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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장소 |
내용 |
비고 |
08:00 |
잠실역 주변 |
서울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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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학사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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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 |
함양석조여래조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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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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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
함양 상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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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 |
남계서원·청계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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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일두 정여창 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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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안의 광풍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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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
동호정·군자정·거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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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
용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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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함양 출발 |
함양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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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
잠실역 주변 |
서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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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강사(오덕만 선생 011-417-7481)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旅路에서 즐기는 詩 感想 ]
편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평안을 위하여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 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있는
겨울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모두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많은 학자들이 배출된 함양
함양군은 상고시대에 마한과 진한, 변한의 경계였으며 가야 문화권에서 신라 문화권으로 변해간 것으로 사료된다.
함양은 경남의 서북부에 위치하여 북쪽에는 남덕유산이 있고 남쪽에는 지리산이, 그리고 그 중간에 백운산이 있어 소백산맥의 산줄기가 호남 지방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과 백운산에서 흘러내린 위천, 전북의 운봉과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엄천이 군의 동남쪽에서 합수하여 남강으로 흐른다. 서편으로는 산이 높고 동편으로는 지대가 낮은 고장으로 동서간이 25㎞, 남북간이 50㎞이고 724,8㎢인 산간 지대로 평야가 좁아서 79%가 임야이고 농경지는 14%에 불과하지만 주산업은 농업이다.
옛날엔 주변의 중심적인 도시였지만 지금은 거창·남원·진주가 크게 발전한 반면 이 고장은 침체되고 낙후되어 있는 고장이다. 인구는 약 48,000명이고 지금까지 교통이 불편했지만 88올림픽고속도로가 뚫리고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2002년 개통되며 군산-함양 간, 울산-함양 간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명실 공히 고속도로 중심지가 되는 곳이며,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과 제10호인 덕유산을 중심으로 황석산, 기백산, 백운산, 괘관산, 오봉산, 삼봉산 등 1000m가 넘는 고산들과 심진동, 화림동, 백무동, 부전동, 칠선계곡, 한신계곡 등의 고산심곡은 등산 코스와 관광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지역이다.
삼국시대에 접경 지역으로 분쟁이 심한 지역이었으며 고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은둔하여 후학 양성을 함에 따라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좌안동 우함양』으로 불리어졌으며 근세 격동기에는 빨치산 활동으로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자연 경관이 수려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곳이며 내륙 고속도로간의 연결 지점으로 물류단지로서의 최적합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연혁
신라시대에 속함군(速含郡)으로 부르다가 천령군으로 개칭
고려시대에 허주도단련사로 승격되었다가 현으로 바뀜. 안의는 현으로 되어 함양군과는 따로 행정을 함.
조선시대에 다시 함양군, 함양부로 승격 또는 강등을 거듭하였으며 안의군에는 거창군이 소속되기도 하였음.
1914년에 안의군이 폐지되어 7개면이 함양군으로 합병
1933년에 13개면에서 12개면으로 구역 조정
1957년에 1읍 10개면으로 구역조정
함양은 중부고속도로(대전 진주간 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어 전국 어디서나 접근이 용이한 곳이며 심산유곡의 명경지수와 골골이 숨어 있는 전설, 그리고 전통문화를 자랑한다. 북쪽에는 남덕유산이 내려다보고 남에서는 지리산이 떠받치고 있으며 동으로는 기백산, 서로는 백운산이 자리하고 있다.
명산들이 빚어내고 분출하는 수많은 계곡과 옥계수만으로도 함양을 찾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 대진 고속도로 상에 있는 서상IC로 들어와 왼쪽 편으로 가면 논개묘가 있다.
덕유산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함양의 덕유산 자락에는 전통사찰 55호인 영각사가 자리하고 있다. 논개묘가 이곳에 있는 까닭은 진주남강에서 투신한 논개의 시신을 함양 의병들이 수습하여 이곳에 쉴 자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라 한다. 서상IC에서 오른편 길로 접어들면 화림계곡이 나온다. 계곡을 따라 도로가 이어지고 청정수가 흐르는 남강에 거연정, 군자정 등 유서 깊은 정자들이 서있는 걸 볼 수 있다.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가면 농월정이 나오고,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동방5현 중의 한 사람인 정여창 고택을 들려본 다음 함양읍내로 들어갈 수 있다.
농월정 방면으로 가다 보면 왼쪽 편으로 사당이 있고 저 멀리 황석산성이 있는 황석산이 보인다. 정유재란 당시 왜적을 맞아 격전을 벌였으나 그 해 8월에 함락되어 500여명이 순국한 우국충절의 현장이다. 농월정이란 이름에는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자연 친화적인 풍류가 스며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고장출신 박명부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지은 정자이다. 선생은 임란당시 의병을 지휘하다 진주대첩 전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월연암이라는 거대한 너럭바위에서 물 미끄럼을 타며 노는 아이들, 모래사장 텐트촌에서 자기들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해방감을 느끼며 자립의 의지를 키우는 청소년들, 동동주기울이며 신선의 기분을 만끽하는 어른들, 이렇게 농월정은 함양을 찾는 나그네들의 훌륭한 쉼터가 되고 있다. 함양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누정들이 역사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농월정을 지나 안의 방면으로 가다 보면 용추계곡이라는 도로표지판을 볼 수 있다. 좌회전하면 심원정계곡과 황석산성, 그리고 기백산이 토해내는 용추폭포, 용추 자연휴양림으로 갈 수 있다. 기백산은 함양과 거창군의 경계를 이룬다. 지우산이라고도 불리우는 기백산을 오르는 등산로 입구는 용추사 일주문이 일반적이다. 가을철이면 “누룩덤”이라 불리우는 기백산의 정상에서 금원산으로 가는 능선 길에는 3km정도에 달하는 억새 풀밭이 있다. 산정에서 은빛물결을 감상한다는 것은 산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아닐까. 이곳을 다시 돌아 나오면 거창과 진주로 이어지는 국도로 갈 수 있다. 정여창 성생이 살던 정병호 가옥은 농월정에서 함양읍으로 이어지는 지곡면 개평리에 있다. 한국전통가옥의 구조와 양식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대문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바위가 깔려있는 것은 말발굽소리가 나게 하기 위해서다. 화장실은 재래식이지만 밖에서 문을 열어도 안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도록 구조가 되어 있다.
상림 숲은 최치원이 조성했다는데 봄이면 생명이 움트는 모습으로 활기를 얻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낙엽을 밟으며 산책하기에 너무도 좋은 곳이다. 어린이에게는 자연 학습원이며 연인들에게는 추억과 낭만의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명의 유의태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산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어떨까. 날마다 수백 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처방을 내려준 인산선생이 은거했던 함양읍 죽림리 인산동천을 김윤수는 “활인구세의 성지”로 표현하고 있다. 함양석조 여래좌상도 놓칠 수 없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4m가 넘는 거대한 조각상으로 함양중학교 경내에 있다. 함양읍에서 휴천면을 지나 마천면에 들어서면 가흥리에 전통사찰인 금대암이 있다.
지리산은 삼정계곡, 한신계곡, 한신지계곡, 칠선계곡을 함양 땅에 선사했다. 함양의 지리산을 찾으려면 88고속도로상의 인월IC로 진입하여 마천 방면으로 오는 것이 좋다. 도로변에 서있는 커다란 석장승이 서있고 그 옆으로 임천이 흐르고 있다. 장승을 지나오면 백무동 표지판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 백무동으로 들어가면 삼정, 한신, 한신지계곡이 나오는데 일명 백무동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마천면 덕전리에 있는 마애 여래입상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5m나 되는 키에 대좌, 광배, 불신 등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삼정계곡의 선유정에는 선녀와 나뭇꾼의 이야기가 전해오며 지리산 백소령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칠선계곡은 임천을 따라 계속해서 가다 보면 유일하게 아치형의 모양으로 다리를 꾸민 의탄교를 볼 수 있는데 다리를 건너면 추성리마을이 나온다. 칠선계곡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벽송사와 서암이 있다. 벽송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서있는 목장승을 쳐다보면 일찍이 이곳 마천이 판소리 변강쇠전의 무대가 되었다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벽송사에는 지암이라는 장군이 벽송대사가 되기까지의 전설이 전해오며, 서암에는 길손이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숙박시설도 갖추어 놓고 있어 하룻밤 머물며 세상근심 잊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를 이루며 엄천강 상류지역에 있는 마을 송정리에는 용유담이 있다. 이 용유담의 맑은 물에는 무늬가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다 하여 '가사어'라 이름 붙여진 물고기가 살고 있다. 지리산 계곡에서만 사는 물고기로 남원의 달궁계곡과 이곳 사이만을 왕래한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함양은 4통8달의 교통입지를 갖추고 있으면서 산마다 고을마다 전설과 역사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학사루(學士樓:유형문화재 90호)
시내에 있는 학사루(學士樓)는 오래된 2층 누각으로서 제법 넓었다. 오래된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기둥과 마루의 단청도 낡아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가진 학사루는 이건 시 발견된 상량문에서 숙종 18년(1692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건물은 객사가 있었던 현재 함양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객사의 부속 건물로 보이는데 현재의 위치로 1979년에 이건한 것이라고 한다. 학사루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무오사화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걸렸던 유자광이 쓴 시를 이곳의 군수로 있던 김종직이 내리도록 하여 유자광이 사적인 원한을 품게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4년) 김일손(金馹孫)등 신진 사류(士類)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나라에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작업 당상관이 되었는데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문제와 이극돈을 비판하는 상소문이 발견됐다. 조의문제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내용이었다. 또 세조비 정희왕후 상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장흥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것을 적은 것으로 김종직과는 원수 척을 짓게 되어 달려간 곳이 유자광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양 학사루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대립각을 보였던 인물이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조의문제를 읽어보고 세조를 비방한 글이 김종직의 지시 아래 씌어졌다고 인정하고 세조의 신임을 받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려 김종직,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한 사건이다. 이 사화로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서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까지 가해진 사건이다.
조의문제가 삽입된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이극돈은 파면되고, 유자광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다른 사화(士禍)와는 달리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었기에 무오사화(史禍)라고 한다.
함양 학사루 次咸陽學士樓題
별동(別洞) 윤상(尹祥, 1373~1455)
頭流山迫白雲間 두류산은 흰구름 사이에 솟고
傍麓經營問幾官 기숡에는 여러 고을이 있네
最是許州鍾秀氣 허주가 가장 빼어난 기가 모여
稟生人傑滿朝端 인걸을 낳아 조정에 가득하네
역주: 함양은 고려 성종 14년(995)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되었다.
학사루 주련 學士樓 柱聯
七月蟬聲滿一樓 (칠월선성만일루) 칠월의 매미소리 누에 가득한데
登臨回顧叉傷秋 (등림회고차상추) 누에 올라 회고하니 감회가 깊구나
長林上下高城出 (장림상하고성출) 긴 숲 위아래로 높은 성이 우뚝하고
大野東南二水流 (대야동남이수류) 한들의 동남에 두 냇물이 흐르네
學士已乘黃鶴去 (학사이승황학거) 학사는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렸는데
行人空見白雲留 (행인공견백운류) 행인은 부질없이 흰 구름만 바라보네
可憐風物今猶昔 (가련풍물금유석) 가련타 풍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常有詩篇揭軒頭 (상유시편게헌두) 언제나 추녀 끝에는 시편이 걸려있네
尹忠憲公實紀序
人臣之臨難致命固職分之常也 而孔子許以殺身成仁 孟子稱以舍生取義者 蓋以得天命之正理 植萬世之大綱也 然其識足以燭於未然 其言足以救其將危而力有不及終以身殉之 則君子尤悲其志而惜其死也 余於忠憲尹公之死江都 爲之掩卷而於邑也 噫丙子之事 尙忍言哉 當時殉國諸賢 節義焯然 皆可以有辭於天下後世 獨忠憲當北使之起釁也 言于人曰 我旣絶和 朝野洶洶 廟廊恬然 曾無畫一籌爲備禦之謨 其先事之憂如此 及夫廟社之入江都也 上書宰相 痛斥金慶徵李敏求玩寇弛備之罪 請急令 進駐津口 耀兵整檝 內鞏分都之守 外援南漢之危 而言終不用 以致北兵飛渡 一島瓦解 大臣從臣 相率入於烈火之中 志士勇夫 騈肩死於鋒刃之下 雖食誤國者之肉 何補於事 嗚呼 誠使公言 見用於絶和之初 則豈有倉卒奔播之擧 見用於保守天塹之時 則奚至蹈躪芟夷之禍乎 如公可謂生而盡扶顚之忠 死而明報國之心 非存於中者有素養 何以及此 蓋聞公少從牛溪沙溪兩君子遊 又與仲兄八松公 竝立臺端 風裁自 持 沈抑而不悔 則可見其學有所本而非一朝慷慨捐生者比也 公歿後 旣贈其官 又立祠焉 崇報之道 靡有餘憾 而今公耳孫咸陽宰光碩甫 裒公死事始末及遺文狀誌 將刻木而傳後 徵辭於不佞 噫是編之成 可以勸百世爲人臣者 非直爲一家之文獻也
良浩 平日慕公之義 願爲之執鞭 而猶未詳當時深識鯨論若是其偉也 故獨於此發揮而表揚之 使後之攬者 知公之言議 實關國家之存亡 而不亶致命之大節而已
崇祿大夫 前行吏曹判書 兼知經筵春秋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洪良浩 謹序
학사루에서 간행한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의 이계(耳溪) 홍양호 서문
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이 간행한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로 인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절교 사건
신하로서 난리에 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진실로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공자님은 살신성인, 맹자님은 사생취의(생을 버리고 의를 취함)라고 칭찬하신 것은 대개 천명의 바른 이치를 얻고 만세의 큰 강령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식견이 충분히 그 미연에 밝게 알고 그 말이 장차 위태로움을 구제할 수 있음에도 힘이 못 미쳐 마침내 몸으로 순절한다면 군자는 더욱 그 뜻을 슬퍼하고 그 죽음을 애석해하는 것이다. 나는 충헌공 윤공의 강화도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책을 덮고서 탄식한다.
아, 병자호란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 순국한 여러 현자들의 절의는 찬연하여 다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을 것이다. 유독 충헌공은 청나라 사신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이미 화친을 거절하여 조정과 재야가 흉흉한데 정부는 태연하게 아무런 방어 대책 하나 계획함이 없구나.” 하였으니, 그 일에 앞서 걱정한 것이 이러하였다.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 갔을 때 재상에게 글을 올려 김경징(金慶徵, 1589~1637,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강화가 함락되자, 수비 실패를 이유로 대간(臺諫)에게 탄핵을 받아 사사(賜死)되었다.)과 이민구(李敏求, 1589~1670, 병자호란 때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려 하였으나, 적군이 어가(御駕)의 길을 막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후에 돌아와 경기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강화 함락의 책임으로 아산(牙山)에 귀양 가고 1643년 영변(寧邊)에 이배(移配)된 후 1649년 풀려났다. )가 적을 얕보며 방비를 소홀히 한 죄를 통렬히 배척하면서, 급히 명령하여 나루터에 주둔하여 병력을 과시하고 배를 거둬들이고 안으로는 임시 수도의 방어를 공고히 하고 밖으로는 남한산성의 위급을 구원하자고 요청하였으나 말이 끝내 쓰이지 않아 청나라 군대가 나루를 건너와 한 섬이 와해되고 대신과 종신들이 서로 불길에 뛰어들고 지사와 용사들이 나란히 칼날 아래 죽음을 맞는 일이 벌어졌다.
비록 나라를 그르친 자의 살점을 씹어 먹더라도 어찌 일에 보탬이 되겠는가. 오호라, 진실로 공의 말이 화친을 거절한 초기에 쓰였다면 어찌 창졸히 파천 가는 사태가 있었겠으며 천연 요새(강화도)를 방수하는 시기에 쓰였다면 어찌 유린당하고 섬멸당하는 재앙에 이르렀겠는가.
공같은 이는 살아서는 위급을 부지한 충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나라에 보답한 마음을 밝혔다고 할 만하다. 중심에 보존된 것이 소양이 있지 않으면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대개 들으니 공은 어려서 우계(牛溪 성혼)와 사계(沙溪 김장생) 두 군자를 따라서 배웠다고 했고 또 중형인 팔송공(八松 윤황)과 함께 대간의 풍모를 지니고 침체되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그 학문이 근본한 바가 있고 하루아침에 강개하며 생명을 버리는 자와 비길 바 아님을 알겠다.
공이 몰한 뒤에 이미 증직하였고 또 사당도 세웠으니 높여 보답하는 도리에 남은 유감이 없는 것이다. 지금 공의 후손 함양 수령 광석이 공의 순국 사실과 유문 및 행장 등을 모아 판각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하며 내게 글을 요청하였다.
아, 이 책의 편성은 백세토록 신하된 자를 권면하는 것이고 비단 한 집안의 문헌이 될 뿐만은 아니다. 나는 평소 공의 의리를 사모하여 운전대라도 잡고 싶었지만 오히려 당시의 깊은 학식과 강직한 논의가 이렇게 위대한 줄은 몰랐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발휘하고 선양하여 후세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의 논의가 실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고 목숨 바친 큰 절의만이 아님을 알게 하는 바이다.
숭록대부 전행이조판서 겸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홍양호(洪良浩, 1724 ~ 1802) 근서
박지원의 『연암집 燕巖集』에 「여윤함양광석서 與尹咸陽光碩書」가 있는데 이는 윤광석에게 절교를 선언하는 편지이다. 박지원은 정조 16년(1792)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뒤 그 2년 전(정조14,1790)에 함양군수로 와 있던 윤광석과 이웃 고을 수령으로서 친하게 지내었다. 그런데 윤광석이 이임(정조19,1795)에 임하여 서둘러 자기 조상 후촌(後村) 충헌공(忠憲公) 윤전(尹烇 1575-1636)의 실기 곧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 일명 『후촌집 後村集』을 간행함으로써 그 내용에 박지원의 조상인 기재(寄齋)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윤전의 요직 진출을 방해했다고 나쁘게 묘사한 글로 인하여 관계가 악화되고 말았다. 연보의 인조대왕 원년(熹宗天啓三年癸亥) 경기도사 임명조 기사에, 박동량이 계축옥사의 빌미를 제공한 일을 윤전이 비판한 것으로 인해 그 당파를 사주하여 윤전이 대간이 못 되게 하고 외직으로 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박지원과 윤광석이 죄수 심문 일로 인하여 모였다가 헤어질 때 윤광석이 『후촌집 後村集』의 원고를 내주며 교열을 부탁하였는데 박지원은 원고의 교정 상태가 어지러워 대충 보고 말았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자기 조상 이야기가 있는 것을 간과하였으니 윤광석 측에선 묵인한 것으로 오해하고 문제가 없다고 파악하고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뒤늦게 박지원 문중에서 내용을 보고 박지원을 힐난하니 박지원은 졸지에 조상을 욕보이는 일에 동참한 패륜아가 된 것이었다. 박지원은 이 책을 함양의 학사루에서 간행할 때 안음의 각수승(刻手僧)을 보내어 지원하였고 그 현장을 방문하여 격려한 입장이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조 16년(1792)에 윤광석이 함양군 서계(西溪)에 흥학재(興學齋)를 세우자 그 기문을 지어주었으니 『연암집』에 있는 「함양군흥학재기」이다. 정조 17년(1793)에 안음의 여인으로 함양의 임술증(林述曾)에게 시집간 밀양박씨가 남편을 따라 순절하자 박지원은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고 윤광석과 산청현감 이면제(李勉齊) 등도 열녀전을 지었다. 정조 18년(1794)에 윤광석이 학사루가 퇴락하자 자기 봉급을 털어 크게 중수한 뒤 박지원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짓게 하였으니 그것이「함양군학사루기」이다. 정조 19년(1795)에 윤광석이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를 간행함에 미쳐 박지원을 연루시킴으로써 둘은 절교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인간관계는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얽혀 있으니 이것을 초월하기는 어려운 일임을 박지원의 절교 사건에서 실감할 수 있다.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는 3권 1책으로 그 책판이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최치원과 김종직 향사)에 간직되어 있었는데 서원이 훼철된 뒤 행방을 알 수 없다.
학사루의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 407호)
학사루 느티나무를 생각하면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란 구절로 이어지는 시가 생각난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삶이, 실은 어디 있는가? 켜켜이 상처가 아물어 단단해진 몸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상처받지 않은 처음의 영혼으로, 두려움 없이 모든 것과 다시 만날 수 있어야지 않을까. 학사루 느티나무를 보며 그런 메시지를 느낀다. 600년 시간을 견뎌온 이 나무에게 늘 좋은 조건만 있었을까? 그랬을 리 없다. 100년이 못되는 사람의 삶도 구절양장의 고비를 넘는데 말이다.
이 나무는 처음 심어졌을 때부터 사람의 깊은 슬픔과 함께 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조선 전기 문신인 김종직 선생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함양군수로 재임하던 중에 5살짜리 아들을 홍역으로 잃었다. 그의 슬픔은 점필재집에 실린 시 한 수에 남아있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 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 /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아이의 이름은 목아(木兒), '나무아이'라는 이름이었다. 자식을 잃은 다음 해에 그는 승진하여 함양을 떠나면서 자주 시름을 달래던 학사루 앞에 천년을 사는 느티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은 이 나무가 '나무아이'의 짧은 삶에 대한 아쉬움으로 심어진 나무라고 믿고 있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상실의 아픔은 신분이나 시대를 넘어 모든 삶에 공통된 감정이기에 그 사연을 안 사람들은 누구나 학사루 느티나무가 나무아이 대신 오래 살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소망을 입어 나무는 이토록 건강하게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느티나무는 개인의 집안에 심는 경우는 드물고 마을 안 정자나무나 당산나무로 많이 심어져 공동체의 크고 작은 일들과 더불어 자라났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동네 사람들은 한여름 철이면 보신탕을 끓여 나누어 먹느라 연기를 피워 올리기도 하고, 동네잔치에는 나무 아래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겠다. 냇물과 물고기가 한 몸으로 흐르는 것처럼 느티나무와 사람들은 정 깊은 풍경으로 같이 시간을 살아낸 거다.
함양 석조여래좌상(咸陽 石造 如來坐像)(보물 제376호)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앉은 높이가 2.45m에 좌대를 포함하면 무려 4m가 넘는 거대한 조각이다. 불상 뒤의 광배가 없어지고 얼굴. 오른쪽. 무릎과 대좌의 일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얼굴이 많아 닳았고 머리 부분도 깨어져 있으나 크고 강건하게 보인다. 코와 입의 모습은 함양 마천면의 마애여래입상과 닮았는데, 미소까지 비슷하다.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두텁게 새겨진 법의는 왼쪽 어깨만 걸쳐있다. 오른손은 깨져 없어졌지만 땅을 가리키는 모양으로 보이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사각형의 좌대는 측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상대(上臺), 한 면에 두개씩 눈 모양을 새긴 중대, 두텁게 새긴 겹 연화문을 돌린 하대의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 석조불상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걸작으로 원래는 청룡사 터 또는 용산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함양 상림 숲
지리산 자락의 고장 함양군 함양읍 대덕동에는 낙엽활엽수림으로선 유일하게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된 상림이란 숲이 있다. 멀리 함양 북쪽 백운산에서 발원한 위천수변을 따라 길게 고구마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200~300m 폭으로 2.1km쯤 길쭉하게 조성된 이 낙엽활엽수림에는 서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당단풍나무, 생강나무, 나도밤나무, 쪽동백나무 등 114종, 2만여 그루의 수목이 자라고 있다. 이중 가장 오랜 것이 200년 된 갈참나무라고 하는데, 그 밑둥 둘레는 120cm쯤 된다. 그밖에도 아름드리 수목이 매우 많아서 어떤 곳은 한낮에도 컴컴할 정도다.
홍수 피해 막고자 숲 조성
상림은 1,100년 전 신라 진성왕(887년∼896년) 때 이곳에 태수로 있던 고운 최치원선생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함양 주민들을 비롯해 외지의 탐방객들이 끊임없이 찾아드는 이색 관광 겸 휴식처가 되었지만 최치원이 조성할 당시의 연유는 사뭇 급박한 것이었다. 홍수로 툭하면 위천수물이 넘쳐 읍내가 물바다가 되곤 하는 피해를 막고자 이 상림을 조성했다.
1,100년 전 당시 위천수는 지금의 읍내 한 가운데를 관통해 흘렀다고 한다. 최치원은 긴 제방을 쌓고 위천수물을 외곽으로 돌리는 한편 제방을 따라 길게 숲을 조성, 제방이 허물어지는 일이 없도록 했던 것이다.
하림은 없어지고 상림만 남아
애초의 숲 이름은 대관림(大館林)으로서 남북으로 길이가 적어도 지금의 세 배인 5km쯤 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런 추측의 근거는 과거 하림(下林)이라 불리던 숲 끝까지의 길이가 그 정도 되기 때문이다. 대관림은 세월이 지나며 중간의 일부가 없어져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고 하림의 수목 또한 일대에 민가가 들어서며 대부분 죽고 말아 지금의 상림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최치원선생께서 지리산이나 백운산으로 가서 손수 나무를 캐와 심기도 했다 더라"고 전한다. 그의 덕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함양주민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아무리 큰 태풍이 지나도 함양은 이 상림 덕에 수해를 거의 입지 않고 있는 것이다.
태풍 셀마 때도 함양 지켜줘
이 태풍 셀마가 닥쳐왔을 때를 함양주민들은 이렇게 돌이킨다. "워낙 물이 많이 지니까 위천수가 넘쳤어요. 하지만 상림 숲을 지나면서 물살이 약해져 별로 큰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그밖에도 몇 년 걸러 한 번씩 큰물이 날 때마다 상림이 함양을 살렸지요."
과거 상림은 코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짙은 숲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림은 하림이 그러했듯 차차 수목이 줄어들어 주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6.25때 인민군이나 아군 본부가 이 숲 안에 들어서서 트럭이 줄지어 드나드는 한편 비행기가 폭격을 하여 크게 숲이 상했다고 한다.
숲에서 천령문화제 열리기도
천연기념물이기는 하지만 이 상림은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입장료를 받지도 않으며 숲속 곳곳에는 사운정(思雲亭), 함화루(咸化樓) 등의 정자와 누각, 벤치 등이 놓여 있어 늘 탐방객들이 찾아든다. 특히 10월말 단풍철과 그 직후 낙엽이 깊게 쌓였을 때의 풍치를 주민들은 최고로 꼽는다. 10월에 함양군 문화제인 천령제(天嶺祭)가 이 상림 속에서 열리기도 한다.
숲 가운데는 맑은 실개천 흘러
아름드리 수목이 하늘을 가린 가을의 상림 속으로 들어서면 후둑거리며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그 도토리 줍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숲 속 곳곳에서 보인다.
상림 가운데로는 길게 남북으로 폭 2∼4m의 좁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이는 상림 속에 수분을 대기 위한 것으로서 이 실개천 덕에 아무리 가뭄이 심한 해라도 상림의 수목이 말라죽은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 실개천은 구름다리와 징검다리를 이용해 건너다닐 수 있다.
상림의 서쪽, 위천변을 따라서는 포장도로가 나 있다. 이 도로를 따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이 유일한 흠이라면 흠이다. 때문에 주민들은 "상림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려면 이 도로를 어떻게든 외곽으로 돌려야 할 것"이라면서 입맛을 다신다.
샘터, 가게 등 간단한 편의시설도 갖춰
동쪽 바깥은 한갓진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상림 경계를 따라서는 울타리가 쳐져 있는데, 남쪽 끝과 동쪽의 도로변을 따라 야트막한 철책을 세운 경계 한 가운데에 작으나마 주차공간과 샘터, 가게 등을 갖춘 출입구가 따로 나 있어 탐방객들은 주로 이곳을 이용한다. 숲의 경관도 이 중간지역이 가장 뛰어나다. 숲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남쪽에서 북쪽 끝까지 오르내리노라면 1시간쯤은 금방 지난다.
상림 숲은 워낙 상서로와서 개미와 뱀, 개구리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경상도집 주인 최씨는 "개미는 진짜 본 적이 없고 개구리도 손톱만큼 작은 것이나 비온 뒤에 조금 보이고 주변의 민가에서 지킴이 구렁이가 이따금씩 나올 뿐"이라면서 은근히 상림이 신성한 곳임을 자랑했다.
이은리 석불(吏隱里石佛)
상림에는 이은리 석불(유형문화재 제32호)과 함화루(유형문화재 제258호)와 문창후선생신도비(文昌候先生神道碑 : 문화재자료 제75호)가 있다.
이 석불은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나, 배 아랫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현재 두 손이 떨어져 나갔는데, 팔꿈치 아래에 끼우게 되어 있었던 듯 구멍이 나 있다. 머리는 민머리(素髮)이며, 육계가 단정하고, 두 귀는 길며,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다. 그리고 얼굴은 소박한 표정을 하고 있다. 얼굴에 비해 빈약한 두 어깨에는 통견(通肩)의 가사가 U자형을 이루며 두텁게 묘사되어 있다.
타원형의 광배는 이중의 원형선을 두른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불상은 그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화루(咸化樓)
함화루(咸化樓)는 원래는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인 망악루였다. 당시 함양읍성에는 동쪽에 제운루(齊雲樓), 서쪽에 청상루(淸商樓), 남쪽에 망악루(望岳樓), 이렇게 삼문(三門)이 있었는데, 망악루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망악루란 이름은 '멀리 지리산(智異山)이 보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일제강점기에는 망경루(望敬樓)라고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총독부에서 강제로 철거하려 하자, 1932년 고적보존회 대표 노덕영(盧悳永)이 사재를 털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함화루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건물은 2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아래층에는 자연석 주초(柱礎)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위층 역시 두리기둥이며, 내부는 단청을 칠하였다.
영남의 대유학자인 김종직은 함악루의 옛 이름인 '망악루'를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작년에는 내 발자취가 저 멧부리를 더렵혔거니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면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은 거듭 더럽히게 될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文昌侯 崔先生 神道碑)
상림에 있는 비석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文昌侯 崔先生 神道碑)이다.
문창후란 최치원의 시호(諡號)인 문창(文昌)에서 온 것이므로, 이 신도비는 최치원의 신도비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 재위) 때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로 있으면서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숲을 조성하였다. 그 공적을 기려 세운 비석이 이것이다.
신도비 귀부의 모습이 꽤 토속적으로 보이면서도 왠지 낯설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여창 묘소에 있는 신도비 귀부와 닮은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일까? 언뜻 보면 이 신도비는 꽤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1923년에 최씨 문중에서 세웠다고 하니 그다지 오래된 것은 아니다.
사운정(思雲亭)
최치원 신도비 옆에는 사운정이라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 있다. 이 정자는 1906년(고종 46년)에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모현정(慕賢亭)이라 불렀으나 고운(孤雲)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사운정(思雲亭)이라 고쳐 불렀다.
이 정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있어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정자가 이곳에 사운정이란 이름을 달고 서 있는 그 연유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지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였다.
사운정 思雲亭
仁山 金一勳(1909~1992)
천강유선수식림 天降儒仙手植林 하늘이 내린 선비신선 심은 상림에서
위성시백읍상심 渭城詩伯揖相尋 위성음사의 시인들 서로 읍하며 찾네
대황대야금파동 大黃大野金波動 크게 누런 큰 들에 황금물결 움직이고
장벽장공옥로심 長碧長空玉露深 길게 푸른 긴 하늘에 옥 같은 이슬 짙네
지락고금신성지 志樂古今神聖志 뜻은 고금 성현의 뜻을 즐거워하고
심통역대준웅심 心通歷代俊雄心 마음은 역대 영웅의 마음을 통하네
사중현사치평일 社中賢士治平日 위성음사의 어진 회원들 태평 시대에
거세효친송덕음 擧世孝親頌德音 온 세상이 효도스런 덕성을 칭송하네
남계서원
함양의 서원들 가운데 가장 우뚝한 지점에 남계서원 南溪書院이 있다.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함양의 대표적인 선비인 일두 정여창 鄭汝昌을 회억할 수 있는 곳이다. 일두는 성리학사에 큰 족적을 남겨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 5현’의 반열에 오른 당대의 인걸이다. 광해군 2년(1610)에는 문묘에도 배향됐다. 대유학자인 남명 조식趙植이 일찍이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의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이라 극찬한 바 있다. 그의 숨결이 새겨진 정여창 고택은 함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아홉 곳에 이르는데, 그중 주장 격이 남계서원이다. 서원은 정여창의 사후 약 49년 만인 명종 7년(1552)에 설립됐다. 명종 21년에 임금으로부터 사액 받았고,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서원 철폐 때도 다른 46개의 서원과 함께 용케 살아남은 곳이다.
서원 내 건물로는 강당인 명성당을 비롯해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 등이 있다. 재실인 애련헌 愛蓮軒은 그가 생전에 연꽃을 좋아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원래 주자의 가례서에는 사당은 본건물의 동쪽에 두는 것이 기본 원칙으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서원 중 이를 지킨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남계서원을 비롯해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정도가 중심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을 따름이다. 그 외의 서원들은 대부분 강당과 사당이 앞뒤로 나란히 배열돼 있다.
남계서원이 자리한 수동면은 함양의 ‘서원 1번지’로 부를 만하다. 남계서원과 인접한 곳에 청계서원 淸溪書院과 구천서원 龜川書員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계서원은 정여창과 동시대 인물인 김일손 金馹孫을 모신 사당으로, 옛 청계정사 터에 세워졌다. 그는 1495년 건립된 청계정사에서 한동안 수학했다고 한다. 김일손은 무오사화 때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갖은 박해를 받았으나, 살아 있을 때 훈구파 고관들의 부패를 격렬하게 공격하는 등 불의에 굴하지 않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경내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으며, 앞쪽으로 학생들이 거처하던 구경재와 역가재가 위치한다. 강당 뒤쪽 높은 지대에는 신위를 모신 청계사가 있다. 남계서원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숙종 27년(1701)에 창건된 구천서원은 박맹지 朴孟智, 표연말 表沿沫, 강한 姜漢 등을 배향한 곳이다. 고종 5년(1868)에 철거됐다가 1984년에야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강한은 조선 초기의 서예가로 학행이 뛰어나고 필법이 정교해 당대의 명필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맨 처음 언급한 송호서원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진 것을 복원한 경우다. 해마다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는데, 예의 그 13대 후손에 따르면 30명 정도 모인다고 한다. 퇴락한 서원이지만 이 제사 때만큼은 의관을 정제한 자손들이 자리해 숙연한 기운이 감돈다.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승사문, 집의재, 거경재, 경앙사 등 강론과 거주, 제사를 위한 6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1. 설립배경과 구조
남계서원은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조선시대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으로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학덕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 고을의 유생 개암(介菴) 강익(姜翼,남명문인)을 중심으로 30여명의 선비들이 합심하여 1552년(명종7) 남계에다 건립하였다. 건립되기까지 이 고을의 여러 군수가 지원하였으나 10년 동안의 공사가 임진왜란으로 서원의 사우(祀宇)가 터를 옮겨가면서 진행하였다.
지방 유림의 다수가 일두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는 소장학자로서 이 지역의 사표인 남명선생의 사숙문인이 다수 포함되었으니, 강익, 박승임(朴承任), 정복현(鄭復顯), 임희무(林希茂) 등이 서구연(徐九淵) 군수의 후원으로 착수하여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1566년(명종21) 9월 남계서원에 사액이 내려졌다. 사액이 내려진 배경에는 지방유림의 노력과 이 고을 군수로 온 김우홍(金宇弘)과 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의 배려가 작용하여 이후 춘추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3년 나촌(羅村)으로 옮겨 복원하였고, 1612년 남계로 옮겼다. 그 후 1675년 (숙종1)에 남명 사숙 문인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서향에 모시고 1689년(숙종15)에 개암 강익을 동향에 모셨다. 별사(別祠)에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배향하였다가, 1868년 별사는 훼철되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의 하나로 지방문화의 진흥과 교육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서원의 구조는 사우, 전사청, 양정재, 보인재, 애련헌, 영매헌, 풍영루, 묘정비각, 고직사 등이 있다. 강익의 《남계서원기》에 의하면 사우와 강당 및 동 서재와 앞 문간까지 총 30여 간이나 된다. 강익은 내가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으로써 여러 군자가 그 전말을 기록하고 그 재사(齋舍)에 이름 하기를 청한다. 사양하다 못해서 삼가 서원을 세운 뜻을 기록하고 드디어 강당을 《명성(明誠)》이라 이름 했는데 중용(中庸)에서 「밝으면 성실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왼쪽 좁은 방은 〈거경(居敬)〉, 오른쪽은 〈집의(集義)〉라 했음은 정자가훈(程子家訓)에 「경(敬)에 거(居)해서 이(理)를 궁구한다.」는 것과 추경(鄒經)에 「의(義)를 모아 산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재사(齋舍)의 동쪽 방을 〈양정(養正)〉이라 함은 역경(易經)에 「산업을 바르게 기른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고, 서쪽 방을 〈보인(輔仁)〉이라 함은 논어(論語)에 「벗으로서 인(仁)을 돕는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재사(齋舍)의 두 추녀를 애련(愛蓮)과 영매(詠梅)라 했고 앞대문은 준도(遵道)라 했는데 각각 뜻이 있다. 선액(宣額)에 남계서원이라 했음은 원이 남계강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서원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2월과 8월(中丁)에 향사를 지낸다. 소장품은 어정오경백편, 고려사 등 59종 317책이 있으며, 재산은 전답 1만 4500여 평 대지 6천 평 등이 있다. 정여창을 받들고 있는 서원은 전국적으로 아홉 군데에 이른다. 그 주된 서원이 남계서원이며, 종산(鍾山)서원(함북), 영계(永溪)서원(하동), 용문(龍門)서원(안의), 도산(道山)서원(거창), 인산(仁山)서원(아산), 이연(伊淵)서원(합천야로), 경현(景賢)서원(나주), 도남(道南)서원(상주) 등이 있었다.
2. 생애와 정신세계
정여창은 본관이 하동으로 평장사공파이며 증조부 때 함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450년(세종32) 5월 5일 아버지 정육을(鄭六乙)과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경남 함양 지곡면 덕곡리 개평에서 출생하였다.
1471년(성종2) 경기도 이천의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473년(성종4) 지리산에 들어가 사서육경을 3년간 연구.
1476년 상경하여 응교벼슬을 하면서 경연관으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 이후 4년 뒷 무렵 김굉필, 김일손, 남효온 등과 교분.
1481년 하동에 내려와 학문연구.
이듬해 4월 14일부터 29일까지 16일 동안 김일손 등과 두류산 등정 후 밀양으로 가 김종직을 방문.
149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로 40세에 첫 관직을 제수 받음. 이 무렵 서울 회현방에 살면서 김굉필과 교분.
1494년 외직을 청하여 안음현감을 5년간 봉직하면서 목민관으로 지대한 치적을 남겼고, 광풍루, 제월당 등을 건립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를 당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 이곳에서 이희중, 고승걸 등 제자를 가르침.
1504년(연산10) 4월 1일 54세의 일기로 적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1568년 문묘 종사 5현에 진청되고, 1575년 문헌공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정여창은 스스로 「한 마리의 좀」이란 뜻의 일두라고 하여 자신을 낮추어서 불렀는데, 이 말은 정이천이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정여창이 박언계의 편지에 대한 답서에서
「오직 학문을 지향하면서 성(誠)으로써 몸을 단속하면서 경(敬)으로써 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나 같이 용열(庸劣)한 중에 시들고 게으름이 더하니 다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간에 한 마리 좀벌레라는 나무람을 진실로 면하기 어려우니 스스로 한탄할 뿐입니다」(일두집)고 하여 그가 성경을 주로 하여 겸손한 마음가짐을 보여주었다.
정여창의 학문을 엿볼 수 있는 저서 『용학주소』, 『주객문답』, 『진수잡저』 등이 있으나 무오사화 때 소실되어 다만 짐작만 할 따름이다.
남계서원 蘫溪書院 咸陽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堂堂天嶺鄭公鄕 당당한 천령 고을 정선생의 고장
百世風傳永慕芳 백세 청풍 전하니 길이 사모하네
廟院尊崇眞不忝 서원에서 존숭함은 참으로 알맞으니
豈無豪傑應文王 어찌 문왕에 호응하는 호걸이 없으리
청계서원
청계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은 함양 수동에서 거창 가는 국도로 약 3㎞쯤 떨어진 우측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조선 연산군 때의 학자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수학하던 서원이다.
김일손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김맹(金孟)의 아들이며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다.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이 되었다가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弔義帝文)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처형되었다.
일찍이 스승으로 섬긴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고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하였다.
1495년 건립된 청계정사(靑溪精舍)에 김일손이 한 동안 수학하였는데, 1905년(광무 10)에 유림들이 상의하여 그 터에 그의 유허비를 세웠다. 1915년 청계정사를 복원하여 청계서원이라 부르고 김일손을 배향하여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건물은 단층 팔작지붕으로 구경재(久敬齋), 동서재(東西齋), 홍살문, 솟을삼문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도로에서 입구까지 콘크리트포장이 되어 있으며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강당(講堂)이 있고 좌우측 건물주위에는 공터인데 잔디 식재로 잘 정비되어 있다. 우측에 연지, 적자제, 비각이 있다. 좌측에는 화장실, 구경제가 있고 관리구역인 관리사가 통하는 협문이 있다. 강당배면의 콘크리트계단을 올라가면 문묘(文廟)구역으로 내삼문 안에 청계사(靑溪祠)가 자리 잡고 있다. 주위에는 토석담장으로 둘러져 있는데 상태는 양호하다.
김일손 선생을 배향한 서원으로는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이 있다.
일두 정여창 고택
산자수명한 함양은 천연기념물인 상림공원을 비롯한 수십 개의 누각과 정자, 서원이 말해주듯 어느 곳보다 볼거리가 많다.
지곡면만 하더라도 개평마을은 그 생김새가 대나무 잎 네 개가 붙어 있는 개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붙여진 마을로, 민속촌같이 양반가의 기와집이 즐비하다. 이 마을에는 조선조 오현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이 있다. 고택은 선생이 타계한 지 1세기 후 후손들에 의해 중건돼 3000여 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애초 17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으로, 솟을대문에 충 효 정려 편액 5점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대문 옆 돌담에 기대어 있는 안내판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86호(1984년 지정) 함양 정병호 가옥'이라 적혀있다. 솟을대문에는 효자 충신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려패인 홍패가 5개나 높이 걸려있다. 그 중 맨 위의 것은 '효자 통정대부 판전농시사 정복주 지문'이라 씌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높은 축대 위에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앞뒤로 툇마루가 붙어 있는 겹집이며, 누마루가 사랑방 앞에 높이 달린 ㄱ자형 평면이다. 일반 사대부 집의 전형적인 배치와는 달리 남향한 안채 옆을 막아서듯 사랑채가 동향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후대에 개수하면서 집의 좌향이 바뀐 듯하다.
활주를 받쳐 드높이 올린 처마 아래의 누마루에 오르면 바로 앞마당에 동산처럼 꾸며놓은 석가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흐드러진 노송이 제 힘껏 꿈틀거리며 똬리를 틀듯 엉켜있고, 여러 괴석이 호석처럼 둘려 있으며, 키 작은 나무들이 간간이 심겨 있어 마치 작은 숲을 보는 듯하다. 또한 멀리 시선을 주면 마을과 산이 시원스레 보여 그 옛날 완월관풍하던 선비의 여유로운 서정을 느낄 수 있다.
드나드는 사람이 《百世淸風》에 휩싸일 수 있을만한 편액이 기둥간살이를 모두 차지하였다. 선비의 사람됨과 마음가짐이 이만이나 되어야 만족스럽지 않겠느냐는 심원(心願)이 잘 상징되어 있다. 조선조 선비님들의 넉넉한 마음이 이룩해 낸 편액이다.
누마루 천장에는 '탁청재'라는 편액이, 사랑대청에는 '백세청풍'이란 편액이 걸려있고, 온돌방 바깥벽 위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와 힘찬 필체로 '충효절의'라고 씌어 있어 대문에서 느꼈던 이 집의 기품을 더욱 고조시킨다.
정여창 고택도 다른 경남의 상류주택 구성처럼 문간채·사랑채·행랑채·아래채·안채·사당·고방채·별당채 등이 각기 딸린 마당과 함께 적절히 배치하고 있다. 안내판을 보면 3000평이 넘는 넓은 대지임에도, 크게 다섯 영역으로 나누어진 각 부분이 샛담으로 구획돼 있어 그리 큰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각 영역은 완전히 구분되지 않고 각 모서리 부분을 터 서로 연결되는 개방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크게 사랑채 영역은 대문채 부분, 사랑마당, 안 사랑마당으로 나뉘며 중문을 통해 안채로 연결돼 있다. 안채 영역 또한 안마당과 광채, 고방 마당 등 부속건물에 따라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사랑마당에서 안채로 들어서려면 중문 너머로 작은 마당이 있다. 사랑마당에서 보면 황톳빛 흙벽의 고방(창고) 옆모습과 단이 진 기와 얹은 흙담, 자연스레 경사져 오르는 문간 바닥과 바닥 돌 그리고 흙담을 배경으로 서 있는 키 작은 꽃나무들이 아우러진 그림 같은 자그마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흔히 전이공간이라 이름붙이는 곳이다. 이는 대문에서의 출입 방향을 안채로 꺾어주는 교통 공간이면서 시선을 자연스레 받아주고 또한 차단하는 여유공간이다. 그리고 남자가 쓰는 사랑마당과 안주인의 안마당을 이어 주면서도 완충시켜주는 중간영역이고, 지대가 낮은 사랑채 부분과 그보다 높은 안채부분의 높이변화를 자연스레 받아주며 연결하는 매우 다목적 공간이다.
대청 한쪽 귀퉁이 내루에서 안마당 쪽에 조성된 동산에 심은 잘 생긴 소나무를 내다보았다. 집주인을 향하고 절을 하는 듯한 자세의 소나무를 내루에 앉아 내다보는 주인 선비님은 그야말로 신선(神仙)같은 즐거움을 맛보시지 않았을까 싶다.
현대 주택의 설계에도 기꺼이 응용할 수 있는 멋들어진 전통공간 구성기법이다.
이 공간을 지나 행랑채 끝에 난 문을 통하면 안마당이 나온다. 사랑마당의 격식 있는 가산과는 달리 작은 괴석과 석물, 소 탑, 갖은 화초들로 꾸며내고 있다. 그 옆의 수키와로 만든 굴뚝과 더불어 한옥의 정경을 한껏 더해준다. 이 서쪽마당 한구석은 뒤꼍의 사당과 고방채로 다시 통한다. 정여창 고택의 안마당에 들어서면 여느 양반집의 안채에서 느끼지 못하는 매우 아늑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안채도 18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가옥으로 크게만 지은 근세기 초 한옥과는 달리 건물 각 부분의 치수가 어딘가 우리 몸의 치수와 어울려 아담한 탓이기도 하다.
더욱이 옛집을 여럿 가보아도 안채가 더욱 정감이 가는 집이란 그리 흔치 않은데, 정여창 고택은 유난히 햇볕이 잘 들어 밝은 나지막한 안채 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포근한 분위기가 저도 모르게 스미어 마냥 사람들을 붙들어두는 그런 안마당을 지닌 기품 있는 집으로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두고택 一蠹古宅
김윤수 작, 역
東國名賢降介坪 동국의 명현이 개평에 탄생하여
打開理學孝忠幷 성리학을 열고 충효도 아울렀네
安貧樂道常居陋 안빈낙도하여 옛집은 누추했으나
宗裔起家府邸宏 종손이 신축하여 저택이 우람하네
안의 광풍루
지금 안의(安義)의 모습에선 예전에 함양이나 거창 못지않은 고을이었음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금천(錦川) 가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2층 누각을 보면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비록 누각 양쪽으로는 바싹 붙어 도로가 나 있어 흡사 포위된 장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건물 자체만 놓고 보면 범상치 않은 건물임을 금방 알아채게 된다. 이 건물은 광풍루(光風樓)라는 누각이다.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2층 누각 처마에는 각기 다른 글씨체로 광풍루라고 쓴 현판이 붙어 있다.
옛말에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말이 있다.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황정견(黃庭堅, 1045~1105년)은 주돈이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표하면서,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춘릉(春陵)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 속이 담박 솔직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라고 하였다.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을 뜻하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이런 연유로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비유하여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세상이 잘 다스려진 일"을 뜻하기도 한다.
- 현판
이 건물에 붙은 '광풍루'란 이름에도 세상이 잘 다스려지길 바라는 옛사람들의 깊은 뜻이 담겨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광풍루
광풍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이 누각은 조선 태종 12년(1412년)에 당시 이안(利安, 안의 옛 이름) 현감이던 전우(全遇)가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 당시의 이름은 선화루(宣化樓)였다. 그 후 세종 7년(1425년)에 김홍의(金洪毅)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으며, 성종 25년(1494년)에 안의 현감이던 정여창(鄭汝昌)이 중건하면서 이름을 광풍루(光風樓)로 바꾸었다.
하지만, 정유재란 때 불탔고, 그것을 선조 34년(1601년)에 복원하였으며, 숙종 9년(1683년)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많이 퇴락한 것을 1980년에 정비하였다.
정자문화 1번지 화림동 계곡
누각이 학문을 연마하거나 연회나 군사적 목적의 공적인 용도로 쓰인 곳이라면 정자는 개인이나 소수가 풍류를 즐기거나 휴식을 위한 사적인 공간으로 지어져 대체로 작은 규모다. 그래서 산수가 화려한 곳에 배치하여도 무리가 없다.
깊은 계곡이 많은 함양에 잘 어울리는 것이 정자다. 화림동 계곡은 8담8정(여덟 못과 여덟 정자)으로 우리나라 정자문화의 1번지라고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다양한 정자가 지척에 있다. 계곡에는 대표적인 정자인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 농월정이 차례로 줄지어 있다.
△이국적(?) 정자, 동호정
동호정은 화림동의 정자 중에서 제일 크고 단청을 입혀서 아름답다. 근처 황산마을에서 태어난 조선 선조 때의 학자 동호 장만리 선생의 후손들이 1890년 세운 정자다.
동호정은 계곡에 있는 바위를 떼어 설명할 수 없는 정자다. 정자 앞에는 거창의 수승대처럼 넓은 바위가 있는데 '차일암'이란 바위다. 동네 사람들의 연회장소로 많이 사용되어 유흥을 즐기는데 이만한 곳이 있을까 싶다.
굵은 통나무 한 그루를 도끼로 찍어 발 디딜 곳을 파내어 만든 동호정의 계단.
정자에 오르는 계단은 독특하여 정자 탐방객에게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굵은 통나무 한 그루를 도끼로 찍어서 발을 디딜 곳을 파내어 개성이 있다. 게다가 정자의 단청이나 문양이 중국식 형태를 띠면서 이국적인 멋도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가 있었다.
동호정은 함양군 안의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전주방향으로 7km 정도의 거리에 국도와 연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동호정은 남강천 담소중의 하나인 옥녀담에 있으며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강 가운데에는 노래 부르는 장소(영가대), 악기를 연주하는 곳(금적암), 술을 마시며 즐기던 곳(차일암)을 포함하며, 차일암이라고 불리는 수백평의 널찍한 암반이 있어 이 곳이 풍류를 즐기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동호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워진 단동의 중층 누각건물이다. 내부에는 배면의 중앙칸을 막아 구성한 판벽이 남아 있는데, 거연정과 마찬가지로 방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면의 좌측으로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을 두어 누로 오르게 하였고,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30cm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루는 장마루가 깔려 있는데, 이것도 원래는 우물마루였으나 후에 변형된 것으로 현재 함양군에서 원형복구를 추진 중에 있다.
천연의 평탄한 암반위에 조성하여 초석은 쓰지 않았고,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누하주는 직경이 큰 재목을 틀어지거나 울퉁불퉁한 채로 대강 다듬어 사용하였다. 마루위의 기둥은 하부에 4각형으로 모를 줄인 초석형태의 부재를 사용하였다. 4면의 추녀 끝부분에는 활주를 세워 건물의 안정감을 높혔고 기둥위에는 2익공계의 공포로 장식을 하였으며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원형의 화반을 끼워 장식하였다.
가구는 5량 구조로 대들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도록 하였고 종보위는 반자를 설치하여 격을 높였다. 종보의 보아지는 초각하여 익공을 꾸미고 종보에는 봉두를 달아 촛가지 위에 올렸다. 종보를 익공으로 장식하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로 정자를 화려하게 꾸미고자 한 노력을 볼 수 있다. 좌, 우측면에서는 충량을 대들보위에 얹었는데 충량의 머리부분에는 용두를 초각하였고 가구에는 모두 단청을 올렸다. 겹처마에 팔작지붕형식이다.
△ 없는 듯(?) 있는 정자, 군자정
군자정은 단청 없는 소박함이 동호정과 구별된다. 장식이나 요란함도 없고 규모도 작아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기품만은 말 그대로 군자의 멋과 닮아있다.
나무색이 그대로 드러나 운치 있는 정자 덕에 근처 식당은 손님을 끌기에 좋은 정자를 얻은 셈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곳에도 단청을 하고자 기둥에 하늘색 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제 지우지도 칠하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흉터'로 남아있다.
서하면 봉전마을은 정여창 선생의 처가가 있는 마을로서 선생이 처가에 들러 유할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에서 유영하였다.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 공의 5대손인 전세걸, 세택이 일두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으로 칭하였으며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으나 내용을 알 수 없다. 군자정은 거연정으로 부터 하류쪽으로 15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나 정면의 주칸을 5자, 측면의 주칸을 4자 정도로 잡아 규모는 작은 편이다.
군자정 역시 천연의 암반위에 단동으로 세운 중층 누각건물로서, 내부에는 방을 들이지 않고 모두 틔워 놓았다. 정면의 우측으로 판재로 만든 계단을 두어 누로 오르게 하였고,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15~18cm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루는 장마루가 깔려 있는데, 이것도 원래는 우물마루였으나 후에 변형된 것으로 현재 함양군에서 원형복구를 추진 중에 있다.
천연의 평탄한 암반위에 조성하여 초석은 쓰지 않았고,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누하주는 직경이 큰 재목을 틀어지거나 울퉁불퉁한 채로 대강 다듬어 사용하였다. 4면의 추녀 끝부분에는 활주를 세워 건물의 안정감을 높혔고 기둥상부에는 익공없이 직절시키고 모서리를 궁글린 보아지로 처리하였다.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가구는 5량 구조로 대들보위에 보방향으로는 판재를, 도리방향으로는 2단의 각재로 짠 十형의 부재로 종보를 받도록 하였고 종보위에는 대공없이 종보가 바로 종도리장혀과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좌, 우측면에서는 충량을 보내 대들보위에 얹었는데 충량의 머리부분은 직절하였으며 단청은 올리지 않았다. 홑처마에 팔작지붕형식이다.
△ 물 위에 뜬(?) 정자, 거연정
거연정은 강가나 산에 짓는 일반적인 형식의 정자와는 달리 계곡의 물이 양 갈래로 흐르는 바위 위에 아찔하게 걸터앉았다. 아치형의 철제다리만 빼면 모두 자연 일부다.
거연정은 정자로는 독특하게 정자 중간에 사방의 시선을 막을 만한 문이 있다. 지금은 한쪽만 남았지만 문을 다 닫으면 2사람만의 공간이 될 정도다.
정자의 개방성과 함께 폐쇄성을 간직한 모습이다. 옛 사람들이 사방의 문을 닫아놓고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엿듣고 싶어진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선생이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인 현 거연정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최초로 건립하였으며 1853년 화재로 서원이 불타자 이듬해 복구하였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되자 1872년 화림재 선생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 건립되었으며 1901년 중수가 있었다.
거연정은 함양군 안의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전주방향으로 9㎞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는 봉전마을 앞 하천내에 있는데, 이곳은 옛 안의 3동의 하나인 화림동 계곡으로서 농월정, 거연정, 용유담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거연정은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천의 암반위에 단동으로 건립되어 있다.
황석산성과 용추사
함양의 황석산성은 사적 제322호 황석산의 봉우리와 계곡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과 큰 싸움이 있었던 곳으로, 인근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지키도록 하였고, 왜군이 난입하여 끝까지 싸우던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음현감 곽준이 전사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함양 안의면 사람들이 성이 무너지자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피바위로 유명하다. 그 중 옥녀부인의 장렬한 죽음으로 피바위는 더 알려졌다.
거북 등처럼 바위 표면이 갈라져 있는 거북 바위 등 각종 바위들이 마치 다 하나의 모양들을 이루고 있다. 주변 암봉은 이 산성의 묘미 중 하나인데, 정상은 다른 산들과 달리 평지가 아니라 완전 높은 바위가 있다. 정상에 오르면 주변 조망이 장관이다. 북쪽으로는 덕유산이 보이며, 남동쪽으로는 황매산, 남쪽으로는 지리산 등이 보인다고 한다.
처음 산을 접하는 이들은 위험한 곳을 수도 있다. 높은 절벽에 로프를 타고 정상에 올라야 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다.
현재 성벽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복원된 곳이 많다. 내려오는 길에 주변은 계곡이 이루고 있다. 시원한 계곡물에 잠시 휴식을 취하면 산행의 보람은 더욱 값지다.
용추폭포로 유명한 용추사
함양에는 계곡이 많은 곳으로 정자들이 유명하다. 용추사 입구에 일주문은 원래 장수사의 문으로 용추사는 신라 소지왕 9년(487) 각연대사가 지은 장수사에 속해있던 암자이기 때문이다. 장수사는 6.25 전쟁 때 불타 버리고 문만 남아 있다가 1975년에 복원되었다.
화려한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로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하는 공포가 빽빽하게 있다. 남쪽으로 향한 정면 현판에 덕유산장수사조계문(德裕山長水寺曹溪門)이라 새겨져 있다. 일주문으로는 대단히 큰 규모이다.
용추사 절 앞에는 깊고 맑은 용추폭포가 있어 유명한데, 마치 계곡의 깊은 곳 화난 용이 떨어진 듯이 물줄기는 장관을 이루고 폭포 앞에 서 있으면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폭포 수량은 장관이다. 예전의 다녀온 그 모습 그 느낌 그대로이다. 시원하게 여름을 보내려면 주변 계곡을 찾는 곳도 좋지만 물놀이는 상당히 위험하니 주의해야 할 듯하다. 자연은 역시 계절에 맞게 우리에게 많은 곳을 주고 있다.
2010년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해외탐방 - 베트남 남북부 여행 4박6일
날짜 |
지역 |
교통 |
시간 |
일정 |
숙식 |
1일 (10/28)목 |
인천
하노이 하롱베이 |
VN937 |
10:35 13:05 |
인천공항 출발 하노이 국제공항 도착 공항가이드 미팅 후 하롱베이로 이동(약4시간소요) -영화 '인도차이나'에서 린당팜이 은신하였던 아름다운 경치 석식 호텔숙박 |
석식:한정식 하롱프라자 /동급 |
2일 (10/29)금 |
하롱베이
하노이
|
전용차량 |
전일 |
조식 전용유람선을 이용하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 자연경관 하롱만의 3,000여개의 그림 같은 주변 섬 관광(약 3시간 소요) -배에서 내려 섬 내의 석회동굴 감상 -티톱섬 전망대 관광 중식 후 하노이로 이동 석식 -수상인형극 관람 호텔 숙박 |
조식:호텔식 중식:선상식 석식:한정식 |
3일 (10/30)토 |
하노이
호치민
|
전용차량
VN225 |
전일
15:30 17:30 |
조식 -호치민박물관 -한기둥 사원 중식후 공항으로 이동 하노이 국제공항 출발 호치민 국제공항 도착 도착 후 석식 호텔숙박 |
조식:호텔식 중식:현지식 석식:한정식
원저프라자 /동급 |
4일 (10/31)일 |
호치민 |
전용차량 |
전일 |
조식 메콩델타 지역인 미토로 이동(약 2시간 소요) 정크선으로 메콩강 열대우림 관광 열대과일 농장, 섬 내 주민들의 생활상 관광(약 3시간 소요) -빈트랑 사원 관광 석식 호텔숙박 |
조식:호텔식 중식:현지식 석식:한정식
원저프라자 /동급
|
5일 (11/1)월
|
호치민 |
전용차량
VN938 |
전일
23:50 |
조식 구찌로 이동(약 1시간 30분소요)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의 지하요새인 구찌터널관광 및 현장체험 중식 호치민으로 귀환 -중앙우체국 -노틀담 성당, 통일궁(대통령궁) 등 시내관광 석식(선상 디너) 공항으로 이동 호치민 국제공항 출발 |
조식:호텔식 중식:현지식 석식:선상식 |
6일 (11/2)화 |
인천 |
|
6:40 |
인천도착 |
|
* 여행경비: 98만원(노쇼핑·노팁)
* 신청기간: 2010년 9월 25일까지
* 국민은행 836301-04-002170 오덕만
* 자세한 문의는 윤영선 사무국장(02-3401-0660)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여행프로그램 [別有風景]
한비야 씨는 여행이란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진행되었던 위례역사문화연구회의 정기답사를 2009년 9월, 102차로 끝내고 송파문화원의 '테마가 있는 문화탐방'이라는 강좌로 변경되다보니 우리 회원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4월부터 새롭게 여행 프로그램을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프로그램 이름을 고민하다가 이백의 시 <산중문답>에
問爾何事棲碧山(문이하사서벽산)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불답심자한)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류수묘연거)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이란 詩가 떠올랐습니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을 별유풍경(別有風景)으로 바꿔보니 보통 볼 수 없는 특별히 좋은 풍경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별유풍경(別有風景)을 구경하러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말이죠.
여행일정은 종전과 같이 매월 4째 주 화요일에 진행되며 접수 및 신청은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02-3401-0660)으로 하셔야 합니다. 1회 참가 시에 회비는 4만원이며, 3개원 단위로 신청을 하실 경우에는 10만원입니다. 강사는 오덕만 선생님이 진행하실 계획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회차 |
일자 |
탐방주제 |
탐방지 |
6 |
9월28일(화) |
산삼과 산약초가 유명한 고장 함양 |
학사루 → 함양상림 → 함양석조여래좌상 → 남계서원 → 청계서원 → 안의광풍루 → 용추사 → 심원정 → 농월정 → 동호정 → 군자정 → 거연정 |
7 |
10월26일(화) |
청정한 자연과 향토문화가 어우러진 괴산 |
각연사 → 미륵산성 → 우암송시열 관련 유적 → 산맥이옛길 |
8 |
11월23일(화) |
풍요롭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충절과 예학의 고장 논산 |
관촉사 → 계백장군묘소 → 돈암서원 → 개태사 → 상계사 → 성삼문묘 → 견훤왕릉 → 강경젓갈시장 → 명재고택 |
회 비 : 3개월(100,000원), 1개월(40,000원)
회비입금: 국민은행 836301-04-002170(예금주: 오덕만)
접수처 :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담당: 오유정 02)3401-0660)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193-17 광진빌딩 2층 ☏ 3401-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