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영의 "생명윤리학의 인간학적 기초"에 대한 논평문
이을상(동아대, 전임연구원)
1. 현대 의과학, 생명과학, 생명공학의 근본토대가 "인간학" 또는 "인간학적"이어야 한다는 논자(홍석영)의 입장에 나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학적 탐구를 어떻게 전개해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논자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논자는 생명윤리학에 인간학적 기초가 요청된다는 점을 문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데, 이런 논자의 전제는 윤리학과 인간학을 분리시킴으로써 마치 윤리학에도 비인간학적인 요소가 들어있어 이를 인간학적으로 바꿔가야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일찍이 칸트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하는 윤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인간학적 문제로 환원시켰으며,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막스 셸러도 "인간학이 곧 철학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와스지데스로는 "인간학으로서 윤리학"을 주창한 바 있다. 굳이 이런 논거들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의과학이나 생명과학에서 자행되는 비인간화의 원인이 모두 비윤리적이고 몰가치적 판단에서 나온 것들이며, 윤리적 것이 본래 인간적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논자는 인간학과 윤리학을 분리시키고, 다시금 인간이해의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결론부분(에서 논자는 "인간학적 접근"이란 말을 사용한다)을 미루어 짐작컨대 "생명윤리학의 인간학적 기초"라는 말과 "생명윤리학의 접근방법론"이란 말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내 견해로는 이 두 말을 의미상으로 분명히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생명윤리학을 보는 시각에는 두 개가 있다. 그 하나는 생명윤리학을 "응용윤리학"의 한 분과로 보는 것인데, 여기서는 생명윤리학이 적용되는 영역(예를 들어 임신중절, 뇌사와 장기이식, 안락사, 생명복제 등)이 문제된다. 다른 하나는 "실천윤리학"의 한 분과로 보는 것인데, 여기서는 접근방법(예를 들어 원칙에 입각한 접근방법, 공리주의 접근방법, 결의론 등)이 문제된다. 그런데 II장 이하의 논술에서 논자의 태도는 마치 내가 방금 예로 든 접근방법들이 하나의 윤리지침 역할밖에 못하고, 이기주의적 태도 또는 인과관계에 의존함으로써(물론 이에 대한 논자의 언급은 전혀 없지만) 다시금 새롭게 "인간학주의"(Anthropologismus)가 요구된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런 느낌은 나의 편견일 수 있다. 만일 그것이 편견이라면, 그것은 "인간학적 기초"라고 할 때 기초(Fundment, Grundlegung)라는 말의 의미를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의 기초지움}(Grundlegung der Metaphysik der Sitten)이란 책에서 보듯이― 상식적 앎을 "학의 체계"로 고양시키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윤리학의 인간학적 기초란 "인간학으로서 생명윤리학"을 의미하는 것이고, 인간학으로서 생명윤리학이 생명연구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가 논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본문 중에서는 논자의 인간학으로서 생명윤리학에 대한 논의도 미약할 뿐만 아니라, 특히 V장의 "인간학이 생명윤리학에 주는 시사점"의 논의는 기존의 생명윤리학의 논의와 비교하여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3. 이런 나의 문제제기가 논자의 능력과 성과를 폄화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본문의 II, III, IV장의 논의와 V장의 논의는 (하르트만 식의) 토대관계가 분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논자는 느슨한 병렬관계에 방치시킴으로써 논의의 초점을 잃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논문의 구성상으로 볼 때, V장에서 논의된 주장을 옹호해 줄 수 있는 결정적인 논거들이 앞의 장들에서 논의되어야 하는데, 그런 노력들이 보이지 않는다. 살피건대 나는 어떤 이유에서 앞의 II, III, IV장의 논의가 필요했는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나의 반문은 동시에 II, III, IV장에서 논자의 논의에 대한 나의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나의 불만이란 앞의 각 장에서 논자는 너무나 친절하게 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소개해 주는데, 이런 과잉친절이 오히려 논자의 논지를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논자의 논의와 무관하게 본문의 내용을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II장에서 (존재론적) 인간=인격(동치)이고, III장에서 (실체론적) 인간=육체-영혼의 합일체(전체성)이고, IV장에서 (가치론적) 인간=육체생명+정신(이원성)을 나타낸다. 이로부터 "인간=인격=육체-영혼의 합일체=육체생명+정신"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이 등식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예를 들어 인격=육체-영혼의 합일체, 인격=육체생명+정신, 육체-영혼의 합일체=육체생명+정신이란 등식을 어떻게 논증할 것인가? 만일 이들 등식이 성립한다면, 존재론적 인간규정과 실체론적 인간규정, 가치론적 인간규정간의 소통구조를 밝혀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야말로 ―논자의 말에 따라― 생명윤리학을 인간학적 토대 위에 구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연후에 이와 같이 구축된 인간학적 토대에 기초하여 "의사-환자 관계", "인간배아줄기세포연구"에서 새로운 윤리적 전망(Perspective)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인간학으로서 생명윤리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4. IV장의 "인간육체생명의 기본가치"에서 "기본"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에 천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말에서 기본이란 단어는 두 개의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궁극성"이다. 예를 들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란 말에서 기본은 개인이 지닌 권리의 신성불가침이란 궁극성을 나타낸다. 다른 하나는 "최소성"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선술집에서 기본안주란 술을 마시기 위한 최소한의 안주라는 의미이고, 여기서 기본은 최소성을 나타낸다. 인간육체생명의 기본가치란 어느 쪽에 속하는 가치일까? 셸러의 "정신을 활동시키는 것은 생명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은 최소성을 나타낸 말이다. 여기서 생명은 필연적으로 수단 또는 하위의 가치로 전락하고 만다. 한편 메를로 퐁티의 "육체생명을 통해 지각하고 사색한다"는 말은 궁극성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생명은 필연적으로 정신보다 우위를 점유한다. 이런 단어의 "양가성"(兩價性)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결 없이 의사-환자 관계, 인간배아줄기세포연구에서 윤리적 전망은 무망(無望)한 것처럼 보인다.
5. 끝으로 오늘날 의과학, 생명과학 내지 생명공학이 인간학적 토대구축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나는 보다 근원적이고, 교육학적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즉 인간학이 명실상부한 의과학 및 생명과학의 기초가 되기 위해서는 생명과학자(의사)가 인간학(철학)을 배우든지, 아니면 인간학자가 생명과학자가 되든지 양단간의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물음은 일찍이 플라톤이 {국가} 후반부에서 "철인왕"을 주장하면서 철학자가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왕이 철학을 배울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과 같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왕이 철학을 배우는 것이 현실적이란 결론을 내린다. 최초의 이상주의자인 플라톤조차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 당면한 현실인데, 위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대답도 당연히 생명과학자가 인간학을 이해하고 학습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론에서 인간학이 과학의 시녀 상황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오늘날 의과학의 인간학적 토대구축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오늘날 의과대학이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바뀌어 가는 이 시점에서 의학전문대학원을 지망하려는 학생들로 하여금 인간학―더 정확하게는 "인간학으로서 생명윤리학"―을 필수적으로 이수하게 하는 제도를 신설하거나 개선하면 될 것이다. 즉 차제에 의학전문대학원 학생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해당 학교는 반드시 "인간학으로서 생명윤리학" 시험을 치게 하는 방안을 법제화할 것을 우리 철학자들의 뜻을 모아 제안하자, 오늘 이 뜻깊은 철학자대회를 한갓 "말의 향연"으로 끝내지만 말고.
6. 철학하는 정신은 곧 "비판정신"이다. 이런 비판정신을 일컬어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라 했다. 이 사랑의 대상이 지혜(지식)인 바, 이로써 철학이 "애지의 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이 논평을 통해 논자에 대한 나의 애정을 표현하고 싶다. 혹여 나의 논평이 논자의 논지를 벗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애정표현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럼 논자의 학문적 정진을 기원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