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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數千 年) 역사의 여로(旅路) ‘실크로드’<2010년 8월>
실크로드 / 명사산 오르는 낙타행렬
1. 서역(西域)의 중심도시 우루무치(烏魯木齊)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尔自治區)의 성도(省都)인 우루무치(烏魯木齊)는 중앙아시아의 등줄기인 천산산맥(天山山脈)의 기슭에 위치한 도시로 중국 옛 명칭인 서역(西域)의 중심도시이다. 이 지역은 먼 옛날 해수면과 거의 같은 높이라 바다였던 곳으로 20여 개의 염호(鹽湖)가 흩어져 있는데 이 염호에서는 많은 소금이 생산된다고 한다. 황량한 사막 저편으로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의 5,000m급 고봉(高峰)들이 꿈결처럼 아련히 누워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면적은 중국대륙 면적의 1/6, 인구는 2,200만으로 13억 중국인구의 1/60 로 인구밀도가 매우 낮지만 중국 제일의 지하자원 보고로 석유 매장량 및 생산량은 중국 1위이다. 또, 석탄을 비롯한 수많은 지하지원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어서 격렬한 위구르 민족의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에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곳이겠다.
인구 비율은 위구르족(45%)과 한족(40%)이 가장 많으며 카자흐족(7%)과 기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물론 문자도 한자와 위구르 문자(아랍문자와 비슷: اپتونومست)를 같이 사용하고 있고 종교도 불교와 이슬람이 공존하고 있다.
◐ 중앙아시아의 등줄기 천산산맥(天山山脈)
천산산맥은 중국의 신강성에서 시작하여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까지 동서로 2,000km에 걸쳐 뻗어있는 대산맥으로 평균높이가 3,500~4,000m이고 최고봉인 포베디봉(Pobedy Peak)은 높이가 7,439m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대 산맥이다. 이 산맥의 남쪽은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천산산맥의 남쪽기슭에 자리 잡은 파리쿤(巴里坤)은 카자흐족의 고향으로, 목장에서는 카자흐족의 작은 말을 타는 체험도 하고 카자흐 유목민의 천막집인 파오(Pao)에 들르면 파오의 안주인은 방문객에게 마유차(馬乳茶)와 곁들여 건포도와 하밀과(哈密瓜/멜론), 그리고 마유(馬乳)치즈 말린 것을 대접한다.
◐ 실크로드(Silk Road)의 역사적 배경
<1> 신장(新疆) 위구르(維吾尔) 자치구의 지역적 특성
중국대륙의 서북쪽 국경 중앙아시아에 있는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에 합병(1884)되기 전 서역(西域)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대부분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사막이 차지하는 황량한 지역인데 곳곳에 형성된 작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흉노족(匈奴), 돌궐족(突闕), 몽고족(蒙古) 등이 세운 수십 개의 작은 나라들이 난립하며 흥망을 거듭하던 곳이다.
동쪽은 깐수성(甘肅省)과 칭하이성(靑海省), 남쪽은 씨창(西藏) 티베트 자치주, 북동쪽은 몽고, 북서쪽은 카자흐스탄, 서쪽으로는 키르키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알타이 산맥, 천산(天山)산맥, 곤륜(崑崙)산맥이 가로로 길게 뻗어있다.
천산산맥을 경계로 북쪽은 중가르 분지(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타림분지, 동쪽으로 투루판 분지가 펼쳐져 있는데 신장(新疆)의 강(疆)이 세 산맥(一)과 분지(田)를 형상화한 글자이다. 또 쿠무타크(庫木塔格) 사막 근처의 둔황(敦煌) 부근은 모래가 많고 모래바람이 심하여 사주(沙州)로, 투루판(土魯番)지구는 분지(盆地)로 너무 더워 화주(火州)로 불린다. 이곳은 불모의 땅인 타클라마칸 사막, 고비사막, 쿠무타크(庫木塔格) 사막 등 황량한 들판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2> 비단길(Silk road)과 옥의 길(Jade road)
실크로드는 글자 그대로 낙타 등에 중국의 비단을 싣고 유럽으로 가고 유럽의 여러 물산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낙타 캐러번의 교역로를 의미하지만 그 이전에도 옥(玉)의 생산지로 유명한 신장성 허텐(和田/和闐)의 질 좋은 옥이 중국으로 유입되던 옥의 길(Jade Road)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한다.
타클라마칸 사막 서남단(西南端)의 허텐은 옥과 함께 사금(砂金), 비취(翡翠)의 생산지로도 유명했는데 중국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옥(玉)을 무척 좋아한다. 이 지역의 명칭은 서역으로부터 옥이 들어오는 관문이라 하여 옥문관(玉門關)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후일 비단이 오가면서 옥의 길(Jade Road)이 비단길(Silk Road)로 이름이 바뀌었다.
<3>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천산남로(天山南路)
실크로드의 시발점은 중국 본토의 시안(西安), 혹은 더 멀리 낙양(洛陽:현재의 鄭州)으로부터 시작하여 당시의 국경부근인 깐수성(甘肅省)의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이 기점이 되었다.
서역(西域-현 新疆)에 들어온 후 투루판을 거쳐 천산산맥 남쪽을 지나 신장성(新疆省) 서쪽 끝인 카스(喀什:카슈가르)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터키의 이스탄불로 이르는 천산북로와 또 하나는 쿤룬(崑崙)산맥의 북쪽을 지나 카스(喀什)로 이르는 천산남로로 나뉘었다. 둔황(敦煌)과 옥문관은 깐수성(甘肅省)의 란저우(蘭州)에서 시작되는 하서회랑(河西回廊 혹은 河西走廊)의 서쪽 끝부분으로 황하(黃河)의 서쪽에 있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河西)이다. 실크로드에서 반드시 거쳐 가야하는 깐수(甘肅)성의 좁고 긴 약 1.000km의 황량한 대협곡(大峽谷)은 마치 긴 복도와 같다고 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 길은 당나라 고승 삼장법사가 천축국(天竺:印度)으로 불경을 가지러 다녀온 길이기도하며 그 이야기가 후일 서유기(西遊記)라는 소설로 씌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4> 교역로(交易路)의 개척역사
장건(張騫)장군 동상 / 양관(陽關) 봉수대
BC 2세기,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장군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흉노(匈奴)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오히려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장건은 10여 년간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흉노여자와 결혼도하고 자녀도 있었지만 결국 탈출하여 이 지역의 자세한 지리와 풍습을 기록하여 한무제(漢武帝)에게 바침으로 후일 흉노 토벌의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이곳에 국경의 관문인 양관(陽關)을 설치하고 주변 여러 나라와 문물을 교역하는 루트를 개설했으며 대상(隊商)들을 보호하여 실크로드를 있게 한 실질적인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중국 서쪽 관문인 양관(陽關)은 글자 그대로 뜨거운 햇볕(陽)으로 가득 찬 불모(不毛)의 땅으로 이곳을 나서면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사막(Takla Makan Desert)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오손국(烏孫國)은 서역 지방에 할거하던 투르크계의 유목 민족으로, 한때 그 세력이 천산(天山) 산맥 북쪽의 이르츠크 호수로부터 일리 강 유역의 분지까지 이르렀을 만큼 강대했다.
전한(前漢) 당시 중국의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는 오손보다 강했는데, 자주 한(漢)나라를 침범했다. 한고조 유방(劉邦) 이래 6대 황제 경제(景帝)에 이르기까지 줄곧 펼쳐 왔던 흉노에 대한 화친 정책을 강공책으로 바꾼 무제(武帝)는, 오손과 함께 흉노를 협공할 계획을 세우고 장건(張騫)을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10년 후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무제의 형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인 세군(細君)을 공주라 속여 늙은 오손의 왕에게 시집보냈다. 그 덕분에 흉노는 한나라와 오손의 협공을 견디다 못해 한층 더 북방으로 밀려났으며, 서역 50여 나라가 한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되었고 한나라는 이민족의 이반을 막기 위해 구자(龜玆)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두었다. 세군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 땅에서 사는 슬픔을 노래한 것이 오손공주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이다.
오손공주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
吾家嫁我兮天一方(오가가아혜천일방) 우리 집에서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쪽 끝이어라
遠托異國兮烏孫王(원탁이국혜오손왕) 머나먼 타국에 몸을 맡기니 오손왕이로다
窮廬爲室兮旃爲墻(궁려위실혜전위장) 천막이 집이 되고 모전은 담장이 되었으며
以肉爲食兮酪爲漿(이육위식혜락위장) 고기가 밥이 되고 양젖이 국이 되었네
居常土思兮心內傷(거상토사혜심내상) 살면서 항상 고향 그리워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願爲黃鵠兮歸故鄕(원위황곡혜귀고향) 황곡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황곡(黃鵠)-누런 고니<세군(細君)을 일명 황곡(黃鵠)이라 부르기도 한다.> ♣旃(전)-모전<장막>
이 노래를 전해들은 한무제(漢武帝)도 세군(細君)을 가엾게 여겨 해마다 세군에게 선물을 보냈다.
수년이 지나 노령(老齡)이 된 오손왕은 오손(烏孫)의 풍습에 따라 세군을 자기 손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풍습이었지만 세군에게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군은 한나라에 사자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귀국하게 해 달라고 무제에게 부탁했으나 무제는 끝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세군은 오손왕의 손자인 손잠(孫岑)의 아내가 되어 딸을 낳았다. 이처럼 한나라를 흉노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 공신인 세군(細君)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 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며 슬픔 속에 살다가 늙어 죽었다.
◐ 기행(紀行) 여정
1. 위구르족의 터전 우루무치(烏魯木齊)
8월 22일 오후 7시 10분, 영종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은 5시간 20분을 비행한 끝에 밤 12시 20분에 우루무치 공항에 도착하였다. 서울과 시차는 3시간 30분이라고 하나 중국은 북경시간으로 통일한다고 하니 시계를 한 시간 늦추어 11시 20분으로 맞추었다. 숙소는 5성급 호텔(美麗華賓館)이라는데 시설은 별로이고 기온은 30도 정도로 한밤중인데도 후텁지근하다.
여행사의 관광 일정이 우루무치로부터 깐수성(甘肅省)인 둔황으로 가서 그곳에서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관광을 시작하여 마지막 날 우루무치로 다시 돌아와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으로 엄청난 거리(1,680km: 4천 2백리)를 갔다가 되짚어 돌아와야 한다.
천산산맥 북쪽 기슭의 오아시스에 자리 잡은 우루무치는 몽골어로 ‘좋은 목초지’라는 의미라는데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중심이며 이 지역의 행정, 문화, 경제, 산업의 중심지로 제일 큰 도시이다. 이곳은 이슬람 문화권인 위구르족이 가장 많이 살며 언어와 풍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생김새도 아랍권을 닮은 외모이다. 우루무치시 인구는 120만 정도인데 중국내에서 위구르인들은 여러모로 평판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잦은 독립시위로 인한 듯)
2. 환상적인 경관의 천산천지(天山天池)
우루무치의 천산(天山) 천지(天池) / 우루무치 홍산(紅山) 공원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둔황(敦煌) 근처의 유원(柳園)까지는 기차로 11시간 정도 걸리고, 거기서 다시 버스로 둔황까지는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기차 출발이 저녁 9시 40분이라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우루무치 인근의 천산천지(天山天池) 관광길에 나섰다.
중국인들은 중국 북동부 길림성의 장백산 천지(白頭山 天池)보다도 이곳 천산의 천지를 더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해발 2,000m 정도의 이 호수는 천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이 고인 호수로 산 아래의 황량한 사막 불모대지를 적시는 젖줄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불모의 뜨거운 벌판을 지나 천산이 가까워지자 계곡이 나타나고 계곡 속으로 푸른 나무와 숲이 나타나 눈이 편안해 진다. 계곡 멀리 푸른 초원이 나타나며 유목민족인 카자흐 족들의 천막집 파오(Pao)가 보이고, 양떼와 소,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천지(天池)를 오르려고 좁고 가파른 계곡도로를 오르다보니 수천마리의 염소 떼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오고 있어 수 십대의 관광버스들이 꼼짝을 못한다. 무리해서 비집고 가던 우리 버스가 기어이 염소 한 마리를 깔고 말았다. 염소 주인과 염소 값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느라...
천지(天池) 300m 쯤 아래 관광마을에 도착하면 이곳부터는 케이블카가 운행되는데 우리는 올라갈 때는 버스로 오르고 내려올 때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면 수정처럼 푸른 소천지(小天池)도 보이고,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울창하게 덮여있는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지나간다. 백두산 천지 2/3 정도의 크기라는 천산천지는 10여 대의 호화롭게 장식한 중국식 유람선이 관광객들을 싣고 호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물빛도 너무 아름답고, 주변의 경관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잠시 넋을 빼앗겼다. 우리 일행도 유람선을 타고 20여 분 남짓 호수를 돌았다.
점심식사를 했던 관광마을은 갖가지 관광소품들을 진열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데 특히 이곳 지방 특산인 한약재(동충하초<冬蟲夏草>, 백사<白蛇> 말린 것, 석이<石耳>버섯 등)들을 전시한 한약방이 눈길을 잡는다. 돌아오면서 우루무치 시내 가운데 있는 홍산공원(紅山)에 들렀다. 잘 가꾸어진 낮으막한 산으로 숲도 잘 가꾸어져 있고 휴식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삶의 여유가 보이고 표정들도 밝다. 우루무치 유일의 공원으로 토, 일요일이면 사람들로 무척 붐빈다고 한다. 공원의 꼭대기에 있는 3층 전시관의 맨 위층에 오르면 우루무치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3. 황량한 사막도시 둔황(敦煌) - 그 인근의 유적들
우루무치에서 저녁 9시 50분 유원(柳園)행 밤기차를 탔는데 6인 1실, 3층 침대가 있는 기차로 2층이 내 자리인데 비좁기 그지없고, 가격은 비교적 저렴하다고 한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너무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투루판(土魯番)인데 중국 단체관광객 떼거리가 올라타며 시끄럽기 짝이 없다. 비어있던 내 아래와 옆자리는 모두 중국 젊은 처녀들과 아주머니들이 차지한다.
아침 8시 30분에 유원에 토착하였으니 거의 11시간을 밤새워 달려온 셈이다. 곧 버스로 갈아타고 1시간 40분 만에 둔황에 도착하여 둔황양광호텔(敦惶陽光大酒店:Sunshine Hotel)에 짐을 풀고 아침을 먹었다.
예전 중국의 서쪽 끝이던 깐수성(甘肅)에 있는 둔황(敦惶)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 세워진 도시이다. 훗날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번성과 영화를 누렸으나 지금은 인구 18만 정도의 소도시로 인근의 막고굴(莫高窟), 양관고성(陽關古城) 관광으로 명맥이 유지되는 사막 가운데의 작은 오아시스 도시이다. 이곳 깐수성(甘肅省)은 신장성(新疆省)에 비하여 경제가 매우 좋지 않다고 하는데 특히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버스를 타고가다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곳은 사막(고비사막) 인근지역으로 모래바람이 특히 심하여 사주(沙州)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아침을 먹은 후 1시간 40분 거리의 양관(陽關)으로 이동하는데 뽀얀 고비사막의 흙바람 속으로 보수중인, 길도 아닌 길로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털털거리고 차가 달린다.
4. 중국 서부의 관문 양관(陽關)
양관은 작은 오아시스 옆에 세워진 중국 서부 관문으로 이곳을 개척한 장건장군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근처에는 박물관, 전시실 등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데 근처에는 적의 침입을 알리는 횃불을 올렸던 당시의 봉수대(烽燧臺)만이 옛 모습 그대로 반쯤 무너져 내린 채 쓸쓸히 언덕위에 서있다. 붉은 언덕 위에 올라서 보면 아득히 멀리 사막 너머로 흰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줄기가 보이는데 치롄산맥(祁连山脈)이라고 한다.
옛날, 이곳 양관을 나서면 타클라마칸 사막이 이어져 있는 죽음의 땅 서역(西域)으로, 살아 돌아오기를 기약하기 어려운 길로 알려졌다고 한다. 군인으로 혹은 장삿길로 이 양관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쉽지 않아 눈물로 송별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친구를 떠나보내는 슬픔을 읊은 당나라의 대시인 왕유(王維)의 동상과 시가 돌에 새겨져 있다.
실크로드의 시발점 양관고성 유적 / 당나라 대시인 왕유(王維) 시비
送元二使安西<원이사를 안서로 보내며/渭城曲>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위성에 내린 새벽비가 흙먼지를 적시네.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객사에 푸른 버들 색깔이 더욱 더 푸르구나.
勸君更進一杯酒(권군경진이배주) 그대에게 다시 술 한 잔 권하노니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양관 서쪽으로 나가면 아는 사람이 없을 터.
당(唐)의 대시인 왕유(王維)는 절친이었던 원이(元二)가 안서도호부(현 돈황) 사절로 가게 되자 송별의 술잔을 기울이며 읊은 시다. 위성(渭城)은 현 산시(山西)성 함양(咸陽)의 옛 이름이다.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시발점이었던 양관(陽關/천산북로의 시발점은 玉門關)은 이제 옛 영화를 까마득히 뒤로한 채 붉은 언덕위에 쓸쓸히 서 있고, 옆의 작은 오아시스 마을의 포도밭에는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사막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향기로움을 더해가고 있다.
5. 고대도시 둔황(敦煌)
둔황 박물관 소장 불화(佛畵) / 백마탑
둔황의 관광꺼리 중 첫 번째는 모가오쿠(莫高窟)이고, 그 밖에 중국 서부의 관문인 양관(陽關), 백마탑(白馬塔), 박물관(博物館), 명사산(鳴砂山), 월아천(月芽泉) 등이 있다. 양관(陽關)을 본 후 둔황으로 되돌아와 백마탑과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AD 386, 고승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불경을 실어오던 백마가 병들어 죽자 애도하여 세웠다는 커다란 탑으로 주위가 4각형 모양인 우리나라와 달리 둘레가 둥근 모양으로 상당히 높은 탑이다. 4세기에 세웠다는데 너무 완전하고 깨끗해서 조금 의심스럽다. 부근에는 자잘구레한 기념품을 파는 초라한 가게가 있고, 잠시 후 들른 박물관은 자그만 했으며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이 없다.
저녁 식사로 제공되는 이곳 특식인 ‘낙타발(駱足)’ 요리에 기대가 컸는데 7명 한 테이블에 달랑 한 접시만 준다. 웬 강냉이 튀긴 것을 수북이 쌓아놓은 접시 한쪽에 푹 고아서 볶은 듯, 한 사람이 겨우 한 조각씩 맛을 볼 수 있었는데 흡사 소 도가니 같은 맛이었다. 사막의 배라고 일컬어지는 낙타는 발이 특히 커서 사막 모래에서도 빠지지 않고 잘 걸을 수 있다. 가이드 녀석은 내일 발목이 잘린 낙타를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너스레를 떨어 모두들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 야시장을 구경하였는데 제법 사람들이 북적이고, 기념품 가게, 먹거리 가게들이 시장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중국지도 1장 12元, 낙타를 판자에 조각한 것 2개 10元씩, 그리고 실크 스카프는 160元 달라는 것을 깎아서 40元에 샀다.
또, 1000년 묵은 둔황 백단목(白檀木) 나무에 내 이름을 새겨주는데 30元, 낙타 조각이 매달린 열쇠고리 10개에 10元... 저녁에 발 마사지를 받으니 한결 피로가 풀린다.
6. 명사산(鳴沙山)과 월아천(月芽泉)
새벽 5시, 명사산 일출을 보기위해 눈곱만 떼고 바로 출발했다. 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낸다는 명사산(鳴沙山), 그리고 그 아래 거센 사막의 모래바람에도 굳건히 천년을 견디어 온 작은 눈썹모양의 오아시스가 월아천(月芽泉)이다. 어스름한 새벽 명사산 밑에 다다르니 50여 마리나 되는 낙타들이 관광객을 기다리며 줄지어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낙타에 올라 10여 분 모래 언덕을 오르는데 절렁거리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줄지어 낙타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천 년 전 실크로드의 대상(隊商)들이 새벽길 떠나는 모습이 연상되며 마치 꿈속을 더듬는 기분이 든다.
명사산 일출 / 능선 위 해맞이
모래산 밑에서 낙타를 내려 가파른 20여 m의 모래언덕을 기어 올라가는데 좁은 나무사다리를 만들어 뉘어 놓아 밟으며 올라가야 하는데 너무 경사가 심해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좁은 모래산 꼭대기 능선을 따라 웅기중기 사람들이 모여앉아 일출을 기다리는 모습이 재미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끝없이 이어진 모래사막의 구불구불한 능선들이 한없이 이어져 있는데 반대쪽 하늘에는 희미한 빛을 내며 달이 떠 있고.... 이곳은 고비사막의 끄트머리라고 한다. 희뿌연 새벽 구름사이로 떠오르는 사막의 일출을 모두들 넋을 잃고 바라보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댄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내려올 때는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데 대나무로 썰매 밑을 대었는데 가파른데도 잘 내려가지 않아 두 손으로 노를 젓듯이 열심히 허위적 거려도 잘 움직이지 않는다. *명사산을 오를 때에는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붉은 고무덧신을 신는다.
명사산(鳴砂山)․월아천(月芽泉)․월천각(月泉閣) / 월아천 표지석(標識石)
다시 낙타에 올라 월아천(月芽泉)으로 향하였다. 마치 초승달 모양의 작은 호수가 눈에 들어오고, 그 옆 푸른 나무들에 둘러싸인 언덕위에 우뚝 솟은 월천각(月泉閣), 사진으로 수없이 보아오던 장면이다. 주위로는 높은 모래 산이 빙 둘러져 있다. 거센 모래바람에 묻기지 않고 천년을 견디어 왔다니 믿기지 않는 미스터리의 오아시스이다. 시간에 쫓겨 달음박질하여 월천각으로 달려가 난간에 잠시앉아 월아천을 굽어보노라니 감회가 새롭다.
7. 위대한 불교석굴 막고굴(莫高窟)
사암절벽에 조성된 막고굴 / 북대불(北大佛) 누각
다음은 불교 석굴유적인 모가오쿠(莫高窟) 관광에 나섰다. 이곳 깐수성(甘肅省)의 막고굴(莫高窟)은 허난성(河南省)의 용문(龍門)석굴, 산시성(山西省)의 운강(雲崗)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 중의 하나이다. 모두 5세기부터 조성되었으니 1,600여 년 전 인간의 정신세계인데 규모나 보존 상태로 보아 이 막고굴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되었다. 고비사막의 남단(南端), 천애(天涯)의 사암 절벽에 조성된 대 불교유적 막고굴은 모두 1,000여 개의 동굴이 있는데 탐사를 마치고 번호를 매겨 관리하고 있는 석굴만도 499개라고 하니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관광객에게 공개되고 있는 석굴은 그 중 극히 일부이다.
진입로 입구에서 바라보이는 거대한 7층의 누각은 96굴로 북대불(北大佛)을 모신 석굴이다. 이 북대불 석굴은 원래는 5층까지 누각이 있어 불상의 머리는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는데 후일 2층을 더 올려 머리 부분까지 누각 안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매표소에서 석굴 안에서는 모든 사진 촬영을 금지되어 있다고 하며 카메라를 맡겨놓으라고 한다. 이 귀중한 것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다니... 무척 안타깝다.
내가 본 것들을 인터넷을 뒤져 사진을 올렸는데 문제가 되지는 않을는지....
37.5m 높이의 북대불(北大佛), 26m의 남대불(南大佛), 누워있는 10m의 와불(臥佛)이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부처님이 열반에 드는 모습으로 모셔진 와불은 석굴 전체가 관(棺)모양으로 조성되어 있고 그 둘레에 제자들이 비통한 모습으로 둘러서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제 237호 석굴에는 여러 나라의 왕자들이 설법을 듣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신라관(두개의 깃털을 꽂은 花郞帽)을 쓴 신라인도 보인다.
화랑모를 쓴 신라인 / 158굴의 부처님 열반상
45굴 보살상 / 259굴 다보여래상
또 ‘동양의 모나리자 미소’로 알려진 259호 석굴의 다보여래상(多寶如來像)의 잔잔한 미소, 그리고 신라의 혜초(慧超)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발견된 17호 장경동(藏經洞)이 기억에 남는다.
왕오천축국전 / 16굴 벽에 뚫린 구멍 17호 장경동
그밖에도 눈부신 채색으로 채워진 천상과 지상의 세계,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들로 채워져 있는 석굴들은 들어설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다. 1500여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 앞에 나타난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신앙에 대한 열망이 나에게 이처럼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8. 둔황 막고굴의 수난
AD 4세기, 중국 전진(前秦)시기에 처음 조성되기 하여 약 1,000 년간에 걸쳐 조성된 굴은 무려 1,000여개나 되어서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는 둔황 막고굴은 숱한 수난을 겪게 된다.
이 막고굴의 수난이 시작된 것은 제17굴인 장경굴(藏經窟)이 발견되고 나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돈황 석굴 / 17호굴(장경동:오른쪽 문) / 도사 왕원록
중국 청(淸)나라 때인 AD 1900년, 이곳 막고굴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도교 태청궁(太清宮)의 도사(道師) 왕원록(王圓籙)은 기금을 모아 허물어진 막고굴을 보수하고 있었다. 당시 일을 도와주던 양씨가 우연히 16호굴의 벽에 틈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벽 뒤에 작은 공간(방)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벽을 허물고 들어가 보니 가로 2.8m, 세로 2.7m, 천정높이 3m의 자그마한 공간에 놀랍게도 5만여 점의 유물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보관 유물은 경전(經典), 고문서(古文書), 서화(書畫), 공예품(工藝品) 등이었는데 신라 혜초(慧超)스님이 쓴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왕원록은 수차례 중국 고위직들에게 보고하고 보존 및 관리를 건의하였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그냥 보관하라고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1906년, 영국의 역사학자 오렐스타인(Aurel Stein)이 이곳에 들러 약 1만 점의 유물을 가져간 것을 필두로, 1908년에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6천여 점을 가져갔다고 한다. 거기에 일본도 합세하여 후일 정토진종(淨土眞宗/西本願寺)의 종주(宗主)되는 된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까지 젊은 시절 탐사대를 조직하여 둔황 막고굴 유물을 약탈한다.
문화재도둑들 / 러시아 올텐부르크 탐사단◾오렐스타인(영국)◾폴 펠리오(프랑스)◾오타니 고즈이
왕원록은 중국 정부에서 막고굴 보수비용을 대주지 않자 몇 푼 안 되는 돈에 유물을 팔아서 막고굴 수리비용으로 충당하였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장경굴(藏經窟) 뿐만 아니라 다른 굴들도 크고 작은 도굴과 도난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심지어 러시아의 고고학자 올덴부르크(Oldenburg)는 2회에 걸쳐 석굴 벽화를 뜯어갔고, 미국 예일대학의 워너(L. Warner)는 벽화와 벽에 붙어있는 불상까지 떼어갔다고 한다.
현재 막고굴(莫高窟) 17호굴 장경동(藏經洞)에 보관되었던 유물들은 영국대영박물관에 1만여 점이 있고, 프랑스가 가져간 6천여 점은 파리 국립도서관과 프랑스국립박물관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라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다. 그 밖에 레닌그라드에 1만여 점, 일본에 2천여 점, 중국 북경에 1만점 정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 고대 4대 세계여행기
첨언(添言)하면.... 역사학자들은 고대 4대 세계여행기(古代 四大 世界旅行記)를 꼽으면서 첫 번째로 당(唐)나라 현장(玄奘)법사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꼽고, 두 번째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그리고 세 번째는 이븐 바투타(Ibn Battutah)의 여행기(리흘라:Rihla), 네 번째로 우리나라 신라 혜초(慧超)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꼽는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경로 / 마르코 폴로 / 리흘라(Rihla)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AD 7세기, 중국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스승과 경전을 찾아 16년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인도 등 138개국의 정보를 상세히 기록으로 남긴 책으로 전 12권의 여행기이다. 이 이야기를 AD 16세기, 명대(明代)의 소설가 오승은(吳承恩)이 손오공(孫悟空), 저팔계(豬八戒), 사오정(沙悟淨)을 등장시켜 소설화한 것이 중국 4대 기서(奇書) 중 하나인 서유기(西遊記)이다.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은 AD 13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중국 원나라에 와서 17년간 관리로 일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고향으로 돌아가 쓴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내용이 중국의 실제와 여러 가지 면에서 좀 차이가 있어 학계에서 논란도 있다고 한다.
이븐 바투타(Ibn Battutah)의 여행기(Rihla)는 14세기, 모로코의 탕헤르(Tanger)에서 태어난 여행가 바투타가 27년 간 44개국을 여행하고 기록으로 남긴, 이슬람의 눈으로 본 여행기이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AD 8세기, 신라 고승 혜초가 해로(海路)를 통하여 인도(印度:天竺國)로 갔다가 육로(陸路)로 중국으로 돌아오기까지 10년간의 여행을 상세히 기술한 여행기이다.
◉ 신라의 혜초(慧超) 스님
신라 경덕왕(AD 8세기) 때 불교의 한 종파인 밀교(密敎)연구에 심취하였던 혜초(慧超)스님은 만 4년간 인도에 머물며 경전을 연구하였고, 이어서 인도 북단(北端)의 카슈미르(Kashmir),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육로를 통하여 중국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이 30세 전후였다고 한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총 6,000여 자의 두루마리 형태인데 현재 일부분만이 있다고 한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란 뜻은 ‘다섯 천축국으로 여행 갔던 기록’ 이라는 말인데, 천축국은 인도를 가리키며 다섯 천축국이라는 말은 인도가 넓기 때문에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지방을 한꺼번에 부른 이름으로 인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원본은 3권이었다고 하나,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현존본은 사본으로 전체내용인지 요약본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책은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9. 하밀(哈密)과 선선(鄯善) 인근의 유적들
둔황(敦煌)에서 허미(哈密)까지 버스로 9시간 30분(430km)이 걸리고, 다시 허미에서 선선까지 4시간(320km) 동안 사막 가운데를 달린다. 둔황은 깐수성으로, 경계를 벗어나 신장지구로 들어서면 도로포장 상태가 훨씬 나아져서 빨리 달린다.
황량한 사막은 시뻘건 흙더미와 돌 부스러기들로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의 연속인데 노중에 용변을 보기위해 차를 세우면 길옆은 온통 말라빠진 便(똥)이 널려있고,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휘몰아치는지 소변을 보면 바지 앞을 적시기 일쑤다. 여자들은 자그마한 언덕 너머로 바람에 휘둘리며 달려야 하는데 소변으로 젖은 신발의 모래를 털어내며 돌아온다. ^^*
그 옛날, 우리는 지금 차를 타고 달리면서도 지치는 이 이 메마른 황무지 길을 낙타에 짐을 실은 대상(隊商)들이 하염없이 걸어갔을 생각을 하면 저절로 머리가 수그려진다. 허미가 가까워지자 그 황량한 벌판에도 먹을 풀이 있는지 야생 낙타들이 풀을 뜯으며 몰려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 오아시스 농산물
자그마한 오아시스 도시 허미(哈密)는 공업과 무역의 중심도시로 부상하고 있다는데 인근에 대 유전(西河油)도 있어 주목받는 도시이다. 그러나 예전부터 허미과(哈密果-멜론)의 산지로 유명하여 20여 종류의 멜론과 포도가 중국 전역으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충분한 일조량과 좋은 물 덕분인지 당도가 무척 높고 포도는 물론 멜론도 무척 달고 맛있어서 우리도 질리도록 먹었는데 우리나라 과일값에 비하여 무척 싸다.
오아시스 포도 / 당도가 무척 높은 수십 종의 건포도 / 포도 건조장
포도는 말린 건포도가 시장마다 종류별로 엄청나게 많이 쌓아놓고 파는데 건조 방법에 따라 품질이 다르고 가격도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한다. 나무에 매달린 채로 말리는 것이 제일 상품이고, 송이로 따서 건조장에 매달아 자연풍으로 말리는 것이 다음인데 한 달 쯤 걸린다고 한다. 요즘은 약품처리로 일주일 만에 말리는 것도 있다는데 제일 하품이고 인체에 유해하다고 한다. 이 부근은 가는 곳마다 흙벽돌로 구멍이 뻥뻥 뚫리게 지은 포도 건조장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 유목민 카자흐(Kazak) 족
허미에서 1시간 20분 거리에 있는 천산산맥 기슭의 파리쿤(巴里坤)은 유목민들의 터전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며, 유목민 카자흐족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위구르(维吾尔)인은 서양인 외모를 닮은 아랍계통으로 무슬림들인데 비하여 카자흐 족은 전형적인 몽골계 인종으로 우리와 외모가 거의 같고 순박하여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 카자흐 족 승마체험을 했는데 말도 자그마하고 순하다. 승마 체험 후 방문한 카자흐 천막집 파오(Pao)에서는 전통복장을 갖춰 입은 주인여자가 흰 비단 천을 들고 환영의 인사를 하며 파오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 마유(馬乳)로 만든 치즈와 허미과를 대접한다.
파리쿤 목장 / 파오 안주인의 환대 / 회왕묘
다음날, 시설이 훌륭한 하밀 홍성호텔(哈密 紅星賓館)에서 1박을 하고 아침에 회왕묘(回王墓)를 관람했다.
회왕묘는 회족(回族)이 세웠던 하밀국의 역대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회교사원 모습의 건물도 있고, 역대 회왕들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쪽 귀퉁이인 쿠무타크(庫木塔格) 사막에서 사막 찦차(Jeep) 타기. 상당히 높은 모래언덕을 가속을 이용하여 모래에 안 빠지고 용케도 올라가는데 아슬아슬하다. 엄청난 굉음을 내는데 한번 갔다 와서는 엔진을 식히려고 물을 붓는데 엄청난 김이 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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