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불인연론 하권
6. 구사미(拘舍彌) 국왕 대제(大帝)가 깨쳐서 벽지불이 된 인연
부모와 처자
곡식과 비단과 재보(財寶) 등을
잠깐 스쳐가는 것이 객사(客舍)와 같음을
지혜로운 이는 깊이 관찰하고
애욕(愛慾)을 버리고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간다네.
나는 옛날 여러 스승들로부터
전해 온 이런 일을 들었다.
일찍이 옛날 가섭불(迦葉佛) 때에 비구가 있었다.
그는 지혜가 총명하고 민첩하며 부드럽고 온화하게 인욕(忍辱)하였으며,
모든 법의 진실한 체성(體性)을 항상 관하였으니, 이른바
‘음(陰)은 고(苦)요, 공(空)이며,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다.
마치 파초(芭蕉)와 같고, 더운 날 아지랑이와 같으며, 요술과 같고,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고 관찰하였다.
이렇게 잘 관찰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닦았다.
그리고 목숨을 마친 뒤에는 천상에 태어났고, 하늘의 수명이 다하고는 내려와 구사미성(拘舍彌城) 국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을 대제(大帝)라 하였다.
그의 부왕이 돌아가시자 선업(先業)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고서 겁초(劫初)의 모든 왕처럼 계행(戒行)을 잘 닦고 바른 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때 성안에 큰 장자가 있었으니 재부(財富)가 한량없었다. 그는 대제왕(大帝王)과는 어릴 적부터 친구라 서로 지극히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장자의 몸이 중병에 걸렸다. 왕은 그가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몸소 찾아가 문병하였다.
장자가 병이 들어 모습이 초췌한 것을 보고 왕은 마음이 언짢아져 머리를 숙이고 근심하며 슬퍼하였다.
그러자 그 장자는 칠보의 발우[鉢]에 금을 가득 담아 왕에게 바쳤다.
왕은 장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병환으로 몹시 괴로우시지요?”
장자가 대답하였다.
“원컨대, 왕께서는 잘 살펴보시고 제가 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저희 집은 매우 큰 부자이니
마치 비사문(毘沙門)과 같습니다.
사랑스런 말씨[愛語]와 재보(財寶)에
친한 벗들도 많이 모이고
처자와 권속들과
동복(僮僕)과 하인도 많습니다.
나는 모두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도
대우도 지극히 후하게 했습니다만
지금 제가 죽을 때에 이르러선
저와 짝할 이가 한나도 없습니다.
왕이 곧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그 말은 매우 진실합니다.
당신의 아들과 모든 친척
재보(財寶)와 많은 창고
그리고 나의 용건(勇健)한 힘과
상병(象兵)ㆍ마병(馬兵)ㆍ거병(車兵)ㆍ보병(步兵)
비록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해도
구제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 모든 친한 벗들은
그대가 병고에 시달림을 보면서도
그저 위로하는 말만 하고
근심하며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또 당신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에도
구제할 수 있는 자는 없나니
오직 그 동안에 지었던 선(善)만을
그대 스스로 가지고 갈 뿐입니다.
왕은 그의 병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마음이 선정을 얻은 자와 같아져
중생에게는 온갖 고환(苦患)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깊이 깨쳤네.
온갖 생류(生類)들은
반드시 병이 들게 되어 있으니
병이 늘 사람을 괴롭히건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 없네.
모든 세간 사람들
반드시 죽음의 길에 들게 되건만
전혀 싫증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네, 이들이 나의 처자라고.
저들이 바로 나의 친척이라 하고
이것이 바로 나의 재물(財物)이라 하며
그는 나를 도탑게 대하였다 하고
나는 그의 친한 벗이라고 하네.
어리석음의 병에 걸린 마음으로
멋대로 이와 같은 생각을 지어내
화재 같은 우환(憂患)이 앞에 있는데도
어리석고 눈멀어[愚盲] 보지 못하나니
위에서 말한 친한 이들 어느 누구도
구제할 수 있는 자는 없네.
이것에 대하여 바르게 사유하자
곧 벽지불의 도를 얻게 되었다.
왕의 친척과 내외의 권속은 왕이 도를 얻어 세간의 일을 끊어버리는 것을 보고, 사랑하던 이와의 이별에 불길에 타듯 크게 괴로워하였다.
그때 벽지불이 허공으로 올라가 열여덟 가지의 신변[十八種變]을 나타내고 위와 같은 게송을 말하였다.
다시 어떤 이가 말하였다.
“이 왕이 왕자(王子)로 있을 적에 동산 안으로 들어갔는데 여러 소경들이 서로 붙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왕자가 왔다는 말을 듣고 음식이 있을 것이라 여겨 길옆에 있다가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해 크고 깊은 구덩이에 떨어졌다.
그래서 즉사한 이도 있었고, 머리가 깨진 이도 있었으며, 손발이 부러진 이도 있었고, 몸이 부서진 이도 있었다.
그때 왕자는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근심하면서 생각하다가 말하였다.
‘이들이 나를 깨치게 하였도다. 이와 같은 소경들 역시 예전엔 부귀(富貴)를 누렸을 터인데 멋대로 방일한 까닭에 지금 이런 고통을 얻는구나. 나는 이제 이런 일을 보았으니, 행(行)을 잘 단속해 방일하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비유하면 불에 달군 금가발로
머리를 장식하면
금가발이 비록 값지고 아름답긴 하나
뜨거운 불길에 결국 해를 입듯
왕위 또한 그와 같아서
삼가하며 방일하지 말아야 하리니
이 소경들이 나를 깨우치네
스스로 방종해서는 안 된다고.
이 왕위로 인하여
몸으로 큰 교만(憍慢)을 일으키고
위력으로 나라의 인민들을 핍박해
모두를 고뇌하게 한다면
뒤에 스스로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이 백천 배나 더 심하리라.
고통 받는 다른 사람을 눈으로 보고도
어떻게 스스로 편안할 수 있으랴
이들이 바로 나의 스승이라
온갖 고환(苦患)을 내게 보여주는구나.
이러한 생각을 했을 때
곧 벽지불의 도를 얻었다.
그때 왕자는 소경들에게 재물과 값진 보물을 크게 하사하고는 사문이 되어 법복을 입고 허공으로 올라가 모든 신변(神變)을 나타내고는 가까웠던 모든 이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성냄과 두려움과 근심이 없기에, 그대들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나는 사랑하는 이들과 국토와 국민을 버렸고, 원수도 친구도 재물도 보물도 전혀 없다.’
그리고 위와 같은 게송으로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