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마리아 팔코네티)는 영국군 법정에서 심문을 받는다. 그녀는 열렬하게 자신을 변호하지만, 그녀의 몸짓과 표정은 하늘의 먼 곳을 향해 있다. 재판관들은 엄숙하고 딱딱한 표정으로 잔 다르크를 법정에 세우지만, 잔 다르크의 변호는 자신의 순수한 신념과 믿음을 옹호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윽고 그녀를 마녀로 모는 심문관들이 격렬한 표정으로 그녀를 심문하고, 그녀의 변호인인 젊은 신부는 그녀에게 공감하여 그녀가 성처녀임을 강조한다.
덴마크 거장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1889~1968 감독이 만든 무성 영화 걸작. 백년전쟁
속에서 수세에 몰리던 프랑스군의 구원자로 나선 잔 다르크의 일생 중에서도 재판 과정을 보여준다. 따라서 스펙타클한 전쟁 장면이나 얽히고 설킨 음모는 나오지 않는다. 단지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진 성처녀 잔 다르크의 재판을 소재로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흑백 화면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다. 특히 드레이어 감독은
1920년대 당시 클로즈업으로 독특하고 실험적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잔다르크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클로즈업으로 인간의 영혼을 화면에 투시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판을 들었을 정도였다. 이 영화는 역사적 기록의 뼈대 속에 숨은 진실을 통해서 영혼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영상화시킨 성공적인 예로 손꼽힌다.
이것이 과대평가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도움 없이 클로즈업 속에 잡힌 풍부한 표정, 빛과 그림자만으로도 이토록 훌륭하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영화이다. 과연 순결한 영혼 잔 다르크의 믿음과 그녀를 둘러싼 재판관들의 위선이 강렬하게 대비되며, 그녀를 구해주려는 한 신부의 노력도 온전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주제와 스타일의 완벽한 조화, 리얼리즘과 형이상학이 만나는 곳에 놓인 초월적 이미지, 역사의 충실한 재현이면서도 시공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획득한 이야기 등으로 <잔다르크의 수난>은 영화사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분석되는 영화들 중 하나이다. 이런 평가와는 무관하게 보아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특히 잔 다르크 역의 마리아 팔코네티의 연기는 가히 불멸의 명연기다. 제스처와 표정을 하얗게 표백될 정도의 빛 속에서 만들어 내는 성스러움의 이미지는 기억할 만하다. 또한 이 영화에는 프랑스 '잔혹연극'으로 일세를 풍미하게 되는 배우 앙토넹 아르토가 출연하고 있다. 그는 잔 다르크를 도울려고 하지만, 허사가 되는 신부 역을 맡아 보조하고 있다.
인류영화 최고걸작 20에도 자주 나오는 작품입니다
드레이어
"잔 다르크의 투명한 눈물 한방울을 상자 속에 간직하고 싶다."
루이 브뉘엘이 이 영화에 대해 한 말이다. 하지만 에릭 로드 같은 영화사가는
감독 카를 테오 도르 드라이어에 대해 고통에 빠진 여성들(이 영화와 <분노의
날>(1943), <오데트>(1955), <게르 트루드>(1964) 등의 작품)을 가학적으로
재현해내는 남성우월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반면 질 들뢰즈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드라이어야말로 관객에게 최고의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 으키는 작품을 만든다고 평했다. 또 혹자는 "절규하는
소리가 나는 무성영화"라고 이 영화를 정 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관점에서 보건 부정할 수 없는 점은 그가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는 것이다. 최소한의 카메라 움직임과
미니멀리즘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드라이어는 사실
세계영화사에서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나 프랑스의 브레송과 더불어
독특한 전통을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느낌표나 의문부호보다는
말줄임표를 즐겨 사용하며, 오히려 데 스마스크에서 가장 강렬한 삶의 표현을
포착해 낸다.
1920년대 후반 르네 클레르와 페르낭 레제 그리고 루이 브뉘엘이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영화 에 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을 때, 덴마크에서 프랑스로
옮겨온 드라이어는 프랑스 영화사로부터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는 역사상 흥미로운 세 명의 여성들, 즉 카트린 드 메디치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잔 다 르크 중 한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생각하다가, 드디어 마지막 인물로 낙점한 뒤 중세의 일상을 재현하기 위한
꼼꼼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잔 다르크 역을 맡을 배우로는 순박 한
시골처녀 같으면서도 순교자의 열정과 고통을 간직한 지방 연극배우 마리아
팔코네티가 선정 되었다.
모든 사람들을 놀라운 시각 경험에 빠지게 한 섬세한 클로즈업 중심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다 양한 톤에 반응하는 팬크로매틱 흑백필름을 사용했고,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서술구조에 적 합한 짧은 길이의 '숏'들로 이루어진
평행편집이 채택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기 위한 재판 과정과 화형 장면으로
나뉘어 있으며, 역사 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들(주교, 영국인, 판사 그리고
군중)이 각기 다른 종교적 신념과 분노를 가 지고 이 전쟁터에 뛰어든다.
'숏'과 거기에 대응하는 '뒤집힌 숏'의 관습적인 사용을 피해 가면서 흐르듯
이어지는 클로즈업 을 채택한 이 영화의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잔
다르크의 고통에 찬 얼굴과 그 뒤 하얀색의 텅빈 실내공간이다. 말하자면
원근법에 따른 공간적 깊이가 부재하는 것인데, 이때 이것을 대체 하는 것이
바로 정신적 깊이이며, 잔 다르크 역의 팔코네티의 얼굴은 마치 중세의
종교적 도상화 처럼 정신적 형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중세와는 달리 이 영화의 후반부는 종교적 구원의 영원성보다는 잔
다르크의 삶에 대 한 열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삭발당한 채 화형대에 올라
"오늘밤 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독 백을 할 때, 그리고 바람에 날려가는
머리카락과 하늘을 나는 비둘기들, 어머니의 품에 편안히 안긴 아기의
이미지들이 보여질 때, 천상의 세계는 멀어 보이고 지상은 그보다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문제제기는 정말 이제 고전적(진부함)으로 보이고, 이
영화가 영화 100년사에서 갖는 의미는 그래서 형식미의 탁월함 정도에 머무를
것 같다.
그러나 들뢰즈의 의견은 또 다르다. 이 영화는 오히려 세상이 저질영화처럼
보이는 20세기에 태어난 서정적 영화이며 바로 그 정서적 효과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것을 복원할 꿈 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복원한단 말인가? <필자: 김소영/영화평론가>
첫댓글 잔다르크가 백년 전쟁의 콩피에뉴 전투에서 영국군에 사로잡히고,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 찍혀 화형당한 날이 바로 오늘이랍니다. 1431년 5월 30일에 화형당했다고 되어있더군요... 교생실습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수업을 시작하기 전 학생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역사 속의 오늘'이라는 주제로 역사 속에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었습니다. 위키백과 같은 곳에 검색하면 역사 속에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르쳐주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학생들에게 매일매일 찾아서 가르쳐주는 버릇이 들어서 오늘도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이 잔다르크가 화형당한 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잔다르크와 텔레파시가 통했나봐. 어쩐지 잔다르크 생각이 나서 글을 올렸더니 오늘이 마침 그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