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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94권
3. 인증장[2]
[선정과 하나의 법]
대관정경(大灌頂經)에 이르되,
“선정 닦는 비구는 다른 생각이 없이 하나의 법만을 지킬지니, 그런 뒤라야 진리를 보게 된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하나의 법을 종(宗)으로 삼으면 모든 티끌이 붙을 데가 없고 다른 인연이 저절로 끊어져서 묘한 성품이 환해지나니,
뜻이 하나에 돌아가야 하는데 어느 지혜인들 밝지 않겠으며,
흐름을 찾아 근원을 얻었는데 무슨 의심인들 풀리지 않겠는가?
요점을 추린 뜻[旨]이므로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보운경(寶雲經)에 이르되,
“온갖 법은 마음을 우두머리로 삼나니, 만일 마음을 안다면 온갖 법을 알게 된다”고 했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부처님들께서는 마음에서 해탈을 얻나니
마음이란 때[垢]가 없어 청정하다 했고
다섯 갈래[五道] 정결해서 물들지 않나니
이를 이해하는 이 큰 도[大道]를 이루네.
해석하여 보자.
다섯 갈래는 마음에서 연유한다.
마음의 체성은 항상 청정한지라 비록 다섯 갈래를 두루한다 하더라도 그의 빛깔[色]을 받지 않으므로,
다섯 갈래에 따르더라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한 모양[一相]에 있는데도 오른 것 아니며,
법계에 전개하는 데도 두루하지 아니하고 작은 티끌에 들어가는데도 오므라들지 않나니,
진여의 한 마음은 본 성품이 청정하여 늘거나 줄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법은 온갖 것을 능히 거두는데,
마치 남상(濫觴)의 한 방울 물이 4해(海) 물의 젖는 성질과 차별이 없는 것과 같고,
겨자씨 구멍 속의 허공이 10방 허공이 포용하는 것과 구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르되,
“하늘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맑고 땅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편안하고 만물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생긴다”고 했나니,
여기서는 하나를 얻음으로써 도를 얻는 것이다.
또 이르되,
“성인은 하나를 안아 천하의 법식을 삼는다”고 했나니,
곧 이 종경(宗鏡)에서는 선문(禪門)의 법식이 된다.
[여여한 성품]
대방등다라니경(大方等陁羅尼經)에 이르되,
“사리불(舍利弗)이 문수(文殊)에게 물었다.
‘기(記)를 받음에는 무엇에서 구해야 합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여여(如如)한 성품 안에서 구하여야 하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여여한 성품이란 곧 모든 중생의 참 마음의 성품이다.
사익경(思益經)에 이르되,
“중생의 여(如)가 곧 샘[漏]이 다한 해탈의 여이니,
온갖 법이 모두 여에 들어가 체성이 없는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해탈이니, 중생의 심행(心行) 중에서 구한다”고 했다.
[분별하는 마음]
인과경(因果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온갖 지은 선과 악은
다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
그러므로 참된 출가는
모두가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
대법구다라니경(大法炬陁羅尼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비사카(毘舍佉)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빛깔 모양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느니라.
저 심식(心識)의 경계는 뜻[意]으로만 아는 것인 줄 알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눈으로는 볼 수 없느니라.
비사카야, 모든 중생에게 있는 마음과 뜻은 말로는 할 수 없나니, 부처님의 지혜로만 아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상법결의경(像法決疑經)에 이르되,
“오늘 이 자리 안에 있는 수많은 대중들은 저마다 보는 것이 같지 않나니,
어떤 이는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여래께서 세간에 1겁(劫) 동안 또는 감겁(減劫)의 겁 1겁 동안 또는 한량없는 겁 동안 살고 계심을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여래의 키 한 길[丈] 여섯 자 되는 몸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작은 몸을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큰 몸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보신(報身)이 연화장(蓮華藏)세계 바다에서 천백억의 석가모니 불을 위하여 심지법문(心地法門)을 설하신 것을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법신(法身)이 허공과 같아 분별함이 없고 모양도 없고 장애됨도 없으면서 법계에 두루하여 같아짐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 곳의 산숲과 토지와 모래며 조약돌 따위를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7보(寶)를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 곳이 바로 삼세의 부처님들께서 수행하시던 곳이라고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 곳이 곧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들의 경계인 진실한 법이라 보기도 했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부처는 일정한 형상이 없는데 식(識)을 따르면서 스스로가 거칠다거나 미묘하다고 분별하며,
경계는 다른 모양이 없는데 마음으로 인해서 공연히 짧다 길다 하고 보나니,
말하자면, 실제로 증득한 법문의 도리는 종경(宗鏡)으로 돌아간다 할 것이다.
여래흥현경(如來興顯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모든 부처님의 행하시는 성품과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심성(心性) 안에 있는 것이라
모양이면 모양이 같은 모양이어야 한다.
현보장경(現寶藏經)에 이르되,
“보살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슨 인연 때문에 온갖 법이 다 불법입니까?’
문수가 말하였다.
‘무처님의 지혜로 깨달을 바니라.’
또 물었다.
‘어떻게 부처님의 지혜로 깨달을 바입니까?’
이에 대답하기를,
‘자기 마음의 여(如)를 이해하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수행자분경(修行慈分經)에 이르되,
“모든 법의 체성과 모양은 미세하여 모두 다 비고 고요하건마는,
범부라는 사람들이 스스로 분별하여 모든 경계를 내고 스스로 분별하는 가운데서 도리어 자신을 속박하고 있다.
아직 마음의 제 성품을 분명히 모르고 있는 동안에는,
마치 꿈 속에 있는 것 같아서 망녕되이 모든 경계를 집착하는 것이니,
다시 ‘온갖 3계(界)는 모두 다 ≺공≻이라 ≺공≻은 ≺공≻을 장애하지 않는다’고 관찰해야 하느니라”고 했다.
입능가경(入楞伽經)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에 부처님이 신통의 힘으로
다시 변화하여 산과 성(城)을 만들어
높고 험한 백천가지 모양으로 되었나니
장엄하게 꾸며짐이 수미산(須彌山)과 대등했네.
한량없는 억(億) 개의 꽃으로 된 동상은
모두가 여러 가지 보배 숲으로 되어
향기가 널리 자욱했나니
대단한 그 향기 일찍이 맡지 못했었네.
하나하나의 보배로 된 산중에
모두가 부처님 몸 나타내어 보이시니
그 안에는 라바나(羅婆那) 야차 대중과
함께 머물러 있게 되었네.
10방의 모든 부처님 국토는
모든 부처님의 몸에서 나타났고
부처님 제자와 야차들은
모두가 그 산으로 와 모였네.
그런데 여기 능가의 성[楞伽城]에
있게 된 모든 대중들은
제 몸이 변화된 능가성 안에
들어가 있음을 모두 보았네.
여래의 신력으로 만든 것이라
그 능가성 또한 동일하였고
모든 산과 동산 숲의
보배로 장엄된 것 또한 그러하였네.
낱낱의 산중에 계신 부처님은
다 크게 지혜로운 물음이 있으셨고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몸 속에서 증득하신 법을 말씀하셨네.
백천 가지의 미묘한 음성 내어
이 경법을 말씀하고 나시자
부처님과 그리고 부처님 제자들은
모두 다 사라져 없어져버렸네.
라바나 야차는
홀연히 자기 몸을 보았더니
제가 본래 있었던 궁정에 있었고
그 밖의 물건은 다시 아니 보였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아까 보였던 것 누가 만들었으며
설법을 한 이는 그 누구였던가
이 누구에게 들은 것이며
내가 보았던 것 무슨 법이어서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인가?
저 모든 부처님 국토와
그리고 모든 여래의 몸인
이러한 모든 미묘한 일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것이 꿈에서 기억한 것일까
이것이 요술로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진실한 성(城)과 읍(邑)이었을까
건달바성(乾達婆城)으로 되었던 것일까
눈병으로 허망하게 보았던 것일까?
아지랑이로 생겼던 것일까
꿈에서 석녀(石女)가 낳은 것일까
내가 불 바퀴[火輪]를 보았던 것일까
불바퀴의 연기로 보았던 것일까
내가 보았던 것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스스로 깊이 생각하기를
모든 법의 체성은 이와 같아서
자기 마음만의 경계일 뿐이라
마음 속에서 증득하여 알리라.
그런데도 모든 범부 무리들은
무명에 가리고 막히게 되어
허망하게 마음으로 분별하면서
능히 깨닫거나 알지 못한다.
능히 보는 것[能見]과 그리고 볼 바[所見]는
모두 다 얻을 수 없으며
설하는 이[說者]와 그리고 설할 바[所說]의
이러한 따위도 역시 없는 것이다.
부처님 법의 진실한 체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법의 모양은 한결같이 이러한데
자기 마음만으로 분별할 뿐이다.
물건을 보고서 진실이라 여긴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을 뵙지 못하리니
분별하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아도
역시 부처님을 뵈올 수 없네.
모든 행(行)이 있음을 보지 않으면
이러한 이를 부처라 하지만
만일 이렇게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여래를 뵙게 되리라.
온갖 모든 경계를
지혜로운 이로서 이렇게 관찰하면
몸을 바꾸어 묘한 몸 얻으리니
그 분을 바로 불ㆍ보살이라 한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허공잉보살경(虛空孕菩薩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온갖 모든 법의 모양은
진실하여 아는 이 없나니
만일 사람이 5음(陰)에 머무르면
여섯 감관[六根] 모두가 가리고 막힌다.
해석하여 보자.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진실하여서 앎도 없고 보는 것도 없지만,
겨우 알거나 보는 것이 있어서 곧 식음(識陰)에 떨어지기만 하면 한 마음은 트이지 아니하고 여섯 감관은 어둡고 막히리니,
끝내 봄이 없는 봄[無見之見]을 보거나 앎이 없는 앎[無知之知]을 알게 되지 못한다.
만일 봄이 있는 봄[有見之見]이라면 온갖 것을 보지 못하지만,
만일 앎이 없는 앎이라면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
그런 까닭에, 현호경(賢護經)에 이르되,
“만일 보살이 4념처(念處)를 관하게 되면 볼 만한 법이 없고 들을 만한 소리도 없다.
듣거나 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분별할 수 있는 법도 없고 생각할 수 있는 법 역시 없다.
그러면서도, 또한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법은 볼 수 없을 뿐이기 때문에 오직 한 참 마음만으로 바깥에는 법이 없음을 본다”고 했다.
보성경(寶星經)에 이르되,
“그때, 세존은 묘음범왕(妙音梵王)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무엇 때문에 눈을 잠시도 떼지 않느냐?
모양이 업는데도 나를 보는 것이냐?
선남자야, 어느 한 법이 있기에 부처라고 하느냐?
어떤 한 물건이 있기에 이름이라 한다고 해야겠느냐’고 하셨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름과 본체는 모두 ≺공≻하며 묘한 뜻은 여기에 있나니,
그러므로 보는 것을 끊어야 여래를 뵙는 것이요, 있다 없다고 보면 다 이는 허망이다.
종경(宗鏡)에 들지 못했거늘 어찌 참된 부처를 말하겠는가?
[법의 성품]
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에 이르되,
“모든 법은 항상 스스로 존재하건마는 중생이 통달하지 못하여 장엄(莊嚴)을 일으키지만,
법과 법이 저절로 생기고 법과 법이 저절로 소멸하며,
법과 법이 생기지 않고 법과 법이 소멸하지 아니하며,
법이 생기고 법이 소멸하되 성품은 이전하지 않나니,
이것이 보살 대사(大士)로서의 도(道)라 평범하고 속된 이로서는 미칠 바 아니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모든 법이 항상 스스로 존재한다 함은, 참 마음은 바꾸어지지 않고 성품이나 모양이 한결같다는 것이요,
중생이 통달하지 못하여 장엄을 일으킨다고 함은,
외도는 단견(斷見)을 고집하고 소승은 무상(無常)을 증득하며, 보살은 범부와 소승을 다스리게 되기 때문이다.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으면서 항상 복된 일을 닦고,
무위(無爲)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지혜의 못에 깊이 들며,
광대하고 장엄한 구름으로 만행(萬行)을 일으키고 생각생각마다 열 가지 바라밀을 원만히 하면,
단견ㆍ상견(常見)을 지닌 외도의 굽은 나무를 삿된 소견의 빽빽한 숲에서 뽑아 내고,
진리에 편벽된 소승 과(果)의 난쟁이 몸을 해탈의 구덩이 밑에서 건져 올리리라.
[뛰어난 도를 닦는 열 가지의 방편과 지혜]
그런 까닭에,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
“제7 원행지(遠行地)에서는 열 가지의 방편과 지혜로 뛰어난 도를 닦아야 하나니,
이른바 비록 ≺공≻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삼매를 잘 닦는다 하더라도, 자비로써 중생을 버리지 아니하며,
비록 모든 부처의 평등한 법을 얻는다 하더라도, 항상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즐기며,
비록 공지(空智)를 관하는 문에 들었다 하더라도, 복덕을 부지런히 닦고 익힌다.
비록 3계(界)를 멀리 여의었다 하더라도 3계를 장엄히 하며,
비록 마지막에는 모든 번뇌의 불길을 고요히 껐다 하더라도, 모든 중생이 일으키는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불길을 끄기 위하느니라.
비록 모든 법이 마치 요술과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 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제 성품이 둘이 없음을 안다 하더라도, 마음에 따라 업을 짓되 한량없이 차별한다.
비록 온갖 국토가 마치 허공과 같음을 안다 하더라도, 청정하고 미묘한 행으로써 불국토를 장엄히 하며,
비록 모든 부처님 법신이 본 성품에는 몸이 없음을 안다 하더라도, 상호(相好)로써 그 몸을 장엄히 하며,
비록 모든 부처님 음성의 성품이 ≺공≻하고 고요히 사라져서 말로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모든 중생을 따라 갖가지의 차별된 청정한 음성을 낸다.
비록 모든 부처님을 따라 세 세상이 이 한 생각 뿐임을 분명히 안다 하더라도, 중생의 뜻의 앎과 분별함에 따라 갖가지의 모양과 갖가지의 시기와 갖가지 겁(劫)의 수로써 수행을 하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경에서 말씀한
“비록 ≺공≻ㆍ무상ㆍ무원의 삼매를 잘 닦는다”고 하는 것은, 범부의 유(有)에 집착하고 낙(樂)을 따르는 소견을 다스리는 것이요,
“자비로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2승의 ≺공≻에 빠지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소견들을 다스린다는 것이니,
아래의 모든 구절의 뜻을 다 이렇게 해석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성문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연각은 자비가 없어서 둘 다 보살이 하는 두 가지 이익되는 행을 잃고 있다”고 했다.
[3해탈문과 도를 구하는 것]
수진천자경(須眞天子經)에 이르되,
“수진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살은 3해탈문(解脫門)을 좇지 않으면서 도를 구해야 합니까?’
문수가 대답했다.
‘천자여, ≺공≻을 좇으면서는 도를 이룰 수가 없고 무상(無相)에서도 도를 이룰 수 없으며, 무원(無願)에서도 도를 이룰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이 가운데서는 마음[心]ㆍ뜻[意]ㆍ식(識)이 없어서 생각 또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이니,
마음ㆍ뜻ㆍ식이 있어서 생각생각마다 움직여져야 그 도를 이루느니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만일 3해탈문을 취하면서 증득하려 한 이면 이는 곧 실제(實際)의 바다에 빠져서 신령한 각[靈覺]의 근원을 저버리는 것이니, 성품을 버리면서 ≺공≻을 좇는데 어찌 큰 도를 이루겠는가?
만일 곧장 심성을 신령하게 안다면 생각생각마다 보리 과위가 원만해져서 단견의 아주 없다는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않거늘, 어찌 상견의 실제로 존재한다는 길을 밟겠는가?
그렇게 하며 뜻을 일으킨다면 큰 작용이 앞에 나타나서 얻을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으며 취한 것도 아니고 버린 것도 아니다.
진리로부터 행(行)을 일으키므로 체성과 작용이 서로가 거두어 행은 진리에 계합되고 말거나 펴는 것이 한 동아리리니, 말하자면 마음과 마음마다 도(道)에 합치하고 생각생각마다 진리에 명합한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환원관(還原觀)에 이르되 작용[用]인 즉 파도가 뛰어오르고 바다가 끊듯 하되 온전히 참된 체성으로 운행하는 것이요,
체성[體]인 즉 거울이 개끗하고 물이 맑듯하되 모두가 인연을 따르면서 고요한 데로 모여지는 것이니,
이는 곧 체성을 여의지 않는 자용이라 그 작용은 파도가 뛰어오르듯 하고 작용을 여의지 않는 체성이라 체성은 언제나 잔잔하고 고요하다.
체성이 비록 잔잔하고 고요하기는 하나 언제나 만 가지의 인연에 있고 작용이 비록 파도처럼 뛰어오르나 한결같이 한 동아리에 명합한다.
[법과 말]
대방광사자후경(大方廣師子吼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전만(電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법은 한 글자일 뿐이니, 이른바 없다[無]는 글자니라.
본래 말로 설명할 것이 없거늘 어디서 말로 설명하겠느냐?
선남자야, 설명할 것 없는 이것이 참된 설명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그때, 정신(淨身)보살이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받잡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설명할 것이 없는 것이 참된 설명이라면, 벙어리로서 말하지 않는 것도 설법이어야 하겠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선남자야, 네가 말한 대로 벙어리로서 잠잠한 것이 설법일 뿐만 아니라 벙어리 아닌 이 역시 모두가 설법이로되 법을 알지 못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모든 중생들이 설법을 하면서도 법을 모르나이까?’
‘선남자야, 마치 나면서부터 장님이 햇빛 속에 있으면서도 해는 보지 못하는데,
곁에 있는 사람이 그를 위해 다른 음성으로 말해 주어야 비로소 해가 있음을 아는 것처럼,
이러한 모든 법은 모두 법계에 들어가고, 법계에는 글자가 없으며 모든 글자의 성질을 여의었으므로, 모든 중생으로서는 널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자세히 알아야 한다.
아직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한 사람이 통상의 견해에 의지하여 다른 이의 말하는 것에 따라 망녕되이 말함이 있음이,
마치 저 장님이 햇빛은 보지 못하면서 곁 사람의 소리만을 듣는 것과 같거늘, 어찌 해 자체를 다 알 수 있겠는가?
만일 눈을 떠서 몸소 보게 된다면 곧 본래 이름이나 말이 없음을 알 것이니,
그러므로 말이 있으면 종지를 상실하여 법계를 통달하지 못한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모두 법계에 들어가고, 법계에는 글자가 없으며 모든 글자의 성질을 여의었다”고 한 것이다.
만일 한 글자라는 것이 마음의 법계임을 깊이 통달한다면, 저절로 말 길이 끊어지고 당연히 앎의 정(情)이 없어지겠거늘, 어찌 이것이 변설의 지혜가 없어서 다할 수 없는 것이겠는가?
마치 조론(肇論)에 이르되,
“석가(釋迦)는 마갈(摩竭)에서 방문을 닫았고,
정명(淨名)은 비야(毘耶)에서 입을 막았으며,
수보리는 말이 없음을 부르짖어서 도(道)를 드러냈고,
제석(帝釋)ㆍ범왕(梵王)은 들기를 거절하면서 꽃을 뿌렸다”고 함과 같나니,
이렇다면, 진리는 신령이 타는 수레[神御]가 되나 입으로써는 잠잠하고 있거늘 어찌 변설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 변설은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