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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교수 우석대·서양사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 역대 대통령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소통 능력이 신통치 않았던 것 같다. 이명박 정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결 국면이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분열상이 어디까지 진행될지 걱정이다. 하지만 우리 못지않게 극한적인 갈등을 겪고서도 극복한 사례가 없지 않으니 타산지석으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16세기 프랑스 사회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나라가 둘로 나뉘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칼뱅의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 신교도가 늘어나 1562년 칼뱅파 신교도(위그노)의 수가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육박했다. 역사상의 이념 대립이 대개 그렇듯이 귀족들은 신·구교 간의 종교적 충돌을 권력 쟁취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변질시켰다. 30년 넘도록 프랑스 종교전쟁(또는 위그노 전쟁:1562∼1598)이 처절하게 지속됐지만 역사가들은 과연 이 전쟁이 ‘종교전쟁’인지 의구심을 품고 있다. 이 전쟁 중 일어난 가장 참혹한 사건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1572)이었다. 왕실의 실권자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신·구교 화합의 상징으로 신교도의 우두머리였던 나바르의 앙리(훗날의 앙리 4세)와 마르그리트 공주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카트린은 수많은 신교도들이 파리를 방문하자 성문을 닫아건 채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신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케 했다. 엄청난 살육의 광란 가운데 상인들은 자신의 경쟁자를, 재산을 노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변심한 남녀는 상대방을 죽였다.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영화 ‘여왕 마고’의 배경이 된 이 사건 때문에 파리에서만 하룻밤 사이에 약 3000명의 신교도가 죽었다. 이렇듯 가톨릭 교도와 위그노 사이에 증오와 적대의 감정이 극으로 치닫던 1589년 나바르의 앙리가 프랑스 왕 앙리 4세로 즉위했다. 30년 넘게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앙리 4세는 신·구교 어느 쪽도 상대에게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프랑스 인구의 절대 다수가 가톨릭 교도임을 감안해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결심했다. 이 결정은 부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이를 추악한 배신 행위라 여겼다. 그러나 앙리 4세는 ‘프랑스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라며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1598년 앙리 4세는 ‘낭트칙령’을 발표해 가톨릭을 국교로 선포했다. 동시에 신교도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하고 가톨릭 교도와 동등하게 공직에 임용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위그노 전쟁은 종결됐다. 그러나 낭트칙령은 가톨릭 측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의회도 승인을 거부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앙리 4세는 이 칙령이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앙리 4세의 관용은 큰 역할을 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불만을 품었고, 심지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에서 그를 죽였어야 했다고 공공연히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국왕 암살 계획을 세우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이런 광신도들에게까지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자신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사람들 앞에서도 얼굴을 붉히지 않아 그들의 흥을 깨버렸다. 통합의 정치를 추구하는 정치인에게는 때로 감정을 숨기는 ‘포커페이스’도 필요한 법이다. 그는 자신을 비방하는 이들에게 복수하는 데 반대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면 전국의 나무를 다 베어도 사형대를 만들기에 부족할 것이다.’
30년 넘는 전쟁으로 프랑스는 황폐해졌다. 빈민들은 갈 곳이 없어 공동묘지에서 생활했고, 제대 군인들은 떠돌이가 돼 곳곳에서 약탈을 하고 다녔다. 귀족들은 수중의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앙리 4세에게 봉건 영지를 회복할 특권을 달라고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타협을 거부하고, 귀족과 군인들이 농토를 함부로 유린하는 것을 금하고 농민들의 생활 개선에 힘썼다.
소통 불능과 배제의 정치가 압도하는 현실에서 앙리 4세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어떨까. 한번 상상해보자. 이명박 정부가 ‘경제위기 극복’과 ‘국민통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치자. 50년, 100년 뒤 사람들은 어느 쪽을 더 높이 평가할까. 앞일을 알 수야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4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역사가들은 앙리 4세가 보여준 ‘통합의 리더십’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댓글 결혼식날 하인들 끼리 싸우다 한 하인이 죽게 되면서 사태가 발생 되었는데, 실세였던 이탈리아 출신의 독실한 카톨릭 메디치가 출신의 메디시스가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위그노들을 학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신교 교회에서는 지금도 이날을 기억하며 이 날은 종을 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앙리 4세는 복수를 다집 했을 법도 한데 화합과 관용의 정신으로 낭트 칙령을 발표했고 결국 오랜 종교 논쟁을 불식 시킵니다. 그 후 피폐한 경제를 되살려 일요일마다 국민들이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했답니다. 덕분에 프랑스의 상징이 수탉이 되었죠. 이런 화합 정책은 훗날 프랑스가 종교 전쟁에서 구교가 아닌 신교도
진영으로 나가 싸울 수 있는 명분을 주는 등(프랑스는 구교 국가였지만 경쟁 가문이던 합스부르크가를 견제할 목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내세워 이를 탄압한다는 명목으로 신교측에 가담해 승리함) 경제적 외교적으로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부디 지금 위정자도 이런 화합과 통합의 기반위에 정치를 해야 나라가 산다는 것을 깨달 았으면 싶네요.
버뜨...명바기한테는 연목구어겠지? ㅠㅠ;
결국은 앙리 4세도 카톨릭교도에게 암살당하던데..종교적인 갈등은 겉으로는 해결되어도 몇몇 광신도들에 의해서 원점으로 돌아가버리는 경우가 많은거 같스빈다 -ㅁ-; 간디도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단합을 위해서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에 몇번이나 금식을 하지만 결국 또 광신도에게 암살당하고..
그러게나 말이야...그렇게 애를 썼어도 결국은 암살로 끝났으니. 하지만 역사가들은 그의 업적을 인정하는 분위기..
사람은 죽은 후에야 진정한 평가를 받는다고 하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죽었을 때의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두렵게 느껴지네요.ㅜㅜ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께서 "나의 묘비에 어떤 글이 쓰이길 원해요?"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때는 철없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중요한 말인것 같네요...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은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만일 내가 할딱거리는 작은 참새 한 마리를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리라.>라는 에밀리 디킨스의 말처럼요.^^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에밀리 디킨슨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코 헛되지 않으리.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 주거나
또는 한 괴로움을 달래거나
또는 할딱거리는 로빈새 한 마리를 도와서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코 헛되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