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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설교 5, 롬 3장
제목: 오직 믿음의 법으로
우리는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할례자이건 무할례자이건 간에 하나님의 구원하심 안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라는 조건을 벗어날 수 없었음을 성경을 통해 고찰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수령한 백성이라는 전제조건이 이방인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신랄하게 공격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더냐? 너희가 생각하고 있듯이 율법의 의로 말미암음이냐? 착각하지 마라. 너희가 율법의 의로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방인들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을 가지고 있느니라. 율법을 가진 너희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구원의 조건 아래서는 동일한 입장에 있느니라”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2:28-29은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며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제시하신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본문
우리는 전장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구원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상고했습니다. 양자 모두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양자 모두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사는데 실패했습니다. 결국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전장에서는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3장의 초두인 1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우리는 이 질문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을 획득하는 계시에 관한한 양자의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할례의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얼른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의 추측을 뛰어넘는 발언을 합니다. 이어서 2절에서 이렇게 대답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 문맥 속에서는 ‘첫째’라는 머리 순서는 있지만 둘째와 셋째의 유대인의 나음에 대한 차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굳이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 해서인가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어떤 조건도 평등하다”는 전장의 확신 있는 언급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나은 점에 대하여 언급하는 사도의 표현에서 우리는 잠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절에서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씀’과 ‘언약’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말씀은 유대인들이 기록한 특별계시인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사도는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음으로써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아는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는 점을 자주 진술합니다. 여기서 “맡았다”는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전승시키고 가르치며 전파하는 등, 말씀과 관련된 사역 전체를 함축합니다. 언약이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약속한 모든 축복된 일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된 결과도 함축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하기를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이방에 대한 이스라엘의 제사장 역할”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19:5~6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즉 이것은 “이방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역할로서의 이스라엘의 빛 됨”을 의미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논에서 쌀을 수확하자면 넓은 논에 모를 심어야 합니다. 논에 모를 내기 위해서는 작은 못자리를 만들어서 뿌린 볍씨를 키워내야 합니다. 못자리에서 자란 볍씨는 적당한 싹으로 자라났을 때 본격적으로 논에 이식되어 결실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은 바로 이 못자리의 역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못자리로서의 역할로서 이스라엘이 그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 이유로 인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가 ‘아브라함 언약’이고, 그 다음으로 이어진 ‘모세언약’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의 번성과,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번성하게 될 그 후손에 대한 언약”이 주류를 이룬다면, ‘모세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아 자신의 성품과 뜻을 온 세상에 나타내게 하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여야만 했고(참고, 신 28장), 더 나아가 이방의 풍속과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멀리해야만 했습니다. 이방을 변화시켜야할 그들이 이방의 풍속에 동화되어 오염된다면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실패가 많았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차별화된 것이 있다면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민족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사도는 9절에서도 여전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방인들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선언한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같은 죄인입니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선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유대인이라고 해서 구원의 획득에서 이방인보다 유리하다거나, 이방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에서 유대인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분명히 복된 일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에 있어서 결코 유리한 조건은 아닌 것입니다. 가령, 10이라는 숫자에 도달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다고 칩시다. 적어도 유대인이라면 10이라는 구원 수에 가까운 7이나 8이라는 숫자에 근접해 있을 것이고, 이방인은 2나 3에 겨우 도달할까 말까한 형편일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구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이방인은 고생고생하며 수고해야 겨우 구원에 도달할까 말까한 형편에 처해 있게 됩니다. 과연 구원이 그렇게 구원요건의 충족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가능한 일일까요? 만일 적당한 선에 도달하는 것이 구원의 방법이라면 유대인이 그토록 선민임을 자랑하는 것에는 분명하게 일리가 있습니다. 구원의 합격점에 이르기 위해 좀 더 노력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적어도 지금 유대인은 이런 사고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유대인이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에게서 조금 멀리 있든, 아니면 아주 멀리 있든 간에 모두가 하나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부터 18절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처럼 의인은 없으되 하나도 없다는 것인데, 이는 모든 인간이 하나같이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현주소이고, 어떤 것으로도 타협 불가능한 사실인 것입니다. 최근 인간은 인간의 이런 현실들에 대하여 나름대로 진단을 내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지요.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상태적 현주소가 ‘소유의 불평등’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해서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창안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교육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을 잘 교육하기만 하면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얼마든지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래적 속성은 한 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공산주의도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었고, 그럴듯한 교육학 이론으로도 해결된 인간의 문제는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멍에를 스스로 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야!”라고.
사도는 유대인의 나은 점과 할례의 유익함을 1절과 2절에서 거론합니다. 그럼에도 9절에서 유대인의 자랑이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자랑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길게 바꾸어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방인이 망하는 것은 율법이 없이 망하는 것이고, 유대인은 율법이 주어졌으므로 율법에 의해 망한다. 이방인이 망하는 것이나 유대인이 망하는 것이나 피차일반인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이에 대한 대답을 20절에서 바로 하게 되는데,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그토록 강한 자부심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이방인과 능히 구별되게 할 줄로 착각을 하는 것에 대한 일격인 셈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능히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유대인의 희망을 통째로 부정해버립니다. 거기다 한 발 더 나아가 “율법으로는 다만 죄를 깨닫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율법의 기능이란 말하자면, 죄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더 길게 표현하자면, “율법은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할 수 없고, 단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이 가진 도구적인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기록된 법의 조문을 어기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율법 자체가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는 “모세언약(율법)의 행위나 소유가 구원을 보장할 수가 없다”는 논지의 전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21절 이후에 답으로 주어집니다.
21절은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앞의 구절에 대한 대 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한 의’가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는 이미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증거를 얻은 것이라 합니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으로’라는 말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율법은 행함으로 의로움을 추구하지만, 이 하나님의 의는 이와는 정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건, 그렇지 않은 이방인이건 간에 차별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차별이 없이 하나님의 의 앞에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도다”고 23, 24절에서 말씀합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지만, 그래서 그 길에는 파멸만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롭게 되다”의 디카이우메노이(δικαιούμενοι)는 현재분사 수동태인데, 이는 의롭게 되는 것은 수동적인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의롭게 하는 주체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5절에서는 사도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 있는 인간을 어떻게 구속하셨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지은 인간과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의 ‘화목제물’, 즉 중재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이라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ίλαστήριον)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속죄뿐 아니라, 백성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화목’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구속’이라는 뜻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신 이유는 인간의 전에 지은 죄를 간과(看過)하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26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되는 단어는 ‘의’(δίκαιος, 디카이오스)라는 단어는 세 번이나 변화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우리가 의롭게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는 의미로서의 의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칭의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본래적 의’로 불릴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의 의는 하나님이 주신 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본 구절의 예수 믿는 사람의 의를 신학적인 용어를 빌려서 말한다면 ‘전가된 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 우리가 죄인이 되었다면, 나중 아담은 우리에게 의로움을 전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7, 28절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지만, 결국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이래야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를 지적하는 용도로서만 효용성이 있을 뿐이었음을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고 있듯이 행위의 법이 아닌 믿음의 법으로라야만 구원이 있음을 유대인들은 깨달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는 29절에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유대인 스스로에게 제한하는 어리석음을 힐난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천하 만민에게 편만해 있습니다. 사도는 30절에서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고 함으로 할례자이건 무할례자이건 모두는 하나같이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구절인 31절에서 믿음으로 인해 율법은 이제 그 기능으로서의 역할이 끝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말입니다. 즉 이 말은 “믿음이 옴으로 인해 율법이 폐기처분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완성됨”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옳은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결론
사도는 로마서 1장에서부터 2장에 이르기까지 줄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구원받아야할 대상임을 역설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3장 1, 2절에 들어서서는 갑자기 유대인의 지위와 할례의 장점에 대하여 피력합니다. 이방인보다 유대인의 나은 점이 많지만, 사도는 으뜸 되는 한 가지만을 말하는데, 그건 다름이 아닌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유대인의 이방인보다 나은 이러한 입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모두가 동일한 죄인”라는 논지를 다시 이어갑니다. 그것이 9-18절까지 기록된 죄인의 악하고 비참한 실상입니다. 그리고 19, 20절에서는 율법을 가진 자 역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의롭다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고, 율법은 고작 죄를 깨닫게 되는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3:21-26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진술로, 4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21-26을 가리켜 “로마서 및 성경 전체의 요점이고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극찬합니다. 21-26은 하나님의 의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만민에게 나타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구속을 실현하시는 그 때에 하나님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게 됨”을 역설하였습니다.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의롭다고 하실 이는 하나님이신데, 이는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여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에 참여하게 하신 주님을 우리는 영원토록 찬양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