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댈러스 공항엔 눈이 쌓이고 |
고 케네디 대통령 |
|
우리가 탄 아메리카 에어라인의 승무원 특히, 여승무원들을 보면 우리나라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의 여승무원과는 다르게 연령대가 높다. 그리고 복장도 대화도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다. 70대는 되어 보이는 몸집이 엄청나고 백발의 할머니가 열심히 기내 서비스를 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이나 유럽은 다르다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 D항공 J여사장 갑질 사건을 접하며 혀를 찾던 생각이 든다. 완전히 사용자와 노동자사이가 주종관계처럼 되어 있는 우리나라 기업이나, 직장 상하간의 갑질하는 문화는 군대의 영향일까? 갑질 받으면 늙어간 며느리가 시어머니 되면 다시 갑질하는 풍토가 있어온 문화의 영향일까? 건전한 민주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런 풍토가 빨리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리마까지 가고 다시 여하간 댈러스에서 환승수속을 받기가 빠듯한 시간이라고 해서 여기 저기 물어가며 수속을 밟는데 무가 그리 복잡한지 모르겠다. 환승수속을 자동으로 밟는데 영문과 한국어로 지시하는 대로 하면 된다. 여권을 올려놓고, 얼굴과 지문을 찍고 등등 복잡한 절차를 밟았는데도 또다시 입국심사대에 가서 입국심사를 받는다. 단순한 경유하는 환승인데도 입출국 절차와 똑같은 절차에 짜증스럽다. 세계의 경찰국가 같은 거대한 국가 미국은 우방도 많지만 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니 9.11 쌍동이 건물 사건 같은 엄청난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출입국 수속을 1시간 정도 걸렸으니, 우리가 수속을 잘못 밟아 늦어져 환승을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같이 가신 선생님께서 걱정을 한다. 하지만 보딩 게이트에 가보니 우리가 팀 중에 제일 먼저 왔다. 더구나 리마 행 비행기는 계속 늦어진다는 문자가 뜨면서 댈러스가 나를 가지 말라고 잡아끄는 듯 계속 늦어진다.
4시간정도 늦어진 리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졸며 가는데 갑자기 비행기 안이 소란하다. 한 여자 노인네가 쿵하고 통로에 넘어진 것이다. 승무원들이 달려들어 응급처치를 한다. 기내 방송에서는 의사를 찾아 도와 달라는 멘트가 숨 가쁘게 나온다. 한 여승무원이 심폐소생술의 일종인 “흉부 압박법”으로 응급처치를 한다. 내 뒷자리에서 덩치 큰 여 의사가 나가 지켜보더니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 같다.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이 때 응급처치를 한 여승무원이 아메리카 항공의 한국인 여승무원이었다. 많은 승무원 중에 가장 용감하고 재빠르게 응급처치를 한 사람이 한국인이라는데도 괜스레 자부심이 생기며 기분이 좋으며 애국심까지 자극하는 것 같다. 나중에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 노인네도 우리나라 D항공 J여사장처럼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다는 소리가 들린다. 여하가 술은 즐거움과 활력을 주지만 만만찮게 우리사회를 시끄럽게도 한다.
리마 축제 |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이란 증거 |
|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가 만든 도시 리마 공항에 도착하니 “알루”라는 별명을 가진 우리들의 여행 인솔자와 함께 여행할 28명의 다양한 사람들을 정식으로 만나 간단한 인사로 조우했다. 연령층과 직업군이 다양하다.
세계인구 70억 명 중에 선택된 28명이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아니 5천만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28명도 그렇다. 확률적으로 얼마나 될까? 5000만의 28제곱 분에 1 이니까, 이건 있을 수 없는 확률이다. 하지만 여행 중 나 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은 여행 중 한국 젊은이들에게 반가워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젊은이들 중에는 이런 이유로 나이 먹은 사람들이 말 부치는 것을 별로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으니, 그냥 반갑게 눈인사만 하고 말도록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왔다. 때문에 여행 중 말을 적게 하리라고 마음도 먹어 본다.
사실 나부터가 뭐가 그리 남의 사적인데 관심이 많은지, 나이 먹으면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혼자 왔는지, 결혼은 했는지, 왜 왔는지? 어디를 가는지? 등 묻고 싶어지는 것은 나이가 먹어서 그럴까 아니면 그런 습관에 젖어서 그런가는 모르지만,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질문이지요. 우리 아이들마저도 싫어하는 질문일 수 있어요. 그건 그렇다 치고,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느낀 건데,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한 숙소에 같은 한국의 어른들을 보면 목례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본척만척 하는 것은, 전직 교육자로서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 때문에 말을 많이 하지 말자고 재차 다짐을 해 본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젊은이들은 소영이와 신혼부부를 비롯하여 모두가 예의가 깍듯한 젊은이들이어서 더욱 좋았다. 하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 비유 맞추느라 고생을 했으리라고 생각이 들어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한 번 이 글을 통해 건넨다. 너무 부정적인가?
호텔 체크인을 하고 환전을 한 다음 각자 리마 시내로 흩어졌다. 마침 리마 축제기간이라서 특색 있는 전통복장과 가장행렬 복장을 한 수십 명씩 무리지어 춤과 음악으로 온통 거리가 요란하다. 아르마스 광장, 산프란치스코 성당을 둘러보면서 페루인들의 신앙심과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성당 주변에 엄청난 순례객들의 행렬을 보니 엄청나다. 우리가 보아오던 가톨릭과는 다른, 가톨릭과 토속신앙과의 혼합인 듯하다.
엄청난 물개무리
3일차 되는 날 우리는 버스로 피스코(Pisco)를 향해 출발 작은 갈라파고스라고 하는 바예스타섬(Isla ballestas)에 도착해서 물개섬 파라카스(Paracas)를 투어 보트를 타고 방문했다. 아름다운 바위섬이었는데 갈매기들과 가마우지, 물개들이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가 무리지어 사는 데 놀랐다. 물개는 한자어로는 해구(海狗)라 한다. 생태를 보면 앞뒤 발이 모두 물고기의 지느러미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헤엄치기에 능숙하며 바다 속의 어류, 연체동물들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수컷의 몸길이는 암컷보다 훨씬 크다. 수컷이 암컷보다 이렇게 체구가 큰 것을 보면 일부다처사회에서의 수컷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수컷 한 마리가 30∼50마리 정도의 암컷을 거느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해구신은 동의보감에도 언급되었을 정도로 남성의 정력제로 유명하다. 특히 예전에는 한국 남성들이 가장 선호하던 식품이 아니었든가 한다. 수십 마리의 암컷을 거느린 수컷을 남성들이 부러워한다고? 하지만 강하고 영리한 놈만 그런 것이지 아무나 그렇게 암컷을 거느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개 사회에선 법 앞에 평등이란 없는 것이다. 그저 힘센 놈이 제일인 것이다. 어설피 태어난 수컷은 장가 한번 못가고 일생을 마친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도 이기적인 유전자의 한 형태, 유전학적으로도 건강하고 힘세고 환경에 잘 적응하는 유전자를 가진 수컷물개의 자손을 얻으려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따른 진화론의 한 형태가 이해되는 것이 아닌가?
3일차 되는 날 우리는 버스로 피스코(Pisco)를 향해 출발 작은 갈라파고스라고 하는 바예스타섬(Isla ballestas)에 도착해서 물개섬 파라카스(Paracas)를 투어 보트를 타고 방문했다. 아름다운 바위섬이었는데 갈매기들과 가마우지, 물개들이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가 무리지어 사는 데 놀랐다. 물개는 한자어로는 해구(海狗)라 한다. 생태를 보면 앞뒤 발이 모두 물고기의 지느러미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헤엄치기에 능숙하며 바다 속의 어류, 연체동물들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수컷의 몸길이는 암컷보다 훨씬 크다. 수컷이 암컷보다 이렇게 체구가 큰 것을 보면 일부다처사회에서의 수컷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수컷 한 마리가 30∼50마리 정도의 암컷을 거느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해구신은 동의보감에도 언급되었을 정도로 남성의 정력제로 유명하다. 특히 예전에는 한국 남성들이 가장 선호하던 식품이 아니었든가 한다. 수십 마리의 암컷을 거느린 수컷을 남성들이 부러워한다고? 하지만 강하고 영리한 놈만 그런 것이지 아무나 그렇게 암컷을 거느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개 사회에선 법 앞에 평등이란 없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그저 힘세고 영리한 놈이 제일인 것이다. 어설피 태어난 수컷은 장가 한번 못가고 일생을 마친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도 이기적인 유전자의 한 형태, 유전학적으로도 건강하고 힘세고 환경에 잘 적응하는 유전자를 가진 수컷물개의 자손을 얻으려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따른 진화론의 한 형태로 이해되는 것이 아닌가?
오아시스 |
버키카와 운전수 |
|
리마에서 나스카를 가는 길에 모래사막 이카(Ica)에 들려 익스트림 스포츠, 사막 버키카 질주와 샌드보딩을 체험한다. 버키카의 질주는 거의 광란에 가깝다. 경사가 45°도 더 되는 사막의 좌우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질주는 체험하는 이들의 입에서 괴성이 나오게 만든다. 이집트의 흑 사막에서 체험한 렌드로버 체험은 새발에 피다. 사막의 아름다운 오아시스는 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많이 오염 시키고 있었다.
나스카에 도착해서는 시장을 보고 나스카마을의 공원을 둘러보는데 아름다운 나무에 붙여놓은 글자가 이상해서 알아보니 나무 이름이 아니고 “나는 생명체입니다(Soy vida), 나를 괴롭히지 말아주세요.(No me Maltrates)” 이었다. 재미난 발상이라고 생각 했다. 나무를 보호하자는 말을 재미있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었다.
투어버스를 이용하여 고대 나스카 인들의 무덤인 챠우칠라를 방문 했다. 고대 나스까인들의모습을 미라를 많은 미라로 볼 수 있었는데, 섬짓한 생각도 들게 한다. 이어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인 나스카 문양들을 비행기에서 볼까하다가 너무 이른 아침에 일어나야 한다고 하기에 포기하고 투어차량으로 둘러보았다. 이 문양들은 1939년, 페루 남부지역을 운행하던 비행기 파일럿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는데 그 이유인 즉, 워낙 큰 규모의 그림인 탓에 지상에서는 땅을 파낸 선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림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오직 하늘에서만 가능했다. 다양한 문양과 선들로 구성된 이러한 거대 나스카 지상화를 제작한 이유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견이 나왔다. 나스카 지상화를 평생 연구한 독일인 마리아 라이헤 여사는 나스카 지상화가 나스카인들에 의해 천문학적인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 외계인들의 우주선 착륙을 위한 표지판으로서 세워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 외계인을 연상시키는 이상한 형상의 사람 그림과 활주로를 연상시키는 직선이 주장의 근거로서 제시되지만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어쨌든 나스카 지상화는 미스터리로 아직도 많은 초고대문명설 주장자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다. 저녁나절 일목을 보고 다시 야간버스로 15시간 걸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마츄픽추를 보러 꾸스코로 향한다.
차우칠라 무덤의 미라 |
평생을 나스카문양 연구에 바친 독일여인(마리아라이헤) |
오늘밤은 야간버스로 16시간 걸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마츄픽츄를 보러 잉카 최고의 도시 꾸스코로 향한다. 이구간이 제일 문제의 구간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고산지대로 간다. 고산증세에는 물을 많이 마시고, 조용히 그리고 모든 동작은 슬로우 모션으로 하고 생강과 코카인 잎을 씹는 등등 하라고 한다. 버스는 청주에서 인천 공항을 가는 리무진버스처럼 좌석이 3열이다. 이 버스를 까마(cama침대)버스라 부른다. 좌석이 넓기는 하지만 완전한 침대가 아니기 때문에 뒤로 많이 재껴질 뿐 잠을 자기엔 그리 편하지 않다. 모든 걸 포기하고 머리를 비우고 간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온몸이 쑤시고 발을 똑바로 못 뻗으니 고통스럽다. 그래도 잠을 청한다. 고산병 약을 한 알 먹고 잠에 떨어졌다. 중간에 소변을 보려고 깨었는데 속이 미식거리고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 이게 고산병 증세구나! 아이고 죽겠네.’ 큰소리로 말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니, KBS 인기 프로그램 “개콘”에서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이 죽겠다고 하면 “염라대왕이 알아차리고 바로 데리러온다.”는 것이 생각나서, “아니 괜찮습니다. 이 정도가지고 뭘. 멀쩡합니다.”하고 중얼거리면서 물을 한 병을 마시고 양손으로 머리를 지압하면서 다시 잠을 청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울렁거리는 증세가 가라않지 않는다. 시간을 보니 아침 6시, 창밖은 끝없는 돌산과 사막으로 펼쳐지던 나스카와는 달리 가파르고 높은 산이 관목으로 푸르니 기분이 좋다. 강도 보인다. 강을 따라 길이 나있어 강가를 달리니 경치는 아름답다. 중간 중간 동네도 보인다.
길가를 보니 TV와 그림에서만 보던 인디언 전통복장을 한 여인네들이 망태기를 메고 뭘 하러 가는지 모르지만 바쁘게 걷는다. 무려 10시간 걸려 아침이 되어서야 중간 도시 “아방가요”터미널에 도착, 버스에 내려 허리를 펴고 간단한 체조도 하고 몸을 추스른다. 내려서 보니 고산증세로 몹시 고생을 한 분들이 몇 있었다. 반은 죽을 지경이라고 하소연 한다. 건강과 체력과도 관계있지만 꼭 그렇지 많은 않다고 한다.
아방가요 도시 자체가 비탈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를 비탈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강원도 비탈은 비탈이 아니요.” 정말 첩첩산중과 비탈에 중간 중간 동네가 많다.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첫 발령을 받아 부임한 곳이 영춘“구인사”가는 길에 있는, 충북 단양군 가곡리에 있는 가곡중학교이었는데 그곳도 정말 오지였다. 가곡 동네를 가려면 고습재라는 재를 넘어야 하는데, 산허리를 깎아 만든 버스길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수십 미터 아래 낭떠러지에 강(남한강)만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고개에서 버스를 타면 비행기를 탄 기분이라고 해서 “비행기 재”라고 불렀다. 어떤 교감선생님은 부임하러 오셨다가 비행기재에서 창밖을 내다보다 졸도를 하셔서 곧장 입원하셨다는 일화도 있는 곳 이었다. 그 때 부르던 노래가 가곡중학교 교사들이 부르던 노래 “♬비행기재 돌아 돌아 가곡중학교 있건만…어쩌구 저쩌구. ♬” 그리고 구인사 신도들 버스 안에서 남무아미 타블을, 열심히 염불을 외는데 그 고개를 넘을 때면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도 겁먹은 신도들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라고 한다. 하지만 쿠스코 가는 길을 보지 않은 사람은 ‘비탈에 대해서 말도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쿠스코 가는길에 먹은 음식 |
쿠스코로 가는 이층버스 |
차장 밖으로 원주민 아이들을 보면서 왠지 어렸을 때 내 생각이 난다. 꾀죄죄한 옷에, 열흘 세수도 하지 않은 검은 얼굴에, 다 떨어진 검은 운동화를 신은 모습, 코를 흘리는 모습 등이 어쩌면 어릴 때 어렵게 산 초등학교 시절 우리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스친다. 더구나 흙으로 벽돌을 찍어 집을 지은 모습마저 어렸을 적 우리 집과 같은 생각이 든다. 조금 나은 집은 구멍난 벽돌을 사용해서 집을 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집도 중학교 땐 “브로꾸(블럭)”라고 해서 구멍이 난 벽돌로 집을 다시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골집엔 지금도 어떤 이들이 와서 살고 있다.
버스는 계속 높이 오르기 시작한다. 아방가요로부터 공중도시 쿠스코까지 계속 오르막 이다. 산들이 높아 구름으로 스카프를 두른듯 산동네에서 원주민들이 사는 모습을 버스에서 엿볼 수 있다.
버스를 이렇게 많이, 그리고 많은 시간을 탄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한편 진정한 여행을 한다는 생각도 든다. 비싸서 비행기를 못 탈지언정, 비행기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고 느끼는 감정도 여행의 일부이며 진정한 여행이라고 스스로를 위안을 해 본다.
남미의 식당의 음식은 대체로 짠 편이며 음식의 양은 많은 편이기 때문에 사람 수 대로 음식을 시키면 도저히 먹을 수없는 만큼 나오기 때문에 다른 사람 먹는 것도 눈 여겨 보아야만 음식 값도 줄일 수 있다.
남미는 남반구에 있는 만큼, 우리와는 반대로 해가 북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차를 탈 때도 어느 쪽을 향해 가느냐에 따라 방향을 잘 잡아야 햇빛이 비치지 않는 쪽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어느 쪽을 향해 간다는 것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알기 힘든 것이다. 동에서 서로, 혹은 서에서 동으로 갈 때는 북반구에서는 북쪽, 남반구에서는 남쪽창가에 앉아야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따라 태양의 위치가 변할 터이니 잘 알아서 타야 한다. 언젠가 호주여행 할 때, 가이드에게 잠깐 속은 일이 있다. “북반구는 겨울에 따뜻하게 하기 위하여 남향집을 짓고 남쪽으로 창을 크게 내지만, 남반구에서는 북향집을 짓고 북쪽으로 창을 내야만 겨울에 따뜻하다. 그래서 남반구에서는 서쪽에서 해가 뜬다고 ”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하다가, 가이드가 농담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예닐곱 시간을 달린 후 허름한 원주민 가게 앞에 세웠다. 허름한 차림의 아낙이 시꺼먼 솥에 돼지고기 조림, 찐 옥수수와 감자 등을 파는데, 돼지고기 조림은 깨끗해 보이지는 않아 우리나라에서 같으면 절대 먹을 엄두도 못 낼 테지만 어렸을 때, 할머니 따라 시골장에 가서 국밥을 먹고 자란 나는 그런 냄새와 풍경이 구수하고 맛있어 보인다. 감자와 옥수수를 나누어 먹는데 맛은 괜찮다. 돼지고기 조림을 먹고 싶지만 ‘기름이 많다. 위생상 좀 그렇다.’하여 아마도 아내가 말릴 것 같다.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아내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가련하다.
오후가 돼서야 비로소 쿠스코에 입성하여 짐을 풀고, 볼리비아 영사관으로 가서 비자를 받으려고 하는데, 비자서류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온통 짐을 풀어 찾느라고 한바탕 전쟁을 하는 바람에 일행들과 같이 못가서, 뒤에 택시를 타고 갔는데 택시 운전사가 볼리비아 영사관을 못 찾는다. 운전사도 경찰에게 물어 찾아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볼리비아 영사관이라야 외진 곳에 있었으며 문도 열어 놓지 않아 초인종을 눌러 들어가야 한다. 영사관 직원들도 도도한 것 같다. 우리나라 같으면 외국인 손님이 영사관을 찾는다면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모실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비자와 황열 예방접종 확인서를 요구 한다는 것이다. IMF때 우리나라가 볼리비아에 영사관인가, 대사관인가를 철수하는 바람에 밉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이 간 캐나다 국적인 한국인은 비자도 필요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요구하는 비자와 황열 예방접종 확인서 요구도 곧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날 저녁, 우리들의 인솔자 알루가 슬픈(?)소식을 전한다. 운전사를 포함하여 쿠스코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내일 새벽 파업이 시작되기 전에 쿠스코 시내를 빠져 나가야 한다고 한다. 이튿날 새벽 3시 기상하여 피곤과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비고 어둠을 틈타 투어차량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마츄픽츄로 가는 차량들이 모여서 간다고 한다. 2시간쯤 달렸을까, 막 쿠스코 지역을 벗어나려 하는데 난데없이 소들이 길에서 행진을 한다. 마츄픽츄로 통하는 길을 막고 농민들이 가축을 풀어 시위를 하는 것이다. 파업의 이슈는 엄청난 관광수입을 원주민과 노동자들에게 고루 분배하지 않고 일부가 독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찰도 소용없는 듯하다. 몰래 도둑질을 하려다가 도둑질도 못하고, 하는 수없이 차를 돌려 되돌아 와 다시 호텔에서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일단 쿠스코 시내 시티투어를 하기로 했다. 쿠스코 시내가 대부분 비탈진 곳에 집들이 많고 비탈진 곳에 살아가는 모습은 빈민가를 연상하게 하며,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 한편 마음은 그리 편치 않다.
잉카 트레인 |
과천태극기 애국소녀(?) |
|
파업이 끝나 5시에 급하게 출발한다는 연락을 아내가 먼저 받아, 3층 호텔 로비에서 쉬고 있는 나를 찾느라고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5시 30분쯤 투어버스에 올랐다. 마츄픽츄를 가기위해서는 먼저 ‘오따이땀보’라는 작은 마을에서 셔틀기차를 타고 가서 ‘아구아깔리안떼(따뜻한 물)’라는 마을에서 셔틀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막 파업이 끝난 터라 길엔 곳곳이 크고 작은 돌들이 널려있다. 앞에 간 차들이 돌들을 한쪽으로 치웠기 때문에 차들은 간신히 돌을 피해 달린다. 간간히 유리창 파편들도 볼 수 있다. 한편 생각해 보면 길바닥에 바위와 돌을 깔아 놓아 차가 못 가게 하는 시위를 하는 자체가 너무 순수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까짓 돌쯤이야, 겨울 눈 치우는 차 정도로 밀로가면 해결될 법하다. 보고 들은 것처럼 남미 대부분 국가들의 민주화와 경제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3월 5일에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잉카의 유적 마츄픽츄로 가는 날이다. 가랑비가 오는가했더니 세차게 내린다. 우비를 입었지만 별 효과가 없다. 오따이땀보 숙소에서 걸어서 역까지 가는 동안 주변 산들이 안개에 싸여 장관이다. 오따이땀보역에서 기차(잉카트레인)을 타니 주변 모든 산이 장엄하여 수천수만 봉우리 모두 그야말로 어떤 산하나 명산이 아닌 것이 없어 경이롭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2시간 정도 가서 따뜻한 물의 도시 아우아 깔리안떼스에 도착하여 셔틀 버스를 타고 마츄픽츄로 갔다. 남미에서 아구아 깔리안떼 뽀르 빠보르(Aga caliante For favor)하면 뜨거운 물을 달라는 것이다.
안개에 젖은 마츄픽츄 |
|
드디어 남미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사라진 잉카의 유적지, 현지어로는 '늙은 봉우리'란 뜻의 마츄픽츄는 침략당시 스페인군들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중도시'라고도 불리어지는 불가사의한 거대한 석조물이다. 지금도 용도가 무엇 이었는지 조차도 미스터리인 마츄픽츄 입구가 나왔다. 여전히 비는 온다. 완전히 첩첩산중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장엄한 산들로 둘러싸인 곳에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석조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화처럼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곳, 감탄에 그냥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비와 안개에 싸인 마츄픽츄는 사진은 흐릿하게 나오지만 묘한 아름다움에 젖어본다. '슬픈 역사를 간직한 잉카의 도시가 우수에 젖어 더 아름다운 걸까?' 비는 서서히 그쳐 시야가 좋아 진다. 마츄픽츄를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마츄픽츄인 줄 알았는데 젊은 봉우리라고 부르는 와이나픽츄이다. 우리는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와이나리픽츄"라고 불렀다. 아마 포도주 양조장(와이너리)이 많은 남미에서 외우기가 쉬워서 일 것이다. 마츄픽츄는 석조 건축물들과 이어지는 뒤쪽에 보이는 봉우리를 말한다. 많은 여행객들은 와이나 픽츄를 등정한다. 등정하려면 2시간 정도 걸리며 급경사를 올라가야한다. 나는 시간이 부족해서 '잉카 브리지'와 '태양의 문'을 다녀오기로 했다. 잉카브리지는 우루밤바 계곡이 보이는, 산 중턱을 깎아 만든 길을 30분정도 가면 절벽에 석축과 석축을 연결하는 아슬아슬한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잉카브리지다. 아무리 몸이 가볍고 산을 잘 탄다지만 저런 다리를 건너 다녔다니, 원숭이처럼 살았나 보다. 다시 돌아와 반대편에 태양의 문이 있다. 길은 외길이기 때문에 길 잃을 염려는 없지만 비가 와서인지 많은 사람이 가지는 않는다. 잉카의 문은 돌로 쌓은 제단 같은 곳이다. 태양의 문(Puerta del Sol)은 마드리드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며, 푸에르타 델 솔은 스페인어로 ‘태양의 문’이란 뜻인데, 흔히 솔 광장이라고 불린다. 스페인 식으로 붙인 이름이 아닐까 한다. 태양의 문에 도착하니 외국인 한 쌍이 있었는데, 남자가 태양의 문 꼭대기서 물구나무를 선다. 비가오니 태양의 문에서 보아도 태양이 보일 리 없다. 태양의 문을 내려 오다보면 마츄픽츄를 오르는 셔틀버스 길이 보이는데 수십 구비 S자 곡선이 예술이다.
잉카브릿지 |
태양의 문 |
태양의 문을 내려와 와이나픽츄를 갈 생각이었으나 이미 늦었다. 예정대로 오따이땀보에서 묵지 않고, 전날 잉카트레인을 타고 곧장 아구아깔리안떼로 가서 이른 아침에 바로 왔어야 아름다운 마츄픽츄의 일출도 보고 와이나픽츄도 올랐을 터인데, 쿠스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늦어지는 바람에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쿠스코로 전전날 묵었던 숙소로 왔다.
투어를 신청하여 쿠스코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모라이계단식 밭과 살리네라스 염전으로 가는 길에 우르밤바 계곡 위로 장엄한 안데스 산맥의 설산들이 간간히 구름을 두르고 나타나는 모습이 장관이다. 모라이유적과 살리네스 염전이 있는 곳은 주변 지형이 붉은 색깔의 토양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를 지질학적으로 말해서 석회암이 풍화되어 생긴 붉은 색깔의 토양을 '테라로사(terra흙, rosa장미)'라고 한다. 모라이 유적을 가는 중간에 ‘마라스라는 중간 마을의 좁은 골목을 지나는데 성당도 볼 수 있고, 광장도 볼 수 있지만 이곳 마을들은 대부분이 흙으로 집을 지었으며 무너져가는 집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시골마을을 연상케 한다.
모라이 계단식 농경지에 도착하니, 어떤 이들은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을 연상케 한다고 하는데, 나는 중국 귀주성의 만평림(萬平林)의 팔괘전(八卦田)이 연상된다. 그곳에도 이와 비슷한 곳에 중앙으로 갈수록 움푹 들어간 수십 개의 다랑이 밭을 이어 각이 지면서 둥글게 만들어 놓은 것인데 8괘 모양을 한데서 붙여진 이름 같다. 이러한 돌리네 지형은 내가 몇 년 살던 석회암 지대가 많은 충북 단양군 가곡면 여천리에서도 있다. 웅덩이처럼 생긴 밭들이 볼 수 있는데, ‘비가 모면 물이 어떻게 배수가 되는가?’를 의심했던 적이 있다. 이런 지형이 생기는 이유는 석회암층에 물이 침투하여 녹으면서 거대한 웅덩이가 만들어 지는데 이런 지형을 ‘돌리네(doline)’라 한다. ‘모라이’는 이런 지형에 인공적으로 돌을 쌓아 계단식 경작지를 만든 곳이다. 이런 지형 맨 아래에는 일명 싱크홀(sinkhole)이 형성되면서 자연적으로 배수가 되기 때문에 물이 고이지 않는다. 또한 모라이는 웅덩이의 바깥 부분과 맨아래 부분의 온도차가 5℃정도 되므로 다양한 고도의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고 있었는데 당시 옥수수와 감자 등을 시험 재배 했다고 한다.
모라이 경작지 유적 |
살리네스 염전 |
|
|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를 조금 달리다보니 계곡 비탈에 계단식 소금밭이 눈에 들어 왔다. 유명한 살리네스 염전이다. 차가 멈추더니 원경을 촬영하라고 한다. 소금밭위쪽 틈에서 흘러나오는 용천이 있고 수로를 만들어 이물을 받아 가두는 계단식 소금밭들이 모자이크처럼 아름답다. 계단식 논이 4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소금의 질이 좋아 수출한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염전이 생길 수 있을까? 남미의 서해안은 지각의 판들이 만나는 곳이므로 지진대에 속하여 지각 변돈이 심한 곳이기 때문에 지진도 잦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변동에 의해 얕은 바닷물이 육지의 땅속에 갇히게 되어, 바닷물이 증발되어 암염으로 바뀌고, 이곳에 지표수가 침투하여 틈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비슷한 지형은 중국의 위난성에도 있어 유사한 방법으로 소금을 생산한다고 한다. 윈난성을 15일간 여행 했지만 가 보진 못하고 언젠가 TV에서 본 기억이 난다. 투어카 운전사가 얼음 조각처럼 생긴 소금을 한 덩이 준다. 기념품으로 가져가란다. 당연히 맛을 보니 짜다. 비닐봉지에 잘 싸서 가지고 다니다가 무거워서 버렸지만 아쉽다. 이제 주요 볼거리를 보았으니 허기가 진다. 투어 가이드가 안내하는 우루밤바 시내로 가서 점심은 뷔페로 먹었다. 값이 비싼 만큼 먹을거리도 다양하고 입맛에도 맞았다. 식당 내에서 현지인 악사들이 대나무로 만든 전통악기 등을 사용하여 남미 전통 음악을 연주 하는 것 같다. 우리 팀 중 한사람이 우리나라사람들이 많이 들어본 곡인 '엘콘도르 파자'를 신청한다.
쿠스코로 오는 길에 친체로 유적을 둘러보았다. 마츄픽츄를 연상하게 하는 돌들로 만들어진 담과 커다란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성모마리아가 이곳의 토속신앙, 대상 대지의 어머니 신인 '파차마마'의 의상을 하고 있었으며 예수그리스도 상도 토속적인 모습이 가미된 듯 예사롭지 않다. 정복자들의 신과 토속 잉카의 신앙이 혼합된 인상을 받게 한다. 주변 길가에는 많은 원주민들이 토속적인 공예품을 팔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 쉬어야 내일 또 야간버스로 티티카카호가 있는 푸노로 간다.
아홉째 날 (3월7일) 푸노(Puno)
밤새 버스는 7시간 정도 달려 아침이 되어서야 뿌노에 도착했다. 푸노는 티티카카호를 가기위해 머무르는 곳, 티티카카 호반의 도시로 페류의 남부, 안데스 산맥의 거의 중앙에 잇는 표고 약 3850m의 도시로 산과 산 사이에 끼어 있는 조그만 평지에 있다. 잉카제국시대의 푸노는 천신이 강림한 땅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에스파냐인에게 점령당한 후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다. 원주민은 도망가거나 많이 흩어졌지만 현재도 원주민 비율은 높다. 라마, 알파카 등의 모피 집산지이며 쿠스코~아레키파 간의 철도의 종점에 해당하여 남(南)페루 안데스 지방의 상업, 교통의 중심지 구실을 한다. 볼리비아 사이를 연결하는 정기 항로가 있으며 식민시대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티티카카호 |
|
푸노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아르마스 광장과 중앙시장을 둘러보다가 송어요리가 유명하다고 해서 광장 옆 현지인 식당에서 송어 요리와 누들을 저렴한 값에 먹었다. 그런대로 입맛에 맞았다. 그리고 티티카카호의 토토라는 갈대로 이루어진 우로스섬(isias los uros) 투어에 참가하여 그들의 생활 방식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갈대로 만든 노를 젓는 배를 타라고 해서 탔더니, 1인당 생각보다 많은 돈을 내라고 한다. 내린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한다. 한 사람(영어가 유창한 모 대학 교수)이 나서서 흥정을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한다. 값을 깎고 나서, 괘씸하다고 여겨, 그 가이드가 추천하는 섬주민이 운영하는 식당의 송어요리 안 먹을 것이니, 그냥 섬을 나가자고 해서 섬을 나와 숙소로 돌아 왔다. 다시 식료품과 채소 등을 파는 저렴한 중앙시장을 들러 고구마와 과일 등을 사가지고 왔다. 숙소에 돌아와 감자의 본고장에 원산지에서 감자를 쪄서 먹으니 맛도 좋고 감회도 새롭다.
10일차(3/8일) 볼리비아-라빠즈
오늘은 페루에서 볼리비아 국경을 넘는다. 볼리비아도 페루와 같이 원주민 비율이 남미에서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다. 원주민이 많을수록 부의 편중이 심하고 원주민들의 생활은 가난한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페루 출입국관리 사무소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걸어서 국경을 넘어 볼리비아 출입국 사무소에서 입국수속을 밟아야 한다. 이때 페루 입국할 때 함께 받아온 출국 카드를 꼭 지니고 있어야 한다. 별 것이 아닌데도 없으면 트집을 잡아 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쓰다 남은 페루 돈(솔)을 볼리비아 돈(볼리비아노)으로 바꾸는 일부터 해야 한다. 이중 환전하면 많은 손해를 보지만 할 수 없다. 그러기에 꼭 쓸 만큼만 환전해야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다. 입국수속을 밟는데 꽤 까다롭게 구는 것 같다. 우리나라가 IMF때인가 밉게 보여 그렇다고 한다.
페루-볼리비아 국경 |
|
버스를 타고 조그만 항구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 코파카바나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넌다. 라빠즈를 가면서 버스를 타고 티티카카호 주변을 달리며 보는 경치는 구름과 호수가 어우러져 장관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저녁때가 되에 볼리비아의 사실상 수도이며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인 ‘라빠즈’에 도착한다. 하지만 헌법상 수도는 ‘수크레’ 라고 한다. 라빠즈를 들어서면서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 철로 만든 거대한 상을 볼 수 있다. 체 게바라가 체포 되어 처형된 곳이라고 한다. 1965년 4월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는 보장된 2인자 자리를 스스로 내 던진 채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압제에 항거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볼리비아로 떠난다. 게바라가 그렇게 존경 받는 것은 죽는 날까지 권력을 등진 채 게릴라로 일관한 전설적인 삶 때문이었다. 쿠바 혁명을 완성하는 순간 모든 권력과 특혜를 버리고 다시 게릴라가 된 게바라에게서 영웅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라빠즈도 해발 3600m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다. 1449년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인 산프란시스코 성당을 볼 수 있다. 또 사가르나가(Calle sagarnaga) 거리에는 레스토랑, 민속예술품, 여행사들이 즐비하여 볼거리와 먹거리로 즐길 수 있다.
11일차(3월 9일)라파즈
대통령궁이 위치한 무릴로 광장과 남미에서 물가가 가장 싸다는 볼리비아, 라파즈의 마녀시장은 종류도 다양하고 값도 저렴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수공예제품인 인형과 체게바라가 시가를 물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하나 사서 입고 다녔다. 인류 사상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이 골프를 치러 왔다가 들른 곳이며 달의 분화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달의 계곡이라고 이름이 부쳐진 곳 "달의 계곡" 투어에 참가하여 기이하게 생긴 계곡을 둘러보았다. 저녁에는 야간 버스로 우유니 소금사막을 가기위하여 우유니로 간다.
라파즈 |
|
12일차(3월 10일) 우유니 2박3일 투어
우유니로 가는 버스는 한 밤중에 빵구가 났다. 길가에서 수리하는 차량이 올 때까지 한 두 시간을 기다리니 수리가 되어 출발한다. 허리도 아프고 불편해서 깨어보니 새벽 6시 가도 가도 황량한 사막과 하늘엔 구름 사이로 빛나는 영롱한 별들만 보일뿐이다. 버스가 쉬어 내려 보니 조그만 휴게소에서 음료수와 닭다리, 계란, 빵들을 팔지만 입맛이 없다. 다시 차는 S자형을 그리며 내려가다가 또 올라가곤 하다가 이끼뭉치 같은 풀들과 작은 관목들이 띄엄띄엄 있는 곳 사이로 물이 흐르는 내도 나온다. 나무로 만든 축구 골대와 농구장도 보인다. 집들도 별로 없는데 어디에 사는 아이들인지 즐겁게 뛰어 노는 광경도 보인다. 내가 이런 곳에 태어났다면 어떠했을까? '삶은 원시적이라지만 맘껏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 좋지 않을까' 개떡 같은 상상도 해본다. 길가에는 노란 이름 모를 꽃들이 아름답다. 사막에 손톱으로 긁힌 자국모양의 내에는 찔찔 눈물처럼, 비온뒤 학교 운동장에 흐르는 물길처럼 겨우 흐른다. 그곳을 지나니 이젠 야마먹이인 크리페cripe 화양목처럼 생긴 나무, 요레타yoreta라는 푸른 이끼뭉치 같은 식물, 빠자paja라는 토끼풀 등이 드문드문 보일뿐 사막이다. 그래도 풀과 나무가 자라는 곳에는 멋진 노루처럼 보이는 '삐꾸나'라는 동물들이 모여 풀을 뜯는다.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우유니에 도착하니 시장도 있고 관광객을 위한 음식점들이 제법 많다. 시장구경을 하고 아침을 해결한 다음, 렌드로바 차량을 타고 2박3일 투어를 시작한다. 우유니 소금사막을 가기 전, 사막의 한 가운데 푸른 하늘이 아름다운 곳에 세상의 모든 고물 열차가 다모여 있는 듯하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옛 철길에 못 쓰는 녹슨 기차를 모아 놓은 곳이다. 이곳의 기차들에는 낙서와 그림들이 사막과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그런대로 멋진 풍경이다. 관광객들이 기차에 올라가 사진을 찍으며 즐긴다. 지프는 계속 사막을 달린다. 드디어 소금 사막이 가까워졌다. 소금호텔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있는 곳에 멈추어 이것저것을 둘러본다. 소금으로 만든 기념품들이다. 소금으로 만든 조형물들이 정말 짠지 혀로 맛보는 이들이 많다.
소금평원에 비친 데칼코마니 |
|
소금밭은 한이 없이 넓다. 사방을 보아도 끝이 없고 멀리 지평선에 아름다운 순백색의 구름들이 푸른 하늘 위에 나타난다.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시인이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고 했지만 정말 가슴이 뛴다는 말을 이때 써야 하는 가보다.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자체가 어렵다. 멀리 지평선에 사라지는 투어 차량들을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실감할 수 있다. 멀리서 보기에 물고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물고기 섬의 아름드리 선인장들이 대단하다. 죽은 선인장을 이용해서 휴지통과 푯말들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소금 평원에 물이 낮게 고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소금물에 비친 반영들이 실물과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으로 보인다. 호수에 비친 것들보다 선명하고 아름답다. 같이 간 여행객들이 환상적으로 아름답다고 야단 들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천국에 온 기분이란다. 우유니 숙소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토담집 시멘트 바닥에 침대를 놓아 바닥에선 먼지가 인다. 그래도 좋다. 침실 앞 거실같은 빈 공간에 원시적인 난로가 있어 불을 피우려니 나무가 없다. 사막의 이끼 마른 것을 주어다가 불을 피우고 맥주와 남은 소주로 파티를 열었다. 숙소는 열악하고 피곤하지만 모두가 즐겁게 노래와 춤을 곁들여 가며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13일차(3월 11일) 우유니, 꼴짜니, 볼리비아 국립공원
우유니 2박 3일 투어 중 둘째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지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어제 저녁만 못하다. 그래도 몸을 추스르고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사막에 화산으로 인해 만들어진 수 만 가지 형상들을 볼 수 있는데 나무모양을 많이 했다고 해서 ‘스톤트리(Arbol de Piegra)’라고 이름이 붙여진 곳을 방문 했다. 스톤트리 나무모양뿐만 아니라 화산에 의해 만들어진 지형으로 자연이 만들어낸 수천가지 형상을 한 지형이다. 라구나까냐빠(Laguna Canapa)를 거쳐 수많은 플라밍고 무리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호수 라구나 에디온다(Laguna Hedionda), 주변 설산과 붉은 빛의 호수 홍학 무리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계속 도요타 지프로 사막길을 하루 종일 달리고 구경하고 모든 시설이 열악한 사막의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 지친 몸을 추스려 본다.
스톤트리 |
|
14일차(3월 12일) 산페트로 데 아따까마
아침 일찍 투어차량을 도요타차량을 타고 또 사막길을 달린다. 도중에 유황냄새와 함께 수증기를 뿜어대는 곳을 볼 수 있으며 노천 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사막의 도시 산페트로 데 아따까마에 도착하여 여정을 풀고 오후에 참가할 수 있는 달의 계곡 투어에 참가한다. 달의 계곡은 지각 변동에 의해 바다 밑 이었던 곳의 진흙덩이가 풍화에 의해 약한 곳을 풍화와 침식을 하면서 기암괴석모양 만들어진 지형이기 때문에 중간에 소금들이 섞여 있다. 함께간 포항 아저씨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가 극적으로 찾은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관광객이 지나가는 곳이니 만큼 찾는 다는 것은 참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 자리로 차를 돌려 가보니 마침 한국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협조해서 찾은 것 같다.
저녁 무렵까지 기다려 모래언덕 일몰 포인트에 가니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이 일몰을 감상하러 모여든다. 일몰을 감상 하면서 일행들과 환담도 나누면서 오후 여유를 가진다. 달의 계곡은 이곳과 라파즈에 있다.
내일은 22시간 버스를 타야한다. 버스에는 좌석이 까마(넓은 좌석, 3열배치)와 세미까마(4열배치)가 있는데 까마석이 적어 심지 뽑기를 해야 한다고 한다. 뽑기는 했지만 불편하거나 연세가 있는 분들을 위해 다들 양보하니 문제는 없다.
달의 계곡 |
|
15일차(3월 13일) 아따까마에서 산티아고
아따까마을 출발하여 22시간 기나긴 여정, 자다 깨고를 반복하다 밖을 보아도 풀한 포기 볼 수 없는 붉은 산과 사막이 이어진다. 언제쯤 도착할까. 파김치가 되어 깨어보니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옆줄 부산아저씨 옆에 카나다에서 미국에 유학을 하고 있는 지리학(지오그래픽)이 전공이라는 학생일 탔다. 전공이 전공인 만큼 여행을 많이 하는 것이 학업에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이 든다. 귀엽게 생겼고 어눌한 영어로 말을 거니 친절하고 받아 주며 이야기를 즐긴다. 자다 깨어보니 학생은 내리고 영화배우 더스틴호프만을 연상하는 키 작은 칠레인이 타고 있다. 그 아저씨 신발을 벗고 있는 데 발냄새가 지독하다.
말이 22시간이지 하루 꼬박 하루를 버스를 타고 달려 왔으니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산티아고 |
|
16일차(3월 14일) 산티아고
8시가 되어 동이 트기 시작한다. 산티아고 도착하여 짐을 풀고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성모마리아상과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크리스토발 언덕을 올라 산티아고 시내전경을 내려다보니 대단히 복잡한 도시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해산물과 야채가 가득한 중앙시장을 방문하여 간식거리 과일과 야채 등을 사 가지고 숙소로 온다.
17일차(3월 15일) 산티아고
절벽위에 아슬아슬하게 빼곡히 있는 집들과 그 사이를 운행하는 케니불카를 타고 미로 같은 항구도시 발파라이소 투어를 신청하여 이곳저곳 둘러본 뒤, 산티아고인들의 휴양지인 비르델마르에서 차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하루 종일 휴식을 취한다. 오늘 또 야간 버스로 푸에르토몬드를 가야한다. 12시간 걸린다고 한다. 야간버스에서 짐을 싣는 동안 감쪽같이 동료 여행객의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빼갔다. 귀신 곡할 노릇이다. 깜깜한 밤이고 무거운 짐을 번쩍 들어 올리느라 힘을 쓰는 새에, 고새에 빼가다니 소매치기가 아니라 마술이다.
18일차(3월 16일)-푸에르토몬트
12시간 만에 푸에르토 몬트에 도착했다. 푸에르토몬트는 남부 양키우에 군과 로스라고스 주의 주도이며 항구도시이다. 1853년에 세워진 이 도시는 당시 칠레 대통령이었던 마뉴엘 몬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되었다고 한다. 고속도로와 남북 철도와 해로의 종점이다. 국제 공항이 한 군데 있으며 수목으로 뒤덮인 언덕, 협만, 호수, 눈 덮인 안데스 산맥과 어우러져 지진에도 불구하고 인기 있는 휴양지다. 우리는 앙헬모 수산시장이 싸고 맛있는 해산물이 있다고 해서 숙소에서 걸어서 20분도 더 되는 곳을 찾아 갔다. 작은 수산시장이었는데 연어, 게, 홍합 등 여러 가지 해산물을 팔고 있었는데, 우리는 대게를 사서, 그 자리에서 삶아달라고 해서 포도주와 함께 먹었다. 포도주를 별로 좋아하지 안지만 내가 평생마신 포도주의 몇 배를 여기 칠레에서 마신 것 같다. 일단 값이 싸고 또 소주도 없으니까.
저녁에는 가까운 파출소를 찾아가서 일행 중 한 분이 어제 잃어버린 핸드폰에 대한 분실신고를 한다고 해서 가까운 파출소를 찾았다. 분실신고 증명서가 있어야 한국에 돌아와서 보험회사에 증명서를 제출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은 엉뚱한 곳(산티아고 버스터미널)에서 잃어버리고 푸에르트몬트 파출소에 신고하고 분실증명서를 발급받은 것이다.
19일차(3월 17일)-바릴로체로
일찍 일어나 시내에 있는 아르마스 광장을 찾았다. 등교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물어서 찾아 갔고 학생들과 손짓 발짓 대화를 하고 함께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시 걸어서 푸에르트몬트 역사박물관을 찾아가는 데, 광주에서 오신 선생님 부부를 만나 함께 박물관에서 도시의 옛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오후에는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간다. 국경을 넘는데 산과 호수가 어우러져 경치가 환상적이다. 국경에서 과일과 야채에 관한 검문이 심하니 국경을 넘기 전에 다 처리 하라고 한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휴양지인 ‘남미의 스위스’라 불리는 바릴로체에 도착했다. 바릴로체의 명물인 초콜렛과 아이스크림을 꼭 맛보라고 한다. 한밤중에 도착하여 이곳의 명물이라는 양고기 바비큐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20일차(3월 18일)-바릴로체
나우엘 외파 국립공원과 호수 투어를 신청하는 여행객이 많았으나 나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와 젊은이 두 명은 호숫가를 자전거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문제는 호수까지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서 가야하는 것이었다. 버스승강장에서 물어보니 버스요금이 7페소라고 해서, 버스를 타서 돈을 주니 운전기사가 받지 않고 내리라고 한다. 영문도 모르고 잠깐 실랑이를 하다가 내렸다. 알고 보니 아르헨티나 버스는 현금은 안 받고 카드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카드를 파는 곳도 멀다고 하고 말도 잘 통하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비싼 택시를 이용했다. 돌아 올 때는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세히 물어 보니 현금을 안 받기 때문에 현지인 승객에게 현금을 주고 대신 카드로 결재 해 달라고 하면 탈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올 때는 자전거 대여점 사장에게 버스요금을 주고 부탁해서 버스를 타고 오니 그 비용을 1/4로 절감할 수 있었다.
자전거 트레킹은 호숫가를 20km정도를 도는 것이었는데 경치는 그야말로 아름다웠지만 길이 경사가 급한 곳도 많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차도를 달리게 되므로 안전에 유의 하여야 한다. 중간쯤 내리막길을 오다보니 중간에서 휴식 중 만났던 중국인 자전거 트레커가 차량과 부딪히는 사고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구급차가 와 있는 것을 보고 자전거 탈 맛이 사라졌다. 조심조심 3/4 지점까지 가니 가파른 길이 나오는데서 자전거 대여점 직원이 나와 있었으며 20페소만 내면 여기에서 자전거를 반납할 수 있으며 자기차로 출발점까지 픽업을 해 준다고 한다. 3명이 상의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리고 버스비를 줄 터이니 우리들을 당신 카드로 결재해서 버스로 보내달라고 하니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올 때는 저렴한 비용으로 왔다. 오늘 하루도 참 힘들었지만 보람된 하루였으나 자전거 타다 다친 사람이 무사 했으면 하고 기도해 본다. 난 끔찍한 것 같아 바라보기가 무서웠는데 젊은이가 자세히 보니 의식은 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아내에게 사고가 났다는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자전거 하이킹 |
|
21일차(3월 19일)-바릴로체-로사리오-깔라파떼
남극을 제외한 지구상에 가장 큰 빙하를 있는 곳 깔라파테를 가기 위해서는 아침에부터 바릴로체공항을 출발하여 로사리오공항, 다시 로사리오공항에서 깔라파테로 두 번의 비행을 해야 한다. 빙하의 종류와 보고 싶은 방법에 의해 투어를 신청해야한다. 우린 나이와 체력에 알 맞는 빙하 미니트레킹을 신청했다.
모레노 빙하(남위 50도 부근) |
|
빙하녹은물 한잔 |
|
빙하얼을으로 위스키 칵테일 한잔 |
|
11시부터 투어에 참가하여 엘 깔라파테 빙하를 포함하는 국립공원을 간다. 미니버스를 타고 빙하를 보러 가는 길에 주변 설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달리다 보니 멀리 빙하가 보이기 시작한다. 말로만 듣던 빙하를 눈앞에서 보이다니 정말 감동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빙하를 보는 전망대에 도착하니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붐빈다. 길이가 50km, 폭 5k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빙하는 멀리 설산에서 만년설이 얼어 밀려 내려온 것인데, 빙하가 녹은 저 물의 색깔을 쪽빛이라고도 하고, 애메랄드 빛이라고도 하는 것 같다.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가끔 빙하가 녹아내려 무너지는 광경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빙하를 바라보며 즐기고 있는데 부산 아저씨가 독한 이름도 모르는 술을 한잔 권한다. 점심은 깔라파테에 사는 한국인이 만들었다는 김밥을 한줄 주문해서 가져왔다. 김밥 한줄에 5000원도 넘지만 그래도 입맛에 맞으니 빵보다는 나은 것 같다. 빙하가 있는 곳이지만 생각보다 춥지는 않다. 위도 상으로도 70~80도 부근은 되어야 빙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남위 50도 부근에 빙하가 있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시 버스를 타고 호수로 간다. 배로 호수를 건너 빙하트레킹(페리토 모레노 빙하)을 하러 간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가이드지시에 따라 빙하를 걷는다. 중간 중간 크레바스가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한다. 크레바스에 빠지면 정말 끝장이 날 것 같다. 빙하위에 고인 물은 정말 쪽빛 명경지수다. 기념으로 모두 한잔씩 마시라고 한다. 트레킹을 마치는 곳에 빙하의 얼음을 넣어서 위스키를 마시도록 준비를 해 놓아 한잔씩 마시고 트레킹을 마친다. 빙하에서 느낀 경이로움은 가슴으로 느꼈지만 그래도 남는 것은 사진이라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댄다.
빙하를 보면서, 알프스빙하에 묻힌 영원한 청춘-프레드 진네만의 [그 여름의 닷새 동안(1982)] 란 영화를 떠 올리게 한다.
[한겨레]신문 기사
알프스의 만년설과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 알프스 산록에 기대어 있는 대다수의 유럽 제국들은 코앞으로 닥쳐온 대 재앙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놓여있다. 인간의 무자비한 환경파괴에 대한 대자연의 응답이다. 그러나 녹아내리는 알프스는 전혀 뜻밖의 ‘선물’도 준다. 수십 년 동안 빙하 속에 냉동되어 있던 산악인들의 주검을 바깥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올여름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 이 지역 경찰들이 공식발표한 주검 발굴의 사례만도 부지기수다.
알프스에서 ‘실종’된 것으로 처리된 산악인의 대부분은 죽었다고 봐야한다. 다만 주검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망’이라 언표하지 않는 것뿐이다. 반면 함께 있던 동료들이 죽음을 확인한 다음, 노천에 방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건하게 크레바스에 밀어 넣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빙하 속에 묻힌 산악인들은 본의 아니게 냉동 미라가 된다. 세월이 그들을 비껴가 ‘영원한 청춘’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알프스가 그들을 빙하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만약 유족들이 그들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어떤 감정에 휩싸이게 될까?
프레드 진네먼의 영화 [그 여름의 닷새 동안](1982, 원제 Five Days One Summer)은 ‘존재론적 슬픔’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이 영화 속에서 50년 전에 죽은 약혼자와 얼굴을 맞댄 70대 노파의 표정은 잊을 수 없다. 빙하 속에 고이 냉동된 남자는 여전히 20대의 해맑은 청년이다. 그를 바라보며 노파는 말을 잊는다. 반가움은 원망과 교차하고, 그리움은 회한과 뒤섞이며, 세월은 결코 넘지 못할 장벽이 된다. 이 ‘세월이 갈라놓은 연인들’을 바라보며 문득 삶의 유한함과 사랑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더글러스(숀 코너리)와 케이티(벳시 브랜틀리)만이 아닐 것이다.
[그 여름의 닷새 동안]은 1930년대 알프스 등반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중년의 산악인 겸 의사 더글러스와 그의 젊은 연인 케이티의 짧은 여름휴가를 다루고 있다. 현지에서 촬영된 알프스 등반의 장쾌한 모습과 숀 코너리의 섬세한 내면연기가 일품이다. 이 영화의 절묘한 엔딩은 유명하다. 추락사고로 끝을 맺지만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주검도 지금 쯤 빙하 밖으로 나와 있을라나? 알프스에 가고 싶다. 영화는 아쉽게도 국내 미 출시작이다.
아마 산사나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는 이 이야기가 모티브가 아닐까 합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의 깊은 산간 마을에
어느 날 낯선 프랑스 처녀가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다음날부터 마을에 머물며 매일같이 계곡에 나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이 가고 또 해가 가고…
고왔던 그녀의 얼굴에도 어느덧 주름살이 하나 둘 늘어가고
까맣던 머리칼도 세월 속에 묻혀 하얗게 세어 갔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기다림은 한결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 날 이젠 머리가 하얗게 되고
할머니가 되어 계곡에 앉아 있는 그녀 앞으로
멀리 상류로 부터 무언가 둥둥 떠내려 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 청년의 시체였습니다.
바로 이 여인이 일생을 바쳐 기다려왔던 약혼자였습니다.
그 청년은 히말라야 등반을 떠났다가 크레바스에 추락하여
행방불명된 그 여인의 약혼자였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엔가는 꼭 눈 속에 묻힌 자신의
약혼자가 조금씩 녹아 흐르는 빙하 물줄기를 따라
떠내려 오리라는 것을 믿고 그 산골마을 강가를
떠나지 못하고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이젠 보잘 것 없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그녀는
수십 년 전 히말라야로 떠날 때의 청년의 모습
그대로인 약혼자를 끌어않고 한없이 입을 맞추며 울었습니다.
평생을 바쳐 이룩한 내 사랑 가슴 저미도록 슬픈 내 사랑
이젠 그곳에선 한 여인을 만날 순 없었습니다.
그렇게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오늘도
山사나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답니다.
23일차(3월 21일)-푸에르토 나탈레스
국경을 넘어 다시 5시간 걸려 칠레의 한적한 항구도시 푸레르토 나탈레스로 간다. 버스에서 보면 한없는 평야에 목장들이 이어진다. 목장의 경계 울타리를 보면 목장 1개가 얼마나 큰 땅인지를 실감한다. 경계에서 다음 경계까지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하니 얼마나 넓은 땅인가? “네가 오늘 하루 종일 갔다가 돌아오는 땅을 네게 다 줄테니, 갔다 오라고 했는데 욕심이 너무 많은 나머지 너무 멀리 갔다가 못 돌아 오른 바람에 땅을 하나도 못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기름진 땅들은 아니지만 땅 좁은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바닷가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주방엔 각 팀들의 요리경연대회가 열린 것 같은 정도로 모도가 시장을 보아다가 백숙, 바비큐, 스테이크 등 요리에 한창이다. 그 중에서도 빈대떡을 굽는 팀이 있었는데 최고의 인기 요리라고 모두가 칭찬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입맛에 딱 맞는다.
24일차(3월 22일)-또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투어를 신청하여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유명한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관광을 투어를 한다. “파이네”란 탑이란 뜻이라고 하는데 세 개의 봉우리가 보는 방향과 거리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과 호수는 그야말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산과 호수를 볼 수 있으며 꼭대기엔 만년설에 의한 빙하를 볼 수 있다. 또 호수엔 큰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그레이 빙하를 볼 수 있다. 걸어서 돌아보려면 며칠 걸리지만 차를 타고 포인트만 관전하는 수밖엔 없었다.
25일차(3월 23일)-남미 최남단 우수아이아(Ushuaia)로이동
투어차량으로 칠레 국경을 넘어 다시 아르헨티나로 간다. 국경에서 버스도 바꾸어 타고 버스를 배에 싣고 마젤란 해협을 지날 때 예쁜 돌고래들이 노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미 최남단 지구의 땅 끝 마을 우수아이아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그릴에 구운 치킨, 소시지, 소고기, 돼지고기 등을 무제한 즐길 수 있는 고기 뷔페가 유명하다 하여 맛보도록 하라고 여행 서에 있었지만 여의치 않아 가까운 음식점에서 맥주와 피자로 대신했다.
펭귄 서식지 |
|
26일차(3월 24일)-남미 최남단 우수아이아(Ushuaia)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일출을 보면서 배를 타고 비글해협으로 간다. 진화론으로 세계 지성인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그 유명하신 찰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이 곳을 발견 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비글해협으로 가면서 작은 섬 위의 엄청난 가마우지 떼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펭귄으로 착각을 했었다. 여기서도 엄청난 물개무리를 볼 수 있고 청정 바다엔 미역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아마 이곳 사람들은 우리처럼 미역을 작 먹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가마우지 등이 있는 곳을 한참 지나서 남쪽 끝에 야생 펭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뚱뒤뚱 걸어 물속에 잠수하는 모습 등을 볼 수 있었다.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펭귄을 직접 보다니 감회가 새롭다. 돌아오는 길에는 대게가 유명한 곳이니 만큼 대게로 유명하다는 음식점에서 대게를 먹고 오는 길에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에비타 페론 동상에서 사진을 찍고, 조그만 박물관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저녁에는 광주에서 오신 장 선생님 사모님 생일이라서 길거리에서 꽃을 꺾어 음료수 병에 꽂고, 스파게티 국수에 신라면 스프로 맛을 내고, 포도주와 과일로 생일 파티를 하는 여유를 보였다.
27일차(3월 25일)-부에노스아이레스-탱고 쇼를 관람하다.
우수아이아에서 비행기 편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동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공원을 찾았는데 공원 곳곳에 있는 아름다운 꽃이 핀 커다란 처음 보는 나무가 인상적이다. 이름을 물어보니 Arbol tree라고 한다. 비슷한 나무가 있는데 열매가 다른 것도 있었는데 이름을 물어보니 그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시내를 배회하면서 나머지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는 탱고의 본고장에서 탱고 쇼를 보면서 저녁식사를 했다.
28일차(3월 26일)-부에노스아이레스
세계 3대 극장 중의 하나라는 꼴론(콜롬보스)극장, 아르헨티나 각지방의 흙을 모아둔 기념비를 구경하고, 영화 마돈나가 주연한 영화 “에비타”의 실제 주인공 에비타 페론이 묻혀있는 레골레타 묘지를 방문하려 했으나 쉽게 찾지 못하고, 유명한 미술관에 들려 모네 그림등 유명화가의 작품을 감상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최대거리 플로리다거리, 산뜻한 파스텔톤으로 채색된 아름다운 보카지구를 방문 하여 거리의 탱고와 토산품가게 등을 구경했다.
에비타 줄거리
시골 가난한 농부의, 그것도 사생아라는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출생의 에바 마리아 두아르떼. 그녀는 나이트클럽의 댄서로 시작해서 라디오 성우를 거치며 자신을 천대해온 세상을 비웃어줄 수 있는 출세를 위한 야망을 키워 나간다. 영화배우라는 꿈으로의 첫걸음을 내딛을 즈음인 1944년, 지진으로 인한 난민구제모금 기관에서 에바는 노동부 장관인 후안 페론(조나난 프라이스)을 만나게 된다. 이 우연한 만남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에바의 운명을 단숨에 뒤바꾸어 버린다. 후안 페론과 에바의 결혼이 임박해 올 무렵, 후안 페론의 정치적 역량이 확장되는 것에 위협을 느낀 권력 기관과 군인들은 후안 페론을 체포하게 되고, 페론의 석방운동은 1945년 9월 17일 민중혁명으로 이어져,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추대되기에 이른다. 이로서 에바는 천한 농부의 사생아에서 고귀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로 등극한다.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소외당하고 멸시받았던 약자였음을 잊을 수 없었던 에바는 권좌에 있으면서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기금을 모으고,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며 불평 등을 척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에 감화된 수많은 국민들은 에바를 부통령 후보로 추대한다. 그러나 부통령 후보를 사임한 직후 에바 페론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기 암 진단을 선고 받는다. 1952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의 장례식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비탄어린 통곡 속에 장엄하게 치러지고, 결코 죽음으로도 잊혀 지지 않는 에비타의 신화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자리 잡는다.
29일차(3월 27일)-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프에르토 이과수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은 대통령정청 앞의 프라시데마요(5월의 광장)와 국회의사당을 잇는 데마요 가로(5월가로)이다. 중심부는 가로를 축으로 하여 직교상으로 계획 되고, 파리를 모방한 건물이 계획적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18세기에 식민지의 수도로 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하여, 1810년 이후 독립전쟁 때에는 요새가 되어 독립 쟁취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민은 이탈리아계와 에스파니아계의 후손들이다.
오전은 시내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나니 이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위치파악으로 지도 보는 법을 익힐 때쯤에 다시 이과수폭포(Puerto Iguazu)로 떠난다. 버스를 타고 또 18시간을 달린다. 달리는 동안 끝없는 목장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넓은 땅들을 가진 목장주는 어떤 사람일까? “늑대와 소년”이 생각난다. 저 넓은 목장을 혼자 지키려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 했을까? 아니면 너무 바쁜 나머지 힘들어서 그랬을까? 어렸을 때 가슴 설레며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별”도 생각이 난다.
‘잠든 그녀를 보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떨림이 일어났지만 아름다운 생각밖에는 준 적이 없는 맑은 밤이 나를 경건하게 지켜주었습니다. 우리 주위로는 거대한 한 무리의 양 떼들처럼 별들이 조용히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별들 중 가장아름답고 반짝이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에 기대 잠든 것이라고’
-알퐁스도데의 별 중에서-
차창 넘어 멀리 지평선으로 해가 지고 있다. 금성이 보이고 오리온자리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30일차(3월 28일)-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u)
푸에르토 이과수에서 폭포까지 가기위해서는 왕복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숙소를 출발하여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국립공원에 도착하여, 다시 조그만 열차를 타고악마의 목구멍을 먼저 가기로 했다. 중간에 많은 폭포들을 조망할 수 있는 곳과 익스트림 투어 하는 곳을 가기위한 중간 역이 있지만, 먼저 악마의 목구멍을 보기위해 종점역으로 갔다. 가는 길에 여러 종류의 동식물을 볼 수 있다. 특히 귀엽게 생긴 너구리와 새들을 볼 수 있는데 원숭이와 너구리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먹던 음식을 가로채 가기도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먼저 맨 마지막 역에서 내려 폭포의 하이라이트 “악마의 목구멍”을 구경하기로 했다. 악마의 목구멍을 가기위해서는 역에 내려 계속되는 강 위를 철로 만든 다리를 따라 구불부불 먼 거리를 걸어야 한다. 아직 폭포는 보이지 않지만 넓이며 흐르는 속도며 엄청난 수량의 강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다리 밑을 보고 있어 무언가 보니 아마존에서만 볼 수 있다는 물고기(메기)가 강아지만 하다. 곳곳이 아름다운 모습을 한 꽃과 새들이 노래를 한다. 한참을 가야만 폭포가 보인다. 장관이다. 좁은 협곡 사이로 엄청난 물줄기가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거대한 광경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모든 세상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악마의 목구멍”, 이름처럼 거대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모습에 전율과 감탄을 나도 모르게 내 뱉는다. 엄청난 물보라로 가까이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기념촬영도 어렵다.
악마의 목구멍 |
|
이과수란 이름은 원주민 인디오들이 폭포를 부르던 호칭에서 유래하며, ‘이구’는 물의 뜻이며 ‘아수’는 장대한 것에 경탄의 뜻을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이구아수 강의 하류에 위치한 폭포는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과 브라질 이구아수 국립공원으로 나뉜다. 두 공원은 1984년과 1986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최대 낙차 80m 이상이며,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이 유명한 관광 명소이다. 걸어서 볼 수도 있고, 배나 헬리콥터로도 관광할 수 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가 방문했을 때, 이구아수 폭포를 본, 부인이 "불쌍하다. 나의 나이아가라야"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악마의 목구멍 조망대를 나와 수많은 폭포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을 갈 수 있는 조망대로 갔다. 거기에서 보트 투어에 참가하면 보트를 타고 폭포 밑까지 접근하는 것이다. 우비를 준비해서 입었으나 소용이 없다. 모두 흠뻑 젖어 나올 수밖엔 없다. 원래 세찬 물보라와 물줄기를 맞고 온전할 리 없다. 배는 흔들리고 물보라를 세차게 맞지만 기념사진을 찍느라 야단이다. 투어를 마치고 수많은 폭포를 감상하다가 다시 시간이 남아 악마의 목구멍으로 다시 갔다.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아침에 갔을 때 심한 물보라로 시야가 흐렸고 사진촬영을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해서인데 다시 가봤지만 마찬가지다. 세차게 흐르는 물이 언제나 물보라는 장관이다.
브라질
31일차(3월 29일)- 포스두 이과수
국경을 넘어 브라질 쪽의 이과수 포스두 이과수로 간다. 브라질 쪽 이과수 국립공원 투어에 참가하여 웅장한 파노라마를 감상하고자 한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의 국경에 걸쳐 있는 이구아수 폭포는 두 나라에서 모두 볼 수 있는데 양국 모두 이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쪽에 있는 271개의 폭포를 브라질 쪽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모습을 관망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32일차(3월 30일)- 리오 데 자네이로
리오에 내려 택시 타는 것은 잠 잘 되어 있었다. 바가지요금을 못 받도록 터미널 택시 안내소로 가서 행선지를 말하면, 가격과 거리를 인쇄해서 준다. 미터기가 얼마를 나왔든지 간에 그 가격만 내란다. 참 좋은 제도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택시 기사가 호텔을 잘 못 찾는 바람에 훨씬 많은 미터 요금이 나 왔는데도 그 가격만 받았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같은 호텔까지 가는 손님들 사이에 엉터리 미터기로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값을 각각 지불 했던 기억을 하면 너무나 좋은 제도라 아니 할 수 없다.
“설탕빵”이라는 기묘하게 생긴 바위산 “판 데 아스칼”과 꼬르바두 언덕의 38m의 예수상과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전경 또한 장관이다. 저녁에는 그 유명한 코파카바나 해변을 찾아 가 해변의 연인들을 모습을 볼 수 있고, 고기 뷔페에서 포도주와 각종 육류를 실컷 먹었다.
예수상 |
|
33, 34, 35일차(3월 31일~4월2일)-리오 공항으로
하루종일 휴식을 취하고 리오공항으로, 마이애미 달라스 경유 인천공항 도착
첫댓글 잘 다녀 오셨군요. 장기간 수고 많이 하셨고 좋은 구경 많이 하여서 좋았겠어요.
감사합니다.
역시 여행 스케일이 다르십니다.
전 그냥 보이는것만 보고 다녔는데.
세세한 여행담이 남미를 다시 복습하게 하네요.
감사합니다.그리고 고마웠습니다.가입인사 함께 올립니다.꾸~벅
노틀담의 종치기요, 해운대의 종치기요? ㅎ ㅎ 박선생님 감사합니다.
중여동에서 글을 읽고 여기까지 왔네요...
언제갈지는 모르지만 이루고 싶은 꿈입니다. 여행...
여행사와 경비같은 것을 물어도 될까요?
"인도로 가는길"여행사를 이용했고요. 600만원과 그외 최소한 경비 미화 2000$
총경비 850만원 정도면 됩니다. 고가의 선물을 사지 않는 다면요.
경비에대한 질문입니다. 850만원은 부부 혹은 개인당 소요 겅비인가요?
1인당 입니다.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이제사 남이며행기를 대충 마쳤습니다.
읽어 주셔 감사합니다.
그 먼 나라. 남미대륙을 여행하셨다니.... 부럽습니당.
잘 읽었습니다.
하루하루 살기 빠듯하고 바쁘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새로운 꿈이 생길것만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늦게나마 축하 드립니다.
저도 퇴직후 꼭 가고 싶은데,,,꿈을 꾸게 해주시네요. 멋지십니다.
1년정도 후, 남미여행이 꿈인데, 준비를 위해 선생님 여행 자료좀 받아볼수 있을까요? 코스, 여행경비, 준비과정등 팁이 될만한 거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남편 퇴직기념 여행을 생각중인데,,,,여행이 가능할지도 걱정되거든요
jhc0903@korea.kr
얼마든지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읽으며 글을 거침없이 참 잘 써내려가심에 감탄했고 남미 여행을 다녀온 사람으로 또 다른 면을 보게되었답니다~^^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