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석보리심론 제2권
6. 사마디(1)
[지혜와 광명]
『보운경(寶雲經)』에서 설하였다.
“모든 올바른 수행자는 지혜의 광명이 있다. 중간(中間)에 태어나도 그 올바름은 무너지지 않는다. 지혜의 출생을 말미암아 닦아 지은 것들이 출생하여 성취된다.
비유하자면 땅 속에서 깨끗하지 못한 것이 두루 가득하다면 태어날 모든 존재가 어떻게 능히 생겨나겠는가?
모든 수행도 또한 마찬가지다. 지과(智果)를 밝게 깨달아야 진실의 성품 가운데서 이치대로 이치를 출현하게 된다.”
『삼마지왕경(三摩地王經)』에서 설하였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러 종류의 추구함을 일으킨다면, 그 일으킨 마음에 집착함과 의지함이 있다. 그러므로 만약에 저 진실한 수소성혜를 증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가장 먼저 사마타(奢摩他)를 닦아서 상응하는 수승한 법을 마음에 편안하게 머물도록 하는데, 마치 움직임이 그친 물처럼 해야 한다.
만일 마음에 움직임이 있을 경우 사마타가 아니면 능히 거두어들여 머무를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등인심(等引心)에 머무르면 능히 여실히 안다.
만약에 산란한 마음의 상태라면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마타를 닦을 때에는 모든 얻을 것과 바라는 바를 버려서 평등함에 머물러야 한다.
체(體) 가운데 고통 등을 다 버려서 없애버리고 청정한 계율에 편안히 머물면서 정진을 일으킨다면 빨리 성취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화합해탈경(和合解脫經)』에서 설하였다.
“먼저 보시 등의 수승한 행을 닦고, 다음에 청정한 계를 지님을 닦는다.
그런 연후에 사마타행에 머문다.
만약에 이 사마타에 머물고자 한다면 모든 분위(分位)에 따라야 한다.
먼저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에게 마땅히 귀명(歸命)하고 참회하면서 수희(隨喜)해야 한다.
다음으로 마땅히 대비심을 일으켜 널리 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생각을 내어야 한다.
편안한 자리에 가부좌하고 앉아서 몸을 곧바로 하고 단정히 머무르면 정념(正念)이 현전하고, 삼마지(三摩地)를 끌어 일으키면 상응함이 현전한다.
처음부터 전주(專注)해서 응하는 대로 관찰하고, 더 나아가 여러 종류의 반연하는 바와 평등한 일을 관찰한다.
그리고 번잡한 마음을 거두어들여 고요히 머무르는 것이다.
다시 총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면, 색과 무색 두 종류에서 마땅히 산란과 허물을 여의어서 총체적으로 그것과 상응하여 반연하는 바가 수승한 작의(作意) 내지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의 모든 일들을 일으키니, 일체 분별하지 않으면 곧 청정함을 얻는다.”
모든 반연하는 바의 행상을 자세히 설한 것은 『화합해탈경』의 제18 상응분(相應分)과 같다.
세존께서는 유정의 일들인 색 등의 분별과 일체사(一切事)의 분별을 거두어들이신다.
간략한 가운데 행상(行相)을 자세히 설한 것은 아비달마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뜻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을 관찰하고 난 뒤 허물을 여의어 다 섭수함으로서 마음의 상속으로 하여금 수승하게 진행시켜 수행을 증장케 하는 것이다.
혹시 마음에 탐욕 등이 생기면, 이때 마땅히 부정등관(不淨等觀)을 지어서 그쳐서 쉼[止息]을 얻는다.
또한 다시 이전[前]을 넘어서 수승하게 나아가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 부정등관의 온갖 행상(行相)은 번잡함을 두려워해서 또한 그친다.
혹 그 마음이 수승하게 나아가 승의락(勝義樂)을 일으키지 못하면, 또한 이는 산란의 허물이다.
이때에 마땅히 삼마지의 공덕을 관해서 승의락을 일으키면 곧 승의락이 아닌 것을 능히 그쳐 쉬게 한다.
만약 그 때에 혼침과 수면이 생기한다면 마땅히 부처님 등의 공덕인 수승하게 기쁜 일들을 관해야 하나니, 그것은 능히 그쳐 쉴 수 있다.
다시 이와 같이 반연한 것 중에서 응하는 대로 견고하게 거두어서 흩어지지 않으면 곧 상응함을 얻을 것이다.
또한 다시 만일 앞의 마음이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함에 따라 뒤의 마음이 높게 들떠서 일어난다면, 이때에는 마땅히 무상등관(無常等觀)을 지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반연하는 것 속에서 마땅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도록 해서 한결같은 집중으로 고요히 머물러야만 높고 낮은 법을 여의고 평등을 행해서 마음이 청정함을 얻는다.
저 깨달음을 일으킴은 산란 등의 원인이므로 모두 버린다. 혹 어떤 사람이 진실로 깨달음을 일으키면 그 마음을 산란하게 지어도 반연한 것에 움직임이 없으리니, 이와 같아야 바라는 바와 행한 바에 수승한 정(定)이 상응함을 얻을 것이다.
이때에는 마땅히 사마타가 이와 같은 것들을 이룸을 알아야 하며, 모든 사마타의 공상(共相)이 이른바 심일경성(心一境性) 중의 자성임을 알아야 한다.
저 사마타가 반연한 바는 결정코 이와 같으니, 이러한 사마타법은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 등의 경에서 설하신 것이다.
[사마타를 닦는 아홉 종류의 법]
다음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사마타를 닦는 데는 아홉 종류의 법이 있다.
첫째는 제(除)이며,
둘째는 정제(正除),
셋째는 분위제(分位除),
넷째는 근제(近除)이며,
다섯째는 조복(調伏)이며,
여섯째는 지(止)이며,
일곱째는 근지(近止)이며,
여덟째는 일향소작(一向所作)이며,
아홉째는 지지(知止)이다.
이러한 아홉 종류의 행상은 어떠한가?
이 아홉의 법에 두루하는 것을 이름하여 제(除)라 하니, 반연하는 것 중에서 번잡한 마음이 두루 제거되는 것이다.
반연하는 것 중에 상속하여 전전하는 것이 분위제이다.
산란함이 현전하나 모두 꺾어 굴복시키는 것이 근제이다.
산란함을 여의고 다시 수승함이 현전할 때 반연하는 바를 두루 제거하는 것이 조복이다.
만일 애착이 일어날 때 굴복시키므로 이름하여 지(止)라고 한다.
산란과 과실이 현전하면 승의락을 일으키지 않아도 능히 그치므로 근지라 한다.
혼침과 수면 등이 일어날 때 빨리 떠나 보내버리는 것이 일향소작(一向所作)이다.
반연 속에서 움직임이 없음을 얻고 그런 연후에 한결같이 집중하여 그침[止]과 상응함을 얻는다. 이 그침을 얻은 후에 마음이 평등함[捨]에 머물게 되는데, 이것을 지지(知止)라 한다.
이러한 뜻은 성 미륵보살께서 설하신 것과 같다.
[삼마지를 닦을 때의 여섯 종류의 과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삼마지를 닦을 때에 여섯 종류의 과실이 있다.
첫째가 해태(懈怠)이며,
둘째는 반연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所緣忘失],
셋째는 가라앉는 것[沈下],
넷째는 높이 들뜨는 것[高擧],
다섯째는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無發悟],
여섯째가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發悟]이다.
[여덟 종류로 끊는 행]
이러한 여섯 가지 과실이 생할 때에 마땅히 여덟 종류로 끊는 행을 일으켜서 대치(對治)해야 한다.
어떠한 것들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믿음[信]이며,
둘째는 하고자 함[欲]이며,
셋째는 부지런함[勤]이며,
넷째는 가벼워 편안함[輕安]이며,
다섯째는 기억함[念]이며,
여섯째는 바르게 앎[正知]이며,
일곱째는 사유[思]이며,
여덟째는 평등함[捨]이다.
이러한 것들의 대치행상(對治行相)은 어떠한가?
믿음[信] 등의 네 법은 해태를 대치한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삼마지의 공덕으로 요컨대 정신순상(正信順相)을 증대시킴을 갖춤이니, 그에 상응하면 수승한 희망을 일으킨다.
희망할 때에 정진의 행을 일으키고, 일으킨 정진으로 몸과 마음이 용맹해진 후에 경안(輕安)을 얻으니, 이 때문에 대치(對治)인 것이다.
기억[念]은 반연하는 바의 망실(忘失)을 대치하니, 이러한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르게 아는 것[正知]으로 가라앉는 것과 높게 들뜨는 것을 대치한다. 이른바 올바른 앎으로 바른 관찰을 일으켜서 능히 높고 낮은 두 법을 그쳐 쉬게 하니, 이 때문에 대치인 것이다.
사유[思]는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대치하니, 이러한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평등함[捨]은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을 대치한다. 앞의 높고 낮음으로 말미암아 그쳐 쉼을 얻은 후에 마음이 정직(正直)에 머무르는 것이 곧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대치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단행(斷行)이 여섯 종류의 과실을 대치한 후에야 가장 높은 삼마지 사업이 곧 성취되면서 신족(神足)의 공덕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만일 여덟 가지 단행(斷行)을 구족하면 곧 능히 네 종류의 신족[四種神足]을 일으킬 수 있으니, 심일경성(心一境性)으로 수승하고 높은 사업이 올바른 상응을 얻으면 비로소 선정해탈법문에 증입(證入)하여 일체의 가장 수승한 공덕이 원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