 장기 기증은 선뜻 내키지 않는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구제가 2등이라면, 전도는 1등이랄 수 있고, 순교는 특등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이고 고결한 신앙 수준을 강조했다.
성례전
초대 당회장이었던 구의령 선교사는 매년 한 차례 성례식을 집례했는데 1980년 4월 13일 최초로 입교 2명, 유아세례자 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981년 4월 21일 에는 세례 3명, 학습 6명 등 많은 학생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 당시 교육전도사로는 정재기(현 울산정자교회), 이태호 전도사가 각각 열성적인 봉사를 하였다. 1982년 이후로는 대구 동노회 북시찰장이 임시 당회장(오춘근목사, 류관선 목사, 엄광섭 목사, 구정학 목사)으로서 세례를 베풀었다. 1984년 2월 19일에는 세례 4명, 학습 17명이었고, 1984년 12월 2일에는 세례 6명, 학습자 4명이었다.
첫 임직식
1982년 1월 13일 공동의회에서 임시 당회장 오춘근 목사의 사회로 김원석 장로의 장로 취임과 홍위숙 권사의 권사 취임에 대한 가부를 묻는 투표에서 통과되어 1982년 2월 7일 오후 2시에 취임식을 가졌다. 이로써 명실공히 조직교회로 발전하게 되어 3월 노회 때부터 성빈교회 총대로 김원석 장로가 파송되었다.
(정리: 이승렬 장로)
(2) 건축기
성전 건축
1980년 1월 6일 교회창립 이후 동구 신암동 333-1에 이층 건물 약 25평을 전세 600만원에 있으면서 부채금 500만원이 미지불된 상태여서 부채 청산을 위한 특별헌금을 하는 등 도처로부터 약간의 헌금을 보내왔는데 1982년 “성전 건축을 준비하자”는 표어를 내걸었고 건축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원석 장로가 위원장을 맡았다.
1982년 1월 31일 제1차 건축헌금을 작정(1800만원)하고, 신암동교회당으로 부터 나와서(출애굽)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던 중 북구 복현동 376-8번지의 대지 140평을 새 성전 부지로 계약을 하였다. 1983년 6월21일 10시 기공식 예배를 드리고 황상필 장로(동촌제일교회)가 1층 시공을 맡아서 골조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9월 1일 김원석 장로의 갑작스런 소천으로 공사가 중단된 채 1층 골조공사만 된 예배당에서 입당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장례식은 노회장(老会葬)으로 임시당회장 엄광섭 목사의 집례로 행해졌고 군위군 우보면 선영에 모셔졌다.
새 성전이 비록 창문은 없었지만 우리 땅에 새롭고 넓은 건물이 만장 같았다. 고 김원석 장로의 소천으로 슬픔에 잠겨있던 성도들에게 더욱 결속력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 김원석 장로가 사용하던 성경 더욱 의지하게 하려는 섭리로 받아들이고 성전을 완공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1983년 6월 매입한 성전부지의 기존 초가집을 헐면서 김원석 장로, 위한규 집사, 이승렬 집사, 이진화 성도와 자장면을 먹으면서 김 장로님의 말씀이 성전 건축을 위한 일이라면 극단적으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보상금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애절한 소망 아닌 소망을 말하였다고 장례식 후 당시의 안타까움을 호소했다고 하니 과연 김 장로님의 성전 건축을 향한 열정에 고개 숙여진다.
그러나 당시 부채가 5,000만원에 달했는데 1983년 12월 제2차 건축헌금을 작정(6명 참여 1,400만원)하고, 1984년 3월 18일 제3차 건축헌금을 작정(2차 에 빠진 자들 참가, 350만원)하고, 1985년 5월22일 제4차 건축헌금을 작정(3,000만원)하여 1985년 12월에는 대지 부채를 청산하고 땅 등기 이전을 완료하기에 이르렀다.
할렐루야! 에벤에셀의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1986년 10월 지하 및 지상 1층을 준공하게 되었다.
과부의 두 렙돈
성빈교회 성전 건축의 핵과 같은 폭발을 일으킨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임입암 할아버지였다. 신암동 작은 토굴에서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한번은 교역자를 찾아와서 호주머니에서 꼬기 꼬기 비닐에 말아 보관해두었던 거금 5천원을 건축을 위해 헌금했던 미담은 그 이후 늘 설교에 예화로 등장되었고 들을 때 마다 감동을 주곤 했다. 1984년 4월 15일 칠곡 복음양로원으로 가셨는데 이를 계기로 후일 복음양로원은 여전도회의 방문지가 되었다.
1983년 대지를 계약할 당시 동노회 회기 중에 노회 석상에서 즉석헌금 128,380원을 비롯하여 노회 건축헌금 보조금으로 100만원이 결정되었고, 노회 상회비 면제 청원이 허락되었고 담임교역자가 동노회 산하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를 하고 호소를 하여 건축보조금을 후원받기로 허락을 받게 되었다.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기간 중 신광교회당에서 성전건축기금 마련을 위한 음료수 판매를 통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장식 목사, 김태한 장로, 서울효동교회(유부웅 목사 시무)로부터 건축헌금이 보내어 왔다. 고등부 출신 재경교우들, 충남보령 최유화 선생, 강원도 지태경, 대구제일교회 김경희 청년, 서울 최봉연 집사, 50사단 최성원 집사, 서울에서 최신한, 박승호, 이문옥 선생, 신광교회 윤학이 집사 형제, 신광교회 최칠석 장로, 박남순 권사, 이금애 권사, 신광교회 제1여전도회, 동문교회 권정순 집사, 남산교회 김동순 성도, 침산교회 정봉남 집사, 경주에서 정재기 전도사, 봉화(영주)에서 김현애 선생, 미국 시카고 김광수 집사, 이창모 집사, L.A 소망교회 신재순 집사, 신세정, 캐더린 김, 미국 동양선교교회 김재숙 집사 등으로부터도 건축헌금이 왔다.
1983년 10월 1일, 10월 3일 공휴일에는 교인들이 몸소 성전건축에 참여하기 위해 시멘트 질통을 지고, 또는 벽돌을 나르며 계단공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이 시멘트 한 포(당시 2,200원)를 헌물로 드리기로 해서 156포를 모금했다. 그 외에 오상연 집사는 유리 전부를 헌납하였고, 칠, 방석, 커튼 등(위한규 집사)을 그리고 종탑, 종, 성가대 가운(이수옥 집사), 성전 바닥공사(윤학이 집사 형제), 피아노(조원제, 서정욱), 난로(유정숙), 케비넷, 의자(서정욱, 정분예 집사, 김중희, 한영자 부부), 마이크(미국 신재순 집사) 등을 헌물로 드렸다.
성빈교회 성전건축과 선교에 큰 디딤돌이 된 것은 1984년 3월 선교유아원 개원이었다. 이명숙 집사(김기순 집사) 가정에게 교회를 평일에 유아원으로 임대 사용하면서 건축을 완공하는데 박차를 가하게 되면서 9월 23일에는 지하공사가 완성되어 선교유아원으로 활용하고 주일에는 교회 교육의 공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명숙 집사의 헌신적인 봉사로 많은 원아들이 선교유아원을 통해서 교회학교 유치부에까지 전도되었고, 믿지 않던 학부모들이 교회 출석을 하게 되는 역사가 있었다.
온 성도들의 기도와 아낌없는 헌금과 외지교인들의 성원과 헌금, 노회를 비롯한 각 교회의 관심과 지원뿐 만 아니라 특별히 친정이 미국에 있었던 신윤옥 사모가 교역자의 가정에서 작정한 건축헌금(2만불)을 감당하기 위해 3년간이나 가족을 떠나 미국에서 일하여 건축헌금을 드림으로써 부도 직전까지 갔던 교회건축을 완공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예배와 교육
창립예배 때 저녁예배에 10명이 참석하고 초창기에는 담임교역자가 수요예배 때 교인 한 명을 대상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힘 안 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시작은 심히 미약하나 창대케 되리라는 말씀과 같이 1980년 1월 20일 학생 1명을 시작으로 중고등부가 시작되었고, 아동 7명을 시작으로 아동부가 시작되었다. 1982년 1월 10일부터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새벽기도회는 1982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 1984년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교회창립기념부흥회(강사: 부산 목양교회 국동출 목사) 이후에 40일 특별기도회를 처음 시작하여 3월 30일 까지 참석자를 시상(13명)하기도 했다. 그 때 한 주간 연인원이 최고 180명이 될 때도 있었다. 초창기 구역예배는 대구 전역이 한 구역이었고 1985년 2월부터 금요구역예배가 다시 시작되었다. 송구영신예배는 1985년 1월 1일부터 시작했고, 금요철야기도회는 1984년 5월 25일 밤 12시부터 했다.
1980년 5월 전교인 첫 야외예배가 하양 강변에서 있은 후 해마다 이어졌다. 1984년 5월 6일청도 유천에서 있었다. 1984년 1월 29일 남선교회 창립총회가 있었고, 10월 21일 가족찬송가 경연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1984년 2월 19일 여전도회 첫 헌신예배가 있었고 철야기도회를 주도해 나갔다. 1984년은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는 해로써 전 교단이 통일 찬송가를 사용하게 되어서 1월 22일부터 일괄 구입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기념 선교대회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렸고 우리 교회의 표어도 “선교의 불길을 일으키자”(막 16:15)였다. 1985년 3월부터 담임 교역자의 장신대 목연과정 이수차 서울에서 학업중이라 수요예배 설교는 박만은 전도사가 대신했고 주간 심방도 담당했고 주일 교회학교 교육 전반에 걸쳐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담임교역자 목사 임직
영남신학대학에 편입학하여 졸업을 한 후 목사 안수를 위해 1985년 3월부터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1년간 목회연구과정을 밟은 후 목사고시를 거쳐 그간 교회 개척 당시부터 전도사로서 주일 설교를 담당해 오던 김제민 전도사의 영광의 목사 안수식이 1988년 3월 10일 목요일 오전 11시 신암교회당에서 열렸던 3월 정기노회 석상에서 성빈교우들의 기도와 성원으로 행해졌다. 전도사로서 명설교를 하였지만 주변의 전입 교인들이 출석했다가 축도를 못 받고 돌아가게 되는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이제 명실공히 목사의 직임이라는 날개를 달고 상승효과를 가지고 더욱 힘차고 심령골수를 쪼개는 말씀이 선포되어지게 되었다. 김제민 목사의 주례로 처음 행해졌던 결혼식이 안수 받던 그 주 토요일에 있었는데 성빈교회 초대 교인이었던 서순향 양의 결혼식이었다.
그동안 미조직 교회의 교역자로 교회법상 교회의 치리와 성례전을 베풀 수 없었으나 5월 22일 성령강림주일에 학습세례 10명, 유아세례 3명, 세례 18명 총31명이 담임목사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해 세례자의 3분의 2가 학생들로 당시 이종권 교육전도사의 열성적인 지도와 다양한 청소년 프로그램으로 신앙훈련을 했던 것이었다.
팜플렛 1989년 임직식 두번째 임직식: 조직교회의 당회 구성
1988년 10월 9일 공동의회에서 조원제, 위한규, 이승렬 집사가 장로로 피택되었고, 오상연, 정재용, 서정욱, 김상순, 김영대, 김기순 집사가 안수집사로 피택되었고, 김문자 권사가 권사시무 허락을 위한 찬반투표에 부쳐 허락되었고, 손순희, 한늠이, 최순탄 집사가 권사로 피택되어서 당회 지도하에 6개월의 직분자 교육을 거쳐 1989년 2월 20일 대구동노회 고시위원회의 장로고시를 거쳐 5월 28일 임직하기에 이르렀다.
1989년 7월 30일 첫 당회는 위한규 장로의 기도와 딤전 4:12-15 말씀에 근거하여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본을 보여라”는 제하의 김제민 목사의 설교가 있은 후 성빈교회의 숙원인 김제민 목사의 위임목사 청빙을 위한 조원제 장로의 동의에 대해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8월 13일 주일 저녁 예배 후 대리 당회장 류관선 목사(신광교회)의 주재로 공동의회를 열어 9월 정기노회에 김제민 목사 위임목사 청빙의 건을 결의하게 되었다.
교회창립 10주년 기념예배
1989년 9월 정기노회에서 위임목사 청빙 허락을 받은 후 10월 정기 당회에서 익년인 1990년 1월 7일 주일에 교회창립 10주년 기념예배 및 헌당식과 김제민 목사 위임식을 갖기로 하였다.
1990년 1월 7일 교회 창립 10주년 주일에 동노회 북시찰장 김영배 목사(성북교회)를 위임국장으로 한 노회원들과 내빈들의 축하를 받으며 위임식을 가진 후 성전 봉헌식을 가지고 제2의 10년을 향한 새 출발을 다짐하며 교회창립 10주년 중점사업을 세우고 성빈교회 설립 취지문을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창립 10주년 중점사업
1. 농촌교회 지원 확대 (6개 보조교회)
2. 도시빈민 선교 확대
선교편지(1990, 김충렬 선교사) 3. 장학 사업 확대(교회 내외에서 선정)
4. 해외 선교사 지원(아프리카 가봉 김충렬 선교사 지원)
5. 교회일치운동 협력 확대(KNCC, WCC를 통한 일치운동)
6. 사회선교의 확대(인권운동, 양심수, 교도소, 고아원, 양로원, 청소년선도...)
7. 방송 선교 지원 확대(기독교방송 사옥건축 및 선교후원)
8. 담임 목사 해외연수 교육 실시(교역자 성장교육)
담임목사 성지연수
교세통계표(1991) 성빈교회 개척 이후 학업과 교회 건축에 몸소 노심초사 혼신의 힘을 기울이며 목회에 전념해 온 10년을 지나오면서 김제민 목사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1990년 7월 4일부터 8월 2일까지 서울신학대학에서 주관하는 성지연수를 다녀왔다. 그 후 담임목사의 설교는 성지에서의 견문을 바탕으로 한층 더 회중들의 이해를 돕는 신뢰성 있고 석의(exegesis)에 충실한 설교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성지에서 가져온 겨자씨를 비닐로 코팅해서 자필 싸인을 하여 나눠 주어서 책갈피로 사용하도록 했으며 성지에서 가져온 밀떡으로 성찬식을 하기도 했다.
부흥성회와 특별기도회
건축에 온 힘을 쏟는 가운데서도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거의 해마다 외부 강사를 초청하여 부흥성회를 가졌다.
1984년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부산 목양교회 국동출 목사를 강사로 부흥회를 가졌고, 1985년 5월 19일부터 23일까지는 서울 대길교회 박용묵 목사를 강사로 하여 부흥회를 가졌다.
1987년 3월 30일부터 4월 3일까지 여수 애양원교회 박병돈 목사를 강사로 부흥회를 가졌으며, 1988년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는 서울 세광교회 김윤배 목사를 강사로 부흥성회를 가졌다.
1989년 12월 3일부터 7일까지 글로리아선교회 대표 김항안 목사를 강사로 부흥사경회를 가졌으며, 교회 창립 10주년인 1990년에는 12월 3일부터 7일까지 부산온천제일교회
부흥사경회 안내장(1989, 강사: 김항안 목사) 부흥사경회 안내장(1990, 강사: 장차남 목사)
1986년 10월 12일 성경대학 제1기가 시작하여 크로스웨이 성경연구원으로 운영되었다. 1987년 11월 15일 제1기 수료식을 갖게 되었다.
1987년 4월 19일부터 6월 7일까지 성령강림대망 50일 새벽기도회를 가진 것을 계기로 해마다 특별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2월 22일부터 4월 1일까지 수난절준비 4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진데 이어, 4월 10일부터 5월 22일까지 40일 연속 철야기도회를 가졌다. 1989년 1월 1일부터 31일까지 특별연속 철야기도회를 가졌고, 12월 8일부터 이듬해 1990년 1월 30일까지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졌다.
세 번째 임직식
팜플렛 1993년 임직식 1992년 3월 노회에서 장로 4인 증선을 허락받아 3월 8일 주일 저녁 예배 후 공동의회에서 장로 4명(김상순, 오상연, 정재용, 김기순 집사), 장립집사 8명(이옥식, 박기태, 류강선, 이정환, 박종계, 배영근, 정응해, 김유수열 집사), 권사 3명(김옥례, 황분조, 김영수 집사)를 선출하고 방종호 집사를 장립집사 취임을 위한 신임 투표로 선출하였다. 장로 임직식은 “6개월 이상 당회 지도하에 직분자 교육을 받아”에 대한 1992년 총회유권 해석에 따라 1993년 1월 26일 임시노회에서 장로고시에 합격하고 1993년 4월 11일 임직식을 갖게 되었다. 이제 성빈교회 당회는 장로가 7인으로 늘어나서 소규모 교회의 면모를 벗어나 중규모의 교회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김제민 목사 안식년: 미국 연수
교회는 목회자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개척 이후 열 네 해째 목회하면서 영육이 지쳐 있었고 대망의 2000년대를 향한 교회의 원대한 비전을 실천하기에는 재충전과 안식을 필요로 했기에 교우들의 양해를 간절히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담임 목사 안식년을 제의했던 바 온 교인이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1993년 5월부터 1994년 4월까지 김제민 목사의 목회 연수 및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그 당시로서는 큰 교회에서도 드물게 실시했던 소규모 교회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담임 목사의 안식년 중 강단은 증경총회장이었고 대봉교회 원로목사였던 박맹술 목사에게 의뢰하게 되었다.
그동안 성빈교회 창립 이래로 청년 목회자에서 중년 목회자로 성숙된 설교를 해 온 진취적이고 웅변적인 힘찬 설교를 해왔고 목회자 자신의 검소하고 청교도적인 삶에서 배어 나온 체현된 설교가 객관적으로 볼 때 힘 있고 예언자적인 의식을 일깨워주었지만 14년째 같은 목회자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로써 적지 않은 부담과 어떤 면에서 때론 위로의 메시지를 갈구하고 있었으리라.
<여호와이레>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증경 총회장을 역임한 박맹술 목사의 설교는 원숙한 설교 바로 그것이었다. 위로와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고 심령을 울리기도 하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그리고 그의 믿음을 우리가 가질 것만 같았다. 간간히 영남신학대학 김춘기 교수의 설교를 통해서 새로운 시각의 메시지를 듣기도 했다.
저녁예배 설교는 주로 전임전도사인 이종권 전도사의 마태복음 강해 설교로 왕으로 오신
1992년 전교인 여름수련회 팜플렛 예수에 초점을 맞추었다. 새벽기도회와 수요기도회 설교를 비롯해서 담임목사의 공백을 99% 매워가며 단독 목회를 하는 심정으로 목회에 전념했다. 당회장의 공석으로 당회가 공식적으로 회집되진 않았지만 교회운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매월 마지막 주일에 장로들과 전임교역자인 이종권 전도사가 함께 교회의 전반적인 의논을 하며 담임목사의 공백을 의식해서 더욱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1993년 12월19일 김제민 목사의 일시 귀국으로 그간 목회통신으로 주고받았던 회포를 담임목사의 간만의 설교를 통해 안식년 경과보고와 미국 생활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체험담을 그리고 성빈 교우들에 대한 사랑 등을 재확인하는 정겨운 시간이 되었다. 당초 계획은 1년간 안식년을 갖기로 했으나 미주 장로교신학대학 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캘리포니아주 로즈메드(Rosemead)에 있는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목회학 박사과정 이수를 위해 1년간 더 연장하기로 결의한 바(1993년 12월 26일 당회 결의) 목회자와 교우들이 다시 한번 단단한 각오와 기도로 각기 맡은 소임을 다 해야만 했다.
1994년 6월까지는 그동안 설교목사로 수고한 박맹술 목사의 대봉교회의 설교 계획 사정상 계속할 수 없어서 또 한번의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예비하사 성빈교회 창립멤버였고 아프리카 가봉에서 총회파송 선교사로 봉사하다가 일시 귀국하여 서울 천성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던 김충렬 목사를 부목사로 청빙하여 설교와 목회를 전담하기로 결의하였다.(1994년 7월 24일 당회 결의, 7월 31일 제직회 결의) 이후 열성적으로 시무한 김충렬 목사는 1995년 2월 16일 고향인 제주서호교회 담임목사로 임지를 옮기기까지 강단을 지켰다. 김충렬 목사는 아프리카에서의 선교사로서의 경험과 어학적 재능과 음악적 재능을 십분 발휘해 재미있는 교회, 신나는 교회로서의 면모를 일신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성실한 설교와 유머로 한껏 목회 기량을 발휘했다. 금요 철야기도회 때는 클라리넷과 디지털 오르간으로 직접 반주도 하며 아프리카 노래도 가르쳐 주곤 했다. 특히 주일 낮 예배를 2부로 나누어, 1부는 7시 30분에, 2부는 11시에 드리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김충렬 목사의 사임으로 설교 담당을 영남신학대학교 총장인 이용원 목사로 결정하였다. 이용원 목사는 영남신학대학교 교수로 지방 교회 집회 인도하러 가는 도중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는 위기 가운데 기적적으로 살아난 지역 교회의 살아 있는 하나님의 전령인 인재로 몸이 다소 회복이 덜 된 상태라서 발음이 약간 어눌했지만 역경을 딛고 선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교수 목사로서 지성과 영성을 겸비하고 있어서 영적 공백을 보충하고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기에 충분했다.
1994년 9월 사임한 이종권 전도사 후임 전임 교역자로 도기봉 전도사(봉화 춘양교회)를 청빙하니 1995년 3월 13일 부임하여 저녁예배와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그리고 목회 전반에 걸쳐 담임 목사가 귀국할 때까지 전담하였다.
(정리: 이승렬 장로)
(3) 성장기
이 기간(1995년~1999년)은 미국으로 유학 갔던 담임 목사가 귀국하여 목회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예배 참여 인원수 증가, 교회학교 교육의 활성화, 교회 재정이 매년 10% 이상의 예산을 초과 달성하는 등 여러 면에서 교회가 성장을 거듭하던 시기라고 하겠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세 번째 예배당의 건축을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1996년 9월 20일 드디어 복현동의 1,120평 녹지를 매입 계약하였다.
담임 목사 귀국
1995년 1월 1일 제직회는 김충렬 목사 부목사 계속청빙 건을 결의하였지만 김충렬 목사는 한 달 후인 2월 16일 고향인 제주도 서포교회로 갑작스럽게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6개월 여 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깔끔한 외모에 아프리카 선교 이야기, 원주민들의 노래, 춤 등을 소개하여 웃음 자아내게 하였으며 교회학교 어린이들로부터 연세 많은 성도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김충렬 목사 사임 후 같은 해 10월 초순 김제민 목사가 귀국하기까지 도기봉 전도사가 약 7개월 동안 교회를 전담하였다. 이종권 전도사에 이어 1995년 3월 13일에 부임한 그는 건장한 체구, 부리부리한 눈에 걸맞게 설교 또한 연신 땀을 훔쳐가며 사자후를 토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은혜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했는데, 가끔씩 농촌 교회 단독 목회 경험과 DMZ에서의 군대 생활 이야기를 예화로 들어 귀를 솔깃하게 하였다.
9월 3일 주일부터는 그 동안 외주를 주어 인쇄하던 주보를 자체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는 시간에 맞추어 원고를 보내고 교정 하는 일이 매우 번거로웠을 뿐 아니라 경비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업무는 장길식 집사가 직장 일로 바쁜 가운데도 자원 봉사하였다.
1995년 10월 8일, 2년 6개월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담임 목사를 모시고 첫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 초대교회 케리그마」란 논문으로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설교 중 미국 이야기를 예화로 많이 들어 우리들로 하여금 청교도적인 미국 성도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하였다.
송구영신 예배와 표어
해마다 새해는 23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송구영신 예배와 더불어 맞이하였다.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복된 시간, ‘올 한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살게 해 주십사’ 기도를 드리고 소원을 아뢰는 복된 시간이었다. 교회서는 ‘새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 책갈피용 카드를 준비하여 헌금 주머니에서 제비뽑듯 하나씩 집어내도록 하였다.
1997년 제직세미나 팜플렛 (주제: 하나님의 나라, 강사: 김제민 목사) 송구영신예배의 설교말씀은 주로 새해 표어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간 표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96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
1997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교회>
1998년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1999년 <생명을 살리는 교회>
예배당 건축 부지 구입
교인수가 늘어나면서 주일낮 2부예배 때에는 1층 중예배실을 자모실로 활용하고도 자리가 부족하여, 지하 소예배실도 활용하기로 하고 1995년 6월말 소예배실에 에어컨을 추가 설치하고 전기 승압 공사를 하였다. 하지만 중예배실과 소예배실은 화면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교회 학교 역시 공간에 따른 애로사항이 많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1996년 9월 20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또 하나,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을 하게 되었다. 마침 복현여중(현재, 경진중) 옆 자연 녹지 매물이 나오게 되어 예배당 건축 부지로 계약하게 된 것이다. 그다지 높지 않으면서도 대구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으면서도 아늑한 공간, 바로 담임 목사가 ‘여호수아 기도’를 하던 그 자리, 세 번째 예배당이 설 터전이었다. 김 목사는 오랜 기간 이 땅을 얻기 위해 여호수아처럼 터를 돌면서 기도해왔다고 뒤에 술회하였다.
5억 5천만 원에 계약하였고 우선 장기발전위원회 재정(잔고 약 2억 8천만원)으로 중도금 납부를 하고, 잔금은 사택을 비롯한 7가정의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납부하게 되었다. 10월 둘째 주일에는 전교인을 대상으로 1998년 말 까지를 기한으로 성전부지구입헌금을 작정하였는데, 작정 액은 부족한 3억원을 초과하였다.
1996년 11월 20일, 드디어 복현동 315-5번지 교회 건축 부지 1,120평을 계약대로 매입하였다. 그곳에는 수십 그루의 복숭아 나무가 있었는데, 농사 경험이 있는 권병석 집사, 서정을 권사 내외가 농사를 지어 수확의 기쁨도 덤으로 누렸다.
교회학교 부흥과 주요 활동
유치부, 유년부, 소년부, 중등부, 고등부, 청년부(1․2청년부)의 6개 교육부서에는 각각 전담 교역자를 배치하여 교회학교 교육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였다. 아마 교세에 비례하여 우리 교회만큼 교육전도사가 많은 교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 결실의 하나로 매년 6월 6일이면 열리던 동노회 아동부연합회 주최 각종 경연 대회에서의 수상을 들 수 있겠다. 우리 교회 아동 3개부는 구연동화, 성경 경시, 성경 암송, 글짓기, 노래 부르기 등 여러 분야에서 상을 독차지하다시피 하였고, 그 중 노래 부르기나 구연동화 부문 수상자는 주일 저녁 예배 시 어른들 앞에서 다시 발표하도록 하여 만장의 웃음을 자아내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교회학교는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열었다. 1997년을 보면, 유치부는 8월 18일부터 20일까지 우리 교회에서, 소년부는 같은 기간에 산내 대현교회에서, 유년부는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우리 교회에서, 중등부는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성주 양정교회에서, 고등부는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하양 복음수양관에서, 청년부는 8월 4일부터 6일까지 춘양 분천교회에서 가졌다. 1999년에는, 유치부와 유년부는 7월 22일부터 24일까지 우리 교회에서, 소년부는 8월 4일부터 6일까지 자인 계림수련원에서, 중등부는 7월 22일부터 24일까지 산내 의곡교회에서, 고등부는 중등부와 같은 날짜에 청천다락원에서, 청년부는 8월 9일부터 11일까지 광주광림교회를 중심으로 광주 전남지역 선교사적지 순례를 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 때 흘린 수고의 땀방울과 헌신 봉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잘 알고 계실 것이다.
더욱 활발해진 선교와 봉사
우리 교회는 개척 초기부터 꾸준히 선교와 봉사활동에 힘을 기울여 왔는데 성장기에 들어서면서 재정규모가 늘어나고 자치회도 더 증가함에 따라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993년 이후 해마다 5월 둘째 주 어버이주일에는 경로잔치를 열었다. 제2남선교회 주최로 주변 아파트 경로당과 인근 지역 어른들이 많이 참석하여 예배를 함께 드리고 정성껏 마련한 식사를 함께 나누었는데, 정작 음식 준비하랴 설거지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는 여 성도님들이었다. 조원제 장로가 인도한 특별순서 때는 참석한 노인들 모두가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청년부는 매년 5월 셋째 주를 청년주일로 지키면서 특히 해마다 무의탁노인돕기 일일찻집을 열어 그 기금으로 구제행사를 하였다. 특히 1995년 5월 21일 주일에는 청년부 주최로 전교인 헌혈행사를 가졌는데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여 육신적인 생명 살리기 운동에 동참했다. 그리고 1998년부터는 전교인 대상 이웃돕기 사랑의 이어달리기 행사를 개최하여 많은 교인들이 선교 활동에 동참하도록 하고 성빈 청년의 기상을 주민에게 알렸다.
1998년 이웃돕기 사랑의 이어달리기대회 팜플렛 94년 2월 우리교회 부흥회 강사로 오신 김창렴 목사가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선교헌금이 시작되었다. 헌금 기간은 1년간으로 95년 3월 마감하기로 하였으나, 헌금이 계속되는 관계로 1년 더 연장하여 96년 2월 종결하기로 하고, 그 이후는 일반재정에 넣기로 결의하였다. 96년 3월까지 모아진 헌금액은 18,753,190원에 달하였다.
1995년의 선교와 봉사 상황을 활동 내역별로 보면, 농촌 및 개척교회인 성곡교회, 대산교회, 매곡교회, 나호교회, 기리교회, 현풍새교회, 영선교회, 작은교회, 여명교회, 봉천교회, 명진교회, 구미영은교회, 샘터교회에 매월 10만원씩, 도시 빈민 선교는 구역별로 20가정을 선정하여 5만원씩, 사회 선교는 연합 방송, 인권단체, 교도소, 사회 복지 시설 지원, 학원 선교, 장학금 지급, 해외 선교는 가봉의 김충렬 목사, 오스트리아의 배재욱 선교사, 러시아의 박경수 선교사에게 헌금을 정기적으로 보냈고 그 외 2개 남선교회, 3개 연전도회는 각 자치회별로 매월 1개 이상 교회에 선교 헌금을 보내는 한편 청구혜양원, 안나 요양원, 복음 양로원, 천광 보육원 등 사회 복지시설을 방문하였다.
1998년부터는 남선교회와 여전도회는 각각 1개씩 늘어나서 돕는 교회도 늘렸다.
제1남선교회 : 청송덕천교회 제2남선교회 : 군위동창교회
제3남선교회 : 포항성지교회 제1여전도회 : 군위고매교회
제2여전도회 : 엘림교회 제3여전도회 : 청도흑석교회
제4여전도회 : 임불교회
그리고 지원하는 농촌 및 개척교회도 포항성지교회, 대구영선교회, 대구동교회, 대구대광교회, 경산벧엘교회, 청도대산교회, 군위매곡교회, 현풍새교회, 청송덕천교회, 대구작은교회, 안동명진교회, 대구신서교회, 구미영은교회, 아름다운교회, 청도풍각제2교회로 몇 교회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96년 11월 2일(토), 우리 교회 처음으로 여전도회 주최 선교바자회가 복현광명아파트 동편 인도를 따라서 열었다. 며칠 전부터 도토리를 주우러 가고, 안 입고 있는 옷을 교회로 모으고, 임불교회에 유기농산물을 주문하고 등등 분위기를 띄우더니, 하루 전에는 현수막을 걸고, 청소를 하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일찍 성도들의 차를 인도 앞에 주차하는 등 개업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드디어 당일, ‘성빈기업’은 도토리묵, 호박죽을 비롯한 모든 품목에서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보소서 주인님이 주신 다섯 달란트로 다시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이익금은 전액 지역선교사업에 사용되었다.
예배와 전도
1998년 11월 19일부터는 영아부가 문을 열었다. 주일 낮 2부 예배시간(11시) 부모들이 예배에 전념할 수 있도록 1부 예배를 드린 교사들이 별관 교육관에서 지도하는 모임이었다.
김영길 총장 신앙간증집회 팜플렛(1998)
매월 1회 정도 주일저녁예배는 자치기관에서 드리는 헌신 예배였는데 강사를 초빙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1998년 3월 8일 저녁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 초청간증 집회, 1998년 7월 26일 김영길 한동대학교 총장 초청간증집회, 1999년 2월 28일 제1남선교회의 탤런트 이영후 장로 초청 간증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1999년 4월 12일 저녁부터 15일 새벽까지는 과천교회 김찬종 목사를 강사로 부흥성회를 열어 전도에 대해 큰 도전을 받고, 훗날 전도대는 직접 과천 교회를 방문하여 전도 방법을 현장 체험하였다.
1995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31일 주일 우리 교회 처음으로 은퇴식을 가졌는데 그 주인공은 목사님의 어머니인 손순희 권사였다. 현 교회법상 모든 항존직은 일흔이 되면 은퇴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을 금 닷 냥 상당의 위로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달래며 그 동안의 수고에 고마움을 표했다.
1996년 4월, 음부의 권세를 뒤흔드는 2개의 대(隊)가 조직되었으니 바로 기도대와 전도대이다. 기도대는 매 주일 낮 2부 예배 전 본당 모여 예배와 교회, 병들거나 가난한 성도,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에 전력하고, 전도대는 매주 수요일 훈련을 받고 노방전도에 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였다. 전도대는 방문전도뿐만 아니라 길거리 청소, 경로당 봉사 등 봉사활동을 동반하면서 전도에 힘써, 생명을 살리는 성빈교회의 선봉역을 담당하였다. 7월 7일, 교회 전기를 110볼트에서 220볼트로 승압하고, 교회관련 토지, 건물의 명의를 김 목사에게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유지재단으로 옮겼다. 9월 1일에는 교회 승합차 ‘그랜드살롱’을 구입하였다.
축구, 테니스 등 동호회가 생기고, 자치기관별로도 다양한 행사를 주관하여 교회는 더욱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997년 6월 15일 갈보리선교회 주최 제1회 전교인 탁구대회가 부부 및 커플대항전을 열리고 10월 3일, 대구공고 운동장에서 열린 대구동노회 교회대항체육대회에서는 본 교회가 종합준우승의 성적을 거두었다.
1994년부터 교육전도사를 맡아오던 서영석 전도사도 우리 교회를 사임하고 포항성빈교회를
포항성빈교회 설립예배 팜플렛 (1991.1.3) 개척하게 되었다. 개척예배는 1999년 1월 3일 오후3시 우리 교회에서 많은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제민 목사의 설교로 진행되었다. 성빈의 이름이 포항 땅에 새롭게 열리는 순간이었다.
1998년 4월 8일 신성교회당에서 열린 142회 대구동노회 마지막 날 도기봉 전도사가 목사 안수를 받았고, 계속해서 본교회 부목사로 청빙되어 시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기봉 목사는 다음 해 1999년 12월 31일, 약 1년 9개월 동안 부교역자로 시무하던 우리 교회를 사임하고 필리핀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힘찬 설교를 들을 수 없어 아쉬움이 많지만 교적이 우리 교회에 남아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정리: 정재용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