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였던가?
화창한 오늘은 죽마고우들과 어울려 산행을 한다고 생각만해도 마음이 설레는 것을...
전국에서 동기들이 속속 모이니 한 부대가 될 정도였는데 계룡대 제 3정문에서 집결후 곧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황인식 장군 측에서 산행시작할 때 생수와 오이를 나눠주고 정상에는 막걸리와 안주, 떡, 과일을 준비하는 등 완벽하게 준비를 해놓았다.
신록이 짙어가고 있는 산세가 그림 같이 빼어났고 전망도 일품이었는데 정상 845m 높이의 이 산은 멀리서 보면 흡사 닭의 벼슬을 머리에 인 용이 꿈틀대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호서평야 한 가운데 우뚝하게 솟은 독립산으로서 동서남북으로 감싸는 산세는 대전, 부여, 논산, 공주, 연기군에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는 산이며 그런 놓임새는 이 산으로 하여금 한반도의 역사에 큰 획을 긋게 하고 있는데
첫째는 이 산 남쪽 자락에서 백제가 신라군의 말발굽 아래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백제의 충신 계백 장군이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벌(연산)에서 신라군과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함으로써 의자왕 20년(서기 660년)에 마침내 백제는 31대 678년만에 나라를 잃고 만 것이다.
백제가 공주와 부여에 도읍을 정한 것부터가 계룡산은 백제의 길목을 지키는 요새였던 것이다.
둘째는 고려태조 19년(936년)의 일로서, 후백제의 신검, 양검, 용검 형제를 쫓아서 태조가 연산 북산성에서 모두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그 후 태조는 연산에 개태사를 세웠으며 지금도 이 절에는 태조 왕건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셋째는 근세에 이르러 갑오(1894년) 동학 농민 혁명군이 보국안민, 제세창생의 깃발을 휘두르며 호남에서 일어나서 한양으로 향하던 중 공주 우금치에서 격파당한 것이니, 계룡산은 말하자면 고대, 중세 그리고 근세에 걸쳐 그 승패는 차치하고서라도 한반도의 동서남북을 두루 화합하여 안정과 평화를 마련하려 드는 가늠쇠의 구실을 해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산은 그 형세로 인하여 오랫동안 풍수도참설에 연루되어 왔으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터를 닦고 일년여 공사를 한 적이 있었기에 "육군본부 이전공사시 추춧돌 백여개와 사대문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같이 산행을 한 이중령이 얘기를 해 주었다.
또 얼마전까지도 정감록의 발원지로서 그를 믿는 신도들이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고도 하였다.
땀을 흘리다가도 능선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에 땀이 마르고 수려한 산세와 동기들의 얘기 속에 파묻혀 올라가니 어느덧 정상 천황봉에 이르러 쉬면서 막걸리와 안주, 옥수수떡에다가 과일까지 곁들이니 피로가 금세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산세를 감상하면서 내려와서 거울같이 맑은 계곡물에 발도 담그고 쉰 후 군인아파트 지역에 있는 명가 한정식에서 삼겹살 파티와 뒤풀이를 하였는데 이번 모임에서는 동기들이 더 불어난 것이 김석삼 동기의 연락으로 박용배 동기가 왔고, 또 모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종근 부부도 참가하여 반가웠으며 그리고 다리가 아직 완쾌되지 않은 박태용 동기도 끝까지 산행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식당에서는 오늘이 결혼기념일인 김정태, 신무식 동기의 축하 이벤트가 있었고 또 대전행사를 앞두고 김성수 동기가 지금 항암투병중인데도 찬조금을 기탁해서 그 고마운 마음을 받아들인 후 그 자리에서 쾌유를 비는 박수와 함께 되돌려드리는 자리도 마련하였다.
아무튼 김정우 산악회장의 숨은 노력으로 황인식 동기가 큰 일을 하였는데 이런 탄탄대로의 기반을 마련한 이용응, 이응탁 두 동기의 공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그 후 김천에 와서도 김석삼과 박용배 동기의 찬조로 꽃게탕 파티 후 노래방까지 가서 흥겹게 놀다 헤어졌는데 끝으로 다시 한번 오늘의 자리를 마련해 준 황인식 동기에게 거듭 고마운 뜻을 전하면서 모든 동기회원들의 건강과 행운을 빌고 또 산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이만 필을 놓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