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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5장
예루살렘의 죄와 치욕을 고백하며 회복시켜 주시길 간구
(찬송 70장)
2023-7-5, 수
맥락과 의미
예레미야애가 5장은 1-4장과 달리 알파벳 시편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분량도 가장 짧습니다. 절수는 4장과 동일하게 22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각 절의 문장이 더욱 간결합니다.
5장은 지금까지의 애가 내용 전체를 종합하여서 요약적으로 제시합니다. 예루살렘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탄식, 그 원인이 된 자신들의 죄에 대한 회개, 주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찬양, 구원하여 주시길 간구하는 내용이 간략하면서도 빠짐없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우리”가 부르는 시로 지어졌습니다. 공동체적으로 함께 슬픔을 노래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1. 유다 백성들의 범죄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받은 치욕을 고백(1-18절)
2. 찬양 받으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주시길 간구(19-22절)
1. 유다 백성들의 범죄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받은 치욕을 고백(1-18절)
1)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정치군사적 공격을 당함(1-7절)
1-5절: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부끄러움”(헤르파)입니다. 성경에서 이 말은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당하는 모욕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보며 “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하라프)?”(삼상 17:26) 할 때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 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오래 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이 땅과 집이 다시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부끄러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부끄러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회복시켜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고아와 과부와 같이 되었습니다. 실제 전쟁 가운데 부모와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불쌍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아버지이며 남편이 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음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이스라엘의 곤궁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시길 구하는 간절한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물이나 나무 같은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들조차 스스로 구할 수 없어서 많은 돈을 주고 사야 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집요하게 추격하고 끝까지 숨을 조여 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지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점점 힘이 빠지고,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참고- 1:3).
지금 이스라엘은 심각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처지가 마치 고아와 과부와 비슷합니다.
6-7절: 백성들은 6절부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합니다. 앞서 언급한 여러 고통들이 자신들이 범한 죄악들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애굽과 앗수르와 화친을 맺고 그들로부터 양식을 얻어 만족을 얻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부터 탐심을 추구한 우상 숭배의 죄입니다. 아하스와 호세아는 앗수르와 화친을 맺고 조공을 바쳤습니다(왕하 16:7-8; 17:3). 그들의 조상들은 범죄한 이후 다 없어졌습니다.
지금의 후손들 또한 조상의 잘못을 그대로 뒤따라서 동일한 죄악을 행했습니다. 여호야김과 시드기야는 애굽과 친교해서 바벨론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왕하 23:35; 렘 37:5). 멸망 이후에도 유다의 군대 장군 요하난은 남은 백성들과 함께 애굽을 의지하여 살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렘 43:7).
2) 사회 질서가 붕괴되고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음(8-14절)
8절부터는 다시 예루살렘의 비참한 처지를 말합니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바벨론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된 뒤로 사회 질서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이전에 종살이하던 사람이 지배층이 되어 사회를 다스립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대한제국에서 일본 식민지로 바뀔 때 과거 낮은 신분이었던 사람이 급부상하게 된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 결과 유다 공동체는 여러 사회적 혼란에 직면합니다. 경찰력과 군사력이 안정되지 않아서 광야 유목민들의 칼로부터 백성들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사려면 죽음을 무릅써야 합니다. 굶주림이 일상이 되어 영양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사람들의 피부색이 탄 것처럼 검게 변했습니다.
이방인들과 동족들 간에 강간과 추행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심지어 성읍 한가운데에서도 성범죄가 일어났습니다. 사회적으로 율법 규정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말씀의 질서가 사라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도자들이 매달리는 것은 아마 범죄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지도층의 부도덕으로 장로들이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맷돌을 지는 무거운 노역에 시달립니다. 심지어 아이들조차 무거운 짐을 들도록 요구받다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합니다.
본래 맷돌을 지고 돌리는 것은 가축이나 노예가 하는 굴욕적인 일입니다. 삼손이 눈이 뽑혀 블레셋에 잡혀가서 한 일이 바로 맷돌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삿 16:21). 주의 청년들이 비참한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노인들은 성문에 앉아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마을의 지도자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지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로부터 권위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청년들에게는 현재의 기쁨도 미래에 대한 소망도 다 끊겨 버렸습니다.
3)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영적인 고통 가운데 슬픔만 가득함(15-18절)
종합하자면, 여러 외적인 고통과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유다 공동체에는 기쁨이 사라지고 슬픔만이 남았습니다.
그들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면류관”(아타라)이 떨어졌습니다. 과거 다윗 왕이 암몬을 멸망시킨 뒤에 그 왕에게서 면류관을 취하여서 썼습니다(삼하 12:28).
그때에는 유다 왕국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며 열방 가운데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바벨론에 멸망당하여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라.” 이스라엘의 몰락은 자연적인 흥망성쇠의 결과도 아니고, 강대국의 출현 때문도 아닙니다. 일부 불경건한 백성들이 주장하듯, 우상 숭배를 철저히 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렘 44:18).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죄의 무게에 짓눌려 그들의 마음이 피곤합니다(참고- 1:13). 죄악의 멍에에 매여 마음이 눌리는 영적인 피곤함입니다. 눈이 어둡습니다(참고- 3:2). 아무런 소망을 발견하지 못한 채 출구 없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영적인 어두움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시온산의 성전은 다 파괴되었고, 하나님께서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여우와 들짐승만이 그 터에서 노닐 뿐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낙심시킨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그분과의 교제가 단절된 영적인 고통이 그들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쉼없이 말씀을 내려 주시고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신다는 이 사실로 위로를 얻읍시다.
2. 찬양 받으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주시길 간구(19-22절)
19절: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이들이 참으로 복됩니다. 이 찬양하는 모습 가운데 이스라엘 회복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주의 통치의 보좌는 대대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고, 지금도 세상 만물을 주님 뜻 가운데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큰 심판을 내리신 것은 우리의 잘못 때문이며, 지극히 공의로운 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죄인됨을 깊이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이 있기에, 큰 불행 가운데서도 이런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20-22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간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러면 우리가 주께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에게 회개의 마음을 주셔서 회개하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예전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거하던 그 관계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자기 스스로는 회개할 능력조차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이 백성들은 큰 고난을 통해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변화되었습니다.
마지막 절은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고(마아스), 주의 진노가 참으로 크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애가 3장에서는 “주께서는 (겸손한 자를) 영원히 버리지(마아스) 않을 것이고, 비록 근심하게 하시지만 풍부한 인자하심으로 긍휼하게 여기실 것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애 3:31-32).
주님께서는 반드시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동안 예루살렘은 인내하며 죄의 파괴적인 결과를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구원의 약속의 있지만, 아직 심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현실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예레미야 애가는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외침으로 여운을 남긴 채로 마무리됩니다.
믿고 복종할 일
예루살렘은 당면한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눈에 보이고 확실해 보이는 강대국과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의 도움을 얻어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로 채움을 받고자 하였습니다(렘 2:13). 이것은 하나님께 큰 모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버리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성들이 당한 모든 고난은 스스로의 잘못과 어리석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시 22:26). 세상의 강대국들은 결코 그들이 원하는 풍요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우리도 세상 권력을 의지하여 배를 채우려는 헛된 시도를 버립시다. 먹고 살 것을 걱정하여 하나님보다 세상을 따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동일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40일간 금식한 예수님께 마귀는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예수님은 배를 불리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먹으셨고, 먹을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는 기다리셨습니다. 항상 자족하는 지혜가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채움받았고 만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십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우리와 교제를 나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참된 배부름이요, 생명입니다.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신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생각하며, 기뻐하고 감사합시다.
우리가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 또한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에 힘씁시다. 복음이 주는 달콤함에 배부릅시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과 동행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 나라를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물질적 필요도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그분께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현실적인 어려움 가운데 처한 경우에도 하나님께 예배하며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계십니까? 말씀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생명을 누리는 것을 중심에 두고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갑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애가 5장에서 다윗 왕의 영광을 암시하는 구절들
애가 5장에서는 과거 다윗 왕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을 누렸던 것을 암시하는 여러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1절, 치욕(헤르파): 다윗이 골리앗을 보며 “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하라프)?”(삼상 17:26) 할 때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능력을 주셔서 골리앗을 물리치고 부끄러움을 씻어버리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마치 블레셋의 침략을 당한 것 같은 치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세우셔서 치욕을 씻어주실 것이 기대됩니다.
3절, 아버지(아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다윗의 자손들에게 “아버지”(아브)가 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삼하 7:14). 아들이 죄를 범하면 회초리로 징계를 하시겠지만, 왕위를 결코 빼앗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아버지 없는 고아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의 후손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셔서 그의 아버지가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아들처럼 돌보아 주실 것이 기대됩니다.
16절, 면류관(아타라): 과거 다윗 왕이 암몬을 멸망시킨 뒤에 그 왕에게서 면류관을 취하여서 썼습니다(삼하 12:28). 하나님의 축복이 다윗 왕국에 함께 하셔서 열방 가운데 높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승리의 면류관은 다윗의 간음죄가 탄로난 뒤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이후에 주어진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이 받은 면류관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주시며 영광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 기대됩니다.
이렇듯 예레미야 애가 5장에는 다윗의 영광을 연상케 하는 내용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새로운 왕이 세워지고, 그 왕의 통치를 통해 예루살렘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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