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2권-19장.hwp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2권-19장(정리) (민음사 冊)
103-104쪽. 환관들의 권력
-환관은 전제정치와 의심의 산물
-환관은 사치풍조가 만연해지면서 로마에도 옮겨진 것
-환관의 정보망은 고성능 레이다.
-환관은 타락한 황제를 거름삼아 흥함. 예) 콘스탄티우스
-가장 악명높은 환관: 에우세비우스(시종장). 막강한 권세를 부리며 콘스탄티우스가 갈루스를 처형하도록 유도하기도 함.
★ 기번은 환관제도를 매우 혐오한다. 이것은 그의 종교적 배경이 개신교-카톨릭-개신교였던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04-105쪽.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의 교육
-유배지에서 교육받게 함. 갈루스:이오니아, 율리아누스:비티니아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에게는 뛰어난 교사가 배정되었으나, 폭군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노예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학문정진, 체력단련이 주된 교육
105-106쪽. 부황제가 된 갈루스
-25세에 환관들의 부추김으로 갈루스가 부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와 갈루스는 서로의 통치권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서방으로 진격했다.
-갈루스는 동방 지역을 통치하면서 동생 율리아누스의 명예와 신분을 회복하고, 막대한 재산을 돌려준다.
106-107쪽. 통치능력 없는 갈루스
-통치에 관한 학문과 기술은 가르치지 않았음. 갈루스는 곧 무능력한 사람임이 드러남.
-침울하고 난폭한 성격이 폭발함
-아내 콘스탄티나 역시 잔인함. (갈루스의 불행!)
-무고자가 늘고, 심지어 갈루스 자신이 평민복을 입고 무고에 가담하기도 함.
-갈루스의 행위는 자기 무덤 파는 격. 제거의 빌미를 찾고 있던 콘스탄티우스에게 좋은 먹잇감을 제공했던 격.
108-109쪽. 콘스탄티우스의 간계, 파견된 대신이 학살당하다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의 실정을 알고 있었으나 내전이 진정되기까지 이를 모른 척했다.
-시리아 총독 테오필루스가 안티오크 백성들에게 학살되는 사건이 생겼다. (갈루스가 선동했다는 말도 있었다.)
-콘스탄티우스는 황제 권위에 도전한 것이라 노하여, 동방 총독 도미티아누스와 황실 재무관 몬티우스를 파견했다.
-도미티아누스와 몬티우스는 건방지게 굴었다. 이에 갈루스와 콘스탄티나는 이들을 근위대에 넘겨 죽게 했다.
109-110쪽. 위험한 상황에 처한 갈루스
-콘스탄티우스는 평온을 가장했고(편지를 보냄), 갈루스는 이에 속았다.
-참고장교 스쿠딜로의 감언이설에 갈루스는 또 속았다. (내외로 갈루스는 포위되었음)
-의지했던 아내 콘스탄티나가 죽었다.
110-112쪽. 갈루스 처형되다
-황제의 요청으로 황제의 궁전으로 향하는 갈루스
-점차 서방이 가까워질수록 갈루스에 대한 응대는 달라진다.
(1) 갈루스의 관할에서 대신 통치임무를 확보할 양으로 콘스탄티우스가 파견한 관리들이 갈루스를 싸늘하게 보았다.
(2) 하드리아노플에서는 무장 해제를 명령받았다. 명령서는 오만하고 절대적인 명령이 적혀 있었다.
(3) 판노이아의 페토비오에 이르자 위장 전략 모두를 제거하고 노골적인 모습으로 대했다.
(4) 갈루스를 체포하고 부황제의 표장을 압수했다. 그리고 격리 감옥에 집어넣었다.
-갈루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모든 것을 아내 콘스탄티나가 사주한 것이라 변명,
-콘스탄티우스는 더욱 분개. 사형집행을 서둘러 집행하라 함.
-환관들의 중간 농간. 결국 갈루스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음.
112-113. 위험해진 율리아누스
-콘스탄티우스에게 제거대상으로 남은 것은 율리아누스 하나.
-경계를 늦추지 않는 율리아누스. 무의식중에라도 빌미가 될만한 말을 하지 않아야 했던 율리아누스.
-황후 에우세비아의 공헌. 황후의 중재로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와 독대하게 되어, 자신의 진심을 밝힐 기회를 가짐.
113. 아테네로 간 율리아누스
-아테네 학원에서 널리 사랑받은 율리아누스.
-스스로도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음.
114-116. 부황제가 된 율리아누스
-콘스탄티우스는 광대한 지역을 혼자 감당하기란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야만족의 침입)
-황후 에우세비아의 충고가 한 몫을 했다. 율리아누스는 야심없는 사람이다. 부황제를 시키면 감사하고 충성할 것이다.
-율리아누스, 25세 생일날 부황제가 되다.
116-117. 부황제 율리아누스
-부황제로서의 삶은 여전히 감시 속의 생활
-아이 낳는 문제까지 간섭과 통제를 받음(에우세비아 황후의 방해)
-죽음을 늘상 의식하는 율리아누스
118. 실바누스의 부당한 죽음
-모함받은 실바누스는 비방과 재산몰수를 단행하자, 혐의를 벗기 전에 실제로 그런 행동으로 나아갔다.
-동료 우르시키누스가 배반하여 실바누스는 암살당했다.
-가장 위험한 적은 가까이에 있다!
119-120. 로마를 방문한 콘스탄티우스
-357년 4월.
-로마에 가까이 이르자 갑자기 개선행렬로 바뀐 왕의 행차
-32년만의 황제 행렬을 보고 로마시민 환호
120-121.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운반
-콘스탄티우스도 로마에 기념물을 남기려고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운반해옴. (右: 로마 포폴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 콘스탄티우스가 옮긴 것)
121-125. 일리리쿰 속주의 위험
-콰디족, 사르마티아족, 리미간테족 정벌
-콘스탄티우스, 사르마티아 전쟁을 잘 치러내어 ‘사르마티쿠스’라는 별명 얻음
125-127. 페르시아의 도전
-샤푸르의 오만한 서신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속주의 반환을 요청함
-콘스탄티우스는 평화롭게 이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으나, 로마 시민 안토니누스의 적대적 술책으로 무산됨. 안토니누스는 샤푸르를 부추겨 동방 속주들을 침공할 것을 권함.
127-129. 샤푸르, 메소포타미아 공격
-359년. 메소포타미아 공격 개시
-로마군은 미리 대비.
129-131. 아미다 공성전
-로마 7개 군단의 방어
-탈주병에 의해 샤푸르 공격이 성공하였으나 페르시아의 손실도 막대했다.
131-132. 싱가라 공성전
-360년. 샤푸르의 2차 공격. 1차때보다 작은 규모.
-싱가라, 베자브데 차지
132-133. (한편) 로마의 사정
-샤푸르를 대적할 수 있는 용장 우르시키누스가 환관들에 의해 군사지휘권을 빼앗기고 노장 사비니아누스가 군사지휘권을 가짐, 작전 계획단계에서부터 실패.
-콘스탄티우스의 동방 이동, 베자브데 포위 공격을 개시했으나 우기가 닥쳐 철군.
134-135. 게르만족의 갈리아 침입
135-136.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 평정의 임무가 부여됨
-사색적인 학문에 익숙한 율리아누스였지만 거친 음식과 혹독한 추위, 불편한 생활을 잘 견뎌냄
-고위 관리 살루스티우스의 지혜를 덕봄
-그러나 살루스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의 질투를 받아 (율리아누스가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해임됨
136-138. 율리아누스의 1차 갈리아 전투
-겨우 360여기의 초라한 규모로 갈리아 전투에 투입된 율리아누스
-1차 갈리아 전투에서는 공격보다는 수비에, 갈리아에 자리잡는 데에 치중하게 된다.
-사령부를 설치한 상스에서 포위되어 30여일의 전투를 치렀다.
138-139. 율리아누스의 2차 갈리아 전투
-기병대장 마르켈루스는 상스를 지원하지 않고, 도우려는 다른 부대의 이동도 저지하였다.
-마르켈루스는 조용히 소환되어 직위해제되었다.
-후임은 세베루스. 그는 율리아누스에게 충성하였다.
-보병대장 바르바티오가 3만명을 이끌고 밀라노에서 출병하였으나, 율리아누스를 돕는 데는 전혀 도움되지 못했다. 오히려 야만족과 비밀동맹 맺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기번은 바르비티오의 무능력인지, 율리아누스에 대한 질시때문인지, 은밀한 지시 효과인지를 가늠한다.)
140-142. 스트라스부르크 전투
-게르만족에서 선발된 3만 5천명이 율리아누스의 1만 3천명과 결전을 치렀다.
-결과는 율리아누스의 승리.
-게르만족을 이끌던 크노도마르는 포로가 되어 콘스탄티우스에게 전리품으로 보내졌다. 그는 패배, 구금, 유배라는 굴욕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알레만니족의 침략 해결)
142-144. 프랑크족을 정복한 율리아누스
-프랑크족은 전쟁을 사랑하고, 전쟁으로 단련된 민족이다.
-뫼즈 강변의 600명 프랑크족을 격파하느라 두 달을 허비한 율리아누스는 프랑크족과의 전투가 어려울 것을 간파, 신속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율리아누스의 민첩성에 프랑크족은 결집하고 의논할 기회를 잡지 못하여, 각개 소수 부족이 율리아누스와 교섭하는 형태로 바뀐다.
-율리아누스는 각 부족의 요구와 로마의 필요를 적절히 배합하여 프랑크족 정복을 마무리한다.
144-146. 라인강 너머로 세 차례 원정한 율리아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경쟁하고자 한 율리아누스. 그도 갈리아 전쟁기를 씀.
-1차: 트라야누스 황제가 건설한 옛 성 수복
-2차: 알레만니족 두 왕의 기를 꺾음. 생존한 로마인 포로를 돌려주겠다는 두 왕의 제안에, 갈리아 도시들과 촌락에서 사라진 주민들의 수를 정확히 제시하여 두 왕의 기만책을 꺾음. 이로써 그는 초자연적인 지식을 갖추었다는 믿음까지 생김.
-3차: 야만족을 기습하고, 로마인 포로 2만명을 구출해옴.
146-147. 갈리아 도시들을 복구함
-마인츠에서 라인강 하구 사이의 7개 전초기지를 요새화함
-게르만족은 물자 준비와 운반의 노역에 종사하게 됨
-브리타니아에서부터 곡물 수송
147-149. 민정처리
-국민들의 평화와 행복에 대한 자애로운 배려
-법정문제: 공사나 민사사건을 속주 총독들이 처리했더라도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재검토
-재정업무는 민정 총독 플로렌티우스에게 완전히 일임되어 있었다. 플로렌테우스는 소인배.
-임시 조세 징수 명령서에 민정 총독이 서명을 요청했을 때 율리아누스는 거절했다. 이 일로 콘스탄티우스 궁정은 크게 화를 냈다.
-율리아누스에게는 정부의 그릇된 정책을 개혁할 권한이 없었다.
149-151. 율리아누스 선정의 결과
-갈리아 도시들은 발전하고 번영했고, 평화가 유지되었다.
-율리아누스는 특히 파리에 애정을 가졌다.
-파리의 옛이름은 ‘루테티아’ ‘레우케티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