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산장 윤두선 씨
윤두선 씨
1980년대 신촌기차역 건너편에 ‘콜럼비아’라는 커피집이 있었다.
커피를 다방에서 마시던 시절이라 당시 이 ‘콜럼비아’는 요즘 커피전문점 처럼 일반 다방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계단을 올라 2층 문을 열고 들어서면 코끝에 확 와 닿는 진한 커피향이 좋았고, 벽 한쪽으로 장작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실내는 깊은 산속의 산장 분위기를 자아냈다. 카운터에는 흰 수염의 나이 지긋한 요즘으로 치면 ‘바리스타’가 우릴 반가이 맞았다. 커피를 주문하면 즉석에서 원두를 주문량만큼 분쇄기에 넣고 갈아서 원두커피를 만들어 내왔다. 다방 커피에 익숙해 있던 우리에겐 갓 갈아서 끓인 원두커피 맛은 색다른 세계였다. 이 털보 ‘바리스타’가 왕년의 설악산 백담산장 지기 윤두선 씨였다.
나와 윤두선 씨와의 첫 만남은 1970년대 말로 올라간다. 당시 학교 기숙사 내부 수리를 하면서 사생들이 쓰던 헌 매트리스와 철침대를 매각하게 되었다. 이때 이를 사들이기 위해서 구매과로 찾아온 이가 윤두선 씨다. 산장에서 사용하기위해 전량을 구입하길 원했다. 내 책상 걸려있던 ‘제2회 설악제’ 기념 페넌트를 보고선 설악산에 다녀갔느냐며 아주 반가워했다. 다음에 설악산에 오면 꼭 들려달라는 말을 하며 그는 돌아갔다..내설악 깊숙한 산속에서 지내시는 분이 기숙사 매트리스 매각 사실을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그 후로 몇 번 더 만나면서 나중에서야 이화여대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백담산장 부근에 국문과 김호순 선생님이 사놓은 집이 있었고 또 계곡을 끼고 조금 더 들어가면 화전민 가옥이 여러채 있었는데 이 중에 국문과 이남덕 선생님 집도 있었다..설악산이 좋아 아예 산속에 집을 사놓은 모양이다. 언젠가 겨울 설악산 산행 시 이남덕 선생님 가옥에서 1박을 했던 적도 있었다.
나의 설악산 경험을 보면, 1974년 등산모임인 ‘흰돌모임’이 생기고 다음해인 1975년 10월 회원들과 첫 설악산 등산으로 마등령 코스 산행을 하였다. 그 전엔 설악산이라곤 여름 방학에 대학 친구와 함께 울산바위, 비선대, 비룡폭포 구경이 전부였다. 요즘으로 치면 관광인 셈이었다. 마등령 산행 후 설악산에 푹 빠져 거의 해마다 찾게 되었고, 특히 12월 연말이 되면 옥영태, 송준만 선생과 함께 셋이서 겨울 설악산 등반을 계속하게 되었다. 코스는 주로 내설악 백담계곡으로 올라 대청봉을 거여 외설악 천불동으로 하산하였다. 시외버스를 타고 5시간여 만에 용대리에 내리면, 요즘엔 백담사까지 셔틀버스가 올라가지만, 당시엔 중간에 계곡에서 버너에 밥을 지어 점심을 해먹고 백담사까지 8km 2시간을 걸어서 올라갔다. 백담사는 전 전 대통령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일반에 알려졌지만 당시엔 산악인 외에는 잘 알지도 못했었다. 백담사와 계곡을 두고 건너편에 윤두선 씨가 1968년엔가 지었다는 백담산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떨어지니 우린 설악산 첫날밤을 백담산장에서 지내곤 했다.
백담산장(1970년대)
기숙사 매트리스 건으로 인연을 맺은 백담산장 지기 윤두선 씨는 겨울이라 인적이 드문 산장을 찾은 우릴 반겨주었다. 벽난로에 활활타는 장작불을 지펴놓고 밤늦게까지 얘기를 주고받았다. 우리가 준비해간 ‘이화포토다이어리’를 주면 무척 좋아했다. 윤두선 씨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친척간이라고 했다. 서울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사랑하는 여인과 이 산골짜기에 들어와 산다고 들었는데, 이 여인이 이대 출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대가 자기 처갓집이나 다름없다고 농삼아 얘기했다. 그 후로도 우린 설악산에 갈때마다 백담산장에 들리곤 했다.
백담산장엔 ‘설구’라는 이름의 덩치가 호랑이만 한 ‘세인트 버나드(Saint Bernard)’ 종 큰 개(犬)가 있었는데 알프스 산의 인명구조견으로 유명한 종자라고 했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 크기가 진짜 호랑이 발자국이라고 할만 했다. 몇 년 후에 갔을땐 ‘설희’라는 암컷도 있었다. 수렴동 산장지기 이경수 씨라는 분이 이 설구에게 물려 두 산장지기 사이가 벌어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1급수인 백담계곡에는 열목어가 살고 있는데,.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열목어가 백담계곡에서 뛰어놀게 된 데에는 윤두선 씨의 정성어린 보호 작전에 따른 공이라고 한다. -세인트 버나드 견. 설구와 설희는 온 몸이 흰털이었다-
-백담산장(1980년 5월 30일)좌로부터 김형두, 이상도, 김연창-
1980년 5월 광주사태가 나고 대학에 휴교령이 내린 때 설악산을 찾았다
산장지기에게 '수염'이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산장지기들 중에는 털보가 많다. 내설악 백담산장 지기인 윤두선 씨가 그렇고, 외설악 권금성산장 지기인 유창서 씨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산장 지기인 함태식 씨가 산악인들 사이에 유명했다.
윤두선 씨는 타의로 백담산장을 떠나게 된다. 강원도 장학회에서 백담산장을 인수 운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 전 대통령이 백담사 유배생활을 할 때 산장은 경호원들의 숙소로 쓰이는 운명을 맞게 된다.
백담산장을 내준 윤두선 씨는 그 후 삼봉약수 부근에 자리 잡고 은둔생활을 한다고 들었다. 가끔 이화광장에서 윤두선 씨를 뵈었는데 이대생들이 삼봉약수로 MT를 오도록 주선하여 직접 인솔해 간다고 했다. 그런데 또 살둔이라는 마을에 산장을 짓고 산다는 얘기도 들었다. 살둔에서 양양 방면으로 15분쯤 길을 달리면 삼봉자연휴양림이 있다. 혹시 삼봉약수 부근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 살둔 마을과 같은 장소를 얘기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살둔이란 어떤 곳인가?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도 난리를 겪지 않았다는 홍천군 내면 율전2리 살둔마을.
‘사람이 기대어 살만한 둔덕’이란 뜻의 살둔. ‘삶둔’이라고도 하고 한자로는 ‘생둔(生屯)’이라고도 한다. 백두대간의 준령에 자리 잡은 살둔은 마을 전체가 병풍을 쳐놓은 듯 1,000m가 넘는 고봉들에 둘러싸인 전형적인 두메산골이다. 방태산 구룡덕봉(1388m)이 앞에 있고 내린천이 굽어 흐르는 살둔마을 끝 쪽, 살둔 마을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 살둔산장 때문이라고 한다. 윤두선씨가 백담산장을 내려와 1985년 지은 산장이 바로 ‘살둔산장’이다. 월정사 복원작업에 참여했던 도목수에게 특별히 부탁해 지은 전통 귀틀집이라고 한다. 때마침 월정사 보수공사가 있어 공사 후 남는 재목을 이곳까지 옮겼다고 한다. 당시에 도로도 놓이지 않았고 목재를 운반할 트럭도 구하지 못해 장마 때를 기다려 강을 통해 목재를 운반했다고 한다. 원래 산장의 이름은 미진각(未盡閣)이었다. 기와로 멋지게 지붕을 울리고 싶었지만 자금이 모자라 함석을 올린 것이 아쉬워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지은 지 28년이 지났지만 틈새하나 나지 않아 '한국 사람이 살고 싶은 집 100선'에 꼽히기도 한 살둔산장은 1년 내내 산사람들과 나그네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순간의 결정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지만 산악인 윤두선씨는 ‘순간의 풍경이 인생을 지배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살둔산장
산이 좋아 일생을 산과 벗하며 지내던 윤두선 씨는 영원한 산 친구 지리산 노고단 산장지기 함태식 씨가 자리를 옮겨 관리하던 피아골 산장에서 1992년 생을 마감한다.
털보 산장지기 3인방(좌로부터 권금성 산장 유창서, 백담산장 윤두선, 노고단 산장 함태식 씨)
첫댓글 정신없이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좋은 이야기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두선 씨는 피아골 산장에서 산장지기 함태식 씨가 출타중에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는데 안타까운 것은 일주일이나 지나 주검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