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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琳 『一切經音義』와 인도네시아 室利佛逝國(Sriwijaya)간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
- 慧超 『往五天竺國傳』 전반부 복원을 위하여 -
김영수
인도네시아국립교원대학교(UPI)
초빙교수
차례
I. 들어가는 말
II. 慧琳 『一切經音義』
1. 배경과 내용
2. 惠超 『往五天竺國傳』上卷 수록 39개 어휘
III. 室利佛逝國(Sriwijaya)
1. 발흥과 불교
2. 慧琳 『一切經音義』수록 어휘와의 관계
IV. 慧超 『往五天竺國傳』전반부 여정 복원
1. 중국 廣州에서 室利佛逝國(Sriwijaya)까지
2. 室利佛逝國(Sriwijaya)에서 裸形國까지
V. 나오는 말
참고문헌
I. 들어가는 말
인도에서 발흥한 후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우리 민족의 다난한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면서 그 뿌리를 굳건히 내리게 된다. 三國이 한반도에 鼎立을 준비하던 시기에 전파된 불교에 대해 우리 민족은 이전의 정령숭배, 주술 등 원시 종교의 행태에서 벗어나 인간 심성과 영혼을 제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신봉하게 된다. 아울러 많은 사람이 출가와 득도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 속에서 불교가 꽃 피울 수 있게 했고, 심오한 불교의 교리가 체계화될 수 있게 그 밑 거름이 되었다. 이와 함께 구법의 열망과 득도의 한 과정으로 한반도 삼국 시기에 많은 승려가 入唐과 목숨을 건 入竺 순례를 단행하게 된다. 新羅僧 慧超처럼 그의 순례기인 『往五天竺國傳』을 남겨 후대에 이름을 전한 사례도 있지만 구법의 순례 길 위에서 흔적 없이 入寂한 경우를 우리는 발견하고 있다.
현존하는 慧超의 순례기 『往五天竺國傳』필사본 전반부 여정이 결락 되었음을 唐僧 慧琳의 『一切經音義』에 수록된 惠超 『往五天竺國傳』과 비교하면 파악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慧超의 출발지인 중국(廣州로 추정)에서 필사본 『往五天竺國傳』첫머리에 기록되고 『一切經音義』中卷 첫 어휘로 나오는 裸形國까지 관련 부분이 유실된 상태이다. 이와 관련하여 좁게는 한국 불교, 넓게는 세계 문화의 찬란한 기록 유산인 慧超의 『往五天竺國傳』의 유실된 부분의 완벽한 복원이야말로 한국 불교가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유실된 慧超의 『往五天竺國傳』전반부 복원과 관련하여 동원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로는 慧琳의 『一切經音義』, 중국과 동남아 史料, 특히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존속했던 室利佛逝國(Sriwijaya)의 지정학적 의미, 海流와 季節風 등 자연조건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자료로는 慧琳의 『一切經音義』를 꼽을 수 있다.
문화는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한 문화의 원형은 다른 문화와 만날 때 또 하나의 문화 원형을 창출하게 된다. 慧超의 역사, 문화적 위상은 그가 인도-서역 문화와 만난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자 그가 만난 문명의 기록이 온전히 오늘 우리의 전통 속에 무던히 접목되게 한 한국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往五天竺國傳』은 그 시대 나라의 언어와 지리와 역사와 종교와 풍물 등을 통섭해냄으로써 지방화와 세계화를 아우르는 세방화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해석학적 가능성을 머금고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II. 慧琳 『일체경음의』
1. 배경과 내용
慧琳(737-820)은 중국 서역 疏勒 출신이다. 속성은 裵씨이다. 어려서 유교를 배우고 뒤에 출가하여 不空三藏(Amoghavajra)(705-774)을 섬겼다. 특히 인도의 聲明과 중국의 訓詁에 정통하였다. 唐 建中 말년부터 元和 5년까지 (783-810) 20여 년 동안 『一切經音義』100권을 완성하였다. 元和 15년 장안 西明寺에서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一切經音義』100권, 『新集浴像儀軌』1권 등이 있다. 『一切經音義』는『大般若經』에서 시작하여 『小乘記傳』에 이르기까지 그 뜻을 분명하게 설명하였는데 字林, 字通, 聖流, 切韻, 玉篇 및 여러 경전과 雜史를 이용하였다. 일명 『大藏音義』, 『慧琳音義』이라고도 한다.
본 慧琳 『一切經音義』卷 第 一百에 惠超 『往五天竺國傳』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중 유실된 필사본 『往五天竺國傳』전반부 여정 관련 어휘 39개가 상권에서 발견되고 있다.
2. 惠超『往五天竺國傳』상권 수록 39개 어휘
39개의 어휘의 음과 주석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閣蔑(각멸 : 林邑으로 지칭되며 大國이며 불교를 신봉한다)/撥帝(발제: 音價만 한정)/葛[束+辛]都(갈날도 : 音價만 한정)/蓱流(평류 : 선박이 불안전하게 파도에 휩싸인 모습)/鬄鬚(체수 : 남방 夷族 장식풍습. 수염을 깎고, 문신을 하고 쇠뭉치 모양으로 머리를 틀어 상투 올리고(椎髻, 추계) 귀를 뚫는 풍습)/抄掠(초략 : 音價만 한정/노략질해서 뺐다)/屯戹(둔액 : 音價만 한정)/迴路(형로 : 우회하여 가는 길)/翩翩(편편 : 새가 날개 짓하며 나는 모습)/杳杳(묘묘 : 깊고 그윽한)/掛錫(괘석 : 音價만 한정)/盼長路(반장로 : 音價만 한정)/撩亂(요란 : 音價만 한정)/山 [白+巴](산파 : 音價만 한정)/倥 [伀+心](공종 : 반가움이 없는 모습)/牙嫩(아눈 : 音價만 한정)/參差(참차 : 전후좌우 차이)/邀祈(격기 : 간절한 기도)/恰如(흡여 : 비슷함)/輥芥(곤개 : 音價만 한정)/崎嶇(기구 : 音價만 한정)/槍 [矛+肖](창삭 : 音價만 한정/창을 의미하는 것 같음)/麞鹿(장록 : 音價만 한정/노루.사슴)/玳瑁(대모 : 바다거북. 등껍질이 황금색)/龜鼈(구별 : 거북이와 자라)/迸水(병수 : 내 뿜어 흩어지는 물)/嶷然(억연 : 산이 높고 가파른 절벽)/渤澥(발해 : 파도가 큰 바다)/湓穹蒼(일궁창 : 허공을 덮는 큰 파도)/走竄(주서 : 쥐가 구멍으로 빨리 도망치는 모습)/黿鼉(원타 : 사람을 능히 해치고 네 개의 발을 갖고 있고 몸에 바둑알 모양의 비늘 있으며 길이는 5, 6척 정도인 동물)/椰子漿(야자장 : 잎은 파초를 닮았으며 목재는 배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열매 안에 물은 달다)/木柵(목책 : 남만 夷族 山 거주지역에 두르는 나무 담장)/杆欄(간난 : 짐승들 침입을 막기 위한 목조 시설)/錐頭(추두 : 音價만 한정)/壓舶(압박 : 바다 가운데 큰 배)/拋打(포타 : 던지면서 때리다)/峻滑(준활 : 音價만 한정)/聒地(괄지 : 音價만 한정)
위 39개 어휘를 해로 여정과 육로 여정으로 구분하여 보면 우선 해로 여정과 관련된 어휘로는 蓱流, 翩翩, 玳瑁, 迸水, 渤澥, 湓穹蒼, 壓舶 등을 들 수 있고 육로 여정과 관련된 어휘로는 閣蔑, 鬄鬚, 迴路, 掛錫, 邀祈, 槍 [矛+肖], 麞鹿, 龜鼈, 黿鼉, 椰子漿, 木柵, 杆欄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서 혜초의 필사본『往五天竺國傳』전반부 (중국 廣州 출발(추정) - 裸形國)까지의 여정은 육로와 해로가 교차 되어 진행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III. 室利佛逝國(Sriwijaya)
1. 발흥과 불교
Sriwijaya가 7세기경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전에 동남아, 인도차이나반도 지금의 베트남 호치민 시를 중심으로 扶南(Funan) 혹은 Pnom 이라 하는 왕국이 옥에오(Óc Eo)를 수도로 하여 존립하였다. 당시 육상 비단길을 이용한 대상들은 신변안전 및 도로 상태의 불확실성, 상품 운송 시간의 절약이라는 측면과 조선기술의 발달로 점차 해상 비단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기술은 거대한 무역선의 건조는 불가능했으며 먼바다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안전한 해안선을 따라 항해가 가능한 소형 선박이 주종을 이루었다.
扶南의 주 소득원은 중국과 인도. 아랍제국, 메소포타미아 등을 잇는 항로에서 그들이 관장하는 지역의 해상 중계무역에서 나왔으며 그것은 주로 무역선들의 안전항해를 보장하는 반대급부로 받는 선박의 통행료, 선적된 물품에 대한 안전보장비 등이었다. 따라서 지역 내의 안전, 특히 해안선과 항로를 유지, 보존하기 위하여 강력한 해군력이 필요했다. 5세기 초 扶南은 강대한 해양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주위의 다른 해양 세력 등장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 존재한 왕국은 서부 자바(Java)에 있었던 따루마느가라(Tarumanegara), 그리고 동부 칼리만탄에 있었던 물라와르만(Mulawarman) 정도였으며 이 두 왕국은 그들 지역 안 해역만 관장하는 정도였다. 扶南에 대항하여 힘을 겨룰 수 있는 해양왕국은 존재하지 못했으며 단지 인도차이나반도 내륙에 있었던 농경 국가인 크메르(Khmer) 왕국 정도였다. 크메르는 농업 중심 경제 구조였다. 따라서 벼농사에 필요한 비옥한 토지의 확보, 도로, 사원, 왕궁의 건설 및 농지 정리 등 국가 기반시설 확충과 유지를 위해 자연스럽게 육군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이 발달하게 되었고 그 근간은 농민이었다. 영토의 확장 즉 농지의 확장을 위해 크메르는 무력으로 인근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하여 6세기 말에는 扶南 왕국을 그들의 세력 아래에 두게 된다. 농경 위주의 크메르의 출현은 무역 거래를 위한 ‘해상 비단길’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감소시켰으며 그 전환기적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7세기경 해양왕국인 스리위자야가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동남아 지역 해상로에 대한 扶南의 해상권 공백(vacuum of power)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있었던 室利佛逝國/Sriwijaya : 이하 스리위자야로 칭함)가 인계하게 된다.
그 기원을 밝힐 수 있는 객관적 史料가 현재까지 발견되지 못해 수마트라에서 스리위자야의 세력이 언제 출현했는지에 대해 고찰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그러나 7세기 중엽부터 중국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室利佛逝/尸利佛誓와 스리위자야 간의 상관관계는 20세기 접어들면서 유럽 학계를 중심으로 진행된 연구 결과로 상당 부분 밝혀지게 되었다. 즉 室利佛逝 또는 尸利佛誓와 스리위자야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존재했던 왕국을 지칭하는 동일 명칭임이 밝혀진 것도 그중 하나이다. 『新唐書』에서는 스리위자야의 첫 조공 사신이 중국에 도착한 연대를 67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0년 수마트라 팔렘방(Palembang) 인근 지역인 꺼두깐 부낏(Kedukan Bukit)과 딸랑 뚜오(Talang Tuo) 등에서 발견된 4개의 비문 내용 해석을 통해 스리위자야가 역사상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논증되었다. 비문 내용에 대한 해석을 통해 스리위자야 왕국에서 불교가 번창했음도 알게 되었으며 왕이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승리를 얻고 전리품을 획득해 개선한 사실과 684년에는 자바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新唐書』를 보면 ‘…室利佛逝, 一曰尸利佛誓, 過軍突弄山二千里, 地東西天里, 南北四千里而遠, 有城十四, 以二國合總, 西曰郞婆露斯…’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室利佛逝 또는 尸利佛誓는 베트남의 軍突弄山<Con son> 섬을 지나 2천 리 거리에 있으며 땅의 넓이는 동서 천리, 남북 4천 리에 달한다. 두 나라의 城을 합치면 14개가 된다. 서쪽을 郞婆露斯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室利佛逝 또는 尸利佛誓는 스리위자야의 한자 音寫이며 郞婆露斯는 Barus의 한자 音寫이다.
초기 스리위자야는 해양왕국으로 구분할 수 없고 무시(Musi) 강어귀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 세력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영토 확장의 결과로 농경 중심에서 해상 중계무역이 중심이 되는 경제로 전환하게 된다. 왕국의 기틀이 잡히면서 스리위자야의 중심 세력은 수마트라 남부 전체 지역, 인근 島嶼, 순다 해협 그리고 자바 인근의 섬들을 장악하게 된다. 이것은 스리위자야가 당시 동남아 지역 교역 항로의 중심부인 싱가포르(Singapore) 해협과 말라카(Malacca) 해협을 장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배경에는 강력한 海軍力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영토 확장에 힘입어 스리위자야는 동남아 지역의 거대한 해양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해군력이 약한 중국을 대신하여 동남아 지역 ‘해상 비단길’의 안전을 지켰고 조공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스리위자야는 당시 중국의 왕조들과 대등한 역학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초기 스리위자야의 영토는 수마트라 남부 무시 강어귀인 팔렘방과 그 인근 지역이었으며 7세기 초엽까지는 해상 중계무역의 요충지로서 지리적 특성이 없었다. 반면에 수마트라 잠비(Jambi) 지역에 그 중심을 두고 있던 멀라유(Melayu)는 동남아 항로, 특히 말라카 해협에 面한 양질의 항구를 갖고 있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멀라유가 스리위자야 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 점이 스리위자야가 국가 체계를 정비한 후 최우선으로 그들의 영토 확장의 대상으로 멀라유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다름이 아닌 양질의 항구 확보였다. 스리위자야는 멀라유 영토였던 방까(Bangka) 섬을 686년에 복속시켰고 람뿡(Lampung) 지역을 병합한 후 북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말라카 해협에 面한 전략적 항구들을 손에 넣게 된다. 스리위자야가 멀라유를 무력 합병한 사실은 의정이 685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귀국 시, 스리위자야 팔렘방에서 머물면서 기록한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멀라유는 이미 스리위자야의 예속 하에 들어갔다 …’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스리위자야가 멀라유를 공략한 것은 685년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스리위자야는 계속해서 말레이 반도의 끄다(Kedah) 지역 병합, 끄라협지(峽地/Isthmus Kra) 장악과 자바 지역 공략을 통해 8세기 초엽 동남아 지역의 절대 강자로 부상하게 된다. 이에 따라 동남아 항로를 지나가는 선박들은 호·불호를 떠나 반드시 스리위자야의 영해를 지나가게 되었다. 항해권과 해상 교역권을 장악한 스리위자야의 국력은 중계무역 거래에 따른 이윤 창출, 교역품에 대한 관세 징수, 안전 항해 보장비라는 명목으로 받는 각종 세금 등을 바탕으로 급속히 신장하게 된다.
스리위자야와 중국 간의 교섭은 670년부터 742년까지 사이에 적어도 6회가 기록되어 있다. 689년 義淨이 중국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기 위해 항구에 정박 중인 商船에 올랐을 때 이상 기후로 배가 출항을 해 하는 수 없이 일단 廣州로 왔다가 즉시 스리위자야로 되돌아가 譯經을 계속했던 사실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스리위자야와 廣州 사이에는 정기적인 선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리위자야와 중국과의 관계는 義淨이 귀국한 다음 약 50년 뒤인 742년에 중국에 한 번 더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을 뿐 900년까지 150년 이상을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스리위자야는 中近東 지역으로 상아, 자단, 주석, 향료 특히 樟腦(또는 龍腦) 등을 수출했고 중국지역으로는 향수, 상아, 과일, 설탕, 산호, 목면, 약재 등을 수출했다. 이 교역품 중에 스리위자야 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발견되는 것은 스리위자야가 제3국의 생산품을 중계 수출, 우회 수출까지도 담당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한편 말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을 장악한 스리위자야는 조선과 항해 기술 발전에 더욱 힘을 쏟게 되며 그 결과로 더 먼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을 만들게 된다.
인도에서 문명이 개화된 이래 그 영향이 벵갈(Bengal)만을 거쳐 동남아에 점진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여 5세기경에는 인도의 통치체계를 근간으로 불교와 힌두교를 신봉하는 왕국이 동남아 각지에 출현하게 된다. 인도와 동남아 간의 교류, 접촉은 주로 상인들에 의해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항해에 필요한 계절풍 시기가 아닐 경우 상인들은 일정 기간 동남아 현지에서 체류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들의 세력을 점차 확장하여 정착촌까지 건설하게 된다. 특히 인도인들의 동남아 지역 정착촌 건설은 인도의 지식 계층인 승려 계급 및 학자들의 자연스러운 이주를 유도했고, 인도 내에서의 政變이 있을 경우 왕족과 귀족 계급의 동남아 이주를 촉진 시켰다. 이러한 인도의 영향은 동남아 각 지역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크게 미치게 된다.
인도네시아 자바의 경우 힌두 문명이 이미 5세기 이전에 자리를 잡았으며 캄보디아, 수마트라, 보르네오에 있던 힌두 정착민들과 밀접한 문화적인 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바 불교의 주류는 大乘佛敎인데 密敎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불교가 브라만(Brahman)교를 압도하고 주도권을 가졌던 스리랑카와는 달리 자바에서는 불교와 브라만교가 같은 길을 가는 협력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불교와 브라만교는 같은 종교의 두 국면으로 이해된 것이다. 자바인들은 초인적인 여러 붓다(Buddha)가 힌두신들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阿彌陀佛(Amitabha)은 마하데와(Mahadeva)의 다른 이름이며 不空成就如來佛/Amoghasiddhi)는 비슈누(Vishnu)의 別名으로 받아들였다. 불교는 자바에서 힌두 문명과 같은 배를 탄 셈이었으며 이 두 종교는 무슬림(Muslim)의 침공으로 자바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인도네시아에 있어 불교의 전파는 안드라(Andhra) 제국 상인들의 영향이 제일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버마(현 : 미얀마), 인도차이나,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해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이들 나라보다 고도로 발달한 사회구조, 정치 체제, 문화 그리고 불교를 소개했다. 또한 인도의 굽다(Gupta) 왕국과 같은 막강한 왕조가 발흥하여 그 결과 강제로 내몰린 인도의 여러 왕조 사람이 인도네시아로 유입도 인도네시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처음에 도입된 불교는 上座部 佛敎였으나 7세기 초부터는 大乘佛敎가 들어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義淨은 스리위자야 지역 사람들이 신봉하는 불교 중 密敎인 金剛僧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수마트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碑文은 683년에 세워진 꺼두깐 부낏 비문, 684년에 건립된 딸랑 뚜오 비문, 686년 까랑 버라히(Karang Berahi) 비문, 방까(Bangka) 섬의 꼬따 까뿌르(Kota Kapur) 비문 등 4개이다. 모든 비문은 다 같이 고대 말레이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딸랑 뚜오 비문에는 Pranidana<誓願>, Kalyanamitra<善知識>, Bodhicita<菩提心>, Ratnaturaya<三寶> 등 불교 용어가 발견되고 있다. 특히 Bajrahsarira<金剛僧> 등 密敎 계통(Tantric Buddhism)의 어휘가 있어 당시 스리위자야 왕국에는 大乘佛敎 특히 密敎가 신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7세기 후반 중국의 入竺僧인 義淨은 여행기 『南海寄歸內法傳』을 통해서 스리위자야 사정을 자세하게 알렸다. 그는 인도로 순례 가는 중간에 스리위자야에 머무르면서 범어(Sanskrit)를 익혔고 스리위자야의 密敎 전통을 중국 남부지역으로 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義淨에 따르면 스리위자야는 당시 중국, 동남아, 인도와 활발하게 교역 활동을 하면서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義淨이 방문했던 시대에 이 지역은 密敎의 중심지로서 각광 받았으며 주변의 국가들로부터 密敎를 익히기 위해 많은 승려가 찾아 왔던 불교 중심지였다. 義淨에 의하면 이곳에는 1천 명 이상의 스님들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學僧이었고 불교의 거의 모든 분야를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스리위자야 불교는 오늘날 동남아에서 볼 수 있는 南方 테라와다(Theravãda) 불교 즉 上座部 佛敎가 아니었다. 이들의 불교는 大乘佛敎 계열의 密敎였고 사실상 이곳을 중심으로 密敎가 인도와 중국 남부지역으로 퍼져 나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10세기경 동인도의 고승으로 티베트에 密敎를 전한 아티샤(Atisa)가 密敎 스승을 찾아 스리위자야 팔렘방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스리위자야에서 密敎가 얼마나 융성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義淨의 『大唐西域求法高僧傳』을 보면 入竺하는 외국 승려들은 예외 없이 스리위자야에 들러 거기에서 범어와 불경을 공부하고 더운 기후와 음식을 인도에 들어가기 전, 먼저 익히기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入竺僧들이 장기간 또는 단기간 스리위자야 지역에 체류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증거로서 당시 스리위자야에는 대규모의 불교 학교와 사크아키르티(Sakyakirti)라는 고승이 있었고 아울러 많은 승려의 구법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들 수 있다.
『諸蕃志校注』에 보면 ‘… 스리위자야에서는 금으로 불상을 만들며 새로운 국왕이 등극하면 금불상을 만들었다. …’ 라고 기록하고 있다(有佛名金銀山, 佛像以金鑄, 每國王位, 先鑄金形以代其軀). 또한 『嶺外代答』卷 二三, 三佛齊條에 ‘… 三佛齊 왕은 聖佛에 향을 피워 예를 올린다 …’ (有聖佛齊國王再歲一往燒香)라고 언급하고 있어 스리위자야 불교는 왕권의 비호 아래 스리위자야인들의 정신적인 중요한 척도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딸랑 뚜오 비문을 보면 스리위자야 왕국에서 大乘佛敎가 어떻게 신봉되었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즉
‘… Swasti. Çri. Çakawarsatita 606 dim dwitiya Çuklapaksa wulan Çaitra ini niparwuat, parwan Dapunta Hyang Çri Jayanasa. Ini pranidhanan Dapunta Hyang …’
해석은 ‘… 얼마나 기쁘고 성공적인가. 606 사카(saka), 사이뜨라(Saitra), 2일 스릭세뜨라(Sriksetra) 庭園 工事를 시작했다. 이는 다뿐따 향 스리 자야나사(Dapunta Hyang Sri Jayanasa)왕의 명령이다. …’
위에 언급한 딸랑 뚜오 비문 내용은 제1행에서 2행까지이며 나머지 3행부터 14행까지는 스릭세뜨라 정원에 심어질 화초의 이름과 정원을 건설하는 목적 즉 모든 사람에게 생물의 번창함을 통해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하겠다는 大乘佛敎 중 密敎의 교리가 적혀 있다.
수 세기에 걸쳐 동남아 해상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富를 축적한 스리위자야도 내적, 외적인 요인으로 서서히 멸망하게 된다. 그 주요 원인은 세 차례에 걸친 인도의 촐라만달라(Colamandala)왕국의 공격, 주요 항구 특히 팔렘방 항구의 土砂 堆積에 따른 효용성 감소, 중앙과 지방간의 경제력 불균형 등으로 7세기경에 출현한 스리위자야는 13세기에 멸망하게 된다. 특히 1271년 등장한 중국의 元은 그들의 세력을 전 세계로 넓히게 된다. 그 세력이 남부 아시아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자연히 동남아시아 세력균형도 깨지게 된다. 시암(Siam)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에 존재했던 스리위자야의 屬國들을 강점, 그 지역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시암에 대항하여 맞설 수 없는 무기력한 스리위자야 왕권에 대한 반발로 지역 내 屬國들의 이탈은 급속히 확대되었고 그 여파로 선박들 특히 무역선들은 스리위자야 영해 안의 방까 섬을 경유하지 않고 싱가포르 해협을 지나가게 된다. 이는 스리위자야의 급격한 경제적 부의 감소를 초래했고 왕권의 기틀마저도 흔들리게 했다.
반면에 Pax-Monggolica의 영향으로 ‘육상 비단길’의 안전이 보장되었으며 많은 隊商이 그 길을 택해 교역하게 되었다. 元의 세력 확장은 동남아 지역에 많은 난민을 발생시켰으며 이들 중 다수는 국적 불명의 海賊이 되어 ‘해상 비단길’의 안전을 위협하게 된다. 자연히 선박들이 동남아 ‘해상 비단길’을 통과하는 빈도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2. 慧琳 『一切經音義』수록 어휘와의 관계
현존하는 『往五天竺國傳』이 節略本인지, 寫錄本인지, 또는 草稿本인지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었다. 羅振玉은 현존본이 慧琳이 보았던 세 권으로 된 『往五天竺國傳』의 절략본이라고 주장했고, 오타니 가쓰나오(大谷勝眞)는 사록본 설을 주장했다. 그는 잔본이 중권 후반부와 하권을 절략한 것이 아닌 원본 그대로 사록한 不分卷이라고 주장을 했다. 高柄翊은 『一切經音義』에 명백히 세 권이라고 명기해 놓고 있음을 지적했다. 정수일도 『一切經音義』에 주석된 85개 어휘도 상권 39개, 중권 18개, 하권 28개 분간되어 있어 원본은 분권되지 않은 단행본이 아니라 세 권으로 된 분권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慧琳 『一切經音義』85개 어휘 중 현 殘本 어휘와 吻合되는 것은 단지 17개뿐이다. 이것은 殘本이 原本의 寫錄本이 아니라 節略本임을 입증함을 의미한다. 慧琳 『一切經音義』주석 어휘와 殘本의 어휘 간에 나타나는 吻合性과 앞 책의 상권에 실린 39개 어휘는 殘本에서 缺落된 첫 부분(상권)과 마지막 부분(하권)의 내용과 분량을 추정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
慧琳의 『一切經音義』에 수록된 惠超『往五天竺國傳』 상권 중 39개 어휘 가운데에서 慧超의 스리위자야 체류, 체제 개연성을 직접 나타내는 어구, 어휘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慧超의 여정과 스리위자야 지역의 연관 관계를 간접으로 나타내는 어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들 수 있는 어휘로 鬄鬚이다. 주석에 따르면 남방 夷族의 장식풍습으로 수염을 깎고, 文身과 椎髻, 즉 머리를 쇠망치 모양처럼 생긴 상투를 틀어 올리는 풍습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장식풍습에 대해 특히 상투를 틀어 올리는 머리 장식풍습에 대해 『島夷志略』三佛齊條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俗淳, 男女椎髻…’ 즉 ‘… 三佛齊 풍습은 순박하고 남녀 모두 머리를 틀어 쇠망치 모양 상투처럼 올린다.…’로 되어 있다. 지금도 수마트라를 포함하여 대부분 지역의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그들의 전통 의상인 끄바야(kebaya)를 착용할 때 필수적으로 머리 뒷부분에 부착하는 둥근 형태의 가발인 상굴(sanggul)과 椎髻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들 수 있는 어휘로서 掛錫,을 지적할 수 있다. ‘錫杖을 걸어 놓다’의 의미로서 본래의 뜻은 ‘승려가 승당에 들어가 안거할 때 그가 갖고 다니는 錫杖을 벽에 걸어 둔다’가 된다. 즉 장, 단기 시간 안에 승려가 사찰에 거주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慧超가 불교를 신봉하는 지역을 지나갔거나 혹은 체류했거나 아니면 그 지역에 대한 견문을 들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어휘로 간주할 수 있다. 당시 大乘佛敎 중 密敎가 널리 퍼져 있었던 스리위자야 왕국에서 慧超가 入竺하기 전, 長短期 체류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즉 慧超의 密敎 스승인 金剛智와 不空三藏이 入唐을 위해 지나온 여정을 되짚어가는 慧超 입장에서는 스리위자야에서의 체류는 당연한 과정으로 여겼을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往五天竺國傳』에서 밝혀졌듯이 외국어 습득과 변별에 남다른 능력이 있는 慧超가 스리위자야에 체류하면서 산스크리트어를 습득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꼽을 수 있는 어휘로서 黿鼉를 들 수 있다. 慧琳 『一切經音義』에 따르면 ‘…사람을 능히 해치는 파충류로서 네 개의 발과 꼬리가 있으며 가죽은 두껍고 몸길이는 5 또는 6척 정도에 등에는 비늘이 있다.…’라고 했다. 이 黿鼉를 수마트라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있는 악어와 비슷하게 생긴 파충류인 왕도마뱀인 비아왁(biawak)과 흡사함을 말할 수 있다.
IV. 慧超 『往五天竺國傳』전반부 여정 복원
1. 중국 廣州에서 室利佛逝國(Sriwijaya)까지
실크로드(Silk Road)는 고대 최대의 무역 루트였다. 중국의 비단 原絲가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을 넘어 인도로 전해졌고 인도에서 화려하게 염색되고 직조된 아름다운 비단이 그 길을 따라 중앙아시아 사막을 넘어 육로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지는 모습들을 많은 사람은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그리스와 로마의 많은 상인이 이집트로부터 紅海와 아라비아(Arabia)해를 거쳐서 중인도와 남인도로 넘어와서 향신료 무역을 중심으로 ‘해상 비단길’을 개척했다. 당시 남인도에는 드라비다(Dravdian)계 언어를 사용하는 왕국들이 융성했으며 해상으로 인도 남서부의 무지리스(Muziris)를 통해 아라비아해를 넘어 이집트·로마와 교역했고 인도 남동부의 아리까메두(Arikamedu)를 통해 벵골만을 넘어 동남아시아와 교역했다. 이 해상무역 루트는 인도대륙 남부를 가로질러서 계속 확장되었다. 아라비아해의 무지리스와 벵골만의 아리까메두 사이에 육로가 형성되었고 인도 남동부 해안에서 벵골만을 통해 동남아시아 서부지역으로 ‘해상 비단길’이 확장되었다.
초창기에는 동인도 해안선을 따라 서북쪽으로 올라가서 오늘날의 방글라데시와 미얀마의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무역 루트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점차 벵골만의 몬순 계절풍에 익숙해지고 항해하는 배의 규모가 커지면서 스리랑카와 남인도를 중심으로 장거리 직항로가 열리게 된다. 남인도와 스리랑카를 기점으로 보면 벵골만을 통과한 무역선은 안다만(Andaman) 제도 또는 니코바르(Nicobar) 제도를 통해 말라카 해협으로 진행할 수 있었고 南 적도 해류를 통해 수마트라섬 남단을 돌아서 순다(Sunda) 해협으로 진행할 수도 있었으며 계속해서 북동쪽으로 진행하여 함사와띠(Hamsavati)로 불렸던 오늘날 미얀마 남부의 이라와디(Irrawaddy)강 하구 및 남부 해안 지역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해안선 무역이 중심이 되었을 때 동서무역의 교차점은 말레이반도의 폭이 가장 좁아지는 지역인 크라 峽地(Isthmus Kra)였다. 길고 긴 말레이반도의 해안선을 빙빙 돌아가기보다는 반도의 폭이 가장 좁은 곳을 육로로 연결하여 해상무역 루트를 동남아시아 중앙부로 확장 시키는 것이었다. 점차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바다에서 활동하는 배들이 크고 단단해지면서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중국 측 史料들은 쿤룬보(Kunlunbo)란 이름으로 동남아의 무역선을 지칭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배들은 티크와 같은 단단한 나무를 줄로 엮어서 바느질하듯 만든 숀 플랭크 보트(sewn plank boat)로서 그 흔적들이 말레이반도, 필리핀, 수마트라 등에서도 발견된다. 배의 규모가 커지고 교역량이 늘어가면서 몬순 계절풍을 이용한 장거리 항로가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도입된다.
동인도 갠지스강 하구에서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길은 점차 방글라데시와 미얀마의 해안선을 이용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정반대로 남서쪽으로 스리랑카까지 내려간 후 스리랑카에서 안다만 제도를 지나 말라카 해협을 통해 남 중국해로 나가는 항로를 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니코바르 제도를 지나 수마트라 남단 해안선을 따라 횡단하는 항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南 적도 해류를 이용한 것으로 먼바다 항해를 통해 스리랑카에서 수마트라와 자바 지역으로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唐朝 대외교섭 총관인 鴻矑卿과 지방 절도사를 거쳐 재상까지 역임한 賈耽(730-805)은 지리서인『皇華四達記』를 저술하여 당시 국내외를 잇는 7대 통로를 상술하였는데 그중 일곱 번째 통로가 바로 ‘廣州 通海夷道’이다. 賈耽은 廣州로부터 페르시아만 서안의 烏刺國(오불라)까지 이어지는 해로의 경유지와 항행 일정 등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그가 제시한 노정은 크게 네 구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 구간은 廣州에서 수마트라 佛逝國까지이고 제2 구간은 佛逝國에서 師子國(스리랑카)까지이다. 따라서 慧超의 入竺 南海路는 제 1구간과 제 2 구간의 전반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唐代 南海 항해에 있어서 거의 모두가 廣州를 출항지로 삼았으며 보통 중국 선박을 이용했었다. 출항 시기는 보통 계절풍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북동풍이 강해지는 음력 10월 말 – 12월을 택했고 중국으로 들어오는 선박은 남서풍이 강하게 되는 음력 4월 – 5, 6월경을 택했다.
남인도양에서는 태평양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大還流가 존재하지만 북인도양에서는 해역이 좁고 또 무역풍이 발달하지 않아서 大還流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겨울에 북동 계절풍이 여름에는 남서 계절풍이 강하므로 겨울과 여름의 해류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즉 북인도양의 해류는 계절풍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이 특징이다. 북동 계절풍 시기에는 해양 상에서는 西流(북적도해류/North Equatorial Current)이지만 벵골만과 아라비아해에서는 反 시계 방향의 還流를 형성한다. 남서 계절풍 시기에는 벵골만 내에서는 해류가 시계 방향의 환류를 형성하지만 그 남쪽 해양에서는 東流를 한다.
賈耽의 ‘廣州通海夷道’를 보면 唐朝가 흥했을 때 해상을 통한 오랑캐들과의 해상 교류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중 동남아 지역과 관련된 부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廣州에서 동남향으로 200리 바닷길을 따라가면 屯文山에 도착하게 되고 다시 서쪽으로 이틀 가면 九州石이 나오고 남쪽으로 이틀 가면 象石에 이르게 된다. 다시 서남쪽으로 3일을 가면 占不勞山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산은 環王國 동쪽 200리 거리에 있다. 다시 남쪽으로 이틀 가면 陵山, 또 하루 거리에 門毒國이 있으며 다시 이틀을 가면 軍突弄山이 나오고 거기서 5일쯤 가면 해협이 나오는 데 이를 質이라 부른다. 이 해협은 남북 100리이며 북쪽 해안은 羅越國이며 남쪽은 佛逝國이다. 佛逝國에서 4, 5일 가면 訶陵國이 나오는데 이 나라는 남쪽 지역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佛逝國을 떠나 서쪽으로 3일 가면 葛葛僧祗國에 도착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포악하며 지나가는 배를 약탈하곤 한다. 이 나라에서 다시 서쪽으로 4, 5일 가면 勝鄧洲에 도착하고 다시 5일을 가면 婆露國에 도착하게 되고 거리서 6일을 가면 婆國, 伽藍洲에 도착하게 된다.
위의 뱃길을 펠리오(P. Pelliot)는 다음과 같이 고증하고 있다. 屯文山은 大礖山이 있는 香港 북쪽 해안과 琵琶洲 사이에 위치하고 九州石은 七洲 즉 타야(Taya)인 것 같다, 象石은 獨珠山, 즉 틴보사(Tinbosa)이고 占不勞山은 지금의 베트남 쿨라오 참(Culao Cham)이고 環王國은 과거 林邑이고 陵山은 베트남의 사호이(Sahoi) 岬이다. 門毒國은 지금의 베트남 퀴논(Quynhon/歸仁) 지역으로 여겨지며 軍突弄山은 崑崙山으로 지금의 풀로 콘도르(Pulo Condore)이며 質은 지금의 싱가포르(Singapore) 해협이다. 羅越國은 말레이반도 남단 지역에 있었으며 佛逝國은 室利佛逝(Sriwijaya)이다. 訶陵國은 梵語인 깔링아(Kalinga)의 음사(音寫)로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에 있었던 왕국의 이름이며 葛葛僧祗國은 아마도 브라워스(Brauwers) 군도를 말하는 것 같다. 勝鄧洲는 아마 수마트라 델리(Deli) 또는 랑깟(Langkat) 지역을 의미하는 것 같고 婆國, 伽藍洲는 아마도 翠藍礖를 지칭하는 것으로 니고바르(Nicobar) 군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상기 펠리오의 고증을 다시 살펴보면 중국 廣州에서 출발한 배는 珠江을 따라 珠江灣을 거쳐 지금의 마카오(Macau) 앞바다로 나오게 된다. 그 후 海南島를 끼고 통킹(Tongking) 灣을 지나 베트남 북부지역의 동부 해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 후 베트남의 동부 해안 지역인 퀴논 등을 거친 배는 베트남 남부에 있는 콘손(Con son) 섬을 거치게 되는데 이 지역이 풀로 콘도르 섬, 즉 崑崙島이다. 이후 배는 싱가포르 해협을 거치게 되며 다음 항로로는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으로 가는 바닷길과 말라카 해협으로 가는 항로로 양분되게 된다. 말라카 해협으로 접어든 배는 수마트라 팔렘방, 델리, 랑깟 지역 등을 거쳐 니코바르 군도를 향해 나간다. 한편 자바 지역으로 향하는 항로는 자바의 북부지역으로 향하는 뱃길과 순다 해협을 거쳐 수마트라 남부, 서부, 북부지역으로 향하는 뱃길로 양분되게 된다.
인도양의 몬순 계절풍은 4월에서 9월 사이에는 아프리카 홍해에서 인도 서해안으로 향해 불고 11월에서 2월 사이에는 인도 서해안에서 아프리카 홍해로 불고 있다. 계절풍을 이용한 항로가 알려지면서 지중해와 인도 사이에서 대량 수송을 통한 대규모 교역이 가능해졌고 그리스·로마의 금화, 올리브 기름, 와인 등이 인도의 향신료, 면직물 등과 거래되기 시작했다. 몬순 계절풍을 이용한 장거리 항로가 동남아시아에 도입되면서 말레이반도 중부와 메콩(Mekong)강 하류를 연결했던 푸난(Funan/扶南)은 점차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리적 이점을 상실하게 되었다. 말레이반도 중부에서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배들은 몬순 계절풍을 이용하여 말라카 해협이나 순다 해협을 지나 수마트라섬이나 자바섬의 큰 항구로 향하게 되었다.
수마트라의 거대한 항구 지역인 팔렘방이 발전하면서 푸난은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팔렘방이 인도와 동남아시아 장거리 항로의 중심지가 되자 팔렘방의 말레이계 상인들은 자신들과 유사한 말레이계 언어를 사용하는 베트남 중부의 해상왕국 참빠(Champa)를 중간 기착지로 선호하기 시작했다.
2. 室利佛逝國(Sriwijaya)에서 裸形國까지
일정 기간 스리위자야에 체류한 후 慧超는 뱃길을 이용하여 裸形國으로 출발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때 사용했을 항로는 스리위자야의 중심 항구가 있는 팔렘방에서 승선하여 말라카 해협을 따라 北西 방향으로 진행한 뱃길을 꼽을 수 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팔렘방에서 출항하여 東南 방향으로 진행하여 순다 해협을 거쳐 수마트라 남단 해안선을 따라 北西 방향으로 진행한 뱃길을 들 수 있다. 두 항로 중 당시 스리위자야 해군력이 해상 안전을 장악한 말라카 해협 상황을 고려한다면 慧超는 말라카 해협을 따라 裸形國으로 진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지금까지도 그 위치에 대해 많은 異見이 노정되고 있는 裸形國의 위치를 인도양 안다만(Andaman) 해상에 있는 니코바르(Nicobar) 군도로 지목할 것인지 아니면 인도차이나 반도 서부 해안, 불특정 지역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V. 나오는 말
지금까지 慧琳 『一切經音義』에 수록된 惠超 『往五天竺國傳』上卷에 수록된 어휘 주석을 중심으로 入竺 과정에서 慧超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존재했던 室利佛逝國(스리위자야/Sriwijaya)에 체류했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유실된 慧超 『往五天竺國傳』전반부 항로인 중국 廣州(추정) 출발에서 裸形國까지 여정 복원을 시도해 보았다.
慧超가 수마트라에 존재했던 스리위자야에 체류했을 개연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慧琳 『一切經音義』어휘 주석 증 鬄鬚, 掛錫, 黿鼉를 분석해 보았다. 특히 『島夷志略』에 언급된 三佛齊 풍습인 머리 상투를 틀어 올리는 것<椎髻>이 수마트라, 스리위자야 지역 풍습임을 밝히면서 慧超의 여정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어휘로 지목하였다. 또한 그의 스승이 入唐 할 때 지나온 당시 동남아시아 密敎의 중심지였던 스리위자야를 慧超가 그대로 통과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밝혔다. 오히려 일정 기간 현지 (스리위자야)에 체류하면서 入竺 전 산스크리트어를 습득하고 인도의 예불 방식 등을 배웠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1200년 전 목숨을 걸고 해로를 통해 入竺했다가 육로를 이용하여 중국으로 돌아온 新羅僧 慧超와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졌던 왕국 ‘스리위자야’에 대한 연구가 우연의 일치처럼 20세기 초엽에 들어와서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연구의 중심에 우리와 인도네시아가 아닌 제3국의 관련 학자들이 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이에 晩時之歎이지만, 이 작은 연구가 한국, 한국 불교, 더 나아가서는 세계 문화사의 찬란한 기록 문화유산인 慧超의 『往五天竺國傳』의 완전한 복원 연구를 위한 다양한 노력에 일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아울러 惠超 연구의 외연 확장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동남아 불교 역사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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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국불교학회 춘계 학술대회 발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