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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 조선의 정치는, 일당 전제 정치와 서울에 거주하는 10여 개 가문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세도정치로 상징되었다.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관직을 매매하는 일이 흔해졌다. 뇌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은 백성들을 쥐어짜다시피 하여 욕심을 챙겼다. 그들이 사리 사욕을 채우는 주된 수단은 여러 가지 세금을 부당하게 거두는 것이었는데, 이는 '삼정의 문란'이란 말로 표현되었다.
홍경래 난(1811)을 계기로, 농민층의 항쟁은 각 지역에서 산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농민 항쟁이 전국에 걸쳐 폭발적으로 퍼진 것은 임술 농민 항쟁(1862)이었다. 제주에서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70 여 개 군현에서 발생하였으며, 그 가운데 전라도 지역 농민들의 저항은 38곳에 이르렀다. 이는 경상도 18곳, 충청도 12곳에 비해 그 수가 많을 뿐아니라, 전라도 54개 군현 수에 비하더라고 발생 정도가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전남에서는 장성, 영광, 창평, 함평, 무안, 나주, 강진, 진도, 남평, 능주, 화순, 동복, 장흥, 옥과, 구례, 순천, 낙안, 흥양 등 18개 군현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개항 이후로 동학농민전쟁이 있기까지도 민중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횃불을 들고 다니던 '명화적'(明火賊)들은 지주, 여각과 객주가 있는 시장, 중앙에 올려보내는 세금, 외국 상인 등을 약탈하였다. 농민 항쟁도 큰 가뭄이 든 1888년에서 189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나, 중앙의 기록에 나온 것만도 50개 지방에서 52회에 이르렀다. 지역적으로는 인구가 많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한 대도시 지역, 왕실의 토지가 많고 토지세의 부정이 심한 평야 지대, 광산 지대 등에서 많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발생한 민중들의 저항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지주제의 확대였다.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량이 크게 늘어나자, 곡식 값이 크게 올라 대토지를 가진 자들이 많은 이익을 누리게 되었다. 쌀을 수집하여 파는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불법으로 농토를 늘려갔지만, 일반 농민이나 빈농 계층은 갈수록 몰락해 갔다.
둘째는 각종 세금을 무리하게 징수했기 때문이었다. 군현의 수령과 아전들이 결탁하여 백성들을 윽박질러 돈을 빼앗고, 새로운 명목의 세금을 터무니없이 만들어 수탈하였다. 1892년 무렵 우의정이던 정범조는 민란의 가장 큰 원인이 수령과 아전들의 부당한 세금 징수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이들 지방관의 횡포가 삼남지방에서 특히 심하다고 진단할 정도였다.
셋째는 외세의 침탈 때문이었다. 1880년대 말부터 본격화한 일본과 청나라 상인들의 내륙 상업 활동으로, 소규모 상인과 상품 생산자들이 크게 타격을 입었다. 의복과 음식,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외국의 공산품이 침투함으로써, 전통적인 상업과 수공업이 크게 피해를 당하였다. 당시 조선은, 개항 이후 청·일 및 서구 열강과 맺어진 불평등 조약 때문에, 그들의 정치, 군사, 경제적 침략을 방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집권 세력인 민씨 정권은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는커녕, 침략 세력과 어울려 수탈을 일삼았다.
난세에 꽃피운 개벽 세상의 염원, 동학
동학은 1860년에 경주의 몰락한 양반 최제우가 창시하였다. 동학 안에는 유교·불교·도교와 천주교, 무속 신앙의 요소까지 두루 담겨 있었다. 이러한 동학 사상은, 최제우 개인이 노력한 결과라기보다는 당시에 직면한 위기 상황의 산물이었다. 안으로는 양반 지배층에게 갖은 수탈을 당하고 밖으로는 외세의 정치·경제적 침략에 시달리고 있던 농민들의 염원과 희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따라서 동학에는 신분제를 비롯한 사회의 여러 차별에 반대하는 평등 사상, 외세를 배척하는 민족주의, 개벽 세상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혁명 사상이 들어 있었다.
동학의 평등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사람은 신분과 남녀의 구별이 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동학의 외국 세력 배척 사상은, 중국마저도 서양에 두릅을 꿇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에서 조선도 머잖아 그들의 침략을 받을 것이라는 위기 의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개벽 사상은, 오랫동안 고통을 강요하던 이 세상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염원이었다. 이러한 동학의 주장은, 수 천 년 동안 차별과 수탈을 직접 당해오던 농민들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다.
동학이 세력을 크게 떨쳐가자, 조정에서는 동학을 위험하게 여기고 불순한 가르침으로 단정하여 탄압하였다. 교조 최제우는 사교(邪敎)로써 백성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1863년 최제우에게 2대 동학 지도자로 인정받은 최시형은, 강원도의 산골을 전전하면서 은밀하게 동학을 전파하였다. 최시형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찬송가에 해당하는 {용담유사}를 펴내면서 전도에 온 힘을 기울였다. '포·접'의 조직이 갖추어지면서, 동학은 경상도와 강원도는 물론 경기·충청·전라도에까지 두루 퍼지게 되었다.
전라도에 동학이 전해진 것은 1880년대 후반이었다. 전라도 지역은 정부 세금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곡창 지대이자 조정과 지방 관리의 수탈이 가장 심한 곳으로서, 부당한 착취에 맞서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농민 항쟁을 전개해 온 지역이었다. 외세 배격과 평등한 새 세상을 구하는 동학의 가르침은, 그러한 전라도 지역 민중의 조건과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동학에 가입하면서, 전라도 농민들은 더욱 각성되고 조직된 힘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전라도 지역의 동학 교세가 급성장하자 감사나 고을 수령들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수천의 동학 교도들은,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열어, 전라 감사 이경직에게 신앙의 자유와 지방 관리들의 동학 교도 탄압 중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 집회는, 관리들의 부정을 금지하겠다는 감사의 약속까지 받아냄으로써 농민들에게 큰 용기를 심어 주었다. 1893년 2월에는 40여 명의 동학 교도가 대궐 앞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달라고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였다. 임금은 모임을 풀고 귀가하면 청원한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감사와 왕의 약속과 달리 동학 교도에 대한 탄압과 착취가 날로 심해졌다. 이에 최시형의 동학 교단은 충청도 보은에서 대규모 집단 시위를 계획하였다. 1893년 3월 에는 동학 교도 수만 명이 모여, 탄압 금지와 일본과 서양 세력 배격을 외쳤다. 이 보은 집회에 참가한 농민들의 절반 이상은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동학혁명의 횃불을 든 녹두 장군 전봉준
이처럼 깨어있고 단결된 동학 농민들의 움직임과는 달리, 지방 관리들의 부정 행위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그러한 탐욕스런 관리들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뻔뻔스러움은, 농토가 아닌 곳에다 세금을 매기고, 죄없는 사람에게 불효·불목(不睦)의 죄를 씌워 벌금을 강요하며, 억지로 만석보라는 보를 쌓아 물세를 거둘 정도였다. 전봉준(1855∼1895)은 이처럼 거꾸로 된 현실에 분개하면서 고부 지방 동학 지도자로서 때를 기다렸다.
그는 태인의 김개남·최경선, 원평의 김덕명, 무장의 손화중 등과 사귀면서 혁명을 준비하였다. 1893년 11월, 전봉준은 김도삼·최경선 등 20여 명과 함께 고부성을 공격하여 조병갑을 죽이고 전주성을 함락하여 서울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담은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그러던 중 고부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면서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남으려고 뇌물을 써, 이듬해 다시 고부군수가 되었다. 이에 분노한 고부 농민 수천 명은, 1월 전봉준을 우두머리 삼아 죽창과 농기구를 들고 고부 관청으로 쳐들어갔다. 악질 관리 조병갑은 줄행랑을 쳤다. 농민들은 감옥을 부숴 억울한 죄수들을 풀어주고 무기고에서 총검을 꺼내 무장하였다. 농민들은 원망의 표적이던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물세로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농민들은 근처의 백산으로 몰려가 진을 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에 놀란 전라감사 김문현이 조정에 사실을 보고하자, 조병갑이 파면되고 새로 박원명이 고부군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광주 사람으로서 이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을 위로하면서 사태를 무난하게 마무리하였다. 이에 고부 농민군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도착한 안핵사(현지 조사를 맡은 임시 관리) 이용태는, 역졸 8백명을 거느리고 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농민들을 약탈·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전봉준은 김개남과 함께 무장의 접주 손화중을 찾아가 농민 봉기를 서둘렀다.
마침내 3월 21일,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은 무장에서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히 하겠다'는 포고문을 선포하여 봉기의 횃불을 올렸다. 이들은 곧장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였다. 그리고 전봉준은 농민군들을 평야 지대 고부 근처의 야산인 백산으로 이동시켜 본거지로 삼고, 호남 창의(倡義)대장에 추대되었다. 전봉준 등은 백산에서 '호남창의대장소'의 이름으로, 전라도 모든 지역에 농민 봉기의 명분을 밝히는 격문을 보내, 주저하지 말고 혁명의 대열에 참여하자고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세상을 구제하고 인민을 편안히 할 것, 일본과 서양 오랑캐를 모두 내쫓아 서울을 깨끗이 할 것, 군대를 몰고 서울에 쳐들어가 못된 벼슬아치들을 죽일 것 등과 같은 농민군의 4대 행동 강령을 밝혔다.
이러한 동학혁명은 이제까지 각 고을 단위로 짧은 기간 동안 저항하다가 스러지고 만 농민 항쟁과는 차원이 달랐다. 농민들이 고루한 양반 지배층의 낡은 정치를 쓸어버리고, 외세 배격으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킴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이루겠다는 혁명적인 전쟁이었다.
전봉준의 호소에 따라 전라도 33개 지방에서 동학 농민군들이 몰려들었다. 동학 농민군은 4월 고부 황토재에서 전라 감영의 지방군을 격파하고 정읍을 점령함으로써 더욱 자신감을 가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토벌대장으로 삼아 중앙군을 급히 전주에 파견하였다. 계속해서 전봉준은 방향을 남으로 돌려 흥덕, 고창, 무장을 점령한 후 영광으로 향하였다. 전력을 보충하고 방비가 허술한 고을들을 점령하여 기세를 드높이려는 의도에서였다. 전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서울의 정예부대를 정면에서 공격할 수 없다는 계산도 있었다.
동학 농민군 승리의 분수령, 장성 황룡 전투
영광을 점령한 동학군은, 법성 창고의 곡식을 확보하고 세미(稅米) 운반선을 습격하여 운반 책임자와 일본인 선원을 징벌하였다. 동학군은 이후 4일간 영광에 머물렀다. 이는 동학군을 토벌하고자 전주에 파견된 홍계훈의 중앙군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동학군은, 전주의 홍계훈 부대가 이동할 기미를 보이자 함평으로 떠났다. 함평 관아를 점령하여 위세를 보이고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6일 간이나 머물렀다.
대포와 신식 총으로 무장한 8백여 명의 홍계훈 부대는, 전주에 머물러 병력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미 황토재 패전 소식이 들리면서 절반 가까운 중앙군이 탈영해버린 상황이었다. 서울에서 독촉이 심해지자, 토벌군이 농민군의 뒤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여 영광에 도착해 법성포로 상륙할 지원군을 기다렸다. 홍계훈은 함평의 동학군이 장성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학승, 원세록 등을 선봉장으로 삼아 군사 300명과 대포 2문을 주어 공격하게 하였다.
장성으로 향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홍계훈 부대를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미 선발대를 앞세워 보내 지형을 살피고, 신무기인 장태를 제작하였다. 장태는 대나무로 만든 원통형의 닭집인데, 보다 크게 만들어 속에 짚을 채우고, 그것을 굴리면서 몸을 숨겨 공격하면 총탄을 피할 수 있었다. 동학 농민군은 수십 개의 장태를 만들고 중요한 장소에 군대를 배치해 놓은 채, 황룡 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곧이어 영광의 홍계훈이 보낸 토벌대 300명이, 대포 2문과 신식 무기를 가지고 장성 황룡강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강 건너 황룡 장터에 주둔한 만여 명의 농민군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먼저 대포 몇 발을 쏘아 약간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신속하게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섰다. 방탄 무기인 장태를 굴리면서 거대한 수의 농민군이 밀려들자, 신무기로 무장한 서울의 정예 부대라 해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들은 패퇴를 거듭하면서, 선봉장 이학승 등 5명의 군졸이 전사했고 대포 2문과 서양총 100자루 및 다수의 탄환을 빼앗겼다. 마침내 동학 농민군은 4월 4일 장성 황룡촌에서 홍계훈의 중앙군을 격파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두려움을 모르는 사기 충천한 군대로 자리잡았다. 그들은 숨돌릴 겨를도 없이 전주로 진격하여, 4월 28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혁명의 모든 기간을 통틀어서 황룡촌 전투는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동학 농민군 1차 봉기에서 승리의 분수령이 되었으며, 집강소를 통해 그들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 승리의 현장인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에는, 1994년 동학 농민군 승전 기념탑이 세워져, 그날의 의미를 기념하고 있다.
농민을 정치의 주인으로 세운 집강소 활동
중앙군의 패배와 이씨 왕가의 고향 전주성의 함락 소식은, 왕과 조정 대신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청나라에 구원 병력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자신들의 권력만 보장된다면 나라의 주권이 손상되어도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조치였다.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겨, 청군 1,500명을 아산만에 상륙시켰다. 그러자 갑신정변 이후 청의 군사력에 밀려나 있던 일본도, 청의 군대 파병을 구실삼아, 청보다 두 배나 많은 3,000여 병력을 인천으로 출동시켰다. 이제 조선은 새로운 위험에 부딪히게 되었다.
일본군까지 개입하는 뜻밖의 상황에 놀란 정부는, 동학 농민군과 휴전을 서둘러 두 나라 군대를 철수시키려 하였다. 농민군들도 외국군대의 주둔을 원치 않았으므로 휴전에 응하였다.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과 서둘러 만나, 농민군과 관군이 화해하는 '전주화약'을 맺었다.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나는 대신, 전라도 모든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정치·사회적 폐단을 고쳐나가는 과업을 추진하였다.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고 농민을 핍박하던 부자와 양반들을 징벌하면서, 농민들이 바라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다. 원래 있던 지방관들은 자리만 지켰을 뿐이었고, 집강소가 행정의 실권을 쥐고서 다음과 같은 정책을 추진하였다.
<폐정 개혁안 12조>
둁동학 교도와 정부 사이의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모든 정치에 협력할 것.
둁부정한 관리의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하게 벌할 것.
둁횡포한 부자를 엄히 벌할 것.
둁불량한 유림(선비)과 양반들을 벌할 것.
둁노비 문서를 불태울 것.
둁일곱 가지 천민에 대한 푸대접을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패랭이 갓을 없앨 것.
둁청상 과부의 재혼을 허가할 것.
둁명목없는 잡부금을 모두 폐지할 것.
둁관리는 지역 차별을 벗어나 실력 위주로 선발할 것.
둁일본과 내통한 자는 엄히 벌할 것.
둁공공의 채무나 개인의 빚은 모두 폐지할 것.
둁토지는 골고루 나누어 경작할 것.
집강소는 대개 동학 교단 조직 접의 우두머리 접주로서 임명되는 집강을 책임자로 하고, 서기, 집사, 동몽과 같은 행정 요원, 의결 기관인 의사원, 군사와 보좌관 등을 갖추어 지방을 실제로 다스렸다. 전주에 있는 대도소는 각 집강소를 총괄하는 역할을 하였다. 전봉준은 금구에서 전라 우도를 호령하고, 김개남은 남원에서 전라 좌도를 감독하여 동학 농민군의 혁명 정책을 추진하였다. 집강소는 전라도 지역은 물론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왕성한 다른 지역에도 설치되었으며, 동학 세력이 경기·황해·평안도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일본군을 내몰고자 2차 봉기
그러나 중앙의 정치 상황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정과 청나라 그리고 미국·영국·러시아도 청·일 양국 군대의 공동 철수를 요구했지만, 불청객 일본군은 군대 철수를 거절하고 침략의 속셈을 드러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하다가 반응이 없자, 6월 21일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한 후 친일 개화 정권을 세웠다. 6월 23일에는 청나라와 전쟁을 선포하여 아예 조선을 독차지하려 하였다.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에 대한 침략 행동을 노골화하자, 동학 농민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전봉준은 일본군을 격퇴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다시 봉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전봉준과 김개남 등은 7월 남원에서 5만 명이 모인 농민군 대회를 열어 앞으로의 진로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지난 수개월간 유지한 정부와의 화해 관계 청산과 척왜를 내세워 일본과 개화 정부에 맞대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곡식이 수확되는 9월이 오기를 기다려 군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전봉준은 구국의 일념으로 2차 봉기를 본격적으로 준비해 갔다. 예를 들면, 장성의 대표적 씨족인 광산 김씨, 울산 김씨, 행주 기씨, 황주 변씨 등의 문중 대표들을 장성 백양사로 초청하여 돈과 식량을 공급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집강소를 통해서는, 전주와 각 고을의 무기를 수집하게 하고 말과 군량을 비축하도록 지시하였다. 마침내 2차 봉기가 결정되면서, 각처의 농민군들은 삼례로 모이라는 통문이 띄워졌다. 9월 하순을 전후하여 전북 삼례에는 전라도 25개 지역에서 농민군 10만 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 2차 봉기에는, 최시형의 동원령에 따라, 지난 1차 봉기 때 방관적이고 적대적이던 북접 조직도 동참하였다.
공주 우금치 전투의 피눈물
남접과 북접의 동학 농민군은 충청도 논산에서 20만 대병력으로 결합하여,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삼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공주로 향하였다. 공주에서 동학 농민군의 북상을 막은 것은 일본군을 비롯한 중앙과 지방 관군 만여 명이었다. 농민군의 전력이 병력 수로는 월등히 많았으나, 무기는 열세였다. 특히, 일본군의 기관총은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전봉준은 충청도 관찰사와 관군에게 각각 편지를 띄워,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일본을 몰아내는 데 힘을 합하자고 간곡히 호소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10월 목천 세성산 전투를 시작으로 하여, 11월 8일과 10일의 우금치·곰티 전투에 이르기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들은 오직 종교적 신념과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파도처럼 우금치를 기어올랐다. 그러나 기관총과 대창의 대결, 심지에 불을 붙여 쏘는 화승총과 방아쇠를 당겨 쏘는 서양 총의 승부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흰옷 입은 농민군의 시신은 산과 들을 덮었고, 그들이 흘린 피는 내를 이루어 흘렀다. 계속되는 패전 속에서 전봉준의 정예 부대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 농민군은 남으로 쫓기면서도, 11월 25일과 27일에 원평과 태인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반격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11월 27일, 장성 갈재에서 전봉준 휘하의 농민군 주력 부대는 해산하였다. 전봉준은 장성의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김개남을 만나 후일을 기약하고자 태인으로 가던 중, 12월 초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체포당하였다. 녹두 장군 전봉준은 붙잡힌 뒤로 이듬해 봄 처형 순간까지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힘찬 기백을 엿볼 수 있는 기록 두 가지를 살펴보자.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전봉준이 벼슬아치를 보고는 모두 '너'라고 부르고 꾸짖으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길을 오는 동안 죽력고(대나무 진액으로 만든 술)와 인삼, 미음을 달라고 하여 먹으면서 행동거지가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뜻을 거스르면 꾸짖기를 '내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너희들이 어찌 나를 함부로 다루느냐' 하였다. 잡아가는 자들이 이를 보고 '예예' 하며 잘 모셨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전봉준인지라 일본 침략자의 회유 또한 호락호락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일본 신문 {이륙신보}에서는 "일본 당국은 온갖 지위와 재산을 준다면서 여러 번 달랬으나, 전봉준은 모두 거절하고 '죽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재판정에서도 너무 당당하여, 일본인들마저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광주를 비롯한 전남 지역은, 손화중과 최경선 부대가 나주·광주 근방에 주둔하여, 서남해안으로 상륙할지도 모를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농민군을 탄압하던 나주 관군의 공격에도 대비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2차 봉기 이후 농민군의 북상 대열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함평의 이화진, 담양의 국문보, 무안의 배상옥, 장흥의 이방언 등도 상당한 수의 농민군 병력을 이끌면서 후방을 방어하였다.
이 무렵 나주 읍성은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농민군의 힘이 미치지 않았으며, 집강소도 설치되지 못하였다. 1894년 4월부터 9개월 동안, 농민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고을이었다. 나주목사 민종렬의 관군과 민보군(지방 양반, 부호 세력과 향리들이 조직한 군대)이 완강히 버티고 있던 까닭이었다. 최경선, 손화중, 나주의 오권선 부대가 여러 차례에 걸쳐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나주는 동학 농민군들에게 등에 찔린 가시와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 광주·나주 일대의 농민군은, 관군의 방어전과 맹렬한 역습에 밀려 11월 27일 광주로 물러났다가, 12월 1일 일단 군대를 해산하였다.
12월 1일 일본군과 관군이 장성 갈재를 넘어오고 나주 관군과 민보군의 적극적 공세가 시작되면서, 전남 지역 농민군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나주에는 이제 그간의 명성에 걸맞게 초토영(토벌군의 본부)이 설치되었다. 전라도 각지에서 잡힌 농민군 지도자들이 나주로 압송되어 서울로 이송되기도 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관군과 민보군 그리고 일본군은 농민군들을 붙잡는 즉시 현장에서 살해하거나, 농민군과 연결된 마을을 통채로 불태웠다. 또한 집집마다 농민군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과 농민군 가족들에게까지 약탈, 폭행, 살육을 일삼았다. 농민군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장흥을 비롯한 전라도의 남쪽 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부산까지 진격하려던 '영호도회소' 농민군의 활동
전남 지역에서 전개된 동학 농민군의 활동 가운데 특별한 것으로 순천, 광양 지역에 근거한 '영호도회소'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동학 본부라는 의미였다. 그 지도자는 김개남의 지지자인 전북 금구 출신의 대접주 김인배(1870∼1894)였다. 영호도회소는 전라좌도의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순천, 낙안, 광양, 여수 등을 관할하였다. 1894년 여름, 영호도회소는 전남 동부 지역의 동학 포교와 치안 확보 및 폐정 개혁에 만족하지 않고, 경상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9월 초, 대접주 김인배는 1만여 농민군들을 이끌고 섬진강을 건넜고, 하동 농민군 1천여 명과 합세하여 이튿날 하동읍을 점령하였다. 김인배의 농민군 주력 부대는 이후로 계속 남아, 경남 서부지역 농민군들과 함께 폐정 개혁을 추진하면서, 진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들은 하동의 동학군과 함께 곤양을 거쳐 진주로 진격하여 진주 병영을 무혈 점령하였다. 영호도회소의 농민군들은 9월말에 진주성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현지의 농민군들과 함께, 경남 서부 지역의 지방 관청을 돌며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죄수를 석방했다. 나아가 농민군 수천 명은 두 개의 부대로 나뉘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는 야심찬 계획까지 세웠다.
조선의 개화 정권과 일본측은 대책을 서둘렀다.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벌대장으로 삼아 하동에 파견하였고, 부산의 일본 영사관에서는 200여 병력을 경남 서부 지역에 출동시켰다. 이들은 10월 초에 하동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들어가 하동 고승산성 전투에서 농민군의 사기를 꺽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관군 및 일본군과 김인배의 농민군 주력 부대가 섬진강을 등진 채 승부를 판가름하는 혈전을 벌였다. 안타깝게도 농민군들은 하동에서 섬진강으로 내몰려, 강을 건너다 3천여 명이 빠져 죽는 참패를 당하였다. 순천으로 물러난 김인배의 농민군은, 전열을 가다듬은 후 11월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여수 좌수영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좌수영 관군과 일본 군함의 연합 작전으로 실패하였다.
부산까지 진격하여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던 영호도회소의 계획은,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과 집권층의 반민족적 탄압으로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영호도회소의 활동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들이 진주성까지 달려가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의 마지막 혈전, 장흥 석대들 전투
동학 농민군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신식 무기 앞에 무너진 뒤로, 논산, 태인 등지에서도 잇달아 패해 남쪽으로 밀려났다. 광주, 나주 일대의 손화중, 최경선 등도 항쟁을 포기하여 농민 운동은 거의 소멸되어 가는 듯했다. 그러나 농민군들은 전라도의 남쪽 끝 장흥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재기를 다지는 대반격을 도모하였다. 아쉽게도 그 싸움은 섬광처럼 번쩍이다 스러져버린, 동학혁명의 마지막 혈전이 되고 말았다.
3만여 농민군을 모아 장흥 혈전을 이끈 인물은 이방언(1838∼1895) 장군이었다. 그는 전봉준이 '녹두장군'으로 숭상된 것처럼 '남도장군' '장태장군'으로 불리며 농민군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남도에서 가장 뛰어난 그리고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장태'를 이용하여 승리를 이끈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과 지도력은, 2차 봉기 이후의 연전연패로 실의에 빠진 농민군을 3만이나 결집시켰다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이방언은 1838년에 장흥군 남산면(지금의 용산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중길은 박학다식한 농촌 지식인으로서 지역에 영향력이 있는 상당한 부자였다. 이방언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당시의 저명한 성리학자 임헌회에게서 배웠다. 그는 체구가 우람하였으며 성품이 호탕하여 늘 의로운 일에 앞장섰다. 그 일례로, 1888년에 장흥 지역에 큰 가뭄이 들어 농민들의 생계가 막막했는데 세금 독촉은 여전한 일이 있었다. 그는 장흥 부사와 전라 감사에게까지 쫓아가 세금을 줄여 줄 것을 청원하여, 마침내 자신의 고향인 남상면 일대의 조세 감면 혜택을 받게 하였다고 한다.
장흥 지역은 1862년 대규모의 농민 항쟁이 있었던 곳이다. 보성군수를 지낸 고제환이 지역민들을 지도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농민을 수탈한 지방관을 내쫓은 일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방언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장흥 지방에서 동학은, 1891년에 입교한 이방언, 이인환 등에 의해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삼례 집회를 전후하여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장흥에는 어산접, 용반접, 웅치접 등 세 개의 접이 조직되었다. 이방언은 어산접의 접주로서 활약하였다. 50대 중반의 이방언은 가장 원로급 지도자에 든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 점으로만 보아도 그의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방언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장흥의 이인환·강봉수, 강진의 김병태, 해남의 김도일, 영암의 신성 등과 함께 3월의 1차 봉기에 참여하였다. 그는 황룡촌 전투에서 '장태전법'의 주인공으로 활약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이방언은 장흥으로 돌아와 집강소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학 농민군이 9월 2차 봉기를 결정하자, 장흥에서도 이방언의 지휘 아래 5천여 명의 농민군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장흥의 농민군은 전봉준의 주력부대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강진의 전라병영과 장흥부의 관군 때문이었다.
동학 농민군 주력 부대의 북상에 따른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관군은 장흥, 강진 지역 농민군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전라북도 금구의 김방서 부대를 장흥에 파견하여 돕게 하였다. 이들은 11월에 장흥 외곽인 흑석 장터에 도착하였다. 11월 하순 무렵에는 광주, 나주, 남평, 화순, 능주, 보성 등지의 농민군들도 속속 장흥으로 내려왔다. 거듭된 나주성 공격이 실패하고 관군과 일본군의 강력한 토벌전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연합 농민군의 규모는 적게는 1만에서 많게는 3만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이들은 12월에는 열흘 동안 파죽지세로 연전 연승하여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강진 전라병영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1만여 농민군은 벽사역과 장흥부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벽사역의 관군들은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나 버렸다. 농민군은 텅빈 벽사역을 점령하고 관청 건물과 역졸들이 살던 민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때 장흥부사 박헌양 이하 장졸 96명을 몰살시키면서 장흥부의 장녕성을 함락시켰다. 이 장녕성 싸움의 과정에서 강진, 해남, 영암, 순천 등지의 농민군이 계속 합세하여, 3만 명에 이르렀다. 연합 농민군은 1894년 말에 계속하여 강진현과 전라 병영의 공격에 나섰다. 강진의 관청을 불태우고 병영의 화약고를 폭발시켰으며, 저항하던 관군과 병영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다시 일어서는 전기를 맞는 듯했다.
농민군들은 병영을 함락한 여세를 몰아 토벌군 본부가 있는 나주성까지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토벌군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전열을 정비하고자 그해 말에 다시 장흥으로 돌아왔다. 전주와 장성을 거쳐 내려오던 중앙군과 일본군은 크게 세 방향에서 장흥을 압박해 들어왔다. 이두황이 지휘하는 중앙군은 순천 방향에서, 이규태가 지휘하는 중앙군은 나주와 영암 방향에서, 나주의 일본군은 영암과 능주 방향에서 각각 진격해 왔다.
농민군과 토벌군 사이의 첫 전투는 불과 수십 명의 토벌대 선발대와 수천 농민군의 접전이었지만, 농민군은 30여 명의 희생자를 낸 채 자울재를 넘어 관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다시 모여 3만 병력으로 장흥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군과 일본군의 본대가 장흥에 도착하면서 전세가 더욱 기울어갔다.
농민군은 압도적인 병력에 의지하여, 관산 방향에서 자울재를 넘어 장흥성 앞의 석대들녘(지금의 장흥읍 남외리)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정부군과 일본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석대들을 가득 메운 농민군을 향해 기관총 등의 신식 무기로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기껏해야 화승총과 대창, 몽둥이로 무장한 농민군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뒤로한 채 자울재 너머로 물러나야 했다. 통한의 우금치 전투 장면을 되풀이하는 듯했다. 농민군 5천여 명은 관산면의 옥당리에 모여 다시 항전하였지만, 여기서도 1백여 명이 전사하고 다수의 생포자가 나면서 농민군의 전열은 무너져버렸다. 약 보름 동안에 집결, 전투, 패전이 이어진 결과였다. 이들은 남해의 섬과 산으로 도망치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고 한다.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의 마지막 불꽃은 장흥 석대들 전투의 함성과 피눈물을 끝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최후의 동학 농민군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던 이방언도 체포되어 뒤에 참형을 당하였다.
동학혁명이 끼친 영향과 그 역사적 의미
전라도 농민들의 주도적 역할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은, 부패한 양반 지배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일어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외세의 개입으로 30여만 명의 희생자를 낸 채 좌절되고 말았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은,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큰 빛을 남겼고 후손들의 삶에 많은 가르침과 과제를 안겨 주었다.
동학농민전쟁의 구호는 크게 두 가지였다. 외세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을 굳게 하고, 낡은 관습과 부패한 정치를 제거하여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조선 내정 개혁의 출발점이 된 갑오개혁과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뒤바꾼 청·일 전쟁이 동학농민전쟁에서 직접 비롯되었다.
갑오개혁은 비록 일본의 압력으로 추진된 개혁이었지만, 그 안에는 동학 농민군들이 집강소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내용이 일부 반영되었다. 새 정부를 구성한 관리들도 개화 세력에 연결된 인물들로서 우리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혁을 모색하였다. 1894년과 1895년의 두 차례에 걸친 개혁이, 일본에 대한 반감과 정치 불안으로 제대로 실행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고비로 하여 봉건적인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보다 개명된 사회로 나아가게 되었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라는 대륙 세력이 물러나고 해양세력인 일본이 강성할 것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동학 농민군이라는 내부의 저항과 청이라는 외부의 방해를 함께 물리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키려는 계획을 착착 추진할 수 있었다. 일본은 중국을 제치고 동양 사회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려는 첫 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우리 나름대로 근대화를 이루고 역사를 전진시키려던 의지가 제국주의 일본의 무력으로 좌절된 것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그 뒤로 항일 의병 투쟁과 일제하 독립 운동의 정신적 원천으로 이어졌다. 동학혁명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면한 사람들은, 의병 대열에 뛰어들었고 여러 분야의 독립 투쟁에서 인적 자원을 이루었다.
동학혁명이 항일 의병 투쟁과 독립 운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고 서로 관련되는지는, 전라도 지역의 사례에서 입증될 수 있다. 전라도 농민들이 동학혁명을 주도한 것처럼, 전라도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의병 투쟁과 광주 학생 독립 운동 그리고 소작쟁의에서도 주 무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서도 이 지역이 늘 앞장서 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동학혁명의 구호가 아직 미완성에 머물러 있는 지금, 이 지역 동학 농민군의 후예들은 그 역사적 책임을 마음 속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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