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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回 衞石碏大義滅親 鄭莊公假命伐宋
제6회: 위나라 석작이 대의멸친하고 정장공이 사칭 칙령하여 송나라를 치다.
話說石厚才勝鄭兵一陣,便欲傳令班師。諸將皆不解其意,齊來稟復州吁曰:「我兵銳氣方盛,正好乘勝進兵,如何遽退?」州吁亦以為疑,召厚問之。厚對曰:「臣有一言,請屏左右。」州吁麾左右使退。厚乃曰:「鄭兵素強,且其君乃王朝卿士也。今為我所勝,足以立威。主公初立,國事未定,若久在外方,恐有內變。」州吁曰:「微卿言,寡人慮不及此。」少頃,魯、陳、蔡三國,俱來賀勝,各請班師。遂解圍而去。計合圍至解圍,才五日耳。石厚自矜有功,令三軍齊唱凱歌,擁衛州吁揚揚歸國。
한편, 석후가 정나라 군사 일진을 겨우 이겼다고 생각하고 바로 회군한다는 영을 내리자, 다른 여러 나라의 장수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제히 달려와서 주우에게 복명하기를, “우리 군사들의 예기가 비로소 왕성하게 일어나 그 승세를 타고 진격하기 좋은데, 어찌하여 갑자기 회군하려고 하십니까?” 하니, 주우도 역시 의아하게 생각하던 참에 석후를 불러 물었다. 석후가 대답하기를, “신이 주군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좌우를 물리쳐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주우가 손을 휘저어 좌우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니, 석후가 말하기를, “정나라 군사는 원래 강합니다. 또한 그 군주는 주나라 경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싸움에서 이겼으니 위엄을 세우는 데는 충분합니다. 주군께서 군위에 오르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나라 안의 일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만일 오랫동안 나라 밖에 나와 있으면 국내에서 변란이 일어날까 걱정됩니다.” 하니, 주우가 말하기를, “경의 말이 아니었으면 과인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으리라!” 했다. 조금 있다가, 노, 진, 채 삼국의 장수들이 모두 와서 승전을 축하하고 각각 회군하기를 청했다. 마침내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신정성을 포위했다가 포위를 푼 것이 겨우 5일 만이었다. 석후가 스스로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여 삼군에게 일제히 개선의 노래를 부르게 하고, 주우를 옹위하여 의기양양하게 위나라로 돌아왔다.
但聞野人歌曰:一雄斃,一雄興。歌舞變刀兵,何時見太平?恨無人兮訴洛京! 州吁曰:「國人尚不和也,奈何?」石厚曰:「臣父碏,昔位上卿,素為國人所信服。主公若徵之入朝,與共國政,位必定矣。」州吁命取白璧一雙,白粟五百鍾,候問石碏,即徵碏入朝議事。石碏託言病篤,堅辭不受。州吁又問石厚曰:「卿父不肯入朝,寡人欲就而問計,何如?」石厚曰:「主公雖往,未必相見,臣當以君命叩之。」乃回家見父,致新君敬慕之意。石碏曰:「新主相召,欲何為也?」
다만 들판의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니 이르기를, “한 명의 영웅이 죽자 또 다른 영웅이 일어선다. 노래와 춤은 칼을 든 병사들을 변하게 하는데, 태평성대는 언제나 볼 수 있을까? 낙양에 가서 호소할 사람이 없음을 한하노라!” 했다. 주우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아직도 화합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석후가 말하기를, “신의 아비 석작은 지난날 상경 벼슬에 있었는데, 평소에 백성들이 믿고 따랐습니다. 주공께서 그를 조정에 불러 함께 나라를 다스리자고 하신다면 주군의 자리가 틀림없이 안정될 것입니다.” 했다. 주우가 흰 구슬 한 쌍과, 흰 곡식 5백 종(鍾)을 보내어 석작을 문안하고 즉시 조정에 들어와 국정을 의논하라는 명을 내렸다. 석작은 병이 위중하다는 핑계를 대고 완강하게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다. 주우가 다시 석후에게 묻기를, “경의 부친이 입조(入朝)하기를 거부하니 과인이 직접 가서 계책을 물어보면 어떻겠는가?” 하니, 석후가 말하기를, “주공께서 비록 가시더라도 아마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직접 가서 주군의 명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했다. 이에 석후가 집으로 가서 부친을 뵙고, 새 군주가 경모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석작이 말하기를, “새 임금이 나를 부르니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했다.
石厚曰:「只為人心未和,恐君位不定,欲求父親決一良策。」石碏曰:「諸侯即位,以稟命於王朝為正。新主若能覲周,得周王錫以黻冕車服,奉命為君,國人更有何說?」石厚曰:「此言甚當,但無故入朝,周王必然起疑,必先得人通情於王方可。」石碏曰:「今陳侯忠順於周王,朝聘不缺,王甚嘉寵之。吾國與陳素相親睦,近又有借兵之好。若新主親往朝陳,央陳侯通情周王,然後入覲,有何難哉?」石厚即將父碏之言,述於州吁。州吁大喜。當備玉帛禮儀,命上大夫石厚護駕,往陳國進發。
석후가 말하기를, “다만 백성들의 마음이 화합하지 않아서 주군 자리가 불안한 상태라 부친께 좋은 계책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니, 석작이 말하기를, “제후가 새로 즉위하면 주나라 조정에 가서 고하고 인증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 새 주군이 주나라 왕에게 뵈면 주나라 왕이 보불(청흑색의 예복)과 관, 수레와 의복을 줄 것이다. 그것을 받고 명을 받들면 비로소 제후 군주가 된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어찌 딴소리를 하겠는가?” 했다. 석후가 말하기를, “매우 합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까닭 없이 주나라에 입조하면 주나라 왕이 틀림없이 의심할 것이니, 먼저 사람을 보내 왕에게 우리의 사정을 먼저 알린 연후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했다. 석작이 말하기를, “지금 진(陳)나라 군주는 주나라 왕에게 충성하여 따르고 조정에 들어가 뵙기를 거르지 않아서 왕이 매우 총애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진나라는 원래부터 서로 친하여 근자에 우리가 정나라를 정벌할 때도 군사를 빌리기까지 했다. 만약 새 주군이 진나라를 친히 방문하여 진후에게 우리의 사정을 천자에게 먼저 알려 달라고 부탁한 다음에 새 주군이 조정에 들어가 주왕을 배알하면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 했다. 석후가 즉시 그 아비 석작의 말을 주우에게 설명했다. 주우가 듣고 대단히 기뻐했다. 주우는 즉시 구슬과 비단 예물을 준비하여 상대부 석후의 호위를 받으며 진나라로 출발했다.
石碏與陳國大夫子鍼,素相厚善。乃割指瀝血,寫下一書,密遣心腹人,竟到子鍼處,托彼呈達陳桓公。書曰:「外臣石碏百拜致書陳賢侯殿下:衛國褊小,天降重殃,不幸有弒君之禍。此雖逆弟州吁所為,實臣之逆子厚貪位助桀。二逆不誅,亂臣賊子,行將接踵於天下矣!老夫年耄,力不能制,負罪先公。今二逆聯車入朝上國,實出老夫之謀。幸上國拘執正罪,以正臣子之綱。實天下之幸,不獨臣國之幸也!」陳桓公看畢,問子鍼曰:「此事如何?」子鍼對曰:「衛之惡,猶陳之惡。今之來陳,乃自送死,不能縱之。」桓公曰:「善。」遂定下擒州吁之計。
석작은 진나라의 대부 자침(子鍼)과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다. 석작은 곧 손가락을 찔러 흐르는 피로 편지 한 통을 써서 심복에게 주어 자침에게 전하고, 그 편지를 진환공(陳桓公)에게 바치게 했다. 편지에 이르기를, “남의 나라 신하인 석작은 백배를 드리며 진후 전하께 편지를 올립니다. 위나라는 국토가 협소한데다, 하늘이 재앙을 거듭 내려 나라의 군주가 시해되는 불행한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반역한 동생 주우가 한 짓이지만, 실은 신의 반역한 자식 석후가 작위를 탐하여, 포악한 사람을 도와서 일어난 일입니다. 두 반역자를 죽이지 않는다면 난신적자가 천하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노부는 늙어서 힘이 부족하여, 두 사람을 제압하지 못해 선군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 두 역신이 마차를 앞뒤로 해서 상국에 입조하러 가니, 실은 노부가 꾸민 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라건대 상국이 잡아서 죄를 밝히고 신하의 기강을 바로잡아 주시면, 이것은 실로 천하의 다행스러운 일이며 어찌 저희 위나라에만 다행이라 하겠습니까?” 했다. 진환공이 읽기를 마치고 자침에게 묻기를,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소?” 하니, 자침이 대답하기를, “위나라의 악행은 우리 진나라에도 나쁜 영향을 줍니다. 지금 두 사람이 진나라로 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찌 그냥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했다. 진환공이 말하기를, “좋소.” 하고, 마침내 주우를 잡을 계획을 정했다.
卻說州吁同石厚到陳,尚未知石碏之謀。一君一臣,昂然而入。陳侯使公子佗出郭迎接,留於客館安置。遂致陳侯之命,請來日太廟中相見。州吁見陳侯禮意殷勤,不勝之喜。次日,設庭燎於太廟,陳桓公立於主位,左儐右相,擺列得甚是整齊。石厚先到,見太廟門首,立著白牌一面,上寫「為臣不忠,為子不孝者,不許入廟!」石厚大驚,問大夫子鍼曰:「立此牌者何意?」子鍼曰:「此吾先君之訓,吾君不敢忘也。」石厚遂不疑。須臾,州吁駕到。石厚導引下車,立於賓位。儐相啟請入廟。州吁佩玉秉圭,方欲鞠躬行禮。
한편, 주우가 석후와 함께 진나라에 당도했다. 그들은 석작의 계획을 모르고 임금과 신하로 뽐내며 들어 왔다. 진환공이 공자 타(公子佗)에게 명하여 성밖으로 나가 영접하여 객관에 묶게 했다. 곧 진한공의 명이라며, 다음 날 태묘에서 회견하겠다고 전했다. 주우는 진후가 자기를 극진하게 대한다고 생각하여 기뻐해 마지않았다. 다음날, 태묘에 화톳불을 피우고 진환공은 주인 자리에 섰으며 좌우에는 신하들이 배석하여 대열이 매우 엄정했다. 석후가 먼저 당도하여 태묘의 문 위에 달린 하얀 팻말을 보았는데, 거기에 쓰기를, “신하가 되어 불충하거나 자식이 되어 불효한 사람은 이 태묘에 들어오지 말라!” 했다. 석후가 크게 놀라, 자침에게 묻기를, “이 팻말을 세운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니, 자침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선군의 교훈이라 우리 군주께서 감히 잊지 않으려고 세운 것입니다.” 했다. 석후가 더 의심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주우을 태운 수레가 도착하였다. 석후가 인도하여 손님 자리에 섰다. 접대하는 관리가 나와서 태묘에 들게 했다. 주우는 구슬을 차고 홀(笏)을 잡고 바야흐로 허리를 굽혀 예를 행하려고 했다.
只見子鍼立於陳侯之側,大聲喝曰:「周天子有命:『只拏弒君賊州吁石厚二人,餘人俱免。』」說聲未畢,先將州吁擒下。石厚急拔佩劍,一時著忙,不能出鞘。只用手格鬥鬥,打倒二人。廟中左右壁廂,俱伏有甲士,一齊攏來,將石厚綁縛。從車兵眾,尚然在廟外觀望。子鍼將石碏來書宣揚一遍,眾人方知吁厚被擒,皆石碏主謀,假手於陳,天理當然,遂紛然而散。史官有詩嘆曰:州吁昔日餞桓公,今日朝陳受禍同。屈指為君能幾日,好將天理質蒼穹。
그 순간 진환공 곁에서 시립하고 있던 자침이 큰 소리를 외치기를, “주나라 천자로부터 ‘주군을 시해한 역적 주우와 석후 두 사람을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죄를 면해 주라!’는 명을 받았다.”라고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먼저 주우를 잡아 생포했다. 석후가 급히 허리에 찬 칼을 뽑으려 했으나 황망 중이라 칼집에서 뽑을 수가 없었다. 석후는 맨손으로 싸워 두 사람의 장사들을 쳐서 넘어뜨렸다. 태묘의 좌우 칸막이 뒤에 매복시켜 놓은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석후를 포박했다. 주우를 따라온 수레와 병사들이 많이 있었으나, 아직 태묘 밖에서 관망할 뿐이었다. 자침이 석작이 보낸 편지를 두루 밝혔다. 사람들은 모두 석작이 주모하여, 진나라의 손을 빌려 주우와 석후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하늘의 이치로 볼 때 당연한 일이라며 뿔뿔이 흩어졌다. 사관이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주우가 지난날 환공을 전별연에서 죽이고, 오늘 진나라에 와서 똑같이 화를 당했다. 며칠이나 임금 노릇을 했는지 손가락으로 세워보고, 하늘의 이치를 푸른 하늘에 대고 물어보라.”고 했다.
陳侯即欲將吁厚行戮正罪。群臣皆曰:「石厚乃石碏親子,未知碏意如何。不若請衛自來議罪,庶無後言。」陳侯曰:「諸卿之言是也。」乃將君臣二人,分作兩處監禁,州吁囚於濮邑,石厚囚於本國,使其音信隔絕。遣人星夜馳報衛國,竟投石碏。卻說石碏自告老之後,未曾出戶。見陳侯有使命至,即命輿人駕車伺候,一面請諸大夫朝中相見。眾各駭然。石碏親到朝中,會集百官,方將陳侯書信啟看。知吁厚已拘執在陳,專等衛大夫到,公同議罪。百官齊聲曰:「此社稷大計,全憑國老主持。」
진환공이 주우와 석후에게 죄를 물어 죽이려고 하자 군신들 모두가 말하기를, “석후는 곧 석작의 친아들입니다. 석작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으니, 위나라에 청하여 스스로 치죄토록 하십시오. 그래야 뒷말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진환공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이 옳소!” 하고 주우와 석후 두 사람을 나누어, 주우는 복읍(濮邑)에 수감하고 석후는 본국에 감금하여 서로 간에 소식을 모르게 했다. 사람을 위나라로 밤새 달려가게 하여 석작에게 알려 주었다. 한편 석작은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둔 후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다가, 진후의 사자가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 종자에게 명하여 수레를 몰게 하여 궁궐로 향했다. 한편으로는 여러 대부들에게 조정에서 서로 만나기를 청했다. 여러 대부들은 모두 놀랐다. 석작이 친히 조정에 당도하여 여러 관리들을 모이게 한 후, 진환공이 보낸 서찰을 꺼내어 보게 했다. 위나라 신하들은 주우와 석후가 이미 진나라에 사로잡혀 오로지 위나라 대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함께 그들의 죄를 의논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위나라의 관리들이 일제히 말하기를, “이 일은 사직에 관한 큰일입니다. 저희 모두는 나라의 원로이신 대부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했다.
石碏曰:「二逆罪俱不赦,明正典刑,以謝先靈,誰肯往任其事?」右宰醜曰:「亂臣賊子,人得而誅之!醜雖不才,竊有公憤。逆吁之戮,醜當蒞之。」諸大夫皆曰:「右宰足辦此事矣。但首惡州吁既已正法,石厚從逆,可從輕議。」石碏大怒曰:「州吁之惡,皆逆子所釀成。諸君請從輕典,得無疑我有舐犢之私乎?老夫當親自一行,手誅此賊。不然,無面目見先人之廟也!」家臣獳羊肩曰:「國老不必發怒,某當代往。」石碏乃使右宰醜往濮蒞殺州吁,獳羊肩往陳蒞殺石厚。一面整備法駕,迎公子晉於邢。
석작이 말하기를, “두 역적의 죄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법과 형벌로 밝고 바르게 처리하여 선조의 영령에게 고해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맡겠소?” 하니, 우재(右宰) 추(醜)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반란을 일으킨 역적은 죽여야 합니다. 이 추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일찍부터 공분을 품어 왔습니다. 역적 주우를 죽이는 곳에 제가 마땅히 가겠습니다.” 했다. 여러 대부가 모두 말하기를, “우재는 족히 이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단지 이번 일의 주범인 주우는 이미 법에 따라 처리하겠지만, 석후는 주우를 따랐을 뿐이니 가볍게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석작이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주우의 악행은 모두가 반역한 아들 석후가 양성하여 생긴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법의 집행을 가볍게 하자고 하는 말은 내가 송아지를 핥는 어미 소같이 사정에 얽매인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게 아니오? 이 늙은이가 직접 진나라도 들어가 내 손으로 그 역적을 죽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선인의 사당을 뵐 수 있겠습니까?” 했다. 석작의 가신 누양견(獳羊肩)이 말하기를, “국로께서는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대신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석작이 우재 추는 복읍으로 가서 주우를 죽이는 자리에 참석하게 하고, 누양견은 진나라로 가서 석후를 죽이는 자리에 참석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어가를 갖추어 형(邢)나라에 망명한 공자 진(公子晉)을 모시러 보냈다.
左丘明修傳至此,稱石碏:「為大義而滅親,真純臣也!」史臣詩曰:「公義私情不兩全,甘心殺子報君冤。世人溺愛偏多味,安得芳名壽萬年!」隴西居士又有詩,言石碏不先殺石厚,正為今日並殺州吁之地。詩曰:「明知造逆有根株,何不先將逆子除!自是老臣懷遠慮,故留子厚誤州吁。」再說右宰醜同獳羊肩同造陳都,先謁見陳桓公,謝其除亂之恩,然後分頭幹事。右宰醜至濮,將州吁押赴市曹。
좌구명(左邱明 ; 魯나라 太史)이 춘추좌전(春秋左傳)을 편찬할 때, 석작의 일에 대해 칭송하기를, “대의를 위해 자식을 죽였으니 참으로 마음이 곧고 진실한 신하로다.”고 했다. 사관도 시를 지어 이르기를, “공의(公義)와 사정(私情)이 같이 온전할 수 없어서, 기꺼이 아들을 죽이고 임금의 원한을 갚았다. 세상 사람들은 사정에 치우쳐 분별을 못하니, 어찌 아름다운 이름을 만세에 전하랴?” 했다. 농서거사(隴西居士)가 또 시를 지어 석작이 애초에 석후를 죽이지 않아서, 마침내 오늘 주우와 함께 죽이게 되었다고 했다. 시에 이르기를, “역모의 뿌리를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어찌하여 미리 반역자를 죽이지 않았는가? 늙은 신하가 앞날을 내다보고 염려하였으나, 아들 석후를 살려두어 주우를 망쳤다.”고 했다. 한편, 우재 추와 누양견은 함께 진나라 도읍에 가서 먼저 진환공을 알현하고, 반란자들을 제거해 준 은혜에 대해 감사한 뒤에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헤어졌다. 우재 추가 복읍에 이르러 주우를 시가지 한가운데로 끌고 나오게 했다.
州吁見醜大呼曰:「汝吾臣也,何敢犯吾?」右宰醜曰:「衛先有臣弒君者,吾效之耳!」州吁俛首受刑。獳羊肩往陳都,蒞殺石厚。石厚曰:「死吾分內。願上囚車,一見父親之面,然後就死。」獳羊肩曰:「吾奉汝父之命,來誅逆子。汝如念父,當攜汝頭相見也!」遂拔劍斬之。公子晉自邢歸衛,以誅吁告於武宮,重為桓公發喪,即侯位,是為宣公。尊石碏為國老,世世為卿。從此陳衛益相親睦。
주우가 우재 추를 보자 큰소리로 외치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아니냐? 어찌 감히 나를 범하려 드느냐?” 했다. 우재 추가 말하기를, “지난날 위나라에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한 자가 있었다. 나는 그를 본받으려 할 뿐이다.” 하니, 주우가 머리를 숙이고 참형을 받았다. 누양견은 진나라의 도성으로 가서 석후의 형을 집행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석후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함거를 타고 가서 부친의 얼굴이나 한번 뵙고 죽겠다.” 하니, 누양견이 말하기를, “나는 너의 부친의 명을 받들어 반역자를 죽이려고 왔다. 네가 만약 부친이 보고 싶다면 너의 목을 가져가서 상면시켜 주겠다.” 하고 곧 칼을 뽑아 그를 참했다. 한편, 공자 진이 형나라에서 위나라로 돌아와서, 주우를 주살한 일을 무궁(武宮 ; 위나라 선조의 사당)에 고하고, 다시 환공의 장례를 치르고 위나라 군위에 올랐다. 이가 위나라 선공(宣公)이다. 위선공은 석작을 국가 원로로 삼고 그 후손을 대대로 경으로 삼았다. 이후로 진나라와 위나라는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卻說鄭莊公見五國兵解,正欲遣人打探長葛消息。忽報公子馮自長葛逃回,在朝門外候見。莊公召而問之。公子馮訴言:「長葛已被宋兵打破,佔據了城池。逃命到此,乞求覆護!」言罷痛哭不已。莊公撫慰一番,仍令馮住居館舍,厚其廩餼。不一日,聞州吁被殺於濮,衛已立新君。莊公乃曰:「州吁之事,與新君無干。但主兵伐鄭者,宋也。寡人當先伐之。」乃大集群臣,問以伐宋之策。
한편, 정장공은 다섯 나라(송,노,진,채,위)의 군사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바로 사람을 장갈에 보내 (공자 풍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했다. 갑자기 사자가 보고하기를, (송나라) 공자 풍이 장갈에서 탈출하여 조정 문밖에서 알현을 청하고 있다고 했다. 정장공이 불러들여 물으니, 공자 풍이 호소하기를, “장갈은 이미 송나라 군사들에게 깨뜨려져서 성지를 점령당했습니다. 저는 간신히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 몸을 다시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말을 마치자 통곡했다. 정장공이 공자 풍을 위로하고 전에 머물렀던 관사에 살게 하며 의식 공급을 후하게 했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주우가 복읍에서 피살되고 위나라는 이미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정장공이 말하기를, “주우가 정나라를 쳐들어온 일은 새로운 위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겠으나, 다만 군사의 주동이 되어 우리 정나라를 쳤던 것은 송나라다. 내가 마땅히 먼저 송나라부터 정벌해야겠다.” 했다. 곧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송나라를 칠 계책을 물었다.
祭足進曰:「前者五國連兵伐鄭,今我若伐宋,四國必懼,合兵救宋,非勝算也。為今之計,先使人請成於陳,再以利結魯。若魯陳結好,則宋勢孤矣。」莊公從之,遂遣使如陳請成。陳侯不許,公子佗諫曰:「親仁善鄰,國之寶也。鄭來講好,不可違之。」陳侯曰:「鄭伯狡詐不測,豈可輕信?不然,宋衛皆大國,不聞講和,何乃先及我國?此乃離間之計也。況我曾從宋伐鄭,今與鄭成,宋國必怒。得鄭失宋,有何利焉?」遂卻鄭使不見。
제족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지난번에 다섯 나라가 연합하여 우리나라를 공격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약 송나라를 정벌한다면 나머지 네 나라는 반드시 두려워하여, 군사를 모아 송나라를 구할 것입니다. 이는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현재로서 가장 좋은 계책은 우선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맺고, 다시 좋은 조건을 내세워 노나라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만약 노나라, 진나라와 손을 잡으면 송나라의 형세가 고립됩니다.” 했다. 장공이 제족의 의견을 좇아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환공이 응하지 않았다. 공자 타가 진환공에게 간하기를, “인자한 마음으로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음은 나라의 보배입니다. 정나라가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데 이를 거절함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진환공이 말하기를, “정백이라는 사람은 교활하게 속이는 것이 비상한데 어찌 가볍게 믿을 수 있겠소? 그렇지 않으면, 송나라와 위나라 같은 대국과는 우호 관계를 맺지 않고, 어찌하여 우리나라와 먼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하겠소? 이것은 이간책이 분명하오. 더욱이 우리는 지난번에 송나라를 따라 정나라를 정벌한 적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정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으면, 송나라는 반드시 노할 것이오. 정나라를 얻고 송나라를 잃으면 어느 편이 이득이겠소?” 했다. 마침내 (진환공은) 정나라의 사신을 접견하지 않았다.
莊公見陳不許成,怒曰:「陳所恃者,宋衛耳。衛亂初定,自顧不暇,豈能為人?俟我結好魯國,當合齊魯之眾,先報宋仇,次及於陳。此破竹之勢也。」祭足奏曰:「不然,鄭強陳弱,請成自我,陳必疑離間之計,所以不從。若命邊人乘其不備,侵入其境,必當大獲。因使舌辨之士,還其俘獲,以明不欺,彼必聽從。平陳之後,徐議伐宋為當。」莊公曰:「善。」乃使兩鄙宰率徒兵五千,假裝出獵,潛入陳界,大掠男女輜重,約百餘車。陳疆吏申報桓公。
진나라가 강화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정장공은 화를 내며 말하기를, “진나라가 믿는 바는 송나라와 위나라인데, 위나라는 반란을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돌아보기에도 겨를이 없으니, 남을 위해 무엇을 하겠느냐? 우리가 노나라와 결맹을 맺고 제나라와 노나라의 군사를 합쳐 먼저 송나라에 원수를 갚고, 그 다음에 진나라를 친다면 이것이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일 것이다.” 했다. 제족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정나라는 강하고 진나라는 약합니다. 우리가 화의를 청했지만, 진나라는 틀림없이 이간책이라고 의심하고 화의에 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선 변경의 군사들에게 명하여, 진나라 변경의 방비가 허술한 곳을 골라 쳐들어가면 반드시 얻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그 후에 구변이 좋은 사자를 진나라에 보내 포로와 재물 등을 돌려주어 속이지 않음을 밝히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의 수호 요청을 따를 것입니다. 진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은 후에 서서히 송나라 정벌을 의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했다. 정장공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하고, 즉시 정나라의 양쪽 변경 수령에게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사냥하는 체하면서 진나라 땅으로 잠입하여 그곳의 남녀 백성과 재물들을 약탈하여 백여 수레에 싣고 돌아오게 했다. 진나라의 변경 수령이 진환공에게 보고했다.
桓公大驚,正集群臣商議,忽報:「有鄭使潁考叔在朝門外,齎本國書求見,納還俘獲。」陳桓公問公子佗曰:「鄭使此來如何?」公子佗曰:「通使美意,不可再卻。」桓公乃召潁考叔進見。考叔再拜,將國書呈上。桓公啟而觀之,略曰:寤生再拜奉書陳賢侯殿下:君方膺王寵,寡人亦忝為王臣,理宜相好,共效屏藩。近者請成不獲,邊吏遂妄疑吾二國有隙,擅行侵掠。寡人聞之,臥不安枕。今將所俘人口輜重,盡數納還,遣下臣潁考叔謝罪。寡人願與君結兄弟之好。惟君許焉。
진환공이 크게 놀라 여러 신하를 모아 상의했다. 갑자기 보고하기를, “정나라의 사신 영고숙이 국서를 가지고 포로와 노획물을 돌려주겠다고 궁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진환공이 공자 타에게 묻기를, “정나라 사신이 온 이유는 무슨 뜻이오?” 했다. 공자 타가 말하기를, “사절을 보낸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시 물리치면 안 됩니다.” 했다. 진환공이 영고숙을 불러 접견했다. 영고숙이 인사를 올리고 정나라의 국서를 바치자 진환공이 열어 보았다. 대략 이르기를, “오생은 두 번 절하고 진후 전하께 삼가 국서를 올립니다. 군후께서는 천자의 총애를 받아 왔습니다. 과인 역시 황공하게도 천자의 신하로 있으니, 이러한 이치로 보아도 서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함께 주나라의 울타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친선을 청했으나 이루지 못했는데, 우리나라 변방의 관리가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겼다고 의심하고, 귀국의 변경을 함부로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습니다. 과인이 그 일에 대해 듣고 자나 깨나 늘 불안했습니다. 오늘 잡혀온 백성들과 재물 등을 모두 돌려드리며, 저의 신하인 영고숙 편에 사죄의 뜻을 전합니다. 원컨대 과인은 군후와 결의형제를 맺어 우호하고자 하오니, 오로지 군후의 허락이 있기를 바랍니다.” 했다.
陳侯看畢,方知鄭之修好,出於至誠。遂優禮潁考叔,遣公子佗報聘。自是陳鄭和好。鄭莊公謂祭足曰:「陳已平矣,伐宋奈何?」祭足奏曰:「宋爵尊國大,王朝且待以賓禮,不可輕伐。主公向欲朝覲,只因齊侯約會石門,又遇州吁兵至,耽擱至今。今日宜先入周,朝見周王。然後假稱王命,號召齊魯,合兵加宋。兵至有名,萬無不勝矣。」鄭莊公大喜曰:「卿之謀事,可謂萬全。」時周桓王即位已三年矣。莊公命世子忽監國,自與祭足如周,朝見周王。
진환공이 국서를 다 읽고 나서, 정나라가 수호하려는 뜻이 진실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드디어 영고숙을 극진히 접대하고 공자 타를 답례 사절로 정나라에 보냈다. 이로부터 진나라와 정나라는 수호를 맺어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정장공이 제족에게 말하기를, “진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으니, 송나라를 치는 게 어떤가?” 하니, 제족이 아뢰기를, “송나라는 작위가 높고 나라는 큽니다. 주나라 조정에서도 손님으로 대접하니 가벼이 칠 수 없습니다. 지난날 주군께서 천자를 뵈러 조정에 가려다가 제나라 군후와 언약 때문에 석문에서 회합하였고, 또 주우의 병란을 만나 지금까지 지체되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먼저 주나라에 가서 주왕을 알현하십시오. 그런 후에 왕명을 거짓으로 칭하여 제나라와 노나라를 불러서 군사를 합쳐 송나라를 쳐야 군사 활동에 명분이 있게 됩니다. 이러고도 이기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하니, 정장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경의 꾀는 만전을 기한 계획이라 하겠소,” 했다. 이때가 바로 주환왕이 즉위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정장공이 세자 홀에게 나라를 맡기고 제족과 함께 주나라로 가서 주왕을 알현했다.
正值冬十一月朔,乃賀正之期。周公黑肩勸王加禮於鄭,以勸列國。桓王素不喜鄭,又想起侵奪麥禾之事,怒氣勃勃。謂莊公曰:「卿國今歲收成何如?」莊公對曰:「託賴吾王如天之福,水旱不侵。」桓王曰:「幸而有年,溫之麥,成周之禾,朕可留以自食矣。」莊公見桓王言語相侵,閉口無言,當下辭退。桓王也不設宴,也不贈賄,使人以黍米十車遺之曰:「聊以為備荒之資。」莊公甚悔此來,謂祭足曰:「大夫勸寡人入朝,今周王如此怠慢,口出怨言,以黍禾見訕。寡人欲卻而不受,當用何辭?」
바로 그날이 겨울 11월 초하루로, 마침 제후들이 천자에게 하례를 올리는 날이었다. 주공 흑견이 왕에게 권하여 정백에게 예를 베풀고, 열국의 제후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주나라 환왕은 원래 정백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한 정나라가 주나라 변경을 침입하여 보리와 벼이삭을 베어 간 일을 생각하여, 성난 기운이 일어났다. 주왕이 정장공에게 말하기를, “경의 정나라는 금년 농사 작황이 어떠하오?” 하니, 정장공이 대답하기를, “대왕의 하늘 같은 복에 힘입어서 홍수나 한발도 입지 않았습니다.” 했다. 주환왕이 말하기를, “다행히 수년 동안 온(溫) 지방의 보리와 성주 지방의 벼가 있어서 짐도 굶지 않고 견딜 만하오.” 했다. 정장공은 가시 돋친 주환왕의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조당에서 물러 나오고 말았다. 주환왕은 정백을 위해 잔치도 베풀지도 않았고, 물품도 하사하지 않았다. 며칠 후 사람을 시켜 곡식을 실은 수레 열 대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받아 두었다가 흉년이 들 때 쓰도록 하시오.” 했다. 정장공은 주나라에 입조한 행위를 몹시 후회하면서 제족에게 말하기를, “경의 말을 듣고 입조했는데, 지금 주왕이 나를 소홀하게 대하고, 말마다 원망을 늘어놓으면서 곡식을 실은 수레를 보내 나를 꾸짖고 있소. 나는 곡식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고 싶은데, 어떤 구실을 대야 하겠소?” 했다.
祭足對曰:「諸侯所以重鄭者,以世為卿士,在王左右也。王者所賜,不論厚薄,總曰天寵。主公若辭而不受,分明與周為隙。鄭既失周,何以取重於諸侯乎?」正議論間,忽報周公黑肩相訪,私以綵繒二車為贈,言語之際,備極款曲。良久辭去。莊公問祭足曰:「周公此來何意?」祭足對曰:「周王有二子,長曰沱,次曰克。周王寵愛次子,屬周公使輔翼之,將來必有奪嫡之謀。故周公今日先結好我國,以為外援。主公受其綵繒,正有用處。」莊公曰:「何用?」
제족이 대답하기를, “제후들이 정나라를 존중하는 이유는 누대에 걸쳐 주 왕실의 경사로서 천자의 좌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하사한 물건은 많고 적고 간에 모두 일컫기를 천자의 총애라고 합니다. 주군께서 만일 받지 않으신다면 주 왕실과는 분명 틈이 생기고 정나라는 주나라 경사의 직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제후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이렇게 의논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공 흑견이 방문했다고 알렸다. 흑견은 사사로이 준비한 채색 비단을 수레 두 대에 싣고 와서 정장공에게 바치고, 아주 간곡한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돌아갔다. 장공이 제족에게 묻기를, “주공 흑견이 이렇게 온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제족이 대답하기를, “주나라 천자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타(沱)라 하고 차자는 극(克)이라 합니다. 주왕은 차자 극을 총애하여 주공에게 보좌하도록 하였습니다. 장차 장자로부터 태자의 자리를 빼앗기 위한 음모가 반드시 있을 것인데, 오늘 주공(周公)이 우리나라와 먼저 좋은 관계를 맺어 두려는 이유는 외부 지원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주공께서 채색 비단을 받아 두시면, 장차 쓸 데가 있습니다.” 했다. 정장공이 말하기를, “그것을 어디에 쓰겠소?” 했다.
祭足曰:「鄭之朝王,鄰國莫不知之。今將周公所贈綵帛,分布於十車之上,外用錦袱覆蓋,出都之日,宣言『王賜』。再加彤弓弧矢,假說:『宋公久缺朝貢,主公親承王命,率兵討之。』以此號召列國,責以從兵,有不應者,即係抗命。重大其事,諸侯必然信從。宋雖大國,其能當奉命之師乎!」莊公拍祭足肩曰:「卿真智士也!寡人一一聽卿而行。」隴西居士詠史詩曰:綵繒禾黍不相當,無命如何假託王?畢竟虛名能動眾,睢陽行作戰爭場。
제족이 말하기를, “정나라가 주나라 조정에 문안을 온 일은 이웃 나라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주공 흑견이 선물한 채색 비단을 수레 열 대에 나누어 싣고, 수레 겉에는 비단보로 덮어씌우고 왕도를 떠나면서 ‘이것은 주왕의 하사품이다.’라고 널리 선전하십시오. 또 붉은 활과 화살을 더하여 ‘송나라가 오랫동안 주 왕실에 조공하지 않았으므로 정환공이 왕명을 친히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할 것이다.’ 라고 하여, 여러 나라를 불러서 군사를 낼 것을 재촉하고, 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것이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제후들이 반드시 믿고 따를 것입니다. 송나라가 비록 대국이기는 하지만, 어찌 능히 왕명을 받아 출동한 군사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장공이 제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기를, “경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오! 과인은 경이 말한 대로 하나하나 따르겠소.” 했다. 농서거사(隴西居士)가 역사를 읊은 시에 이르기를, “천자의 비단과 훔쳐 간 곡식이 서로 맞지도 않은데, 어찌하여 있지도 않은 왕의 명을 받았다고 하는가? 필경은 거짓말로 많은 군사들이 움직여서, 송나라의 수양성(睢陽城)만 전쟁터로 만들겠구나!” 했다.
莊公出了周境,一路宣揚王命,聲播宋公不臣之罪,聞者無不以為真。這話直傳至宋國。殤公心中驚懼,遣使密告於衛宣公。宣公乃糾合齊僖公,欲與宋鄭兩國講和,約定月日,在瓦屋之地相會,歃血訂盟,各釋舊憾。宋殤公使人以重幣遺衛,約先期在犬邱一面,商議鄭事,然後並駕至於瓦屋。齊僖公亦如期而至。惟鄭莊公不到。齊侯曰:「鄭伯不來,和議敗矣!」便欲駕車回國。宋公強留與盟。齊侯外雖應承,中懷觀望之意。惟宋衛交情已久,深相結納而散。
정장공이 주나라의 경계를 벗어나 지나가는 곳마다 왕명을 선전하여, 송나라가 신하의 본분을 지키지 않은 죄를 소리 높여 알리자, 듣는 사람은 모두 사실인 줄 알았다. 그 소문은 송나라에 곧바로 전달되었다. 송상공은 마음속으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은밀히 사절을 위선공에게 보냈다. 위선공은 제희공과 규합하여, 송나라와 정나라 양국을 강화시키려고 날짜를 정하여 와옥(瓦屋) 땅에서 서로 만나 피를 입술에 발라 맹세를 하고, 각각 유감을 풀어 주려고 했다. 송상공은 사신을 시켜 많은 예물을 위나라에 보내어, 먼저 위선공과 견구(犬丘)에서 약속을 하고, 정나라의 일을 상의한 후에 함께 와옥에 당도하였다. 제희공이 역시 날짜를 맞추어 도착했으나, 정장공만은 오지 않았다. 제희공이 말하기를, “정백이 오지 않았으니 화친은 어렵게 되었소.” 하고, 어가를 돌려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려고 하자. 송상공이 간곡히 만류하여 머무르게 하고 세 나라만이라도 회맹을 맺자고 했다. 제희공은 겉으로는 회맹을 승락했지만, 속으로는 관망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단지 송나라와 위나라만이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왔으므로 진심으로 회맹을 맺고 헤어졌다.
是時周桓王欲罷鄭伯之政。以虢公忌父代之。周公黑肩力諫,乃用忌父為右卿士,任以國政。鄭伯為左卿士,虛名而已。莊公聞之,笑曰:「料周王不能奪吾爵也!」後聞齊宋合黨,謀於祭足。祭足對曰:「齊宋原非深交,皆因衛侯居間糾合,雖然同盟,實非本心。主公今以王命並布於齊魯,即託魯侯糾合齊侯,協力討宋。魯與齊連壤,世為婚姻,魯侯同事,齊必不違。蔡、衛、郕、許諸國,亦當傳檄召之,方見公討。有不赴者,移師伐之。」莊公依計,遣使至魯,許以用兵之日,侵奪宋地,盡歸魯國。
이때 주환왕은 정백의 조정 직위를 그만두게 하고, 괵공 기보가 대신하게 했으나, 주공 흑견이 간곡히 만류하여 기보를 우경사(右卿士)로 삼아 주나라 정사를 맡아보게 하고, 정백은 이름뿐인 좌경사(左卿士)로 삼았다. 정장공이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주왕이 내 벼슬을 완전히 빼앗지는 못했구나!” 했다. 얼마 뒤에 정장공은 제나라와 송나라가 와옥에서 회맹을 행하고 힘을 합쳐 협력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족에게 그 대책을 물었다. 제족이 대답하기를, “제나라와 송나라는 원래부터 그렇게 좋은 사이가 아닙니다. 모두가 위나라 군주가 중간에서 규합한 것이니, 비록 동맹은 했지만, 사실은 제나라의 본심은 아닐 것입니다. 주공께서 지금 왕명을 받았다고 제와 노나라에 선포하시고, 즉시 노나라에 부탁하여 제나라를 규합하도록 한 다음에, 힘을 합쳐 송나라를 토벌하십시오. 노나라와 제나라는 땅이 인접해 있고, 대대로 혼인을 하여, 노나라 군주가 일을 같이 도모한다면 제나라는 필시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채(蔡), 위(衛), 성(郕), 허(許) 등의 제후들에게는 마땅히 격문을 보내 불러서 같이 토벌하자고 하십시오. 주공께서 토벌함을 보고도, 만일 오지 않는 자가 있다면, 군사를 움직여 그 나라를 토벌하시면 됩니다.” 했다. 정장공이 제족의 의견대로 사절을 노나라에 보내 군사를 일으킬 날짜를 알리고, 송나라를 공격하여 빼앗은 땅은 모두 노나라에 주겠다고 하였다.
公子翬乃貪橫之徒,欣然諾之。奏過魯君,轉約齊侯,與鄭在中邱取齊。齊侯使其弟夷仲年為將,出車三百乘。魯侯使公子翬為將,出車二百乘,前來助鄭。 鄭莊公親統著公子呂、高渠彌、潁考叔,公孫閼等一班將士,自為中軍。建大纛一面,名曰「蝥弧」,上書「奉天討罪」四大字,以輅車載之。將彤弓弧矢,懸於車上,號為卿士討罪。夷仲年將左軍,公子翬將右軍,揚威耀武,殺奔宋國。公子翬先到老挑地方,守將引兵出迎。
노나라의 공자 휘는 바로 재물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허락하였다. 공자 휘는 노은공(魯隱公)에게 상주하여 제희공과 송나라를 치자고 약속하고 정나라와 같이 중구(中邱)에서 회합하기로 했다. 제희공은 그의 동생 이중년(夷仲年)을 장수로 삼아 전차 3백 승을 주어 출동하게 하고, 노은공은 공자 휘를 장수로 삼아 전차 2백 승을 출전시켜 정나라를 돕게 했다. 정장공은 친히 공자 려, 고거미, 영고숙 공손알 등의 장수를 거느리고, 자신이 친히 중군을 지휘하여 꿩 깃으로 장식한 큰 깃발 대독(大纛)을 세워 모호(蝥弧)라 부르고, 그 위에다 ‘천자의 명을 받들어 죄 있는 자를 토벌한다.(奉天討罪)’라는 네 글자를 써서 제후의 수레인 노거(輅車)에 꽂았다. 다시 붉은 활과 화살을 수레 위에 걸고, 주나라의 경사가 죄 있는 자를 토벌한다고 선언했다. 정장공은 이중년을 좌군으로 삼고, 공자 휘를 우군으로 삼아 위풍당당하게 송나라로 쳐들어갔다. 공자 휘가 먼저 송나라의 노도 지방에 이르니 지키는 송나라 장수가 나와 맞섰다.
被公子翬奮勇當先,只一陣,殺得宋兵棄甲曳兵,逃命不迭,被俘者二百五十餘人。公子翬將捷書飛報鄭伯,就迎至老挑下寨。相見之際,獻上俘獲。莊公大喜,稱贊不絕口,命幕府填上第一功。殺牛饗士,安歇三日。然後分兵進取,命潁考叔同公子翬領兵功打郜城,公子呂接應;命公孫閼同夷仲年領兵攻打防城,高渠彌接應。將老營安扎老挑,專聽報捷。卻說宋殤公聞三國兵已入境,驚得面如土色,急召司馬孔父嘉問計。
공자 휘가 용감하게 선봉을 맡은 제1진이 송나라 군사를 무찌르니 송나라 군사들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며 도망갔다. 공자 휘는 250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정백에게 승첩을 띄워 보고하고. 노도에 하채하고 있다가 정장공을 영접하였다. 정장공을 배알할 때 포로와 노획물을 바쳤다. 정장공이 크게 기뻐하여 칭찬해 마지않으며, 막부에 명하여 공로가 일등이라고 기록했다. 장공은 소를 잡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3일 동안 휴식을 취한 후에 군사를 나누어 진격했다. 정장공은 영고숙과 공자휘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고성(郜城)을 공격하고 공자려가 지원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공자알(公子閼)과 이중년이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방성(防城)을 공격하고 고거미가 지원하게 했다. 자기는 노도의 본영에 남아 후방을 지키며 첩보를 기다렸다. 한편, 송상공은 세 나라의 군사가 이미 경계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놀라서 얼굴이 흙빛이 되어, 황급히 사마(司馬) 공부가(孔父嘉)를 불러 대책을 물었다.
孔父嘉奏曰:「臣曾遣人到王城打聽,並無伐宋之命。鄭託言奉命,非真命也,齊魯特墮其術中耳。然三國既合,其勢誠不可爭鋒。為今之計,惟有一策,可令鄭不戰而退。」殤公曰:「鄭已得利,肯遽退乎?」孔父嘉曰:「鄭假託王命,遍召列國。今相從者,惟齊魯兩國耳。東門之役,宋、蔡、陳、魯同事。魯貪鄭賂,陳與鄭平,皆入鄭黨,所不致者,蔡衛也。鄭君親將在此,車徒必盛,其國空虛。主公誠以重賂,遣使告急於衛,使糾合蔡國,輕兵襲鄭。鄭君聞己國受兵,必返旆自救。鄭師既退,齊魯能獨留乎?」
공부가가 아뢰기를, “신이 이미 사람을 왕성에 보내 소식을 알아보니 송나라를 토벌하라는 왕명은 없었습니다. 정나라가 천자의 명을 받았다고 한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제나라와 노나라는 정나라의 술수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세 나라가 이미 군사를 합했으므로, 형세가 참으로 다툴 수 없습니다. 오늘을 위한 계책으로는, 오로지 한 가지 대책이 있습니다. 정나라가 싸울 수 없게 만들어 퇴군하게 하는 겁니다.” 했다. 송상공이 말하기를, “정나라가 이미 이기고 있는데 어찌 갑자기 물러가겠소?” 하니, 공부가가 말하기를, “정나라가 거짓으로 왕명을 빙자하여 여러 제후국을 소집했으나, 지금 그에 따른 나라는 단지 제나라와 노나라뿐입니다. 동문의 싸움(위나라가 주동이 되어 정나라에 쳐들어가 신정성의 동문에서 싸운 전쟁)에서는 송(宋), 채(蔡), 진(陳), 노(魯)가 함께했습니다. 이번에 욕심 많은 노나라는 정나라 뇌물을 탐내어 변절했고, 진나라는 정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어 역시 정나라 편에 섰습니다. 아직도 정나라와 손을 잡지 않은 나라는 채나라와 위나라입니다. 정백이 친히 이곳까지 출전했으니 그 전차와 보병이 강할 것이며, 그 국내는 텅 비었을 것입니다. 주공께서 많은 재물을 들려 사절을 위나라에 급히 보내어 위급함을 알리고, 위나라로 하여금 채나라를 규합하여. 가벼운 무장병으로 정나라를 급습하게 하십시오. 정장공이 본국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급보를 받으면 틀림없이 군사를 거두어 스스로 구하려 할 것입니다. 정나라 군사가 물러가는데 제나라와 노나라가 홀로 남아있겠습니까?” 했다.
殤公曰:「卿策雖善,然非卿親往,衛兵未必即動。」孔父嘉曰:「臣當引一枝兵,為衛蔡鄉導。」殤公即簡車徒二百乘,命孔父嘉為將,攜帶黃金白璧綵緞等物,星夜來到衛國,求衛君出師襲鄭。衛宣公受了禮物,遣右宰醜率兵同孔父嘉從間道出其不意,直逼滎陽。世子忽同祭足急忙傳令守城,已被宋衛之兵,在郭外大掠一番,擄去人畜輜重無算。右宰醜便欲攻城,孔父嘉曰:「凡襲人之兵,不過乘其無備,得利即止。若頓師堅城之下,鄭伯還兵來救,我腹背受敵,是坐困耳。不若借徑於戴,全軍而返。度我兵去鄭之時,鄭君亦當去宋矣。」
송상공이 말하기를, “경의 계책은 비록 훌륭하나 경이 직접 사절로 가지 않으면, 위나라는 필시 군사들을 곧바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하니, 공부가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신이 마땅히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위나라와 채나라를 위한 향도가 되겠습니다.” 했다. 송상공은 곧 공부가에게 전차 2백 승과 보병을 뽑아 주고 공부가를 장수로 삼아, 황금과 백옥과 비단을 가지고, 밤낮으로 달려 위나라에 당도했다. 위후를 접견한 공부가는 재물을 바치고 정나라를 공격하는데 원군을 내어 주기를 요청했다. 위선공은 예물을 받고, 우재 추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공부가와 함께 가게 하여, 예상치 않은 사잇길로 곧바로 형양으로 육박했다. 세자 홀과 제족은 황급한 마음이 되어 성을 지키라고 명령을 전달했으나, 그때는 이미 외곽 성이 송나라와 위나라 군사들에게 점령되어 사람과 가축과 치중을 무수히 노략질당하였다. 우재 추가 계속 성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공보가가 말하기를, “무릇 적군을 기습할 때는 상대방이 방비가 없는 틈을 타서 공격하고, 승리하면 그쳐야 합니다. 만약 견고한 성 밑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정백이 군사를 돌이켜서 구하러 온다면, 우리는 앞뒤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어 앉아서 곤란하게 됩니다. 대(戴)나라로 통하는 길을 빌려 전군이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군사가 정나라를 떠났을 때쯤이면 정장공도 송나라에서 떠났을 것입니다.” 했다.
右宰醜從其言,使人假道於戴。戴人疑其來襲己國,閉上城門,授兵登陴。孔父嘉大怒,離戴城十里,同右宰醜分作前後兩寨,準備攻城。戴人固守,屢次出城交戰,互有斬獲。孔父嘉遣使往蔡國乞兵相助。不在話下。此時潁考叔等已打破郜城,公孫閼等亦打破防城,各遣人於鄭伯老營報捷。恰好世子忽告急文書到來。
우재 추는 그 말에 따라 대(戴)나라에 사신을 보내 길을 빌리려 했다. 대나라 사람은 그들(우재 추와 공부가)이 자기 나라를 습격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군사들을 성가퀴로 올려보내 공격에 대비했다. 공부가는 크게 노하여 성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다 우재 추와 같이 전후 두 개의 영채를 세우고, 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했다. 대나라 사람들이 성을 굳게 지키면서 여러 번 성밖으로 나와 교전을 하여, 서로 죽이기도 하고 포로가 되기도 했다. 공부가가 채나라로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때 영고숙 등은 이미 송나라의 고성(郜城)을 함락시키고, 공손알도 역시 방성(防城)을 함락하여, 각각 정백의 노도(老挑) 본영에 승리의 소식을 보냈다. 그때 마침 세자 홀이 급한 문서를 보내왔다.
不知鄭伯如何處置,再看下回分解。
정백이 어떻게 처리할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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