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동아일보 ‘현대시 100년-사랑의 詩’에 소개 된 것을 보았다. 처음 보는 시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첫사랑에 대한 내용이 일부 있으나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오는 날에 남의 ‘비옷을 빌어 입고’ 있는, 자신의 비옷이 없는 화자의 가난한 처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가 있는 때는 ‘온 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리는 곳이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화자는 5가지의 지난 날을 회상한다. 먼저 ‘이십팔 년 전/ 선죽교(善竹橋)가 있는/ 비 내리던/ 개성(開城)’을 떠올린다. ‘호수돈 고녀생(高女生)에게/ 첫사랑이 번지어졌을 때’와 ‘버림 받았을 때’를 생각한다. 그리고 가난해서 남에게 ‘비옷을 빌어 입고 다닐 때’와 ‘기와 담장 덩굴이 우거져’ 있는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오늘처럼 ‘온 종일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리는 ‘때’를 생각한다.
이 시에서 중요점은 ‘비옷을 빌어 입고’의 ‘빌어’이다. ‘빌어’는 ‘빌려’의 잘못된 표기일 수도 있다. ‘빌리다’는 ‘남의 물건이나 돈 따위를 나중에 도로 돌려주거나 대가를 갚기로 하고 얼마 동안 쓰다’의 의미이다. 그러나 언어를 정밀하게 쓰는 시인이 단어를 잘못 썼다고 보기보다는 ‘빌다2’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빌다2’는 ‘(…을)남의 물건을 공짜로 달라고 호소하여 얻다’로 화자가 가난한 처지에 있음을 알려준다.
화자가 ‘기숙사에 있을 때’는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 기숙사였을 것이다. 이 시의 정확한 창작 연대를 모르는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어디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어디로 보던 시의 내용이 흐트러지진 않는다. 그러나 대학교 기숙사라로 보면 시적 상황이 좀더 우울해진다. 화자인 시인은 평양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인 광성고등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광성고등보통학교는 1894년 홀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 교육을 위한 사숙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시인이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도 기숙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시인은 연세대학을 다녔는데 이 때에 기숙사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시에서 말한 기숙사가 대학교 기숙사였다면 화자의 가난한 상황이 대학 시절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리고 화자가 수미상관으로 거듭 쓴 ‘온 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은 동일한 시간으로 보기 어렵다. 이 시간은 화자의 현재와 과거에 모두 걸쳐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인 ‘온 종일 비는 내리고’는 단순한 배경으로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제목인 ‘비옷을 빌어 입고’ 때문이다. 이는 가난한 처지에 있는 화자의 상황을 말해준다. 그리고 ‘트럼펫’은 영화나 알려진 음악을 통해 볼 때에 경쾌한 소리를 내는 악기가 아니다. 슬픈 감정을 불려 일으키는 악기이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온 종일 비는 내리고’는 화자의 우울한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사랑스런 멜로디’는 화자가 ‘트럼펫’ 소리를 사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화자가 ‘트럼펫’ 소리를 자주 들었다는 의미도 된다. 이는 화자가 가난으로 인하여 우울해진 적이 많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가난은 1연의 ‘트럼펫이 울린다’라는 현재시제를 통해서 아직도 계속 되고 이로 인한 우울함 또는 슬픔이 지속 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이 이 시를 쓴 때는 고등학교 시절에서 28년이 지난 때이다. 고등학생이면 약 16-19세 정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나이가 약 40대 중년일 것이다. 40대 중년의 나이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게 쓰고 있다.
어디선가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온 종일 비는 내리고’ 나는 ‘비옷을 빌어 입고’ 비를 피하고 있다. ‘가까이’ 자주 듣던 ‘트럼펫’의 ‘멜로디’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나를 ‘이십팔 년 전/ 선죽교(善竹橋)가 있는/ 비 내리던/ 개성(開城)’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그 때 ‘호수돈 고녀생(高女生)’을 사랑했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랑를 할 때도 ‘온 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에서 ‘트럼펫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와 한 사랑은 ‘눈물’(비)이었다. 그 눈물에 ‘첫사랑이 번지어’ 버렸다. 이때도 나는 ‘트럼펫’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나는 ‘호수돈 고녀생(高女生)에게’ ‘버림 받았’다. 이때에도 ‘온 종일 비는 내리고’ 나는 ‘트럼펫’ 소리를 들었다.
‘온 종일 비는 내리’는 날에 ‘비옷을 빌어 입고 다닐 때’도 나는 ‘트럼펫’ 소리를 들었다. 너무 가난해서 ‘비옷’도 살 수 없었다. 남의 비옷을 겨우 얻어 입고 다닐 정도로 나는 가난했다.
‘기숙사에 있을 때’에도 ‘기와 담장 덩굴이 우거져’ 무성한 여름의 기숙사에서 가난해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에도 내 마음에는 ‘온 종일 비는 내리고’ 나는 ‘트럼펫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도 중년의 나이에도 나의 마음에는 ‘온 종일 비는 내리고’, 나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여전이 ‘비옷을 빌어 입고’ 있고, 내 귀에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이제는 너무 많이 들어 ‘사랑스러운 멜로디’가 되어 버린 ‘트럼펫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20080612목후0851갑작스런소나기전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