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쿠라 키요시(中倉 淸. 켄도, 이아이도 9단. 1910-2000)
먼저 나카쿠라 키요시(中倉 淸) 선생님의 일대기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상물.
이 DVD는 69번의 대회시합에서 한번도 진적이 없는 전설적인 검도가인 나카쿠라 키요시범사의 일생과 그의 철학을 조명해보는 영상물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자주 미야모토 무사시와 비교가 되기도 하고 쇼와시대의 미야모토 무사시의 환생이라고도 일컬어 지셨다. 55분. - 라고 뒷면에 씌여있다.
교토 타이카이에서 나카쿠라 키요시선생님.
본 시범을 보이고 계신 나카쿠라 키요시 선생님.
이아이도(居合道) 시연을 하고 계신 나카쿠라 선생님.
그리고 일본의 무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도가를 소개하는 영상물.
'영원불변의 무도'
여기에서 아이키도의 창시자이신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님도 나오시고, "이아이도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나카야마 하쿠도 선생님(나카쿠라 키요시 선생님의 스승), 그리고 쥬도 10단의 미푸네 큐조 그리고 카노 지고로의 제자들과 나카쿠라 키요시 선생님도 소개가 되어있다.(사진 맨아래 중앙)
* 시오다 고조 (아이키도)
* 미푸네 큐조 (쥬도)
* 우에하라 시키치 (모토부 우돈 티)
* 나카야마 하쿠도 (이아이도)
* 다나카 코시로 (후지 류 타이주츠)
* 야오 종 순 (이수안)
* 시마즈 켄지 (야규 신간 류)
* 히라타 카나에 (코센 쥬도)
* 우에시바 모리헤이 (아이키도)
* 타키가미 테세이 (텐넨 리신 류)
* 시마다 미치오 (타이키켄)
* 킨조 히로시 (가라데)
* 나카쿠라 키요시 (켄도)
* 모리시게 타미조 (호주츠 - 총포술)
* 하츠미 마사아키 (부진칸 부도 타이주츠)
그리고 예전에 허광수선생님꼐서 내신 검도총담에 실린 내용 중 나카쿠라 키요시선생님 얘기가 나온다.
<검도총담-1호>
5. 천지(天地)의 기(氣)와 통하는 자연의 겨눔 자세
―연사 6단 나카야마 쇼후 씨의 자세론―
현대검도에 있어서 겨눔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현재 일반적으로 가르치고 행하는 겨눔세가 무도의 요소가 희박해져가고 있는 경향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미에(三重)현의 구와나(桑名) 시민병원 부원장이며, 검도 연사 6단인 나카야마 쇼후(中山尙夫) 씨는 현대검도에 의문을 품고, 나카야마 하쿠도(中山博道), 다카노 사사부로(高野 佐三郞) 등을 비롯하여 과거의 검도가들이 남긴 가르침을 독자적으로 연구, 무도로서의 검도를 재확인하여 후학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다음은 나카야마 쇼후 씨의 말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 - - - 중략 - - - -
(6) 우주의 기(氣)를 배우는 웅대한 검도.
발동작에 있어서도 현대에는 밀어걷기 밖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옛날 가르침 안에는 길로 많은 발동작이 있습니다만 그것에 대하여는 다음의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검의 길에 뜻을 둔 사람은 현대 검도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진리를 고래로부터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움직임에 있어서도 현대 검도는 앞뒤의 움직임뿐입니다만, 검도는 좁은 다리 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은 앞뒤 뿐만 아니라 좌우로도 넓게 퍼져 있기 때문에 천지의 기(氣)를 받아들여서 전후좌우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검도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카쿠라선생의 검도에 마음이 끌린 것은 선생이 나카야마 하쿠도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그러한 좌우의 움직임, 또는 ‘보통걷기‘ 라고 하는 요소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류(古流)에는 많은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고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다카노 사사부로와 나카야마 하쿠도입니다.
'이기면 된다,‘ ’점수만 따면 된다.‘ 라는 생각은 검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검도는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몸을 혹사하고, 발에 물집이 생기고, 발바닥이 갈라지고 팔굽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기술한 바와 같은 검도를 실천하면 몸이 상하는 일이 없습니다.
나카쿠라 키요시 선생의 손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카야마 군. 내 손을 보시오. 어디에도 물집 하나 없질 않소.”
선생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다카노 사사부로 선생의 손도 실로 부드러웠다고 합니다.
웅대한 검도, 큰 검도를 지향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입니다.
자연이란 무엇이냐 하면 자세도 좋고, 전신이 부드럽고, 단전에 기를 모아 다른 부분에 무리한 힘이 가지 않으며, 유연하며, 천지간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러한 이미지입니다.
한정 없이 넓은 우주의 기를 배우는 것이 무도, 검도인 입니다. 큰마음을 가지고 연습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검도를 통해서 선(禪 )의 경지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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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나카쿠라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검도일본에 특집으로 실린 선생님에 대한 글.
나카쿠라 선생님을 기리며
츠이토 키카쿠 검도일본 2000년 5월호
나카쿠라 키요시, 무사의 혼.
2000년 2월9일 나카쿠라 키요시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검도, 이아이도 9단).
먼저, 그 분은 나카야마 하쿠도(中山 博道) 도장의 수련생으로 그중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전전 전후의 각 대회에서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관동지역의 경찰청들과 히토츠바시 대학 그리고 츄오대학 등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했다. 그의 일생은 그 시대에서도 켄캬쿠(劍客)라고 불려도 될 만큼, 검으로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그는 검도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도쿄로 올라온다.
그리고 나카야마 하쿠도 선생님의 제자로 들어가 수련을 하게된다.
나카쿠라 키요시 범사는 메이지 43년 鹿兒島県(카고시마켄) 히가시 쿠시라 무라 칸조쿠 군 에서 태어났다. 5 형제 중 3남이며 다른 형제들은 모두 조용하고 얌전한데 반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활달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검도를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이미 기량이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역시 각종 대회에서 아주 좋은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혼카(本科)를 졸업하는 해에, 자신을 쇼와시대의 사이고 다카모리라고 말하는 이마무라 사다하루라는 사람이 가고시마에 다이도칸 무도선수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자신의 사설도장을 가고시마켄의 승인을 받고 이런 무도전문학원으로 발전시켰다.
쇼와 2년, 나카쿠라선생이 17살이 되던 해에, 그는 이 학교에 들어간다. 바로 전문 검도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이 무도학교의 일정은 아침 6시부터 시작했는데, 점심까지 아사게이코(朝稽古. 이른 아침에 하는 연습) 를 하고 오후에는 12시부터 2시까지 수학과 일본어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게이코를 했다.
이 게이코는 마루타 카네히코 센세이와 시바가키 마사주미 센세이가 지도했는데, 그저 공격에 관한 것만을 가르쳤다. 그것도 선생님들을 상대로 학생들은 쉬지 않고 하는 카카리게이코(掛稽古. 공격연습) 를 하고, 찌름을 당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죽도로 공격이 막히면서 정원까지 밀쳐져 나뒹구는 그런 연습을 했다. 게이코 도중에 실신을 할 정도로 격하고 힘든 수련이었다고 한다.
혼카에서 1년간 수련을 하고 다시 다이도칸에서 수련을 한 뒤 나카쿠라선생은 다이토 샤 코우게이 주쿠 라는 학교에서 검도사범을 하게 된다. 하루는 학생들이 도쿄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이때 나카쿠라선생은 검성이라 불리우던 나카야마 하쿠도(中山 博道 막부 말기 에도 3대 도장의 하나였던 신토무넨류의 렌페이칸의 대를 이은 인물) 선생님을 찾아가 도장에서 그 분의 제자들과 연습을 하게 된다. 나카야마선생님은 나카쿠라선생에게 도쿄로 올라와서 자기 도장에서 수련하라고 초대한다. 나카쿠라선생은 뭘 하기로 결심을 했으면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는 코게이샤의 사부로부터 도망치듯이 도쿄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나카쿠라선생은 쇼와(昭和) 5년(1930년) 1월, 19살에 나카무라 하쿠도의 유신칸(有信館) 도조에 입문한다.
유신칸은 아주 과격하고 엄청 고된 수련으로 유명했다. 수련의 대부분은 연격을 하는 것이었고, 찌름과 요코멘, 아시가라미(あしがらみ [足搦み] 다리걸기), 나게(なげ [投げ] 던지기, 메어치기), 쿠미우치(組み討ち 상대에게 올라타 누름) 등의 기술도 많이 사용했다.
다음의 일화를 보면 유신칸 도조의 수련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도장은 특히 저녁 게이코 시간에 학생들로 가득 찼는데, 게이코를 마치면 대개 들것에 실려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신칸 도조는 매년 두 번씩 심사시합을 여는데, 유신칸에 들어가고 첫 시합에서 나카쿠라선생은 연이어 16명을 이기고, 다른 도장과의 시합에서도 연이어 이기면서 강함을 보였다.
쇼와 5년 가을에 코단샤 유쇼 시아이(講談社 優勝 試合) 란 대회가 있었는데, 코토 각코 대학 등 각 도장에서 3인씩 단체전을 하는 대회였다(지금의 전일본대회 같은 대회).
이 대회에서 나카쿠라선생은 하가 쥬니치와 카무로 이사오와 함께 유신칸의 대표로 나가 싸웠고 결국 결승에서 천황호위팀과 싸워 우승을 했다. 이 승리 이후 전쟁으로 검도가 쇠퇴기를 걷는 10년 동안 나카쿠라선생은 각 대회에서 엄청난 위업을 달성한다.
하가 그리고 나카지마 고로조와 함께 그들은 유신칸의 가장 강한 3인방으로 불리게 된다.
이듬해 4월 나카쿠라선생은 황제호위단(코구 케이사츠)의 부름을 받아들여서 호위단에 들어간다. 그리고 5월, 그는 교토의 다이니혼 무도쿠카이(大日本武德會) 로부터 ‘세이렌 쇼우’ 를 받는다. 이 ‘세이렌 쇼우’ 는 지금의 ‘연사’와 같은 칭호인데, 그 의미는 훨씬 더 깊고 크다.
그 이듬해에 천황호위대와의 케이시초우 시합에서(이 시합은 한 명이 20명과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방식의 시합) 나카쿠라는 8명을 이기고, 9명 째에는 히키와자를 썼다.
이 시합에서 그는 최종 우승자로 완전히 영웅이 되었다.
또한 나카쿠라선생은 메이지 진구 타이카이(明治神宮大會. 일본경찰대회)에서 이토 마사지한테 패하지만 베스트 4 안에 든다.
이 시기에 나카쿠라선생의 이름은 점점 더 널리 알려지고 유명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모든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는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 같은 대회가 없었다. 반면에 텐란 타이카이라는 대회가 있었는데, 쇼와시대가 시작하고 3번 열렸다. 그리고 부토쿠사이 엔부 타이카이(지금의 교토 타이카이의 전신) 가 있었다. 하지만 이 대회는 우승자를 가리는 그런 대회가 아니었다.
또 하나 저명한 대회가 있었는데, 부토쿠사이 만큼 명성이 자자한 대회였다. 바로 사이네이칸 켄도 타이카이 로 일황경찰 켄도부가 여는 대회였다.
이 대회는 여러 방식이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대회는 5명의 검사가 소아타리 시합을 하는 것이었다(総当たり 참가자 모두와 싸우는 방식).
이 대회를 위해 가장 강한 검도가 5명이 선정이 되었고, 일본에서 가장 강한 검도가를 결정짓기 위해 싸운다.
쇼와 10년(1935년), 나카쿠라선생은 코지마 카메타로, 사토 사다오, 오노 소이치로, 오사와 마모루와 함께 이 대회에 5인 중에 한 명으로 뽑히고, 이 4명을 모두 이기고 우승자가 된다.
전일본대회의 전신인 메이지 진구 타이카이에서는, 쇼와 8년(1933년)에 30세 이하부에서 우승을 했다.
그리고 도쿄의 센다가야에 코도기 카이라는 큰 도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큰 무도대회를 개최했다.
쇼와 12년, 렌시 챔피언십을 열었는데 거의 18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나카쿠라선생은 당시 와세다대를 다니는 오오카(당시 가장 강하고 유명했던 검도인)를 꺾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쇼와 13년(1938년)에는 세이네이카이 켄도 타이카이 중에 렌시 타이카이가 있었는데(16명과 겨룸) 여기에서도 우승을 한다.
그리고 쇼와14년, 나카쿠라선생은 28세의 나이로 '쿄시 고'를 받는다. 이전까지 이렇게 어린 사람이 쿄시 고를 받은 예가 없었다.
쇼와 15년에 열린 코도기카이 타이카이에서 교시 우승대회를 개최했는데, 나카쿠라선생은 가장 어린 검도가로 참자를 해서 10살에서 많게는 20살이나 많은 상대를 모두 쓰러뜨리고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기에 나카쿠라는 거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한다.
쇼와9년, 나카쿠라선생은 이미 도쿄 쇼카 대학(지금의 히토츠바시 대학. 一橋大学)의 시람(수석사범) 이 되어 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또한 동서대항전에서 나카쿠라는 9승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남기며 사람들로부터 오니(귀신) 이라 불리우게 된다.
쇼와 16년에는 전쟁이 일어나는데, 나카쿠라선생은 이때 있었던 미야자키 진구 타이카이(宮崎神宮大會 전일본동서대항전의 전신) 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쇼와 17년에는 만슈 쿄신부덴에서 열린 제10회 기념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낸다. 그렇지만 시합은 전쟁 때문에 갈수록 줄어들었다.
나카쿠라선생께서 나가노 야소지와 와타나베 토시오선생님과 함께 세우신 시세이카이는 검도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검도 클럽이다.
이 당시 검도계는 나카야마 하쿠도의 제자들과 다카노 사사부로(高野 佐三郞) 의 제자들로 양분되어있었는데, 검도가들은 다른 도장에 자유롭게 드나들지를 못했고 대회에서 심판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이런 점을 바로잡기 위해 세 사람이 이 클럽을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검도수련이 금지되었던 때에도 수련을 지속했다. 하지만 쇼와 22년에 나카쿠라선생은 시세이카이에서 나가노선생과의 마지막 수련을 마치고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쇼와23년에 나카쿠라선생은 다시 수련을 시작했고, 후쿠오카현과의 시합 이후에 대회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전후 검도의 복귀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쇼와 26년, 나카쿠라선생은 들에서 일하는 도중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수술을 받게 된다. 이 후유증으로 후미코미에 이상이 생겼는데, 이때에 나카쿠라선생은 이전에도 종종 했던 히다리 조단을 시작하게 된다.
쇼와 27년에는 젠 니폰 켄도 렌메이(全日本劍道連盟) 가 발족하고 공식적으로 검도가 허가된다.
이듬해에 나카쿠라선생은 가고시마시경의 시한(師範)이 된다.
그리고 이해에 제1회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가 열린다.
이 당시 그는 43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사람들은 그가 우승할 확률이 가장 높은 검도가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의 무릎부상 탓인지 나카쿠라선생은 2회전에서 패하고 만다.
이듬해에는 준결승에서 나카오에게 지지만 3위를 결정하는 시합에서는 아베 사부로(전년도 준우승자)를 꺾고 대회 3위를 하게 된다.
* 제1회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 결승,
사카키바라 타다시(榊原 正. 렌시) 대 아베 사부로(阿部 三郎. 쿄시)
그리고 이 동영상은 전검련에서 1950년대의 필름으로 짐작하는데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한 영상.
잘하면 나카쿠라선생님의 모습도 하나쯤 있지 않을까해서 올린다.
그리고 같은 해에 전일본현대회에서 나카쿠라선생은 가고시마팀 멤버로 참가하는데, 대장으로 출전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하지만 역시 그의 검도의 강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합은 쇼와 29년에 출발한 전일본동서대항전에서이다.
나카쿠라선생은 이 대회에 총 8번 출전하여 단 한 차례도 진적이 없었다. 이 대회에서 그의 성적은 18전 전승이다.
처음에는 몇몇 사람만 엄선해서 개인전으로 치러졌는데, 나카쿠라선생은 총 3회를 싸웠고 쇼와 30년에 우승을 했다. 이즈음 그는 전쟁 이전의 상태로 회복이 됐다.
쇼와 31년 전일본동서대항전이 센다이의 미야기 큐조에서 열렸는데 2만명의 관중이 구경하기 위해 모였다(아마도 검도역사에 남을 기록일 것이다.).
이 대회에서 그는 동팀의 9명의 쇼우를 상대로 5번째 쇼우로 싸웠는데(대장을부터 5번째) 동팀의 대장까지 다 이겨서 서팀에 우승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이날 대장은 치치이로 다카노 사사부로의 수석제자였다.
다음해 쇼와 32년에는 3 쇼우로 나가 싸웠는데, 이때에는 동서팀 모두 전력이 비슷해보였고 나카쿠라선생이 나가 싸울 땐 동팀에 4사람이 남아있었다. 그는 이 4명을 모두 이기고 다시 서팀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때 나카쿠라선생이 이긴 4인은 시세이카이의 친구인 나가노 야소지와 와타나베 토시오, 그리고 오가와라 사부로와 대장에는 천황경찰호위대에서 함께 수련한 사토 사다오였다.
동서대항전에서의 2년 연속에 걸쳐 이러한 업적을 보여서 각종 신문매체들은 나카쿠라선생을 일컬어 ‘동서대항전(토우자이 타이카이)의 귀신’이라고 불렀다.
이 동서대항전의 마지막 시합은 쇼와 38년에 치러졌는데, 나카쿠라선생은 동팀 대장에 츠루미 이와오에 맞서 서팀 대장으로 싸워 역시 승리를 차지한다.
쇼와 37년에는 전일본전국대회(현 대항 대회 코쿠타이)에 출전하는데, 나카쿠라선생은 자신의 아들 에이지와 함께 가고시마팀으로 출전하여 대회에서 우승을 한다.
쇼와 41년에 나카쿠라선생은 다시 도쿄로 가는데, 거기에서 전쟁 전에 자신이 지도했던 동쪽에 위치한 몇 군데의 경찰도장과 히토츠바시 대학과 츄오대학 그리고 보우에이 대학 등에서 지도를 했다.
나카쿠라선생은 타이 사바키(體捌き 몸다루기) 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켄도는 공격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셨다.
검도일본은 나카쿠라 선생님의 반평생을 그린 ‘쇼와 레츠켄후’ 란 기사를 ‘키덴’ 이란 제목의 책으로 펴낸 것을 구입해서 나카쿠라 선생님의 검도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았다.
'자신이 시합에 강하고 연습에서 강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많은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켄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타이 사바키(體捌き 몸다루기) 라고 말합니다.‘
'나는 좌우로의 움직임이 켄도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게이코를 할 때에도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수련을 합니다. 단지 앞뒤로만 이동을 하면, 강한 세메에는 뒤로만 물러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아유미아시(步足 보통걷기)와 히라키아시(開き足 여는발)를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는 아유미아시가 더 낫겠네요. 공격이나 방어를 할 때 뿐만아니라 공격을 당하고 방어를 당했을 때에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유미아시가 좋습니다.'
나카쿠라 선생의 켄도와 그의 켄도에 대한 생각은 신토무넨류의 사부인 나카야마 하쿠도의 가르침으로 연격에 아주 많은 중요성을 많이 두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나카쿠라선생이 젊으셨을 때 우에시바 선생님에게 배운 아이키도의 영향이기도 하다.
가고시마 경찰청에서 나카쿠라와 함께 수련한 사카구치 카도치요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카쿠라의 수련은 그의 인생과 영혼이 담겨있었어요(일본어로 이노치 가타). 그는 게이코 중에 절대 누구한테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해야한다며 지시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상대를 무찌르고 때리고 무찌르고, 이걸 반복했지요. 그는 학생이 맞으면서 계속해서 배우기를 기대한 거지요.
그리고 그는 절대 힘들고 어려운 게이코를 마다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켄도는 공격하는거야. 공격을 할 때에만 켄도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야.“ 라고 말했지요.”
나카쿠라선생은 전 생애를 통하여 강한 기세를 이어나갔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해의 교토타이카이 다치아이(立ち会い) 에서 그는 엄청난 기세와 함께 손목머리허리 기술을 보여주었다. 다른 9단 선생님들의 기술보다도 쓸모없는 동작이나 공격이 없이(無駄 内 무다 우치) 완벽한 한 판에 집중하여 목표점에 타돌을 하시는 점이 단연 돋보이셨다.
나카쿠라선생님은 검도가가 아닌 켄캬쿠(劍客) 로 불리울 수 있는 마지막 분이신 것 같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는 나카쿠라선생님 같은 검사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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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글은 일어가 원어였을텐데 어느 사이트에서 영문으로 되어 있는것을 내가 번역한 것으로
다른데서 퍼온거 아님.
(동영상은 내가 끼워 넣은 것)
블로그를 하면서 내가 직접 찍은 사진도 있지만 많은 사진은 다른데서 가져온 거고, 검도일본의 컬럼등은
거의 경남검도회의 김명서님이 번역해 놓으신거고해서 글이든 사진이든 다 가져갈 수 있게 해놓았다.
뭐 링크해 가실때 인사나 한마디 남기면 좋은거고.
이 글은 그냥 가져가시지 말고 퍼가신다고 인사라도 남겨주시길. 노동의 댓가라고나 할까..? ^^;;
나카쿠라선생님 인터뷰
나는 이 분이 왜 뜬금없이 아이키도의 창시자이신 우에시바 모리헤이선생님 얘기를 하시나 했다.
위의 인터뷰 내용도 친구랑 우에시바 선생님을 찾아가서 진짜로 그렇게 잘하는지 확인하려고 덤볐다는 얘기고.. 그런데 이 아이키도의 창시자이신 오센세이(大先生) 이라고 불리우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선생님과의 관계는 그 이상이었던 것.
1930년1월, 19살 되던 해에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이름을 떨친 삼바 가라수(당시 이름을 떨친 세 개의 도장) 중 하나인 나카야마 하쿠도의 유신칸(有信館) 도조에 입문하고 최고 제자 중 한 명이 되는데,
1932년 아이키도의 창시자인 모리헤이 우에시바의 후계자가 됨과 동시에 양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이름을 우에시바 모리히로로 사용했다. 하지만 약 5년 뒤 결혼은 파경을 맞고 나카쿠라선생은 우에시바 도조를 떠난다.
당시 1932년에 찍은 사진. 21세 이셨나 그럼..?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님의 양아들 시절.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님에게 지도 받고 있는 나카쿠라 선생님.
그후 나카쿠라선생님안 다시 켄도를 연마한다.
그는 켄도와 이아이도에서 70대까지 엄청난 두각을 나타내며 정상의 실력을 선보이시면서 켄도와 이아이도에서 9단범사가 되시고 일본을 이끄는 고단자 검도가가 되심.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수석사범으로 지도를 하신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고류스타일의 戰前 스타일의 켄도수련의 결실이신 검성 하쿠도 나카야마의 수석제자이고,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전양아들이었던 나카쿠라 키요시(中倉 淸) 선생님은 일본을 대표하는 검도가 중의 한 분 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