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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6권
2. 분별근품 ④
이와 같이 불상응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앞에서 ‘생상(生相)이 소생법(所生法)을 낳을 때 그 밖의 다른 인(因)과 연(緣)과의 화합을 떠나서는 그것을 낳지 않는다’고 말하였다.1)
[원인]
여기서 어떠한 법을 설하여 ‘인’이라 하고, ‘연’이라고 한 것인가?
바야흐로 원인[因]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능작(能作)과 구유(俱有)와
동류(同類)와 상응(相應)과
변행(遍行)과 이숙(異熟)이니
원인은 오직 여섯 가지라고 인정하고 있다.2)
논하여 말하겠다.
원인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능작인(能作因)이며,
둘째가 구유인(俱有因)이며,
셋째가 동류인(同類因)이며,
넷째가 상응인(相應因)이며,
다섯째가 변행인(遍行因)이며,
여섯째가 이숙인(異熟因)이다.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은 원인에는 오로지 이와 같은 여섯 종류 만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3)
육인[六因]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03389&cid=50763&categoryId=50784 모든 것이 일어나는 원인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 (1) 능작인(能作因). 어떤 것이 생겨나는 데 도움이 되는 원인, 또는 방해되지 않는 원인. (2) 구유인(俱有因). 두 개 이상의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관계일 때의 그 원인. (3) 상응인(相應因). 마음〔心〕과 마음 작용〔心所〕이 동시에 일어나,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관계일 때의 그 원인. (4) 동류인(同類因). 결과와 성질이 같은 원인. 인과 관계에서 결과도 좋고 원인도 좋고, 결과도 나쁘고 원인도 나쁜 것과 같이 성질이 같을 때의 그 원인. (5) 변행인(遍行因). 두루 작용하는 원인. 동류인에서 힘이 강한 번뇌가 원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세운 것. 강력한 번뇌가 특정한 대상에 한하지 않고 널리 여러 번뇌를 일으킬 때의 그 원인. (6) 이숙인(異熟因). 다른 성질로 성숙된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 [네이버 지식백과] 육인 [六因] (시공 불교사전, 2003. 7. 30., 곽철환) |
[능작인]
바야흐로 첫 번째 능작인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체를 제외한 그 밖의 것이 능작인이다.4)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유위법은 오로지 그 자체를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법으로써 능작인을 삼으니, 그것이 생겨날 때 장애함이 없이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 밖의 다른 원인도 역시 능작인이 된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능작인은 달리 별칭(別稱)이 없어 색처 등과 마찬가지로 총칭을 별칭으로 삼았기 때문에 [능작인이라 이름한 것이다.]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온갖 번뇌[諸漏]가 응당 일어나겠지만 이미 알았기 때문에 온갖 번뇌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럴 때 지(智)는 번뇌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어찌 능히 장애가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또한 햇볕은 지금 뭇 별들을 보는 데 능히 장애가 되고 있는데, 어떻게 유위법은 오로지 그 자체를 제외한 다른 일체의 법으로써 능작인을 삼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5)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생겨날 때 저것은 모두 어떠한 장애함도 없이 머물기 때문에 저것은 이것에 대해 바로 능작인이 되는 것이다.6)
만약 이것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저것이 능히 장애가 될 수 있음에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면 원인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나라 백성들은 그 나라의 왕[國主]이 손해만 끼치지 않으면 모두 다 같이 ‘우리는 국왕으로 인해 안락하게 산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이것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저것에 장애하는 작용이 없다고 한다면, 설혹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원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바야흐로 열반과 불생법(不生法,즉 비택멸)과 같은 것은 일체 유위법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두루 장애하는 작용이 없으며,
나락가 등의 유정의 상속신에는 무색계의 제온(諸蘊)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능히 장애하는 작용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장애하는 작용이] 있음에도 [장애하고] 있지 않는 원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장애하는 작용이 없을지라도 역시 원인으로 삼을 수 있으니,
이를테면 [폭정을 할] 힘이 없는 국왕도 역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설할 수 있는 것이다.7)
이상은 바로 온갖 능작인에 대해 공통으로 설한 것이다.8)
그렇지만 수승한 것(즉 유력능작인)에 대해 말하자면 [결과를] 낳는 힘이 없지 않으니,
이를테면 안(眼)과 색(色) 등이 안식 등을, 음식이 몸을, 씨앗 등이 싹 등을 낳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힐난하고 있다.
“만약 일체법이 장애함이 없이 머무르기 때문에 모두 능작인이 된다고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제법은 모두 단박에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어떤 사람이 살생을 하였을 때, 어떤 이유에서 일체의 모든 이는 그 살생자와 마찬가지로 살생의 업을 성취하지 않는 것인가?”9)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생겨나는 것에 대해 직접적인 조작의 힘[親作力]을 갖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장애함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법이 능작인이 된다고 인정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온갖 능작인은 모두 결과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능히 조작[能作]하는 힘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바야흐로 열반 등은 안식이 생겨나는 데 대해 어떻게 능히 조작의 힘을 갖는다고 하겠는가?
의식은 그것을 소연으로 삼고 경계로 삼아,
혹 어떤 경우에는 선한 의식을, 혹 어떤 경우에는 악한 의식을 낳으며, 이러한 의식에 의해 후시(後時)에 안식이 점차로 생겨날 수 있으니,
전전(展轉)하면서 [선행한 법은 뒤에 생겨나는 법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 같은 열반 따위도 안식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능히 조작하는 힘을 갖는 것이다.10)
이와 마찬가지로 그 밖의 다른 법에 대해서도 이 같은 경우[方隅]에 따라 ‘능히 [결과를] 낳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능작인의 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구유인]
두 번째로 구유인(俱有因)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구유인은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는 법으로
이를테면 대(大)와, 상(相)과 소상(所相)과,
심수전(心隨轉)에 대한 심(心)과 같은 것이다.11)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어떤 법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용과(士用果)가 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법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
그 상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4대종(大種)과 같은 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상(諸相)과 소상법(所相法), 심(心)과 심수전법(心隨轉法)도 역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
그러한 즉, 구유인은 서로에 대해 결과(즉 사용과)가 되기 때문에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일체의) 유위법을 두루 포섭한다고 할 수 있다.12)
그런데 유위법과 수상(隨相)은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지 않는다.13)
그렇지만 유위법은 수상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만 수상은 본법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마땅히 분별해 두어야 할 것이다.
[심수전법]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심수전법(心隨轉法)이라고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소와 두 가지 율의(律儀)와,
그러한 것과 마음의 온갖 상(相)이니,
이것이 바로 심수전법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심상응법(心相應法,즉 심소)과, 정려(靜慮)와 무루(無漏)의 두 가지 율의(律儀)와, 그러한 법(심상응법과 두 가지 율의)과 마음의 ‘생(生)’ 등의 상(相)으로, 이와 같은 것을 모두 심수전의 법이라고 한다.14)
어떠한 까닭에서 이러한 법을 심수전(心隨轉)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시(時)와 과(果)와 선(善) 등에 의해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간략히 설하면 시(時)와 과(果) 등과 선(善) 등으로 말미암아 ‘심수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가령 ‘시(時)에 의한다’고 함은,
이러한 법(즉 심소와 율의와 그것의 유위상)과 마음은 동일한 시간에 생기ㆍ지속ㆍ소멸하며, 아울러 동일한 세에 처함[墮一世]을 말한다.15)
‘과(果) 등에 의한다’고 함은,
이러한 법과 마음은 동일한 결과(사용과와 이계과)를 획득하며, [동일한] 이숙과와 동일한 등류과를 갖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앞(즉 時)의 동일함은 ‘함께함[俱, 동일한 시간(俱時)]’을 나타내고, 뒤(즉 果)의 동일함은 ‘공통됨[共, 공동의 과보(共果)]’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뜻이 동일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 등에 의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이러한 법과 마음은 다 같이 선ㆍ불선ㆍ무기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열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심수전’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16)
여기서 심왕(心王)은 지극히 적을 때라도 쉰여덟 가지의 법에 대해 구유인이 되는데,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大地法)과 그것의 마흔 가지 본상(本相)과, 마음의 본상과 수상(隨相) 여덟 가지이니, 이것을 쉰여덟 가지 법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이러한 쉰여덟 가지 법 가운데 마음의 네 가지 수상을 제외한 나머지 쉰네 가지 법은 마음에 대해 구유인이 된다.17)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마음의 [구유]인이 되는 것은 오로지 열네 가지 법뿐이니,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과 아울러 마음의 본상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품류족론』에서 설하는 바에 어긋나기 때문이니,18)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혹 어떤 고제(苦諦)는 유신견(有身見)을 원인으로 삼아도 유신견에 대해서는 원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19)
이를테면 미래의 유신견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법의 생(生)ㆍ노(老)ㆍ주(住)ㆍ무상(無常)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염오한 고제이다.
혹 어떤 고제는 유신견을 원인으로 삼고, 유신견에 대해서도 역시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앞에서 제외된 법(즉 미래의 유신견과 그것과 상응하는 생ㆍ노ㆍ주ㆍ무상)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 앞의 어떤 이)는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법’이라는 말을 외워 [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말하기를,
“그 문장은 반드시 그와 같이 외워 [전해야] 할 것이다.
혹은 마땅히 [구유인의] 뜻에 준하여 [유여사의] 설에 그 밖의 다른 점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20)
무릇 구유인이 되기 때문에 원인을 성취하는, 다시 말해 구유인으로서의 원인이 되는 모든 법, 그것은 반드시 동시에 존재[俱有]한다.
그렇지만 혹 어떤 경우 동시에 존재하는 법일지라도 구유인으로서의 원인은 되지 않는 법도 있다.
이를테면 온갖 수상(隨相)은 각기 본법(本法)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으며],
이 같은 본법의 온갖 수상은 각기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수심전법(隨心轉法)의 수상은 마음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으며],
이 같은 수심전법의 온갖 수상으로 전전(展轉)하는 것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구생(俱生)하는 유대(有對)의 조색(造色)으로 전전하는 일체의 법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21)
구생하는 무대(無對)의 조색으로 전전하는 일부의 법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22)
구생하는 일체의 조색과 대종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구생하는 일체의 득(得)과 소득(所得)의 법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즉 이와 같은 따위의 제법은 비록 동시에 존재[俱有]하는 것이라고 이름할 수는 있을지라도 구유인으로서의 원인은 되지 않으니, 동일한 결과, 동일한 이숙, 동일한 등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득과 소득의 법은 결정코 함께 작용[俱行]하지 않으니,
혹 어떤 경우에는 [득]이 앞서 생겨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에는 뒤에 생겨나기도 하며,
혹 어떤 경우에는 구생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23)
이와 같은 일체의 이치는 바야흐로 그럴 수 있다고 하겠으나 씨앗 등과 싹 등의 관계와 같은 세간에서 상식적으로 인정[極成]되고 있는 인과상생(因果相生) 중에서는 이와 같은 동시인과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떻게 동시생기[俱起]한 제법에 인과의 뜻이 있을 수 있는지 여기서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24)
어찌 [세간일반에서] 현견(現見)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등불[燈焰]과 불빛[燈明], 싹과 그림자는 동시적 관계이지만 역시 인과가 되는 것이다.25)
이에 대해 마땅히 보다 상세하게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등불이 빛의 원인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앞서 생겨난 인연의 화합에 의해 등불과 빛이 구기(俱起)하는 것인가?26)
그리고 어떤 사물이 광명을 장애하는 경우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러한 그림자가 싹을 원인으로 삼아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인가?
이치상으로 볼 때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인과관계란] 있고 없음에 따르기 때문이다.
인명(因明)에 뛰어난 이들은 인과의 현상에 대해 설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것이 있거나 없을 때 저것도 따라서 있거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결정적으로 원인이 되고, 저것은 결정적으로 결과가 된다”고 하였다.
나아가 동시에 존재하는 법 가운데 어떤 하나의 법이 존재하면 일체의 법이 존재하고,
어떤 하나의 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일체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치상 여기에는 인과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기(俱起)의 인과는 이치상 바야흐로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인과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27)
바로 앞에서 말한 바(일법과 일체법의 동시인과)에 따라 이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앞에서 설한 것처럼 소조색(所造色)은 서로 간에 상리(相離)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조조색과 제 대종, 마음의 수상(隨相) 등과 마음 등의 법도 모두 상리하지 않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28)
만약 세 개의 막대기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여 서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존재하는 법의 인과의 뜻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세 개의 막대기는 동시에 생기한 상호의존력[相依力]에 의해 서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혹은 앞서 생겨난 인연화합의 힘(이를테면 사람이 막대기 세 개를 한곳에 모아둔 것과 같은 인연)이 그러한 세 개의 막대기로 하여금 동시생기하여 서 있게 한다고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막대기 이외의 별도의 물건, 이를테면 끈이라든지 못 혹은 땅 등이 연속적으로 유지되어 그것들이 서 있게 되는 것인지를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동시에 존재하는 법)에는 또한 역시 이 밖에 동류인(同類因) 등이 관계하고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구유인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29)
이와 같이 구유인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동류인]
그렇다면 세 번째 동류인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동류인이란 결과와 서로 유사한 법으로
자부(自部)ㆍ자지(自地)에 대한 원인으로, 먼저 생겨난 법이지만
무루도의 경우 전전하여 9지(地)에 대해 원인이 되며
오로지 동등하거나 뛰어난 것만을 결과로 삼는다.
유루의 가행생(加行生)도 역시 그러하니
문(聞)ㆍ사소성(思所成) 등이 그것이다.30)
논하여 말하겠다.
동류인이란 서로 유사한 법[相似法]이 서로 유사한 법에 대해 동류(同類)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하니,
이를테면 선한 오온은 선한 오온에 대해 이리저리 서로 견주어보면 동류의 원인이 되며,
염오는 염오에 대해, 무기는 무기에 대해 각각의 오온을 서로 견주어보더라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정무기온(淨無記蘊:즉 無覆無記의 蘊)의 다섯 가지는 바로 색온의 과(果)이지만 [그 밖의] 4온은 색온의 인(因)이 아니다”고 하였다.31)
또한 어떤 유여사는 설하기를,
“다섯 가지는 바로 4온의 결과이지만 색온은 4온의 인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유여사는 설하기를,
“색온과 4온은 이리저리 서로를 견주어 보더라도 모두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한 소의신 중에서 갈랄람(羯剌藍)의 단계는 능히 열 가지 단계[十位]에 대해 동류인이 되며, 알부담(頞部曇) 등의 아홉 단계는 각각이 모두 앞의 단계를 제외한 그 밖의 단계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32)
그렇지만 만약 다른 소의신에서의 열 단계에 대해서라면 각각의 단계는 모두 [다음 생의] 열 단계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33)
그리고 이 같은 예에 따라 외계의 보리나 벼 따위의 자류(自類)와 자류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땅히 널리 사택해 보아야 할 것이다.34)
그런데 만약 색온이 색온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35) 그 같은 주장은 바로 본론(本論)에서 설한 바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36)
본론에서는 설하기를,
“과거의 대종은 미래의 대종에 대해 인연(因緣)과 증상연(增上緣)이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37)
그렇다면 서로 유사한 온갖 법은 서로 유사한 법에 대해 모두 동류인이 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자부(自部)와 자지(自地)의 법은 오로지 자부ㆍ자지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된다.
그래서 [본송에서] ‘자부ㆍ자지’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부’란 이를테면 5부(部)로서, 견고소단(見苦所斷) 내지 수소단(修所斷)을 말하며,38)
‘지’란 이를테면 9지(地)로서, 욕계의 한 가지와 [4]정려와 [4]무색의 여덟 가지를 말한다.
즉 이 가운데 욕계의 견고소단의 법은 다시 욕계의 견고소단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만 그 밖의 법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 않으며,39)
이와 마찬가지로 수소단의 법은 다시 수소단의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만 그 밖의 법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각각의 법으로서 욕계지의 그것은 다시 욕계의 그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고,
초정려지의 그것은 초정려의 그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며,
내지 유정지(有頂地)의 그것은 유정지의 그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으로,
다른 지의 그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또한 이러한 자부와 자지의 법은 일체의 자부와 자지의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자부와 자지의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먼저 생겨난[前生] 법’이다.
오로지 먼저 생겨난 제법만이 그 후 서로 유사하게 생겨나는 법과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본론(本論)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발지론』에서 설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동류인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먼저 생겨난 선근은 이후에 생겨나는 자계(自界)의 선근과 아울러 그것의 상응법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선근은 그 밖의 2세(과거와 현재)의 법에 대해, 과거ㆍ현재의 선근은 미래의 선근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는 사실 따위에 대해서도 마땅히 널리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40)
그런데 그 논에서는 바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만약 어떤 법이 그 같은 법에 대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면 혹 어느 때 이 법이 그 같은 법에 대해 인[연]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는 그 논에서 답하여 말하기를,
“어떠한 때라도 인[연]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하였다.41)
이는 바로 구유ㆍ상응ㆍ이숙의 세 가지 원인에 근거하여 은밀히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미래법에는 동류인이 없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미래 정생위(正生位)의 법은 결정코 능히 그 같은 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니,42)
그렇기 때문에 그 논의 글에서는 최후의 단계(즉 미래 生相位)에 근거하여 은밀하게,
‘어떠한 때라도 인[연]이 되지 않는 때는 없다’고 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힐난된 내용에 대해 잘 해석한 것이 아니니,
미래법은 정생위 이전에는 동류인이 되지 않으며,
그 뒤 [생상위(生相位)에 이르러] 비로소 동류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미래 생상위의 법이 동류인이 된다고 한다면, [그 논에서의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즉 그 논에서 다시 물어 말하기를,
“만약 어떤 법이 그 같은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되었다고 한다면 혹 어느 때 이 법이 그 같은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는 그 논에서 바로 답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 법이 아직 이생위(已生位,즉 현재)에 이르지 않았을 때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43)
만약 그의 해석대로 라고 한다면, 마땅히 이 역시 ‘어떠한 경우라도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때는 없다’고 대답하여야 하였을 것인데,
[논에서는] 어찌하여 ‘만약 이 법이 아직 이생위에 이르지 않았을 때라면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던 것인가?
그런데 그는 다시 해석하기를,
“[『발지론』의 논의는] 두 갈래[二門]로 나타내고자 하였으니,
그곳에서 설한 바대로 여기에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서 설한 바대로 그곳에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하였다.44)
그러나 이와 같이 해석하여 작문(作文)한들 도대체 무슨 공덕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논주(論主, 『발지론』의 저자 迦多衍尼子)가 글에 능숙하지 않다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앞의 해석이 뛰어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4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품류족론』에서 이같이 설하였겠는가?46):
“혹은 어떤 고제(苦諦)는 유신견(有身見)을 원인으로 하지만 유신견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미래의 유신견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고제를 제외한 그밖의 온갖 염오한 고제가 바로 그것이다.
혹은 어떤 고제는 유신견을 원인으로 삼고 또한 역시 유신견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앞에서 제외한 법이 바로 그것이다.”47)
그 논에서의 글귀는 응당 ‘미래의 유신견과 상응하는 고제의 법을 제외한……’을 설한 것으로,
설사 그와 같이 설하였다고 할지라도 뜻에 따라 그것은 마땅히 비리(非理)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48)
또한 다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시설족론』에서의 설은 어떻게 통석(通釋)할 것인가?
즉 그 논에서 설하기를,
“제법은 네 가지[四事]가 결정되어 있으니, 이른바 인(因)과 과(果)와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49)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그 논문(論文)에서 ‘인’이라고 한 것은 능작인과 구유인과 상응인(相應因)과 이숙인(異熟因)을 말한 것이며,50)
‘과’라고 한 것은 증상과(增上果)와 사용과(士用果)와 이숙과를 말한 것이며,51)
‘소의’라고 한 것은 안(眼) 등의 6근을,
‘소연’이라고 한 것은 색(色) 등의 6경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동류인은 일찍이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52)
[유부에서도 그렇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다.
즉 동류인은 작용하는 상태[位]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지 본질 자체[體]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연이] 화합하여 작용하는 상태가 결과를 낳는 것이지 법체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동류인은 이숙인처럼 미래세에 존재한다고 하면 여기에는 어떤 허물이 있는 것인가?
미래세에 만약 동류인이 있다고 한다면 본론(本論,아비달마논서) 중에서 마땅히 논설하였을 것이다.(비바사사 反難)
본론에서는 오로지 능히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공능을 갖는 동류인에 대해서만 설하였기 때문에 [미래 동류인에 대한 논설이 없을지라도 그것이 있다고 하는 것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53)
그와 같은 뜻은 없으니, 동류인은 등류과(等流果)를 인기(引起)하기 때문이다.
즉 미래에는 전후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등류과가 미래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옳지 않은 것이다.
또한 과거로 낙사한 법이 현재법의 등류과일 수 없듯이, 이미 생겨난 법(즉 현재의 법)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법(미래의 법)의 등류과일 수는 없는 일로서,
그것은 결과가 먼저이고 원인이 나중이 되는 과실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4)
따라서 미래세에는 동류인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숙인도 마땅히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응당 마땅히 이숙과가 원인보다 먼저이거나 동시라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55) 미래세의 법에는 전후가 없기 때문이다.
[이숙인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없으니,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56)
즉 앞에서 말한 대로 동류인과 그 결과는 서로 유사한데,
만약 시간적인 전후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미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었다면 응당 마땅히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과 결과(동류인ㆍ등류과)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숙인은 결과와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미래세가] 전후의 차별을 떠나있다고 할지라도 앞에서와 같은 허물은 없다.
따라서 동류인은 [현재 작용하는] 상태[位]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이기 때문에 미래세에는 있을 수 없으며,
이숙인은 [법의 체]상(體相)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이기 때문에 미래세에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동류인은 오로지 자지(自地)에 대한 것이다’고 말한 것은 결정적으로 어떠한 법에 근거하여 설한 것인가?
그것은 결정코 유루법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무루도의 경우 이리저리 서로 견주어 보면 그 하나하나는 모두 9지(地)에 대해 인이 된다.
즉 미지정(未至定)과 정려중간과 4근본 정려와 아울러 3근본 무색정의 9지의 도제(道諦)는 모두 서로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무루도는 그 같은 온갖 지(地)에서는 모두 손님[客]이 머무는 것처럼 3계에 포섭되어 떨어지지 않으니, 그 같은 온갖 지에 애착하고 집착하여 자기가 있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9지의 무루도는 비록 그 지가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전전(展轉)하며 동류인이 될 수 있으니, 동등한 종류이기 때문이다.57)
그렇지만 [9지는 일체의 무루도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동등한 것[等]과 뛰어난 것[勝]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될 수 있고 열등한 법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될 수 없으니, 가행(加行)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미 생겨난 고법지인(苦法智忍)은 다시 미래의 고법지인에 대해 동류인이 되니, 이와 같은 [미래의 고법지인을] 일컬어 ‘동등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고법지인은 이후 다시 고법지로부터 내지 무생지(無生智)에 이르는 법에 대해 능히 동류인이 되니, 이와 같은 [상지의] 법을 일컬어 ‘뛰어난 것’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지는 이미 생겨난 온갖 무생지는 오로지 동등한 종류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되니, 더 이상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생겨난 온갖의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그리고 무학도(無學道)는 그 순서대로 세 가지와 두 가지와 한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58)
또한 이 중에서 온갖 둔근(鈍根)의 도는 둔근과 아울러 이근(利根)의 도에 대해 동류인이 되며, 만약 이근의 도라면 오로지 이근의 도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된다.
또한 수신행(隨信行)과 아울러 신승해(信勝解) 시해탈(時解脫)의 도와 같은 것은 그 순서대로 여섯 가지, 네 가지, 두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되며,
수법행(隨法行)과 견지(見至)와 비시해탈(非時解脫)은 그 순서대로 각기 세 가지, 두 가지, 한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59)
상지(上地)의 온갖 도가 하지의 인이 된다면, 어째서 혹은 동등하고, 혹은 뛰어난 것이라고 일컫는 것인가?60)
원인의 증장(增長)에 의해, 그리고 근(根)에 따라 그렇게 일컬은 것이니,61)
이를테면 견도 등[의 3도]와 하하품 등[의 9품]은 그 다음다음 단계로 나아갈수록 원인이 점차 증장되는 것으로,
비록 어떤 한 상속(相續) 중에 수신행과 수법행의 두 도가 현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이미 생겨나 있는 법은 미래 [수법행 등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62)
그렇다면 오로지 성도(聖道)만이 ‘동등한 것’과 ‘뛰어난 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그 밖의 세간법으로서 가행(加行)에 의해 생겨난 것도 역시 ‘동등한 것’과 ‘뛰어난 것’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만 열등한 것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가행에 의해 생겨난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문소성(聞所成)과 사소성(思所成) 등이다.
여기서 ‘등’이라고 함은 수소성(修所成) 따위도 두루 취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문(聞)ㆍ사(思)ㆍ수(修)에 의해 생겨난 공덕을 그것의 ‘소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것들은 곧 가행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것과 ‘동등한 것’과 ‘뛰어난 것’에 대해 동류인이 되고, 열등한 것에 대해서는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문소성의 법은 능히 자계(自界)의 문ㆍ사소성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만 수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즉 수소성의 법)은 욕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소성의 법은 사소성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만 문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즉 문소성의 법)은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색계에 계속되는 문소성의 법이라면 능히 자계의 문ㆍ수소성에 대해 동류인이 될 수 있지만 사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즉 사소성의 법)은 색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소성의 법은 오로지 자계의 수소성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되지만 문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즉 문소성의 법)은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색계에 계속되는 수소성의 법은 오로지 자계의 수소성의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되지만 문ㆍ사소성의 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은 무색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63)
이와 같은 문ㆍ사ㆍ수소성의 제법에는 다시 9품(品)이 있는데,
만약 하하품(下下品)의 법이라면 그것은 9품에 대해 동류인이 되고,
하중품(下中品)일 경우 8품에 대해 인이 되며,
내지 상상품일 경우 오로지 상상품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될 뿐이니, 앞의 열등한 것을 제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생득(生得)의 선법에도 9품이 있는데, 그것들을 서로 견주어보면 이리 저리 동류인이 된다.64)
염오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65)
무부무기(無覆無記)에는 모두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이숙생(異熟生)ㆍ위의로(威儀路)ㆍ공교처(工巧處)ㆍ변화심[化心]과,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것[俱品:즉 네 가지 무기와 함께하는 심소와 4相 등]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들은 그 순서에 따라 능히 네 가지와 세 가지와 두 가지와 한 가지에 대해 동류인이 된다.66)
또한 욕계의 변화심은 4정려의 결과(즉 등류과)로서 존재하는데,
상(上) 정려의 결과는 하(下) 정려의 결과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으며,
가행의 원인에 의해 하정려의 열등한 결과는 획득되지 않으니,
공력(功力)을 들여 벼와 보리 따위를 뿌린 것처럼 힘들여 수고하였으므로 획득되는 바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뛰어난 것’은 열등한 것의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가 물어 말하였다.
“이미 생겨난 제 무루법으로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未生位]의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러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이미 생겨난 고법지품(苦法智品)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고법인품(苦法忍品)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으며],67)
또한 [이미 생겨난] 일체의 뛰어난 무루법은 열등한 일체의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68)
“한 상속신 중의 온갖 무루법으로서 이전에 결정적으로 획득된 것은 이후에 생겨난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러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미래의 고법인품은, 그 이후(고법인 이후)에 이생(已生)의 고법지품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으니],69) 결과가 원인에 앞서 존재하는 일은 필시 없기 때문이다. 혹은 동류인은 미래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생겨난 제 무루법으로서 그 이후에 이미 일어난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러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앞서 생겨난 뛰어난 무루법은, 그 이후에 이미 일어난 열등한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지 않으니], 이를테면 상과(上果)에서 물러난 자에게 하과(下果)가 현전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70)
또한 이전에 이미 생겨난 고법지의 득(得)은, 그 이후 이미 생겨난 고법인의 득에 대해서도 동류인이 되지 않으니, 그것(고법인의 득)은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동류인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상응인]
네 번째로 상응인(相應因)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응인은 결정코 심ㆍ심소 뿐으로
소의가 동일한 것[同依]이다.71)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심ㆍ심소만이 바로 상응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소연(所緣)과 행상(行相)에 다름이 있는 것도 역시 마땅히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응인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소연과 행상이 같은 것만을 ‘상응’이라고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시간을 달리할지라도 소연과 행상이 같은 것이라면 마땅히 상응인이라고 설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요컨대 소연과 행상과 아울러 시(時)가 동일한 것만을 ‘상응’이라고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소의신은 다를지라도 소연과 행상과 시간이 동일한 것이면 마땅히 상응인이라고 설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를테면 여러 사람이 초생달을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72) 한마디로 말하면 이와 같은 여러 비방과 힐난을 모두 막기 위해 [본송에서] ‘소의가 동일한 것[同依]’이라고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요컨대 동일한 소의를 갖는 심ㆍ심소법이야말로 비로소 서로에 대해 상응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하다’고 하는 말은 소의가 하나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만약 안식이 지금 이 찰나의 안근을 소의로 삼았다면, 그것과 상응하는 수(受) 등도 역시 지금 이 찰나의 안근을 소의로 삼는다.
내지 의식과 그 상응법도 역시 그러하여 의근을 동일한 소의로 삼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상응인의 본질은 바로 구유인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인은 그 뜻에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기 때문에 구유인으로, 이를테면 상인들이 서로 의지하며 험난한 길을 함께 가는 것과 같다.
그리고 5의(義)가 평등함에 따라 함께 상응하기 때문에 상응인을 세우니, 그것은 이를테면 상인들이 식사 등을 함께하고 사업을 함께하는 것과 같다.73)
그(5義) 중 어느 한 가지만 결여되어도 그것들은 모두 상응하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심과 심소는] 서로에 대해 [상응]인이 된다는 사실은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응인의 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변행인]
다섯 번째로 변행인(遍行因)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변행인이란 이전에 생겨난 변행의 법이
같은 지(地)의 염오법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74)
논하여 말하겠다.
변행인이란, 이를테면 이전에 이미 생겨난 변행의 제법은 그 후 같은 지(地)의 온갖 염오의 제법에 대해 두루 작용하는 인[遍行因]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변행의 제법에 대해서는 「수면품(隨眠品)」(본론 권제19) 중의 변행의 뜻을 밝히는 곳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리라.
이것은 염오법에 대해 공통의 원인[通因]이 되기 때문에 동류인(同類因) 밖에 별도로 건립한 것이다.
또한 역시 다른 부[他部]의 염오법에도 [두루 작용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다른 부의 염오법과 그 권속도 생장하게 되는 것이다.75)
성자의 소의신 중의 온갖 염오법이 어찌 역시 이러한 [변행의 염오]법(즉 변행혹)으로써 변행인을 삼을 것인가?76)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체의 염오법은 견소단[의 변행의 혹]을 원인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품류족론』에서,
“무엇이 견소단을 원인으로 삼는 법인가?
이를테면 온갖 염오법과 견소단법에 의해 초감(招感)된 이숙이 바로 그것이다.77)
무엇이 무기를 원인으로 삼는 법인가?
이를테면 온갖 무기의 유위법과 아울러 불선법이 바로 그것이다.78)
혹은 고제로서 유신견을 원인으로 삼으면서 유신견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미래의 유신견과 아울러 그것의 상응법인 생(生)ㆍ노(老)ㆍ주(住)ㆍ무상(無常)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염오의 고제이다”79)라고 논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성자의 번뇌도 변행혹을 인으로 삼아 일으킨다고 한다면,
어떻게 『시설족론』의 논설을 통석할 수 있을 것인가?
즉 그 논에서 말하기를,
“불선의 법으로서 오로지 불선만을 원인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성자가 이욕(離欲)에서 물러날 때 최초에 현기하는 염오의 사(思)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80)
아직 끊어지지 않은 원인에 의거하여 은밀하게 이와 같이 설한 것으로, 견소단의 법도 비록 이 같은 원인이라 할 수 있지만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폐(廢)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81)
이와 같이 변행인의 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숙인]
여섯 번째 이숙인(異熟因)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숙인은 불선과
아울러 선법으로, 오로지 유루이다.82)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불선과 아울러 선한 온갖 유루의 법만이 바로 이숙인으로, 다르게 익는 법[異熟法]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무기는 이숙과를 초래하지 않는 것인가?
그 힘이 열등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부패한 종자와 같다.
어떠한 연유에서 무루는 이숙과를 초래하지 않는 것인가?
애(愛)의 윤택함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견실한 종자[貞實種]에 물의 윤택함이 없는 것과 같다.83)
또한 무루법은 이미 지(地)에 계속(繫屬)되지 않는 것이니, 어찌 능히 지에 계속되는 이숙과를 초래할 것인가?
그러나 그 밖의 [선이나 불선의] 법은 이러한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84)
그렇기 때문에 견실한 종자가 물에 윤택되어 질 때처럼 능히 이숙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숙인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숙의 원인을 이숙인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숙이 바로 원인인 것을 이숙인이라고 일컬은 것인가?85)
이숙인의 뜻에는 두 해석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그럴 경우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만약 이숙의 원인을 이숙인이라고 이름한다면 성교(聖敎)에서 응당 마땅히 ‘이숙에 의해 생겨난 눈[眼]’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며,
만약 이숙이 바로 원인인 것을 이숙인이라고 이름한다면 성교에서 응당 마땅히 ‘업의 이숙’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해석은 다 같이 통하는 것이니, 이미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86)
그렇다면 지금 말하고 있는 ‘이숙’ 즉 다르게 성숙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류(異類)로서 성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숙의 뜻이다.”
말하자면 이숙인이란 오로지 이류로서 성숙하는 것이고,
구유인 등은 오로지 동류(同類)로서 성숙하는 것이며,
능작인 한 가지는 동류와 이류 모두로서 성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이류로서 성숙하는] 이 한 가지만을 이숙인이라고 일컬은 것이다.87)
이숙과(異熟果)는 마땅히 다른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획득되는 결과와는 다르다.
즉 그것은 두 가지 뜻을 갖추었기에 비로소 ‘숙(熟)’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니,
첫 번째는 상속의 전변과 차별에 의해 그것 자체(즉 果體)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며,88)
둘째는 원인의 세력이 뛰어나고 열등함에 따라 시간적인 지속의 차이[分限]가 있다는 것이다.89)
그러나 그 같은 구유와 상응의 두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결과(즉 士用果)는 요컨대 상속의 전변과 차별에 의해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니,
취과(取果)의 순간이 바로 여과(與果)이기 때문이다.90) 또한 능작인과 동류ㆍ변행인의 세 원인에 의해 낳아진 결과(즉 증상과와 등류과)는 역시 또한 원인의 세력이 뛰어나고 열등함에 따른 시간적인 지속의 차이를 갖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때 원인과 결과는 동류상사하여] 선악 등의 원인은 생사를 되풀이하면서 끊임없이 결과를 산출하고 [그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또 다시 무수한 결과를 산출할 것이므로] 시간적 한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다만 ‘변이하면서 성숙하는 것[變異而熟], 이것이 바로 이숙의 뜻이다’라고 해석하여야 하지,
단지 ‘다르다[異]’는 사실만으로써 이숙인을 그 밖의 다른 원인과 구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91)
욕계 중에 있어서 어떤 때에는 하나의 온(蘊:즉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92)
이를테면 유기(有記)의 득(得)과 아울러 그것의 ‘생(生)’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때에는 두 가지의 온(즉 표업의 색온과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선ㆍ불선의 신업ㆍ어업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때에는 네 가지 온(즉 색온을 제외한 네 가지 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선과 불선의 심ㆍ 심소법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93)
색계 중에 있어서 어떤 때에는 하나의 온(즉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유기의 득과 무상등지(無想等至) 및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때에는 두 가지의 온(즉 표업의 색과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초정려의 선한 유표업(有表業)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94)
어떤 때에는 네 가지 온(즉 색온을 제외한 네 가지 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비등인(非等引)의 선한 심ㆍ심소 법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95)
어떤 때에는 오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바로 등인의 심ㆍ심소법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무색계 중에 있어서 어떤 때에는 하나의 온(즉 행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유기의 득과 멸진등지(滅盡等至) 및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때에는 네 가지의 온이 이숙인이 되어 함께 하나의 결과를 초래하니,
이를테면 일체의 선한 심ㆍ심소법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어떤 업은 오로지 일처(一處)의 이숙만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으니,96)
이를테면 법처 즉 명근 등을 초래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의처(意處)를 초래하는 업이라면 결정적으로 두 가지의 처를 초래하게 되니,
의처와 법처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촉처(觸處)를 초래하는 업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촉ㆍ법 두 가지 처를 초래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신처를 초래하는 업이라면 결정코 세 가지의 처를 초래하게 되니, 신처와 촉처와 법처가 바로 그것이다.97)
만약 색처(色處)ㆍ향처(香處)ㆍ미처(味處)를 초래하는 업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각각의 처와 촉처ㆍ법처를 초래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안처(眼處)를 초래하는 업이라면 결정코 네 가지의 처를 초래하게 되니,
이를테면 안처와 아울러 신처ㆍ촉처ㆍ법처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를 초래하는 업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98)
어떤 업은 혹 어떤 경우 다섯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여섯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일곱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여덟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아홉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열 가지의 처를, 혹은 어떤 경우 열한 가지의 처를 능히 초래하기도 한다.99)
즉 업에는 그 결과가 적은 경우도 있으며, 혹은 많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니,
마치 밖에 뿌린 씨앗의 결과가 혹은 적기도 하고, 혹은 많기도 한 것과 같다.
여기서 씨앗의 결과가 적다고 하는 것은 곡식이나 보리 따위와 같은 것이며,
씨앗의 결과가 많다고 하는 것은 연(蓮)이나 석류, 약구타(若瞿陀) 등과 같은 것이다.100)
또한 일세(一世)의 업이 삼세에 이숙되는 일은 있어도 삼세의 업이 일세에 이숙되는 일은 없으니,101) 힘들여 수고하였으므로 결과가 원인보다 감소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찰나[一念]의 업이 다찰나[多念]에 걸쳐 이숙되는 일은 있어도 다찰나의 업이 한찰나에 이숙되는 일도 없으니, 그 이유는 앞에서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숙과는 업과 함께하는 일이 없으니,102) 업을 지을 때 바로 과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무간(無間)에도 [함께하는 일이] 없으니, 다음 찰나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의 힘에 의해 인기(引起)되기 때문이며,
또한 이숙인이 다른 종류[異類]의 결과를 초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속에 근거해야만 비로소 능히 그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103)
[6인은 어떤 세에 존재하는 것인가]
이와 같이 6인은 결정코 어떠한 세(世)에 존재하는 것인가?
6인이 어떠한 세에 존재하는지 결정적인 뜻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논설하였지만, 아직 송문(頌文)에 포섭하여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거듭하여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변행과 동류는 2세(世)에 존재하며
삼세에 존재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변행인과 동류인은 오로지 과거와 현재에만 존재하며 미래세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 이유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상응ㆍ구유ㆍ이숙의 세 가지 원인은 삼세 중에 모두 두루 존재한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능작인이 존재하는 세에 대해 설하지 않고 있지만 뜻에 준하여 그것은 삼세와 비세(非世:즉 삼세와는 무관한 무위법을 말함)에 통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6인의 차별과 그것의 삼세 규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원인과 결과(1)]
이러한 6인은 무엇을 결과로 삼아 그것들에 대해 원인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결과에는 유위와 이계가 있으며
무위법은 인과를 갖지 않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 설하기를,
“과법(果法)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온갖 유위와 아울러 택멸이다”고 하였다.10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위가 바로 결과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마땅히 원인을 가져야 할 것이니, 요컨대 그 같은 원인에 대해 비로소 이것은 결과가 된다고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105)
또한 이러한 무위는 바로 원인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결과를 가져야 할 것이니, 요컨대 그 같은 결과에 대해 비로소 이것은 원인이 된다고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106)
오로지 유위법만이 원인을 갖고 결과를 갖는 것으로, 온갖 무위는 그렇지가 않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6인(因)을 갖지 않기 때문이며, 5과(果)도 없기 때문이다.107)
어찌 제 무간도(無間道)는 이계과에 대해 능작인이 된다고 인정하지 않았든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장애하지 않는 것을 능작인이라 설정한 것으로, 무위는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 그 같은 도에 무슨 [능작인으로서] 작용이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택멸의 이계과가 능작인의 결과가 아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의 결과이며, 이 때 결과란 무슨 뜻인가?
이를테면 이것은 바로 무간도의 결과이며, 도의 힘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10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간도의 결과는 응당 마땅히 오로지 득(得)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도는 득에 대해서는 공능(功能)이 있어도 택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109)
그렇지가 않으니, 득에 대한 도의 공능과 택멸에 대한 도의 공능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10)
그렇다면 득에 대해 무간도가 갖는 공능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능히 낳는[能生] 공능이다.
택멸에 대해 무간도가 갖는 공능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능히 증득[能證]하는 공능이다.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아 무간도가 비록 택멸의 원인은 아니라 할지라도 택멸은 무간도의 결과가 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온갖 무위는 증상과를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능작인이 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온갖 무위법은 그 밖의 다른 법(즉 유위법)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장애하지 않기 때문에 능작인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위법은 삼세의 시간적 제약을 떠난 법[離世法]으로서 능히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증상]과를 갖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경부사(經部師)는 설하기를,
“무위는 [능작]인이 되지 않으니, 경(經)에서 ‘[능작]인은 바로 무위이다’고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경에서 ‘[능작]인은 오로지 유위이다’고 설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어떤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어떤 경에서 설하기를,
“온갖 인(因)과 온갖 연(緣)으로서 능히 색을 낳는 것은 모두 다 무상하다. 무상한 인연에 의해 낳아진 온갖 색이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식(識)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하였다.11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위 역시 마땅히 능연(能緣)인 식(識) 등에 대해 소연연(所緣緣)이 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112)
[경에서는] 오로지 ‘능히 낳는 것’만을 설하였기 때문에 [무위가] 소연연이 될 수 있는 것이다.113)
즉 경에서는 오로지 ‘온갖 인과 온갖 연으로서 능히 식(識)을 낳는 것은 모두 다 무상하다’고만 설하였지,
식의 연이 되는 일체 모든 것이 모두 다 무상하다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힐난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경에서는] 오로지 능생(能生)의 원인만이 무상하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무위는 오로지 [다른 것의 생기를] 장애하지 않으므로 능작인이 된다’는 사실을 어찌 부정하였다고 하겠는가?114)
계경 중에서 무위법은 소연연이 된다고 설한 일은 있어도 어떠한 계경 중에서도 무위법이 능작인이 된다고는 설한 일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오로지 장애하지 않는 원인의 존재[不障因性, 즉 능작인]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록 경에서 설한 일이 없을지라도 또한 역시 부정한 곳도 없다.
그리고 오늘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들이 이미 은몰(隱沒)하여 버렸는데, 어떻게 결정적으로 경에서 설한 일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법을 일컬어 택멸(擇滅)이라고 하는 것인가?115)
즉 본론(本論) 중에서 설한 바의 택멸이 바로 그것이다.116)
앞에서 ‘무엇이 택멸인가?’라고 물었을 때는 ‘바로 이계(離繫)이다’라고 답하지 않았던가?117)
그런데 지금 ‘어떠한 법을 일컬어 택멸이라고 하는 것인가?’하고 물으니 ‘바로 택멸이다’고 답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두 가지 답은 상호간에 의존하는 설명으로 그 자성에 대해서는 끝내 능히 드러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마땅히 그 자성을 별도의 갈래[別門]로서 나타내 보여야 할 것이다.
이 법(택멸)의 자성은 실유(實有)로서 언어를 초월해 있어 오로지 제 성자들만이 각기 개별적으로 내증(內證)하는 것이다.118)
다만 방편으로 그 전체적인 상[總相]에 대해 설하여 보면 선하고 항상하는 실체[實物]가 별도로 존재하니, 이것을 일컬어 ‘택멸’이라고 하고, 또한 역시 ‘이계’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부사(經部師)는 설하기를,
“일체의 무위는 모두 [각기 자상과 자성을 갖는] 색(色)이나 수(受) 따위처럼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실유의 법이 아니니,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11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어째서 ‘허공’ 등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오로지 접촉되는 바가 없는 것을 설하여 ‘허공(虛空)’이라 일컬은 것이니,
이를테면 어둠 속에서 촉대(觸對)되는 바가 없으면, 다시 말해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으면, ‘이것은 허공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일어난 수면(隨眠)과 그것에서 생겨난 종자[生種]가 소멸한 상태에서 간택력(簡擇力)에 의해 그 밖의 다른 번뇌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것을 설하여 ‘택멸’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간택력과는 관계없이 인연이 결여됨으로써 더 이상 달리 생겨나지 않는 것을 ‘비택멸(非擇滅)’이라 이름하니,
마치 중동분(衆同分)을 남기고서 중간에 요절한 자의 나머지 온(蘊)과 같은 것이다.120)
그런데 다른 부파의 논사는 설하기를,
“무루혜의 공능에 의해 수면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일컬어 택멸이라 하고,
수면의 연이 결여되어 이후 괴로움의 과보가 생겨나지 않는 것은 무루혜의 공능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택멸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121)
간택력을 떠나서 이러한 멸은 성취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같은 괴로움의 과보가 생겨나지 않는 것은 바로 택멸에 포섭된다.122)
어떤 이는 설하기를,
“제법은 생겨났다가 그 후 존재하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소멸하기 때문에 비택멸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123)
이와 같이 주장된 비택멸은 마땅히 무상멸(無常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법이 아직 멸하지 않은 때에는 그것(대중부가 주장하는 비택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24)
택멸도 간택력이 선행하여 [뒤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찍이 존재하지 않다가 비로소 존재하는 것[先無後有]’이어야 하므로 역시 또한 어찌 무상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간택력이 선행하고 나서 비로소 택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택멸을 역시 또한 무상멸이라고 하겠는가.125)
그 까닭이 무엇인가?
먼저 간택력이 있고, [그것에 의해] 그 후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법[未生法]이 비로소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不生]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제법의] 불생은 본래 스스로 존재하는 것[自有]으로, 만약 간택력이 없다면 제법은 마땅히 생겨나겠지만, 간택력이 생겨날 때 법은 영원히 생기하지 않는다.
이같이 [제법이] 생기하지 않는 것에 간택력의 공능이 있으니,
이를테면 그 이전에는 [제법의] 생기가 장애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생기가 장애 되는 것으로, [간택력이 제법의] 불생(不生)을 조작하는 것은 아니다.126)
만약 오로지 [제법의] 불생만이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경의 문구는 응당 어떻게 회통될 수 있는 것인가?
즉 경에서 말하기를,
“[신(信) 등의] 5근(根)을 혹은 닦고, 혹은 익히고, 혹은 많이 닦고 익히면 능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중고(衆苦)를 영원히 끊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127)
말하자면 이같이 ‘영원히 끊는 것[永斷]’ 자체가 바로 열반임에도, [그대들은 열반을 중고 불생이라고 하고] 불생의 뜻은 오로지 미래에만 존재하며, 과거ㆍ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다고 하니 어찌 [앞의 경설과] 서로 모순된다고 하지 않겠는가?(유부의 난문)
비록 그러한 경의 문구가 있을지라도 의미상으로는 모순되지 않는다.
즉 그러한 경문의 뜻은 ‘과거ㆍ현재의 고과(苦果)를 연(緣)으로 하는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중고단(衆苦斷)이라 이름하였다’는 사실을 설한 것으로,
이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그대들은 색(色)에 대해 마땅히 탐욕을 끊어야 할 것이니, 탐욕이 끊어질 때를 일컬어 ‘색이 끊어졌다[色斷]’고 하고 ‘색이 변지되었다[色遍知]’고 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식(識)에 대한 것도 역시 이와 같다.”
즉 과거ㆍ현재의 고과가 끊어지는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128)
설사 다른 경에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제 번뇌를 끊는다’고 말한 경우가 있을지라도 앞의 이치에 준하여 해석하게 되면 의미상으로 어떠한 모순도 없는 것이다.(경부의 회통)
혹은 이러한 경설 중에는 별도의 다른 뜻이 있으니,
과거의 번뇌란 과거의 생에 의해 일어난 번뇌를 말하고,
현재의 번뇌란 현재의 생에 의해 일어난 번뇌를 말하니,
마치 애행(愛行) 중에 열여덟 가지 애행이 설해지고 있는 것과 같다.129)
즉 과거세에 일어난 것은 과거생에 의거하였다고 설하고 내지는 미래ㆍ현재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지금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ㆍ현재의 2세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미래의 제 번뇌를 낳기 때문에 현재의 상속신 중에 종자(種子)를 인기한다.
그리고 [간택력에 의해] 이러한 종자가 끊어지기 때문에 그것(종자의 원인이 되는 과거와 현재의 번뇌)도 역시 끊어졌다고 일컬은 것으로,
이는 마치 이숙과가 다하였을 때를 설하여 역시 또한 업이 다하였다고 일컫는 것과 같다.
나아가 미래의 중고(衆苦)와 제 번뇌는 바로 이러한 종자가 부재[無]하기 때문에 필경 생겨나지 않게 되니, 이를 설하여 ‘단(斷)’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과거ㆍ현재[의 중고]는 어떠한 이유에서 반드시 끊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멸[已滅]하였거나 지금 멸[正滅]하고 있는데 힘들게 노력하여 그것을 소멸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이상 경부의 별석)
만약 무위법 그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경에서,
“유위든 혹은 무위든 존재하는 일체의 제법 중에서 이염(離染, viraga, 택멸열반을 말함)이 제일이다”고 설하였겠는가?130)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을 비존재[無] 가운데 제일이라고 설정할 수 있는 것인가?131)(유부의 난문)
우리도 역시 온갖 무위법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설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설하는 바대로 ‘있다[有]’고 할 뿐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소리(즉 현재의 소리)는 [발성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有先非有] [발성된]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後非有]’고 설하는 것과 같다.
즉 비존재[非有]를 [그대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존재[有]라고는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경부에서 말하는] ‘있다’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으니,
‘무위가 있다’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132)
즉 ‘있다’고 하는 것이 비록 비존재라 할지라도 칭탄할 수 있으니,
그래서 온갖 재앙과 횡액의 완전한 비존재를 일컬어 이염(離染)이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일체의 존재와 비존재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교화될 중생으로 하여금 깊이 흔락(欣樂)을 낳게 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것을 [비존재 가운데] 제일이다고 칭탄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 경부 답)
만약 무위법이 오로지 비유 즉 비존재라고 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기 때문에 마땅히 멸성제(滅聖諦)라고 일컬어서는 안 될 것이다.(유부 난문)133)
대저 성제(聖諦)라고 하는 것, 그 뜻이 무엇인가?
이 말이 어찌 전도됨이 없다는 뜻이라 하지 않겠는가?
‘성’이라고 함은 있고 없음을 봄에 있어 모두 전도됨이 없이 보는 것이니,
이를테면 성자는 괴로움에 대해서는 오로지 괴로움이라고만 보며(제1성제 즉 고성제),
괴로움의 비존재에 대해서는 오로지 괴로움의 비존재라고만 보니(제3성제 즉 멸성제),
이것이 성제의 뜻과 어떠한 모순이 있는 것인가?(경부의 해석)
어떻게 비존재를 설정하여 제3의 진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인가?
(유부의 난문)
성자께서 제2의 진리와 무간에 보았고, 그리고 설하셨기 때문에 제3의 진리가 된 것이다.134)
(경부의 답)
만약 무위법 자체가 오로지 비존재라고 한다면 허공과 열반에 대한 인식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 대상[無境]을 소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135)
(유부의 힐난)
이 같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소연으로 삼더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과거ㆍ미래에 대해 분별하면서 응당 마땅히 널리 사택(思擇)하게 될 것이다.136)
(경부의 해명)
만약 무위법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과실이 있는 것인가?
(유부의 문)
또한 거기에 무슨 공덕이 있을 것인가?
(경부의 반문)
[무위법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종의를 옹호하는 것이니, 이것이 공덕이다.
(유부의 답)
만약 그것에 옹호할 만한 점이 있다면 결정코 천신(天神)이 알아 응당 스스로 옹호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무위를 실유로 인정하는 것은 허망한 관념[虛妄計]과 벗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과실이다.
(경부의 조롱과 답)
그 이유가 무엇인가?
(유부의 문)
이것은 색(色)이나 수(受) 따위처럼 [지각될 만한] 자성[體]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역시 안(眼)이나 이(耳) 등처럼 [추리될 만한] 작용[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만약 이것이 개별적으로 실재한다면 어떻게 [성교에서] ‘그것(번뇌)의 소멸’이라고 하는 소유격[第六轉]의 용법을 설정하였을 것인가?
‘소멸’과 ‘그것’은 서로 소속되어 관계하는 것이 아니니,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것’이 부정될 때 소유격이 성립할 수 있으니, 그것의 비존재를 일컬어 택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137)
(경부의 답)
멸이 비록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인 혹(惑)의 득(得)이 끊어질 때 비로소 이러한 멸을 획득하므로 이러한 멸은 그것(혹)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138)
(유부의 답)
어떠한 이유에서 이것(번뇌)의 멸이 결정코 이러한 득(번뇌득)에 속한다고 한 것인가?
(경부의 문)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비구들이여, 현법열반(現法涅槃, 현신의 열반)을 획득하라”고 하였다.139)
나아가 열반이 만약 비존재라면 어떻게 획득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유부의 답과 난)
대치도(對治道)를 획득함에 따라 바로 번뇌와 후유(後有)에 영원히 모순되는 소의신을 획득하기 때문에 ‘열반을 획득하라’고 일컬은 것이다.140)
또한 성교(聖敎)에서 ‘열반은 오로지 비유(非有)를 그 자성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나타낸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141)
“존재하는 중고(衆苦)를 모두 남김없이 끊고[斷], [3계 9지에 따라] 각기 개별적으로 버리고[捨棄] 다하고[盡] 이염(離染)하고 멸(滅)하고 고요히 종식[息]하고 영원히 몰[歿]하며,
그 밖의 다른 고(苦)가 속생(續生)하지 않고 취(取)하지 않고 생겨나지 않으면 이것이 궁극의 적정(寂靜)이며 궁극의 미묘(美妙)이니,
말하자면 온갖 근거[諸依, 즉 유위제법을 말함]와 일체의 갈애를 버리고 다하고 이염하고 멸한 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
(경부의 답)
[여기서] ‘생겨나지 않는다[不生]’는 말은, 이것(즉 실유의 택멸)에 근거하여 [고과(苦果)가] 생겨나는 일이 없기[無生] 때문에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는 사실을 어째서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유부의 난)142)
우리가 이러한 처격(處格, 第七轉)의 용법을 관찰하건대, 택멸의 실재성을 논증하는데 아무런 공력(功力)도 없는데,
어떠한 의도에서 ‘이것(택멸)에 근거한 무생’이라고 설하는 것인가?
[이것(즉 택멸)에 근거한 괴로움의 불생이라고 할 때] 만약 ‘이것에 근거한’이라는 말을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는[已有] 택멸에 의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열반(즉 택멸)은 상주(常主)하기 때문에 [괴로움은] 응당 마땅히 본래부터 불생일 것이다.
또한 만약 ‘이것에 근거한’이라는 말을 ‘이미 택멸을 획득하게 한[已得] 힘에 의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이는 곧 대치도의 획득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오로지 대치도에 의해, 혹은 도의 획득에 의해 고(苦)가 생겨나지 않게 된다고 그대는 마땅히 신수(信受)해야 하는 것이다.143)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의해 경(經)에서 설한 비유의 말씀을 능히 잘 해석할 수 있으니,
“마치 등불이 열반(즉 소멸)하는 것처럼 심해탈(心解脫)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144)
즉 이러한 경설의 뜻은,
마치 등불의 열반이 다만 등불의 불꽃이 사라진 것[謝]일 뿐 그 밖의 별도의 실유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는 마음이 해탈을 획득한 것도 다만 제온(諸蘊)이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도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145)
“무사법(無事法)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무위법이다.”
여기서 ‘무사’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본체나 자성[體性]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 경부의 답과 경증)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그 같은 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들은 ‘사(事)’의 뜻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사’라고 하는 것에 간략히 다섯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자성(自性)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만약 이미 이러한 사를 획득하면 그는 이러한 사를 성취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146)
둘째는 소연(所緣)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일체의 법은 지(智)에 의해 알려지고 그러한 사에 따른다”고 말한 바와 같다.147)
셋째는 계박(繫縛)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만약 이러한 사[此事, 계박되는 법]에 애결(愛結)이 계박되면 이러한 사에 에결(恚結)도 계박되는 것인가?’라고 말한 바와 같다.148)
넷째는 소인(所因)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유사(有事)의 법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제 유위법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149)
다섯 번째는 소섭(所攝)의 사(事)이니, 어떤 곳에서 ‘전사(田事, 밭일), 택사(宅事, 집일), 처자 등의 사(事)를 [섭수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150)
따라서 지금 여기(앞서 인용한 아비달마)서는 [실체나 자성이 아니라] 원인을 설하여 ‘사’라고 일컬었으며, 무위법은 어떠한 원인도 갖지 않는 법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위는 비록 실유의 존재라 할지라도 항상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원인도 갖지 않고 결과도 갖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2)]
[5과(果)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를 이미 마쳤으니,
이제 온갖 결과 중에서 마땅히 어떤 결과가 어떤 원인에 의해 획득되는지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지막의 원인의 결과는 이숙이고
앞의 원인의 결과는 증상이며
동류와 변행인의 결과는 등류이고
구유와 상응인의 결과는 사용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마지막의 원인’이란 말은 이숙인을 말하니, 6인(因)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5과(果) 중의] 첫 번째인 이숙과(異熟果)는 바로 이러한 원인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앞의 원인’이란 말은 능작인을 말하니, 6인 중에서 최초로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5과 중의] 최후인 증상과(增上果)는 바로 이러한 원인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원인의] 증상력에 의해 생겨난 과이기 때문에 증상과라고 이름한 것이다.
[능작인은] 오로지 장애함이 없이 머무는 것인데 어떠한 증상력이 있는 것인가?
즉 장애함이 없기 때문에 ‘증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151) 혹은 능작인도 역시 뛰어난 힘이 있으니,152)
마치 10처계(處界)가 5식(識)에 대해, 온갖 유정의 업이 기세간(器世間)에 대해 뛰어난 힘이 있는 것과 같다.153)
이를테면 이근(耳根) 등도 안식의 생기 등에 대해 역시 증상의 생기력이 있으니, 뭔가를 듣고 나서 바로 그것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러한 등등의 증상에 대해 마땅히 경우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동류인과 변행인은 등류과(等流果)를 획득하니, 이러한 두 가지 원인의 결과는 모두 원인과 유사하기 때문이다.154)
구유인과 상응인은 사용과(士用果)를 획득하는데, 사부(士夫)의 체(體)를 떠나 별도로 사부의 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러한 사부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용’이라는 명칭은 어떠한 법에 근거한 것인가?
즉 제법이 갖은 작용에 근거한 것으로, [제법의 공능은] 사부의 작용과 같기 때문에 ‘사용’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니,
마치 세간에서 ‘아족(鴉足) 약초’ ‘취상(醉象) 장군’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155)
[그렇다면] 오로지 이러한 두 가지 원인만이 사용과를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른 원인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156)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밖의 원인에도 역시 이러한 사용과가 존재하는데, 다만 이숙인은 제외된다.
왜냐 하면 사용과는 원인과 구생(俱生)하거나 혹은 무간에 생겨나지만,157) 이숙과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러한 이숙인에도 역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隔越] 사용과가 있으니, 비유하자면 농부가 수확하는 과실과도 같다”고 하였다.158)
이숙과 등의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숙과는 무기의 법으로서
유정에 속하고, 유기(有記)로부터 생겨난다.
등류과는 자신의 원인[自因]과 유사하며
이계과는 혜(慧)에 의해 모든 번뇌를 다한 것이다.
만약 그것의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면
이러한 과를 이름하여 사용이라 하며
이전에 생겨난 것을 제외한 유위법을
유위의 증상과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무부무기법 중에만 이숙과가 있다.159)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비유정수(非有情數)와도 역시 통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오로지 유정에 국한된다.
[만약 그렇다면] 등류(等流)나 소장양(所長養)과도 통한다고 해야할 것인가?160)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이숙과는 오로지 유기(有記)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즉 일체의 불선과 아울러 선한 유루의 업은 능히 그 이숙을 기표(記表)하기 때문에 ‘유기(有記)’라고 이름하는데,
그것(즉 선ㆍ불선의 유기업)으로부터 구시(俱時)나 무간이 아닌 후시(後時)에 비로소 이숙이 일어나기 때문에 [본송에서] ‘유기로부터 생겨난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이숙과의 상이다.
비유정수도 역시 업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데, 어찌 이숙과가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유정이] 공유(共有)하는 것이기 때문으로,161) 이를테면 다른 이들도 이와 같은 비유정수(즉 기세간)을 능히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저 이숙과는 반드시 다른 이와 함께 수용되는 일이 없으니, 다른 이가 업을 짓고 다른 이가 그러한 업에 의해 이숙과를 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162)
그 같은 증상과(增上果,즉 산하대지의 비유정수)도 역시 업에 의해 생겨난 것인데, 어떻게 [여러 유정들에게] 함께 수용될 수 있는 것인가?
공업(共業)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인[自因]과 유사한 법을 등류과(等流果)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동류와 변행의 두 원인과 유사한 결과를 말한다.163)
만약 변행인도 역시 등류과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이것을 동류인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변행인의 결과는 다만 [그것이 계속(繫屬)되는] 지(地)와 염오함이 동등하기 때문에 원인과 서로 유사하다고 한 것으로, 종류 즉 끊어지는 부류(部類)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결과가 종류에 있어도 역시 원인과 유사하다면, 이러한 결과의 원인이 되는 것을 동류인이라고 한다.164)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동류인이면서 역시 변행인인 경우가 있는가?”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제1구는 변행이 아닌 법으로서 동류인이 되는 법이며,
제2구는 타부(他部)에 두루하는 법으로서 변행인이 되는 법이며,
제3구는 자부(自部)에 두루하는 법으로서 변행인이 되는 법이며,
제4구는 앞에서 언급한 온갖 상을 제외한 법이다.165)
혜(慧)에 의해 [유루의] 법을 다한 것을 이계과(離繫果)라고 이름하는데,
소멸하였기 때문에 ‘다하였다[盡]’고 일컬은 것이며,
간택[擇]하였기 때문에 ‘혜’라고 일컬은 것이다.
즉 택멸(간택에 의한 소멸)을 설하여 이계과라고 이름하였다.166)
만약 어떤 법이 있어 그것의 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이면, 이러한 법을 설하여 사용과(士用果)라고 이름한다.167)
이를테면 하지의 가행선심의 세력에 의해 상지의 유루와 무루의 선정이 낳아지며,
아울러 청정한 정려심의 세력에 의해 변화신(變化身)이 낳아지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따위의 유형도 [사용과이다].
그리고 택멸도 마땅히 도(道)의 세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온갖 유위법으로서 이전에 생겨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유위를 증상과라고 한다.168)
그렇다면 사용과 증상의 두 결과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사용과’라고 하는 명칭은 오로지 조작하는 자[作者]에 대한 것이지만,
‘증상과’라고 하는 명칭은 그 밖의 것(향수하는 자)에 대해서도 다 통하니,
예컨대 어떤 장인이 만든 조각품은 그것을 만든 장인에 대해서는 사용과와 증상과라는 명칭을 모두 획득하지만,
그 밖의 다른 장인이 아닌 이에 대해서는 오로지 증상과의 명칭만을 획득하는 것과 같다.
앞에서 설한 여섯 가지 종류의 원인 중에서 어떠한 상태에 있는 어떠한 원인이 취과(取果)하고 여과(與果)하는 것인가?169)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의 취과(取果)는 오로지 현재할 때이며
두 가지(구유ㆍ상응)의 여과(與果)도 역시 그러하다.
과거ㆍ현재에 여과하는 것은 두 가지(동류ㆍ변행) 인이며
한 가지(이숙)의 여과는 오로지 과거에 있을 때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능작인을 제외한] 다섯 가지 원인의 취과(取果)는 오로지 현재할 때로서, 결정코 과거에서는 취과하지 않으니, 그것(즉 과거법)은 이미 취과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에서도 역시 취과하지 않으니, 그 작용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170)
또한 역시 능작인의 취과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하겠지만, 결정코 반드시 결과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171)
그리고 구유인과 상응인의 여과(與果)도 역시 그러하여 오로지 현재할 때만 여과하니, 이 같은 두 원인의 취과와 여과는 반드시 동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류와 변행의 두 원인의 여과는 과거ㆍ현재와 통한다.
과거는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현재에 등류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인가?
등류과는 [원인과] 무간에 [미래 정생위(正生位)에서] 낳아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172)
그리고 만약 결과가 이미 생겨난 때라면 이러한 두 가지 원인은 이미 과거로 지나가 버렸을 것이고, [현재에 있을 때] 이미 여과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더 이상 여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73)
선의 동류인은 어떤 때 취과는 하더라도 여과는 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이를테면 선근을 끊을 때 최후로 버리는 선근의 득(得)이다.174)
제2구는 이를테면 선근을 속생(續生)할 때 최초로 획득하는 선근의 득이다.175)
그러나 이 때 속생하는 것은 앞서 [선근을 끊을 때 최후로 버렸던] 선근의 득이라고 마땅히 설해야 한다.
제3구는 이를테면 선근을 끊지 않은 자가 그 밖의 다른 상태[에 있을 때의 득]이다.176)
제4구는 앞서 언급한 상을 제외한 그것이다.177)
불선의 동류인에 대해서도 역시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이를테면 욕탐을 떠날 때 최후로 버려지는 [번뇌의] 득이다.178)
제2구는 이를테면 이욕(離欲)에서 물러날 때 최초로 획득하는 [번뇌의] 득이다.179)
그러나 이 때 물러나는 것은 앞서 [욕탐을 떠날 때 최후로 버렸던 번뇌]의 득이라고 마땅히 설해야 한다.
제3구는 이를테면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가 그 밖의 다른 상태[에 있을 때의 득]이다.
제4구는 앞서 언급한 상을 제외한 그것이다.
유부무기의 동류인 중에도 역시 4구가 있으니,
아라한과를 획득할 때와 물러날 때와 아직 획득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상태가 바로 그것으로, 마땅히 이치에 맞게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180)
무부무기의 동류인 중에는 순후구(順後句)가 있다.
이를테면 그것이 여과할 때는 반드시 역시 또한 취과하지만, 혹 어느 때 취과는 하더라도 여과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아라한이 [무여열반에 들 때의] 최후의 제온이 그러하다.181)
유소연(有所緣)의 찰나의 차별에 근거한 선의 동류인에도 역시 4구가 있으니,182)
제1구는 이를테면 선심과 무간에 염오심과 무기심이 일어나는 때이고,
제2구는 이를테면 이와 반대되는 경우이고,
제3구는 이를테면 선심과 무간에 다시 선심이 일어나는 경우이고,
제4구는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상을 제외한 그것이다.183)
그리고 불선심 따위의 동류인에 대해서도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4구가 있으니,
앞의 예에 준하여 설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취과(取果)와 여과의 뜻은 무엇인가?
능히 그것(즉 결과)의 종자[種]가 되기 때문에 ‘취과’라고 이름하며,
바로 그것에 힘을 부여하기 때문에 여과라고 이름한다.
이숙인의 여과는 오로지 과거에 있을 때이니, 이숙과는 이숙인과 구유하거나 무간인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앞에서 논설한] 5(果)과 이외에 별도로 4과를 설하고 있다.184)
첫 번째는 안립과(安立果)이니, 이를테면 마치 수륜(水輪)이 풍륜(風輪)의 결과가 되고, 내지는 풀[草] 따위가 대지의 결과가 되는 것과 같다.
둘째는 가행과(加行果)이니, 이를테면 마치 무생지(無生智) 등이 부정관(不淨觀) 등의 먼 결과가 되는 것과 같다.
셋째는 화합과(和合果)이니, 이를테면 마치 안식 등이 안근 등의 결과가 되는 것과 같다.
넷째는 수습과(修習果)이니, 이를테면 마치 변화심 등이 온갖 정려의 결과가 되는 것과 같다.185)
그러나 이와 같은 4과는 모두 사용과와 증상과에 포섭된다.186)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법과 원인의 관계]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떤 법은 이 가운데 몇 가지의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법에는 간략히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염오법(染汚法)과 이숙생법(異熟生法)과 첫 번째 무루법(즉 苦法智忍)과 이 세 가지 이외의 나머지 법이 그것이다.
나머지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이숙을 제외한 그 밖의 무기법과 첫 번째 무루법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여러 선법이다.187)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이 몇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지]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오법과 이숙생법과
그 밖의 법과 첫 번째 성도는 차례대로
이숙인과 변행인과 이 두 가지와,
아울러 동류인을 제외한 그 밖의 인에 의해 생겨난다.
이것은 말하자면 심ㆍ심소에 대한 것으로
그 밖의 법은 아울러 상응인을 제외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염오법은 이숙인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니, 이숙인에 의해 생겨나는 제법은 염오하지 않기 때문이다.188)
이숙생법은 변행인을 제외한 그 밖의 다섯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189)
세 가지 이외의 나머지 법은 양쪽 모두에 걸친 이숙과 변행의 두 가지 원인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190)
첫 번째 무루법은 앞에서 [제외한] 두 가지 원인과 아울러 동류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191)
이와 같은 네 가지의 법은 무엇에 대해 설한 것인가?
이를테면 심과 심소에 대해 설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불상응행이나 색의 네 가지 법은 다시 몇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192)
심ㆍ심소법에서 제외된 원인 이외에 상응인도 아울러 제외하니,193)
‘그 밖의 다른 법’(즉 불상응행과 색법)은 그와 같은 원인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ㆍ세 가지ㆍ두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이 가운데 염오와 이숙생법은 나머지 네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194)
세 가지 이외의 나머지 [색과 불상응행]법은 [이숙ㆍ변행인과 아울러 상응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
그리고 첫 번째 무루[의 색과 불상응행]법은 [이숙ㆍ변행ㆍ동류인과 아울러 상응인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니,
‘하나의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존재[法]는 결정코 아무것도 없다.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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