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자량론 제3권
[진실[實]과 버림[捨] 및 적정[寂]과 지혜[智]]
다시 그 밖의 스승의 생각으로는
모든 깨달음의 자량은
진실[實]과 버림[捨] 및 적정[寂]과 지혜[智]의
네 가지 처소에 포섭되는 바이다.
또 한 논사(論師)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체 보리의 자량은 모두 진실한 곳[實處]ㆍ버리는 곳[捨處]ㆍ적정한 곳[寂處]ㆍ지혜로운 곳[智處]에 포섭되는 바이다.’
진실이란 허망하지 않은 모습이며, 진실은 곧 계(戒)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시라바라밀로 삼는다.
버림은 곧 보시이다. 그러므로 버리는 곳[捨處]을 다나바라밀로 삼는다.
적정이란 곧 마음이 혼탁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혼탁하지 않으면 애호하는 일과 애호하지 않는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정한 곳[寂處]을 찬제바라밀과 선나바라밀로 삼는다.
지혜로운 곳[智處]을 또한 반야바라밀로 삼는다.
비리야바라밀은 두루 여러 곳에 들어가되 정진하지 않으면 곧 모든 곳에서 성취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비리야바라밀은 모든 일을 성취시킨다.
그러므로 일체의 자량은 모두 이 네 곳에 들어간다.
[자(慈)와 비(悲)]
【문】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자(慈)의 자량으로 걸림이 없는 마음을 얻고, 버림[捨]의 자량으로 증오와 애호를 단절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자(慈)와 비(悲)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대비(大悲)는 골수(骨髓)를 사무쳐서
모든 중생의 의지가 되나니,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고
자(慈)는 일체에 보편하다.
생사의 험한 길에 들어가면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여러 세계에 떨어지면서 악하고 삿된 그물에 머물고 어리석음의 숲에 덮여 삿된 길[邪徑]과 그릇된 길[非道]을 가는 것이 마치 눈이 어두운 장님이 출리(出離)가 아닌 가운데 보면서도 출리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늙고ㆍ병들고ㆍ죽고ㆍ근심하고ㆍ슬퍼하고ㆍ괴로워하고ㆍ번뇌하는 모든 도적에게 붙잡혀서 악마의 의지가 행해지는 숲에 들어가 부처님의 뜻[佛意]에서 멀어지는 자가 된다.
보살은 대비(大悲)로 자신의 피부와 살점 및 근육을 뚫어 골수에 사무치기까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의지처[依處]가 됨으로서 이 중생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나고 죽는 광야와 험난한 나쁜 길을 벗어나게 하여 일체지(一切智)의 성(城)과 두려움 없는 궁전[無畏宮]에 안치시키고자 한다.
비유하면 장자(長者)가 유일한 복스런 자식에게 질병의 괴로움이 닥쳐오자 사랑이 피부와 살을 뚫고 골수에 들어갈 때까지 오로지 언젠가는 그 병이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비(悲)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오직 괴로운 중생에게 일어나며, 자(慈)는 널리 일체중생에게 일어난다.
또다시 자(慈)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서 걸림이 없는 마음을 얻고, 비(悲) 때문에 나고 죽는 속에서도 피곤하여 싫어함이 없다.
또 자(慈)는 선한 사람속에서 생기고, 비(悲)는 선하지 않은 사람 속에서 생긴다.
또 보살은 자(慈)가 증장하므로 자기의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아서 대자를 낳고, 비(悲)가 증장하므로 모든 지절(支節)과 목숨을 버려서 대비를 낳는다.
[큰 기쁨[大喜]]
만약 부처님의 공덕을 사념하고
또 부처님의 신변(神變)을 듣고서
애호하고 기뻐하고 감수하고 청정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큰 기쁨[大喜]이라고 한다.
‘만약 부처님의 공덕을 사념하고’ 중에서 무엇이 부처님의 공덕인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 세존이 한량없는 천백의 구치(俱致)겁 속에서 선근(善根)을 쌓은 것이며, 몸ㆍ입ㆍ마음의 업을 수호하지 않은 것이며,
다섯 가지 마땅히 알아야 할 것 중에서 의심을 단절한 것이며,
네 가지의 대답하기 난처한 것 중에서 실수가 없는 것이며,
서른일곱 가지 보리를 보조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며,
열두 지분[十二分: 十二支緣起]으로 연기하여 생하는 것 중에서 인연을 깨달은 것이며,
아홉 가지의 가르침[九敎]을 가르친 것이며,
네 가지의 주지(住持)를 구족한 것이며,
네 가지 한량없음[四無量]을 획득한 것이며,
여섯 바라밀[六波羅蜜]을 만족한 것이며,
보살 십지(菩薩十地)를 설한 것이며,
출세간의 다섯 무리[出世五衆]를 성취하여 만족한 것이며,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ㆍ열 가지 힘[十力]ㆍ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부처님의 법[十八不共佛法]을 구족한 것이며,
한계가 없는 경계이며, 자신의 마음을 자재로 굴리는 것이며,
법에 싫증을 내거나 만족하지 않는 것이며,
금강(金剛) 같은 삼마지(三摩地)를 얻은 것이며,
허망하게 법을 설하지 않은 것이며, 법을 파괴함이 없는 것이며,
세간을 지도하는 스승이며, 정수리[頂]를 보는 일이 없는 것이며,
더불어 동등함이 없는 것이며, 능히 수승함[能勝]이 없는 것이며, 불가사의한 법이며,
대자(大慈)ㆍ대비(大悲)ㆍ대희(大喜)ㆍ대사(大捨)를 얻은 것이며,
백 가지 복된 모습이며, 한량없는 선근이며,
한계가 없는 공덕이며, 한량이 없는 공덕이며,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며, 분별할 수 없는 공덕이며, 희유한 공덕이며, 함께할 수 없는 공덕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사념한다’고 한다.
‘모든 부처님의 신변(神變)을 듣고서’에 대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모든 중생을 교화하므로 신통변화를 일으킨다.
마땅히 제도하여야 할 중생에 따라서, 중생의 몸에 따라서, 그 형상과 분량[形量]ㆍ길고 짧음[長短]ㆍ넓고 좁음[廣狹]에 따라서, 그 색의 부류[色類]가 갖가지로 특수하게 차별되는 것에 따라서, 그 음성이 청정하게 분별되는 것에 따라서 일으키는데,
모든 부처님 세존은 갖가지 희유한 신통을 통해 그 행하는 바대로, 그 믿음과 욕망하는 바대로 저 각각의 방편에 따른 차별의 신통변화로써 그를 교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듣고 나서,
“애호하고ㆍ기뻐하고ㆍ감수하고ㆍ청정한 것을 큰 기쁨[大喜]이라고 이름한다” 중에서,
마음이 용열(勇悅)한 것을 애호[愛]라고 이름하며,
애호하는 마음이 몸에 두루한 것을 기쁨[喜]이라고 이름하며,
기뻐하는 마음이 즐거움[樂]을 자각하는 것을 감수[受]라고 이름하며,
즐거움을 감수할 때에 바르게 깨달은 자[正覺者]의 큰 신통과 덕(德)을 염(念)하여서 그 마음이 혼탁하지 않은 것을 청정[淨]이라고 이름하며,
그 마음이 청정해질 때 기뻐하는 마음이 충만한 것을 큰 기쁨[大喜]이라고 이름한다.
저 얼마 안 되는 승[少分乘]에 오르는 자에게 비록 기쁨이 있어도 함께하지 않으므로 큰 기쁨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