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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의 산실(産室)을 찾아서 6
김철교(시인, 배재대 교수) 월간 시문학 2월호
14. 열이틀 째 날: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영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셰익스피어를 내가 맨 처음 만난 것은 피천득 선생님의 영시강좌에서 소네트를 공부한 때였다. 피교수님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무척 좋아하셨다. 피선생님의 번역시집 <내가 사랑하는 시, 샘터, 2005 개정판>에 몇 편이 실려 있는데 나름대로 깔끔하게 번역하셨다. 예를 들면, 66번 소네트의 원문은 14행이나 번역한 시는 다음과 같이 8행으로 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 두고 가는 것이 아쉬워, 지저분한 이 세상에 어쩔 수 없이 머물고 있다는 내용이다.
찬란한 명예들이/돈에 팔려 주어질 때// 예술이 권력 앞에서/벙어리가 되었을 때//바보가 박사인 양 / 기술자를 통제할 때// 이 세상 떠나고 싶다/ 그대를 두고 가지 않는다면(소네트 66, 세익스피어, 전문)
권력(정치권력이든, 문단권력이든)에 빌붙어 무슨 장(長)이나 특혜를 받으려고 얼쩡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소위 권력자(바보)들이 마치 자기가 거장인양 많은 예술가(기술자)들을 통제할 때,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셰익스피어의 한탄이자 피교수님의 한결같은 철학이었다.
외국문학작품을 제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원문에도 충실해야 하고 우리말에도 충실해야 한다. 특히 시는 시답게, 수필은 수필답게, 소설을 소설답게 번역해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특히 시작품은 행간까지 번역해내야 하기 때문에 해당 외국어에 정통한 시인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셰익스피어의 고향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아침 일찍 아일랜드 쾌속정(Irish Swift)을 타고 더블린 항구를 출발하여 2시간 달리면 앵글시(Anglesey)에 있는 홀리헤드(Holyhead)에 도착한다. 이 섬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기차역이 있다. 웨일즈 말로 스란페어 역이라고 한다는데, 정식이름이 영어로 총96자(The Church of Mary in the hollow of the white hazel near the fierce whirlpool and the church of Tysilio by the red cave)로 이루어진 기차역이다. 스란페어 역에서 휴식을 취하고 체스터(Chester)를 지나 스트랫퍼드(Stratford-upon-Avon: ‘에이본강가에 있는 스트랫퍼드’라는 뜻)에 오후 늦게 도착하였다. 셰익스피어를 만나기 위해 하루 내 배로 버스로 달려온 셈이다.
해가 길어 저녁을 일찍 먹고 셰익스피어가 잠든 홀리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 1596년에 세워져 영국에서 가장 오랜된 펍(pub)이 있는 개릭여관(The Garrick Inn), 셰익스피어가 만년을 보낸 뉴플레이스(New Place), 딸이 살던 홀스 크로프트(Hall's Croft), 손녀가 살던 내쉬의 집(Nash's House), 셰익스피어 극이 일년내내 상연되는 3개의 극장(Royal Shakespeare Theatre, Swan Theatre, Courtyard Theatre)을 거쳐 백조가 한가로이 떠있는 에이본 강가에서 10시쯤 지는 해와 작별인사를 하고 하루를 마감하였다. 꿈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생가를 비롯한 주요 건물들의 내부는 다음 날 오전에 세밀하게 관람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기차역 앞가게> <에이본 강가에서 일행들과 함께>
스트랫퍼트 역에서 채 1km도 안되는 곳에 셰익스피어 생가가 있다. 셰익스피어가 1564년에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집으로 16세기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의 부친은 가죽가방과 양모사업으로 재산을 모아 읍장까지 되었던 도시의 유지였다. 3층 목조건물은 당시의 중산층 생활상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정원에는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한다는 많은 꽃들이 가득하다. 생가 옆에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개관한 셰익스피어센터가 붙어 있어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생가에서 남쪽으로 약 500미터 정도의 거리에 1597년부터 죽을 때까지 말년을 보낸 뉴플레이스(New Place)가 있다. 셰익스피어가 구입하여 살 때에는 훌륭한 저택이었으나 1759년에 새 주인이 건물을 헐어버려 현재는 집터와 화려한 엘리자베스 양식의 정원만을 볼 수 있다. 이 정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1626년 셰익스피어의 손녀 엘리자베스 홀(Hall)과 결혼한 토마스 내쉬(Nash)의 집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에서 약 300m의 거리에 있는 홀스 크로프트 (Hall's Croft)는 1607년 셰익스피어의 딸 수잔나와 결혼한 존 홀(John Hall) 박사의 집으로 내쉬의 집과 함께 튜더왕조의 전형적인 건물이다.
여기에서 약300m 거리에 홀리 트리니티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는 셰익스피어와 부인, 딸과 사위의 무덤이 있고 북쪽벽에는 죽은 직후에 세워진 셰익스피어의 흉상이 있다. 중심가에서 약 2km 서쪽에 셰익스피어의 부인 앤 하서웨이의 생가(Anne Hathway's Cottage)가 있다.
<셰익스피어 부인 하서웨이 생가> <셰익스피어의 생가>
셰익스피어 아내인 앤이 1582년 결혼할 때까지 살았던 집으로 정원에 둘러 쌓인 초가지붕의 농가로 당시의 유복한 농가의 전형이라 한다. 19세기 말까지 앤의 손자인 하서웨이 일족이 살았다. 참으로 아름답게 잘 꾸며 놓은 정원이 집의 품격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 영국의 전형적인 농가로 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가득하였다. 15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확인된 그림같은 이집의 외형과 12개의 방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후손들이 사용한 가구와 생활용품이 많이 남아 있다. 이곳은 셰익스피어 전원극 <뜻대로 하세요>에 등장하는 시리아의 집 모델이기도 하다.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을 겸하고 있었던 중농(重農)이었다. 아버지가 읍장까지 지낸 유지였으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스트랫퍼드에는 훌륭한 문법학교(Grammar School)가 있어서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기본적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뒤에 그에게 필요했던 고전 소양도 이때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운(家運)이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는 않으나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590년을 전후한 시대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국운이 융성한 때여서 문화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1592∼1594년 2년간에 걸친 페스트 창궐로 인하여 극장 등이 폐쇄되었고, 때를 같이하여 런던 극단도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이때부터 신진 극작가인 셰익스피어에게 본격적인 활동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1594년 당시의 극계를 양분(兩分)하는 세력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 극단(Lord Chamberlain's Men)의 간부단원이 되었다. 1599년 템즈강 남쪽에 글로브극장(The Globe)을 신축하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의 허락을 받아 극단명을 ‘왕의 극단(King’s Men)’이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이런 명칭은 당시의 관례였을 뿐 상업적인 성격을 띤 일반 극단과 차이가 없었다. 1613년 그의 마지막 작품인 <헨리 8세>를 상연하는 도중 글로브극장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616년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스트랫퍼트에 있는 셰익스피어 극장> <런던에 있는 셰익스피어 극장 터>
그의 작품은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기(1590-95)는 습작 번안의 시대로 말로우의 작품을 모방한 역사극과 청춘과 연애와 향락을 주제로 하는 가벼운 희극을 썼다. 달빛 아래 전개되는 요정의 세계를 그린 <한여름 밤의 꿈>, 열렬한 사랑의 비극을 그린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제2기(1595-1600)에는 희극과 역사극이 쓰여졌으며 <베니스의 상인>, <헨리 4세>, <십이야> 등이 이 시대의 대표작이다. 제3기(1600-08)에는 비극이 중심이 되었는데 복수극 <햄릿>, 질투를 주제로 한 <오셀로>, 가장 장렬한 비극 <리어왕>, 스코틀랜드의 역사에 뿌리를 둔 <맥베스> 등 4대 비극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제4기(1608-12)에는 낭만극이 중심이 되었으며, <템페스트>는 동인도 제도로 가던 배가 버뮤다 섬에서 난파한 이야기 등의 여행기를 기초로 쓰여진 작품이다.
셰익스피어 전집이 처음 발간된 것은 1623년으로 37편의 희곡과, 154편으로 된 소네트집, 69편의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15. 열사흘 째 날: 웨일즈(Wales)의 역사와 문학
아침 일찍 셰익스피어 생가(Shakespeare's Birthplace)와 부인의 집(Anne Hathway's Cottage)의 내부까지 자세히 관람하고,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들의 파노라마인 코츠월드(Cotswold)를 통과하여 웨일즈로 향하였다. 카디프성(Cardiff Castle)과 카디프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Cardiff)에서 웨일즈의 역사를 공부하고 카디프에 있는 디슬팍호텔(Thistle Parc Hotel)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대영제국, 즉 그레이트 브리테인(Great Britain)은 웨일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로 구성되어 있다. 스코틀랜드는 경제적 이익을 앞세워 협약에 의해 합병하였으나 웨일즈는 무력에 의해 통합하였다. 영국의 황태자는 웨일즈 왕자(Prince of Wales), 그 부인은 웨일즈 왕자비(Princess of Wales)라고 불리운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전형적인 서양의 호전적인 왕이었다. 그는 웨일즈를 침공하여 1284년 웨일즈 칙령으로 웨일즈와 잉글랜드를 통합하였다. 웨일즈 사람들에게 화해의 제스처로 그의 아들이 카나본(Caernarbon)성에서 제1대 웨일즈 왕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 왕자가 나중에 에드워드2세 왕이 된다. 이후 영국의 황태자는 대대로 카나본 성에서 황태자 대관식을 거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영국의 황태자는 ‘웨일즈 왕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후에도 1296년 팔커크(Falkirk)전투에서 왈러스(Wallace)를 무찌르고 스코틀랜드의 대관석인 스콘(Scone)을 잉글랜드로 가져왔고 스코트인을 때려 부수는 망치(The hammer of the Scots)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호전적이며 용감했다.
코츠월드는 옥스퍼드 교외에서 시작되어 서쪽 첼트넘Cheltenham)에 이르는 아름다운 구릉지대를 말한다. 13-14세기 양모산업의 중심지로 번창한 아름다운 마을과 도시가 곳곳에 있다. 숲과 목초지의 녹음으로 둘러싸인 마을들은 엘리어트가 자주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룻밤 머물던 카디프는 딜런 토마스(Dylan Marlais Thomas, 1914-1953)의 활동무대였던 스완지(Swansea)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나, 그의 고향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딜런 토마스는 웨일즈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일찍이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18세 때에 런던으로 갔다. 제1시집 <18편의 시(詩): 18 Poems, 1934>로 젊은 천재시인으로 인정받아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어 시집 <사랑의 지도: The Map of Love, 1939>, <죽음과 입구: Deaths and Entrances, 1946> 등을 출판하여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소리와 운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노골적으로 감정적 충격을 주었으며, 성서적인 내용과 성적인 표현 사이에 긴장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난해하고, 몽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포크 음악의 대명사인 밥 딜런(Bob Dylan)은 그를 존경한 나머지 자신의 성을 딜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불과 20세의 나이로 첫 시집을 내고 단번에 영국 문단에서 찬사를 받는 천재로 군림했지만 불과 39세의 나이로 알콜 중독과 방랑의 피로로 미국의 뉴욕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웨일즈 란(Laugharne)의 세인트 마틴 교회(St. Martin Church)에 묻혔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딜런 토마스의 기념비가 복제품으로 남아있다.
코츠월드를 통과하여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에 도착하였다. 도시의 역사는 로마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도시가 급속히 발전한 것은 18세기 산업혁명의 덕택이다. 석탄과 철광석의 집산지로서의 항구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카디프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원래 로마인의 요새가 있었던 장소로 13세기에 성이 건축되었지만 17세기 이후에는 폐허가 되었다. 성 내부에 있는 돌탑 노르만킵(Norman Keep)은 로마인이 만든 요새를 노르만인이 더욱 보강한 것으로 19세기에 발굴되었다. 현재 성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 후반에 걸쳐 뷰트공작(Earl of Bute)이 복원한 것이다. 금박과 대리석을 푸짐하게 사용한 영국에서 가장 호화찬란한 성이라고 한다.
16. 열나흘 째: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과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
1층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화재경보가 울렸다. 나는 혹시 아침에 내가 다리미질을 하다가 전기를 끄지 않아 문제가 생겼나 걱정이 되었다. 안내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지 않아 계단으로 부지런히 뛰어올라가 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안심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숙박객은 모두 대피하고 소방차가 도착했다. 아무리 봐도 연기는 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도인들이 아침 기도를 하기 위해 향을 피웠는데 그게 경보기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벨이 울렸다고 한다. 여하튼 영국에서 화재대피 훈련을 철저히 한 셈이다.
식사 후 코츠월드 구릉의 남서쪽 끝, 에이번 강 주변에 펼쳐진 기원전 로마인에 의해 시작된 온천지역인 바스로 이동하였다. 로마인들이 만들었다는 로만바스(The Roman Bath)는 지금도 섭씨 46도의 물이 흐르고 있다. 지하박물관에는 목욕탕과 함께 건조된 로마식 신전의 잔해와 모형 등이 전시되어있다. 18세기에는 온천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상류계급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이 도시를 무대로 화려한 사교계가 펼쳐졌다고 한다.
바스 수도원(Bath Abbey)에 이르니 바스대학 졸업식이 열리고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다. 아름다운 여학생과 함께 사진 한 장 찍은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경영학을 전공한다하여 말이 잘 통했다. 바스 수도원은 758년에 창건되고 973년에는 잉글랜드를 통일한 색슨 왕 에드거의 대관식이 행해진 곳이라고 한다.
<바스대학 졸업식에서 경영학과 학생과 함께> <로만바스 옛 때밀이 복장 안내원>
제인 오스틴이 1801년부터 1804년까지 바스에 살았다고 하며 제인오스틴센타(Jane Austen Center)에는 그녀의 바스 생활과 당시의 거리 모습 등이 소개되고 있다. 그녀는 화려한 사교계가 익숙하지 않아 얼마 살지는 않았으나 <설득: Persuasion, 1817> 등의 작품에 바스 생활의 흔적을 담았다.
솔즈베리로 이동하여 솔즈베리 대성당(Salibbury Cathedral)을 찾았다. 1219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310년에 완공되었다. 챕터하우스(Chapter House)의 천정은 고딕 양식의 건축미를 자랑하며, 성서의 이야기를 그린 벽의 부조는 중세 미술의 걸작 중 하나다. 1386년에 만들어진 시계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215년에 국왕의 권한을 처음으로 제한한 칙령인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원본도 보존되어 있다.
마그나 카르타 원본은 4개가 남아 있는데 솔즈베리성당, 대영박물관(2개), 영국 링컨 성(Lincoln Castle)에 보관되어 있다. 챕터하우스에 있는 마그나 카르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며 유리관 속에 견고하게 보관되어 있다. 성당 안에는 마그나 카르타 서명을 기념하여 1880년 구리로 동상을 만들었는데, 당시 서명에 참여했던 존왕(King John), 랑톤대주교(Langton), 혁명주동자 남작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마그나카르타 서명 기념 동상, <스톤헨지를 배경으로>
존왕, 랑통주교, 혁명주동 남작>
오후에는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Stonehenge)를 찾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석기시대 유적지다. BC3500년경 솔즈베리 평원에 거주하고 있던 유목민족이 토대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BC150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넓은 평원에 원을 이루며 서있는 스톤헨지는 종교의식, 혹은 천문관측 등을 위해 세워졌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돌기둥으로 사용된 청석암은 240마일 떨어진 웨일즈 지방의 채석장에서 가져 온 것으로 밝혀졌다. 제일 무거운 돌의 무게는 26톤에 달하는 큰 돌들을 그 먼 옛날 원시인들이 어떻게 해안가에서 내륙지방으로 옮겨왔는지가 가장 큰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엄청난 인력과 시간을 들여 완성되었음이 분명한 스톤헨지는 당시의 상당한 공학기술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스톤헨지는 1891년 출간된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 테스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테스’로 분한 영화배우 나타샤 킨스키가 살인을 저지르고 잡혀가기 직전에 바위위에 누워있었는데 그곳이 스톤헨지의 돌기둥위였다. 테스는 자신의 순결을 빼앗아간 알렉을 죽이고 엔젤과 함께 스톤헨지의 거대한 돌 위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청순한 테스가 걸어간 길고 험난했던 운명의 사슬은 스톤헨지를 거쳐 윈체스터 감옥의 단두대에서 끝이 난다.
잉글랜드 도체스터(Dochester)에서 태어난 토마스 하디는 19세기 영국의 소설가이며 시인이다. <테스: Tess of the D'Urbervilles, 1981> 등을 통해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인습과 편협한 종교인의 태도를 공격하고, 남녀의 사랑을 성적 면에서 대담히 폭로하였다. 석공의 아들로 1856년 도체스터 건축기사의 제자가 되었고, 1862년 런던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갔다. 건축공부를 하는 여가에 소설을 쓴 것이 당시 문단의 대가로부터 인정받자 많은 소설을 썼다. 나폴레옹 시대를 무대로 쓴 장편 대서사 시극(詩劇) <패왕 3부작: The Dynasts>을 1903∼1908에 썼으며, 만년에는 영국 문단의 원로로 자타가 공인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후에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코너’에 묻혔는데, 그의 심장만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고향에 있는 부인의 무덤 옆에 묻혔다.
17. 열다섯 째날 오전: 그리니치 천문대와 내셔널갤러리
드디어 출발한지 열하루 만에 런던에 돌아와 왔다. 6월21일에 3일간의 아이슬란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얼스 코트 아이비스 런던 호텔(Ibis London Earls Courts)에서 하룻밤 자고, 그 이튿날 바로 영국 순회 여행을 시작하여 7월1일에 다시 똑같은 호텔에 돌아와 머물게 된 것이다.
아침 식사후 1675년에 템즈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그리니치 천문대로 향하였다. 세계 표준시 GMT(Greenwich Mean Time)의 기준이 되는 곳이다. 17세기에 찰스 2세에 의해 지어진 천문대는 1884년 워싱턴 국제천문회의에서 경도(longitude) 제로 지점으로 채용되었으며, 1935년부터 이 자오선을 기준으로 하는 그리니치 시(時)가 국제적 시간 계산에 쓰이게 되었다.
영국의 현대식 천문대는 1946-53년에 서섹스(Sussex)로 옮겨졌지만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그리니치 자오선)의 표주(標柱)와 천문대 초창기에 쓰던 관측기계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본초자오선은 바로 이 건물을 통과한다. 적도를 기준으로 남반구와 북반구로 나뉘듯이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나뉜다.
넓은 그리니치 공원 안팎에는 유명한 영국 건축가들에 의해 건립된 해군사관학교 및 해사박물관 등이 있으며 언덕에는 범선 커티삭호(號)가 보존되어 있다. 참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옛날 천문관측에 쓰였던 망원경과 각종 시계들 앞에서 경탄을 금치 못하고, 특히 경도 제로 지점에서 기념촬영은 필수 코스다. 마침 스웨덴에서 여행 온 예쁜 여자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거시기를 경도 제로 지점에 맞추고 동서(東西)로 미녀들을 세우고는 사진을 찍었다.
<그리니치 천문대 앞, 세계표준시> <본초자오선 표주 앞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살피고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으로 향했다. 넬슨 기념비가 높이 솟아있는 트라팔가 광장이 옆에 있다. 1824년 38점의 수집품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13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유럽 회화 2천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이 풍부하다.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각국에서 탈취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관계로 입장료를 받을 처지가 아니라고 한다. 대영박물관, 국립미술관, 국립초상화미술관은 각각 하루는 둘러보아야 진수를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는 곳들이다. 나는 대영박물관과 국립미술관에서는 주로 ‘사랑’과 관련된 그림과 조각들에 초점을 맞추어 자세히 관람하였고,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는 시인들의 초상화 앞에서 존경을 표하였다.
나는 금년 말에 네 번째 시집을 발간하는데 1968년 동인지 <창작시대>에 ‘수련’이라는 시를 발표한 이후 40여년간 써 왔던 시들이 이번 네 번째 시집에 이르러 비로소 모두 정리된다. 이제 부터는 새로운 방향의 시 쓰기를 모색하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그림과 음악을 중심으로, 고전에 나타난 신화와 전설 속의 이야기들을 배경 삼아 ‘화가와 뮤즈’라는 연작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한권의 시집으로 묶을 예정이다. 또한 피천득 교수님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자신의 목소리로 번역했듯이, 성경의 ‘시편’에 나와 있는 150편의 시를 나의 혼으로 다시 써 보려고 한다. 이 두 기둥이 앞으로 내가 당분간 시인으로써 해야 할 작업일 듯 싶다. 이번 여행은 어쩌면 그 준비작업의 일환인 셈이다.
국립미술관에서 <비너스와 마르스>, <거울앞의 비너스>,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을 만났다. <비너스와 마르스: Venus and Mars>는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작품으로, 올림포스 최고의 추남인 대장장이의 신 불카누스의 아내 비너스와, 미남인 전쟁의 신 마르스의 혼외정사 이후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비너스 앞에서 잠들어 있는 마르스는 사랑의 힘이 무력보다 강하다는걸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비너스와 마르스>
<거울 앞의 비너스: Venus before the Mirror>는 스페인의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Velázquez: 1599-1660]가 그린 그림이다. 사랑의 신 큐피드가 거울을 바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여인의 앞면을 거울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침대 위에 길게 누운 비너스는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을 통해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생각에 잠겨 바라보고 있다.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 Venus, Cupid, Folly and Time>은 브론치노(Agnolo Bronzino:1503∼1572)가 그렸다. 큐피드는 붉은 쿠션에 무릎을 꿇고 사랑의 여신 비너스에게 입맞춤을 한다. 관능적인 몸매의 비너스는 오른 손에 큐피드의 화살을 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황금사과를 들고 있다. 비너스 옆에는 '쾌락'이라는 아이가 장미꽃을 뿌릴 준비를 하고 있다.
<거울 앞의 비너스>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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