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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2권
3. 이법품 ②
[선정에 드는 선교와 선정에서 나오는 선교]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선정에 드는 선교[入定善巧]와 선교에서 나오는 선교[出定善巧]이다”라고 했는데,
선정에 드는 선교란 어떤 것인가?
[답] 선정[定]이란, 이른바 8부(部) 8온(蘊)의 선정이어서 곧 4정려(精慮)와 4무색정(無色定)이다.
선정에 드는 훌륭하고 교묘함이란,
이른바 “이러한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초정려(初靜慮)의 선정에 들어갔고, 이러한 보특가라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선정에 들었다”라고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이러한 보특가라가 초정려의 선정에서 훌륭하고 교묘[善巧]하게 뜻을 지었고, 이러한 보특가라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에서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었다”라고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이러한 보특가라가 초정려의 도(道)에 들었고, 이러한 보특가라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도에 들었다”라고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이러한 보특가라가 초정려의 도에 드는 일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었고, 이러한 보특가라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도에 들어간 일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었다”라고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일이란 어떤 것인가?
마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뜻을 지었고 이러한 뜻을 지으면서 초정려에 들어갔고,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에 드는 일에 대하여 평등하게 잘 알고 가까이 잘 알며 잘 분별하고 잘 생각하며 잘 통달하였다.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관(觀)하며 이와 같이 훌륭하게 알고[勝解] 이와 같이 맡아 지니며[任持] 이와 같이 분별해서 초정려의 선정에 들었고,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에 드는 일에 대하여 평등하게 잘 알고 나아가 잘 통달하였다.
나는 이와 같이 가다듬은 마음[攝心]과 다잡은 마음[策心]과 조복된 마음[伏心]과 지니는 마음[持心]과 드날리는 마음[擧心]과 버리는 마음[捨心]과 억제하는 마음[制心]과 내버리는 마음[縱心]으로 초정려의 선정에 들었고,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에 드는 일에 대하여 평등하게 잘 알고 나아가 잘 통달하였다.
나는 이와 같은 법으로 선정에 들었고, 그리고 선정에 드는 훌륭하고 교묘함에 있어서 작용도 없고 이익도 없으며 많이 지은 것도 없고 다만 장애가 될 뿐이라는 이런 법을 평등하게 잘 알았고, 나아가 잘 통달하였다.
나는 이와 같은 법으로 선정에 들었고, 그리고 선정에 드는 훌륭하고 교묘함에 있어서 작용도 있고 이익도 있으며 많이 지은 것도 있고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이런 법을 평등하게 잘 알고, 나아가 잘 통달하였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갖가지 선정에 드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평등하게 알며 가까이 알고 두루 알며 기민한 슬기로 통달하고 자세히 살피며 총명과 예지로 깨닫고 밝은 지혜로 비발사나를 행하는 것을 곧 선정에 드는 훌륭하고 교묘한 것이라 한다.
[문] 선정에서 나오는 훌륭하고 교묘함[出定善巧]이란 어떤 것인가?
[답] 선정이란, 이른바 8부 8온의 선정으로서 곧 4정려와 4무색정이다.
선정에서 나오는 훌륭하고 교묘함이란,
이른바 “이러한 보특가라가 초정려의 선정으로부터 나왔고, 이러한 보특가라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으로부터 나왔다”라고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이러한 보특가라가 초정려의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데에 있어서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었고, 이러한 보특가라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데에 있어서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었다”라고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이러한 보특가라가 초정려의 도(道)로부터 나왔고 이러한 보특가라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도로부터 나왔다”라고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이러한 보특가라가 초정려의 도로부터 나오는 데에 있어서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었고, 이러한 보특가라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도로부터 나오는 데에 있어서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었다”라고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일이란 어떤 것인가?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뜻을 지었고 이러한 뜻을 지으면서 초정려의 선정으로부터 나왔고,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일에 대하여 평등하게 잘 알고 가까이 잘 알며 잘 분별하고 잘 생각하며 잘 통달하였다.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관(觀)하며 이와 같이 뛰어나게 알고 이와 같이 맡아 지니며 이와 같이 분별해서 초정려의 선정으로부터 나왔고,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일에 대하여 평등하게 잘 알고, 나아가 잘 통달하였다.
나는 이와 같은 가다듬은 마음과 다잡은 마음과 조복된 마음과 지니는 마음과 빼앗는 마음과 버리는 마음과 억제하는 마음과 내버리는 마음으로 초정려의 선정으로부터 나왔고,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일에 대하여 평등하게 잘 알고, 나아가 잘 통달하였다.
나는 이와 같은 법으로 선정에서 나왔고, 나아가 선정에서 나오는 훌륭하고 교묘함에 대하여 작용도 없고 이익도 없으며 많이 지은 것도 없고 다만 장애가 되었을 뿐이라는 이러한 법을 평등하게 잘 알았고, 나아가 잘 통달하였다.
나는 이와 같은 법으로 선정에서 나왔고, 나아가 선정에서 나오는 훌륭하고 교묘함에 대하여 작용도 있고 이익도 있으며 많이 지은 것도 있고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이러한 법을 평등하게 잘 알았고, 나아가 잘 통달하였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갖가지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나아가 비발사나를 행하는 것을 곧 선정에서 나오는 훌륭하고 교묘함이라 한다.
[계선교와 작의선교]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계선교(界善巧)와 작의선교(作意善巧)이다”라고 했는데, 계선교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어떤 필추가 18계(界),
즉 안계(眼界)ㆍ색계(色界)ㆍ안식계(眼識界)와 이계(耳界)ㆍ
성계(聲界)ㆍ이식계(耳識界)와 비계(鼻界)ㆍ
향계(香界)ㆍ비식계(鼻識界)와 설계(舌界)ㆍ
미계(味界)ㆍ설식계(舌識界)와 신계(身界)ㆍ
촉계(觸界)ㆍ신식계(身識界)와 의계(意界)ㆍ
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과 같다.
또 6계(界),
즉 지계(地界)ㆍ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ㆍ공계(空界)ㆍ식계(識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6계(界),
즉 욕계(欲界)ㆍ에계(恚界)ㆍ해계(害界)ㆍ출리계(出離界)ㆍ무에계(無恚界)ㆍ무해계(無害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6계(界),
즉 낙계(樂界)ㆍ고계(苦界)ㆍ희계(喜界)ㆍ우계(憂界)ㆍ사계(捨界)ㆍ무명계(無明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4계(界),
즉 수계(受界)ㆍ상계(想界)ㆍ행계(行界)ㆍ식계(識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3계(界),
즉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3계(界),
즉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ㆍ멸계(滅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3계(界),
즉 과거계(過去界)ㆍ미래계(未來界)ㆍ현재계(現在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3계(界),
즉 열계(劣界)ㆍ중계(中界)ㆍ묘계(妙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3계(界),
즉 선계(善界)ㆍ불선계(不善界)ㆍ무기계(無記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3계(界), 즉 학계(學界)ㆍ무학계(無學界)ㆍ비학비무학계(非學非無學)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2계(界),
즉 유루계(有漏界)ㆍ무루계(無漏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또 2계(界), 즉 유위계(有爲界)ㆍ무위계(無爲界)를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계(界)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평등하게 알며 가까이 알고 두루 알며 기민한 슬기로 통달하고 자세히 살피며 총명과 예지로 깨닫고 밝은 지혜로 비발사나를 행하는 것을 곧 계의 훌륭하고 교묘함이라 한다.
[문] 작의선교(作意善巧)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어떤 필추가 혹은 소달람(素怛纜)을 받아 지니기도 하고,
혹은 비나야(毘奈耶:律)를 받아 지니기도 하며,
혹은 아비달마(阿毘達磨:論)를 받아 지니기도 하고 혹은 친교사(親交師)가 말하는 것을 듣기도 하며,
혹은 궤범사(軌範師)가 말하는 것을 듣기도 하며,
혹은 차츰차츰 삼장(三藏)을 전해 주는 말을 듣기도 하며,
혹은 한 가지 이치대로 닦은 어떤 분의 말을 듣기도 했다 하자.
이와 같이 이치대로 들은 데서 이루어진 지혜에 의지하여 안계 내지 의식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非常] 괴롭고[苦] 공하고[空] 나가 아니라[非我]고 생각하며, 지계 내지 식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욕계ㆍ에계ㆍ해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출리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낙계ㆍ고계ㆍ희계ㆍ우계ㆍ사계ㆍ무명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수계ㆍ상계ㆍ행계ㆍ식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색계와 무색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멸계에 대해서도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과거계ㆍ미래계ㆍ현재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열계ㆍ중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묘계에 대해서도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선계ㆍ불선계ㆍ무기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학계ㆍ무학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비학비무학계에 대해서도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유루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루계에 대해서도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유위계에 대하여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위계에 대해서도 훌륭하고 교묘하게 뜻을 지어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마치 어떤 필추가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대한 뜻 지음[作意]과,
선(善)한 것ㆍ선하지 않은 것[不善]ㆍ무기(無記)에 대한 뜻 지음과,
욕계의 매임[繫]ㆍ색계의 매임ㆍ무색계의 매임에 대한 뜻 지음과,
배울 것이 있는 것ㆍ배울 것이 없는 것ㆍ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것에 대한 뜻 지음과,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見所斷]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修所斷]ㆍ끊을 것이 아닌 것[非所斷]에 대한 뜻 지음을 사실과 똑같이 알고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갖가지 뜻 지음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나아가 비발사나를 행하는 것을 곧 작의의 훌륭하고 교묘함이라 한다.
[질박하고 정직한 것과 부드럽고 온화한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질박하고 정직한 것[質直]과 부드럽고 온화한 것[柔和]이다”라고 했는데,
질박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마음이 굳세지 않은 성품이요 마음이 강하지 못한 성품이며,
마음이 경직되지 않은 성품이요 마음이 순수하고 질박한 성품이며,
마음이 정직한 성품이요 마음이 윤활한 성품이며,
마음이 유연한 성품이요 마음이 고르고 온순한 성품이니,
이것을 곧 질박하고 정직하다고 한다.
[문] 부드럽고 온화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몸이 굳세지 못한 성품이요, 몸이 강하지 못한 성품이며,
몸이 경직되지 않은 성품이요, 몸이 순수하고 질박한 성품이며,
몸이 정직한 성품이요, 몸이 윤활한 성품이며,
몸이 유연한 성품이요, 몸이 고르고 온순한 성품이니,
이것을 곧 부드럽고 온화하다고 한다.
[견디고 참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견디고 참는 것[堪忍]과 즐거워하는 것[可樂]이다”라고 했는데,
견디고 참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춥고 덥고 배고프고 목마른 것과 바람ㆍ햇빛ㆍ모기ㆍ등에ㆍ뱀ㆍ전갈 등의 접촉을 참고 견디며 또 다른 이의 추악한 말에 몸 속에서 맹렬하고 절박한 마음이 일어나 그를 죽이고도 싶은 괴로운 느낌[苦受]을 잘 참고 견디는 것을 곧 견디고 참는다고 한다.
[문] 즐거워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가령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용납할 수 없고 자랑으로 여길 수 없으며 되돌릴 수 없고 인내할 수 없다 하여도, 그에 대하여 난폭하지 않고 발악하지 않으며 거칠지 않고 모질지도 않으며 참고 견디면서 즐거워하며 쉬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면서 모든 악을 그치고 멈추게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일이 닥쳤을 적에 용납할 수 있고 긍지를 가질 수 있으며 되돌릴 수 있고 인내할 수 있다 하여도, 또한 그에 대하여 난폭하지 않고 발악하지 않으며 거칠지 않고 모질지 않으며 참고 견디면서 즐거워하며 쉬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여 모든 악을 그치고 멈추게 하는 것을 곧 즐거워한다고 한다.
[온화하고 순종하는 것과 공양하는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온화하면서 순종하는 것[和順]과 공양하는 것[供養]이다”라고 했는데,
온화하면서 순종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어떤 이가 즐거워할 만한 말과 사랑할 만한 말을 하기 좋아하며 얼굴에 기쁜 빛을 띠고 찡그리지 않으면서 먼저 위로하고 문안하기를,
“구수(具壽)여, 잘 오셨습니다. 하시는 일은 참아낼 만하십니까, 살아가실 만하십니까, 안락하게 머무르실 만하십니까, 음식은 쉽게 얻으십니까?”라고 하면서,
이렇게 기뻐할 만한 말 등으로 모두를 즐겁게 하는 일을 하기 좋아하는 것을 곧 온화하게 순종한다고 한다.
[문] 공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공양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나니,
하나는 재물의 공양[財供養]이요, 다른 하나는 법의 공양[法供養]이다.
[문] 재물의 공양이란 어떤 것인가?
[답] 뜻에 맞는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과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이며, 그리고 그 밖의 살림살이로써 다른 유정에게 은혜를 베풀고 따라 은혜를 베풀며 버리고 두루 버리는 것을 곧 재물의 공양이라 한다.
[문] 법의 공양이란 어떤 것인가?
[답] 소달람(素怛纜)이나 혹은 비나야(毘奈耶)나 혹은 아비달마(阿毘達磨)나 혹은 친교사(親交師)의 말이나 혹은 궤범사(軌範師)의 말이나 혹은 삼장(三藏)을 전해 받은 말이나 혹은 그 밖의 믿을 만한 어느 한 분의 말로써 다른 유정에게 은혜롭게 베풀고 따라 은혜롭게 베풀며 버리고 두루 버리는 것을 곧 법의 공양이라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를 통틀어 공양하는 것이라 한다.
[염을 갖추는 것]과 바르게 아는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염을 갖추는 것[具念]과 바르게 아는 것[正知]이다”라고 했는데,
염을 갖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벗어나는 것[出離]과 멀리 여의는[遠離] 착한 법에 의지하는 모든 염(念)하고, 따라 염[隨念]하고, 오로지 염[專念]하고, 기억[憶念]하고, 잊지 않고[不忘], 잃지 않고[不失], 빠뜨리지 않고[不遺], 새지 않고[不漏], 상실하지 않는 법[不失法]의 성품과 마음에 밝게 기억하는[明記] 성품이니, 이것을 곧 염을 갖춘 것이라 한다.
[문] 바르게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벗어나는 것과 멀리 여의는 착한 법에 의지한 법에 대하여 간택(揀擇)하고, 지극하게 간택[極揀擇]하고, 가장 지극하게 간택[最極揀擇]하여서,
분명하게 알고 평등하게 알며, 가까이 알고 두루 알며,
기민한 슬기로 통달하고 자세히 살피며,
총명과 예지로 깨닫고 밝은 지혜로 비발사나를 행하는 것을 곧 바르게 안다고 한다.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과 닦아 익히는 힘]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思擇力]과 닦아 익히는 힘[修習力]이다”라고 했는데,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이란 어떤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견문이 많은[多聞]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즉 ‘몸으로 짓는 모든 악행(惡行)은 현재의 법에서나 장차 다가올 세상에서 악의 이숙(異熟)을 초래하는 것이므로,
내가 만일 몸으로 악행을 행하면 현재에서는 자기 자신도 싫증을 내고,
또한 다른 이와 천신(天神)과 모든 부처님의 꾸지람을 받게 되며,
또한 지혜 있고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이에게서 책망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온갖 세계에 악한 이름이 유포될 것이요,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험하고 악한 세계[惡趣]에 떨어져서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라.
몸으로 짓는 악행이 현재의 법에서나 장차 다가올 세상에서 악의 이숙을 초래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로 말미암아 부지런히 힘써 몸의 모든 악행을 끊고 또한 부지런히 몸의 모든 묘한 행[妙行]을 닦아야 한다.
말의 악행과 뜻의 악행에 있어서도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니, 나아가 부지런히 말과 뜻의 묘한 행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만일 이와 같이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으로 말미암고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에 의지하며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에 머물러서 착하지 않은 법을 끊고 모든 착한 법을 닦게 되면 이것을 생각하여 선택한다[思擇]고 하고 또한 힘[力]이라고도 하나니, 이것을 곧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이라 한다.
[문] 닦아 익히는 힘이란 어떤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염등각지(念等覺支)를 닦아서 싫증[厭]을 의지하고 여읨[離]을 의지하며 없앰[滅]을 의지해서 평정[捨]에 회향할 것이요, 택법(擇法)ㆍ정진(靜進)ㆍ희(喜)ㆍ경안(輕安)ㆍ정(定)ㆍ사등각지(捨等覺支)를 닦아서 싫증을 의지하고 여읨을 의지하며 없앰을 의지해서 평정에 회향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만일 이와 같이 닦아 익히는 힘을 인하고 닦아 익히는 힘을 의지하며 닦아 익히는 힘에 머물러서 착하지 않은 법을 끊고 모든 착한 법을 닦게 되면 이것을 닦아 익힌다[修習]고 하고 또한 힘[力]이라고도 하나니, 이것을 곧 닦아 익히는 힘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힘이라 하는가?
[답] 이 힘으로 인하고 이 힘에 의하며 이 힘에 머무름으로써 온갖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을 끊고 부수고 깨뜨리기 때문에 힘이라 한다.
[감관을 수호하지 않는 것과 음식에 대해 헤아릴 줄 모르는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감관[根門]을 수호하지 않는 것과 음식에 대해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감관을 수호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견문이 없는 이생(異生:凡夫)은 눈으로 빛깔을 보고 나서 눈의 감관으로 말미암아 상(相)과 수호(隨好)를 취하여 곧 그것에 대하여 눈의 감관을 수호하지 않으면 수호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세간의 탐애(貪愛)를 일으키어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이 마음을 따라 생기고 자란다.
그는 눈의 감관을 방어하지 않고 수호하지 않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눈의 감관을 수호하지 않는다고 하며, 눈의 감관을 수호하지 않기 때문에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기고 자란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그와 같다. 우선 뜻의 감관을 말해 본다면, 뜻이 법(法)을 알고 나서 뜻의 감관으로 말미암아 상과 수호(隨好)를 취하여 곧 그것에 대하여 뜻의 감관을 수호하지 않으면 수호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세간의 탐애를 일으키어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이 마음을 따라 생기고 자란다.
그는 뜻의 감관을 방어하지 않고 수호하지 않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뜻의 감관을 수호하지 않기 때문에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기고 자란다.
그는 도리가 아닌 것[非理]을 생각하여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눈으로는 모든 빛깔을 보고 귀로는 모든 소리를 들으며 코로는 모든 냄새를 맡고 혀로는 모든 맛을 보며 몸으로는 모든 감촉을 느끼고 뜻으로는 모든 법을 알되, 여섯 가지 감관을 방호하지 않고 평등하게 방호하지 않고 두루 방호하지 않으며 감추지 않고 덮지 않고 가리지 않으며 고요하지 않고 조복하지 않고 수호하지 않나니, 이것을 곧 감관을 수호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음식에 대해 헤아릴 줄 모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견문이 없는 이생은 생각하여 선택하지 못하면서 먹으며 용맹과 건강을 일삼고 오만과 방일을 일삼으며 안색과 용모를 위하고 단정과 장엄을 위하면서 먹을 것만 먹는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생각하여 선택하지 못하면서 먹는다”는 것은, 이치대로 이끄는 것을 생각하여 선택하지 못하면서 먹을 것만 먹는 것이다.
“용맹과 건강을 일삼으며 먹을 것만 먹는다”는 것은,
어떤 한 종류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반드시 배가 부른 뒤에 몸이 날래고 씩씩하게 되어 어려운 일을 하고 무거운 짐을 지며 수명을 더욱 늘리어 오래도록 세간에 머무르고 원수와 적을 때려 부수며 수레보다 빨리 가고 멀리 뛰어 달아나며 갖가지로 세간의 온갖 놀이를 잘 하리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오만과 방일만을 일삼으며 먹을 것만 먹는다”는 것은,
어느 한 종류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반드시 배가 부른 뒤에 오만과 방일에 취한 마음을 일으키고 평등하게 일으키며 생기게 하고 평등하게 생기게 하며 상속하게 하고 남을 업신여기면서 온갖 것을 뜻에 내키는 대로 멋대로 하리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안색과 용모만을 위하여 먹을 것만 먹는다”는 것은,
어느 한 종류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반드시 배가 부른 뒤에 장차 내 몸의 용모가 반짝거리게 되며 피부와 몸이 매끄럽게 되리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단정과 장엄을 위하여 먹을 것을 먹는다”는 것은,
어느 한 종류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반드시 배가 부른 뒤에 장차 나의 몸으로 하여금 제일 아름다운 형색을 성취하여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게 하리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음식을 애지중지하면서 모든 음식에 대하여 평등하게 여기지 않는 성품과, 헤아릴 줄 모르는 성품과, 슬기롭지 못한 성품으로 그의 모양[相]을 알지 못하고, 모양을 알지 못한 뒤에는 스스로 재량(裁量)하지 못해서,
“나는 이제 다만 그러한 음식만을 먹어야겠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곧 음식에 대해 헤아릴 줄 모른다고 한다.
[감관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에 대해 헤아릴 줄 아는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감관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에 대해 헤아릴 줄 아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감관을 수호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눈으로 빛깔을 보고 나서 눈의 감관으로 말미암아 그 상(相)을 취하지도 않고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일[隨好]도 취하지 않으며, 곧 그것에 대하여 눈의 감관을 수호한다. 잘 수호하기 때문에 세간의 탐애를 일으키지 않으며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도 마음을 따라 생기거나 자라지 않는다.
그는 눈의 감관을 잘 방어하고 잘 수호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눈의 감관을 수호한다고 하며, 눈의 감관을 잘 수호하기 때문에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그와 같다.
우선 뜻의 감관을 말해 보면, 뜻이 법을 알고 나서 뜻의 감관으로 말미암아 그 상을 취하지도 않고 수호를 취하지도 않으며, 곧 그것에 대하여 뜻의 감관을 잘 수호한다.
잘 수호하기 때문에 세간의 탐애도 일으키지 않으며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도 마음을 따라 생기거나 자라지 않는다.
그는 뜻의 감관을 잘 방어하고 잘 수호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뜻의 감관을 수호한다고 하며 뜻의 감관을 잘 수호하기 때문에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치대로[如理] 생각하여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눈으로는 모든 빛깔을 보고, 귀로는 모든 소리를 들으며, 코로는 모든 냄새를 맡고, 혀로는 모든 맛을 보며, 몸으로는 모든 감촉을 느끼고, 뜻으로는 모든 법을 알아서 여섯 가지 감관을 방호하고, 평등하게 잘 방호하고, 두루 잘 방호하며, 잘 감추고 잘 덮고 잘 가리며 고요히 하고 조복하고 수호하는 것을 곧 감관을 수호하는 것이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음식에 대해 헤아릴 줄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견문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잘 생각하여 선택하면서 먹으며, 용맹과 건강을 일삼지 않고 오만과 방일을 일삼지 않으며,
안색과 용모를 위하지 않고 단정과 장엄에 힘쓰지 않으면서 먹을 것을 먹으며,
다만 이 몸이 잠시 동안 살아 있으면서 배고픔과 목마름만을 그쳐 주게 하고, 범행(梵行)을 섭수(攝受)하게 하기 위하여 먹을 것을 먹으며,
예로부터 있던 느낌[故受]은 끊고 새 느낌[新受]을 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힘쓰며,
죄 없이 살아가고 힘과 즐거움으로 편안히 머무르기 위하여 먹을 것을 먹는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잘 생각하여 선택하면서 먹는다”는 것은, 이치대로 이끄는 것을 생각하여 선택하면서 먹을 것을 먹는 것이다.
[문] “용맹과 건강을 위하지 않으면서 먹을 것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어떤 한 종류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반드시 배가 부른 뒤에 몸이 날래고 씩씩하게 되어 소중한 일을 하거나 무거운 짐을 지거나 수명을 더욱 늘려서 오래도록 세간에 머무르거나 원수와 적을 때려부수거나 수레보다 빨리 가거나 멀리 뛰어 달아나거나 갖가지로 세간의 온갖 놀이를 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오만과 방일을 일삼지 않으면서 먹을 것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한 종류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반드시 배가 부른 뒤에 오만과 방일에 취한 마음을 일으키거나 평등하게 일으키거나 나게 하거나 평등하게 나게 하거나 상속하게 하거나 남을 업신여기면서 온갖 것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안색과 용모를 위하지 않으면서 먹을 것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한 종류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반드시 배가 부른 뒤에 장차 내 몸의 용모를 반짝거리게 하거나 피부와 몸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단정과 장엄을 힘쓰지 않으면서 먹을 것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한 종류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반드시 배가 부른 뒤에 장차 나의 몸으로 하여금 제일 아름다운 형색을 성취하여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다만 이 몸을 잠시 동안 머무르고 살아 있게 하기 위하여 먹을 것을 먹을 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몸도 또한 몸[身]이라 하고,
몸의 감관[身根]도 또한 몸이라 하며,
다섯 가지 물질의 감관[五色根]도 또한 몸이라 하고,
네 가지 요소[四大種]로 만들어진 덩어리[聚]도 또한 몸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이 뜻에서는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덩어리를 몸이라 한다.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다만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몸 덩어리로 하여금 잠깐 동안 머무르고[暫住], 평등하게 머무르고[等住], 가까이 머무르고[近住], 편안히 머무르게[安住] 할 뿐이다’라고 한다.
또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다만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몸 덩어리로 하여금 있게[存] 하고, 따라 있게[隨存] 하며, 이루게[濟] 하고, 따라 이루게[隨濟] 하며, 보호[護]하고, 따라 보호[隨護]하게 하며, 구르게[轉] 하고, 따라 구르게[隨轉] 할 뿐이다’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살아 있게 한다고 한다.
“다만 배고프고 목마름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먹을 것을 먹을 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苦受]을 말하여 배고프고 목마르다[飢渴]고 한다.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다만 생각하기를,
‘나는 이 음식을 먹고 장차 배고프고 목마름에서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으로 하여금 잠시 동안 그쳐 쉬게 하면서 괴롭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라고 한다.
“다만 범행을 섭수하기 위하여 먹을 것을 먹는다”라고 하는 것은,
음욕을 여의는 것도 또한 범행(梵行)이라 하고, 8지성도(支聖道)도 또한 범행이라 한다. 이 뜻에서는 8지성도를 말하여 범행이라 한다.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다만 생각하기를,
‘내가 이 음식을 먹는 것은 8지성도를 섭수하고 따르며 더욱 늘리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라고 한다.
“지나간 느낌[故受]을 끊고 새 느낌[新受]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먹을 것을 먹는다”라고 하는 것은,
먹지 않는 것이 연이 되어 일어나게 되는 괴로운 느낌을 지나간 느낌이라 하며,
배부른 것이 연이 되어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을 새 느낌이라 한다.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다만 생각하기를,
‘내가 이 음식을 먹는 것은 지나간 느낌을 끊고 새 느낌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만족하면서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할 뿐이다.
“죄 없이 살아가기 위하여 먹을 것을 먹는다”라고 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죄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인가?
[답] 마치 어떤 한 종류가 거짓과 속임수의 몸짓으로 잽싸게 놀고, 이익으로써 이익을 구하면서 음식을 구하며, 이러한 방편으로 음식을 얻은 뒤에는 기뻐 수용하면서 탐애(貪愛)와 미민(迷悶)과 탐착(貪著)을 버리지 않고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여 벗어날 줄 모르는 것을 죄를 지으며 살아간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이 죄가 없이 살아가는 것인가?
[답] 마치 어떤 한 종류가 거짓과 속임수의 몸짓으로 잽싸게 놀거나 이익과 이익으로써 음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사실대로의 방편으로 음식을 얻은 뒤에 법답게 수용해서 탐내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혼미하지 않고, 어둡지 않으며 지나치게 즐기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그의 허물을 잘 보고 벗어날 줄을 잘 아는 이와 같은 것을 죄가 없이 살아간다고 한다.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와 같이 죄 없이 살아가기 위하여 먹을 것을 먹는다.
“힘[力]과 즐거움[樂]을 위하여 먹을 것을 먹는다”라고 하는 것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다만 생각하기를,
‘내가 이 음식을 먹는 것은 몸의 힘으로 하여금 쇠퇴하지 않게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하며 착한 일을 잘 마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할 뿐이다.
“편안히 머무르기 위하여 먹을 것을 먹는다”라고 하는 것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다만 생각하기를,
‘내가 이 밥을 먹는 것은 가고, 서고, 앉고, 눕고, 독송(讀誦)하고, 선정 등을 닦을 때에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안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할 뿐이다.
이와 같이 음식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모든 음식에 대하여 평등한 성품이 있으며, 헤아릴 줄 아는 성품이 있고, 슬기로운 성품이 있어서 그 모양을 분명하게 알며, 그 모양을 분명히 안 뒤에는 스스로가 재량(裁量)하면서,
‘나는 이제 다만 그런 음식을 먹어야 할 뿐이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곧 음식에 대해 헤아릴 줄 안다고 한다.
[계율에 결함이 있는 것과 소견에 결함이 있는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계율에 결함이 있는 것[匱戒]과 소견에 결함이 있는 것[匱見]이다”라고 했는데,
계율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생명을 끊는 것[斷生命]과 도둑질[不與取]을 하는 것과, 음욕의 삿된 행[欲邪行]을 하는 것과, 거짓말[盧誑語]을 하는 것과, 이간질하는 말[離間語]을 하는 것과, 추악한 말[醜惡語]을 하는 것과, 잡스럽고 더러운 말[雜穢語]을 하는 것이다.
또 생명을 끊는 것과, 도둑질하는 것과, 범행이 아닌 것[非梵行]이며, 또 선하지 않는[不善] 온갖 계율과, 도리로 이끄는 것이 아닌[非理所引] 온갖 계율과, 선정[定]을 장애하는 온갖 계율을 곧 계율에 흠이 있다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계율에 흠이 있다고 하는가?
[답] 이 법의 제 성품[自性]은 사랑할 수가 없고 좋아할 수가 없으며, 기뻐할 수가 없고 뜻에 맞을 수가 없으며, 안온하지 않고 정직하지 않으며, 흐뭇하지 않고 언짢으면서 바른 도리[正理]에 어긋난다.
또 이 법은 사랑할 수 없는 결과[果]와, 좋아할 수 없는 결과와, 기뻐할 수 없는 결과와, 뜻에 맞을 수 없는 결과와, 안온하지 않은 결과와, 정직하지 않은 결과와, 흐뭇하지 못한 결과와, 언짢은 결과와, 바른 도리에 어긋나는 결과를 얻는다.
또 이 법은 사랑할 수 없는 이숙(異熟)과, 좋아할 수 없는 이숙과, 기뻐할 수 없는 이숙과, 뜻에 맞을 수 없는 이숙과, 안온하지 않은 이숙과, 정직하지 않은 이숙과, 흐뭇하지 못한 이숙과, 언짢은 이숙과, 바른 도리에 어긋나는 이숙을 받기 때문에 계율에 흠이 있다고 한다.
[문] 소견에 흠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지니는 모든 소견에서 은혜를 베푼 것도 없고, 친애(親愛)할 것도 없고, 제사 지낼 것[祠祀]도 없으며,
선행도 없고, 악행도 없고, 묘한 행과 악행의 업의 결과인 이숙도 없으며,
이 세상도 없고, 다른 세상도 없으며,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으며, 화생(化生)하는 유정도 없고,
세간에는 아라한에 바르게 이르고[正至] 바른 행[正行]으로써, 즉 이 세상에서나 다른 세상에서 스스로 통달하고 증득하고 깨달아 알아서 나의 생(生)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섰으며 할 일을 다 마치고 후생 몸[後有]을 받지 않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온갖 선하지 않은 소견과 온갖 도리로 이끄는 것이 아닌 소견과 선정을 장애하는 온갖 소견이니, 이것 등을 바로 소견에 흠이 있다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소견에 흠이 있다고 하는가?
[답] 이 법의 제 성품은 사랑할 수 없고 나아가 바른 도리에 어긋나며,
또 이 법은 사랑할 수 없는 결과와 나아가 바른 도리에 어긋나는 결과를 얻으며,
또 이 법은 사랑할 수 없는 이숙과 나아가 바른 도리에 어긋나는 이숙을 받기 때문에 소견에 흠이 있다고 한다.
마치 계율에 흠이 있고 소견에 흠이 있는 것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계율을 깨뜨리는 것[破戒]과 소견을 깨뜨리는 것[破見]에서도 또한 그런 줄 알아야 한다.
[계율을 온전히 갖추는 것과 소견을 온전히 갖추는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계율을 온전히 갖추는 것[具戒]과 소견을 온전히 갖추는 것[具見]이다”라고 했는데,
계율을 온전히 갖추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답] 생명을 끊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으며,
음욕의 삿된 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고 추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잡스럽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 생명을 끊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하지 않으며, 범행이 아닌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또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의 온갖 계율과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의 온갖 계율과 배울 것이 있는 이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이도 아닌 온갖 착한 계율이니,
이것을 곧 계율을 온전히 갖춘다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계율을 온전히 갖추었다 하는가?
[답] 이 법의 제 성품은 사랑할 만하고 좋아할 만하며 기뻐할 만하고 뜻에 맞으며 안온하고 정직하며 흐뭇하고 언짢지 않아서 바른 도리를 따른다.
또 이 법은 사랑할 만한 결과와 좋아할 만한 결과와 기뻐할 만한 결과와 뜻에 맞는 결과와 안온한 결과와 정직한 결과와 흐뭇한 결과와 언짢지 않은 결과와 바른 도리를 따르는 결과를 얻는다.
또 이 법은 사랑할 만한 이숙과 좋아할 만한 이숙과 기뻐할 만한 이숙과 뜻에 맞는 이숙과 안온한 이숙과 정직한 이숙과 흐뭇한 이숙과 언짢지 않은 이숙과 바른 도리를 따르는 이숙을 받기 때문에 계율을 온전히 갖춘다고 한다.
[문] 소견을 온전히 갖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지니고 있는 모든 소견에서 은혜롭게 베푸는 것이 있고, 친애하는 것이 있고, 제사 지내는 것도 있으며,
묘한 행도 있고, 악한 행도 있고, 묘한 행과 악한 행을 지은 업의 결과인 이숙도 있으며,
이 세상도 있고 다른 세상도 있으며,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으며, 화생하는 유정도 있고,
세간에는 아라한이 바르게 이르고, 바른 행으로써, 즉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스스로 통달하고 증득하며, 온전히 갖추어 머무르고 사실대로 깨달아 알며, 나의 생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섰으며, 할 일을 다 마치고 후생 몸을 받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온갖 소견과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온갖 소견과 배울 것이 있는 이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이도 아닌 온갖 착한 소견이니,
이것을 곧 소견을 온전히 갖춘 것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소견을 온전히 갖추었다 하는가?
[답] 이 법의 제 성품은 사랑할 만하고 나아가 바른 도리를 따르며,
또 이것은 사랑할 만한 결과와 나아가 바른 도리를 따르는 결과를 얻으며,
또 이 법은 사랑할 만한 이숙과 나아가 바른 도리를 따르는 이숙을 받기 때문에, 소견을 온전히 갖추었다고 한다.
계율을 온전히 갖추고 소견을 온전히 갖춘 것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계율이 청정한 것[淨戒]과 소견이 청정한 것[淨見]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소견과 이치대로의 뛰어난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소견[見]과 이치대로의 뛰어난 것[如理勝]이다”라고 했는데,
소견이란 어떤 것인가?
[답] 벗어나고[出離] 멀리 여의는[遠離] 착한 법에 의거하여 그 법에 대하여 간택(揀擇)하고 지극하게 간택[極揀擇]하고 가장 지극하게 간택[最極揀擇]하며 분명하게 알고, 평등하게 알며, 가까이 알고 두루 알며,
기민한 슬기로 통달하고 자세하게 살피며, 총명과 예지로 깨닫고 밝은 지혜로 비발사나(毘鉢舍那)를 행하는 것을 곧 소견이라 한다.
[문] 이치대로 뛰어난 것이란 어떤 것인가?
[답] 어떤 필추가 그의 소견으로,
“만일 이와 같이 모든 행(行)의 모양[相狀]을 연유하면 세간의 바른 소견[正見]이 아직 생기지 않았어도 생기게 된다” 하여,
그는 곧 이치대로 이와 같은 모든 행의 모양을 생각하나니,
그는 이치대로 이와 같은 모든 행의 모양을 생각하기 때문에 곧 거룩한 도[聖道]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평등하게 일어나게 하며,
생기게 하고 평등하게 생기게 하며, 구르게 하고 나타나 구르게 하며, 닦고 쌓게 하고 출현하게 하나니,
이것을 곧 도가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道如理勝]이라 한다.
또 어떤 필추가 그의 소견으로,
“만일 이와 같은 모든 행의 모양을 연유하면 벗어나거나 멀리 여의는 어느 하나의 착한 법이 아직 생기지 않았어도 생기게 된다” 하여,
그는 곧 이치대로 이와 같은 모든 행의 모양을 생각하나니,
그는 이치대로 이와 같은 모든 행의 모양을 생각하기 때문에 곧 거룩한 도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평등하게 일어나게 하며, 생기게 하고 평등하게 생기게 하며, 구르게 하고 나타나 구르게 하며, 닦고 쌓게 하고 출현하게 하나니,
이것을 곧 도에서 이치대로 뛰어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를 통틀어 이치대로 뛰어난 것이라 한다.
[싫증과 이치대로 뛰어난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싫증[厭]과 이치대로 뛰어난 것[如理勝]이다”라고 했는데, 싫증이란 어떤 것인가?
[답] 4순염처법(順厭處法)에 의하여 싫증을 내는 것이다.
[문] 이치대로 뛰어난 것이란 어떤 것인가?
[답] 바른 생각[正思]으로 거룩한 도를 끌어내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4순염처법인가?
첫째는 자기 쇠손[自衰損]의 순염처법이요,
둘째는 남의 쇠손[他衰損]의 순염처법이며,
셋째는 자기 흥성[自興盛]의 순염처법이요,
넷째는 남의 흥성[他興盛]의 순염처법이다.
자기 쇠손의 순염처법에 의하여 싫증과 이치에 맞는 뛰어난 것을 낸다는 것은,
마치 어떤 한 종류가 자기 자신의 몸의 악행[身惡行]과 말의 악행[語惡行]과 뜻의 악행[意惡行]이 완성되고 원만하며 뛰어나고 순숙(淳熟)한 것을 평등하게 따라 살펴보면서 곧 생각하기를,
‘나는 방일함[放逸]으로 말미암아 방일을 의지하며 방일에 머무르고 방일로 말미암아 이런 악한 일을 지었으니, 나는 이제 마땅히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으로 하여금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지 않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영원히 끊게 하리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가 이와 같이 벗어나려는 용맹으로 말미암아 끌어내는 싫증이 곧 여기서 말하는 싫증이니,
이미 싫증을 낸 뒤에는 이치대로 생각하며, 또 거룩한 도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평등하게 일어나게 하며, 생기게 하고 평등하게 생기게 하며, 구르게 하고 나타나 구르게 하며, 닦아 쌓게 하고 출현하게 하므로, 이것을 도(道)에서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곧 자기의 쇠손에 의한 싫증과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이라 한다.
남의 쇠손의 순염처법에 의하여 싫증과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을 낸다는 것은,
마치 어떤 한 종류가 다른 이의 몸의 악행과 말의 악행과 뜻의 악행이 완성되어 원만하며, 뛰어나고 순숙한 것을 평등하게 따라 살펴보면서 곧 생각하기를,
‘그는 방일을 의지하며 방일에 머무르고 방일로 말미암아 이러한 악한 일을 지었다.
나는 이제 마땅히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으로 하여금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지 않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영원히 끊어지게 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가 이와 같이 벗어나려는 용맹으로 말미암아 끌어내는 싫증이 곧 여기서 말하는 싫증이니,
이미 싫증을 낸 뒤에는 이치대로 생각하며, 또 거룩한 도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평등하게 일어나게 하며, 생기게 하고 평등하게 생기게 하며, 구르게 하고 나타나 구르게 하며, 닦아 쌓게 하고 출현하게 하므로 이것을 도에서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곧 남의 쇠손에 의한 싫증과 이치에 맞는 뛰어난 것이라 한다.
자기 흥성의 순염처법에 의하여 싫증과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을 낸다는 것은,
마치 어떤 한 종류가 자기 자신의 몸의 묘한 행[妙行]과 말의 묘한 행과 뜻의 묘한 행이 완성하고 원만하며 뛰어나고 순숙한 것을 평등하게 따라 살펴보며 곧 생각하기를,
‘나는 방일하지 않음[不放逸]으로 말미암아 방일하지 않음을 의지하며 방일하지 않음에 머무르고 방일하게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착한 일을 지었다.
나는 이제 마땅히 모든 뛰어나고 착한 법으로써 아직 생기지 않았으면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이면 갑절 더 불어나게 하고 광대하게 해야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가 이와 같이 벗어나려는 용맹으로 말미암아 끌어내는 싫증이 여기서 말하는 싫증이니,
이미 싫증을 낸 뒤에는 이치대로 생각하며, 또 거룩한 도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평등하게 일어나게 하며, 생기게 하고 평등하게 생기게 하며, 구르게 하고 나타나 구르게 하며, 닦아 쌓게 하고 출현하게 하는 것을 곧 도(道)에서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자기의 흥성에 의한 싫증과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이라 한다.
남의 흥성의 순염처법에 의하여 싫증과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을 낸다는 것은,
어떤 한 종류가 다른 이의 몸의 묘한 행과 말의 묘한 행과 뜻의 묘한 행이 완성하고 원만하며 뛰어나고 순숙한 것을 평등하게 따라 살펴보면서 곧 생각하기를,
‘그는 방일하지 않음을 말미암아 방일하지 않음을 의지하며 방일하지 않음에 머무르고 방일하게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착한 일을 지었다.
나는 이제 마땅히 모든 뛰어나고 착한 법으로써 아직 생기지 않았으면 생기게 하고, 이미 생겼으면 갑절 더 불리고 광대하게 해야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가 이와 같이 벗어나려는 용맹으로 말미암아 끌어내는 싫증이 곧 여기서 말하는 싫증이니,
이미 싫증을 낸 뒤에는 이치에 맞도록 생각하며, 또 거룩한 도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평등하게 일어나게 하며, 생기게 하고 평등하게 생기게 하며, 구르게 하고 나타나 구르게 하며, 닦아 쌓게 하고 출현하게 하는 것을 곧 도에서 이치에 맞도록 뛰어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말하여 남의 흥성에 의한 싫증과 이치에 맞게 뛰어난 것이라 한다.
[선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끊어야 할 것]
[문]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선(善)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끊어야 할 것[斷]을 막거나 그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선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선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긴다”는 것은,
어떤 한 종류가 오직 작은 계율[少戒]만을 얻고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오직 작은 금계[少禁]만을 얻고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오직 욕심을 여읜 것[離欲]만을 얻고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오직 부정관(不淨觀)만을 얻고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오직 지식념(持息念)만을 얻고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혹은 오직 초정려(初靜慮)와 나아가 제4 정려만을 얻고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혹은 오직 자무량(慈無量) 나아가 사무량(捨無量)만을 얻고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혹은 오직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만을 얻고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혹은 오직 예류과(預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만을 얻고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혹은 오직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ㆍ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ㆍ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ㆍ숙주수념지증통(宿住隨念智證通)ㆍ사생지증통(死生智證通)만을 얻고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것과 같나니,
이들을 말하여 선에 대하여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긴다고 한다.
“선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긴다”는 것은,
어떤 한 종류가 작은 계율만을 얻고서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며,
더 널리 말하면 나아가 사생지증통만을 얻고서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같나니,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선을 닦으며 나아가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으니, 그 사이에서는 끝내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겠다’라고 한다.
이것을 곧 선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문] “끊어야 할 것을 막거나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답] 끊어야 할 것을 막고 그친다는 것은,
어떤 한 종류가 착하지 않은 법을 끊으려 하고 착한 법을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왕성하게 좋아하며 부지런히 닦고 쉬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나로 하여금 빨리 이치에 맞는 착한 법을 깨달아 얻게 할까?’ 하고,
그가 이와 같이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왕성하게 좋아하면서 부지런히 닦고 익힐 때에,
아직 이치에 맞는 착한 법을 깨달아 얻지 못하게 되면. 그는 곧 생각하기를,
‘내가 닦는 끊음[斷]은 부질없고 헛되어서 결과도 없고 이익도 없으며 이치도 없고 의미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다’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는 끊어야 할 것에 대하여 뛰어난 이익이 없다고 여겨서 그로 말미암아 싫증을 내고 비방하고 헐뜯게 되나니,
이와 같은 것을 끊어야 할 것을 막고 그친다고 한다.
또 어떤 한 종류는 착하지 않은 법을 끊으려 하고 착한 법을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왕성하게 좋아하며 부지런히 닦고 멈추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어떻게 나로 하여금 빨리 이치에 맞는 착한 법을 깨달아 얻게 할까?’라고 하고,
그가 이와 같이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왕성하게 좋아하며 부지런히 닦고 익힐 때에,
아직은 이치에 맞는 착한 법을 증득하지 못하거나 혹은 비록 깨달아 얻었다 하더라도 분명하게 모르고 있으므로 곧 생각하기를,
‘내가 닦는 끊음은 부질없고 헛되어서 결과도 없고 이익도 없으며 이치도 없고 의미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다’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는 끊어야 할 것에 대하여 뛰어난 이익이 없다고 여기면서 그로 말미암아 곧 싫증을 내고 비방하고 헐뜯게 되나니, 이와 같은 것도 역시 끊어야 할 것을 막고 멈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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