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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단의 방해와 하나님의 대책 - D. 사탄의 방해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⑷
(창3: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마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첫 번째 대책은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신 것이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찾아왔는데 이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는 위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 도덕, 교훈과 같은 이런 것들은 위치라기보다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어리석은 행동, 지혜로운 행동, 악한 행동, 선한 행동 같은 것으로 인생의 문제를 풀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선을 행한 사람은 잘되고 악을 행한 사람은 망한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이런 유교적인 사상이다. 이런 전부 선악의 문제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인생의 모든 문제는 지혜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처음부터 그런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왔다.”고 말한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한다. 찾아왔는데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선이냐 악이냐 ?’이런 식으로 따지면 하나님이 온 것이 더 저주가 된다. 사람의 생각보다 더 크신 이가 ‘너 뭐했어?’ 이렇게 물으면 그것은 죽으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찾아와서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말이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뭐하냐?”고 물으면 우리는 멸망인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까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이다.
* 사탄과 그 후손을 낮추시고, 여자와 그 후손을 높이심
그리고 두 번째는 사탄과 그 후손을 낮추시고 여자와 그 후손은 높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주가 움직이려면 ‘높은 자는 낮아져야 되고 낮은 자는 높아져야 된다. 여자의 후손이 우주를 지배해야 한다.’는 그런 논리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주질서의 원칙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같다. 교회도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진다는 원칙이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다.
그러니까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를 알려면 이 원칙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안 된다. 이 원칙을 떠나서 아무리 기독교인이 되어도 이 원칙을 떠난 반대의 것이 된다면 그것은 도로 세상이다.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큰 선교사업을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어떤 질서냐는 것이다.
지금 공산주의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 공산주의 질서 안에 있느냐 자본주의 질서 안에 있는가 하는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질서 안에 있다. 전 세계는 자본주의 질서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자본주의 질서를 무시하고는 잘 살 수 없다. 만약 공산주의가 세계를 지배한다면 공산주의의 질서를 무시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무엇을 하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질서 속에 있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본이 지배하는 질서 속에 내가 있느냐 아니면 미국이 지배하는 질서 속에 내가 있느냐 하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 질서 속에 내가 있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질서 속에 내가 있는가 하는 것을 혼돈해서 모르면 자본주의 질서 속에 있으면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전체 질서에 역행하는 것이니까 쉽겠는가 어렵겠는가. 이것은 바람을 거꾸로 잡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급류를 거꾸로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것은 결국 살아남지 못 한다.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는 자본주의 질서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인생이 성공할 수 있다. 이런 속에서 사회주의를 자꾸 부르짖으면서 사회주의적 질서를 생각하고 있으면 안 맞게 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배를 타고 있는가, 어떤 질서 속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온 사람들은 어떤 우주질서 속에 있는가? 하나님의 경영질서는 어떤 것인가?’하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앙적인 노력만 계속 해서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왜 그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질서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신년이라고 해서 CBS 뉴스에서 어떤 교회에서는 부목사 둘이서 갑자기 원목사를 구타하고 내려갔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나라의 유명한 교회에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군데서는 지금 현재 있는 목사를 비난하는 전단을 뿌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까운 교회에 있는 목사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이 사람은 전 목사의 처남이라고 한다. 이런 뉴스가 나왔었다. 이것은 열심은 대단한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우주질서가 뭔지를 모르고 열심인 사람들이다. 자기들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을 것이고 잘하자고 했을 것인데 질서가 다른 질서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질서를 모르고 따르면 따른다고 따르는데 그것은 헛길로 가는 것이 된다. 다른 길로 가버리게 된다.
그러니까 사탄과 그 후손은 낮추시고 여자와 그 후손은 높인다는 말은 단순히 겸손한 사람은 우대한다는 뜻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의 질서를 의미한다.
* 아담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심
그리고 세 번째는 아담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았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게 되어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사탄이 한 것이니까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된 것이니까 하나님으로서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아야 되는 데 구원의 길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을 말할 때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는 이것이 복음이다.
8회말까지는 졌는데 9회말에 역전승했다는 이것이 복음이다. 질줄 알았는데 이겼다는 것이다. 다 질줄 알았는데 연장전에서 이겼다고 하면 사람들이 박수치고 난리가 난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사람이 실패했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길을 열어 놓았다는 이것이 복음이다.
살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열어 놓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절망적이니까 너는 그냥 ... 할 수 없다.” 이러면 끝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이 있단 말이다.
우리 말 속담에 재미있는 것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런 말도 있고, 맷돌에 콩을 갈면 원칙적으로 다 갈려야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안 갈리고 나온 것이 있다. 그러니까 살아날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그런 말을 쓴다. 어떤 사람은 정말 죽을 상황에서도 살아난다. 다 죽는 데 살아난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다 죽는 것 속에서 살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 분명히 죽을 사람인데 살았다. 내 주변에서는 이런 사람이 죽었다. 같은 투 베드(tow bed)에서 옆에 있던 젊은 친구는 죽었다. 절에서 한 방에 같이 자던 그 사람도 죽었다. 여러 사람이 나와 같은 병에 걸렸다가 죽었다. 나도 죽게 생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안 죽고 살았다.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내 사진을 보고 그런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살았느냐?’고 한다. 이렇게 해서도 70살이 넘게 살았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길에서 잘됐다. ‘그 사람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듣더니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갔다더라.’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복음은 일반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일반상식을 초월한 것이다. 안 되는 데도 된다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상황으로 봐서는 꼭 죽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살았다는 것 이것이 구원이다.
오늘은 복음, ‘여자의 후손이 오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분명히 여자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아서 동산을 빼앗기게 되었고 잃어버렸다. 그러면 여자는 이제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할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이 온다는 것이 복음이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자가 온다.’ 이것이 복음이다. 여자의 후손은 사람을 속였던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이다.
사탄은 머리가 더 좋아서 사람을 속였는데 머리를 상해버리면 머리가 다쳤으니까 사람보다 못하게 될 것이다. 띵해져서 기억력도 없어지고 속일만한 인물이 못 된다. 기억력이 없으면 남을 속일 수 없다. 자기가 언제 속였는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모르면 탄로 난다. 기억력이 없는 사람은 거짓말 할 생각도 안 해야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해 놓고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니까 안 되기 때문이다. 남을 속이려면 머리가 아주 좋아야 된다. 특별하게 좋아야 된다.
전쟁을 할 때 이기려면 상대방보다 3배의 전력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래야 전쟁에 이길 수 있는 타산이 맞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계산하지 못하고 전쟁을 하면 백발백중 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탄은 사람보다 머리가 3배나 더 좋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자에 비해서 3배나 더 좋았다. 그런데 그 3배나 더 좋은 머리가 상처를 받아서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다. 아직은 안 죽었다. 상하기만 했지 죽지는 않았다. 거기서는 “여자의 후손이 너를 죽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결국 붉은 용은 요한 계시록 마지막까지 간다. 그때까지 살아있다는 말이다. 살기는 살았는데 머리를 한 방 맞아서 옛날 같지 않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옛날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분명히 전에는 나보다 3배나 머리가 좋아서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도 안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상하게 하는 것마다 잘못한다. 이게 머리가 띵해졌다면 이제는 내가 백발백중 이기는 것이 아닌가! 승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대적하는 원수를 이기기 위해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1. 여자가 아들을 낳음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여자가 낳았는데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여자가 낳은 아들은 두 종류다. 하나는 사람의 뜻으로 난 아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난 아들이 있다. 두 종류가 있다. 하와가 아들을 낳았다.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이다. 물론 그 다음에도 많은 아들들을 낳았겠지만 특성상 이 세 사람을 골라 놓은 것이다. 가인은 악의 상징으로, 아벨은 선의 상징으로, 셋은 또 다시 새로 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다시 새로 난 상징으로 골라 놓았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았다. 하갈이 이스마엘만 낳았겠는가? 그 외에도 많은 아들들을 낳았겠지만 모든 아들이 다 이스마엘로 대표된다. 우리도 가인일 수도 있고, 아벨일 수도 있으며 셋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스마엘일 수도 있다. 이 특성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 어디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여자가 낳기는 낳았는데 하나님의 경륜에서 빗나간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라는 이삭을 낳았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았다. 사라도 이삭만 낳았는지 더 낳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삭만 이야기 한 것은 이삭 안에 이 원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삭의 아들일 수도 있고 이삭으로 태어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다.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낳았는데 예수만 낳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야고보도 낳고 동생도 있고 그랬다. 그러니까 다른 자녀들도 낳았지만 예수만 이야기 한 것은 다른 아들들은 다 그냥 낳은 보통의 아들들이고 예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았다는 이것이다.
여기서 보면 사람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모든 인간은 다 그렇다.
1/2. 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 낳은 아들(가인, 아벨, 셋, 이스마엘)
첫 번째로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낳은 아들이다. 요한복음 3장에는 이렇게 말한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다.’(요1:13)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들은 누군가? 그것이 가인이고 아벨이고 셋이고 이스마엘이고 그렇다. 그 안에 이 사람들이 다 들어있다. 구체적으로 성경에 써 놓았다.
⑴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 아벨, 셋을 낳음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고, 또 동침하여 아벨을 낳고, 또 동침하여 셋을 낳고’ 반드시 동침했다는 말이 쓰여 있다. 성경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정확하다. 우리가 이렇게 해석할 줄 알고 써 놓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사람들이 나를 알았겠는가? 이 신성한 책에다 ‘동침했다’는 말을 왜 써 놓았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말은 안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말인데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또 동침하매 아벨을 낳고’ 그리고 가인과 아벨을 끝내고 셋을 낳을 때도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라고 했다. ‘그가 아들을 낳아 셋이라 하였더라.’ 다시 동침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담은 계속해서 동침해 봤자 계속 똑 같은 사람을 낳은 것이다. 왜 그런가? 동침하니까 그렇다.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니까 어느 아들이든 똑 같은 아들이라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똑 같은 것이 왜 그런가 하면 다 동침해서 낳았기 때문에 같은 것이다. 안 그런가? 똑똑한 사람도 있고 잘난 사람도 있으며 못난 사람도 있다.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다 동침해서 낳았다. 동침하지 않고 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동치미국 먹었다. 그래서 똑 같다는 것이다. 하나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났느니 못났느니 할 것이 없다. 다 같은 계통이니까 그렇다. 멸치는 어느 멸치든지 다 알을 까서 낳는다. 전부 알로 낳는다. 그래서 멸치는 다 똑 같다.
⑵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음
창16:4“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성경에 창세기 16장 1절 이하를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했다. 하갈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도 예외 없이 동침하였다. 그러니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났다는 말이 결국은 이 말이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그러면 일차적으로 다 동침해서 낳은 사람들이니까 그 차원의 사람과 다음 차원의 사람이 구별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직업이나, 성향이나, 지식이나, 높고 낮음 같은 것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동침해서 낳아졌느냐, 아니면 동침하지 않고 낳아졌느냐?’ 이 차이로 갈라지는 것이다.
수중생물로 보면 ‘알로 낳은 놈이냐, 새끼로 낳은 놈이냐’에 따라 다르다. 새끼로 낳은 것을 보면 뱃속에 새끼가 가득 들어 있어서 배를 갈라보면 새끼로 가득 차 있다. 상어종류는 알로 낳는 것도 있지만 새끼로 낳는 것도 아주 많다. 알로 낳는 놈은 뱃속에는 새끼가 없고 알이 바깥에 나와서 부화를 해서 낳는다. 이렇게 종류가 2가지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알로 낳은 종류도 있고 새끼로 낳은 종류도 있다고 보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있고 육신으로 낳은 자가 있다.
2/2. 하나님의 말씀으로 낳은 아들(이삭, 예수)
⑴ 사라가 하나님 말씀대로 이삭을 낳음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이삭을 낳게 하심(창17:19, 21:1-4)
창17:19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창21: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방문)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낳은 아들을 한번 살펴보자.
사라가 이삭을 낳는데 ‘동침했다’는 표현이 없고 “사라가 하나님 말씀대로 이삭을 낳았다”고 되어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이삭을 낳게 하셨다. “네 아내 사라가 정녕(확실히)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창17:19)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방문)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창21:1-2) 라고 되어있다. 여기서는 동침했다는 말이 하나도 없다. 어떻게 이렇게 구분해서 써놓았는지 모르겠고 너무너무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써놨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지 만약에 잘못 써놨으면 우리가 헷갈려서 모르지 않겠는가! 너무나 정확하게 써놨기 때문에 우리같은 사람이 보고 ‘아하~ 2종류가 있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
⑵ 마리아가 하나님 말씀대로 예수를 낳음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예언하시고, 천사로 고지하여 예수를 낳게 하심(사7:24,마1:18, 눅1:31)
마1: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마1:18“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눅1:31“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도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하나님 말씀대로 예수를 낳았다. 성경대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예언하고, 천사로 고지하고, 성령으로 낳았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마1:23) 이것은 선지자로 예언한 내용이다.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18) ‘동거하기 전에’라는 말은 ‘동침하기 전에’라는 말이다. 여기서도 동침했다는 말이 없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여기서도 동침했다는 말이 전혀 없다.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동침했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동침했는지 안 했는지 그 사실을 우리가 모르지만 우리에게 계시된 것은 ‘2종류의 사람’이 따로 계시되었다. 하나는 동침해서 낳은 종류의 사람이 있고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된 사람이 있다.
⑶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심(요1:1,14 1요1:1)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세 번째는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람이 또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혜와 실제가 충만하더라”(요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라고 했다. 예수에 대해서 말할 때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알고 보면 같은 계통의 사람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썼을 것이다. ‘말씀’을 희랍세계에서는 로고스(Logos)로 번역했고, 불교로 말하면 법(法)에 해당한다. 희랍사람들은 식물로 말할 때 씨를 로고스라고 한다. 씨를 말하려고 로고스라는 말을 썼는데 이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 말은 '하나님의 씨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 쓴 말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도 알고보면 표현방법만 다를 뿐이지 같은 의미다.
이래서 우리가 예수가 나신 것을 보니까 ‘아! 종류가 다른 사람이구나! 다른 계통을 타고 왔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인, 아벨, 셋, 이스마엘 같은 종류의 인간이 있고 이삭, 예수 같은 다른 계열의 사람이 또 있다.
⑷ 말씀으로 다시 난 사람들(요1:12,13 벧전1:23)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벧전1:23“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것인가? 복음은 무엇이냐하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은 복음이 안 되고 ‘다르게 난 사람’이 복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말씀으로 다시 난 사람들’이다. 우리 여기 있는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사람들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를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불자(佛子)들을 보고 하는 말이 ‘여러분들은 다 법으로 난 사람들이다, 불법(佛法)으로 된 사람들이다’라고 말하는데 그 법이라는 것은 말씀이라는 말이다. 그 사람들이 훨씬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으로 된 사람들이다. 육신으로는 우리가 분명히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사람들인데 우리가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영접함으로써 나는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
다른 동물들은 소는 소대로, 개는 개대로, 태어난 그대로 있고 2차적인 존재가 없지만 사람만 2차적인 존재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뭘 듣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래적(生來的)으로 태어난 나’하고 ‘말씀을 듣고 태어난 나’하고 다르다. 이 ‘말씀을 듣고 태어난 나’는 창조되지 않은 사람, 창조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사람은 창조에 속한 사람이고 말씀으로 된 사람은 창조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람을 보고 ‘영원하다’고 말한다. 창조에 속한 것마다 시작이 있으니까 다 끝이 있게 되지만 이것은 창조에 속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히랍어로 조에)이라고 말한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시간이 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된 사람이니까 성질이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다.
아까 우리가 극명하게 표현된 대로 ‘동침해서 낳은 아들’하고 ‘성령으로 난 사람’이 다른 것처럼 지금 우리는 1차적으로는 다 육신적으로 동침해서 낳은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조성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생래적인 사람과 다르니까 생래적으로는 똑같이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어도 말씀을 받았느냐 안 받았으냐에 따라서 사람은 달라지게 된다. 어떤 말씀을 받아들였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되기도 하고 저렇게 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소위 ‘인간’이다. 우리가 생래적으로 태어난 것은 동물(動物)이고 우리가 인간이라고 말할 때는 이 동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2차적으로 태어난 사람을 보고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공산주의자가 되는데 그것은 생래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형제간에도 이념이 틀리면 딱 대립이 되어서 죽고 살고 하게 된다. 어떻게 형제간인데 그럴 수가 있느냐 할 수 있지만 형제간이라는 것은 생래적인 것이고 공산주의란 것은 생래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래적인 것보다 공산주의가 더 강한 것이다.
6∙25동란 때 한 가정이 두 패로 갈라져 버린 경우가 많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갈라진 경우, 형님과 아우가 갈라진 경우가 많이 있었다. 뭐가 중요하냐면 생래적인 그 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2차적인 그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은 이것이 특별한 존재이다. 개는 한번 태어나면 그대로이다. 검은 개로 태어난 놈은 다른 게 없이 다 검은 개이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기는 다 같이 태어나도 다른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다. 새로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받는 일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그냥 슬슬 들을 일이 아니다. 그냥 슬슬 듣는 것 같아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자꾸 젖는다. 그러니까 잘못 된 것을 들으면 안 된다. 여러분도 잘못 된 것을 들으면 망한다. 왜냐하면 여기와 있다 보면 자연히 젖는다. 우리 형제들이나 아이들을 보면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세상에 나가보며 젖어 있다. 어떤 말씀으로 젖어 있다. 그래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갈 때 잘 가야 한다. 잘못 가 놓으면 골치가 아픈 것이다.
“너희가 거듭남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이것이 지금 우리이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지금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누구이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나는 지금 생례적인 사람으로의 육신이 있다. 우리 육신은 분명히 생례적인 사람이다. 아침에 밥을 먹을 때 나는 생례적인 사람으로 밥을 먹었다. 그런데 삶은 무슨 삶을 살고 있냐 하면 생례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난 사람으로 살고 있다. 세상 사람도 알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 다시 난 것이다.
우리가 다시 났다는 말은 예수로 하나님 말씀으로 다시 난 것을 말한다. 세상 사람도 공산주의가 되면 다시 난 것이다.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다. 잘못 거듭나서 그렇지 거듭난 것이다. 다시 난 사람의 세계가 인간세계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볼 때 생래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생래적인 것은 기초에 불과하다. 자동차가 만들어지면 그것은 생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동차가 어디로 갈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주인에 따라서 부산으로 갈 수도 있고 서울로도 갈 수 있는 것이니까 그건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해져 있지 않다. 말씀에 의해서 정해진다. 내가 무슨 말씀을 듣냐에 따라서 정해지기 때문에 말씀은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 그런 말씀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것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가 없이는 되어진 것이 없다.”고 한다. 그가 없이는 되어진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가 없이 되어진 것이 많은데 왜 그가 없이 되어진 것이 없다고 하는가? 그가 없이 되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것은 지금 다른 세계를 말하고 있다. 근원적으로 하면 물론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있었고 산이 있으라 하니까 산이 있었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에 있는 것은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 인격의 세계를 말한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되었으니 그가 없이 되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그가 없이 되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나라고 주장할 것이 없다. 나다하는 것이 나가 아니다. 나는 말씀이지 나가 아니다. 공산주의자를 생각해 보라.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아니다. 공산주의자이지 자기가 아니다. 그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로 말미암은 사람이 되었을 경우에는 내가 아니고 예수이다.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라고 한다. 이걸 잘못해서 “내가 예수다.”라고 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내가 예수는 아닌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세상 사람하고 무엇이 다른 것인가! 말씀이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코가 다른가? 입이 다른가?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다. 누구나 다 소고기 좋아하고 누구나 다 돈을 좋아한다. 그런데 딱 한 가지가 다르다 새로 태어 낳으니까 다른 말씀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다른 것이다.
육신으로 가서 만나면 다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 같이 살다 보면, 1년 2년 같이 살다 보면, 10년 20년 같이 살다 보면 무엇이 부딪히느냐? 자연인이 부딪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난 사람이 부딪힌다는 것이다. 말씀이 A로 들어간 사람하고 B로 들어간 사람하고 부딪히면 항상 A와 B가 싸운다는 말이다. 말씀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밤 낮 받아 드린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얼른 보면 그냥 살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살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결혼 하려고 하면 그렇다. ‘교회 안에서 봐도 그게 그거더라.’ ‘세상에 가도 좋은 게 많더라.’이렇게 된다는 말이다. 눈으로 보면 그렇다. 우리교회는 미스코리아만 뽑아 낳는가? 미스터 코리아만 데려다 낳는가? 다 똑같다. 그런데 처음 만날 땐 괜찮다. 그런데 1시간 2시간 3시간 4시간, 하루 이틀, 1년 2년 3년 살아가면 다 달라지게 된다. 들은 것이 다르니까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체질이 바꿔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걸 잘 모르고 있다가 뒤로 가면 시행착오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겉에 있는 사람은 똑같은데 속 사람이 바꿔졌다. 이 속 사람이 바꿔짐으로 인해서 어떤 일이 생겼는가? 두 세계가 생겨난다. 두 아들들의 세계가 생겨 난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낳은 아들들의 세계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으로 낳은 아들들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세계가 달라진다. 사람이 달라지니까 세계가 당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사람이 사상에 따라 가지고 우리가 봐도 공산주위 사회의 분위기가 다르고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가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다. 세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북한에서는 한다. 그래도 그것이 자기들 에게는 별로 이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하루도 못 견딜 것 같지 않는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잘 살고 있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 말로 양육이 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니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쌀밥을 먹고 있었다. 우리 위장이 밥으로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속이 좀 불편 하면 밥이 들어가면 편안해 진다. 그래서 영~ 속이 불편해 질 때는 밥물(밥을 끓여 가지고 나온 물)그걸 마시면 속이 편안해 진다. 그러면 누구나 밥물을 먹으면 속이 편안해 지는냐? 그렇지 않다. 밀가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밥물을 먹어가지고는 편안해 지지 않는다. 밀가루 빵을 먹어야 편안해 진다는 말이다. 노르웨이 청년을 만났는데 그때 거랬다. 하얀 쌀밥을 주니까 밥을 안 먹고 쫄쫄 굶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콩만 하나씩 집어 먹고, 그리고 다른 것은 안 먹고 국끓일 때 들어 있는 감자 그것만 먹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장에 가서 싸구려 삼립 빵을 사다 주었더니 좋다는 것이다. 자기 위장에는 그것이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사람은 육신도 이렇게 길들이기에 따라가지고 밥이 맞냐? 빵이 맞냐? 이렇게 되는데 하물며 전적으로 다시난 사람이 그 말씀 없이 살아지겠냐 이것이다. 그러니까 세계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빵 먹는 세계가 달라지고 밥 먹는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어디가면 달라지는가? 주방에 가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주방에 가면 무슨 냄새가 나는가? 된장 냄새가 나고, 간장냄새가 난다. 왜냐하면 밥을 먹으면서는 간장을 먹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다. 간을 치지 않으면 밥은 싱거워서 못 먹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밥을 해 먹는 문화에서는 다 간정을 먹어야 된다. 간이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빵을 먹는 사람들은 간이 없어도 된다. 빵 먹는 사람들 식당에 가면 버터 냄새가 난다는 말이다. 당장에 음식이 달라지면 주방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냄새가 달라지고 다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말씀이 달라지면 사람 분위기가 당장 달라지고 세계가 당장 갈라질 것 아니겠는가? 안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안 된다. 다 달라져 있다. 여기서만 있으니까 잘 모르고 구별이 안 돼서 잘 모른다.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구별이 된다. 이상하게 뭔가 하여튼 체질적으로 안 맞는 게 생긴다. 세계가 다르니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아들들의 세계, 이게 육신의 자녀의 세계라는 말이다. 가인과 아벨, 셋의 세계를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써놨는데 결국은 바벨로 가는 세계였다. 분열로 가는 세계, 바벨은 결국 분열이 됐다.
“자, 시날 평지에 모여서 우리가 힘을 모으자. 흩어짐을 면하자. 성을 쌓자. 망대를 높이 세워서 하늘에 이르자.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이렇게 갔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생겼냐하면 가인부터 시작했다. 그리 쭉 가다보면 그렇게 간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리 가도록 되어있다.
국화는 처음 봄부터 자라긴 자란다. 근데 소쩍새가 울어도 개나리는 국화가 안 핀다. 국화꽃만 국화가 핀다. 국화는 자라면서 계속 어디로 가나 국화꽃이 필 때까지 자란다. 참 억울한 국화도 많다. 인제 겨우 폈는데 그만 된서리가 와버린다든가, 눈이 와버린다든가 그러면 국화가 겨우 펴가지고 얼마 못보고 시들어 버리고 만다. 제주에서는 겨울에도 안 죽고 있어서 국화가 있는 수가 있다.
우리 교회는 국화꽃을 허남표 형제가 갖다 키워다 놨는데 그만 지난번에 추운 바람에 다 얼어버렸다. 우리 교회에 유일하게 꽃을 키워다가 교회에 놓은 사람, 우리 박수 한번~(짝짝짝). 우리 교회는 그런 정서가 없어가지고 내가 (36:54)워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다른 교회에서는 꽃을 가꾸느라고 난리다. 한주에 꽃값이 얼만 줄 아는가 굉장히 많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걸 사업으로 하는 데가 있다. 교회 꽃을 주일마다 대는 사업장이 있다. 그럼 한 달에 얼마씩 주면 매주 꽃을 갈아 놓는다.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데 우리는 꽃을 가져오는 사람이 없다.(하하하) 그런데 허남표 형제가 저기다 딱 소쩍새가 울 때까지 키워가지고 갖다 놓는다. 얼마나 보기 좋은가, 들어올 때 기분이 좋다. 남을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들이 참 기분 좋은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내고 어떤 사람들은 저런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꽃을 가꾸는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 더 안 낫겠는가. 기왕이면 쓰레기 더미를 만드는 사람보다는 꽃을 가꿔다 놓은 사람이 훨씬 더 낫다. 그럼 사람에 따란 이런 세계도 나오고 저런 세계도 나온다.
가인과 아벨과 셋의 세계는 바벨로 가는 세계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세계는 결국 바벨로 가서 분열이 된다 이 말이다.
그 다음 이스마엘의 세계가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율법, 심판 이렇게 계시 됐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두 어머니가 있는데 하나는 사라고 하나는 하갈이다 이리 되어있다.
하갈로 난 자들은 율법을 상징하게 되어있다. 시내산에서부터 난 자들이다. 시내산하면 율법이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시내산에서 받았으니까. 그리고 이스마엘의 후예들이 시내산쪽에 살았다. 그랬으니까 이스마엘의 세계를 얘기하면서, 두 세계를 얘기 하면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 하나는 종의 여자 이렇게 표현한다. 그래서 율법의 세계를 표현할 때 종의 세계로 표현한다. 하갈로 말미암은 세계 이렇게 표현한다. 왜냐하면 율법 안에서는 우리가 다 종이 되니까. 법이 있으면 자연히 지켜야 되니까 종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하갈을 거기 들어서 설명한 데가 있다. 갈라디아서 4장을 읽어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율법, 율법이 있으면 뭐가 있는가 당연히 심판이 있게 된다. 법이 있는데 심판이 없겠는가. 법을 만들어 놓고 경찰서도 없고 경찰청도 없고 법원도 없으면 법이 소용이 없다. 법을 집행할 곳이 없는데 만들어 놓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러니까 율법이 있으면 당연히 심판이 있는 것이다. 율법이 참 좋은 것이지만은 옳고 좋은 것이지만은 각오해야 될 것은 심판이 따라있다. 이걸 각오해야 한다. 근데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걸 모르고 ‘아, 정말로 옳습니다. 우리가 다 그대로 준행하겠나이다.’ 이렇게 화답을 했다. 그리고 먹고 놀고 아주 즐거워했다 심판이 그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법이 있으면 반드시 심판이 있다. 심판 없는 법이라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
이스마엘의 세계는 법으로 되어있다. 왜 이스마엘의 세계는 법이 되었는가하면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 법으로 낳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라에게 아들이 없다보니 사라가 제안하기를 내게 아들이 없으니까 내 몸종을 데려다가 아들을 낳아서 내 아들을 삼아 달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법이었다. 쉽게 말하면 입양법, 양자 만드는 법인 것이다. 이법에 따라서 하갈과 아브라함이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다. 그것을 꺼집어 내서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 썼다. 너무나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의 세계는 율법으로 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하였으니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서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다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따라 났다하는 말은 자연인이라는 말, 자연법에 따른 아들이었다는 말이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 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은 2차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서 낳은 아들이니까.
좀 전 읽은 대로 사라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했다. 내년 이맘때에 태기가 있을 것이다. 생명의 때에 내가 너를 찾아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서 방문하셨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셨기 때문에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여기서 두 세계가 갈라진다. 종의 세계와 아들의 세계로 갈라졌다. 오늘 우리는 어느 세계에 와 있는가? 종의 세계에 와 있는가? 아들의 세계에 와 있는가? 종의 세계가 아닌 아들의 세계에 와 있는 것이다. 계집종의 세계가 아니고 아들의 세계. 우리가 만약 스스로 율법을 취한다면 우리는 계집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다시 율법으로 돌아 갈수가 있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너희 눈 앞에 보이거늘 어찌하여 다시 돌아 가냐는 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고 죽은 것이다.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다. 율법의 심판을 받고 죽은 것이다. 유태인의 공회에서 재판을 해서 사형 언도를 한 것이다. 유태인의 공회는 율법을 가지고 재판을 해서 이 사람은 율법을 어긴 사람이다 해서 죽인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고 안식일을 위반했다. 여러 가지 말을 했겠지만 대표적으로 성전을 헐라고 했는데 율법에 따라서 이 사람은 사형이 해당한다고 판정이 되어서 죽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돌아 가냐? 또 죽으려고 돌아 가냐? 이 말이다. 한사람 죽었으면 말지 또 죽으려고 가냐? 이 말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를 대표한자가 율법의 심판을 받고 죽었다. 그 대표한자가 누구냐? 우리는 감히 따라 갈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심판을 받고 죽었는데 또 그리 기어들어 가냐? 이 말이다. 또 한 번 네가 재어 보려고 기어들어 가냐? 이런 뜻이다. 너보다 백배나 나은 사람이 심판을 받고 죽었는데 네가 또 가서 재어보겠다는 말이냐? 이런 뜻이다. 율법의 세계가 이렇다는 것을 깊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분명히 옳은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다 따를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대책을 세웠는데 다른 대책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또 들어 가냐? 이런 뜻이다.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았다. 오늘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우리는 그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일일이 심판을 받을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 그곳에다 모든 것을 묻어 버리고 더 이상 사람을 심판 할 수 없다. 내 아들도 심판을 받는데 이 법을 더 두면 어떻게 하겠냐는 말이다. 그래서 그 법을 폐지한 것이다. 아들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임금님이 법을 세워서 지금까지 잘 해 먹었는데 그 법에 자기 아들이 걸려들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죽이고 나니까 임금님이 이놈의 법 때문에 아들이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어서 이 법을 폐지하고 다르게 해야겠다는 것이다. 꼭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 ‘우리는 약속이 있는 백성이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약속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 약속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약속일뿐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겠다는 것은 약속이었다. 아들을 그냥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고 그냥 약속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약속을 따라서 이삭을 낳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손에 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에게는 약속이 있다. 이 약속을 가지는 것이 믿음이다. 약속의 자녀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구나.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지, 나의 어떠함을 붙든다든지 나의 어떠함을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 나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고 나는 가봤자 율법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알면 나를 떠나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한다. 지금은 없지만 하나님이 내게 약속한 것이 내가 살 길이구나, 약속이 살 길이지 내 속에서는 살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사람들은 법을 모르고 다시 돌아갔다는 것이다. “너희에게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밝히 보이거늘 왜 다시 돌아가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돌아가면 안 된다.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나보다 월등하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떨어졌는데 그 학교에 또 원서를 내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우리 반 학생 중에서 1등이 떨어졌는데 중간도 안 가는 사람이 자기가 도전해 보겠다고 가는 것과 똑 같은 이치다. 그것은 가나마나 떨어진다. 2등이나 되면 혹시 모르지만 1등이 떨어졌는데 10등이 가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1등이 해서 안 되는 것을 봤으면 10등 이하는 다 안 되는 구나 이렇게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도 심판을 받았으면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우리가 살 길이 전혀 없다. 우리가 살 길은 약속에 있다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하는 말씀은 약속이었다. 이 약속이 이루어졌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백성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비웃을 때 “저것은 약속이 없는 백성이다.” 이렇게 말한다. 아무 약속이 없으니까 자기 생리적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생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약속을 붙잡고 산다. 하나님 나라도 약속이고 천국도 약속이고 모든 것이 다 약속이다. 지금 우리가 맛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모두 약속이다. 이 약속을 내가 무시하면 내게는 하나님 나라도 없고 천국도 없는 것이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그래서 믿음이 중요하다. 병을 고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믿었더니 병이 고쳐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더 나은 구원이 있어야 한다. 물론 병도 나아야 하지만 이런 것으로 끝나버리면 안 된다. 인생문제가 이런 것으로 해결이 안 된다. 영원한 구원을 위한 약속이 있다. 이 약속을 붙잡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생활이다.
이것이 잘 못하면 허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말씀 없이 믿음만 가지면 허황한 사람이 되고 만다. 공부도 못하는 사람이 일류대학교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으면 그것은 허황한 것이다. 이런 것은 믿음을 아무리 가져도 안 된다. 공부를 안 하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는 분명히 합격시켜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고 해서 합격이 되는가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약속을 한 일이 없다. 하나님은 공부를 안 해도 합격을 시켜준다는 그런 약속은 없다. 그러니까 그런 약속을 믿고 있으면 허황한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미신이라고 한다. 믿지 못할 것을 믿는 것이 미신이다.
그러면 믿을 것을 안 믿으면 뭐냐? 그것은 불신이다. 그러니까 믿을 것은 믿어야 되고, 믿지 않을 것은 안 믿어야 된다. 무조건 믿으면 안 된다. 무조건 믿음만 있으면 다 된다고 하니까 기독교인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무조건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니까 엉뚱한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는 믿을 것을 믿어야 된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믿어야 된다. 그래서 성경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왜 필요하냐면 하나님이 뭘 약속했는지가 있다. 하나님의 그 경륜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뭘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 대한 약속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분이 어떤 경륜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그 약속을 봐야 되고 직접적으로 약속하신 말씀도 있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안 그러면 자기 나름대로 믿어 버린다. 자기 나름대로 믿어버리면 공부 안 해도“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더라”이러면 곤란하다.
신학교에 가면 그런 말이 있다. 시험은 성령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고 안 충만하고 하는 것은 시험 볼 때 아무 소용없다. 시험에는 성령도 무력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으로 낳은 아들의 세계가 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약속의 자녀의 세계다. 영적인 자녀라 말 할 수 있다. 이삭의 세계는 이스라엘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약속을 갖고 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했다. 그 사람들은 그 약속을 굳게 붙잡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역시 이스라엘을 유지하고 있다. 그 약속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잘 못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민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 약속을 믿고 있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안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은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약속을 믿고 있고 좀 허황한 약속을 믿고 있지만 믿고 있다. 약속의 백성 쉽게 말하면 언약의 백성이다.
그 다음 예수의 세계 이것은 하나님 말씀과 그 약속으로 낳은 세계의 마지막이고 종착역이다. 여기 대표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교회다. 예수님의 세계의 결실이다. 예수라는 사람은 이런 결실을 갖는다.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가면 예수라는 세계는 이런 세계로 간다. 그러니까 교회는 예수님의 결실이고 예수님의 세계다.
만일에 교회가 이 땅 위에 없었으면 예수님은 지금 아무도 모를 겁니다. 교회 없었으면 예수님이 어디 가겠습니까!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한 두 사람입니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겠습니까! 수없이 많다. 그런데 왜 예수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가? 그것은 교회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그의 몸이다. 생명의 유기체란 뜻이다. 그리고 그의 비밀이다. 예수의 비밀이다. 우리가 씨 하나를 보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열매가 열리면 그것이 씨의 비밀이다. 보리 하나를 심었더니 보리 하나가 나왔다. 그건 보리의 비밀이다. 교회는 바로 그의 비밀이다. 그러니까 교회 없이는 그 분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다. 모든 실재의 받침목이다. 참 진리가 어디 있는가? 모두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로 말미암으면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된다. 예수 안에서 구속을 받으면 우리는 기둥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반이 확실해진다. 구속은 우리의 기반을 확실히 해준다. 그러니까 진리의 기둥과 터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다. 히브리 기자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는 맏아들로 세상에 다시 오신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다. 일곱 금등대다. 이렇게 말하고 마지막에는 새 예루살렘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난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으로 난사람들의 세계의 종착역이다. 마지막이 새 예루살렘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데 이 새 예루살렘은 우리에게 약속된 땅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땅이 약속된 땅이듯이 오늘 우리에게는 새 예루살렘이 약속된 세계다. 이 약속의 세계가 지금은 없는 것 같지만 우리는 약속의 세계를 믿고 있다. 현재 교회가 있으니까 이 교회를 통해 가지고 우리는 약속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싹이 나면 싹을 보고 결국 결실이 될걸 믿고 있다. 마찬가지로 배추를 심어 놓으면 싹이 두개난다. 그것을 보고 가을에 김장할 배추를 믿고 있다. 김장할 배추를 한 번도 보지 않았을 때는 이것이(싹) 큰 배추가 되겠나? 아무도 못 믿을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늘 농사를 지어 봤기 때문에 두 잎만 나도 가을을 생각하고 있다. 이게 믿음이고 소망이다. 오늘 교회는 두 이파리 일수가 있고, 세 이파리 일수도 있다. 어느 날 가면 떡잎이 다 없어지고 다른 잎이 나올 수 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속이다. 우리는 약속을 믿고 약속을 보고 가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다시 난사람들이다. 원래 있던 그것으로 나를 생각하면 안 고 그것으로 우리를 생각하면 안 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봐도 안 된다. 우리는 그 사람으로 모인 게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모였다. 다시 난사람으로 와 있는 것이다. 다시 난사람으로 알고 다시 난사람으로 만나야 되고 다시 난사람의 세계를 소망해야 된다. 교회가 왜 이런냐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다시난 사람들의 세계를 못보고 다른 세계만 봤다. 그 일차적인 것 그 세계만 보고 그 세계서만 잘하냐? 못하냐? 이것만 보고 있다. 그러면 맨날 봐도 똑같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봐도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다시 난사람의 세계를 알고 나면 바람이 불던지~ 비가 오던지~ 파도가 일던지~ 일지 않던지~ 똑같은 것을 보게 된다. 이 우주 안에는 바람도 불고, 비도오고, 기후에 변동이 생기지만 일정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될 때 다른 사람을 보는 도 안정이 되고 나를 아는 것도 안정이 되고 해서 모든 것이 안정이 된다. 그냥 저절로 평안이 오는 것이 아니고 이 안정이 되어야 평안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약속의 세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느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더욱 바랄 것이다. 이런 말이 나오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다. 예수의 세계, 이삭의 세계, 이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으로 되어진 세계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삭의 세계, 예수의 세계에 와 있는데 이삭의 세계는 결국 이스라엘까지 밖에는 못왔다. 그 이상은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의 세계는 새 예루살렘까지 가게 된다. 이것이다. 기도합시다.
[ 기 도 ]
감사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생래적인 인간으로 그냥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셔서
우리가 주예수를 따라서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는
약속있는 백성이 되게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소망있는 백성이 되게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창수가 날찌라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가 기반을 잡게해 주시기를 원하고,
거기에 우리 인생의 기초를 두게 되기를 원합니다.
거기서 우리가 살고, 거기서 우리가 만나고, 거기서 우리가 찬양하고,
거기서 우리가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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