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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관계 안에 있는 세계
2019. 12. 1. 이현래 목사
하나님 나라가 따로 없고,
이렇게 늘 보고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천국이다.
불교는 인간 자신의 문제를 파고 들어가고 있다. 왜 병이 드는가? 왜 늙어지는가? 왜 살고 죽는가? 이런 문제로 시작해서 자기를 찾는 철학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무엇인가? 이런 철학이다. 백양사 입구에 가면 큰 바위를 세워놓고 ‘이게 뭐꼬?’라고 써 놓았다. 아마 거기 주지스님이 경상도 사람인 것 같다. 뭔가 인간에게 의문되는 것을 찾고 벗기느라고 철학이 생겼다. 종교라기보다 철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샤머니즘과 결합해서 종교화 되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는 샤머니즘을 벗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것을 벗으면 철학만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을 벗어버리면 불교인이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없애지도 못하고 두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리에 놓여 있다. 그래도 옛날과 다르게 끊임없이 그 법을 설법하고 있다. 불공 위주가 아니라 불교의 법을 가르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들어보면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 자기를 발견하자, 자기를 찾자는 말이다. 성경에 있는 말씀은 처음부터 관계이다. 내가 이렇게 되었느냐 저렇게 되었느냐 보다도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도 역시 관계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신랑과 신부, 또 하나님과 어린양, 이런 식으로 상대적으로 관계적이다. 관계가 완성되는 것이 역사의 완성이다. 그러면 관계가 완성되면 뭘 하는가? 관계가 완성되면 그때부터 세계가 또 시작이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 일단 혼자 살던 세계가 둘이 사는 세계로 바꾸어진다. 둘이 사는 세계로 바꾸어지면 뭘 하는가? 그때부터 애기 낳고 사는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이다. 창조자와 피조물, 하늘과 땅, 만들어진 피조물과 하나님의 동산,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모두 다 그렇다. 우리는 관계사회에 들어온 것이다. 이 관계 사회의 완성이 인격의 완성이고, 우리 세계의 완성이다. 혼자 살려면 중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제일 좋은 길이다. 둘이 같이 살면서 중 되기는 어렵다. 대처승은 알아주지 않는다. 혼자 불도를 닦는 비구승이라야지 대처승은 땡땡이라고 생각하고, 불교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잘 났든지 못 났든지 둘이 연합해서 뭔가 하나를 이루어 가는 세계이다. 이번에 아주 놀랍고 재미있는 일을 보았다. 옛날 어떤 곳에 부부 둘이 살았다. 둘이 사이가 나빠서 개 닭 쳐다보듯 살았다. 그런데 무슨 동기인지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좋아져서 자기 인생을 다 바쳐서 사랑하겠다는 말을 부끄러움 없이 했다. 참 이상했다. 어떻게 어제까지 개 닭 쳐다보던 사이가 저렇게 되었나 생각하면서 참 놀라운 요술이라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한번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굴곡 있고 따끈하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같은 경우는 밋밋해서 언제 좋은지 언제 나쁜지 모르고 산다. 인간사회는 둘이 사는 세계니까 둘이 뭐가 딱 맞아야 되니까 재미있는 세계이기도 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혼자 살고 끝난다면 사람이 얼마 있지 않으면 지구상에 다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둘이 살기 때문에 지금 살고 있다. 세상이 시끄럽고 복잡해도 둘이 사는 그것이 남아서 세상이 유지되고 있다. 싸워도 같이 살아야 되고 문제가 있어도 같이 살아야 된다. 더군다나 교회 안에서는 같이 살아야 뭐가 나오지 같이 살지 않으면 뭐가 나오지 않는다. 북적거리고 시끄럽기는 해도 해결되고 나면 너무 좋은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런데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특별히 다른 점이 무엇인가? 죄라는 문제가 있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녀보면 알겠지만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죄다. 왜 그럴까? 관계 사회이기 때문이다. 죄라는 것은 혼자 있으면 없다. 혼자 살면 죄 지을 일이 없다. 둘이 살면 좋은 일도 생기고 나쁜 일도 생기니까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하다보면 한쪽은 죄인이 되고 다른 한쪽은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왜 이런 죄 문제가 많이 생겼는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백성들이 광야로 나왔다. 종으로 살 때는 죄라는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하라는 대로 해야 되고 안하면 죽으니까 거기는 범죄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광야로 나왔다. 한 200만 사람들이 광야로 쏟아져 나왔는데, 질서를 유지해야 하니까 법이 없으면 안 된다.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 죄라는 문제가 나오게 된다. 바울 말했듯이 법이 없었으면 범함도 없을 것인데, 법이 생기고 범죄가 생겼다는 것이다. 논리가 이상하다. 법이 없었으면 범죄도 없었을 것인데, 법이 오니까 범죄가 생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옛날에는 교통사범이 없었다. 그냥 걸어 다니니까 교통사범이 나올 일이 없다. 그런데 차가 생기니까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면 큰일이 난다. 그래서 교통법규를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들어놓으니까 교통사범이 생겼다. 잘못하면 벌금을 내야하고, 더 잘못하면 징역을 가야 한다. 또 사람을 죽이는 일도 생긴다. 법이 만들어진 이상은 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빨간 신호일 때는 정지해야 하고, 파란 신호일 때는 가야 되는데 자기 마음대로 파란 신호에는 정지하고, 빨간 신호일 때 가면 가만 두면 안 된다. 그래서 경찰이 잡아서 딱지를 떼거나 고발하는 수가 생긴다. 관계 때문에 범법자가 생기는 것이다. 원래 법이 없을 때도 자기 멋대로 하는 놈도 있고, 남 조심해서 사는 놈도 있지만 법이 없을 때는 범법자가 안 된다. 그런데 법이 정해지고 나니까 범법자가 생겼다. 이 사람은 1년 징역 살 사람이고, 저 사람은 2년 징역 살 사람이라는 법이 정해졌다. 이스라엘은 광야에 나와서 법이 필요했다. 질서를 유지하려니까 모세를 통해 법이 선포되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법을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법이 없을 때는 이렇게 저렇게 살아도 범법자가 없었는데, 법이 생기고 나니까 범법자가 생기고 죄명이 생겼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회 속에는 계속해서 이 죄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율법이라는 것이 무지막지 오래된 법이다. 인류 역사상 함무라비 법전보다 더 오래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 이상으로 오래된 법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죄라는 문제가 생겼다. 건국을 해서 나라가 되니까 또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교회에 가게 되면 그것을 받아서 이어서 말을 하게 되기 때문에 죄라는 말이 무지 많다. 여러분 중에 교회를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가? 지나치게 많다. 별로 심각하지도 않은데 매일 저렇게 심각하게 죄를 회개하라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교회 간 사람이 자기 죄 때문에 간 사람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 해서 교회를 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회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죄라는 말이 나오게 되고, 마지막에 가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23)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다 죄인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녀보신 분들은 다 죄인이다. 나는 죄인 아니라고 하면 큰일난다. 네가 누구인데 죄인이 아니라고 하느냐? 네가 뭔데 죄를 안 지었다고 하느냐? 우리나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 ‘당신 죄인이요.’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이요?’ 하면 성경을 펴놓고 이런 죄를 짓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러면 걸리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다. 옛날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분은 첫째 날 간증이 그것이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아버님이 무슨 종교 비슷한 것을 했는데 어려서부터 아주 선하게 커서 한 번도 나쁜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분에게 어떤 전도자가 찾아와서 사람은 죄인이라고 가르쳤다. 아무리 들어도 자기는 모르겠으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계속 일주일을 오더니 지쳐서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죄인이라고 해야 그 다음에 말이 되는데, 자기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고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하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죄가 있어야 회개를 시키고, 또 죄가 있어야 지옥도 가르치고 천당도 가르치는데 죄가 없다고 하니까 가르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시던 날 나오다니 여기가 천국이라고 간증했다. 멀쩡하게 천국을 보면 될 일인데, 처음부터 죄인을 가르치니까 순수한 분이니 그렇게 말하지 어지간한 사람이면 사람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 죄인이라고 했으면 넘어갔을 것인데, 이 양반은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자기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말은 하지 않지만 이런 사람도 더러 많이 있을 것 같다. 혹시라도 찔러 버리면 안 되니까 말을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도 아주 성인군자는 아닌데, 그렇게 큰 죄를 저질러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 왜 죽었는가? 내 죄 때문에 죽었다. 내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고 하는데 정말 답답한 일이다. 내가 저지른 죄를 가지고 예수님이 죽었다는데, 이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감사가 안 된다. 오로지 그분은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데, 나는 그런 죄 의식이 없으니까 나는 감사가 될 일이 없다. 그것이 답답했다. 다른 사람은 울고불고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고 감사를 하는데 이것이 안 되니까 사람이 완악해서 그런 것인지 이것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답답했다. 이것은 관계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가 괜히 쫄 필요도 없고, 또 괜히 뻔뻔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관계가 잘못되면 그것이 죄고, 이웃과 나 사이에 관계가 잘못되면 그것이 죄다. 이웃과 나 사이에 잘못된 것은 이웃과 나 사이에 해결할 문제이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잘못된 것은 하나님과 내가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뒤범벅되고 섞여서 죄를 말하기 때문에 아주 난처하고, 막상 해결해야 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사람과 해결해야 되니까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는 내가 혼자 해결하고 싶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문제인지 몰랐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슨 잘못된 것이 있는가? 그것을 몰랐다.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그것이 죄다. 왜냐하면 둘이 서로 정상적이라야 만나지게 되는데, 정상적이지 아니고 하나가 삐뚤어지면 서로 못 만난다. 이것을 삐뚤어지게 하는 누군가 있는데 그것이 사탄이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버리는 어떤 존재가 있다. 그것을 보고 사탄이라고 한다. 사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이간자가 와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무슨 이유로 갈라놓았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적으로 그 하나님을 싫어하고 본성적으로 거역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은 또 자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사람을 지어놓았다. 그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갔다. 이것이 큰 문제가 된 것이다. 우리는 잘 모른다. 얼마나 큰 목적을 가지고 지어놓았는지도 모르고, 또 얼마나 큰 죄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들어보면 우리는 그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그러면 그를 표현해야 할 중대한 위치에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다른 동물은 죄가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까 죄가 없는데, 사람에게는 아주 귀중한 것을 걸어놓았다. 그런데 그 귀중한 자가 이탈하고 갔으니 이것이 큰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모르면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알 수 없다. 말단에 있는 공무원이 잘못한 것과 비서실장이 잘못한 것은 아주 다르다. 요즘 민정비서 문제가 많이 거론되는데, 그 사람이 잘못하면 큰일 난다. 내 책임이 중대하면 그만큼 잘못하면 중대한 죄를 짓게 되고, 잘하면 큰 영광을 받게 된다. 사람이 자기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했다. 생각해보았자 겨우 내가 누구에게 잘못했다는 정도이지 싸운 것도 없고 원수 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만들어놓았는가? 이것을 알고 나면 내가 그분의 이러이러한 점을 거역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죄와 다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23)라고 했는데 무슨 죄인지 모른다. 모든 사람 속에 나도 들었는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과 사람 관계는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알아야 은혜도 되고 범죄자도 되고 감사도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냥 개나 소처럼 살다가 죽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했으니까 없으면 안 될 존재이다. 잘못하면 절대로 안 될 존재이다. 하나님이 웃는데 내가 성을 내버렸다면 큰일난다. 하나님이 속으로 너무 기쁜데 내가 분이 나서 가버리면 어찌 되겠는가? 하나님이 분이 나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 대통령은 지금 백성을 위해 잘살게 해보려고 하는데, 민정비서실장이 무슨 일을 저질렀다면 대통령이 욕을 먹는 것이지 비서실장이 욕을 먹겠는가? 이것이 큰 문제이다. 사람은 아무렇게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의 얼굴이 된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없다. 그냥 밥 먹고 살다 죽을 인생인데, 하나님의 얼굴이 된다, 그이 모습이 된다, 그에게 없어서 안 될 존재가 된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없다. 꼭 살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그런 관계이다. 처음에 이렇게 알기는 좀 어렵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살려놓은 것이 이것 때문에 살려 놓았다고 생각된다. 나라도 있어야 되겠다. 저 사람이라도 살려놓아야 숨을 쉬지 않겠나 해서 나를 살려 놓은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제는 하나님께 배짱을 좀 내는 것이다. 하나님 내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필요하시면 좀 넉넉하게 하시고, 필요하지 않으시면 데려가도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주신 것만도 너무 감사한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지금 이런 입장이다. 그래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필요하십니까? 필요하시면 연장을 해주시고, 필요 없으면 지금이라도 데려가도 전혀 여한이 없습니다. 죽음도 준비해 놓았고, 하나님이 쓰실 것도 준비해 놓았다. 쓰실 것이면 내가 이렇게 쓰여져야겠다. 데려가면 내가 이렇게 가야 되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담당의사에게도 내 병에 대해 숨기지 말고 내일 죽을 것 같으면 내일 죽는다고 미리 말해 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루라도 더 완전하게 살 것이 아니겠는가? 내일 죽는다고 하면 오늘 내가 잠을 자겠는가? 말을 해주어야 한다. 말을 해주지 않고 괜찮다고 하다가 죽어버리면 나는 살 것을 못 살고 죽는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이렇게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신에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시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요즘 그런 마음이니까 시간은 참 짧다. 왜냐하면 쉬어야 할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막상 무엇을 할 시간이 별로 없는데 그 시간이라도 쪼개서 쓰고 싶다. 아까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와도 좋은데, 오면 무조건 똑같은 말을 나한테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무조건하고 다른 소리는 안할 것이니까 다른 말을 하려면 시간이 바쁘니까 오지 말라. 내가 생각할 때 내 평생에 딱 한 가지 말만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도 못하고 저 말도 못하고 아무 말도 못 할 수도 있고, 할 말은 많은데 쓸모없는 말도 많다. 유명하다는 분들을 검색하니까 공부도 많이 했고, 할 말도 많은데 건질 것이 하나도 없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런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몇 말씀 안했다. 성경에도 직접 하신 말씀은 별로 없다. 그런데 없으면 안 될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성경 안에 있는 말씀들은 없으면 안 될 말들이다. 어제 청년부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했는데, 이 말이 없으면 큰일난다. 내 생명은 없어도 그 말은 있어야 된다. 왜냐하면 그 말이 없으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고 하지 않으면 나는 누구인가? 부득이 원숭이 새끼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지었다고 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나는 갈 데가 없으니까 침팬지 후손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갈 데가 없다. 동물원에 갈 수 밖에 없다.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있는 그 한 말씀 때문에 내 인생이 자랑스럽게 존재한다. 내가 인생이구나. 하나님의 피조물이구나. 하나님이 필요해서 나를 만들었구나. 이것이 그 한 말씀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없으면 여러분이 아무리 잘난 척해도 소용없다. 잘난 사람이 나뿐인가? 잘난 사람이 여러분뿐이겠는가? 세상에 가보면 잘난 사람이 정말 많다. 비교할 수 없이 잘난 사람이 많다. 하나님의 그 한 말씀이 내 인생을 세워주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말 같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누가 봤어? 나인들 보았겠는가? 나도 본 일이 없다. 하나님을 본 일이 없다. 천지를 창조할 때 내가 본 일이 없다. 그런데 그 말이 있다는 것이 내 인생을 세워준다. 이것이 참 이상한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말 같은데, 그 말이 없으면 나는 창경원에 가야 된다. 내 조상을 만나러 그쪽으로 가야 된다. 다른 길이 없다. 옛날에 성경이 이렇게 좋은 말씀인 줄 몰랐다. 이렇게 귀중한 말씀인 줄 몰랐다. 이렇게 내 인생을 복되게 하는 말씀인줄 몰랐다. 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했다는 이것만 복음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지었다는 이 말이 더 복음이다. 육신적으로 사람이 부모가 없으면 불행한 것이다. 부모가 있어서 내가 네 아버지고 네 엄마라고 하니까 사람이 산다. 세상에 아무데나 물어봐도 나는 네 엄마나 아버지가 아니야. 아무도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리 밑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 아버지라는 분이 있다. 나를 지은 분이라는 분이 있다. 내가 무슨 고통을 당하고 무슨 어려움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면 언젠가 쓸 것인데, 내가 다른 것 때문에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지으신 분이 그냥 지어 놓았겠는가? 나를 지으신 분이 있다면 나를 그냥 지어 놓았겠는가? 내가 처음 출발할 때 거기서 출발했다. 내가 그것을 인정하고 나니까 다음에 오는 질문이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 그러면 나를 왜 지어 놓았습니까? 무엇하려고 지어 놓았습니까? 이런 질문이 생겼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이 질문이 나오겠는가? 나는 그 전까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방황했다. 그러니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정하니까 그러면 나를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나는 누구지요? 나는 무엇 때문에 필요하지요? 이런 질문이 나온다. 아주 정당한 질문이다. 사람이 꼭 해야 할 질문을 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나는 왜 이럽니까? 저럽니까? 이런 질문이 아니다. 나를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이런 질문이 생겼다. 그런데 불렀다. 내가 너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주었으니 이제는 네가 나를 위해서 일해라하고 부르는 것이다.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준비되면 다 데려간다. 준비되면 다 일을 시킨다. 준비되면 할 일이 너무 많다. 이 한마디 말씀이 내 인생을 살려주는 것이다. 없던 데서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전에 나는 없는 사람이고,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인생에 하나 있다가 없다가 하는 데는 똑같다.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있다가 죽으나 똑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파리 한 마리가 집에 들어오면 당장에 파리채를 가지고 와서 잡아버린다. 누가 뭐라고 하는가? 누가 뭐라고 할 자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뭐라 할 자가 없다. 이 한마디가 이렇게 소중하다. 이것이 관계이다. 전능하신 이와 내가 관계가 있다. 이것은 내가 대통령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중요한데, 전능하신 이와 내가 관계가 있다. 나는 그에게 꼭 필요하고, 그는 내가 꼭 필요하다. 이런 관계이다. 보통 관계가 아니고, 서로가 없으면 안 될 관계이다. 하나님도 나 같은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누가 말해 주겠는가? 하나님도 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있어도 사람 없는 하나님은 없다고 했다. 잘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해 줄 자가 없다면 하나님이 없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하나님이라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르니까 하나님 없는 인간은 있다. 그런데 사람 없는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나 한 사람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나 한 사람만큼 나타나 계시는 것이다. 여러분 한 사람이 있으므로 여러분 한 사람만큼 하나님이 나타나 계신다. 얼마나 귀중한가! 점 하나를 잘 찍는 것에 따라서 그림이 명품이 될 수도 있고, 또 안 될 수도 있다. 글씨가 획 하나에 명필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우리 한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할 수도 있고, 하나님 안 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 내가 시시하게 쓸데없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된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어차피 관계인데 내가 누구와 관계가 되는가? 이것이다. 바로하고 관계가 되는가? 모세와 관계가 되는가? 이것에 따라 다르다. 모세와 관계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 바로와 관계된 사람들은 애굽 백성이 되었다. 관계된 사람에 따라서이다. 나와 관계된 존재가 누구인가? 이것이다. 전능자가 나를 지었다는 말이 그 말이다. 나와 관계된 자이다. 나는 능자가 나를 지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 그리고 실제로 해보면 또 맞다. 왜냐하면 내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 내가 영화롭게 된다. 그러니까 그 말이 맞는 말이다. 우리는 관계사회에 살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내가 관계가 있다. 꼭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나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도를 통해 보았자 혼자는 소용이 없다. 해탈해서 우주를 날아다녀도 아무 관계가 없으니까 소용이 없다. 자기 혼자 날아다니다 마는 것이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꽃도 볼 사람이 있어야 꽃이지 볼 사람이 없으면 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장님들만 있는데 세상에 꽃 잔치, 꽃 박람회를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을에 국화박람회를 하는데 온갖 국화가 다 피고 종류가 많다. 기술적으로 피게 해서 보기 좋게 만들어놓은 국화가 많다. 그런데 볼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그것이 뭐가 되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자매들은 외출할 때 얼굴에 바르는데 왜 그런가? 볼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지 아무도 봐 줄 사람이 없으면 누가 바르고 다니겠는가? 맨날 얼굴을 두드린다. 남이 그렇게 두드리면 싸움이 날 것인데, 자기가 두드리니까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 어쩔 수 없다. 여자는 본성적으로 그런 것 같다. 애들을 키워보아도 남자애와 여자애가 다르다. 남자애는 가꾸는 것을 모르는데, 여자애는 조금만 했을 때부터 머리를 땋고 묶기도 한다. 본성이 그런 것 같다. 봐줄 남자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도 누가 쳐다봐주고 해야 된다. 너무 많이 쳐다보면 욕하지만 그래도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된다. 여자들은 참 이상하다. 자기를 봐달라고 꾸미고 다니는데, 천천히 보면 욕한다. 저** 왜 나를 보느냐고 한다. 그러니까 보기는 보되 뚫어지게 보면 안 된다. 여자는 배필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볼 사람이 봐야 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이럴 사람이 봐야 되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면 기분 나쁘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자기를 보면 기분이 나쁘다. 자기 마음에 든 사람이 자기를 봐주어야 기분이 좋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겠는가? 연애하려면 이렇게 한번 해봐야 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이런 사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왜냐하면 사람 없는 하나님이 없다. 없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표현이 되지 않으니까 그분 자신이 표현이 없는 분이니까 표현해 줄 사람이 없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게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여러분은 함부로 웃으면 안 되고, 찡그리는 것도 함부로 찡그리면 안 된다. 인상 쓰고 있으면 누가 보면 그것밖에 못 보니까 하나님이 저렇게 하고 있다고 보일 것이 아니겠는가? 대구교회 나오시는 여러분들이 인상 쓰고 있으면 사람들이 대구교회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겠는가? 주의해야 한다. 성 낼 일이 있어도 성내지 말고 주의해야 된다. 화내려고 하다가 남이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화를 못 낸다. 사람은 정말로 귀중한 존재이다. 함부로 할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분에게는 너무 귀중하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무슨 말인가? 두 부부가 가는데 아무리 봐도 안 어울린다. 둘이 팔짱을 끼고 너무 잘 갈 때,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한다. 안경이 아무 안경이나 쓰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눈에 맞는 안경이 있다. 모양도 그렇고 보기도 그렇다. 근시인 사람에게 원시 안경을 쓰게 하면 안 된다. 원시에 근시를 끼우면 안 된다. 또 안경테도 유행이 있어서 때에 따라 유행한다. 전혀 유행이 뒤진 것을 쓰고 다니면 사람들이 촌스럽게 생각한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하나님에게 제 눈에 안경이 사람이다. 하나님을 너무 위대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 없으면 안 되는 분이구나. 나 없으면 그분은 안 되는 분이구나. 그분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바로 그것이 죄다. 그분은 나를 생각할 때 나는 너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 나는 생각하기를 당신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다고 하면 그것이 대역죄가 된다. 아내가 남편을 생각할 때, 하늘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아내를 생각할 때 걸레처럼 생각하면 화나지 않겠는가? 남들이 다 무시해도 자기 아내가 자기를 알아주면 이 사람은 허리만 펴지는 것이 아니고 가슴까지 펴고 다닌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똑똑하다고 하고 잘났다고 하고 잘한다고 하는데, 집에 들어오면 마누라가 무시하면 살맛이 딱 끊어진다. 서로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서로 존중해야지 서로 존중하지 않으면 그런 꼴이 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그런 관계이다. 그보다 짙은 관계이다. 그것을 표현하느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이다. 예수를 보라. 내가 과거에도 예수 때문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 도무지 수용이 안 되고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나를 아주 어려운 환경 속에서 건져주었지만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이 생각이 들어오니까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진짜로 나를 위해 죽었다면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섭섭하시겠는가? 그리고 진짜로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을 내가 소홀히 했다면 나는 얼마나 귀중한 보화를 잃어버린 것인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나와 예수님 관계를 확실하게 해주었다. 죄, 죄, 하는 말에서는 내가 해답을 갖지 못했다. 내가 참 인생이라는 자리에 와서 내가 그분 때문에 참이 무엇인지 알았구나. 이분이 죽지 않았더라면 참이 뭔지 참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를 것인데 이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내가 참 사람을 알았구나. 내가 돌아갈 곳을 알았구나. 내 영원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았구나. 이러니까 이분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공자님도 좋고 석가모니도 좋고 다 좋지만 그분들은 나에게 이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나에게 참 사람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그전에도 알았던 것 같은데 희미했던 것 같다. 희미하니까 확실성이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분명해져서 확실해지니까 예수 없었으면 나는 안 될 뻔 했구나. 예수 없으면 안 되는구나. 그래서 나는 지금 예수를 전하고 있다. 전하는 이유가 나를 나 되게 해 준 분이고 나를 복되게 해주고 내 위치를 찾아주었다. 요한일서 5장 마지막 말에 재미있는 말이 있다. 중요한 말이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는 말이 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다. 여호와는 유일하신 분이다. 그런데 요한일서 5장 마지막에 보면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라고 했다. 예수를 보고 한 말이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얼마나 귀중했으면 사람에게 참 하나님이라고 했겠는가? 그것이 신이라는 말이 아니다. 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신이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분의 칭호다. 군을 다스리는 분을 군수, 시를 다스리는 분을 시장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나 같은 경우 해석하면 그는 참 내 구속의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다. 그분이 나에게 영생인 것이다. 잘못하면 아주 난해한 구절이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하면 지금까지 하나님은 거짓된 하나님이라는 말인가?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디 간 것인가? 구속에 있어서는 그분이 나에게 절대적이다. 나를 나되게 참 사람되게 하는 데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다 이분이 나의 참 하나님이시다. 실제적인 하나님이다. “영생이시라.”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아주 특이하다.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5:21)라고 되어 있다. 모든 우상에서 멀리 하라. 갑자가 그 말이 왜 나오는가? 그것이 아니면 다 우상이라는 것이다. 헛것이다. 헛것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다. 내 영원한 행복이다. 이렇게 관계가 점점 발전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이렇게 발전해야 된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서 여러 생물들을 이끌어 오면서 네가 이름을 지어보라 했더니 이름 한 바가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2:18,19)고 했는데, 이것은 관계 설정이다. 개라고 말할 때는 개와 나와의 관계이다. 소라고 말할 때는 소라는 말속에는 소와 나와의 관계이다. 그런데 아담이 다 봤는데 소, 개, 돼지는 다 있는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 그리고 하와를 데리고 오니까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말하는 것이다. 비로소 이제 배필을 만났다는 말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완전한 배필을 만나가는 과정이다. 소도 만나고 호랑이도 만나고 원숭이도 만나고 만나가는 과정은 한 사람이 참 배필을 만나가는 과정이다. 우리 인생도 결국 참 배필을 만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우상이라는 것이다.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5:21) 이제 참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나왔으니까 다른 것은 다 우상이다. 우상이라는 말은 헛것이라는 뜻이다. 진짜가 아닌 것, 실제가 아닌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이제는 참 배필을 만났으니까, 참 신랑을 만났으니까, 이제는 참 사람을 만났으니까, 다른 것은 다 우상이다. 그 우상 때문에 우리가 헛된 일을 한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고 우상이 있으면 가서 밥 차려놓아야 되고 절해야 되고 초하루 보름에 뭘 걸어놓아야 된다. 제주에 가면 큰 나무가 있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거기다 무엇을 걸어 놓았는지 아주 일 년 내내 빨간 줄, 파란 줄, 노란 줄을 걸어 놓아서 이 고목나무 자체가 완전히 줄로 덮여 있다. 그 나무도 수고스럽겠고, 그것을 하는 사람도 수고스럽겠고 헛일이다. 걸어놓는다고 나무가 알아주겠는가? 어찌 되겠는가? 우리가 참 배필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일과 비슷하다. 인간이 하는 짓이 이것으로 저것으로 자기 자리를 채워보려고 하고, 자기 짝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지식을 자기 짝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기도 하고, 돈을 자기 짝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기도 하고, 오만 것을 자기 짝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아담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자기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나무 뒤에 숨었다고 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계속해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내가 참 배필을 만나기 전에 모든 것은 다 우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든지 여기지 않던지 간에 나에게는 다 우상이다. 그래서 우상을 멀리 하라고 되어 있다. 여러분이 요한일서 5장 21절에 가보면 그 말이 써 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고 해놓고,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5:21)고 되어 있다. 참 이상한 말이다. 아담에게 하는 말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그러면 다른 것은 다 우상이라는 그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결혼하고 나면 남자는 자기 아내 놔두고 밖에 나가면 안 된다. 우상한테 가버린 것이다.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죽니 사니하고 싸운다.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한 것처럼 참 배필이고 영생을 만났는데 밖에 나가면 되겠는가? 우리는 관계사회에 들어와 있다. 창조될 때부터 우리는 관계사회에 들어와 있다. 그 관계 안에서 가치도 있고 모든 것이 있다. 관계를 떠나면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배필로 여기지 않는다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머리가 좋고 과학이 발달한 이것이 사람된 것이 아니다. 인공위성을 날리고 있으면 새들이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상숭배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날아가는 새들이 저것들은 별 우상이 다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만일 나무타기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하자. 서커스 하는 사람들이 외줄타기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타고 있을까 싶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감탄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고 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원숭이들이 보면 박장대소하고 웃을 것이다. 배꼽잡고 웃을 것이다. 저것들 뭐하고 있는 짓인가? 이렇게 할 것이다. 힘자랑 하면 힘센 놈이 많다. 호랑이, 사자, 코끼리, 힘센 놈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이 거기에 비교가 되겠는가? 알렉산더 같은 사람도 코끼리 부대에 눌려서 뒷걸음치고 나온 것이다. 코끼리가 원체 크니까 말이 아무리 달려가도 못 간다. 코끼리가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코끼리 앞에 가면 뒤돌아선다. 인간이 인간이라고 자랑할 것이 없다. 다 우리가 불편해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있는 것뿐이다. 동물들은 빌딩을 짓지 않고도 잘 산다. 새들이나 짐승들을 보면 빌딩을 짓지 않고 잘 산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유일하게 자랑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배필이다. 하나님은 나 없으면 안 된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다. 이 자랑을 해야 내가 부끄럽지 않은 자랑을 하게 된다. 내가 힘자랑을 하면 코끼리 앞에 가면 부끄럽다. 용감한 것을 자랑하면 호랑이 앞에 가면 부끄럽다. 그 놈들은 참 대단하다. 자기 몸뚱이보다 몇 배나 큰 놈을 올라타서 모가지를 물고 늘어지는데 그 큰 소가 그냥 넘어진다. 대단하다. 사람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알아야 진실하다. 그렇다고 자랑할 것이 없어 짐승 앞에 가서 자랑하겠는가? 사람보다 나은데 가서 자랑해야지, 나보다 더 나은데 가서 자랑해야지, 짐승 앞에 가서 인공위성 날리고 있다고 한다고 그것이 자랑이 되겠는가? 관계 속에서는 이 관계가 잘되는 것이 행복이고, 관계가 잘못되면 불행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잘되면 영생이고, 하나님과 사람 관계가 끊어지면 멸망이다. 영생과 멸망은 간단하다. 영원히 산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과 내가 서로 없으면 안 되는 관계가 되면 그것이 영생이다. 하나님 나라가 따로 없다. 우리가 다 연합이 잘되면 하나님 나라다. 오늘 교회 모이신 여러분의 연합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있다. 연합이 없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안 된다. 기화요초가 만발한다고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연합할 수 있는 사회, 연합된 사회가 하나님 나라다. 세상은 무엇인가? 바벨탑이다. 아무리 쌓아도 허물어지고 또 허물어지고 그것이 바벨이다. 그 바벨이 세상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그것이 영생이다. 영생, 천국, 하나님 나라가 다 같은 것이다. 누구와 내가 연합하려면 연합할 조건이 맞아야 한다. 자기 똑똑하다고 해도 소용이 없고, 자기 잘났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연합이 안 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참된 연합을 하게 되면 사람과도 연합이 잘된다. 당연히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구속 안에 오면 누구와도 연합하지 못할 사람이 없게 된다. 거기서 참된 연합이 있다. 연합이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애써 해보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구속 안에서만 연합이 가능하다. 연합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가 아예 시작이 안 된다. 구속이 없으면 아예 시작 자체가 안 된다. 내가 요즘에 기독교를 좀 찾아보니까 이것이 안 된다. 기본이 안 된다. 기초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되겠는가? 우리가 이 복음을 만방에 전해야 한다. 기초를 확실하게 해놓아야 한다. 그래야 뭐가 되지 기초가 없는데 뭐가 되겠는가? 만날 말해봐야 기초가 없으니까 결론이 나지 않는다. 바닥을 제대로 해놓고 집을 지어야지 바닥을 제대로 해놓지 않고 아무리 좋은 집을 지으면 뭐하겠는가? 도로 허물어지고 도로 허물어진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두 사람이 바탕이 같아야 이것이 연합이 되고, 연합이 되면 고장이 나도 뿌리가 같으니까 다시 고쳐진다. 기초가 없으면 연합이 안 된다. 근본적으로 연합이 안 된다. 그러면 자기 혼자 살게 된다. 우리는 다 관계이다. 모든 것이 다 관계이다. 모든 것이 관계니까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관계를 정말로 합당하게 하려면 우리가 구속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관계가 제대로 안 된다. 다 나만큼 잘났기 때문에 안 된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리는 예수 안에서는 또 관계가 안 된다. 뛰어내릴 수 없는 그분 안에서만 관계가 된다. 그래서 내가 자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거기서는 연합이 가능하다. 다른데서는 아무리 별다른 신학을 해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만인구원론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멸망을 받기를 바라겠는가. 결국은 만인이 다 구원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런데 거기도 말이 많고 비판도 많다. 참 좋은 말인데, 어떻게 만민이 다 구원이 되냐는 말이다. 그것이 없다. 어떻게 만민이 다 구원이 되는지가 없다. 만민이 다 구원이 된다는 것은 만민이 다 연합이 된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도 연합되고, 사람과 만민도 연합된다. 연합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밖에는 연합이 안 된다. 이것은 너무 놀라운 것이다. 만유의 구원! 말이야 좋지 만유의 구원이 공으로 된다. 내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절대적인 의지로 된다는데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런데 그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의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말만 하지 안 된다. 한 사람의 죽음, 그 시시한 한 사람의 죽음이 만유를 구원할 수 있다. 이 복음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 성경에 있는 것을 백번을 읽어도 안 된다. 모든 것은 그 기초 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관계로 만들어주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내가 홀로 완성되도록 만들어 놓았더라면 나라가 안 될 것이다. 갈수록 점점 혼자 사는 세계가 된다. 외로운 세계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것은 갈수록 점점 하나되는 세계로 가는 것이다. 관계 안에서, 영원한 관계 안에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사는 이것이 축복이다. 지금 비록 조금 덜 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되도록 가는 것이다. 목표가 거기 있다. 내가 8년 동안 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아무 목표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8년 동안 설교를 한 것이 헛일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좋은 말을 한다고 많이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는 이야기를 했다. 8년을 말을 했어도 지금 한 시간 말한 것만 못하다.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지금 확실한 복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아무데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데 가도 이런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한다고 해서 시시한 줄 알면 큰 손실이다. 어디 있는지 여러분이 다 검색해봐라. 그리스도 사역의 중심이 구속이다. 그것이 아니면 그분이 세상에 있을 필요가 별로 없다. 오셨을 이유도 별로 없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 다 있던 것이다. 기적, 이런 것은 다 있던 것이다. 이 구속이 아니면 예수가 오셔야 될 이유가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잡혀있지 않다. 그것이 희미해져서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뭐가 되겠는가? 인생이 되겠는가? 교회가 되겠는가? 뭐가 되겠는가? 아무 것도 안 된다. 유사 교회, 유사 인간밖에 안 나온다. 비슷한 것 밖에 안 된다. 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한 길을 보여주신 것을 감사하고, 여러분과 함께 이런 말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나는 너무 행복하다. 이것을 아무도 모른다.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니까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려야 된다. 이것은 우리가 알려서 아는 것이지 스스로 알 수 없다. 사람이 스스로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계시에 의해서 알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전해야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10:17)라는 말이 그 말이다. 저절로 생기는 믿음은 신념이다. 자기 속에서 생기는 믿음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신념이다. 들으면서 나는 믿음이라야 한다. [김치현 목사 화답] 오늘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전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우리 인생이 사람이든지 환경이든지그 무엇이라도 내게 관계된 것이 하나도 필요 없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그때 인생은 온전해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에게 관계의 축복을 주시고, 관계라는 목표 안에서 다른 모든 것이 내려놓아지도록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영생이시다. 그러므로 우상을 내려놓으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것이 어떻게 연관이 된 말씀인지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니까 영생하는 삶, 우리가 온전한 관계를 누리는데 관계를 깨뜨리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었구나. 누구와 불편한 것이 있었거나 또 누구와 관계가 안 되는 것은 내가 참 배필로서가 아니고 우상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구나. 이 말씀을 들으니 너무나 온전하게 해석이 되고, 삶이 뭐가 더 중요한지가 더 확실해지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내 인생에 내게 관계된 사람이든지, 환경이든지 이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모든 것이 나에게 우상으로 발견이 되고,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관계의 축복을 누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