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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출남 李出男 Lee Chul-Nam
이출남李出男 (1958.2.9~2009.7.9)
이출남李出男(1958.2.9.~2009.7.9) 수필가는 '우리집은 도계읍의 변두리 범재, 해발 600m가 넘는 고지대에 있다. 조상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지는 4대 째이다' <아이를 키우며> 수필 속 한 구절이다.이출남은 <범재포도농원>을 남편과 어린것들 3남매를 키우면서 오손도손 행복했다. 강원도여성농업인회장으로,늦깎이 강원대학교 문창과를 졸업하고, 두타문학회 40주년 행사 준비로, 참 바쁘게 생활한 여걸이였다. 수필가 이출남은 36세 때『두타문학』16집(1994년)에 '죽어가는 우리의 땅' 첫 작품을 세상에 내 놓았다. 동지 19집에 '태국여행기' 동지 20집에 '오월의 푸르름 앞에서' 등 작품활동을 하면서 41세 때인 1999년 1월 월간『수필문학』지로 등단했다. 그해『두타문학』22집에 '아이를 키우며'와 '범재에 올라서' 특집호를 게재한다. 동지 23집에 '세대 차이' 작품을 발표하는 등 꾸준히 창작을 하면서 8년후 49세 때『두타문학』30집(2007년)에는 '산다는 것은' 수필 1편과 '지역에 빛나는 별이 되길' 두타문학회장으로 머릿글을 올린다. 동지 31집에 '전원일기' 동지 32집(2009년)에 수필 '아이를 키우며'와 '두타문학 40주년 자축' 머리말이 이 세상 마지막 글이 됐다. 이출남은〔두타문학 40주년 '삼척문학 축제'〕-①238회 두타시낭송회|삼척비치조각공원 ②『두타문학』32집 발간|신국판 252쪽 ③『월간두타문학』40권 7호 238권 발행 ④두타문학 40년자료전|삼척문화예술회관 제1전시실 ⑤두타동인 도자기시화전|제2전시실 ⑥저명문인 황금찬 선생 외 15인 육필원고전|제3전시실, 준비과정에서 밤 늦은 귀가중 빗길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작품
아이를 키우며
“엄마 아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셋이서 합창하며 등굣길에 나서는 아이들을 오랜만에 배웅하고 돌아온 난 가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와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들 그리고 내 친구들이 ‘끝물’이라고 애칭을 붙여준 막내도 어느새 4학년이 되어 집안을 가득 채워주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성격이 모두 제각각이라서 싸우기도 많이 하는 아이들이지만 어려운 일이나 위험한 일들이 닥치면 제 형제들끼리 똘똘 뭉쳐서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아이 많다고 탓하던 지난날들이 조금은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집은 도계읍의 변두리 범재, 해발 6백 미터가 넘는 고지대에 있다. 조상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지는 4대 째, 내가 이곳에 시집을 온 지는 어언 20년, 그동안 이곳을 거부하고 몇 번 들고 나고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자리잡고 농사를 주업으로 살고 있다.
집이 높은 산 위에 있는 탓으로 제 또래들의 다른 애들보다 등굣길을 1시간은 일찍 나서야 하고 하루에 4번밖에 안 다니는 버스 때문에 하굣길은 해가 서산으로 기운 뒤에야 흠뻑 땀에 절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우리집 아이들이다. 여름에는 해가 길어서 어둡기 전에 돌아오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겨울이 되면 어두워서 마중을 가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애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놓고 실로 오랜만에 딸아이의 책상 앞에 앉아보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내 나이 또래의 세대에 어울리지 않게 난 첫아이를 비롯해 셋을 병원에도 한번 가보지 못하고 순산을 했다.
첫아이는 분가해서 얼마 안 되어 단칸셋방에 살던 시절 남편의 직장이 변변치 않아 수중엔 돈도 없었지만 하늘이 노랗게 보이도록 아파야만 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믿고는 밤새도록 진통을 겪다가 병원에 갈 사이도 없이 새벽 4시에 친정어머니와 집주인 할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낳았었다.
둘째는 동해시 묵호동에 잠시 살 때 자정을 조금 넘은 밤중에, 막내는 병원이 먼 탓도 있지만 저녁에 지금 사는 집에서 쉽게 낳았기에 또래들은 다 누려보았을 병원에서의 호사 한번 누려보지 못한 채 아이 셋을 얻었다.
지금은 가족계획도 본인 의사에 맡기는 형편이지만 내가 아이들을 낳을 때만 해도 나라에서 권하는 가족계획 홍보물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애들을 둘도 아니고 셋씩이나 데리고 나서면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딸 낳고 아들 낳았으면 백점인데 아들 하나가 덤으로 더 있으니 빵점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아이들을 키웠었는데 그 애들이 어느새 저렇게 커서 제 몫들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면서 한편으론 어떻게 쓸만한 인재로 키울지 걱정이 앞선다.
우유병을 들고 다니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던 시절, 우린 형편이 안 되어 모유를 먹이는 내 모습이 때론 초라하게 비쳐진 적도 있었지만 젖 빨기가 힘들어 아이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도록 힘들게 엄마 젖을 먹고 자란 내 아이들의 모습들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요즈음 다시 모유의 중요성을 인식해 모유 먹이기를 권장하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내가 아이 키운 방법이 초라하기보다는 오히려 잘한 일인 것 같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3년 전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생이 몇 명 안 되는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교 앞에서 제일 공부 잘 한다고 칭찬만 받던 아이가 3년 전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낯익은 친구도 하나 없고 칭찬만 듣던 저는 아무것도 아니더란다.
다른 애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해서 중학교 과정의 기초는 모두 익히고 들어왔는데 학원에 다닐 여건이 되지 않던 우리 아이는 기초가 없는 데다 친구들조차 생소하니 학교에 가기가 싫다는 항변이었다. 유난히도 욕심이 많고 샘이 많은 애라 일 년 내내 고전하더니 2년부터는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1년 앞으로 다가온 고등학교 진학문제가 또 다른 과제로 다가오는 것 같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애들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자고 때론 위로도 해주고 억지도 부려가면서 내 나름으로 아이를 키우는 방식에 최선을 다했지만 애들이 가슴 아파할 때 나 역시 속앓이를 많이 했다.
큰애 때문에 10년 가까이 속앓이를 하던 끝에 밑으로 두 애들을 시내의 큰 학교로 전학시키고 나니 극구 말리던 학교 측 보기에도 민망했다.
나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다른 학교로 전학을 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아버지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던 우리는 나와 동생만 먼저 아버지 계신 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충청도의 조그만 시골학교에 다니던 나와 동생은 광산의 경기가 한창 좋던 시절 광산 도시에 있던 학교로 전학을 오고 보니 내가 있던 학교보다 학생도 훨씬 많았고 시설도 잘 되어 있는 학교였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전학 오기 전까지 10년 이상이나 불러오던 이름을 호적과 틀리다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으로 부르니 그때의 억울함과 어색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안 되어 학교에 가기가 싫었던 나와 내 동생은 학교에 간다고 책가방 들고 나갔다가 아버지께서 출근하시고 나면 땡땡이 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어려운 시절이 내게 있었기에 내 아이들은 가능하면 전학을 안 시키려고 했었는데 환경이 어쩔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남자애들은 여자와 달리 낯선 환경에도 적응을 제법 잘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고 다른 지역으로 유학 가기를 원하는 딸아이 앞에서 몸도 마음도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에 부모 그늘을 벗어나서 마음 고생할 아이를 생각하니 지금의 처해 있는 여건에 은근히 짜증도 난다.
모두가 최고만을 고집하고 명문만을 중요시하는 현실에서 조금 더 나은 학교에 가겠다는 애를 말릴 뚜렷한 명분도 없으니 아이의 편에 서는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것 없이 풍요 속에 살아가는 다른 애들에 비하면 난 내 아이들에게 주는 것도 없이 항상 일을 핑계 삼아 소홀이 대하는 것 같다.
요즘도 주말이면 딸아이의 빨래와 청소가 제 몫이 되었고 아들은 염소 먹이와 닭 먹이 그리고 소여물 주는 일이 저희들 몫으로 떨어지지만 당연한 듯이 제 몫들을 다하는 애들이 고마울 뿐이다. 더욱이 집이 남달리 고산지대에 있어 오르내리기가 고달픈 데도 그런 여건에 익숙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다니는 것을 보면 대견스럽기만 하다.
우수한 성적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넓은 아량과 모든 사물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건실한 일꾼이 되길 바라면서 아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산다는 것은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어느 지인의 말처럼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도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깊은 골짜기를 결혼이라는 멍에를 쓰고 찾아든지도 어느새 이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날 새면 보이는 건 병풍처럼 둘러싸인 꽉 막힌 산과 하늘밖에 없었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찻길이 열리고 사람들의 왕래도 빈번하게 되었다. 한번씩 다녀가는 사람들이 산좋고 공기 좋은 곳에 산다고 부러워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도 차츰 내가 사는 이곳에 정이 들기 시작했다. 복잡한 도시에 살면서 북적거리는 것 보다는 한적한 이 산골이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 같기도 했다.
누가 말했던가? “산다는 것은 외로움이고 쓸쓸함이고 허망하지만 외로움 그 때문에, 쓸쓸함과 허망함 그 때문에 산다는 건 그리움이며, 열정이고, 사랑이다”라고.
도회지 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농사에는 전혀 경험이 없던 내게 지금의 환경과 생활은 너무 견딜 수 없어서 분가도 해 보았지만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오매불망 농사만을 고집하던 남편에게 두 남매의 엄마가 된 후에 양보를 하고 지금의 자리로 돌아왔다. 농사꾼의 아내가 된 후 땅과 씨름하며 살다보니 식구도 한 명 더 생겼다. 집에 들어와 낳은 막내가 어엿한 고등학생이 되자 내 마음에는 다시 황량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 누구일까? 의문이 생기기 시작할 때쯤 주위를 둘러보니 내 손을 필요로 하던 아이들도 우리 곁을 떠났거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자연과 벗하면서도 항상 목말라 하던 실체가 표현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사회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세상의 소리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생활을 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 있던 목마름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이 보이고 나니 그동안 접어두었던 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대학생활 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가 좋았고 가끔씩 아이의 학교에 가기라도 하면 캠퍼스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아울러 우울하게 찾아드는 열등감은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 생활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에 방송통신대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대학 3학년이던 딸아이가 교환학생으로 중국에 가기 위해 집에 와있던 겨울 어느날,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립대학이지만 신설 학과라서 올해 들어가면 입학할 수 있는 학과가 있을 것 같으니 생각을 한 번 해 보라는 거였다. 기회가 매일 있는 것도 아닌데 용기 내보심이 어떻겠느냐는 제의에 처음엔 강하게 거절을 했다. 학생이 셋이나 있는 집안에 엄마가 학교를 가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더 권유를 하는 후배 때문에 가족 모두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살아온 세월의 절반은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평생에 한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나면 평생 가슴에 응어리를 남기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도 넉넉하게 뒷바라지를 못하는 상황에서 나까지 포함이라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학생인 딸에 고3인 아들과 고1인 막내, 거기에 나까지 학생으로 등록을 하기에는 모든 상황이 힘든 상태였음에도 남편을 비롯한 아이들까지도 기꺼이 배려해 준 덕분에 나는 꿈에만 그리던 캠퍼스 생활을 하게 되었다.
등록하고 수업 시간표를 받아 캠퍼스로 들어와 보니 또 다른 회의가 들었다. 딸 보다도 더 어린 학생들이랑 같이 수업을 받아야 하는 분위기도 어색했고, 열심히 강의를 듣는다고는 했지만 강의 내용이 입력이 되지 않으니 더욱더 난감했다. 농사철이 시작되고부터는 학교에 가서도 집의 일 걱정 때문에 수업이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와 일을 마치고 나면 저녁에는 피곤이 쌓여 내어 준 과제물을 다하지 못해 학교에 가서 학생들 한테 도움을 받기도 했다.
공부하는 강의실에서 왕언니 소리를 들으며 과제물 작성법부터 시작하여 복사하는 법, 도서관 이용하는 방법 등을 배우며 차츰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새삼 공부를 해보니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시험기간만 돌아오면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이해는 하겠는데 외워서 쓰지를 못했다. 한 문장 외우고 나면 앞에 문장이 기억이 안나서 때로는 비애감마저 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외우기라면 자신이 있었는데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고 보니 머리도 녹이 스는 것 같다. 그럴땐 이 길을 선택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어디에도 순탄한 길은 없었던 것같다. 이 과정도 남들에게는 기회가 잘 오지 않는 일이 내게 왔음을 감사하면서 열심히 쫒아 다녔다.
동안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학교와 농사만을 위해 살다가 보니 어느새 사각모를 쓰게 되었다. 주위의 지인들도 과연 졸업을 할 수 있을까 염려를 했었다는데 세월은 내가 그토록 갈망하고 그리워하던 학사모를 쓰게 해 주었으니 이만하면 잘 살아온 인생이라고 스스로 칭찬을 해 본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쓸쓸함과 허망함 때문에 뛰어든 학문이 내게 열정과 용기를 주었고 인생의 한 과정을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주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이제 과정을 돌이켜 보면서 내게 삶의 지혜와 용기를 주었던 김수영 님의 시 「풀」 전문을 되뇌어 본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산다는 것은 역시 자기 하기 나름인 것 같다.
전원일기
비가 오고 난후의 대지는 맑고 신선하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 후 어제 저녁 늦게까지 내리던 비여서 오늘도 비가 오리라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날씨가 화창하다. 비오기 전까지만 해도 따가운 햇살과 가뭄으로 시들어가던 작물들이 어제 내린 비로 물기를 흠뻑 머금고 키가 훌쩍 커보인다. 쌀을 씻어 안치고 밥솥에 스위치를 꽂고는 하우스로 향한다. 비가 오고난 후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산야에는 밤꽃향이 짙게 깔리고 짝을 찾는 비둘기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진다. 하우스에는 먼저 온 남편이 이미 오이 작업을 마치고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는 오이가 자식만큼이나 정겨움이 묻어난다. 오이를 선별해서 숫자를 세어 가구에 담는다. 오늘은 우리 지역 5일 장이다. 지난 장날 오이를 따다 주기로 아주머니와 약속을 한 터라 차에 싣고는 서둘러 장터로 향했다. 늦게 간 탓으로 장은 이미 상인들의 물건들이 펼쳐져 있었다. 늦어서 안 오는 줄 알고 다른 데서 물건을 받아 놓았다는 아주머니가 오이를 하나 뚝 분질러서 맛을 보더니 맛이 좋다고 하면서 흔쾌히 받아 준다. 오이를 시작으로 이제 무수히 많은 농산물이 시장이나 소비자에게 판매 될 터인데 첫 판매가 순조로워 기분이 좋다.
집에 돌아와서 작년에 쓰던 노트를 넘겨서 올해의 판매 기록을 첫줄 맨 위에 적었다. 올해는 과연 몇장의 노트에 얼마의 기록이 판매금액으로 올라올지 기대 반 우려 반을 하면서….
노트를 펼쳐 작년의 기록들을 훑어본다. 제법 많은 양의 노트에 다양한 품목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아래칸에는 합산을 한 것으로 보이는 금액들이 적혀 있는 걸로 봐서 적은 금액이 아닌데 마음은 항상 허허롭다. 이 금액들만 빠져 나가지 않고 모여 준다면 봄 되면서 농사자금 걱정과 아들 학비 걱정은 안 해도 될 터인데 미리 빌려 쓴 돈 갚다보면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그나마도 상환기일이 모두 가을이라면 마음이나 편할텐데 그 전에 돌아오는 원금과 이자 통지를 받고나면 싸하니 마음이 아프다.
모든 물가가 오른다고 아우성들이지만 농산물 값만은 예년 가격을 상회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유가를 비롯하여 서민들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라면까지 생필품이 안 오른 품목이 없다. 농가에서 쓰는 물건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료값을 비롯하여 농자재 전반에 걸쳐서 가격이 모두 올랐다. 며칠전 결속 테이프를 사러 갔더니 직원이 오르기 전에 넉넉하게 가져다 놓으라는 소리를 한다. 그 직원의 말에 의하면 요즘은 모든 농자재들이 주문 할 때마다 가격이 올라서 오기에 다음에 살때는 또 오른 가격으로 사야 할 것 같으니 있을 때 쓸 양을 미리 가져가라는 것이다. 비료 가격 또한 작년에 비해 배는 올랐는데도 올해 다시 올리기 위해서 생산공장에서 배급을 안 한다고 한다. 며칠전 읍내에 있는 농약상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곳 농협에서는 비료가 없어서 사러 가도 한포씩밖에 안 준다고 한다. 얼마 전 TV에서 비료를 구하지 못해서 농사를 짓지 못하겠다고 울상을 짓던 한 농부의 말이 우리지역에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격이 오르는 것도 속상한데 품귀 현상까지 일어난다면 농민들의 고통이 이중으로 늘어 날 텐데 걱정이다. 이렇게 천정부지로 뛰는 물가에 비하면 농산물 값도 올라야 하는데 오르기는커녕 제철 되어서 쏟아지는 농산물 가격이 바닥을 치고 있단다. 토마토 농사를 짓고 있는 화천에 있는 회원과 통화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더니 그 회원의 말인 즉 토마토 가격이 너무 없어서 수확을 해야 하나 포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라며 걱정을 한다. 나 역시도 수확기가 얼마 안 남은 토마토가 있는데 가격이 안 올라가면 걱정이다. 다른 공산품은 유가가 오르고 있으니 가격이 오르는 건 당연하고 농산물 가격은 조금만 올라가도 물가의 주범인 양 여기고 있으니 농가에서 늘어나는 것은 웃음이 아니라 시름과 빚 뿐이니 누구에게 원망을 하겠는가?
늦은 아침을 먹고는 쪽가위와 결속기를 챙겨 들고 포도밭으로 향한다. 3일전까지만 해도 가물어서 물을 주던 밭인데 아무렴 인위적인 물주기가 자연의 빗물만이야 하겠는가, 포도 줄기는 한뼘이나 더 자란 듯 하고 포도알도 팥알 만큼 굵어져서 포도송이의 자태를 제법 뽐내고 있었다. 새삼 자연의 섭리에 감사를 드리고 일과를 시작한다. 아래쪽에서는 남편이 예초를 하느라 밭이 예초기 소리로 시끄럽다. 예초가 끝난 밭을 허리를 굽혀 내려다보니 생풀향기가 상큼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파르스름한 들판이 마치 푸르른 잔디밭을 연상케 한다. 이 넓은 들판이 포도밭이 아닌 골프장이라면 지금 나는 땀에 절은 작업복이 아닌 폼나는 유니폼을 입고 노동이 아닌 운동을 즐기고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는 내게도 그런 날이 올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며 내 일상으로 돌아온다. 친환경 포도를 재배하면서 과수원을 조성재배하기 때문에 제초제를 칠 수가 없다. 덕분에 칠천여 평이나 되는 과수원의 풀을 예초기로 일년에 4번이나 깎아 줘야 하니 과수원 일 중에 제일 힘든 일이 풀 깎는 일인 것이다.
작년 이맘때 생각이 난다. 남편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고 예초를 할 사람이 없었다. 열매나 나무 관리는 여자 인력을 사서 하면 되지만 풀 베는 일은 여자들이 할 수가 없을 뿐더러 아무나 하면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힘들기도 하지만 어린 과일 나무들은 예초기가 스치면서 건드리면 끊어져서 죽어버리기 때문에 나름대로 기술과 조심성이 필요한 작업인 탓에. 제대하고 복학을 한 아들의 방학을 기다려 집으로 불러 들였다. 잡초가 나무 키 만큼이나 자란 밭은 아들에게 맡겼다. 다행이도 군에 있을 때 예초기로 풀을 베어본 경험과 젊은 힘이 있는지라 며칠은 잘 버티는 것 같았다. 따갑게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일하는 아들이 안쓰럽긴 했지만 제대로 일을 하는구나 싶어 대견스럽기도 했다. 아비의 일을 대신 할 수 있는 후계자가 있다는 사실에 흐뭇해 하면서 난 농담반 진담반으로 공부도 하기 힘든데 농장 관리나 하고 이곳에서 네 나름대로 꿈도 설계해 보라고 은근히 권유를 했다.
이튿날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제의를 받은 아들놈이 제 누나에게 전화를 했더란다. “누나 나 이제 공부 열심히 할래, 내가 공부 안 하면 엄마가 나 이곳에서 농사지으라는데 예전엔 공부가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농사가 훨씬 힘들어.”하더란다. 딸애와 나는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사실 큰놈은 누나나 동생에 비해서 낙천적인 성격이라 내게 충고를 제일 많이 들었던 터였다. 가정에 어려운 일이 생기니까 각자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끼고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가족간의 마음과 힘을 결집하는가 하면 쉽게 보이던 일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포도는 다른 것에 비해 손이 많이 간다. 이른 봄 나무전지를 시작으로 눈 솎기, 어깨송이 제거, 순짜르기와 곁가지 제거, 송이 다듬기가 끝나면 봉지 씌우기와 또 곁가지 제거 등 지금은 송이 다듬기전의 순서로 어려서 미처 순짜르기를 못했던 놈들을 골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이 크는 모습이 모두 다르듯이 작물도 자라는 모습이 모두 다른 것같다. 같은 나무인데도 먼저 커서 움쑥 올라가는 줄기가 있는가 하면 열매가 클려고 하는 시기인데도 아직 기본 잎수도 확보하지 못하는 가지를 보면 나를 보는 것만큼이나 애처롭다.
내 인생의 여정도 성장이 뒤떨어진 포도줄기 만큼이나 더디고 힘든 과정이지 않은가, 유복자이신 아버지의 맏딸로 태어나 보릿고개 나물죽을 먹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6남매나 되는 식솔들을 거느리고 내 땅 한 평 없이 남의 땅을 일구시던 아버지께서 어느날 돈을 벌어 오겠다며 집을 나가신뒤 시골에 남겨진 우리는 엄마의 떠돌이 행상으로 겨우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집 나간 지 일년 후 아버지께서 소식을 전해 오셨고 나와 남동생만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올 수가 있었다. 나는 맏딸이라서 선택되었고 남동생은 장남이라서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때부터 회사에서 주는 배급쌀로 굶지는 않았지만 가난이 쉽게 벗어 날 리는 없었다. 일년 후 다시 가족이 모였고 나는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학교를 다닐수 있었지만 두 살 차이 여동생은 집안 살림에 늦게 태어난 동생 보살피느라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하고 농사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분가를 했지만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아이 남매를 업고 지금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막내가 이사 들어와서 태어나 군입대를 했으니 이곳에서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더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안 해본 농사가 없다. 옥수수농사, 고랭지배추, 고추, 콩 등등 여러 작물들을 농사 지어 봤지만 노력한 것에 비해 돈이 되지 못했다. 삼남매가 상급 학교에 다니고부터는 우리 가정에도 위기감이 오기 시작했다. 관행 농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과수원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시설을 하느라 투자를 한 탓에 빚은 졌지만 기존의 농사처럼 암울하지는 않았다. 과수원을 조성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꺼번에 투자하기가 버거워 차츰차츰 넓히다 보니 이제 자리가 잡히는 듯하다.
준 고랭지에 위치해 있는 우리집, 읍내보다도 열흘은 봄이 늦게 도착하는 이곳에 과일 농사가 되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우리 가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과수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결속을 하다 보니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팔도 아프고 목도 아프지만 가을의 결실을 생각하니 희망이 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