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보리심경론 상권
6. 찬제바라밀품(羼提波羅蜜品)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인욕(忍辱)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인욕이 자리와 이타, 그리고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인욕은 바로 보리의 도를 능히 장엄한다.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이 고뇌를 여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욕을 닦는 것이다.
즉 인욕을 닦는 자는 마음이 항상 일체 중생에 대해 겸손하고,
강압과 교만을 버리고 행하지 않으며,
추악한 이를 보고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고,
말은 항상 부드럽고 선을 닦을 것을 권유해 교화하며,
분노와 화합하여 참음[和忍]의 과보의 차별을 능히 잘 분별하여 설하니,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인욕을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욕을 닦기 때문에 모든 악을 멀리 여의어서 몸과 마음이 안락하게 되니,
이를 일러 ‘자리’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그들을 모두 화순(和順)하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가 닦은 위없이 높은 대인(大忍)으로써 온갖 중생을 교화해서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또한 인욕을 닦음으로 인해 단정(端政)을 획득해서 사람들에게 으뜸가는 공경을 받고,
나아가 부처님의 지극히 미묘한 상호를 증득하게 되니,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인욕이다.
무엇을 신인(身忍)이라고 하는가?
만약 다른 이가 악한 마음으로 침입하여 훼손하고 때리고 나아가 상해를 입히더라도 그것을 모두 참고 감수할 수 있으며,
온갖 중생들이 위험과 핍박을 당해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몸으로 그를 대신하면서도 괴로워하여 회피하는 일이 없는 것,
이것을 일러 ‘신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구인(口忍)이라고 하는가?
만약 꾸짖는 자를 보더라도 묵묵히 감수할 뿐 앙갚음하지 않으며,
혹은 이치에 맞지 않은 일로 와서 엄하게 꾸짖는 자를 보더라도 마땅히 부드러운 말로 달래고,
혹은 어떤 이가 무고로 제멋대로 비방하더라도 그것을 마땅히 모두 참고 감수하는 것,
이것을 일러 ‘구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의인(意忍)이라고 하는가?
미워하는 이를 보더라도 마음에 한(限)을 품지 않으며,
혹은 번뇌를 촉발시키는 경우가 있더라도 마음이 산란되지 않고,
혹은 꾸짖고 훼손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마음에 역시 두려워함이 없는 것,
이것을 일러 ‘의인’이라고 한다.
세간에서 때리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실제적으로 때리는 것[實打]이며,
둘째는 제멋대로 때리는 것[橫打]이다.
만약 죄과가 있든지 혹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혐의를 받아 맞았다면, 그는 마땅히 감로를 마시듯이 스스로 참고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때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능히 나를 잘 가르치고 조복시켜 나로 하여금 온갖 죄과를 여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악한 마음에서 제멋대로 나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마땅히
‘나는 지금은 죄가 없지만, 이건 과거의 숙업이 초래한 바이므로 역시 마땅히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이며,
또한 마땅히
‘이 몸은 사대(四大)가 일시 화합된 것이고 오중(五衆: 오온)이 인연 화합한 것이니, 누가 맞는 자[受打者]일까?’라고 하거나, 또는
‘앞에서 때리는 사람이 어리석은 이처럼 보이고 미치광이처럼 보여서 나는 마땅히 그를 불쌍히 여기거늘 어찌 참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꾸짖는 것에도 역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실제적으로 꾸짖는 것[實罵]이며,
둘째는 거짓되게 꾸짖는 것[虛罵]이다.
만약 죄과가 있어서 실제적으로 꾸짖었다면 나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죄과가 없는데도 거짓되게 꾸짖었다면, 나는 일찍이 꾸짖음을 들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 같은 꾸짖음은 이를테면 메아리 소리와 같고 바람이 지나가는 것과 같아서 나에게 손해될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그러한 꾸짖음을 참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성내는 것[瞋]도 역시 그러하니,
타인이 와서 나에게 성을 내더라도 나는 마땅히 참고 감수해야 한다.
만약 그에게 성을 낸다면 미래세에 마땅히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크나큰 고뇌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나의 몸이 설혹 절단되어 떨어져 나가더라도 마땅히 성을 내지 말아야 하며,
마땅히 오가는 업의 인연을 깊이 관찰해야 할 것이며,
마땅히 자비를 닦아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적은 괴로움을 능히 참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능히 스스로 마음을 조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능히 중생을 조복하여 일체의 악법(惡法)으로부터 해탈시켜서 위없이 높은 과보를 성취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어떤 지인(智人)이 인욕을 즐거이 닦았다면, 이 사람은 늘 얼굴과 모양새가 단정하고 많은 재물과 보배를 획득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보고서 환희하고 공경해 받들며 복종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관찰해야 하나니, 만약 어떤 사람의 형태가 쇠잔하고 안색이 추악하며 온갖 감관이 결여되어 있고 재물이 궁핍하다면, 이는 성냄의 인연 때문에 얻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말미암아 지자(智者)는 마땅히 인욕을 깊이 닦아야 하는 것이다.
참음, 즉 인욕을 낳는 인연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나[我]와 나의 것[我所]의 상(相)을 관찰하지 않는 것이며,
두 번째는 종성(種姓)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세 번째는 교만을 깨트려 제거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악이 닥쳐오더라도 앙갚음하지 않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무상(無常)의 상(想)을 관하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자비를 닦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마음이 방일하지 않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배고픔이나 목마름에 대해 괴롭고 즐겁다는 등의 느낌을 버리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성냄을 끊고 제거하는 것이며,
열 번째는 지혜를 닦아 익히는 것이다.
즉 만약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열 가지 일을 능히 성취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는 능히 인욕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보살마하살이 청정필경인(淸淨畢竟忍)을 닦을 때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무작(無作)에 들어가면, 보고 지각하고 원하고 짓는 것과 화합하지 않아서 공ㆍ무상ㆍ무원ㆍ무작에도 기대어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온갖 보고 지각하고 원하고 짓는 것은 모두 공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인욕이 바로 둘 없는 모습[無二相]의 인욕으로서 소위 ‘청정필경인’이라고 한다.
혹은 결(結:번뇌)의 다함[盡]에 들거나 적멸(寂滅)에 들어가면, ‘결’에 의한 생사와 화합하지 않고 ‘결의 다함’이나 적멸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갖 결에 의한 생사는 공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인욕이 바로 둘 없는 모습의 인욕으로서 소위 ‘청정필경인’이라고 한다.
혹은 인욕의 자성이 스스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며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라면, 출현함이 있지 않아서 파괴할 수도 없다.
파괴할 수 없는 것이란 바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인욕이 바로 둘 없는 모습의 인욕으로서 소위 ‘청정필경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작(無作)ㆍ비작(非作)이라서 의지해 집착하는 것도 없으며, 분별도 없고 장엄도 없고 닦아서 다스리거나 발진(發進)하는 일도 없어서 끝내 생(生)을 이루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인욕이 바로 무생인(無生忍)이다.
나아가 보살은 바로 이와 같은 인욕을 수행하여 수기(受記)된 인[忍]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지만 보살마하살은 인욕을 수행하면서도 그것의 성상(性相)이 다 공(空)이라고 여기니, 더 이상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찬제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