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방언의 의미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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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의 뜻과 목적>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은사는 그 종류가 매우 많다. 은사(恩賜)는 헬라어로 카리스마(χ?ρισμα)인데 은혜 또는 감사라는 뜻의 카리스(χ?ρι?)에서 파생된 말로서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며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한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영어에 유입되면서 지도자의 절대적인 권위라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옛날 예언자들이 예언을 하거나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압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다.
아무튼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사 또는 주님의 은사와 같은 말이며 결국은 주님의 능력의 나타남이다. 주님의 능력은 주님을 영접하여 모시고 있는 성도에게 각양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카리스마인 것이다. 따라서 카리스마는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발현되는 주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은 자신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주님의 능력인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서 골고루 나누어주시고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런데 카리스마의 특징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고전 12:11)에 따라 각 사람에게 여러 가지 형태로 주신다고 하는 것이다. 즉 카리스마는 사람이 원함으로써 구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행 8:20)이며,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셨을 때 우리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각양의 카리스마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 모두에게 각양의 카리스마를 주셨건만 사람들은 카리스마 중에서도 가급적이면 신비스런 능력을 사모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자신에게 주신 카리스마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리스마의 종류가 수 없이 많지만 주님의 능력은 모두 같은 것이다. 모든 카리스마는 한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며 주님은 한 분으로 동일하고 주님의 모든 능력 또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카리스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라는 뜻이므로 만일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은사가 있다면 매우 잘못된 것이다.
<방언이란>
은사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은사가 방언의 은사이다. 방언은 성경(고전 13:1)에 의하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사람의 방언(Dialect)은 헬라어로 디알렉토스(διαλεκτος)라고 하는데, 오순절 때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 것(행 2:4)으로 분명한 언어(Language)이다. 반면에 천사의 방언(Tongue)은 헬라어로 글로싸(γλωσσα)라고 하는데 혀(Tongue)라는 뜻이며, 사람의 언어가 아니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이며, 개인적으로 자신과 하나님께 말하는 방언(고전 14:28)이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두 종류의 방언을 비교하면 먼저, 오순절 때의 사람의 방언은 복음 전파의 목적으로 성령의 임재의 증거로써 주신 것이며, 인간의 언어로 나타났고, 통역이 필요하지 않으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말미암아 불가항력적이었고, 성령 받은 제자들이 모두 다 방언을 하였으며, 오순절에 기해 일시적이고 단회적으로 발생하였다.
반면에 천사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것으로 인간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고전 14:2)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하며(고전 14:13),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에 은사를 받은 자가 조절하여 쓸 수 있었다. 또한 은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며, 단회적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타났다는 특징이 있다.
방언 중에서 오순절 때와 같은 인간의 언어로서의 방언은 그렇게 논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문제는 천사의 말이라고도 하는 방언에 대해서 기독교인들 간에도 수많은 의견 차이가 있어서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신앙의 근본은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에 있어서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훈을 그대로 따라 규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천사의 방언은 심지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특히 교회에서 공적으로 말하지 않도록 금하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언을 하더라도 교회 내에서 하려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두세 명 정도 내에서 순서를 정하여 하되 반드시 통역(고전 14:27)을 하여 교회의 유익을 주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통역이 없이 혼자서 하는 방언(고전 14:9)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자기와 하나님께 말하는 방언은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전 14:28)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갓 믿는 초신자의 경우(고전 14:22) 간혹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신앙을 갖게 하는 계기로써 공적인 방언을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교회의 유익을 주지 못하고 개인을 유익하게 할 뿐으로 초신자에게 있는 일이지 주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된지 오래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일은 아닌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가 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보더라도, 교회의 덕을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오순절 때
각지에서 모인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는 바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고전 14:12)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방언의 은사는 누구에게 주시는가? 흔히 믿음이 신실한 성도에게 주시는 것으로 알고, 방언의 은사를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는 자가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위해서(고전 14:22)라고 하였다. 믿지 않는 자라는 말은 불신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온전히 믿지 못하는 초신자를 포함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왜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초신자의 경우(고전 14:22)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신앙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고전 14:5에서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한 것이다. 이는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라는 뜻이 아니라,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아직까지 육신에 속하여(고전 3:1-3)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고전 13:11)이므로 방언의 은사라도 받아야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바른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데도 온 교회가 다 방언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방언하기’를 내세우는 것(고전 14:23)도 잘못된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천사의 방언을 말한 사건들은 모두 초신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진리를 안다면 오래된 신자로서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였다고 계속해서 방언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언의 은사나 다른 신비한 은사를 구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신앙이 자라도록 힘쓰는 것이 성도의 옳은 자세일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당시에 방언의 은사에 관한 오해가 많으므로 자신이 방언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서(고전 14:18) 이상과 같이 방언에 대한 오해들을 종식시키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도 될 것이다.
<영분별의 은사를 사모하라>
또한 병 고침이나 문제 해결 등이 신앙의 척도인 양 신자들에게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그러한 종류의 카리스마(은사)를 중요시하는 것도 흔히 보게된다. 물론 고통받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을 고침 받고 문제를 해결받음으로써 믿음을 갖게되거나 더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게 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역시 잘못하면 이기적인 신앙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고 문제 해결을 받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러한 이적을 체험하는 당시에 잠시 헌신적 신앙의 열정이 나타나는 것 같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순간적인 감동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서 개인적으로 유익을 구한 것이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발전과는 무관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다. 이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신앙은 결단코 신비주의가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신기한 현상을 수반한 그러한 종류의 능력을 부러워하기까지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모두 하나님 나라보다는 자신의 욕망이 앞서는 이기적인 신앙에서 발로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을 위한 진실성을 갖는 일에 그만큼 갈망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은사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성령의 은사인지 마귀의 능력인지 구별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길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도 마귀가 매우 비슷하게 흉내내기 때문에 분변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가장 사모해야 하는 은사는 영분별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인지 아니면 멸망 길로 인도하는 헛된 말인지를 분별하는 것만이 미혹하는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누가 무슨 말을 하거나 아무리 신비한 현상을 보더라도 절대 동요하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이 비성경적인 것은 배격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것을 바로 영분별의 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영생으로 가는 좁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많은 자들이 지금 가고 있는 넓고 큰 이 길이 설마 멸망의 길일까? 라고 하는 스스로의 생각으로 그 길을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너무나 어리석은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도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동안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이 아깝고 자신의 지위나 환경 등을 고려하여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세상의 삶이 끝나고 심판 받는 날 어떤 결정을 받게될 지는 스스로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