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설초일명삼매경 상권
6. 초일명삼매의 종류
[법보삼매]
이구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법보(法寶)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삼보인 불(佛)ㆍ법(法)ㆍ승[聖衆]을 끊지 않는 것이니라.
무엇을 끊지 않는다고 하는가?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일으켜 모든 덕의 근본[德本]을 이루는 것이 마치 수미산과 같고, 대승(大乘)을 믿고 좋아하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
먼저 상서로운[嘉瑞] 삼천 불국토를 보고 억백천 년 동안 모두 완전히 갖추어 수승하여 필적하기 어려운 총지를 이루므로 시도무극(施度無極)을 성취하고 통달한다.
처음 발심(發心)할 때에 몸의 편안함을 버리고 언제나 온갖 즐거움을 조심하면서 즐거워할 바를 즐거움으로 삼지 않고 세속의 그리워할 바를 버리고, 법으로써 즐거움을 삼는 것이니라.
무엇을 세속의 즐거움이라 하는가?
아(我)ㆍ인(人) 수(壽)와 5음ㆍ6쇠ㆍ12인연과 기악(伎樂)ㆍ음식(飮食)ㆍ관작(官爵)ㆍ봉록(俸祿)ㆍ재물(財物)ㆍ부귀(富貴)ㆍ처자(妻子)ㆍ노비(奴婢)ㆍ권속(眷屬)과 경영하고 관리하는 집과 토지며 소ㆍ말ㆍ마차 등은, 바로 세속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니라.
무엇을 법의 즐거움이라 하는가?
무아(無我)ㆍ무인(無人)ㆍ무수(無壽)ㆍ무명(無命)을 분명히 깨달아 알면서 5통(通)ㆍ6달(達)ㆍ12부경(部經)과 보살의 도법(道法)을 소리 내어 읽고 읊고 외우며 일곱 가지의 법재[七法財]에 대하여 염증을 내지 않는다.
4은(恩)의 행과 4등심인 자ㆍ비ㆍ희ㆍ호를 행하며,
6도무극으로 뭇 선행을 하고,
기어 다니거나 헐떡거리는 사람과 만물의 무리들을 해치지 않으며 국토를 다스리되,
스스로 칭찬하지도 않고 그 밖의 다른 것도 헐뜯지 않는다.
그 마음이 간절하면서 언제나 온갖 것에 뜻을 두는 것이니, 하늘ㆍ신ㆍ용ㆍ귀와 백성들 가운데 이 사람을 보는 이는 누구나 뜻을 일으켜 그 덕을 칭찬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법의 즐거움이니라.
또 열 가지의 일을 행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신근(信根)이 첫째이고, 정근(定根)을 근본으로 삼으며,
대자(大慈)를 으뜸으로 삼고, 대애(大哀)를 높이 여기며,
뜻하는 성품[志性]이 부드럽고 모든 신통과 지혜가 바르며,
중생을 건립하고 4은이 우두머리가 되며,
도품(道品)이 으뜸이요, 불법을 수호하는 데에 뜻을 두어 그것의 하인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또 열 가지의 행을 범하지 않느니라.
어떤 것을 열 가지라 하는가?
몸으로는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음행(婬行)을 하지 않고,
입으로는 망언(妄言)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기어(綺語)를 하지 않으며,
뜻으로는 에질(恚嫉)ㆍ호의(狐疑)ㆍ사견(邪見)을 갖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시방을 가엾이 여김이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생각하듯 하고,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어지러워지지 않으며,
세속 사람에게 미혹 당하지 않고 영화(榮華)에 속지 않으며,
탐하는 사람을 좇지 않고 성내는 사람을 좇지 않고 어리석은 이를 좇지 않는다.
삼보를 비방하지 않고 속임수[譎詭]를 품지 않으며,
여섯 가지 염[六念]을 일으켜 불(佛)ㆍ법(法)ㆍ승[衆]을 행하면서 믿음과 지혜를 베풀고,
나고 들고 걸을 적에 뽐내지를 않으며,
처음 뜻을 낸 이는 마치 달이 처음 생겨서 반드시 가득 차게 되는 것과 같다.
하늘ㆍ용ㆍ귀신이 보고 옹호하게 되어서 사악(邪惡)한 소견에 중독되지 않으며,
마음을 세 가지 법에 두어 도(道)로써 보배를 삼고 세간을 무상(無常)한 것으로 여기느니라.
이것이 바로 법보삼매이니라.”
[선주삼매]
이구목이 또 물었다.
“무엇을 선주(善住)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땅이 좋은 것ㆍ나쁜 것ㆍ맛있는 것ㆍ쓴 것ㆍ냄새 나는 것ㆍ향기로운 것과 깨끗하지 못한 물건을 모조리 다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오염되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아서, 온갖 것을 받아들여 스스로 닦고 세우되,
먼저 상서로운 삼천 불국토가 편편한 것이 마치 손바닥과 같다.
뭇 보배와 연꽃으로 장엄되었다고 보면서 수승하고 비유하기 어려울 총지를 이루게 되므로 곧 초월한 계도무극(戒度無極)을 이루게 되느니라.
또 열 가지의 일을 행하여 여덟 가지 재난을 제거하느니라.
성문이나 연각의 승(乘)을 건너 부처님의 덕을 건립하고,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한 모든 일과 연유한 바는 모두 부처님 법을 따르고,
뜻하는 성품[志性]을 엄숙하게 3취(趣)의 액(厄)을 제도하고,
모든 소원을 원만하게 갖추며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몸은 언제나 자비를 행하면서 절도(竊盜)하지 않고 음탕하지도 않으며,
경전을 강의하되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하게 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다툼을 화해시키되 말이 부드러우면서 거칠지 않으며,
일찍이 교묘하게 꾸며대는 일이 없고 탐욕을 버리면서 보시를 생각하며,
사람들의 안녕과 조화를 위하고 사견(邪見)을 여의면서 바른 법을 즐긴다.
언제나 무상ㆍ고ㆍ공ㆍ비신을 관하여 세속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법을 판단의 근거로 삼으며,
마음은 스스로 닦고 존립하면서 언제나 미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몸으로는 이로움을 찾지 않고 5음(陰)이 곧 손상시킨다고 보며,
5욕(欲)을 없애려고 하고 부처님 도를 존중하면서 회한(悔恨)을 가지지 않으며,
하늘은 무상하다고 살펴 알고 사람은 마치 꿈과 같다고 관하며 3도(塗)는 가장 괴로운 것이라 그들을 가엾이 여기고 슬퍼하느니라.
어떠한 방편으로써 스스로 생사와 5음의 재난을 구제하고 다른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인가?
시방의 사람들이 곧 내 것[我所]이라고 헤아리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려 할 적에, 와서 침범한 이를 보아도 그의 악(惡)을 생각하지 않고,
만일 매우 이롭게 하는 이라도 치우치게 좋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욕설을 퍼붓는 이를 보아도 잠자코 있으면서 보복하지 않고,
만일 회초리로 때리는 이라도 받아들이면서 겨루지 않으며,
만일 성을 내는 이라도 인자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고,
만일 업신여기면서 헐뜯는 이라 하더라도 불쌍히 여기면서 해치지 않는 것이다.
또 스스로 수없는 겁으로부터 생사 중에 있으면서 5음으로 가려져 스스로 구제되지 못했으며,
마음이 헷갈리고 뜻이 미혹하여 다섯의 강물에 흐르고 네 가지 두려움의 근심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
재물은 무상하고 몸은 나의 소유가 아닌 줄 알아 재물이 있으면 능히 보시하고,
착한 벗을 구하여 가까이하고 나쁜 벗을 멀리하고, 뜻을 일으켜 부처님을 향하며,
항시 높은 경전의 뜻을 구하고 세간의 이름을 구하려 하지 않으며,
행은 언제나 공경하고 겸손하며 뜻은 믿음[信]ㆍ계율[戒]ㆍ견문[聞]ㆍ보시[施]ㆍ지혜[慧]와 도(道)에 두고,
의혹과 범금(犯禁)과 해태(懈怠)와 간탐(慳貪)과 우치(愚癡)에 의해 도의 뜻을 버리지 않느니라.
언제나 법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이 마치 굶주린 이가 밥을 구하듯 하고,
차츰차츰 도(道)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샘물이 멀리서 흘러 나와 점차 바다로 들어가듯 하며,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 키우듯 생산을 조절하여 생활을 유지하되 축적하지 않는다.
부모ㆍ형제ㆍ처자ㆍ노비ㆍ객사(客使)에게 나누어 주되 모두 가엾이 여겨 제도하여 3도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삼계를 초월하게 하며,
삼존인 불ㆍ법ㆍ승[聖衆]에 귀명하고 3달지(達智)와 걸림이 없는 지혜를 얻으며 3구(垢)에 더럽힘을 당하지 않는 것이니,
그가 이와 같은 것을 행한다면 그것 그대로가 선주(善住)삼매이니라.”
[무동삼매]
이구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무동(無動)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사자나 모든 사슴 왕은 뭇 짐승들이 두려워할 만한 위력으로써 항복시키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먼저 상서로운 삼천 불국토에 스스로 나타나 용맹스럽게 다섯 가지 병기를 잡고 잘 머무르는 총지(總持)를 이루기에 곧 초월하는 인도무극(忍度無極)을 이루느니라.
이에는 다시 열 가지의 일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인욕을 근본으로 삼고, 믿음의 기쁨[信悅]을 추진력으로 삼으며,
온갖 사람에게 깊고 묘한 법인(法忍)을 가르치고, 모든 번뇌를 흩어 끊으며,
장애됨을 없애고, 몸의 근원을 연모하지 않으며,
수명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신통과 지혜로써 하여,
3탈문(脫文)을 초월하며, 법의 평등함을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몸과 입과 뜻을 계호(戒護)하면서 언제나 모든 법으로써 인연을 일으키니,
무엇을 법의 즐거움[法樂]이라 하는가?
부처님 법을 즐기면서 세속의 법을 좋아하지 않고, 즐거이 경전을 들으면서 세간의 언담(言談)을 생각하지 않으며,
대중에게 공양하기를 좋아하면서 세속의 무리에는 가담하지 않고, 다만 삼보(三寶)만을 좋아할 뿐 3구(垢)에는 뜻을 두지 않으며,
즐거이 3처(處)를 제도하면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이니라.
즐거이 지ㆍ수ㆍ화ㆍ풍 4대(大)를 관하면서 내 것이라고 헤아리지 않고, 즐거이 사람과 만물을 편안하게 하여 위험과 해로움을 끼치지 않으며,
소유한 것을 즐거이 보시하여 간탐을 부리지 않고, 즐거이 금계(禁戒)를 받들어 준수할 바를 어기지 않는다.
즐거이 욕됨을 참아서 덕의 근본을 잃지 않고, 즐거이 정진에 힘쓰면서 죄의 근원을 만들지 않으며,
즐거이 한마음으로 선(禪)을 행하여 뜻을 어지럽게 하지 않고, 즐거이 지혜의 깊이를 더하여 미혹되지 않느니라.
즐거이 진로(塵勞)를 교화하여서 때가 끼거나 흐려지지 않게 하고, 불국토가 청정한 것을 좋아하여 개화(開化)를 싫어하지 않으며,
즐거이 도법(道法)을 장엄하여 그릇된 법은 장엄하지 않고, 즐거이 3탈문으로 공(空)ㆍ상(相)ㆍ원(願)을 여의며,
무위(無爲)의 법을 즐기면서 속세의 거짓을 즐기지 않고, 깊은 법에 즐거이 들어가되 절개를 잃지 않으며,
즐거이 기쁜 데에 뜻을 두어 성냄과 진실이 아닌 것을 여읜다.
자연법(自然法)을 즐기면서 또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며,
착한 벗을 즐거이 사귀어 세간의 이익으로 인해 가까이한 사귐은 멀리하고,
즐거이 늘 도(道)에 뜻을 두어 미혹된 일을 짓지 않느니라.
즐거이 바른 뜻을 강설하면서 속전(俗典)을 강설하지 않고,
즐거이 보살을 연모하여 성문을 사모하지 않으며,
즐거이 정각(正覺)을 구하여 연각은 구하지 않고,
즐거이 대도(大道)를 향하여 작은 술수는 닦지 않는다.
즐거이 8등(等)에 머물러 8사(邪)에는 있지 않고,
예순두 가지의 지혜를 좋아하여 스스로 두 가지의 소견에 떨어지지 않으며,
위없는 법[無上法]을 좋아하여 하열한 것은 좋아하지 않고,
대승의 업[大乘業]을 좋아하여 아라한의 법은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법의 즐거움이니라.
또 정의(定意)를 빠르게 증득하는 데에 열 가지의 일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인자한 마음으로 사람을 가엾이 여기면서 위해(危害)를 끼치지 않고,
언제나 열 가지의 선행을 행하며, 나쁜 행을 멀리 여의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도를 닦으며,
부처님 법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마치 굶주린 이가 밥을 구하듯 목마른 이가 물을 구하듯 하며,
널리 깊은 이치를 존중하고, 치우치게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며,
자비로 시방을 생각하여 온갖 중생을 제도하려 하면서 자기 몸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그러므로 무동삼매의 법이라고 하는 까닭은 제1ㆍ제2의 삼매를 초월하기 때문이요,
세속의 법에 미혹 당하지 않기 때문이며,
보살이 인자한 마음의 법을 받들어 행하기 때문이며,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로 중생의 3취의 재난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차츰차츰 대자(大慈)를 익히면서 삼계를 제도하려 하기 때문이며,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름이 없이 보아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언제나 법에 대한 생각만을 하기 때문이며,
법을 근본으로 삼고 세속을 죄로 삼기 때문이며,
언제나 중생을 가엾이 여겨 모두 도(道)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무동(無動)삼매이니라.”
[도무동삼매]
이구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도무동(度無動)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자연(自然)의 구쇄역사(鉤鎖力士)는 용맹스럽고 힘이 강하여 막히는 바가 없어서 모두 열고 물리쳐 남이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영웅으로 모든 예해(穢害)와 진로(塵勞)와 원수를 제거하는 것과 같으니,
먼저 상서로운 삼천 불국토의 사방과 네 모퉁이에 큰 바람이 불어오고 여러 가지의 꽃이 부처님 국토에 두루 함을 보고, 분별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총지를 이루므로, 곧 초월하는 진도무극(進度無極)을 이루느니라.
이에는 다시 열 가지의 일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평등하게 근(根)에 정진하고 정진하는 힘을 근본으로 삼으며,
평등한 방편으로 의지(意止:意志)를 으뜸으로 삼고, 온갖 사람들로 하여금 몸을 탐하거나 좋아하지 않게 하며,
마음과 입으로 수순하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머무른 곳에서 돌아오지 않으면서도 처(處)하는 데가 없으며,
정진을 가장 으뜸으로 삼고 원수를 항복시키며,
부지런히 닦으면서 모든 신통과 미묘한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4대의 몸은 마치 독사와 같다고 생각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두려워하여,
처음에서 끝까지 버리지 않는 등의 미혹된 일을 하지 않으며,
자ㆍ비ㆍ희ㆍ호로 기어 다니거나 헐떡거리는 사람과 만물의 무리를 마치 아버지인 듯 어머니인 듯 아들인 듯 자기 몸인 듯이 평등하게 여기면서 차별이 없게 하고,
언제나 도의 뜻을 생각하여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생각을 없게 하느니라.
보시하되 간탐하는 생각이 있지 않고, 금계(禁戒)를 받들어 지니어 나쁜 생각을 행함이 없으며,
인욕(忍辱)의 생각을 내어 성을 내는 생각이 없고, 언제나 정진을 닦아 게으른 생각이 없으며,
오로지 한마음일 뿐이어서 뜻을 어지럽히는 생각이 없다.
지혜의 행이 바르면서 어둡거나 가려진 생각이 없으며,
언제나 방편을 구하여 지극한 마음의 방편으로 방일(放逸)한 생각이 없고,
사람에게 권화(勸化)할 것을 생각하길 자기 몸을 제도하듯 하며,
소유한 온갖 물건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느니라.
지옥에 떨어진 이의 모진 고통의 우환(憂患)을 마치 자기 몸이 당한 듯하고,
언제나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여 그들의 죄를 대신 받는다 해도 원망하지 않으며,
아귀 세계의 배고프고 목마른 궁핍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몸을 떨고 딱하게 여기며 제도하고 구하여 저절로 안온하게 하려한다.
법을 밥처럼 먹으면서 5음과 6쇠의 목마름을 제거하며,
경전을 읽고 외우는 것을 밥으로 삼고 경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음료수로 삼으며,
여섯 가지 법행(法行)을 닦음으로써 현명하고 착한 이가 되며,
드나들면서 걷는 걸음걸이와 정진은 안온하고 편안하느니라.
축생에 떨어진 이를 생각하면서 언제나 측은하게 여기고 안온하게 하여 그 전생의 빚을 다 마치게 하며,
옛날에 지은 죄를 분명히 알게 하여 다시는 같은 죄를 짓게 않게 하고,
모든 선(善)을 받들어 행하여 온갖 악(惡)을 행하지 않는다.
스스로 지난 세상에서마다 나를 헤아려 도법(道法)을 믿지 못한 죄를 분명히 모르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고,
죄를 범한 이는 마치 깊은 못에 빠진 것과 같고 법을 받들면서 계를 믿는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고 법을 알지 못한 이가 5도에 돌아다님은 마치 수레바퀴와 같이 반복됨을 생각하느니라.
부모를 서로 근심하고 형제를 서로 염려하며 부부간에 서로 연모하면서 지니는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거나,
또는 부모를 위할 것인데 도리어 자녀를 위하고,
본래 자녀를 위할 것인데 도리어 부모를 위하거나,
혹은 부부간이 다시 원수가 되거나 하여,
상하(上下)가 뒤바뀌고 무상(無常)과 근본(根本)이 뒤바뀐 이에게는,
이 보살의 뜻은 언제 그들을 인자하게 생각하면서 깨우치고 교화하여 부처님의 바른 도를 믿고 들게 하며,
무상ㆍ고ㆍ공ㆍ비신임을 믿어 알게 하니,
이것이 바로 도무동(度無動)삼매이니라.”
[보적화삼매]
이구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보적화(寶積華)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도리천(忉利天)의 주도수(晝度樹)와 같이 모든 본래의 행[本行]으로써 5근(根)을 제도하고 중생을 초월하여 마음이 청정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다.
먼저 상서로운 삼천 불국토에서 뭇 음성과 기악(伎樂)이며 여러 가지가 섞인 영락(瓔珞)으로 그의 몸을 장식하고 사이화(思夷華)로써 그의 몸을 빛나게 하면서 해탈화(解脫華)와 푸른 연꽃이 비 내리듯 하여 그 위에 모시고 있는 것을 보아서, 모든 덕(德)을 총지하여 곧 받아들이게 되므로 선도무극(禪度無極)과 상응하느니라.
이에 다시 열 가지의 일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감관을 조복하여 덕의 근본으로 삼으며,
한마음으로 힘을 삼고 평등으로 방편을 삼으며,
정의(定意)로 산란하지 않고 금계(禁戒)로 근원을 삼으며,
해탈문으로 으뜸을 삼고 정요(定要)에 나아가면서도 있는 바가 없으며,
진로(塵勞)를 녹여 없애고 모든 정(定)을 이루어 사유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5도를 가엾이 여기고 5음을 공격하여 없애며,
5근을 성립시키고 5색을 깨끗이 화하게 하여,
이미 덕을 쌓아 5품의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解)ㆍ도지견(度知見)의 품(品)을 완전하게 갖추며, 뜻이 5통과 10력을 그리워하여 당장 이룬다.
모든 재앙과 허물을 만나지 않으며,
태어날 적마다 언제나 부처님 법을 닦고 이름과 덕이 멀리까지 드러나며,
삼계를 가엾이 여기고 어리석은 생각을 내거나 헷갈리지 않으며,
선취(善趣)와 악취(惡趣)를 환히 아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온갖 시냇물이 쉬지 않고 빠르게 흘러 사해(四海)로 향하는 것과 같나니,
이 법을 받드는 보살의 행 역시 그와 같아서, 쉬지 않고 정진하여 마침내 대도(大道)로 향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달이 열흘이 되었을 때는 빛이 더욱 완전해지면서 중생을 비추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공덕의 위엄이 있는 빛이 날마다 더욱 더하면서 모든 위액(危厄)을 제도하고 중생의 우환을 가엾이 여기느니라.
또 다섯 가지 일의 행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다섯 가지 계율의 청정함이 마치 밝은 거울과 같이 더러울 바가 없고,
열 가지의 선을 침범되지 않아 두루 갖추게 되며,
도의 뜻을 잃지 않고, 삿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몸을 탐착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이니라.
또 다섯 가지가 있느니라.
성내는 빛을 없애고, 겁약(怯弱)한 마음이 없으며,
간탐(慳貪)하는 뜻을 버리고, 아첨하려는 뜻을 없애며,
분별하여 공(空)을 아는 것이니라.
비단 입으로만 언제나 한마음을 닦는다고 할 뿐만이 아니라 행도 어지럽지 않으며,
호귀(豪貴)와 권세(權勢)와 부락(富樂)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줄 알며,
색(色)은 마치 큰 물거품과 같고 통양(痛痒)은 마치 작은 물거품과 같으며 상(想)은 마치 파초(芭蕉)와 같고 생사(生死)는 마치 그림자와 같으며 식(識)은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관하느니라.
색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통양에 미혹되지 않으며,
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삿된 행[邪行]을 하지 않으며,
식을 추구하지 않고 5음이 공한 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이니라.
다시 다섯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음행을 탐하는 것과, 성을 내는 것과, 잠자듯 의식이 암담한 것과, 희롱하여 놀리는 것과, 의심하는 것인, 이 5개(蓋)를 제거하는 것이니라.
관통하여 보고 환히 보며 가벼이 올라가 능히 날고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며, 어디로부터 와서 태어나고 죽는 것인가를 알고,
다섯 가지 신통으로써 스스로 재미있게 즐기며, 5음으로써 방일하지 않는다.
몸은 덕행(德行)을 닦으면서 그릇된 법을 행하지 않으며,
깨우쳐 교화하면서 설법하고, 안온한 바가 많게 하며,
많은 악한 일과 해로운 일을 하지 않고,
도(道)로써 업을 삼아 법을 익히는 것으로써 밥을 삼고, 뜻[義]을 이해함을 음료로 삼으며,
호귀(豪貴)를 그리워하지 않고 법으로써 호(豪)를 삼고, 공(空)을 환히 앎으로써 귀(貴)를 삼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적화(寶積華)삼매이니라.”
[일광요삼매]
이구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일광요(日光耀)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상서로운 삼천 불국토에 뭇 보배로 된 목욕하는 못에는 여덟 가지 맛이 나는 물이 맑고 고요하게 가득 찼고 푸른 연꽃ㆍ붉은 연꽃ㆍ노랑 연꽃ㆍ횐 연꽃이 심어져 있으며, 둘레와 난간은 모두 7보(寶)로 만들어졌다.
그 주위는 상서로운 꽃이 있으며, 밑은 금모래[金沙]가 깔려 있고 자신의 몸이 그 안에서 재미있게 노는 것을 보면서, 지혜의 정[慧定]을 이루고 총지를 증득하여 밝히므로, 초월하는 지도무극(智度無極)을 이루느니라.
여기에 다시 열 가지 일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지혜를 근원으로 삼고, 지(智)의 힘을 최상으로 삼으며,
바른 소견을 으뜸으로 삼고, 평등한 뜻[等意]을 수승한 것으로 삼으며,
몸의 모든 덕을 닦고, 모든 부류에 들어가 거룩한 진리[聖諦]의 상(相)을 갖추며,
평등한 상(相)을 이루고, 지혜로워 음개(陰蓋)가 없으며,
모든 지나간 소견을 제거하고, 불기법인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의 일이니라.
6정(情)을 관(觀)하되 본래 처소가 없어서 어디서 온 것도 없고 어디로 가는 것도 없으며,
본래 자연 그대로요 공(空)한 것인데 연(緣)을 만나 일어나는 것일 뿐이니,
비유하면 하늘에서 비가 오되 용(龍)으로부터 나오지도 않고 물로부터 나오지도 않으며,
땅으로부터 나오지도 않고 용의 마음으로부터 나오지도 않아서,
모두 인과 연이 합하고 만나야 비로소 이 비를 내리게 하는 것처럼,
6정의 모든 입(入)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오히려 인과 연으로 성립되는 것이요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라.
생사도 그와 같으니, 비유하면 그림 그리는 이가 그림의 대상인 사람ㆍ방ㆍ집ㆍ코끼리ㆍ말ㆍ탈것 등을 그릴 때,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그 대상의 형태나 솜씨가 나타나지 않다가,
벽판(壁板)과 소필(素筆)과 채색(彩色)의 기구 등 온갖 연(緣)이 두루 합하고 만나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과 같으니라.
선악(善惡)도 그와 같이 인과 연이 합하여 성립되느니라.
또다시 도(道)를 행하는 데에도 10선의 행과 6도를 인(因)하는 것이니,
무극(無極)의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ㆍ선권방편이 합쳐져서 성취할 뿐이니라.
부처님 몸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부처님 몸을 떠나지도 않고,
마음과 뜻에 생각이 없어 자연 그대로 허공과 같으며,
차츰차츰 대자(大慈)에 들어가고 또 대비(大悲)와 희호(喜護) 등의 행을 닦되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언제나 온갖 중생을 위하면서 또한 구함도 있지 않으며,
몸의 행을 삼가하고 말을 조심하며 겸손하면서 순하며,
마음속의 생각은 부드럽고 아첨이 없고 질박(質朴)하면서 삿됨이 없느니라.
또 여섯 가지의 일이 있어서 빠르게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를 얻느니라.
어떤 것이 여섯 가지인가?
언제나 부처님께 의지하여 머무르고,
바르고 참된 도(道)에 들어 마음이 다시 되돌아가지 않으며,
속뜻의 행[內意行]에 대하여 스스로 환히 깨달아 알고,
착한 벗을 만나서 그에게 일을 맡기며,
뜻하는 원[志願]이 너그러우면서 만족하지 않고,
마음이 화합하지 않음이 없고, 지혜가 결핍됨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여섯 가지이니라.
보살이 도를 수행하되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기대지 않고 안과 밖에도 기대지 않으며,
근본이 되는 법의 가르침에 따르면서 보살의 깊고 묘한 행을 어기지 않고,
대자(大慈)를 멈추지 않으면서 대비(大悲)도 잃지 않으며, 세간의 결핍한 바에 따라 그들을 구제한다.
도를 닦아 바르게 교화하면서 삿되게 가르치지 않으며,
한마음으로 지혜를 향하여 어리석음에 가려지지 않고,
6쇠(衰)는 마치 허깨비ㆍ요술ㆍ그림자ㆍ메아리ㆍ아지랑이와 물속의 달과 같고,
꿈속에서 본 것은 홀연히 그 처소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줄을 밝게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일광요(日光耀)삼매이며 감동한 바가 많은 유순법인(柔順法忍)이니라.”
[제리의삼매]
이구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일러 제리의(諸利義)삼매를 이루었다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상서로운 삼천 불국토의 온갖 보배로 된 목욕하는 못에 그 좌우를 자세히 살피며, 지옥의 고액(苦厄)을 제도하여 넓은 들판에서 노닐게 하며, 기특한 취락(聚落)의 총지에 이르므로 곧 초월한 권도무극(權度無極)을 이룬다고 하느니라.
이에 다시 열 가지의 일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뜻하는 행에 들어가고, 중생을 건립(建立)하며,
끝없는 대자비와 두루 한 연민을 근본으로 삼고, 심성(心性)이 부드러우면서 싫증을 내거나 게으르지 않으며,
제자(弟子)와 연각(緣覺)의 승(乘)을 버리고, 관(觀)하는 바가 자세하고 참되며,
도의 마음을 인도하면서 다스리고, 모든 신통과 지혜로써 불퇴전을 세우고, 넓은 지혜를 깨달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의 일이니라.
언제나 바른 지혜로써 삿된 견해를 멀리 여의고,
자연히 도를 닦으면서 세속에 미혹되지 않으며,
미묘하고 끝없는 법에 깊이 들어가면서 널리 세속에 들어가며,
세속에 대하여도 속되지 않고 도에 대하여도 의지함이 없으며,
생각이 성스러운 가르침에 이르러 중생을 개화하고,
노(老)ㆍ병(病)ㆍ사(死)로 언제나 신변을 수호하며,
6정을 물리치고 6쇠에 떨어지지 않으며,
7사(邪)를 좇지 않고 언제나 7각(覺)을 섭수하느니라.
마음은 삿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 정진하면서 폐지하지 않고,
법에 수순하여 어기지 않고 기뻐하면서 한(恨)하지 않으며,
신근(信根)이 헷갈리지 않고 안온하면서 위태롭지 않으며,
뜻이 안정되어 어지럽지 않고 재(財)를 믿고 지(智)를 믿되 본래 계재(戒財)가 없다.
소승(小乘)의 참괴재(慚愧財)에 떨어지지 않고 삼계에서 아직 제도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재물을 부끄럽게 여기고 지혜가 넓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며,
재문(財聞)을 널리 들어 짝할 이가 없고 지극히 깊고 먼 지혜로 재시(財施)를 보시하며,
대도(大道)의 지혜재(智慧財)로써 지혜에 들어가 널리 온갖 중생을 제도하느니라.
열 가지의 일이 있어서 불퇴전에 이르니,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도무극이 있음을 듣고는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지 않고,
부처님의 존재 유무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지 않으며,
법(法)의 유무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지 않고,
성중(聖衆)의 존재 유무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지 않으며,
도(道)의 유무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지 않는다.
보살의 존재 유무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지 않으며,
법신(法身)의 존재 유무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지 않고,
세속의 유무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지 않으며,
사람의 존재 유무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지 않고,
목숨이 있고 없는 것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거나 하지 않으며,
수명이 있고 없는 것에 마음이 동요하여 물러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시방으로 날아가서 모든 하늘과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며,
법(法)으로써 근본을 삼고 도(道)로써 근원을 삼으면서 나[我]를 헤아리지 않으며,
혹은 지옥으로 들어가서 고통을 구제하기도 하고,
혹은 날짐승ㆍ길짐승에 들어가서 어리석음을 깨우친다.
혹은 아귀(餓鬼)에 들어가서 굶주림의 독을 위로하면서 배를 채워 주고,
세속 인연을 따라 가르치고 교화하면서 저마다 그 처소를 얻게 하며,
세속의 법에 오염되지 않고 깨끗하기가 마치 햇빛과 같고 밝기는 마치 둥근 달과 같으며,
보살은 불퇴전을 얻어서 많은 변화를 능히 행하고 깨우쳐 제도할 바 있는 데서는 문득 많이 보전하여 제도하며,
모든 고뇌가 있는 이에게는 모두 큰 안락을 얻게 하고,
모든 지혜 없는 이에게는 모조리 다 지모(智謀)를 넓히게 하니,
이것을 바로 제리의(諸利義)삼매를 이룬다고 하느니라.”
[현재제불목전립삼매]
이구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현재제불목전립(現在諸佛目前立)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달이 다 차서 둥근 보름달일 때 뭇 어둠이 다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하는 일도 그와 같이 정성껏 잘 수행하고 청정히 하면 원하는 바가 성취되어 불국토를 이루게 되고 중생을 가르쳐 교화하는 것이다.
먼저 상서로운 삼천 불국토에 사자와 사슴 왕이 머리에 비단을 이었는데 그 몸이 높고 커서 위력으로 여러 짐승을 다스리는 것처럼,
끝없는 8만 4천의 모든 총지문을 이루므로 곧 초월한 지혜를 성취하느니라.
이에 다시 열 가지의 일이 있느니라.
한마음의 정의(定意)로 삼매에 들어, 상념(想念)이 없으며,
오로지 한 뜻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모두 끊으며,
모든 것을 구하지 않고, 법이 모두 공(空)한 줄 알며,
삼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위(無爲)를 좋아하지 않으며,
유위(有爲)를 헤아리지 않아서, 법신을 이해하여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그 향한 방소(方所)에 현재 부처님이 계신다는 것을 들으면 언제나 그 방소를 생각하면서 부처님 곁에 모인 사부대중과 그들을 위하여 경법을 설하시는 것을 관하며,
4대(大)는 공하여 땅은 마치 거품 더미와 같고,
물은 마치 아침이슬과 같으며,
불은 마치 번갯불과 같고,
바람은 마치 부치는 부채와 같다고 관찰하며,
4대는 인(因)과 연(緣)이 합하여 이루어졌을 뿐, 본래 아무 것도 없다고 분별하느니라.
스스로 몸의 모습을 관하면서 온갖 감관은 본래부터 실체가 없다고 자세히 살피고,
스스로 통양(痛痒)을 관찰하면서 본래부터 통양은 없는 줄 알며,
스스로 사상(思想)을 관하되 온갖 사상을 자세히 살피면서 본래부터 사상은 없는 줄 알고,
스스로 그의 뜻을 관하면서 본래부터 뜻이 없는 줄 아느니라.
이미 공(空)하다고 관한지라 온갖 것은 없다고 보며,
여덟 가지 재난을 가엾이 여기고 세간의 여덟 가지의 일인 흥성[盛]ㆍ쇠망[衰]ㆍ훼방[毁]ㆍ칭찬[譽]과 이름이 있고[有名] 이름이 없는[無名] 것과 근고(勤苦)와 안락(安樂)에서 벗어나며,
여덟 가지 삿됨을 버리고 여덟 가지 바름[正]에도 머물지 않으며,
평등하게 있고 없음[有無]에 처하면서 역시 머물지 않으며,
4등심(等心)인 자ㆍ비ㆍ희ㆍ호를 행하고, 4은으로 중생을 제도하며 인애(仁愛)를 은혜로이 베풀고 이롭게 하되 평등하게 하느니라.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모든 다른 상념(想念)이 없으면,
5음이 곧 끊어지고 6쇠는 처소가 없으면서 마음이 곧 안정을 얻으며,
4대를 보지 않고 사람도 보지 않으며,
천(天)ㆍ지(地)ㆍ인(人)ㆍ물(物)도 보지 않아 영원히 보는바가 없을 것이니,
이렇게 오래오래 하여야 비로소 시방의 부처님을 뵙게 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물이 흐리면 그 밑이 보이지 않지만, 오랫동안 멈추어 움직이지 않고 고용해지면 맑아져서 훤히 보이듯이,
보살도 그와 같이 정(定)에 들어 상념이 없고, 관하되 보는 바가 없으면,
5음과 6쇠가 환해진 것이 마치 구름이 걷히면 해나 달빛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시방의 부처님을 뵙게 되느니라.
다시 그것을 관하면서,
‘내가 부처님께로 간 것인가?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오신 것인가?’라고 하면,
이는 마음이 곧 스스로 생각한 것이니, 본래 부처님도 또한 오시지 않았고 나도 또한 가지 않은 것이니라.
비유하면 밝은 거울이나 맑은 물이나 깨끗한 기름에서 형상이 보이고 그림자도 보이되 그 영상(影像)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은 것처럼,
보살도 또한 그와 같이 시방의 부처님을 뵙되 역시 가고 옴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꿈속에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부모ㆍ형제ㆍ처자를 보았으나 깨고 나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시방의 부처님을 뵈었으나 삼매에서 깨고 나면 도무지 본 바가 없는 것이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32상과 80종호는 본래 없으며 다만 화현(化現)이기 때문이니라.
형상이 없고 처소가 없는 것은 마치 허공과 같이 따로 알 수 없는 것이니, 어느 것이 허공이겠느냐?
법신도 그와 같아서 처소가 없어야 비로소 온갖 근원을 보고 통달할 수 있으며, 앉아서 시방을 보되 오고 가지도 않느니라.
이것이 바로 현재제불립목전(現在諸佛目前立)삼매이니라.”
[혜광요삼매]
이구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혜광요(慧光耀)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상서로운 삼천 불국토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법왕(法王)의 가르침을 베풀고 임금의 아들과 보신(輔臣)과 백천 권속과 영종(營從)들이 허공 가운데서 모든 보배 꽃을 가지고 그의 몸을 가리는 것을 본다.
그지없는 총지문(總持門)을 행하여 60만해(萬姟)의 모든 총지의 지혜를 이루므로 곧 초월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명월신주(明月神珠)가 모든 궁하고 모자란 것을 가득 채우고 넉넉하게 하는 것과 같이,
완전히 갖춘 모든 법으로 중생에게 가르쳐 주되 온갖 사람을 따르면서 그에 상응하게 무진덕장(無盡德藏)을 베풀어 주느니라.
이에 다시 열 가지 일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법으로써 보시하고, 계율로써 불순(不順)을 거두어 취하며,
인욕으로써 강포(强暴)를 다스리고, 정진으로써 태만을 섭취(攝取)하며,
일심으로써 산란을 섭취하고, 지혜로써 사지(邪智)를 섭취한다.
선권(善權)으로써 때를 따라 대승(大乘)으로 교화하고, 대도(大道)를 천명하여 넓히며,
8난에서 노닐며 8사행(邪行)을 해탈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것에 편파(偏頗)된 행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이니라.
여덟 가지 불가사의에 머무르면서 보살을 버리지 않고, 삼계는 마치 허깨비와 같아 진실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스스로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헤아려도 오고 간 곳을 보지 않아서, 가고 머무름에 따라 저마다 스스로 이루어지게 하느니라.
삼계는 마치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니, 여름에 사람이 없는 넓은 들판을 갈 때 멀리서 보면 큰 강에 물이 흐르고 그 곁에는 나무가 자라 여러 가지의 열매가 아주 무성해 보인다.
그 사람은 배고프고 목마르고 더운 데다 피로하여 다시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인데도,
그곳으로 가고자 하여 몇 리를 달려가 가까이 다가가지만 도무지 물은 보이지 않고, 아지랑이가 걷히게 되자 물이 없는 것과 같으니,
달인(達人)은 자주 보았는지라 물이 없음을 알므로 달려가서 구하지 않느니라.
중생은 삼계가 허깨비와 같은 줄 분명히 모르고 내가 있고 수명이 있다고 여기다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의 온갖 내용은 무상하다는 것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하고 깨달아서 다시는 미혹되지 않는다.
보살은 온갖 처소와 삼계는 마치 변화와 같고 요술과 같으며 그림자나 아지랑이와 같고 꿈이나 물속의 달과 같은 줄 알며,
본래부터 없음을 모두 아는지라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으며 해탈도 없으므로 온갖 것에 구함이 없다.
마치 어미가 제비 여러 새끼들을 먹여 살리는 것과 같이,
보살도 그와 같이 일체 중생을 깨우쳐 교화하되 역시 내버려두는 바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비유하면 마치 길잡이가 장사꾼들을 많이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올 적에 흉악한 도적을 만나지 않고 편안하게 집에 도착하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혜광요삼매의 정(定)으로써 일체 중생을 도와 음(婬)ㆍ노(怒)ㆍ치(癡) 3독(毒)의 어둠을 버리게 하고 3승(乘)을 열어 보이되 대승을 근본으로 삼아 저마다 처소를 얻게 하느니라.
비유하면 의왕(醫王)이 여러 사람들의 질병을 보고 그 병에 따라 약을 주매 그 병든 사람들이 낫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혜광요삼매로써 널리 중생의 5도의 우환과 3독의 혹독한 고통을 보고 큰 자비로써 그들을 깨우쳐 교화한다.
무극(無極)의 지혜를 바르게 가르쳐서 발심한 이나 아직 발심하지 않은 이라도 받들게 하고, 견고하게 정진하면서 회향한 이는 일생보처에 올라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혜광요삼매의 정(定)이니라.”
[용맹복삼매]
이구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용맹복(勇猛伏)삼매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전륜성왕이 공조(功祚)가 한량없고 위덕(威德)이 높고 뛰어나 자재(自在)를 얻어 온갖 법에 걸림이 없는 지혜를 얻음이 마치 허공에 때[垢]가 없어 청정한 것과 같다.
먼저 상서로운 삼천 불국토의 여래의 형용은 황금빛 얼굴이요, 그 광명은 모지고 둥근데 셀 수조차 없는 범덕(梵德) 억백 나술(那術)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경을 설하신 것을 보면서,
한량없는 총지문을 행하여 항하 모래만큼 많은 백천해(百千姟)의 총지를 이루었기에 곧 초월한 성지(聖智)를 성취한 바가 많으니라.
이에 다시 열 가지 일이 있으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일체지(一切智)에 뜻을 두면서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고, 유위에 머무르지 않고 무위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널리 인자한 마음으로 행하여 중생들을 위해 평등하게 베풀며,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평등하게 행함이 마치 허공과 같으며,
제자라는 생각이 없으면서 보살이라는 생각도 없다.
또한 세속에 대한 마음도 없고 도(道)에 대한 뜻도 없으며,
언제나 큰 지혜로써 중생을 수순하여 교화하고, 온갖 내는 데에 들어가되 또한 내는 바가 없으며,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나타나되 법신을 버리지 않고, 마음이 나[我]와 열반에 평등한 것이니,
이것을 바로 열 가지 일이라 하느니라.
몸과 입으로써 말하거나 행한 바가 있지 않고, 마음은 언제나 안정하여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욕계(欲界)에 나타내어 모든 욕진(欲塵)을 제도하고, 욕심의 자연(自然)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온갖 것에서 구하지 않음은 마치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다.
색계(色界)를 나타내되 빛깔의 자연에 대해서도 구하거나 바라는 것이 없으니,
마치 참기름이 물과 합쳐지지 않는 것처럼,
빛깔과 빛깔 없는 것을 관하되 스스로 본래부터 없는 줄 살피고 또한 살필 바도 없느니라.
무색계(無色界)를 나타내되 빛깔이 없는 것은 자연이어서 뒤도 없고 앞도 없으니,
마치 불길은 허공을 태우지도 못하며 또한 더하거나 덜함도 없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가고 오는 곳이 없는 것과 같아서,
삼계에 홀로 걸으면서 세 가지 처소를 초월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나는 새가 허공을 날아다니되 거리끼는 바가 없는 것과 같이,
삼계를 제도하고 해탈하되 각각 본래의 뜻을 따르면서 속히 깨우쳐 알아 대승(大乘)에 이를 수 있게 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의왕(醫王)이 여러 가지의 약을 가지고 저마다 병에 따라 먹게 함으로써 풍한과 열병을 곧 낫게 하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불법의 약으로써 음ㆍ노ㆍ치의 병을 치료하여 남음이 없게 하므로 그 마음이 청정하여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느니라.
마치 용맹하고 씩씩한 군대의 장군이 악한 역적을 토벌하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큰 자비로 중생을 교화하여,
모든 생사를 윤회하는 이[周旋者]와, 이에 어두운[闇昧] 사람과, 예순두 가지 소견의 모든 사악한 의심의 그물[羅網]에 떨어진 이와, 그리고 예순두 가지의 모든 바르지 않은 법을 지닌 모두에게 뜻을 일으켜서,
각자 6도(度)와 대자대비와 뭇 행의 요긴한 것을 좇아 대승에 이르게 하느니라.
비유하면 뱃사공이 견고한 배를 조정하여 왔다 갔다 하면서 뭇 사람을 건네주어 각자 원하는 곳에 이르도록 하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용맹복삼매의 정(定)으로써 한량없는 생사의 고뇌를 제도하고 해탈하되, 성문에게 나타나 그 마음을 따라 깨우쳐 주느니라.
연각에게 나타나서는 근본을 좇아 가르쳐 주며, 부처님 몸을 나타내어 세 가지 도의 가르침을 열며,
혹은 큰 법의 끝없는 지혜인 대승의 깊은 법을 나타내기도 하거니와 3악도(惡道)도 없고 또한 3승도 없느니라.
비유하면 마술사가 대중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몸을 죽게도 하고 불에 타게도 하며 짐승에 먹히는 일을 나타내면,
대중들은 모두가 두려워하여 저마다 안타까워하면서 크게 물건을 내주며 그의 몸이 회복되기를 바라지만,
그 마술사는 얻은 보물이 많은 것을 보고 즉시 땅에서 일어나 본래대로 회복되어, 본래 죽은 것도 아니고 다시 살아난 것도 아닌 것과 같다.
보살도 그와 같이 중생의 생사 5도를 깨우치고 교화하되,
보살이 되기도 하고 성문이 되기도 하며, 연각이 되기도 하고 천상에 나기도 하며,
갑자기 열반을 나타내기도 하면, 여러 사람들은 슬피 통곡하면서 그가 멸도하여 없어졌다고 여기기도 한다.
홀연히 다른 지방의 성문과 연각으로 나타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이 하면,
이미 멸도하여 다시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
마치 불에 타 없어져서 다시 그곳에 없어 불에 타 모두 없어져 버렸다고 여긴다.
보살이 비록 열반을 나타내면서 법신과 합쳐졌다 하더라도 역시 오고 간 것도 없으며, 다시 중생에 따라 나타내 보이면서 교화하는 것이니,
보살 대사(大士)는 그것을 통달했기 때문이며 법신을 환히 알기 때문이니라.
비유하면 마치 햇빛이 물속이나 그리고 군ㆍ나라ㆍ현ㆍ읍ㆍ언덕ㆍ마을 등을 비추지만,
해의 궁전[日殿]은 내려오지 않고 또한 움직여 옮아오지 않으며,
인간 세상에 있어서도 그 광명 모조리 다 이르지만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은 것과 같다.
보살도 그와 같이 삼계에 나타나되 또한 가고 오고 돌아다닌 것도 없으며,
온갖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되 역시 제도한 바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용맹복(勇猛伏)삼매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