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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 대립의 사고와 다양체의 위상 사유
류종렬, 22, 02 19(토), 철학아카데미,
토요일(오후 1시 50분), 줌 입장: http://www.acaphilo.or.kr/xe/board_1/1602423
# 정담(鼎談)에 들어가서면서, .
이번 강의 개설은 이항 대립과 ‘달리 사유하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들어가는 이야기로서 몇 가지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구체적인 철학사는 두 달에 한 번씩 제기할까 합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루소, 벩송, 들뢰즈로 이어갈까 합니다.)
## 고민거리의 발단
*(공개강의)좌파 대 우파의 구별 ****
정치적으로 혁명으로 제헌의회에서 프랑스 공화국이 성립한다. 그 의회의 타원형의 자리에서 좌측에 자꼬방 산악파, 우측에 화해파와 수평파들이 앉았던 역사에서 유래 합니다.
그리고 맑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래로 공화국을 수호하려 새로이 등장한 프롤레타리아를 좌파로, 산업화의 수혜자인 부르주아를 우파로, 즉 무산자를 좌파로 자산가를 우파라 합니다.
공동체나 국가에서 철학적으로는 세력들 사이의 형이상학적 관점의 연관이 큽니다. 즉 심층의 지속에서 표면으로 생성과 창발의 사유를 좌파로, 상층의 부동에서 표면으로 표상과 재현을 설명하는 사고를 우파라 합니다.
이런 사상의 배경에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하늘의 영원성과 지상의 변화성에 대한 이원적 규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심층과 상층의 대비에서 빨강과 파랑이라도 합니다.
우리는 철학에서 형이상학적인 이중성의 사고가 지배해 왔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형이상학의 내면에서 또는 기원에서 형상과 정지가 아니라 운동과 지속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 지속하는 내재성의 철학이 좌파의 기원입니다.
이런 의미로 인간 의식의 변천과정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55MLEF)
### 왜 이런 고민거리는 문제제기가 잘 되지 않을까?
* 이항 대립의 사고와 다양체의 위상 사유
이와 더불어 모순을 설정한 논리학의 이항 대립과 다른 실증적 사실들을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철학사 또는 학문 발달사와 연관에 있기에 강의 순서에 따라 등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사실들을 열거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항대립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양태이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밤과 낮(음과 양) 여름겨울(하동, 夏冬): 빛과 그림자로 공통감각으로 다루어지는데, 이는 천문의 순환인데, 동일 원으로 환원되는 것을 착각합니다. 여기서 동일반복과 이질반복이 있는데, 우리는 공통감각으로 구별(차이)하는 이들에게 이질반복(차히)을 당장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설탕물이 녹기를 기다려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교육이 필요합니다.
둘, 요즘 이야기되는 페미니즘과 이에 대립각을 세운 남성주의 사이에는 모순이라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양자관계는 인간 종에서 상부상조의 관계일 것인데, 대립으로 모순관계처럼 대하는 사고에는 어떤 것이 내재해 있는지를 생각해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셋, 계급모순이라고 하는 투쟁(가투)과 전투(사투)는 전장(전쟁)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산업 전쟁 또는 경제 전쟁처럼 몰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공동체 중에서 누군가가 차지하는 몫의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문제제기는 투쟁과 전투에서 이루어지는데, 소득의 불평등보다 자산의 불평등, 토지의 문제에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전쟁을 치르려고 대립각을 세우는 쪽은 누구일까요? 올바른 문제제기에서 해소 방안이 나올 것입니다.
넷, 자연에는 모순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모순처럼 보이는 한 현상이 있습니다. 자석의 북극과 남극입니다. 이런 문제를 보는 시각은 지구의 자전의 속력과 내부의 용암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 운동이 먼저다. - 두 방향의 다른 전자기적 힘을 드러낸다는 것을 인류가 깨달은 것은 200여년이 채 안됩니다. 일상에서 말하듯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공통감각(상식)으로 주장하는 견해에 한 번의 설명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면, 저 많은 종교와 점치는 미신이 난무할리 있겠습니까. 착각을 벗어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란 교육이 필요합니다. 지구라는 자기장은 상반된 힘이 원(둥근지구)을 형성하는 근거일 수 있습니다. 모순이란 이름으로 전쟁을 치루는 것이라기보다, 지구가 조화로운 땅을 생성(변형)하고 또한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섯, 인간DNA와 인간의 세포 속에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전혀 다른 유전정보입니다. 왜 두 정보가 같이 있을까요? 이 생물적 지식이 알려진 것은 50여년이 정도입니다. 인류의 오만과 인류가 주인이라는(스피노자 표현으로 제국속의 제국)이라는 이기심이라는 극치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석가모니는 탐진치(貪瞋癡)를 벗어나는 노력(수련, 점수)을 행할 것을 권했습니다. 현생 인류가 생물학적으로 아는 것, 참으로 적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좀 전에 남녀의 상호보조라는 문제제기를 했지만, 생명체에서 서로 차이 있는 DNA를 조화롭게 총체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오랜 과정이었을 것이라 여깁니다. 인간 종은 원숭이와 갈라진 과정에서 거의 700만년 정도인데 비해, 인류사에서 여성과 남성의 대립은 2천5백년의 형이상학에서 왔다고 봅니다. 당시의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다룰 수 없었던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면서 해결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그 속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에 기인하며, 이를 합리한 것은 탐욕의 광기일 것입니다. 이런 이기심의 적용과 실용에서 탐욕과 탐음이 들어섰고, 이를 믿는 자들의 무모함이 타인에 대한 분노처럼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왜 내 말을 안듣나? 이는 지배의 논리의 기본이었습니다. 이에 분노는 적은 양의 아는 것으로 많은 것을 해결하려는 부당주연의 오류이기도 하고, 근원적으로 완전히 아는 것이 있다는 인간의 착각에서 만들어낸 악순환(순환논증의 오류)입니다.
세포핵의 DNA와 세포질 속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다름(차히)에도 함께 공생할 수 있는 길이 있었듯이, 여와 남 사이에 차이는 이에 비해 사소한 것임에도 대립과 모순처럼 조장하는 인식의 이유와 과정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류가 지혜롭게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류는 현재에도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거의무한정하게많습니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는 것을 거의 무한정하게 이분법적으로 수집하는 것입니다. 그 수집도 총체적 자연의 일부이며, 그 일부가 자연보다 좁게는 지구, 생명체를 판단하고 지배할 것으로 여기는 그 사고가 무엇을 탐욕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탐욕을 욕망이라 부르는 것이 위계제도의 일부입니다.
달리 사유하기, 달리 말하기에서 “같잖은 이야기들”이 사실들의 과정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함께 공감하는 조화로운 삶은, 공유의 면이 대립의 면보다 훨씬 더 넓고 무한정하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도 함께 가면서 준안정상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 듯이, 남북의 허리가 잘린 대립적 사고에서 벗어나 조화로운 총체적 사유로 가는 길을 지혜롭게 마련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55M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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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출발은 경험:
(2022 02 03, 입춘(立春) 전날. - 2022 02 16.)
사실 이 강의는 나의 벗 권용원과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되었던 것인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 아픔이 있다. 이를 풀어가는 방식을 인도에서 싯달다는 사고(四苦)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서양에서는 난제(aporie)가 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변역(變易)이 있으나 ‘천하’는 평온과 안정을 요구하다고 한다. 현자든 지자든 이런 문제들을 해소하거나 해명하고자 노력하였다고 본다. 나로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읽어보고 숙고해 보았지만, 영혼 속에는 무한정하게 많이 있지만 입말로 또는 손글로 쓰기에는 부족하여 게을러서, 더듬거리고 또한 말도 안 되는 글을 쓴다고 핀잔을 받기 일 수였다. 그래도 어벙거리며 같잖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런 점수의 노력과 학습이 드라마 같은 과정이라 여기고, 그 과정이 기쁘고 즐거움(不亦說乎, 不亦樂乎)이었던 같다. (55MKC)
산다는 것이 먼저다(primum viv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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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간(出世間), 현자는 세상에서 뜻을 펼친다고 한다고 들었다. 간(間)은 사이의 뜻일 것인데, 뜻을 펼치는 것은 천문과 지리를 통달해야 한다고들 한다. 간단하게 전래로서 천문의 수는 60간지의 60진법이고, 지리의 수는 64괘의 2진법의 수이며 활용에서 10진법을 이용한다. 하늘의 수와 땅의 수가 서로 사맛디 아니한다. 고대 그리스의 3대 난문제는 이 관계를 해명할 수 없어서 정확성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원둘레를 직선으로 환원은 해결할 수 없는 난문제로 남았다. 2500여년이 지나 19세기에 둘 사이는 환원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무한’ 개념의 다양성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모하다. 하도(10수) 낙서(9수)에서부터 아마도 천문과 지리의 수가 다름을 알아차렸으나 그 기호를 기표화하고 기의로서 해설과 주석을 다는 쪽으로 기운 것 같다. 천문과 지리의 통달(공시태든 통시태든)은 지자와 현자의 과제였다는 것 같다. 그 둘 사이에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했을까? 체제를 세우고자 또는 변역(變易)의 생성하고자 했을까?
천문의 체계와 지리의 차계의 차이를 개별과학의 발달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문제에서 둘 사이에 합의로서 천문과 지리의 동등한 관계 또는 대등한 관계 임에도 인간이 지식 또는 통찰이 모자라서 잘 모르는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이런 자연에 대해 해명 또는 해석하려 하거나, 자연을 근원으로 삼아 이유와 근거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죽 있어왔다. 동등을 평행으로 또는 부대현상으로 여기는 쪽은 근대 인식론자들에게서 작업일 것이고, 형이상학에서는 벩송이 두 개의 방향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를 제도 속으로 옮겨서 설명한 이들은 들뢰즈/가타리 일 것이다. 두 방향 중에서 인민의 방향은 심층에서 상층으로 이며 민주제도이고, 상층에서 심층으로 방향은 명령의 체계로서 참주(황제)제도이며 제국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제국의 타파는 인식론의 전복이 아니라 (형상)형이상학적 사고를 (자연)형이상학적 사유로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층의 실재성으로부터 표면의 현실성으로 나가는 자의식의 발현, 창발이 탈주선(용출선)을 만들고 되기(devenir)를 실행하는 것이라 한다.
아마도 제의[의례]의 방식이 만들어지는 신석기 후반에서 참주는 형성되었을 것이다. 전쟁의 설화에서 만들어진 상층의 유일한 힘과 권력에 대한 전승은 신들의 이야기로 또는 영웅의 설화로서 이어지고, 그 시대를 태평천국의 시대로 또는 이상향의 시대로 인간의 심성(가슴)속에 전승되었을 것이다. 이 전승을 철떡 같이 믿는 것은 기호의 기표화에서 일 것이며, 적어도 7세기경에 입말이 쓴글로 민중들에까지 전승되기 시작 했을 것이고, 이런 시대의 현자는 전승을 올바로 또는 정확하게 전달하는 소임을 담당했으리라. 그런데 이런 7세기 이전에도 전승의 기호들은 여러 곳에서 여러 방식으로 실행되었으나 기표로서 기의를 생산하는 과정이 결여되어 전승되지 못하고, 현재로서는 독해되지 못하여 유물로서 잔존할 뿐이다. 이 유물의 잔존에서 인류의 삶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정의 계속성을 아직은 찾을 수 없다. 인류는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는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왔다는 것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우여곡절의 과정이, 즉 분류화되고 정돈되어 규칙화되면서는 과정이 시간지속의 두께와 강도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긴 유인원의 시대 신석기 청동기 철기 규소시대에 이어지는 속도의 변화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 속도만큼이나, 인민이 자각 속도가 빨라지고, 인민의 자연권은 응집평면으로서 밀도와 강도를 가지고 확장되고 새로운 되기로 나가고 있다. 이런 과정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21세기가 아닌가. 규소의 시대가 70여년이다. 이 엄청난 변화과정에서 3세대가 같이 겪는 뒤엉킴의 과정을 겪고 있는 시대이다. 철기의 시작에서 제자백가 시대는 지자와 현자들이 새로운 제도와 체계를 정리하려고 했다면, 규소의 시대의 시작은 가상과 현실(우화와 사건)이 섞여있는 복잡계이다.
이런 과정에서 실재성이 현실화되는 되기의 노력이 우선 필요하다. 되기는 시간-지속이다. 하늘의 수에 관계한다. 그리고 출세간에서 사람들 사이의 상호부조가 절실하다는 검을 알고 있다. 교육이 필수적이다. 그러고 나서 운용의 방식으로 지리의 수가 요구될 것이다. 이는 전쟁의 전장이 되어서 안 된다. 가투(투쟁 lutte)과 사투(전투 combat)가 있을지라도 전장을 만들어서 안 된다. 살기 죽기가 아니고, 살기 즐거이 살기, 새로운 것 되기로 나가야 할 것이다. 잘려진 허리의 아픔을 감추고 죽기 살기로 가려는 방식에는 탐욕과 탐음이 끼어든다. 탐모치(貪謀痴)를 벗어나는 것도 교육이다. 철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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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가 불평등의 심화에서 찌들고 파라노이아로 치닫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단지 19세기 산업사회의 발달에서 어린애를 탄광에 보내는 사악한 무리들에 분노하며, 맑스가 자본론(1876)을 썼다고 해서, 세계가 사회주의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만은 아니었으리라. 그의 작업은 생산력이 높아지고 잉여가 넘치는 사회에서 불평등의 심화를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한다. 잉여는 그 당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으로 맑스주의자들은 말한다. 고대 시대의 철학 사상 또는 형이상학이 도래하는 시기에도 잉여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분업과 축적이라는 신석기 초기 문화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세계사에서 기원전 6-5세기에 철기의 대중화에서도 잉여가 있어서 사유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 중에서 수도자를 자처하는 집단이 갠지스강 지류에서 발생한 것은 흥미롭다. 이 집단의 지도자였던 싯달다는 세상의 공평과 평안을 위해 탐진치(貪瞋癡, 탐욕, 분노, 치기)를 버리라고 설교 했다는데, 이 개념이 21세기 규소의 시대, 즉 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瞋)을 잘 이해되지 않았다가, 벩송의 플로티노스 견해 설명에서, 삶에서 욕심과 무모함(audace 無謀)이 오류를 범한다고 하는 글을 보면서, 탐모치(貪謀癡)가 세상을 흐려놓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극우파와 우파의 정치놀음(도박)을 하는 현세태가 탐모치에 허덕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 사이에 비판, 반대, 비난, 분노의 입말은 거칠어져서 중생들이 각각이 자기 경계 안에서도 불안하고 두려움에 빠지고 있었을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철학자들은 모순을 피하기 위한 노력으로 분석도 하고 또는 다른 가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창과 방패를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어느 쪽이 부러지거나 깨지는, 둘 다 못쓰게 되는 현상은 분명히 있다. 모순이라는 극한 대립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하는 별종(l’anomalie)들도 있다. 아마도 삶의 과정, 태어나서 사라지기까지 과정을 통째로(종합, 직관) 생각하면 다른 사유태도, 즉 별종의 태도가 여러 방식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논리적 사고와 더불어 통사유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통사유는 삶의 과정에 대한 음미이기도 하다. 태어나서 사라지기까지 삶을 공자는 자신이 요약한 자서전처럼 15세에 지학(志學), 30세에 이립(而立), 40세에 불혹(不惑), 50세에 지천명(知天命), 60세에 이순(耳順), 70세에 종심(從心)이라 한다. 모든 삶에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일생의 과정은 생명체로서 인간의 자연(la nature, 본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누구나 동일하게 겪는다는 것은 아니며, 공자는 과장된 표현이기도 하지만 ‘주유천하’(중국일부)를 14년간, 들뢰즈 표현으로 노마드 14년을 지났을 때 쉰여섯이라 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천재들은 자연이 일찍 데려 간다고 하는 속설처럼 젊은 나이에 이순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정을 일반화하여 기표(퍼스의 인덱스)로서 기호화 할 수 있듯이, 과정의 반복은 누구에게나 적용가능하며, 과정 동안에 노력 또는 점수(漸修)는 필수적이다. 역사에서 다음 반복이 웃음거리라고 할 때, 동일반복이 어리석음이라는 의미일 것이며, 삶에서 매일, 매달, 매년을 거치면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로서 이질반복도 있으며, 이를 통해 별종은 언제나 용출선(탈주선)을 생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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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철학을, 삶을 통해, 배우고 익히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런가? 공자는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하지 않았던가? 산다는 것, 배우고, 반복하고 새로이 반복하고, 즉 이질반복하며 익히며 사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물체를 다루고 익히며 이롭게 하는 일은 여전히 즐겁고 흥미롭다. 이런 이야기로서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옆에서 지켜 본 퀴레네 학자들의 생각은 소크라테스의 삶의 태도에다가 세상을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자는 소박한 유물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을 첨가하였다. 이를 이은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소박한 유물론자가 자연을 다루면서 또는 사회에 합의와 일치를 찾으면서, 어쩌면 고요하면서도 명랑하게 사는 방식을 찾으면서, 소크라테스가 평생 동안 추구한 삶이 즐겁고 흥미롭게 살아갔듯이, 고요한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게 과정을 살고자 했을 것이다.
싯달다는 궁정에 갇혀서 또는 제도와 체계의 경계 안에서 평온과 안락을 누렸으나, 세상사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6년 동안 생고생하며 고민 고민 끝에 알아챘다고 하면서, 민중의 언어인 팔리어로 이리저리 노마드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삼십대 깨달음 이후에 여든에까지 여러 사람들을 만나 – 어리석은 삶을 사는 자들에게 나도 한때 그들처럼 살았다고 말하면서 – 그들 각각의 삶(영혼)에 맞게 하는 이야기가, 그 각각을 만난 만큼이나 많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과장하여 하늘의 별만큼 만은 이야기라 하고, 후세에 따르는 자들은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의 기원적이고 깊이 있으면서, 누구에게나 근본(la raison, 이유)로서 제시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뭣꼬? 소크라테스가 저자거리를 노마드처럼 돌아다니며 세상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듯이, 싯달다에게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으리라. ‘이뭣꼬’. 누구에게나 삶은 있다. 싯달다도 그 삶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뭣꼬는 무수히 많은 응답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런데 깨달은 싯달다는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실행하면서 각자에 맞게 이야기로 할 수 있었기에, 후세에 그를 부처라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이야기의 발단을 염처경에 견주어서 보면, 아마도 기원에서 과정의 이야기는 신수심법(身受心法)에 해당할 것이다. - 이런 생각은 내 맘이지, 누가 알아야 한다고 강제하거나 주입한 것도 아니고, 체계와 논리로서 설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신수심법(身受心法)이 플라톤의 국가(폴리테이아)편에서 이데아를 설명하면서 선분의 비유에 닮았다는 것이다. 우선 선분의 비유에서 그림자, 물체, 추론, 이데아의 넷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림자를 통해 물체를 이해하듯이 수학적 추론을 통해 이데아를 인식한다고 한다. 이런 두 단락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는지 또는 과정으로 설명했는지는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설명의 방식은 다르더라도 신수법신의 네 과정을 선분의 네 단계와 유사하게 대입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지속성으로 보는 플로티노스의 견해를 보면, 플라톤의 네 단계를 마치 신수법신처럼 과정으로 설명하고, 게다가 영혼의 전개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설명방식을 택하면서도 달리 생각한 벩송에 와서 보면, 신체의 운동을 인식하는 지성과 의식 내부를 재인식하는 직관이 두 개의 다른 방향이라 한다. 아마도 플로티노스를 알았던 스피노자는 이 두 인식을 두 가지 속성처럼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신수심법이든 선분의 비유이든 사유하는 틀(체계)이기도 하고 과정일 수 있다.
이에 비해 유가(儒家)의 주역(周易)에서 기표에 대해 기의(signifié)를 설명하는 여러 해석들은 태극, 음양, 4상, 8괘, 64괘의 방식은, 수의 분열의 과정상으로 보아, 순수 2분법적인 갈래치기(le dédoublement)의 연역적 분석의 묘미일 것이다. 여기에서 4상은 불교의 신수심법이나 플라톤의 4선분과는 다르다. 중국이 음양을 나눌 때도, 음양은 모순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서양에서도 이항 또는 양자에 관한 논의에서, 원인 또는 기원의 의미로 다루기도 한다. 말하자면 계절은 2항이 순환관계이고, 남녀는 상호보조 관계이며, 존재와 무만이 모순관계이다. 중국이 음양을 모순이라기보다 인륜에 비추어서 연관관계로 보아, 기의의 설명(사辭, 익翼)으로 간 것은 “천하의 평안”이라는 대과제가 선전제로서 은연중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에서 ‘격물-치지-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은 불교의 신수신법에 비교할 수 없을지라도 네 단계라는 점은 유사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그 다음 문장의 네 단계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연결하게 되면 앞의 4가지 대 뒤의 4가지로 8괘에 준해서, 기의를 해석하는 태도에 닮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중국도 4단위의 설정으로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인도, 그리스, 중국에서 이와 같은 논리적 사고의 유사성은 신체를 통해 대상을 다루는 방식으로 상식적 기표에 대한 해명이 우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기표를 기의로서 여러 해석과 주석으로 쓴 글을 남기에 되지만, 그 기표의 발생은 여전히 철학자의 관점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세상은 실제로 1, 2, 4, 8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게다가 싯달다도 여러 설법을 통해 4가지는 여러 가지치기로 분류하고 확장하였으며, 서양철학도 선분의 비유 이상으로 여러 갈래의 기표를 창안하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철학자들이, 없애지 못한 또는 버릴 수 없는 또는 해결할 수 없는, 다른 체계와 기호들이 자연(본성)계 안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자각자들을 형이상학자 또 선구자(예언자가 아니라)라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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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분류 방식은 어째거나 2항이라는 것을 거쳤다. 2항의 문제를 꼭 4항관계로 나갈 필요는 없었을 것인데, 4항으로 가는 길은 지상의 배치에 관한 것과 연관이 더 클 것이다. 그러면 2항 다음으로 3항으로 가는 길도 있을 것인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경험적으로 둘 다음 셋이라고 하는 수의 나열은 일반적으로 지면에 선을 그어서 세고 헤아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를 3으로 나누는 것은 선위에 것이 아니라 각도 또는 원주의 선분에 관한 것이다. 하늘을 12등분하든 시간을 24등분으로 하든 천문에 관한 것이다. 게다가 1/3은 답은 산술적 계산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매우 유용한 면이 있다. 즉 8/24은 하루를 8등분하여 삶에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다. 원주(원둘레)를 직선의 수로 대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잘 알고 있었던 난문제(aporie)였다. 제도 속에서 삼분할로서 로마 공화정에서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3분할을 3위격에 적용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셋 중의 하나는 상위격이 된다. 사람들은 또다시 일의 분할에서 2라는 사고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3항 논리는 이항논리의 지배 또는 코드 속에 끌려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천문의 수로서 3분할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셋이 각각이 성립하는 것이기도 하고, 천문의 전체를 여럿으로 나눈다면, 하루를 12시간(자시에서 자시까지), 달로 치면 12달이 되고, 날로 치면 360일(물론365+1/4일)이 된다. 이런 원환의 순환이 인간의 삶에 매우 소중하며, 구체적을 일생을 살아가는 양식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적용하였다. 그럼에도 1/3 + 1/3 + 1/3 = 1인데 비해 0.333… + 0.333… + 0.333… = 1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 양자 사이에는 천문과 지리의 차이가 있다. 기원후 70년경에 파트모스의 한 지식인이 666을 악마로 여기는 쪽이 얼마나 위계질서를 갖고 싶었는지를 알게 한다. 그럼에도 천문의 수의 유용함은 아랍의 전승에서 17마리 낙타를 유산으로 남긴 아버지가 아들 셋에게 1/2, 1/3, 1/9로 나누어 가져라고 할 때 10진법으로 나눌 수 없다. 한 이맘이 한 마리의 낙타를 몰고와서 18마리를 되었을 때, 맏이는 9마리, 둘째는 6마리, 막내는 2마리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윤구병은 「0과 1 사이(2015)」이란 논문에서 인도의 공(空)의 사상이 거의 무한임을 설명하려고 하며, 「논리 연산 가늠자(Operater for logical Computation)」(2019년, 12월 21일 발제문)에서는 0-9 사이를 산술적으로 설명한다. 1/9=0.111…이며 8/9=0.888…이며 9/9=0.999…이듯이 0/9=0.000…이라 한다. 0 속에도 그냥 빈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어한다. 이런 논법은 천문의 수에 대한 설명의 한 틀일 수 있다. 그러면 그 퍼져가는 점점점(…)의 무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공통감각에 기초할 수 밖에 없는 사고에서는 불합리 하지만 달리 있음을 예고 또는 암시 정도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좀더 달리 생각하면, 상식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현자들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발생적으로 과정상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면, 지상의 수와 다른 세계가 우리의 머리속에, 기억 속에 또는 인연연기 속에 있다는 사유를 가질 수 있다. 이 통시적 사유의 실재성을 상식으로 설명하기는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고 설명하기 보다 어려운지 모른다.
2항이 아니라 3항이 경험적으로 또는 내재성 성찰로서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밖으로 내보이기는 어렵다. 또한 바깥에 있는 현실성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이다. 이 내재성의 실재성은 현자들은 그 실재성이 현실의 표면에서 왜 환원되지 않느냐는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유에서 정확성을 찾으려는 고대 그리스 사유는 하늘에서 원의 곡선이 지상에서 직선으로 환원되는지를 고민했고, 그들은 정확성으로서는 해결되지 않은 3대 난제(aporie)를 남겼다. 원 둘레는 직선이 되는가? 원의 크기와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의 넓이가 있는가? 어는 삼각형이든 정해진 각도를 가진 꼭지점에 밑변으로 3분할이 가능한가?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공의 체적과 같은 각을 가진 다각형의 체적이 있는가를 난문제로 하지 않았고, 플라톤은 정다각형 5개가 공(구球) 속에서 마치 원소들들처럼 있어서, 서로 작용하여 다양한 현실세계를 설명하는 요소들로 삼았다. 그럼에도 이 세가지 난 문제들은 19세 후반에서야 비유클리트 기하학에서 달리 문제제기를 함으로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항의 체계와 3항의 체계 사이의 환원 불가능을 알기 전에도 이항체계가 항상 우선하고 또한 상위 지식(인식)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상위 생각에는, 벩송에 의하면 형상 형이상학이 지배하는 한에서 이라고 한다. 그러면 2항체계가 3항체계를 포섭 또한 유적으로 포함관계에 있지 못하다는 19세기 비유클리트 사유가 들어왔다고 해서 2항체계가 무너지느냐하면 그렇지 않고, 인식체계상으로 상위를 그대로 유지한다. 그 유지를 수리와 언어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쪽에서, 사고의 대상과 언어의 대상 사이의 일치 또는 평행을 또 다시 끌어오게 된다. 이런 사고의 바탕에는 정지가 학문 또는 인식에 필수불가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필수불가경이 편리와 유용에 의한 인간의 도구이며, 지성이 먼저 있듯이 통일성이 먼저 있었다는 목적론적이고 결과론적인 사고를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인간의 오만이 인간의 이기심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벩송이며, 이런 사고는 스콜라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한다. (55M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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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의 수와 지상의 수, 천문의 기하학과 지상 산술학 사이에 환원은 불가능하다면, 도대체 어떻게 교감, 공감, 합의, 계약으로 나가, 인간이 사는 토지 위에서 공동체에서 자주와 자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도 천상의 기하와 지상의 수 사이에 공통성을 찾기는 어렵다. 둘 사이에 있는 인간이 이를 종합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통일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둘 사이에 새로운 하나, 인간은 우발적 사고(accident)의 산물처럼 보인다. 열열학과 생명진화의 논의가 나올 때면 사고라기보다 아자르(hasard)라고 하고 싶어 한다. 예견과 예언은 놀이(le jeu) 또는 놀음(le pari, 노름)의 각 양식들처럼 보인다.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의 고르기아스는 아예 미래를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벩송 식으로 읽으면 과거의 총체(기억)도 알 수 없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현재의 삶에서 어제와 이제와 아제의 덩어리에서 그에게 진솔한 삶은 무엇일까? 카이로스(Kairos) 즉 때와 장소에 맞는 현실화(실현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들 각각은 자연의 필연적 과정의 산물이다.]
이런 사유에는 이항 대립(지상)과 삼항연대(천상)의 운수(la chance) 사이에 정합적 통일성도 결과적 절대성도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경우이다. 행운(bonne chance)이든 불운(mal chance)이든 현실은 여러 다양한 개별자들과 계열들이 엉켜있는 덩어리와 같다. 겉으로부기에는 서로 달리 모습을 띠거나 다른 계열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근원과 기원에서 보면 자연이라는 덩어리에서 – 인간이 안다고 여기는 우주 덩어리 – 기나긴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고 생성된 사물들 또는 개별물들이다.
이항 대립이 전쟁의 씨를 가진데 비해, 3항의 연대는 생성과 세분화라는 다양성을 생산한다. 이 이항에서 다른 하나가 현상적으로 또는 과정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여기면서, 우리는 그 현존자를 우리는 별종(une anomalie) 또는 용출선(la ligne de fuite)라고 부른다. 인간은 이항대립의 산물이거나, 삼항으로서 생성했다는 가설을 벗어나서, 인간이 스스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천문과 지리의 이용자이며 발현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다.
삶의 하루는 집을 나서고 일터에서 일하고 되돌아가는 반복적 과정은 지리(토지, 영토)에 연관이 깊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루라면서 해가 뜨고 지는 경과에서 또는 8시간으로 간주하는 노동이라는 것은 지리라기보다 천문이다. 천문이 삶을 잠정적으로 내재적으로 규정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좀더 들어가 보자, 8시간을 일한다고 해서, 기계처럼 줄곧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점심을 먹고 또한 중간 참이라는 이름으로 휴식도 한다. 이런 삶의 양태에서 중간에 음식을 준비하고 나르고 하는 다른 노동을 생각하면서 산술적으로 계산해야 한다. 한 건물을 짓는데, 벽돌과 목재를 다루는 석공과 목공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음식을 장만하는 식당도 그리고 재료를 제공하는 공급자도 필요하다. 어느 그림에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는데 재료를 준비하는 작업장이 짓고 있는 건물의 크기보다 더 넓은 것 같았다. 왜냐 하니까 나르는 마차 또는 말들의 터(주차장)가 있어야 하고, 건물 공사장의 인력에 필요한 먹거리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르는 공급자들뿐만이 아니라 말들이 먹이를 위한 건초간도 말들의 마굿간도 필요하다. 그러니 짓는 건물의 높이만큼이나 수평으로 넓은 터를 필요로 하다. 그러면 그런 계산을 천문의 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측지의 수로 계산하여 필요와 공급을 순서대로 해야 본 건물을 지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거대 건물의 건축만큼이나 군대의 이동도 계산적이어야 할 것인데 지상(측지)의 수로 계산되어야 한다. 먹거리(병참)의 길이가 길면 전쟁의 속도가 느려진다고 병참이 없는 전쟁을 한 전략가는 징기스칸과 나폴레옹이라 한다. 징기스칸의 성공에 비해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점령했을 때 먹거리를 다 태워버린 빈 모스크바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이항과 삼항 사이에 쓸모와 전개에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또는 다른 활용에서 각각은 그럴듯한 명분을 갖는다. 남북이 갈려진 상화에서 각각은 이항의 대립관계를 앞세우면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전쟁으로 치닫는다. 삼항으로 사유하면, 문제제기가 달라진다. 서로 간에 합의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합의에 이르기에는 교감, 공감, 일치를 할 수 있는 내재적 공통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될 때 가능하다.
이항의 모순은 전혀 다른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사고의 극한에서 이루어진다. 존재와 무. 삼항의 사유에서 그런 모순은 없다고 한다. 박홍규의 견해를 빌려서, 이항 대립을 운동과 정지의 대립으로 놓고, 이 둘을 함께 사유한 철학자를 플라톤으로 놓을 수 있다. 플라톤에서는 사유의 전개는 그래도 상층의 ‘선의 이데아’가 중심의 원리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에서는 3가지 논의 방식이 있으며, 그 세 가지 사이의 산술적 계산이라 기하적 비례가 아닌 3의 조화를 사유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플라톤을 삼위상의 철학자에 배치할 것이다. 그런데 심층의 일자(통일성)이자 모든 것을 내포하는 다양성(다양체)에서 출발하는 방식을 고안한 플로티노스도 3가지를 기준으로 하였다. 벩송은 이 세 가지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왔다고 하는데, 기원적으로는 철학사에서 또는 인류의 사유의 발전사에서 이루어진 것이리라. 즉 기원후 2세기 중엽에서야 인류가, 심층에서 가지치기의 사유를 갖게 되는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마도 인도에서 흘러온 불교 염처경의 생성, 수련, 과정, 성취라는 흐름도 관여했으리라고는 생각이 든다.
서양에서 이항대립과 삼항조화의 사유가 아테네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벩송은 철학사에서 “사고(accident)”이라 한다. 나도. 이오니아쪽에서 오는 동방의 질료(자연)론과 엘레아 쪽에서 서방에서 일자(존재)의 논의가 마주치는 곳이 중간 쯤되는 아테네 이다. 그러나 지리적 중간이라기보다 제국의 참주(황제)와 싸워서 이긴 그리스 반도의 합일점이었다는 것이다. 천문적이라기보다 지리적인 요소가 보다 중요하게 작용했으리라. 플라톤의 저술에는 그 지리적 환경(영토)적 사유가 먼저보이고 나중에서야 천문적 통합 또는 재구성이 필요했으리라. 티마이오스편은 세계의 형성 또는 우주생성론만큼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영토(지리)상에서 개별자들의 생성과 전개를 탐색할 수 있다. 플라톤은 천문과 지리의 연결성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존재론의 일자에서 다자의 ‘충분이유율’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자연에서 출발하지 않아서, 개별자들의 충분이유를 찾기보다는 제도의 완전성 속에서 개별자들의 삶을 규정하려 했을 때, 플라톤은 법률을 썼다. 그러한 제도가 펼쳐지는, 중국식으로 평천하의 왕도가 펼쳐지는, 구체적 영토(지리 측면)를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설명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후기 사유는 정태적 사유의 전개로서, 내가 보기에는, 우주발생론이라기보다 우주론의 복사본으로 소우주론을 전개하려 한 것 같다.
천문과 지리의 조합의 불균형적이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깊이 사유하는 현자들은 알았을 것이고, 이를 지리에서 환경에서 과학적으로 정확성을 갖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학문은 지리적 측면으로 종합되고 통일되기보다, 천문적 측면으로 세분화되고 각각의 학문으로 고유성을 갖는 영역의 발달로 나갈 것이다. 19세기에 와서야 크게 보아 수학(천문학), 물리학(화학), 생물학(사회학), 생리학(영혼학)으로 각 영역이 자기 위상을 차지한다. 위상은 셋이 이라기보다, 다양체이다. 간단히 넷으로 정리한 것도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 비추어서 설명한 것이리라. 수학만 보아도, 산술학, 기학학, 지수학(로그), 해석기하학, 미분학, 군론, 비유클리트기하학, 확률론, 무한론 등 각각은 각각의 위상이 있고, 오일러가 말하듯이, 한 문제제기를 풀 수 있는 방식이 수학적으로 50가지가 넘는다고 하듯이, 위상들은 각각 다르다. 이런 이야기를 스포츠, 예술(음악, 문학, 회화, 조각 등)에서 더 많은 위상들을 전개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양체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 벩송의 다양체 개념이 수학에서 온 것이라고 할 때 당연히 비유클리드 기하학이지만, 벩송의 다양체의 개념은 지수론에서도 찾을 수 있고, 보이지 않고 잘 느껴지지 않지만 살아있는 한 실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영혼(기억론)에서도 생명(유전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항대립의 사고에서 약간만이라도 벗어나면, 허리가 잘린 우리 남북문제의 답을 찾기보다, 올바른 문제제기에서 그 이항논법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왜 남은 북을 적으로 삼는가라는 문제제기가 이항대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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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은 존재와 무의 사유에서 시작하여 전쟁을 유발하는 모순관계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천문에서 밤과 낮은 모순이 아니라 교대관계이다. 동양에서 음양의 대립에 양이 실재하면 음이 무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런 생각은 천문의 수에서 온다. 그리고 삶에서 태어나 살다가 떠난다에서 삶과 떠남은 이항 대립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겪는 모든 지상의 개별물들의 것이다. 영원이라는 개념이 하늘의 별이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다는 데서 왔다고 하듯이, 지상에서 생성, 생성, 전개, 소멸은 당연한 과정이며 여기에 시간의 의미를 붙이며 하늘의 수를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 하나가 이기고 다른 하나가 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정복(과 식민)의 논리, 전쟁의 논리라는 것이다.
각각이 서로 관계를 맺을 때 성의 관계를 일단 관여하지 않는다면, 사람 대 사람은 먹고 사는 행위에서 지상의 수이다. 대립도 있고 경중도 있고 우선도 쓸모와 무용도 있다. 그렇다고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생태계에서 바이러스 없애야 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까? 이런 인간이 오만이 종교가 아니라 정복과 전쟁을 뒤에 감추고 사고하는 것이다. 이런 오만과 광기(파라노이아)가 탐욕과 탐음을 부추기고, 무모하게 자기 아닌 타자를 멸하자고 들 하며, 과학과 기술로 또는 종교적 신앙심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들 한다. 이 오만과 광기 뒤에서 탐진치의 어리석음이 있다. 어리석음을 감추는 것은 과감한 것이고 무모하게 전쟁을 거는 것이며, 전쟁의 결과에서 탐욕과 탐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항 대립이 사고가 얼마나 거칠고 전쟁의 사고인지를 깨닫게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 어려움을 일상에서 습관과 상식으로 삼는 사고이며, 위계적 사고, 가부장적 사고(filiation)가 참주제와 황제제를 옹호하고 있다. 이 뒤에는 제국(자본)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삼신론(la trinité)자리 잡고 있는데, 이 삼위격은 위상적 사고와 달리 대립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하는 둘이 있고 그 위에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정지에서 운동으로의 사고.
새로운 세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에 대한 저항과 봉기에 있다. 르네상스가 그러한다. 르네상스에 종교개혁이나 인문학자에게서 보다 여성이었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글로 남아있기 보다 그림과 도판으로 남아서 여성주의는 삼신론의 배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하는 짓이나, 기독교 목사가 광장에 나와 빤스내리라는 이야기를 하는 말투가 성행하는 21세기에도 삼신론의 사고를 벗어나 삼위상을 넘어서 다양체 사유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삼신론 사고에서 하늘나라를 믿는 자들은 하늘나라가 아름답고 충족한 나라라서 빤스가 필요 없을 것이다. 올바른 문제제기는 다른 문제제기의 답을 주는 것이라기보다 해소한다. 천국에 빤스 입고 있던 벗고 있던 그것은 현실에서 삶의 문제가 아니며, 천국의 티켓을 사려고 십일조를 내며 교회에 모이는 자들의 사고이다.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며, 혹시 그 인간에게 중요점이 있다면, 가버린 인간을 추억하며 기껏해야 살아온 그의 과정의 몇 가지가 인류의 생장과 전개에서 얼마나 필요했는지를 감사할 따름이다. 다양체의 각 부분에서 그들의 이름을 19세에 이르기까지 공통교육을 받는 자들의 입에 매년 오르락내리락한다. 내년의 19세 청소년은 라브와지에와 라마르크를 입에 올릴 것이고 세월 속에서 다시 입말을 올리지 않아도 기억에는 남아있다. 무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다양체가 성립한다. 없어진다고 할 때 슬그머니 존재와 무라는 이항대립이 들어서며, 투쟁과 전투를 넘어서 전장을 불러와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허리를 잘라놓고 투쟁(가투)과 전투(사투)를 막으며 전장을 없애자는 평화조약을 거부한다. 언제나 전쟁을 일으켜 너희들 박살낼 수 있다는 제국은 이 땅의 인민들이 죽거나 살거나 관심이 없고, 탐욕과 탐음이 크게 동하면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땅에서 그런 제국의 사고에 동의하는 이항대립을 계속해야 될 것인가를 사고가 아니라 사유해야 할 것 같다.
달리 말하기, 달리 살기로서 다양체의 사유.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노력하며 실행하는 한 작은 방식이다. (55MKE)
(초고11:36, 55M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