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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독증을 앓다
햇살이 컹컹 울 것 같이 맑은 날이었다
희고 컴컴한 백지 같은 한낮이라고 생각했다
줄장미가 핀 담벼락을 바라보며 난독증에 걸린 며칠이 흘러갔다
손톱 밑에서 따끔거리던 몇 줄이
쓰리고 아름다웠으나……
옮겨 적진 않았다
그것은, 금단의 구역 위로 함부로 목을 늘어뜨린 채 반란과 음모를 꿈꾸는 극단적인 빛깔이었다 치명적이라는 말이 전신에 독처럼 퍼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혀를 뚫고 나오지는 않았다
저절로 시들어갈 때까지 발설할 수 없는 음모에
가담할 수 있을까 충혈 된 눈동자로 홀린 듯이 창을 열어보면
수상하게 흔들리는 이파리들이 있고 뾰족한 가시들이 숨어 있었다
또박또박 읽히지 않는 생의 환멸을 엎지를 것처럼
고양이가 앙칼진 교성을 지르며 핏빛 담장을 넘을 때
두 개의 눈동자로 훅- 옮겨 붙는 불꽃
데인 듯이 붉고 뜨겁고 울컥거리는
저 지독한 생의 화염
바람이 담장 위의 꽃들을 흔들고 갈 때마다
벌겋게 달아오른 생각들이 파지처럼 툭툭 떨어졌다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어떤 머리든 머리는 둥글고 머리통 속엔
동그랗게 가두어놓은 것이 있다
누가 저렇게 동그란 새장을 목 위에 올려두었나
새장을 이고 다니며 새를 부르는 사람처럼
새장 속의 새를 멀리까지 날려 보내려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구름 속에서 새를 잃어버린 적이 있거나
솟대처럼 목의 위치를 한 쪽 방향으로 고정시키고
새를 기다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새장과 새장 사이
열쇠구멍처럼 동그란 당신의 눈동자
깜빡 열쇠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막 목의 위치를 바꾸려다 실패한 사람처럼
수상한 팔과 다리의 움직임
새장 속에는
끊임없이 새를 기다리는 새가 있고
끊임없이 새를 날려 보내는 새가 있어서
새장 주변에는
늘 머리카락처럼 가벼운 그 무엇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대명동블루스
아직도 앞산 밑에 대명동이라는 동네는 골목이 많고 키 큰 전봇대가 여전하고 오선지처럼 전깃줄에 걸린 새들이 짹짹짹 입방아를 찧고 아직도 그 동네는 골목을 달려 나오는 소리가 있고 골목을 기어들어가는 꼬리가 있고 대명동은 대명동이 아니랄까봐 보름만 되면 건달 같은 달이 오줄없이 골목을 기웃거리고 아직도 대명동은 유목의 기질이 다분한 글쟁이가 살고 그 글쟁이가 벌이는 한량놀음에 어절씨구 저절씨구 구리구리 사람냄새나 풍기고 냄새 따라 풍류들이 송사리 떼처럼 오글오글 몰려다니고 대명동은 명이 긴 사람들이 가파르게 붙어살아 앞산과 뒷산 사이가 천지지간 大明해서 어화둥둥 둥기둥기 마음의 명동이고.
추파 읽는 저녁
당신은 추파라는 말이 좋다고 했다
가을秋, 물결波
그동안 추파에 대한 오해가 깊었다
추파를 던진다는 건
마음이 물결처럼 한 번 인다는 것
그러니까 이쪽 물결이 저쪽 물결에게
두둥실 마음이 서는 것이 추고
넘쳐서 출렁대는 것이 파다
그런데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이 추파라는 말은 금방 적응이 안 된다
마음이 마음에게 거는 수작처럼
수군거리는 데가 있고
손발이 오그라드는데가 있고
내가 추파에서 먼 것은
수심이 얕아서겠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된 작업의 정석을 몰라서다
번지다가 만 물결의 얼룩처럼
오도카니 앉아서 추파 읽는 저녁
던지고 받아내는,
만물들의 윙크가 은근히 깊다
새벽, 하이웨이
길은 명령한다 달리시오, 달리시오들, 곧장, 이 길로 돌아보지 말고 쭈욱 달리시오들 채찍을 휘두르며 석유를 먹은 말 잔등을 후려친다 목전에 붉은 당근밭이 있다고 등 뒤에 푸른 이정표를 감추며 속삭인다
곧게 뻗은 길 위에서 구불구불한 사색은 금물, 브레이크가 많은 당신의 산책도, 떠도는 구름의 방랑도 금물, 여기 길이 있다고 달려도 달려도 계속 달려 나온다 돌아가시오, 라고 말 할 때조차 길은 철저히 달리시오를 외친다
벗어나도 벗어날 수 없는 길이, 여기 길 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명령한다 길은 길 위에서 길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길이 길치처럼 졸졸 따라다니다가 길을 줄줄 흘리고 다닌다 고삐를 바싹 당기면 당길수록
끝내 사라져가는, 사라지지 않는 바닥 한 줄 집요하게 추격해오고 있다
유리창이 있는 벽
유리는 투명하다
무엇이든 다 허락할 것 같다
거리낌 없이 다 보여 줘도 결국 벽이라고
속지처럼 끼워져 있는 유리창
호호 입김을 불어 닦은 데 또 닦아도
자꾸 흐려지는 일들
얼룩이 남는 그런 일들은
아마도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들
버선목처럼 속을 뒤집어 보이거나
입을 아, 하고 벌려도
코 박고 이마를 찧을 수밖에 없는
유리는 투명하고
유리는 무엇이든 다 허락할 것 같은데
누구나
벽이 있고
벽마다 창은 하나씩 있고
창마다 자주 흐려지는 유리가 끼워져 있어
저마다 한 번씩 소리 나게 드르륵 열어보고 싶어진다
깡통의 세계
깡통은 내용을 다 쏟아버렸다
내용이 깡통을 멀리 던져버렸다
서로 상반된
이 두 문장은 간단하게 버렸다로
압축된다
구겨진다
찌그러진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사라지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내용이 사라진,
이 지점에서부터
내용이라는 말을
만끽할 수 있다고
대낮부터 깡통이 바람을 껴안고
빙글빙글 돈다
요란하게 도로 위를 뒹군다
깡통이 온몸으로
깡통을 증명해내듯
깡통이 옆구리에 깡통을 차고 신나게
호기심 어린 시선 몇
웬만한 깡으로는 넘볼 수 없는
세계를 발로 툭툭 건드려 보고 있다
서랍의 한계
서랍이 있는 방에서 서랍을 생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계를 견디기 위해서 서랍은
헐렁한, 구멍 난, 빛바랜, 짝이 맞지 않는, 뒤엉킨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함구 한다
수납되는 순간
서랍은 모든 사적인 기록들을 포괄적인 하나의 문장으로
단락 짓지만 서랍은 서랍의 한계 때문에
열리고 닫힐 때마다
반목한다 저항 한다
칸칸마다 포개어지던 기억들이
뒤죽박죽일 때
서랍은 서랍의 형식으로 정리되지만
서랍은
언제나 하나의 손잡이에 매달린 만연체 문장
손 내밀면 왈칵, 쏟아질 줄 안다
지난밤
서랍 밖에서 누군가 서랍을 열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갑자기 하얗게 목련이 핀 것도 서랍 때문이다
수납의 한계를 앓던 꽃들이
왈칵왈칵 피고 있다
의자가 있는 골목
- 李箱에게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만한 일이오
의자는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뿔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서면 늘 바람이 거세다
조금만 불어도 윙윙, 사나운 소리를 낸다
공기의 흐름을 막아놓아서라고 했다
바람이 뿔났다, 사실
막힌 곳이 많은 우리 집에도 여러 마리 뿔이 산다
공기의 흐름이 심상찮은 날이면 서로 으르렁거린다
그런 날엔 뿔을 함부로 세우는 바람에
잠시 격리될 뻔 한 뿔도, 제 뿔에 제가 걸려 넘어진 뿔도 있다
막힌 곳이 제일 많을 것 같은 아빠는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모자 속에 뿔을 숨겨 두었다가
상한 줄도 모르고 꺼낸 적이 있다 꼭 중국산 가짜 같았다
뿔 중에서 가장 약발이 센 뿔은 단연 엄마의 뿔이다
엄마는 알래스카 순록처럼 우아하게
뿔을 장식하고 다니지만 한 번 찔리면 오래 간다
TV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뿔 갈이 하는 순록들을 보았다
순록들은 바위나 나무에 뿔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벅벅 문지르고 나서야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온순해졌다
통증의 깊이로 까맣게 익어가는 순록들의 눈망울을 보면
아니, 서로 엉덩이에 난 뿔을 뽑아주려다가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집 뿔들을 보면 후시딘 같은 거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끝없는 설원을 헤매다가 온 것 같은 밤이면
아무리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잠들어도 뿔 근처가 욱신거린다
우연히 한 우리에 갇히게 된 짐승들처럼
뿔과 뿔이 엉키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막다른 곳에 서면 예민해지는 우리 집 뿔들
툰드라의 이끼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바람의 출구를 살핀다
쓰자마자 벗어야하는 순록들의 아름다운 冠을 생각하며
나는 지금 웃자란 내 뿔을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뿔 대신 쫑긋해진 두 귀,
온순하게 한 철을 보낼 작정이다
<시인의 산문>
미흡과 흡의 틈 사이에서 시 쓰기.
매순간마다 그곳에는 여러 겹의 주름이 있고 표정이 있고 진동이 있고 냄새가 있고…….
그런데 그곳에는 항상 내가 없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나는 부재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내 마음으로부터 늘 부재한다. 안락하게 둥지를 틀고 그곳에 기거 하고 싶지만 책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부터 부재한다가 아니라 실은 부재 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시인 랭보가 말했다던가.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 고. 하지만 부재의 의미를 묻기 전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삶은 여기에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고 한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은 한결 더 잔인하게 들린다. 이 말을 떠올리면 ‘여기’라는 부재의 공간은 어쩔 수 없이 또렷해진다.
‘여기’ 만큼 구체적인 지시어가 있을까. ‘여기’는 마음일수도 있고 시일수도 있고 또 다른 공간의 ‘여기’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라고 못 박아버리는 순간 마음은 혹은 시는 곧바로 ‘여기’를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냉정한 부재를 인식하는 순간 ‘여기’에 대한 집착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일말의 애틋함 그리움 확신 없는 확신 같은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되는 것은 왜 인가. 왜 부재는 매번 부재함을 내게 확인 시켜려 드는 것일까.
이것들은 한 편의 시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에서의 느낌과 아주 비슷하다. ‘여기’의 안쪽을 더듬어 보려고 했으나 번번이 더듬는 손길만 허망해지고 마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 강렬한 부재의 느낌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가 아닌 다른 곳, 다른 그 무엇을 나는 신봉할 수 있는가. ‘여기’로부터의 부재는 나를 끊임없이 어떤 부추김 속으로 몰아간다. 이런 만성적인 일들을 시를 쓸 때마다 겪는 어떤 모종의 증후군이라고 진단해본다. 그렇다고 해도 매끼니 마다 입속 가득 언어를 퍼 넣고도 우물거리는 증상 혹은 아이러니라니. 이를 불안이라고 해도 좋고 절망이라고 해도 좋고 오히려 희망이라 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다행히, 부재 한다는 그 또렷한 사실이 주는 자학적인 쾌감, 말할 순 없지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오만과 편견 그런 것들은 시를 쓰는 순간에 정확하게 존재하므로 ‘부재 한다는 느낌의 존재’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더 이상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게 된다. 부재가 주는 선물 같은 거 아니 부재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시 속에는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부재 하는 세계’를 빙빙 돌며 떠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씩 슬프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힐끔거리며 사물들의 세계와 배후를 살피는 일들. 마음의 한 부분을 싹둑 떼어내어도 배양되지 않는 언어들이 여전히 소녀적인 몽상을 꿈꾸게 한다. ‘여기’ 와 또 다른 ‘여기’의 틈 사이에서 시의 핵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 한 채 나는 시에 들러붙어 기생하고 있다. 지리멸렬한 생의 한 가운데서 시를 유일한 기사회생의 기회라는 착오를 범하면서. 마음 언저리에 붙어있는 언어들과 한 번씩 묵은 각질처럼 떨어져나가는 시들을 바라본다.
그때마다 나는 ‘여기’에서 불행한가 행복한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는 말 랭보의 말을 떠올리면 이따위 질문들은 무의미 하다. 질문하고 있는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으므로 편하게 머물러 본 적이 없는 흡의 공간을 향해서 그저 미흡의 순간순간을 견디고 있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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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납의 한계를 앓고 있던 목련이 왈칵왈칵 피고 있음을 보는 봄, 봄!
축하합니다!
변희수시인님
시는 읽고 읽어도 좋습니다.
난독증을 앓고 있는
대구의 환절기를 읽어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시가 있어서요...
변희수시인님
좋은시 잘 감상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변희수시인님!
시를 읽게 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와우!
기다림이 있는 시읽기가 되고 있어요.
변희수 시인의 참신함이 봄날 같습니다.
잘 읽었구요, 사랑합니다.
앞산 밑 대명동!
결혼해서 타향살이~~
잊고 살았었는데
추억 보따리를 풀러
머잖아 다녀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