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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각부역(三角貿易)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은 자유에 못지않게 더 절박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임자 없는 무한한 땅이었다. 일직이 건너와 해안가 좋은 땅을 차지한 사람들은 그래도 운이 좋았다.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는 울창한 숲과 돌로 뒤덮인 박토들뿐이었다.
막막하기는 했지만 급선무는 눈비를 피할 오두막을 마련하는 일이요, 그리고는 주변의 숲을 비어내고 돌무더기를 치워 경작지를 넓혀 나갔다. 그곳에 옥수수와 밀을 심었다. 첫 수확을 할 때까지는 야생 칠면조, 사슴, 물고기 등을 잡아 연명했다. 옷은 사슴, 양가죽을 대충 꿰매어 걸쳤다. 정말 가혹한 삶이 아닐 수 없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삶속에서도 이들은 살아남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군 땅과 삶에 터전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들은 자연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자립심으로 굳어져 있었다. 이들의 통나무집과 개간한 자영 농토들이 점점이 들어서면서 신대륙은 여기 저기 사람이 살만한 땅으로 변해갔다.
이렇게 최소한의 삶의 기초가 해결되자 이민자들은 다양한 경제 활로를 찾게 되었다. 자연환경이 남과 북이 다르듯 결과도 달랐다.
북부는 험준한 산지가 많아 농업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울창한 산림자원과 풍부한 해산 자원이 있었다. 지천으로 널린 질 좋은 참나무와 소나무는 배를 만들기에 안석마춤이었으니 자연적으로 크고 작은 조선소가 세워지고 거기서 만들어진 배들로 고기잡이로, 무역으로 바다를 누비니 자연적으로 큰돈을 번 인물들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무역은 초창기는 생필품 위주에서 점차 밀무역(密貿易-영국은 식민지인들의 허가받지 않은 무역행위를 엄격히 규제했다))이 성행했다. 이른바 삼각무역(Triangular Trade)이라는 것인데, 그 과정은 좀 복잡했다. 우선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빚은 럼주(Rum)를 배에 가득실고 아프리카 해안으로 가서 비싼 값에 팔아(럼주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높아 공급이 수요를 따를 수 없어 값이 높았다) 그 돈으로 노예를 사들이고 그 노예들을 럼주를 실고 갔던 배에 실어 서인도 제도로 가서 이들을 농장에 팔아넘기고, 그 돈으로 다시 럼주의 원료인 당밀을 사서 뉴잉글래드로 돌아오면 부두에는 양조장 주인들이 줄을 서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삼각무역은 엄청난 이윤을 남겼으므로 식민지인들은 너도 나도 이사업에 뛰어들었고, 뉴욕과 볼티모어는 럼주의 유통기지로 변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1697년에는 영국 아프리카회사가 독점하던 노예의 무역을 자유화함으로 식민지와 아프리카는 노예직거래가 큰 규모로 늘어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선박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게 됨으로 뉴잉글랜드 연안을 따라 대규모 조선소가 생겨나고 내륙에서는 양조업이 번성하는 등 파급효과가 컸다.
그러나 삼각무역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영국의 대외무역 기반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영국은 이를 규제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733년의 당밀법, 1764년에 설탕법은 서인도제도로부터 당밀과 설탕의 수입을 규제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당연히 이런 규제를 지키지 않았으며 식민지인과 영국과는 갈등이 깊어지고 훗날 독립전쟁의 씨앗으로 남게 되었다.
아무튼 이런 환경 속에서 북부의 무역업, 어업, 상업이 발달했고 보스턴, 뉴욕 같은 항구들이 번창했다. 그러니 북부는 자영농을 제외한 식민지인들이 대부분 항구가 가까운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다.
지형적으로 북부와 전연 다른 남부는 산지가 드물고 한 없이 펼쳐진 들판들은 자연적으로 농업이 주산업이 되게 하였다. 교통이 편리하고 인력 수급이 용이한 해안에는 대규모 플렌테이션(기업 형 대규모 농장)들이 늘어섰고 내륙에는 주로 나중에 이민 온 사람들과 농장에서 나와 독립한 사람들이 개간하여 터를 잡았다. 버지니아와 메릴렌드의 농장들은 담배만을, 캘로라이나와 조지아에서는 담배 외에도 쌀과 염료작물을 재배해 수출했다.(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남부의 대규모 목화를 재배하는 것은 아주그 후의 일이다) 담배, 쌀, 염료는 모두가 수출용이었음으로 해상무역과 조선업도 함께 발전했다. 그래서 사우스 캘로라이나의 주도인 찰스턴은 농산물의 집산과 수출항으로 크게 번영했다.
남부와 북부 간 이런 경제구조의 차이는 사회, 문화, 정치 등 삶에 다른 영역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으며. 남부는 점차 세월이 더함에 따라 대농장주들은 귀족화 되어갔고, 그들의 삶의 모습은 영국의 귀족의 사치함을 뛰어넘을 지경이었다. 반면에 자영농과 노동자들은 엄청난 육체적 노동과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거기에다 노예들의 상황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 비해 북부는 겉으로는 남부에 비해 훨씬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도회적인 분위기 었지 만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높낮이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인 것만은 분명했다.
남부와 북부는 경제구조의 차이로 사회, 문화, 정치는 물론 삶의 방식자체가 달랐다. 그러니 불신과 충돌이 잦아졌고, 그의 연장선상에서 남북전쟁을 겪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남과 북은 정치, 경제는 물론 개인의 삶의 형태에도 서로 다른 전통이 지배하고 있다.
2) 최초의 미국인
미국사중에는 18세기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이유는 이 기간에 기억에 남을 만한 큰 사건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평온함 뒤에서는 꾸준이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대륙에는 인구가 늘고 산업이 발전하고 소득이 높아지는 가운데, 곳곳에 학교가 세워지고 대학들을 중심으로 문학, 철학, 예술, 과학의 진흥을 가져왔다. 근면, 용기, 자유를 추구하는 신 대륙적 삶에 방식과 가치가 이 시기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시기가 독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성공하기위한 준비의 시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은 이 시대 신대륙의 정신과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아주 어려운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오직 근면과 성실함 하나만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완벽한 성취를 이룬 그를 미국의 역사는 “최초의 미국인”이라 칭하며 존경을 표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1706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사이어 프랭클린은 양초와 비누를 만들어 파는 영세 자영업자였다. 그는 두 번의 결혼으로 1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벤자민은 두 번째 부인 애비아 풀저가 낳은 10명의 자녀 중 8번째였다.
어린 벤자민은 변변한 교육을 받을 처지가 못 되었다. 17세까지 아버지를 도와 일했다. 17세가 되자 그는 자신의 미래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필라델피아로 가 인쇄소에서 힘든 노동을 하면서 밤에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의 성실함은 주변에서 인정을 받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인쇄소를 차렸고 거기서 번 돈으로 <펜실바니아 가제트>라는 신문을 사들여 단기간에 이를 펜실바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 만들었다.
1732년에는 자신의 인쇄소에서 역사적인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을 펴냈다. 다가올 한해의 날씨, 생활정보, 간단한 지식, 삶의 지혜들을 다룬 일종의 종합 안내서인데, 나오자마자 식민지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을 1958년까지 발행되었으며, 매년 1만부 이상 팔린 당시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을 통해 프랭크린은 큰돈을 벌었고 그의 이름을 식민지 전역에 알리는 호기가 되었다. ‘한 푼을 저축을 해야 한 푼이라도 번다’ ‘빈 수래가 요란하다’ 등의 경구를 프랭크린이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서 유행시킨 경구다.
프랭크린은 이렇게 모은 돈을 도서관, 학교, 병원, 소방서 같은 공공시설을 짓는데 아낌없이 투자하고 1736년 식민지 최초의 주민 자치소방서인 유니언 소방사를 설립했고, 1751년에는 필라델피아 대학(오늘날의 펜실베니아 대학)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총장으로 부임했다.
다 초점 안경, 피뢰침, 등 지금도 우리들에게 없어서는 아니 되는 물건들을 발명했고 기타 자연과학을 연구해 일가를 이루었다. 이런 그의 뛰어난 업적으로 하버드, 예일, 윌리엄엔메리,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 왕립학술원 명예회원이 되었다. 이제 2년밖에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프랭크린을 프랭크린 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747년에는 인쇄업을 접고 정치에 참여 1751년에 펜실베니아주 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그는 우체국, 공공병원, 군대의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1757년 펜실베니아 식민지 사절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에 부과한 인지세의 철폐를 주장했다.
프랭클린은 열렬한 식민지 독립의 지지자였다. 그는 일직부터 식민지의 독립을 위해 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최초의 미국인’이란 영예로운 별명은 이때에 얻은 것이다. 1775년 보스턴에서의 무력충돌을 시작으로 식민지 독립 운동이 본격화하면서 그는 선봉에서서 운동을 이끌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서명하고 신생 미합중국 대사로 프랑스에 부임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과 참전을 이끌어 냈다.(독립전쟁에서) 그는 1785년 대사의 임무를 끝내고 귀국, 80의 노령이었으나 1787년 제헌의회의 펜실베니아 주 대표로 참석 헌법제정에 이바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179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2만 여명의 군중이 모여 그의 마지막을 애도했다.
프랭크린은 18세기 신대륙의 역사와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사업가이자 과학자, 정치가, 외교관이며 문필가였다.
3) 프렌치-인디언 전쟁(1755-1763)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갈등(영불전쟁)
신대륙에 식민지 건설의 러시가 이뤄질 때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도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영국이 뉴잉글랜드 남쪽을, 프랑스는 북쪽을 선택하여 의좋게 나누어 진출하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진출한 북쪽은 너무 춥고 땅도 너무 척박해 자연적으로 5대호 남쪽의 땅을 넘보게 되었고, 영국은 각 식민지마다 밀려드는 이민들로 새로운 땅이 필요했는데, 남쪽은 애팔래치아 산맥이 가로 막고 있어 유일하게 이들에게 진출할 수 있는 활로는 오직 오하이오 계곡뿐이었다.
싸움은 버지니아, 오하이오 주식회사가 영국정부로부터 오하이오 계곡의 식민 특허장을 받아들고 이민자들과 함께 진출함으로, 프랑스는 이를 “부당한 영토 침해‘로 간주하고 군대를 파견 곳곳에 요새를 쌓고 이주민들의 진출을 무력으로 막았다. 이에 맞서 소규모 원정대를 파견했으나 이들은 도착 즉시 프랑스군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훗날 독립전쟁의 영웅인 조지 워싱턴이 22살의 나이로 이 원정대 대장으로 참전했다.
본래 영국은 프랑스의 북미 진출에 불안해하던 차에 오하이오 계곡의 이민들이 프랑스군의 방해로 정착이 어려워지자 즉시 대규모 정규군을 파견 프랑스와 일전을 불사하게 되니 이렇게 해서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개전 초기에는 프랑스군의 연전연승으로 1755년6월19일 두케인 요새(오늘의 피츠버그)에서 영국군 1377명 중 977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했다. 이 후에도 1757년 헨리 요새전투, 1758년 타이곤테로가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당시 영국은 7년 전쟁(1756-1763)이라는 유럽의 분쟁에 휘말려 신대륙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프랑스도 형편은 비슷했다. 1758년에 윌리엄 피트가 영국 재상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그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앞으로 영국의 신대륙 경영에 치명적으로 중요하다고 결론, 영국의 최정예 부대를 추가로 파견 불리한 전황을 반전시켜, 영국군은 1759년부터 프랑스군을 몰아붙여 결국 1759년 9월 퀘벡에서 건곤일척의 최후의 일전을 벌여 승리했다.
싸움은 처음부터 프랑스군에 불리했다. 수적으로는 불리했지만 영국군은 잘 훈련된 정예부대였고 지휘관 역시(제임스 울프 장군) 젊고 유능하고 용감했다. 게다가 영국군은 세인트 로렌스강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난공불낙의 프랑tm군 퀘벡요새도 영국군에게 함락됨으로 대패했다. 전투 중에 용감하고 유능한 제임스 울프 장군이 전사했다.
퀘벡전투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나고, 다음해에는 최후의 요새인 몬트리올이 함락되었고, 캐나다 총독은 캐나다에 프랑스가 갖고 있던 모든 영토를 영국에 넘긴다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식민지 문제가 최종 타결된 것은 유럽에서 7년 전쟁이 끝나고 열린 파리 강화회의(1763)에서였다. 캐나다는 뉴펀드랜드 연안과 카리브 연안의 몇몇 섬을 제외한 신대륙의 모든 식민지를 영국에 빼앗겼다. 7년 전쟁 때 프랑스편을 들었던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겨주는 대신 루이지에나와 그 서쪽에 프랑스 식민지를 넘겨받았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규모면에서는 그리 큰 전쟁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우선 전쟁의 위험 앞에서 식민지인들이 처음으로 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점이다. 본국정부의 중제가 있기는 했지만 1754년 6월에 식민지 대표들은 뉴욕 주 올버니에 모여 상호연맹의 절대적 필요성을 확인하고, 벤자민 프랠크린이 기초한 연맹규약을 채택했다. 비록 각 식민지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 규약은 중앙정부의 조세권과 방위권을 명시함으로서 훗날 세워질 독립국가의 모습의 대계를 그렸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승리로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간섭이 본격화 되었다는 점이다. 전쟁 중 식민지들은 의용군도 보내고 물자도 공급하는 등 나름대로 이바지 했으나,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기본적으로 영국 단독으로 치러낸 전쟁이었다. 막대한 전쟁비용을 지출한 영국은 전쟁이 끝나자 당연히 식민지에 보상을 요구하면서 간섭을 강화했고, 여기서 비롯된 갈등이 결국 식민지의 독립선언과 함께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조지 워싱턴, 이스라엘 퍼트넘 같은 식민지의 많은 군인들이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얻은 풍부한 전쟁경험으로 미국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일궈냄으로 미국의 독립을 확실하게 한 영웅들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영국은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자신들의 피를 흘려 싸워 승리하여 식민지들의 독립의 길을 열어준 것에 불과했다.
첫댓글 신대륙으로 발견되여 탐험에 이어 개척민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그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니
산업이 발전하게 되고 도시가 형성되니 그에 맞는 질서가 요구되여 미국이라는 국가가 태동되기
시작되였다고 생각이 되여지네요.앞으로 이야기가 더 재미있게 전개되리라 생각하니 더욱 기대가 됩니다.
장문의 글을 올려주시는 노고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