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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3권
6. 초품 중 ‘큰 비구승과 함께하시었다’를 풀이함
【經】 큰 비구승92)과 함께 [머무셨다.]
【論】 함께[共]93)라 함은 한 장소, 한때, 한마음, 한 계행, 한 소견, 한 도, 한 해탈을 말하니, 이것이 ‘함께’이다[마하(摩訶)94)는 진나라말로는 ‘크다(大)’ 혹은 ‘많다(多)’ 혹은 ‘뛰어나다(勝)’는 뜻이다.]
어찌하여 크다 하는가?
모든 무리 가운데서 가장 높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가 끊겼기 때문이며, 천왕(天王)95) 등 큰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많다 하는가?
수효가 5천에 이르는 까닭에 많다고 한다.
어찌하여 훌륭하다 하는가?
일체의 96종의 논의96)를 능히 깨뜨리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비구(比丘)라 하는가?
비구란 구걸하는 자[乞士]라 하나니, 청정하게 살아가는 까닭에 걸사라 하는 것이다.97)
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사리불(舍利弗)98)이 성에 들어가서 걸식을 하고는 벽을 향해 앉아서 먹고 있었다. 이때 정목(淨目)99)이라 부르는 여자 범지가 와서 사리불을 보자 이렇게 물었다.
“사문이여, 그대는 먹고 있는가?”
사리불이 대답했다.
“먹고 있다.”
정목이 다시 물었다.100)
“그대는 하구식(下口食)101)을 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앙구식(仰口食)102)을 하는가?”
“아니다.”
“ 그러면 방구식(方口食)103)을 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사유구식(四維口食)104)을 하는가?”
“아니다.”
정목이 말했다.
“음식을 얻는 법[食法]에는 네 가지가 있다.
나는 그대에게 모두 물어 봤는데 모두 아니라 하니, 알 수가 없구나. 그대는 설명해 달라.”
사리불이 대답했다.
“출가한 사람이 약을 조합하거나 곡식을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등의 일로 깨끗하지 못한 생활을 하다면 이를 하구식이라 한다.
출가한 사람이 별자리나 해와 달이나 바람ㆍ비ㆍ우레ㆍ번개ㆍ벼락을 관찰하는 등 깨끗하지 못한 생활을 한다면 이를 앙구식이라 한다.
출가한 사람이 권세 있는 사람 앞에서 아첨을 떨면서 사방으로 심부름을 다니거나 교묘한 말로써 많은 것을 구해 깨끗하지 못한 생활을 한다면 이를 방구식이라 한다.
출가한 사람이 갖가지 주술을 배워 길흉을 점쳐주는 등 갖가지 깨끗지 못한 생활을 한다면 이를 유구식이라 한다.
누이여, 나는 이 네 가지 부정한 식사법[不淨食]에 떨어지지 않으니, 나는 오직 청정한 걸식으로 살아간다.”
이때 정목은 청정한 법식(法食)105)을 설함을 듣고는 기뻐하며 믿고 이해하니, 그 때문에 사리불은 법을 설해주어 수다원도(須陀洹道)를 얻게 했다.
이와 같이 청정하게 걸식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걸사라 한다.
또한 비(比)는 ‘부수다[破]106)’이며, 구(丘)는 ‘번뇌’107)이니,108) 번뇌를 능히 깨뜨리기 때문에 비구라 하는 것이다.
또한 출가한 사람을 비구라 하니, 마치 호한(胡漢)ㆍ강로(羌虜)109)가 제각기 이름이 있는 것 같다.
또한 계를 받을 때에 스스로 “나 아무개 비구는 목숨이 다하도록 계를 지니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기 때문에 비구라 한다.
또한 비는 ‘두려워하다[怖]110)’이고, 구는 능(能)111)이다.112)
곧 마땅히 마왕과 마의 백성을 두려워해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계를 받아야 한다.
이때 마(魔)가 겁을 내는 것이다. 어찌하여 겁을 내는가?
마왕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반드시 열반에 들게 되리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고 일심으로 계를 받으면 이 사람은 차츰차츰 번뇌를 끊고 괴로움을 여의어 열반에 들 것이다” 하신 것과 같다.
무엇을 승가(僧家)113)라 하는가?
승가는 진나라에서는 무리[衆]라 한다. 곧 많은 비구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승가라 한다.
예를 들어 큰 나무가 모여 있으면 숲이라 하지만 하나하나의 나무를 숲이라 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하나의 비구를 승가라 하지는 않지만, 하나하나의 비구를 제하고는 승가도 없나니, 모든 비구가 화합해 있기 때문에 승(僧)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이 승가에 네 종류가 있으니,
유수승(有羞僧)114)ㆍ무수승(無羞僧)115)ㆍ아양승(啞羊僧)116)ㆍ실승(實僧)117)이다.
어찌하여 유수승이라 하는가?
계를 지키어 깨뜨리지 않고 몸과 입을 깨끗이 간직하며 좋고 나쁨을 잘 분별하되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를 유수승이라 한다.
어찌하여 무수승이라 하는가?
계를 범하고 몸과 입을 깨끗이 간직하지 못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는 것을 무수승이라 한다.
어찌하여 아양승이라 하는가?
비록 계는 범하지 않았으나 둔하여 지혜가 없고 옳고 나쁨을 가릴 줄 모르고 가볍고 무거움도 모르고 죄 있고 죄 없음도 모르고, 대중에 일이 있어 두 사람이 싸우면 판결을 하지 못하고 잠자코 말이 없는 것이 마치 흰 염소가 사람이 죽어도 소리치지 못하는 것 같은 이를 아양승이라 한다.
어찌하여 실승이라 하는가?
유학(有學)이나 무학(無學)이 네 가지 과위에 머물러서 4향도(向道)를 실천하는 것을 실승이라 한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승은 함께 백일갈마(百一羯磨)118)를 하고, 계를 설하고,119) 법랍을 받는[受歲] 등 갖가지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실제의 성문승120)은 6천5백이요, 보살은 두 종류인데 유수승과 실승이다.
이 실승으로써 나머지도 모두 승이라 이름할 수 있으니, 이 때문에 비구승이라 부르는 것이다.
【經】 대략의 수효 5천 분(分).
【論】
【문】 어찌하여 대략의 수효라 하는가?
곧 조금 지나거나 조금 모자라는 것을 대략의 수효라 한다.
어찌하여 분(分)이라 하는가?
곧 많은 대중에서 일부분을 취한 까닭에 분(分)이라 한다. 이 비구들이 천만 명인데 그 가운데서 일부분을 취한 5천 사람이니, 그러므로 5천 분이라 한다.121)
【經】 모두가 아라한(阿羅漢)이었다.
【論】
【문】 어찌하여 아라한이라 하는가?
아라(阿羅)122)는 도적123)이요, 한(漢)124)은 깨뜨림[破]125)이니,126) 곧 모든 번뇌의 도적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한다.
또한 아라한은 모든 누(漏)127)가 다하였기 때문에 온갖 세간과 하늘과 사람의 공양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아(阿)128)는 부정하는 것[不]이요, 나한(羅漢)129)은 태어남[生]130)이니,131) 곧 다시는 뒷세상에 태어나지 않으므로 아라한이라 한다.
【經】 모든 누(漏)가 이미 다했다.
【論】 삼계(三界) 가운데에서 세 가지 누132)가 이미 다하여 남음이 없기 때문에 누가 다했다 한다.
【經】 다시는 번뇌가 없었다.
【論】 모든 결사의 흐름[結使流]ㆍ수액(受扼)133)ㆍ결박[縛]134)ㆍ덮개[蓋]ㆍ견해[見]135)ㆍ얽매임[纏]136) 등이 다 끊겼으므로 번뇌가 없다고 한다.
【經】 마음으로 잘 해탈하였고[心解脫] 지혜로도 잘 해탈하였다[慧解脫].
【論】
【문】 어찌하여 마음으로 좋은 해탈을 얻고 지혜로 좋은 해탈을 얻었다 하는가?
【답】 외도로서 욕심을 여읜 자는 한 장소와 한 도에서만 심해탈을 얻을 뿐 온갖 장애의 법에서 해탈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을 ‘마음으로 훌륭한 해탈을 얻었고, 지혜로 훌륭한 해탈을 얻었다’ 한다.
또한 아라한들은 두 가지 도에서 심해탈을 얻나니, 견제도(見諦道)137)와 사유도(思惟道)138)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훌륭한 해탈을 얻었다 한다.
아직 배울 것이 남은 사람[學人]은 비록 심해탈을 얻기는 해도 훌륭한 해탈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번뇌[結使]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도들은 길을 돕는 가르침[助道法]이 만족치 못하나니, 하나의 공덕만을 행하거나 혹은 두 가지 공덕만을 행하고서 도를 구하나 얻지 못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보시만을 해서 청정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며,
또한 어떤 사람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서 말하기를,
“능히 근심과 걱정을 벗어나며, 항상 즐거운 국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여덟 가지 청정한 도가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깨달음이요,
둘째는 들음이요,
셋째는 경을 읽음이요,
넷째는 안의 괴로움을 두려워함이요,
다섯째는 큰 중생의 괴로움을 두려워함이요,
여섯째는 하늘의 괴로움을 두려워함이요,
일곱째는 좋은 스승을 만남이요,
여덟째는 크게 보시를 하는 일이다”라고 한다.
그러니 앞의 사람은 여덟째 것만을 청정한 도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어떤 외도는 보시와 지계만을 청정한 도라 하고,
또한 어떤 이는 보시와 선정만을 청정한 도라 하고,
또한 어떤 이는 보시와 지혜 구하는 것만을 청정한 도라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길은 충분하지 못하다.
공덕이 없거나 공덕이 적으면서 청정하다 하면 이 사람은 비록 한 곳에서는 심해탈을 얻을지라도 호해탈(好解脫)이라 할 수는 없나니, 열반의 도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생ㆍ노ㆍ병ㆍ사의 큰 바다를
공덕 없는 사람은 건너지 못한다.
공덕이 적은 이도 건너지 못하니
길을 잘 행하라 하심은 부처님의 말씀이라.
여기에서 『수발타범지경(須跋陀梵志經)』139)을 얘기해야 하리라.
수발타140) 범지는 120세에 5신통(神通)141)을 얻고서 아나발달다(阿那跋達多)142) 못 가에 살고 있었다.
밤에 꿈속에서 보니, 사람들이 모두 장님이 되어 벌거벗은 채 어둠 속에 서 있었으며, 해는 떨어지고 땅은 깨어지고 바다는 마르고 큰 바람이 일어 수미산을 불어 깨트려 흩어버리는 것이었다.
깨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무슨 까닭일까? 나의 목숨이 다하려는 것인가. 혹은 천지의 주인[天地主]이 떨어지려는 것인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 이러한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이전 세상부터 선지식143)이었던 신(神)이 있었는데,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수발타에게 말했다.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라. 일체지를 갖추신 분이 계시니, 부처님이라 한다. 그 분이 새벽녘에 무여열반에 드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꿈을 꾼 것이지 그대의 몸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이때 수발타는 이튿날 구이나갈국(拘夷那竭國)144)의 숲 속에 이르러 아난(阿難)이 경행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난에게 물었다.
“내가 듣건대 그대의 스승이 새로이 열반의 진리를 말씀하시고 오늘 저녁 한밤중에 열반에 드신다 합니다. 저에게 의문이 있으니 부디 부처님을 뵙고 내 의문을 해결하게 해 주시오.”
아난이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몸이 극히 피로하시니, 그대가 따져 묻는다면 세존을 번거롭게 할 것이오.”
수발타가 마찬가지로 거듭 청하고 세 번째 청하니, 아난도 세 번까지 처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때 부처님께서 멀리서 이 대화를 들으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수발타 범지가 내 앞에 와서 마음껏 따지고 묻도록 허락하라. 그는 나의 마지막 도를 얻은 제자가 될 것이다.”
이때 수발타가 부처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는 한쪽에 앉아서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외도들이 은애(恩愛)와 재물을 버리고 출가하였어도 모두가 도를 얻지 못했거늘 오직 사문 구담(瞿曇)만은 도를 얻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염부제 땅에 있는 6사(師)145)의 무리들이 모두 말하되 ‘내가 일체지를 갖춘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인지요?”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내 나이 열아홉에
집을 떠나 불도를 배웠다.
내가 출가한 뒤 오늘까지
이미 50년이 지났다.
청정한 계와 선과 지혜를
외도는 하나도 갖지 못했고
아주 조금도 없거늘
하물며 온갖 지혜이겠느냐.
“만일 8정도(正道)146)가 없다면 여기에는 제1과도 제2ㆍ제3ㆍ제4과도 없거니와 만일 8정도가 있다면 여기에는 제1과와 제2ㆍ제3ㆍ제4과가 있느니라.
수발타야, 나의 법에는 8정도가 있으니, 여기에는 제1과와 제2ㆍ제3ㆍ제4과가 있느니라.
그 밖의 외도의 법은 모두가 공하여 도도 없고 과도 없고 사문도 없고 바라문도 없나니, 이렇게 나는 대중 가운데서 진실로 사자후를 외치노라.”
수발타는 이 법문을 듣고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부처님보다 나중에 열반에 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부처님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스스로의 신통력으로 몸에서 불을 내더니 몸을 태워 멸도를 택했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덕이 없거나 공덕이 적으면 조도법이 원만히 갖추어지지 못한다” 하셨다.
부처님의 말씀은 모든 공덕이 구족하므로 능히 제자들을 제도하시나니, 마치 작은 약장사는 한 가지 약이나 두 가지 약뿐으로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므로 중대한 병을 고치지 못하지만, 큰 약장사는 여러 약을 갖추고 있기에 모든 병을 다 치료하는 것과 같다.
【문】 삼계의 온갖 번뇌를 여의는 까닭에 심해탈을 얻는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욕에 물든 마음을 여의면 해탈을 얻는다’ 하시는가?
【답】 애욕[愛]은 능히 마음을 얽매고 막는 큰 힘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만을 말씀하시고 다른 번뇌를 말씀하시지 않았으니, 애욕이 끊어지면 다른 번뇌도 끊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온다” 하면 반드시 데리고 온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애욕도 그렇다.
또한 수건의 한 끝을 잡으면 나머지는 모두 따르는 것같이, 애욕에 물드는 일 역시 그와 같아서 애욕이 끊기면 나머지 번뇌는 이미 다 끊긴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또한 모든 번뇌[結使]는 애(愛)와 견(見)에 속하나니, 애에 속한 번뇌는 마음을 가리고, 견에 속한 번뇌는 지혜를 가린다.
그러므로 애를 여의는 까닭에 애에 속했던 결과 사 역시 여의게 되어 심해탈을 얻는다.
이와 같이 해서 무명을 여의는 까닭에 견에 속하는 결과 사도 여의게 되어 혜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5천명의 아라한은 물러나지 않는 법에서 무생지(無生智)147)를 얻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훌륭한 해탈을 얻고 지혜로 훌륭한 해탈을 얻었다 하나니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러나는[退法] 아라한이 시해탈(時解脫)을 얻음은 마치 구제가(劬提迦)148) 등이 비록 해탈을 얻었으나 퇴법인 까닭에 훌륭한 해탈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經】 마음이 길들여져 유연했다.
【論】 어떤 이가 공경하고 공양하거나 성내고 때리더라도 마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소중한 보배를 얻거나 기와쪽을 얻거나 동일하게 보고,
칼을 들어 손발을 끊거나 전단향을 몸에 발라 주거나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또한 음욕ㆍ진애ㆍ교만ㆍ의견(疑見)149)의 근본 번뇌가 이미 끊겼으므로 마음이 잘 길들었다 한다.
또한 이 아라한들은 욕망에 물들기 쉬운 곳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고, 성내기 쉬운 곳에서도 성내지 않고, 우치해지기 쉬운 곳에서도 우치해지지 않고 6정(情)을 지키고 보호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잘 길들여졌다 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사람이 6정을 수호함이
잘 길들여진 좋은 말같이 하면
이는 실로 지혜로운 사람이니
모든 하늘이 우러러 받든다.
그 밖의 범부들은 6정을 잘 수호하지 못하여 음욕ㆍ성냄ㆍ교만ㆍ어리석음ㆍ의혹ㆍ사견을 끊지 못했으므로 잘 길들지 못했으니, 마치 길들여지지 않고 유연하지 않기가 사납고 버릇 나쁜 말과 같다. 그러므로 아라한들을 마음이 잘 길들여지고 유연하다 하는 것이다.
【經】 마하나가(摩訶那伽).
【論】 마하(摩訶)는 대(大)요, 나(那)는 불(不)이요, 가(伽)는 죄(罪)이다.150) 아라한들은 모든 번뇌가 끊겼다. 그러므로 부죄(不罪)라 한다.
또한 나가(那伽)는 용(龍)이고도 하고 코끼리[象]라고도 한다.
이 5천의 아라한들은 무수한 아라한 가운데서도 가장 힘이 세다. 그러므로 용 같고, 코끼리 같다 한다.
물로 다니는 것 가운데에서는 용의 힘이 으뜸[大]이요, 육지로 다니는 것 가운데에서는 코끼리의 힘이 으뜸이다.
또한 잘 길들여진 코끼리왕은 능히 큰 무리의 군사를 무찌르고 곧장 뛰어든다. 고개를 돌리거나 칼과 몽둥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물과 불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니, 도망가거나 물러섬이 없어 죽음에 이르러도 피하지 않는다.
아라한들 역시 그와 같아서,
선정과 지혜를 닦았으므로 마군과 모든 번뇌[結使]의 도적을 능히 무찌르고,
욕하거나 때려도 원망하거나 성내지 않으며,
늙음ㆍ죽음의 물ㆍ불도 두려워하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또한 큰 용왕은 큰 바다에서 일어나 큰 구름을 일으키어 온 허공을 두루 덮게 하고, 큰 번개와 광명을 놓아 천지를 밝게 비추며, 큰 비를 내려 만물을 윤택하게 한다.
아라한들 역시 그와 같아서,
선정과 지혜의 큰 바다에서 일어나 자비의 구름을 일으켜서 축축이 적셔줄 중생이 있는 곳에까지 미치게 하며,
큰 광명과 갖가지 변화를 나타내고 실상의 법을 연설하여 제자들의 마음을 적시어 선(善)의 싹이 돋아나게 한다.
【經】 할 일을 이미 다했다.
【論】
【문】 무엇을 할 일[所作]151)이라 하며, 무엇을 이미 다했다[已辨] 하는가?
【답】 신(信)ㆍ계(戒)ㆍ사(捨)ㆍ정(定)152) 등 온갖 착한 법을 얻었기 때문에 할 일이라 하고,
지혜ㆍ정진ㆍ해탈 등 모든 착한 법을 얻었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하나니,
두 가지 법이 구족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할 일을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모든 번뇌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애욕에 속하는 번뇌요, 또한 하나는 견해에 속하는 번뇌이다.
애욕에 속하는 번뇌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 할 일이라 하고,
견해에 속하는 번뇌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색법(色法)153)을 잘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할 일이라 하고,
무색법(無色法)154)을 잘 보았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한다.
가견(可見)과 불가견(不可見)155), 유대(有對)156)와 무대(無對)157) 등 두 가지 법도 이와 같다.
또한 불선(不善)과 무기법(無記法)158)을 끊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선법(善法)을 사유하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문(聞)ㆍ사(思)의 지혜를 성취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수(修)의 지혜를 성취하였으므로 이미 다했다 한다.
갖가지 세 가지로 된 모든 법 역시 모두 이와 같다.
또한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159) 등을 얻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고법인(苦法忍) 등 무루의 선근들을 얻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견제도(見諦道)를 얻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사유도(思惟道)를 얻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유학도(有學道)를 성취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무학도(無學道)를 성취하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심해탈을 얻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혜해탈을 얻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누(漏)를 다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공해탈(空解脫)을 얻는 까닭에 이미 끝냈다 한다.
또한 온갖 번뇌[結使]를 제거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때 아닌[非時] 해탈을 얻은 까닭에 이미 다했다 한다.
또한 스스로의 이익을 끝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한다.
이와 같이 할 일을 이미 다했다는 이치를 자유롭게 설명할 수 있다.
【經】 짐을 버리어 능히 짊어질 수 있었다.
【論】 5중(衆)이 거칠고 무거워서 항상 괴롭히기 때문에 짐[擔]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짐이라 하는가? 5중(衆)이 짐이다” 하신 것과 같다.
아라한들은 이 짐을 이미 제거했다. 그러므로 ‘짐을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능히 짐을 진다’ 했는데, 불법 가운데에는 두 가지의 짐이 있으니, 공덕의 짐과 남에게 응하는 짐이다. 전자는 스스로를 이롭게 함이요, 후자는 남을 이롭게 함이다.
모든 누가 다하고 원망 없는[不悔] 해탈 등 모든 공덕을 갖춘 것을 일컬어 ‘스스로를 이롭게 함’이라 하고,
신(信)ㆍ계(戒)ㆍ사(捨)ㆍ정(定).혜(慧) 등의 모든 공덕을 능히 남에게 줄 수 있으면 이를 ‘남을 이롭게 함’이라 한다.
이 아라한들은 스스로의 짐과 남에 응하는 짐을 능히 질 수 있기 때문에 ‘능히 짐을 진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비유하건대 큰 소가 강력한 힘으로 무거운 짐을 능히 감당해 내는 것과 같으니,
이 아라한들 역시 그와 같아서, 무루의 근(根)ㆍ힘[力]ㆍ각도(覺道)를 얻어 능히 불법의 큰 일[大事]를 걸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들을 일컬어 ‘능히 짐을 지는 자’라 하는 것이다.
【經】 자기의 이득을 체득했다.
【論】 무엇을 자기의 이득[己利]이라 하고, 무엇을 자기의 이득이 아니라 하는가?
곧 모든 착한 법[善法]을 행하는 것을 자기의 이득이라 하고,
그 밖의 옳지 못한 법[非法]을 자기의 이득이 아니라 한다.
또한 신(信)ㆍ계(戒)ㆍ사(捨)ㆍ정(定)ㆍ혜(慧) 등 모든 공덕은 온갖 재물이나 보배보다 수승한 까닭이고,
이 세상과 뒷세상에서 항상 쾌락을 얻는 까닭이며,
능히 감로의 성(城)에 이르게 되는 까닭이니,
이러한 세 가지 인연 때문에 ‘자기의 이득’이라 한다.
「신품(信品)」160)에서 게송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믿음과 지혜를 얻으면
이 보물은 으뜸이며 제일이니
그 밖의 세간의 재물들은
이 법 보배에 미치지 못하리.
또한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얻고, 뒷세상에서도 즐거움과 열반을 얻어 항상 행복하다면[樂] 이를 자기의 이득이라 한다. 그 밖의 것은 자기의 이득이 아니다.
이런 게송이 있다.
세상이 알고 있는 갖가지 무도(無道)의 법은
금수(禽獸)와 꼭 같아 다를 바 없나니
바른 지혜와 요긴한 도법을 구하여야
늙음과 죽음 벗어나 열반에 들리라.
또한 8정도와 사문의 과를 아라한의 자기 이익이라 하는데,
이 5천 아라한은 득도(得道)와 과위의 두 가지 일을 모두 얻는 까닭에 자기의 이득이라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득을 얻었다’고 한다.
【經】 모든 유(有)161)와 결(結)162)이 다했다.
【論】 세 가지 유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163)이다.
욕계에 얽매이는 업은 인연을 취해 능히 뒷세상에서 그 업의 과보를 내니, 이것을 욕유라 한다.
색유와 무색유도 이와 같으니, 이것을 유라 한다.
결(結)이 다했다고 했는데, 결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곧 애결(愛結)ㆍ에결(恚結)ㆍ만결(慢結)ㆍ치결(癡結)ㆍ의결(疑結)ㆍ견결(見結)ㆍ취결(取結)ㆍ간결(慳結)ㆍ질결(嫉結)인데,
이들 결사가 다하여 유가 다함에 이르고, 이 유가 다하여 결이 다함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결이 다했다’고 한다.
【문】 아라한들은 번뇌[結使]가 영원히 다했다. 일체의 번뇌를 여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유는 결코 다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라한이 아직 멸도에 들지 않는 한, 안근 등의 5중(衆)이나 12입(入)ㆍ18계(界)의 모든 유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답】 방해될 것은 없다. 이는 과위(果位) 가운데서 인위[因]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와 같다.
“단월(檀越)164)이 음식을 보시할 때는 다섯 가지 일[五事]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곧 목숨[命]과 모양[色]과 힘[力]과 즐거움[樂]과 변재[𥊳]165)이다.
음식이 항상 다섯 가지 일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음식을 얻어먹고도 죽거니와 어떤 사람은 적은 양의 음식을 먹고도 살아간다. 음식은 다섯 가지 일의 인위가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음식을 보시할 때 다섯 가지 일을 베푼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게송이 있다.
음식을 끊으면 틀림없이 죽지만
먹은 이는 죽는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음식을 베풀면 다섯 가지 일을 준다 하시네.
또한 어떤 사람이 백 근의 금을 먹었다 하는 것과 같다.
금은 먹을 수 없지만 금이 음식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금을 먹었다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계율의 티166)가 된다” 하셨는데,
이는 여자가 계율의 티라는 것이 아니라 계율의 티가 되는 원인이기 때문에 여자는 계율의 티가 된다 하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과 같다.
아직 땅에 닿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죽었다”고 한다.
곧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사람은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한들은 이미 번뇌가 다하고 있는 까닭에, 존재[有] 역시 반드시 다할 것이 틀림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유와 결이 다했다’고 하는 것이다.
【經】 바른 지혜로 이미 해탈을 얻었다.
【論】 마건제(摩犍提)167) 범지의 제자가 그의 시체를 평상에 얹어 메고 성안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외치기를,
“누구든지 눈으로 마건제의 시체를 보기만 하여도 그 사람은 모두가 청정한 도를 얻게 된다.
그러니 하물며 예배하고 공양하는 사람이겠는가” 하니,
그 말을 믿는 이가 많았다.
이 말을 들은 비구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일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소인은 눈으로 보아 청정을 구하지만
이렇게 지혜 없는 자에게 참된 도는 없도다.
모든 결(結)과 번뇌가 마음에 가득하거늘
어떻게 눈으로 보아서 청정한 도를 얻으랴.
만일에 눈으로 보아 청정함을 얻는다면
지혜공덕이라는 보물이 무슨 소용 있으랴.
지혜의 공덕만이 청정함이 되나니
눈으로 보아 청정을 구함은 옳지 못하네.
그러므로 ‘바른 지혜로 해탈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문】 아라한들은 해야 할 일[所作]에 관해서는 이미 끝내서 다시는 더 나아가 구할 것이 없거늘, 어찌하여 항상 부처님 곁에만 머물러 다른 곳에서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가?
【답】 일체 시방의 중생들도 부처님께 공양을 드려야 하지만, 아라한이 받은 은혜는 무거운 까닭에 더 많이 공양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아라한들은 부처님을 좇아 무량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니, 결과 사가 끊어져서 신심(信心)이 더욱 많아짐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대덕 아라한들은 부처님 곁에서 공덕의 즐거움[樂味]을 느끼고, 공경하고 공양하여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까닭에 부처님 곁에 머무르는 것이다.
아라한들이 부처님을 둘러싸고 있는 까닭에 부처님의 덕은 더욱 존귀한 것이다.
마치 범천의 사람들이 범천왕을 둘러싼 것 같고, 삼십삼천(三十三天)168)이 석제환인을 둘러싼 것 같고,
귀인(鬼人)169)들이 비사문왕(毘沙門王)170)을 둘러싼 것 같고,
작은 왕들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둘러싼 것 같고,
병들었던 사람이 병이 나은 뒤에는 큰 의사171) 곁에 머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라한들이 부처님의 곁에 머무니, 아라한들이 둘러싸고 공양하기에 부처님의 위덕은 더욱 존귀한 것이다.
【문】 아라한들은 이미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자신의 이익을 얻었다면, 다시 가르침[法]을 들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반야바라밀을 설하실 때 5천의 아라한이 함께했는가?
【답】 아라한들은 할 일을 이미 다하기는 했어도 부처님께서 깊디깊은 지혜의 가르침으로써 시험하려 하신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물으신 것과 같다.
『바라연경(波羅延經)』172)의 아지타(阿耆陀)의 질문173)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종종의 학인 및
모든 수법(數法)의 사람들
이 사람들이 행하는 법을
여실하게 설해 주시옵소서.
여기에서 “무엇이 학인(學人)이고 무엇이 수법인(數法人)인가?”라며 물으셨지만 이때 사리불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세 번에 걸쳐 물었지만 세 번 모두 침묵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의단(義端)을 내보이시며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생(生)은 있는가, 없는가?”
사리불이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생은 있습니다.”
생이 있는 자는 멸을 이루고자 한다.
유위의 생법인 까닭에 학인이라 하고, 지혜로써 무생법(無生法)을 얻는 까닭에 수법인이라 한다.
이 경의 이 아지타의 질문 가운데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또한 혹은 유루이거나 혹은 무루의 모든 선정(禪定)을 아직 얻지 못했기에 얻고자 하고, 이미 얻은 것을 견고하게 하고 깊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아라한들은 부처님 곁에서 가르침을 듣는 것이다.
또한 현전의 즐거움을 위함이기도 하니, 『난타가경(難陀迦經)』174) 가운데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금생의 즐거움을 위해 가르침을 듣는 것이다.
또한 아라한들은 부처님 곁에서 가르침을 들으면서 마음으로 싫어하는 일이 없다.
『비로제가경(毘盧提迦經)』175)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곧 사리불이 비로제가176)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법 가운데에서 가르침을 들으면서 싫어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또한 큰 스승이신 부처님께서 스스로 일심으로 제자 곁에서 가르침을 듣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비난해서,
“아라한은 이미 할 일을 다 마쳤거늘, 어찌해서 가르침을 듣는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비유하건대 배부른 사람도 좋은 음식을 만나면 다시 먹으려 하거늘 어찌 시장한 사람에게 먹지 말라 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아라한들은 할 일을 이미 끝냈으되 항상 부처님 곁에서 법을 듣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해탈법 가운데 머무셨고 아라한들 역시 해탈법 가운데 머물렀다. 법에 머무는 자에 상응하는 권속들이 장엄을 이루는 것이다.
『전단비유경(栴檀譬喩經)』177)에서 말씀하셨다.
“어떤 전단 숲에는 이란(伊蘭)178)이 둘러싸고, 어떤 이란 숲에는 전단이 둘러싼다.
또한 전단이 있으면 전단이 숲을 이루고, 이란이 있으면 이란이 저절로 둘러싼다.”
부처님이나 아라한 역시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는 훌륭한 법의 해탈에 머무셨고, 아라한들도 훌륭한 법의 해탈에 머무니, 법에 머무는 자에 상응한 권속으로 장엄하고 있는 것이다.179)
대중이 둘러싼 것은 마치 수미산왕180)을 10보산(寶山)181)이 둘러싼 것 같고, 횐 코끼리 왕[白香象王]을 여러 횐 코끼리가 둘러싼 것 같고, 사자의 왕을 사자들이 둘러싼 것 같으니, 부처님 역시 그러하시다.
부처님은 위없는 복전(福田)이기에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머무시는 것이다.
【經】 오직 아난만을 제하니, 그는 배움의 경지[學地]182)에서 수다원을 얻었을 뿐이었다.
【論】
【문】 어째서 아난만은 제외되었는가?
【답】 위에서 찬탄한 것은 아라한들인데, 아난은 그 범주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아직도 배우는 경지에 있어서 애욕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 대덕 아난은 제3의 스승이며 대중의 법장(法將)183)으로, 열반의 종자를 심은 지 이미 한량없는 겁을 지났고, 항상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어 법장(法藏)을 지녔다.
대덕이시고 예리한 근을 지닌 분이거늘 어찌하여 아직껏 애욕을 여의지 못하고 배우는 경지의 사람으로 있는가?
【답】 대덕 아난은 본래 서원을 세우기를,
“나는 들은 것 많은 무리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이 되리라” 했다.
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에 의하면 아라한은 할 일을 이미 끝낸 자이기에 시중들고 공양하는 사람이 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며,
불법 안에서 능히 큰 일을 마치고 번뇌의 도적을 부숨으로써 부처님과 더불어 해탈의 평상에 나란히 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로 아난은 갖가지 경전을 듣고 지니고 외우고 관찰하였으므로 지혜는 많으나 마음을 거두는 힘이 적었다.
만일 두 가지 공덕이 균등하였더라면 누가 다한 경지[漏盡道]184)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 아난은 배우는 사람으로서 수다원의 지위에 머무른 것이다.
또한 세존께 시봉하기를 탐내었기 때문이다.
아난은 부처님의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서 생각했다.
‘내가 일찍 누가 다한 경지를 얻으면 문득 세존과 멀어져서 시봉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리라.’
그런 까닭에 아난은 비록 아라한의 도를 얻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억제하여 취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처(處)와 때[時]와 사람[人]이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처(處)에도 능히 법을 결집할 천명의 아라한이 아직 기사굴산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처(處)이다.
세존께서 떠나실 때[時]에 도착하지 못한 채 장로 바기자(婆耆子)185)가 곁에 있지 않았다.186) 그러므로 장로 아난은 누가 다하지 못한 것이다.
세존께서 열반에 드신 것과 법을 결집할 대중이 모인 것과 바기자가 설법을 권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모여서 누진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대덕 아난은 세상의 법을 싫어하는 생각이 적어서 다른 사람만 못했기 때문이다.
아난은 여러 세상마다 왕족으로 태어나 단정함이 견줄 데 없고 복덕이 한량이 없었다.
세존께서 친히 가까이해 주시고 항상 부처님을 시중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나는 부처님을 친히 가까이 모시었기에 법의 보장(寶藏)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누진도법(漏盡道法)을 잃을 일은 두렵지 않다.’187)
이런 일 때문에 그다지 부지런히 힘쓰지 않았던 것이다.
【문】 대덕 아난의 이름은 무슨 인연으로 생겼는가? 전생의 인연인가? 부모가 지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인연에 의해서 지은 것인가?
【답】 전생의 인연인기도 하고, 부모가 지으셨기도 하고, 인연에 의하기도 하다.
【문】 어찌하여 전생의 인연이라 하는가?
【답】 석가문(釋迦文)부처님은 전생에 대광명(大光明)188)이라는 기와장이[瓦師]였다. 그때에 석가문이라는 부처님이 계셨으며, 사리불ㆍ목건련ㆍ아난이라 불리는 제자가 있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기와장이의 집에 가서 하루 저녁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기와장이가 풀자리[草座]와 등불과 꿀물[石蜜漿] 189) 등 세 가지로써 부처님과 비구들에게 공양하고 발원했다.
“내가 미래의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과 5탁악세[五惡世]190)에 태어나서 부처를 이루면 지금의 부처님과 같이 석가모니라 하고, 나의 제자들도 지금의 제자들의 이름과 같아지리다.”
곧 부처님의 서원에 의해 아난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아난은 세세(世世)에 서원을 세우기를,
“나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로서 들은 것이 많은 이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 이름은 아난이라 불릴 것이다”고 했다.
또한 아난은 세세에 인욕에 의해 성냄을 제거했다. 그 인연으로 태어나자마자 용모가 단정했다. 그 단정함으로 인해 보는 이가 기뻐했기에 아난의 부모는 그를 아난이라 이름 지었다.[아난은 진나라 말로는 환희(歡喜)이다.]
이것이 전생의 인연으로 이름이 생긴 사연이다.
어째서 부모가 이름을 지었는가?
옛날에 일종왕(日種王)191)이 있었는데 사자협(師子頰)192)이라 불렀다.
그 왕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정반(淨飯)193)이요, 둘째는 백반(白飯)194)이요, 셋째는 곡반(斛飯)195)이요, 넷째는 감로반(甘露飯)이었다. 그리고 딸 하나가 있었으니, 감로미(甘露味)196)라 불렀다.
정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부처님과 난타(難陀)197)였고,
백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발제(跋提)198)와 제사(提沙)199)였고,
곡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제바달다(提婆達多)200)와 아난(阿難)201)이었고,
감로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마하남(摩訶男)202)과 아니로두(阿泥盧豆)203)였고,
감로미에게 외아들이 있었으니, 시바라(施婆羅)204)였다.
이 가운데서 실달다(悉達陀)205)보살이 점점 자라서 전륜성왕의 지위를 버리고 밤중에 출가하여 구루비라국(漚樓鞞羅國)206)의 니련선하 기슭에 이르러 6년 동안 고행을 했다.
이때에 정반왕이 아들을 염려하는 까닭에 항상 사자를 보내 문안하여 소식을 듣고자 했다.
“내 아들이 도를 얻었더냐? 아니면 병이 나거나 죽었더냐?”
사자가 와서 왕에게 말했다.
“보살께서는 오직 가죽과 뼈와 힘줄만이 상접하여 겨우 목숨을 지탱할 뿐 심히 허약하시니, 오늘이나 내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몹시 걱정하여 근심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내 아들이 전륜성왕도 되지 못하고 부처도 되지 못하면서 어찌 그다지 심한 고행만 하다가 아무것도 얻는 바 없이 죽어가게 되었느냐.”
이렇게 근심하고 괴로워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기운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때 보살은 고행하던 곳을 버리고 백 가지 맛이 구족한 우유죽을 드시고 몸의 기운을 회복했다.
니련선하의 물에서 몸을 씻은 뒤에 보리수 밑으로 가서 금강좌207)에 앉아 스스로 맹세했다.
“이 결가부좌를 헐기 전에 반드시 일체지를 이루리라.
만일 일체지를 얻지 못한다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때에 마왕208)이 18억의 무리를 이끌고 보살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감히 보살과 우열을 겨루고자 했다.
보살이 지혜의 힘으로 마군을 크게 무찌르니,
마왕이 당하지 못하고 물러가면서 생각했다.
“보살은 이길 수가 없으니, 그 애비를 괴롭혀 주리라.”
그리고는 정반왕에게로 가서 거짓말로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아들은 오늘 저녁에 이미 죽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놀랍고 두려움에 평상에서 떨어지니, 울부짖는 모습이 마치 뜨거운 모래 위의 고기와 같았다.
왕은 이때 통곡하면서 이러한 게송을 읊었다.
아이타(阿夷陀)209)도 거짓말이었고
상서로운 감응도 영험이 없도다.
이득을 얻으리라는 좋은 이름도
아무런 소득이 없구나.
이때에 보리수신210)은 매우 기뻐하면서 하늘꽃 만다라211)를 가지고 정반왕에게 와서 게송으로 말했다.
그대의 아드님은 도를 얻으셨으니
악마의 무리들 이미 깨져 흩어졌고
광명은 돋는 해 같으시니
두루 시방의 국토를 비쳐 주시네.
왕이 말했다.
“아까는 어떤 하늘이 와서 말하되, ‘그대의 아들은 이미 죽었다’ 했는데, 그대는 이제 와서 악마를 무너뜨리고 도를 얻었다 한다.
두 말이 서로 어긋나니,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나무신이 다시 말했다.
“실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까 왔던 하늘은 거짓으로 ‘이미 죽었다’ 한 것입니다. 이는 마라가 질투심을 품고 괴롭히려 왔던 것입니다.
오늘 모든 하늘ㆍ용ㆍ신 등이 꽃과 향으로 공양하고, 공중에 비단기[繪]를 드리웠으며, 그대의 아드님은 몸에서 광명을 뿜어 하늘과 땅 사이를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일체의 고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왕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비록 전륜성왕의 지위를 버렸으나 이제 법의 전륜왕의 지위를 얻었으니, 기필코 큰 이익을 얻을 뿐 잃어버리는 일은 없도다.”
왕이 이렇게 매우 기뻐하고 있는데 이때에 곡반왕 집의 사자가 와서 말했다.
“작은댁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왕은 몹시 기뻐하면서 말했다.
“오늘은 대단히 상서롭고도 기쁜 날이로다.”
그리고는 찾아온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아기는 꼭 아난이라 부르게 하라.”
이 때문에 그 부모는 아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 것이다.
어째서 인연에 의해 이름을 짓는다고 하는가?
곧 아난은 단정하고 청정하여 마치 맑은 거울과 같았다. 늙고 젊고 예쁘고 미움이나 얼굴과 맵시는 모두 몸에서 드러나는 법인데, 아난의 그 몸은 청정하여 여자들이 보기만 하면 욕심이 곧 발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어깨 덮는 옷[肩衣]을 입도록 허락하셨다.
이 아난은 능히 보는 사람의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기 때문에 아난[歡喜]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에 논(論)을 지은 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찬탄을 했다.
얼굴은 맑은 보름달 같고
눈은 푸른 연꽃 같은데
불법의 큰 바닷물이
아난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갔도다.
사람들의 마음과 눈으로 하여금
보기만 하면 크게 환희하게 하고
부처님을 뵈러 온 모든 이들
잘 인도하여 화목함을 잃지 않네.
이와 같이 아난은 비록 아라한의 도를 얻었으나 부처님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스스로가 누를 다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공덕으로 인하여 무학[無學]의 경지는 아니나 무학의 범주에 들며, 아직 애욕을 여의지 못했으나 애욕을 여읜 자의 범주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5천인 가운데 있는 것이니, 실제로는 아라한이 아닌 까닭에 ‘아난만은 제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92)
범어로는 Mahābhikṣu-saṁgha.
93)
범어로는 sārdham.
94)
범어로는 mahāt.
95)
통상의 하늘의 신인 사천왕을 가리키나, 여기에서는 천왕을 사람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96)
범어로는 upadeśa. 육사 외도에 각각 15인의 제자를 더해 아흔여섯 종류가 된다.
97)
비구는 범어로는 Bhikṣu이다.
98)
범어로는 Śāriputra.
99)
범어로는 Śucimukhī.
100)
이하, 정목 바라문이 묻는 네 가지는 음식을 얻는 걸식의 유형을 말하며, 이에 대해 사리불은 비구의 참된 생활방식이 무엇인지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01)
범어로는 adhomukho bhuñjasi. 수행자가 밭을 갈거나 약을 지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을 말한다.
102)
범어로는 ūrdhvamukho bhuñjasi. 수행자가 별자리를 보거나 일월ㆍ풍우를 예측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을 말한다.
103)
범어로는 dińmukho bhunñjasi. 수행승이 사방으로 권력을 좇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을 말한다.
104)
범어로는 vidiśāmukho bhuñjasi. 수행승이 길흉화복을 점쳐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을 말한다.
105)
범어로는 pariśuddha dharmaika āhāra.
106)
범어로는 dhid.
107)
범어로는 kṣudh.
108)
이는 bhikṣu를 bhid(부수다)와 kṣudh의 합성어로 보는 경우이다.
109)
호한(胡漢)은 중국을, 강로(羌虜)는 티베트를 가리킨다.
110)
범어로는 bhī.
111)
범어로는 kṣam.
112)
이는 bhikṣu를 bhi(두려워하다)와 kṣam(~할 수 있다)의 합성어로 보는 경우이다.
113)
범어로는 saṁgha.
114)
범어로는 hṛmat-bhikṣu.
115)
범어로는 āhṛkya-bhikṣu.
116)
범어로는 eḍamūka-bhikṣu.
117)
범어로는 bhūṭa-bhikṣu.
118)
갈마(羯磨, karma)란 구족계를 받는 경우나 승잔죄와 같은 중죄를 참회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작법을 말한다. 여기에서 백(百)이란 많은 법을 의미하고, 일(一)이란 많은 법에 대해 하나하나의 갈마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계율에 관한 어떤 사항을 교단에 고시(告示)한다는 의미로 백(白)이라 하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하나의 고시[白]마다 하나의 갈마로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켜 백일갈마(白一羯磨)라 하기도 한다. 혹은 ‘백(白)을 두 번째로 삼는 갈마[白二羯磨, jñapti- dvityā-karma-vācanā]’라고 하기도 한다.
119)
범어로는 upavasatha. 포살(布薩)이라고도 한다. 매월 보름날 대중을 모아놓고 계경을 읽어 준 뒤 그 동안에 지은 죄를 참회시킴을 말한다.
120)
범어로는 śravaka-yāna.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길[三乘] 가운데 하나이다. 성문이란 원래는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따르던 불제자를 뜻하던 말로, 출가수행승만을 지칭하게 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대승의 입장에서 본다면, 성문승은 독각승과 함께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에 전념하는 성자가 된다.
121)
곧 5천 분(分)이란 ‘5천 명이라는 일부분’이라는 뜻이 된다.
122)
범어로는 ara.
123)
범어로는 ari.
124)
범어로는 hat.
125)
범어로는 han.
126)
이는 arhat를 ari(도적)와 han(죽이다)의 합성어로 보는 경우이다.
127)
범어로는 āsrava.
128)
범어로는 a-.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이다.
129)
범어로는 rahat.
130)
범어로는 ruh.
131)
이는 arhat를 부정접두어 a-와 ruh(태어나다)의 합성어로 본 것이다.
132)
세 가지 누란 욕루(慾漏)ㆍ유루(有漏)ㆍ무명루(無明漏)를 말한다.
133)
범어로는 upādāna. 일종의 속박된 상태를 의미한다.
134)
범어로는 bandhana.
135)
범어로는 dṛṣṭi.
136)
범어로는 paryavasthāna.
137)
범어로는 darśana-mārga. 4제(諦)를 관찰하는 단계. 번뇌 없는 성스런 길을 처음으로 발견한 자리를 말한다.
138)
범어로는 bhāvanā-mārga. 수도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139)
범어로는 Subhadrabrahmacāri-sūtra.
140)
범어로는 Subhadra.
141)
6신통(神通) 가운데 누진통을 제외한 5신통을 말한다. 곧 원하는 곳에 몸을 드러내는 신족통(神足通, ṛddhi-prātihārya)ㆍ미래를 보는 천안통(天眼通, divya-cakṣus)ㆍ범부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천이통(天耳通, divya- śrotra- abhijñā)ㆍ남의 마음을 읽는 타심통(他心通, parijaya-jñāna)ㆍ나와 남의 과거를 읽는 숙명통(宿命通, purvenivāsa-jñāna).
142)
범어로는 Anavadatapta. 무열뇌(無熱惱)ㆍ무열(無熱)이라고도 한다.
143)
범어로는 kalyāṇa-mitra. 불도수행의 도반을 가리킨다.
144)
범어로는 Kuśinagara.
145)
원시불교가 흥기하던 무렵은 고대 인도에 있어서는 이른바 수 많은 자유사상가들이 활약하던 시대인데,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6명의 사상가인 Pūraṇa Kaśapa, Pakudha Kaccāyana, Makkhali Gosāla, Ajita Kesakam- balin, Sañjaya Belaṭṭhiputta, Nigaṇṭha Nātaputta를 말한다. 쟈이나교의 교조인 니칸타를 제외하고는 오직 『사문과경』 같은 원시불교 문헌을 통해서만 이들의 주장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46)
범어로는 āryāṣṭāńgikamārga.
147)
범어로는 anutpāda-jñāna. 4제(諦)를 관찰해 얻는 지혜로서, 이제 더 이상 괴로움의 과보가 일어나지 않게 되었음을 자각하는 지혜를 말한다.
148)
범어로는 Godhika. 말라(malla)족 출신으로, 카필라성에서 부처님을 만나 친구들과 함께 출가했다.
149)
범어로는 moha. 우치를 말한다.
150)
범어로는 mahānāga를 mahat(大)-na(不)-aga(罪)의 합성으로 보는 경우이다.
151)
범어로는 kṛtya.
152)
범어로는 각각 ṡraddhāㆍśīlaㆍupekhāㆍsamādhi이다.
153)
범어로는 rūpidharma.
154)
범어로는 arūpi-dharma.
155)
범어로는 각각 sanidarśana, anidarśana이라고 한다.
156)
범어로는 sapratigha. 제법이 서로 대하는 관계를 말한다. 혹은 장소를 점한 채 물질적으로 장해하는 바가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157)
범어로는 apratigha.
158)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상태.
159)
범어로는 각각 uṣmagata-dharmaㆍmūrdhan-dharmaㆍkṣāntiḥ-dharmaㆍlaukikāgra-dharma이다. 열반으로 이르는 네 가지 길인 가행도(加行道)ㆍ무간도(無間道)ㆍ해탈도(解脫道)ㆍ승진도(勝進道)의 네 가지 도 가운데 가행도(加行道)에 이 네 가지 선근이 있다.
160)
범어로는 Śradhāvarga.
161)
범어로는 bhava.
162)
범어로는 saṁyojana.
163)
범어로는 각각 kāma-bhavaㆍrūpa-bhavaㆍarūpabhava이다. 곧 욕망으로 이루어진 존재,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 정신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를 말한다.
164)
범어로는 dānapati. 보시하는 자를 말한다.
165)
대정장에서 𥊳은 궁(宮)본에서는 '辯'이라고 한 것을 따랐다(대정장 25, p.82b04).
166)
범어로는 śīlamala.
167)
범어로는 Mākandika.
168)
범어로는 trāyastriṃṣa. 욕계 6욕천(欲天) 가운데 두 번째인 도리천을 말한다. 수미산 꼭대기에 있으며, 중앙에 제석천이 있고, 사방에 각각 여덟 명의 신들이 있어 모두 서른셋이 되기에 삼십삼천이라고 한다.
169)
아수라(Asura)를 가리킨다.
170)
범어로는 Vaiśravaṇa.
171)
범어로는 mahāvaidya.
172)
범어로는 Parāyana.
173)
범어로는 Ajitapañha.
174)
범어로는 Nandaka-sūtra.
175)
범어로는 Pilotika-sūtra. 원문에는 '蜫盧提迦經'이라 하였으나 蜫은 毘의 이체자로 보았다.
176)
범어로는 Pilotika.
177)
범어로는 Candanopama-sūtra.
178)
범어로는 Eraṇḍa.
179)
곧 부처님과 아라한들의 관계는 마치 ‘어떤 전단숲이 전단에 둘러싸인 격’이라는 것이다.
180)
범어로는 Sumerurāja.
181)
범어로는 daśaratana-parvata.
182)
범어로는 śaikṣabhūmi.
183)
범어로는 dharmapati.
184)
범어로는 āsravakṣaya-mārga.
185)
범어로는 Vṛjiputra.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아난이 아직 유학의 경지에 있으면서 법을 설함을 꾸짖어 아난으로 하여금 깨닫게 했다고 한다.
186)
때[時]란 세존께서 떠나실 때를 말하며, 사람[人]이란 바기자를 말한다.
187)
이른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들어 잘 알고 있으니, 선정으로 번뇌를 멸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188)
범어로는 Prabhāsa.
189)
범어로는 madhumaireya.
190)
말세에 다섯 가지 탁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다섯 가지란, 전쟁이나 기근 질병이 번창하는 시기인 겁탁(劫濁, kalpa-kaṣāya)ㆍ유정의 수명이 짧아지는 명탁(命濁, āyuṣ-kaṣāya)ㆍ유정의 과보가 쇠해져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고통이 증대하는 중생탁(衆生濁, sattvakaṣāya)ㆍ갖은 번뇌가 식성하는 번뇌탁(煩惱濁, kleṡa-kaṣāya)ㆍ삿된 견해가 횡행하는 견탁(見濁, dṛṣṭi-kaṣāya)을 말한다.
191)
범어로는 Sūryavaṁśa.
192)
범어로는 Siṁhahanu.
193)
범어로는 Śuddhodana.
194)
범어로는 Śuklodana.
195)
범어로는 Dronodana.
196)
범어로는 amṛtarasa.
197)
범어로는 Nanda.
198)
범어로는 Bhadrika.
199)
범어로는 Tiṣya.
200)
범어로는 Devadatta.
201)
범어로는 Ānanda.
202)
범어로는 Mahānāman.
203)
범어로는 Aniruddha.
204)
범어로는 Dānapāla.
205)
범어로는 Siddhārtha
206)
범어로는 Uruvilvā.
207)
범어로는 vajrāsana.
208)
범어로는 māra.
209)
범어로는 Ajita.
210)
범어로는 Bodhimṛkṣadevatā.
211)
범어로는 māndārava. 색깔 좋고 향기 좋은 고결한 꽃으로, 이를 바라보는 자의 마음을 환희롭게 만드는 천계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