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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2권
6. 근문품(根門品)
그때에 최승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상위(上位) 보살은 6주(住)의 지위에서 그 행(行)을 청정하게 하나이까?”
[상위 보살의 행, 6바라밀]
부처님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상위 보살은 언제나 6도무극을 수행하여 존재에 대해 연모함 없기에 본래의 과보와 서원을 이룬다.
성문(聲聞)의 마음을 버리고 국토를 청정히 하려 하며,
연각(緣覺)에 대한 뜻이 없고 하는 일은 크고 넓어 소인배의 마음이 되지 않느니라.
구걸하는 이를 보면 먼저 스스로 탐욕을 없애고 곧 그 사람에게 나아가 배부르고 만족함을 얻게 하며,
지니고 있는 진기하고 미묘한 물건을 먼저 그 사람에게 주겠다 생각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며,
나라는 것[吾我]을 멀리 여의고 항상 있다고 헤아리는 마음을 버리나니, 그 지혜는 한량없고 또한 다함이 없느니라.
깊고 미묘한 법을 듣고 취하려 하면 몸[身]과 입[口]과 뜻[意]을 깨끗이 하여 온갖 계율을 범하지 않고 언제나 모든 계율 지닌 사람을 옹호하려 하느니라.
상위 보살은 마음이 항상 인자하여 중생에게 상해(傷害)를 끼치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살생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살생을 가르치지 않으며,
어떤 이가 살생한 것을 보면 권하여 선(善)을 닦게 하며,
남의 물건은 터럭만큼도 훔치지 않고 가령 범하는 이가 있으면 고치고 뉘우치도록 가르치느니라.
또 언제나 마음을 오로지 하여 음행[淫泆]을 범하지 않고 만일 범한 이를 보면 청정한 행을 닦게 하며,
언제나 지성으로 행하고 처음부터 이간질로 하여 피차(彼此)를 이별하지 않게 하고,
다투는 이가 있으면 화해시켜 흩어지게 하며, 충언(忠言)과 간유(諫喩)로 널리 선을 행하게 하고 끝내 욕설하여 남을 성내게 하지 않으며,
성내는 이를 보면 인욕을 행하고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참괴(慚愧)하는 마음이 있으며,
말을 할 때는 입을 수호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온갖 사람에 대하여 평등하게 생각하고 미워하거나 시샘하지 말고 교만을 없애며,
중생을 향하여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고 매양 자신이 극복하고 책망하면서 상위에 이르기를 바라느니라.
지금 인욕을 행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추악하고 비루해지나니, 언제나 마음을 바로 하여 후학(後學)을 가벼이 여기지 않느니라.
즐거운 마음을 품고 도법(道法)에 있는 이면 그 마음이 청정하여 진로(塵勞)가 없나니, 깊고 미묘하여 견줄 데 없는 법을 좋아하며,
네 가지의 두려울 바 없음[無所畏]으로 외학(外學)을 항복받고 청정한 업을 닦아 그보다 위로 뛰어날 수 있게 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도(道)에 있어 인자한 일을 좇고 받들며,
만일 사문이나 이학(異學)이나 범지(梵志)를 보면 곧 스승처럼 섬기고 힘써 그 처소를 얻게 하나니,
그렇게 하는 까닭은 부처님께서 도 이룬 것을 말미암아 일체지를 이룸으로써 마음이 언제나 부드럽고 행이 졸렬하거나 난폭하지 않으며,
만일 다른 이의 잘못을 보면 보호하고 자기는 하지 않으며,
처음에는 누실(漏失)하였을지라도 그릇된 법의 행이 있지 않으며,
또한 성문이나 연각의 마음이 없고 모든 범한 바에서도 범한 바를 보지도 않나니,
살고 있는 데서마다 또한 어리석거나 어둡지 않기 때문이니라.
언제나 부지런히 힘써 행하되 게으르지 않고,
삿된 부류와 함께하되 같이 두루 접하지 않으며,
설령 폐악(弊惡)하여 보답이 없는 이를 본다 하여도 어떤 일을 함께 하지는 않되 말은 은밀하여 다정하게 하고,
계율을 받들어 완전히 갖춰 일찍이 이지러지지 않으며,
지혜 있는 사람과 법을 깊이 이해하는 이를 가까이하고 또한 어기고 거스르거나 고달파하는 뜻이 있지 않으며,
청정한 계율을 돈독히 믿고 닦는 바가 진실하여 바르고 사악한 부류들에게 물들지 않으며,
삼가 그 법을 지키되 상응하는 대로 행하느니라.
모든 중생이 그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고 법률을 관장하고 수호하며 청정히 하여 하자가 없으며,
행한 바가 견고하여 본래 마음이 결단코 마치며,
능히 말함에 그릇됨이 없고 언구에 하자가 있을 수 없느니라.
그런 까닭에 이것을 말미암아 바른 일을 행하고 삿된 도[邪道]를 품지 않나니, 그는 계율을 완전하게 갖추므로 다시는 미혹되지 않으며,
연설한 바의 음향은 듣기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고,
모든 부처님 정각(正覺)의 도움을 받으며,
자기 마음대로 즐기되 또한 구하는 바가 없고,
언제나 그쳐 만족할 줄 알고 탐하거나 그리는 바가 없으며,
그 마음이 순숙하여 뭇 악이 이미 제거되었고 몸과 뜻이 담연(澹然)하니 기뻐하거나 즐기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언제나 한가로이 살기를 좋아하나 마음으로 친근하는 것이 없고,
어수선한 데에 있어도 갖춰 분별하여 도법(道法)을 알며,
외도(外道)를 좇아 자문받거나 하는 바가 없고 근신(謹愼)하니 위의가 일찍이 예법을 잃지 않았느니라.
비단으로 된 좋은 옷을 입지 않고 본래의 서원대로 사는지라 덕이 미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마음과 뜻을 어지럽히지 않고,
이미 도력이 있으면서 덕업을 바르게 지니며,
닦는 바의 계율을 순종하여 실없이 희롱하지 않으므로 하늘과 사람들이 호위하여 구경(究竟)을 이루게 하느니라.
인자함을 행하되 널리 중생들을 생각하고,
또 가엾이 여김[悲哀]을 닦되 무릇 진로(塵勞)를 참아내며,
받들어 좇아 수호하되 게으르지 않게 하며,
평등한 마음을 행하여 선악이 둘이 없으며,
모든 중생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언제나 살피고 관하여 분명히 알되 손실되게 하지 않으며,
심식(心識)이 뭇 생각에 내닫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 악(惡)을 기억하지 않되 남의 잘못을 전하지도 않느니라.
모든 뜻을 수호하여 다 껴잡아 견고히 하되 그것을 따라 항시 보시할 것을 생각하며,
모든 중생들을 양육하고 인욕을 행하되 다른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며,
정진하기를 뜻하고 원하되 끝내 회전(廻轉)하지 않으며,
선(禪)을 생각하여 고요하되 안온한 정(定)을 얻으며,
지혜를 좇고 받들되 뭇 이치를 널리 보며,
연설한 바가 바다와 같되 역시 만족해 함이 없나니,
때문에 널리 견문(見聞)을 닦고 계율과 요긴한 법을 배우느니라.
착한 벗을 따라 모든 법을 통달하려 하며, 언제나 나쁜 스승을 여의고 모든 삿된 학문[邪學]을 멀리 하느니라.
삿된 학문이란 참되고 바른 도[眞正道]가 아닌 것이니, 몸의 모습[相]에 의지하거나 문식(文飾)을 탐하거나 집착함이 없고, 만물은 모두 무상한 데로 돌아가는 줄 아느니라.
그의 계율의 공덕은 청정하여 마치 자금(紫金)과 같고,
베푸는 뜻이 청정하여 또한 뉘우침이 없으며,
마음과 뜻이 맑아 끝내 허식(虛飾)이 없고,
배우는 바가 미묘하여 또한 번거롭지 않으며,
그 뜻은 산뜻하고 밝아 때나 혼탁함[垢濁]이 없고,
본래의 행이 청정하여 마음에 초조하지 않느니라.
비록 미혹된 곳에 있어도 음욕을 따르지 않고,
뜻이 어지럽지 않아 언제나 한결같이 안정되어 있으며,
모든 결박(結縛)을 쉬니 영원히 일어나거나 없앨 것이 없고,
끝내 잘못하지 않고 고요하게 환히 사무치며,
계율이 갖추어져 이지러지지 않으니, 새거나 없어지는 바가 없고,
그 본래의 요의[本要]에 따르되 또한 빠뜨리거나 버리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정근(定根)으로써 모두 분별하고 평등한 마음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며,
일체지로부터 해탈문에 들어가고 모든 삼매에 노닐어 다 눈앞에 나타나느니라.
몸과 목숨을 탐내지 않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이 있지 않으며,
아ㆍ인ㆍ수명에 집착하여 헤아리지 않고,
또한 명(名)ㆍ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사유하지 않으며,
몸과 입의 4대에 의지하여 물질을 만들지도 않느니라.
그 진리는 생각하여 본래와 같이 사실대로 알며,
만들어진 물질은 하나요 둘이 없음을 분별하느니라.
다시 눈의 빛깔[眼色]ㆍ귀의 소리[耳聲]ㆍ코의 냄새[鼻香]ㆍ혀의 맛[舌味]ㆍ몸의 느낌[身更]ㆍ마음의 법[心法]은 두루 다 청정하되 한 모양[一相]도 모양이 없어 헷갈리거나 당황하지 아니하며,
진실로 모든 법을 관하여 공의 행[空行]을 넘어서며,
생각도 없고 원(願)도 없고 또한 형상도 없으며,
삼계를 건너되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해탈하거나 해탈하지 않는 것도 없고 또한 얽매는 것도 없다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다시 기억을 내지도 않고 또한 내는 것을 보지도 않나니,
그렇게 하는 까닭은 모든 법은 도무지 생기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언제나 인자하고 가엾이 여겨 살생이나 도둑질을 생각하지도 않고 모든 중생을 기르면서 살아가게 하려 하며,
또한 망령되이 다른 이의 재보(財寶)를 취하지도 않고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느니라.
삿된 음행[邪淫]을 생각하지도 않고 색(色)을 멀리 여의며,
처음부터 속임수가 없고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으며,
말할 때는 충실하고 신의 있게 하고 남의 착한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며,
마음이 헷갈리거나 당황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모든 노인[耆年]을 보면 한결같이 존경하고, 돌아다니는 곳마다 어진 마음을 더하며,
저마다 얻는 바에 여한이 있지 않게 하고,
넓고도 크게 포용하되 바른 가르침[正敎]으로써 보이며,
생각은 평등하여 율법(律法)에 상응하고 어떠한 무리에게라도 또한 억울하게 하거나 함부로 하지 않으며,
온갖 행(行)이 구비됨으로써 더 나아갈 데가 없고, 구경(究竟)을 연설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하며,
널리 온갖 것을 위하여 덮개[覆蓋]를 열어버리느니라.
상위(上位) 보살은 법의 큰 주인[大主]이어서 널리 삼승의 끝없는 가르침을 연설하며,
덕은 수미산(須彌山)보다 뛰어나고
지혜는 강물이나 바다보다 많고 넓으며,
도(道)는 허공보다 뛰어나서 비유할 수도 없느니라.
최승아, 모든 사람들은 어리석고 게으르고 방일하고 미혹하여 법교(法敎)를 따르지 않으므로 다시 생사의 고통을 겪으면서 물러나 못쓰게 되고, 헷갈리어 음개(陰蓋)에 얽히어서 3취(趣)를 면하지 못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여래는 그 모든 미치지 못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어 모든 법의 근본을 좇게 하고 모두 다 하나의 법[一法]을 위하여 익히거나 집착하는 모든 것을 끊게 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과 접촉]
22가지의 병(病)은 갱락(更樂)의 근본이지만,
이 모든 법도 역시 법이 있는 것도 없고 법이 아닌 것도 없으며 또한 언교도 없어서 도무지 설명할 바도 없나니,
그렇게 되는 까닭은 그 없는 법[無法]은 곧 생기는 바도 없고 또한 소멸할 바도 없기 때문이며,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도 설하는 바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상위(上位) 보살은 갱락이 생기는 바와 갱락이 소멸하는 바를 분별하고 사유하느니라.
보살은 그것을 관하여 갱락을 대치(對治)함이 있나니,
여섯 가지 갱락으로 더불어 근본을 삼는 데서도 역시 그것을 알아야 하고,
여섯 가지 근본을 삼지 않는 데서도 역시 그것을 알아야 하며,
일곱 가지 갱락은 함께 서로 받아들이느니라.
또 보살은 사유하고 관찰하여 광어(廣語)의 갱락을 환히 알아서 세 가지의 갱락으로 근본을 짓는지라 지류(枝流)의 일곱 가지 갱락에는 조금의 분한[分]만이 있느니라.
또 최승아, 보살은 다시 명(明)의 갱락과 스스로 상응할 때,
그 밖의 네 가지 갱락을 함께 서로 받아들이는 것을 사유하여야 하고,
또한 염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도 사유해야 하느니라.
또 보살은 무명(無明) 갱락이 세 가지 갱락과 스스로 상응할 때에는,
다시 열한 가지 갱락과는 그 분한이 조금 있되 또한 염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또 최승아, 명도 아니고 무명도 아닌[非明非無明] 갱락과 스스로 상응할 때에는,
그 밖의 열한 갱락에는 그 분한이 조금만 있느니라.
또 보살은 애욕(愛欲)의 갱락과 스스로 상응할 때에는,
열한 갱락에는 조금만 그 분한이 있으며,
가령 성냄[恚怒]의 갱락이 서로 포섭하여 지닐 적에도,
열한 갱락에는 조금만 그 분한[分]이 있느니라.
또 낙통(樂痛)의 갱락은 다시 열둘의 갱락과 조금 그 분한이 있고, 고통(苦痛)의 갱락은 열한 갱락과 조금 그 분한이 있으며,
무고통무락통(無苦痛無樂痛)의 갱락은 역시 열셋의 갱락과 조금 그 분한이 있느니라.
또 보살은 안식(眼識)의 갱락이 스스로 상응할 때에는,
여덟 갱락과 조금 그 분한이 있고, 귀ㆍ코ㆍ혀ㆍ몸에서도 역시 눈의 갱락과 같아서, 차이가 없으며,
색상(色想)의 갱락은 다섯 갱락으로 체(體)를 삼고 곧 일곱 갱락과 서로 함께 이어지느니라.
다시 소리[聲]의 갱락은 세 갱락으로 체를 삼고 그 때에는,
열한 갱락과 함께 서로 이어지며,
냄새[香]의 갱락은 두 갱락으로 체를 삼고 그때에 아홉 갱락과 함께 서로 이어지며,
간혹 맛[味]의 갱락은 네 갱락으로 체를 삼되 이때에 곧 열한 갱락과 서로 이어지느니라.
또 세활(細滑)은 세 갱락으로 체를 삼되 곧 열세 갱락과 서로 이어지며,
간혹 법(法)의 갱락이 스물두 갱락과 함께 서로 체를 삼되 그 때에는 모든 갱락과 서로 이어지느니라.
상위(上位) 보살은 언제나 갱락(更樂)의 흥성과 쇠망과 일어나고 소멸하는 곳을 사유하여 낱낱이 분별하되 더하거나 덜하지 않게 하여야 하며,
곧 모든 티끌[塵]과 욕결(欲結)을 소멸시키고 결을 소멸시킴으로써 마음도 역시 항상하다[常]고 헤아리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다시 아ㆍ인ㆍ수명과 생기고 소멸하고 집착하고 단멸하는 것을 보지도 않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6주 보살은 진실한 마음으로써 있다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공(空)을 자세히 아는 이이니,
모든 갱락(更樂)에 대하여 하나[一]임을 분명히 분별하느니라.
보살은 간혹 때로는 갱락을 대치하면서 한 가지 근(根)으로 체(體)를 삼을 줄도 알아야 하나니,
이 때에는 따로 여덟 가지 근(根)과 서로 이어지느니라.
상위 보살은 다시 사유하면서 뜻을 오로지 앞에다 두어 낱낱이 분별하되 마음은 염착하지 않아야 하며,
보살은 다시 광어(廣語) 갱락(更樂)이 5근(根)으로 체를 삼는 줄 관찰해야 하느니라.
그때에 따로 여덟 가지 근과 서로 함께 이어지며,
또한 끝내 염착하지 않는 줄 사유해야 하느니라.
보살은 마땅히 명(明)의 갱락은 세 갱락으로 체를 삼음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그때에 따로 아홉 가지 근과 서로 함께 이어지고,
또 무명(無明)의 갱락이 스스로 체가 될 때에는 역시 여섯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며,
명도 아니고 무명도 아닌 갱락이 스스로 체가 될 때에는 열한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애욕의 갱락도 또한 네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고,
성냄의 갱락도 다시 네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며,
낙통(樂痛)의 갱락은 두 가지 근으로 체를 삼되 아홉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며,
고통(苦痛)의 갱락은 두 가지 근으로 체를 삼되 다시 여섯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며,
고통도 없고 낙통도 없는[無苦痛無樂痛] 갱락은 한 가지 근으로 체를 삼나니, 그때에 다시 무근(無根)과 함께 서로 죽어지느니라.
또 보살은 눈[眼]의 갱락이 스스로 체(體)가 될 때에는 아홉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고,
귀ㆍ코ㆍ혀ㆍ몸도 역시 그와 같으며,
뜻[意]의 갱락은 다섯 가지 근으로 체를 삼나니, 이 때에는 여덟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색(色)의 갱락은 두 가지 근으로 체를 삼으면서 곧 다섯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고,
성(聲)의 갱락은 세 가지 근으로 체를 삼나니, 그 때에는 곧 여덟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또 보살은 역시 사유해야 하나니, 냄새[香]의 갱락은 여섯 갱락으로 체를 삼나니, 그 때에는 곧 아홉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고,
가령 맛[味]의 갱락이면 두 가지 근으로 체를 삼나니, 이때에는 곧 열한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며,
혹은 때로 세활(細滑)의 갱락은 한 가지 근으로 체를 삼기도 하나니, 곧 여덟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보살은 다시 관하면서 알아야 하나니, 법(法)의 갱락은 열아홉 가지 근으로 체를 삼고 곧 열세 가지 갱락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가령 보살이 사유하고 헤아리면서 탐착을 제거하고 갱락을 짓지 않으면,
곧 온갖 소원이 충만하여지고 금빛 광명의 상호로써 몸을 장엄하며 번쩍거리는 빛이 비추어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모든 법은 죄가 공하고 고요한 줄 깊이 이해하며,
법의 근본은 역시 법이 없으면서 또한 법이 아닌 것도 없는 줄 깨달아 아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 법이 없다면 곧 생기는 바도 없고 또한 멸하는 바도 없으며,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되 설하는 바를 보지도 못하고 진실이 아닌 법은 거짓으로 붙인 이름이요 말뿐이기 때문이니라.
[모든 법은 말이 없다]
안으로는 여섯 수(受)가 있고 밖으로는 여섯 입(入)이 있으며,
5음의 모든 종류와 온갖 입(入)은 모두 텅 비고 고요하여 다 거짓 이름이요 장구(章句)와 일체법(一切法)이라고 분별하지만,
진실한 이치로써 관찰하면 역시 5음은 없고 4대의 모든 종류와 스물두 갱락의 근본은 아주 없다[斷滅]는 것도 없으며,
또한 이것은 상(常)이라거나 무상(無常)이라는 것도 없으며,
또한 견고한 것도 없나니,
이것을 바로 ‘모든 법은 말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니라.
[처소가 없는 법]
모든 법은 근본과 지말이 청정하며, 모두가 공(空)하고 모두가 고요하여 그 이름도 없으며,
온갖 법성과 명호는 모두가 또한 자연(自然)이고 전혀 아무것도 없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도 역시 그와 같나니, 처소가 없는 법을 두루 닦아 익혀야 하느니라.
무엇을 ‘처소가 없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라고 말하는가?
이를테면 담박(憺怕)함을 익히면 다 생기는 바가 없고,
욕심이 없음[無欲]을 닦으면 진실한 이치의 법을 행하며,
본래 없음[本無]을 익히고 배우면 법계를 거닐고 또한 본제(本際)를 익혀 다 공인 줄 분명히 알며,
모든 법은 다 머무르는 바가 없고 익히고 행할 바도 없으면 행(行)도 행하지 아니할 것도 없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6주 보살은 모든 법이 공임을 알고,
다시 위의와 예절을 닦아 익히며,
미래[當來]를 취하지 않고 이미 과거를 버렸으며 현재를 생각하지도 않느니라.
또한 내 것[我所]도 없고 받아 취할 바도 없으며,
또한 주인도 있지 않고 다시 옷을 입은 이도 없으니, 볼 수도 없으며,
구경에 공(空)이기 때문에 다하는 것도 없고,
설령 문자가 있다 하여도 역시 임시로 붙인 이름일 뿐이니라.
그 다함이 없다면[無盡] 곧 생기는 바가 없고,
그것은 본래 청정한지라 뜻[志意]이 담박하며,
또한 출생(出生)하는 것도 없는지라 당연히 생기는 바나 생기는 바 없는 것도 여의어야 하고,
이미 익히고 배운 바도 역시 소리나 메아리가 없으며,
나아갈 데를 보지 못하고 또한 물러날 것도 없으며,
가장자리를 미루어 찾아도 곧 그 밑도 없고 또한 밑이 없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나니,
이것을 바로 ‘본래 공[本空]임을 통달한다’라고 말하느니라.
평등(平等)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했으나 역시 생각이나 기억이 없으며,
가까운 것도 없고 먼 것도 없고 또한 발자국도 없나니,
이것을 바로 익힌다[習]고 하느니라.
익힌다고 말하는 것은 법률(法律)에 들어가서 모든 법은 임시로 붙인 이름이 있을 뿐이요,
또한 오고 가는 것이나 돌아다니는 곳도 없으며,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항상하여 법계에 머무르므로 그가 이와 같은 법을 능히 받들어 행한다면 이것을 익힌다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법(法)인가?
말한 바 법이라 함은 법은 법을 기억하지도 않고 또한 헐어 무너뜨리지도 않으며,
다시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바라는 것도 없으며,
설령 바라는 것이 없다 하여도 역시 갚으려고 생각지도 않느니라.
만일 갚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온갖 바라는 생각의 누(累)가 제거되며,
장차 올 세상을 거스르지도 않고 현재에도 머무르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도 않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이면 곧 완전히 삼세에서 평등할 수 있느니라.
삼세가 평등하게 되면 곧 언설(言說)도 없고 머물러 일부러 중생을 제도할 필요도 없느니라.
[자연과 적멸]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는 출현하여 이런 언교를 연설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저 언덕[彼岸]에 건너갈 수 있게 하거니와,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법성은 언제나 머물러 법계는 자연(自然)이며,
또한 변하거나 바뀌지 않거나 법계가 머무른다고 함은 바로 적연(寂然)함을 말하는데,
다시 무엇 때문에 법계가 자연인가?
나[吾我]가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 하느니라.
[4성제]
간혹 보살은 이 내 것[我所]을 헤아리면서 스스로 몸과 뜻으로 오로지 집착하는 바가 있다고 여기어 5음의 형상을 받아 인연(因緣)을 보며,
이름을 임시로 붙여서 마음속으로 헤아리고 근본과 지말과 4대의 모든 입(入)을 관찰하기도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다시,
‘나는 반드시 권하고 나아가게 하여 제도하며, 반드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병을 버리고 도(道)의 가르침을 닦고 익혀 세 가지 해탈문에 들어가게 하여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또 다시,
‘중생들로 하여금 평등하게 도의 자취[道迹]에 이르게 하리라’라고 하고,
아라한이 되어 4과(果)를 얻어 증험하고 혹은 다시,
‘의지(意止)ㆍ의단(意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7각(覺)ㆍ8도(道)ㆍ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과 4제와 진여가 진로(塵勞)를 소멸시킨다’라고 생각하기도 하나니,
이런 생각이 있으면서 안으로 중생에 대하여 권속을 삼는다면 곧 법계에 대하여 결감(缺減)이 있느니라.
6주 보살은 이것을 멀리 여읨으로써 연각이나 성문의 마음과 함께하지 않고 보살의 업과 대승의 서원을 행하며 크고 넓은 일산[蓋]과 넓고 큰 뜻을 펴는 것이니,
마음에서 스스로,
‘만일 내가 부처가 되려고 하여 도혜(道慧)를 힘써 구한다면 백천 가지 행에 대하여 줄어지지 않게 하리라.
나는 보시하여 간탐과 인색함을 버리고 법재(法財)를 베풀며,
금계를 청정하게 하여 더러운 흠을 끊어 없애고 행을 삼가하고 지키며,
인욕을 세우고 성냄을 베어 버리며 몸의 행은 부드럽고 온화해야 하고,
또 정진(精進)을 닦을 때는, 게으름의 때[垢]를 보호하고 부지런히 힘써 좇고 닦으면서 처음부터 버리지 않아야 하며,
또 아무도 없는 조용한 데에 살면서 정수(正受)를 닦을 때는, 뜻이 어지럽거나 옮아가지 않고 한 마음[一心]을 체득하며 삼매(三昧)에서 일어나면 그 뜻을 받들어 행하고 여섯 가지 도무극으로 중생을 깨우치고 교화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부처님의 도를 구하여 도과(道果)를 이루고자 하면,
반드시 6주로 말미암아 등정각을 이루고 뭇 악마를 항복시키며,
위없는 법을 굴려 인민들을 제도 해탈시키며,
부처님의 영원한 적멸[永寂]로써 멸도해야 하므로,
거룩한 지혜[聖慧]를 궁구하여 다하고 주지(住地)를 배우고 다스려 여래의 10력(力)의 업과, 열여덟 가지 수승하고 특수한 법[十八殊勝不共法]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所畏]을 널리 통하고,
변재를 분별하고 통달하여 막힘이 없으며,
또한 색(色)과 무색(無色)을 생각하거나 구하지 않고 탐내거나 그리워하는 바도 없으며,
그 앞 사람에 상응하게 5음을 분별하되, 일으키거나 없애는 바도 없고, 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은 바로 고뇌의 모양이니,
이 공(空)을 이해하게 되는 이것이 바로 고제(苦諦)이니라.
5음의 연(緣)으로 좇아 일어난 바를 깨달아 알고 보는 바의 만물에는 모두가 생각이나 구하는 것이 있으므로,
따로따로 그 뜻을 환히 알지만 시비(是非)가 없으며,
비록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영원히 잊지는 않나니,
이것이 바로 습제(習諦)이니라.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일과 함께하지만 그러나 진세를 같이하지[同塵] 않고,
또한 그 안에 머물러서 요행의 마음이 있지 않으며,
모두 다 소멸하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없음을 아나니,
이것이 바로 진제(盡諦)이니라.
도(道)에 이르고자 하면 고(苦)ㆍ습(習)ㆍ진(盡)을 분명히 알고 84가지 성인이 존중한 바 신령하게 통달하는 지혜로써 연의 계박[緣縛]과 망설임[猶豫]과 번뇌의 그물[結網]을 제거하나니,
이것도 바로 진제(盡諦)이니라.
4제에서 온갖 나타나는 바의 선ㆍ악과 고ㆍ락을 분별하고 마음으로 세간을 알며 근본과 지말을 모두 환히 알지만 구하지도 않으며,
비록 구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 증득을 취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제(道諦)를 행하는 것이니라.
몸이 공하고 고요히 사라져서 일어나지 않음을 분명히 이해하고,
또한 재앙이나 허물이 없으며 또한 죄(罪)를 제거하지도 않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며 다시 끊어지거나 파괴도 없으며,
몸과 몸이 아닌 것도 없고 시설이나 조작이 있는 것도 보지 않으며,
피차(彼此)에 있지도 않고 또한 중간도 없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상위(上位) 보살은 언제나 사유하되 스물두 갱락(更樂)의 근본과 서로 관련되는 재앙을 제거하여야 비로소 보살의 업(業)을 잘 닦아 익히고 숭앙할 수 있나니,
최승아, 이것이 바로 상위 보살이 6주 가운데서 그 행(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