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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2권
5. 발심품(發心品)
[발심의 모양]
[釋] 이와 같이 이미 보살의 종성을 분별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보리심을 낸 모양에 대해 분별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용맹과 방편과
이익과 출리(出離),
이 네 가지 큰 것이 나타내는 세 공덕은
두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釋] 보살이 발심하는 데는 네 가지의 큰 것이 있다.
첫째는 용맹이 큰 것이니, 말하자면 큰 서원으로 정진하여서 매우 깊어 짓기 어려운 것을 긴 세월 동안 수순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이 큰 것이니, 말하자면 큰 서원의 갑옷을 입고서 항시 방편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이익이 큰 것이니, 말하자면 모든 때에 자기와 남의 이익을 짓기 때문이요,
넷째는 출리(出離)가 큰 것이니, 말하자면 위가 없는 보리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또는 이 네 가지의 큰 것이 세 가지의 공덕을 나타내 보인다.
첫째와 둘째의 큰 것은 대장부(大丈夫)가 지은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요,
세 번째의 큰 것은 큰 뜻의 공덕 지음을 나타내 보였고,
네 번째의 큰 것은 과를 받는 공덕을 나타내 보였으니,
이 세 가지의 공덕은 두 가지의 뜻으로 인연을 삼는다.
즉 하나는 위가 없는 보리요, 또 하나는 모든 중생이다.
이 생각으로 말미암아서 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발심의 차별]
이미 발심하는 상(相)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발심의 차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믿어 행함과 정의(淨依)와
보로써 얻음과 장애 없음이니
발심하여 여러 지(地)를 의지하는 데는
이 네 가지의 차별이 있다.
[釋] 보살이 발심하여 여러 지(地)를 의지하는 데는 네 가지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믿고 행하는 발심이니, 말하자면 믿고 행하는 지위이다.
둘째는 정의(淨依)의 발심이니, 말하자면 앞의 7지(地)이다.
셋째는 보(報)를 얻는 발심이니, 말하자면 뒤의 3지이다.
넷째는 장애가 없는 발심이니, 말하자면 여래의 지위이다.
이미 차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마땅히 자세히 해석하고자 한다.
[문] 이와 같은 발심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으며, 무엇을 의지하며,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반연하며, 무엇을 타며, 무엇에 머무르며, 어떠한 장애의 어려움들이 있으며, 어떠한 공덕이 있으며, 어떠한 자기 성품이 있으며, 어떠한 것에서 출리(出離)하며, 어떠한 곳에서 끝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큰 자비와 중생을 이롭게 함과
큰 법과 장차 종지(種智)를 얻음과
뛰어난 욕심과 또한 크게 보호함과
장애를 받음과 착함을 증장함과
복과 지혜와 바라밀을 닦음과
지(地)와 지가 차며
처음 근(根)과 나중의 마침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 해석할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 보살의 발심에는 큰 자비로 근본을 삼고, 중생들을 이롭게 함으로써 의지를 삼으며, 대승의 법으로써 믿음을 삼고, 종지(種智)로써 반연함을 삼는다.
그것들을 구하기 위하여서는 뛰어난 욕망으로 타는 것을 삼으니, 무상(無上)을 타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게 보호함으로써 머무는 곳을 삼으니, 그것은 보살계(菩薩戒)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애를 받음으로써 어려움을 삼으니, 대승과 다른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착함을 증장함으로 공덕을 삼고, 복과 지혜로써 자기의 성품을 삼고, 여러 바라밀을 익힘으로써 출리를 삼으며, 지위를 얻음으로써 구경(究竟)을 삼는다.
지(地)마다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그것들과 더불어 서로 응하는 것이다.
[세속의 발심]
이와 같이 이미 자세히 분별하였으니,
다음에는 세속에 응하여[受] 발심함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벗의 힘과 인의 힘과
근본의 힘과 또한 들음의 힘,
이 네 가지의 힘이 합하여 두 가지의 발심을 하니
견고하지 못함과 견고함이다.
[釋] 남의 말을 좇아서 깨달음을 얻어 발심하는 것을 세속에 응하여 발심한다고 이른다. 이러한 발심은 네 가지의 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첫째는 벗의 힘으로 발심하거나 혹은 선지식을 얻어 수순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因)의 힘으로 발심하는 것이니, 혹은 과거에 일찍이 발심한 것이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근본의 힘으로 발심하는 것이니, 혹은 과거에 일찍이 여러 선근을 행하여서 원만(圓滿)하였기 때문이다.
넷째는 들음의 힘으로 발심하는 것이니 혹은 곳곳에서 설법할 때에 한량없는 중생들이 보리의 마음을 발하기 때문이다.
또는 선근을 익힌 자가 혹은 현재에 법답게 항상 듣고 받아 가지는 등이다.
그 네 가지의 힘으로 발심하는 것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견고한 발심이 아닌 것이니, 말하자면 벗의 힘으로 발심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견고한 발심이니, 말하자면 인(因) 등 세 가지의 힘으로 발심하기 때문이다.
[제일의의 발심]
이미 세속의 발심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제일의(第一義)의 발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정변지(正遍知)를 가까이하고
복과 지혜의 무더기를 잘 모아서
법에 있어서 분별이 없으면
가장 위인 참지혜가 생긴다.
[釋] 제일의의 발심은 세 가지의 뛰어남이 있음을 나타낸다.
첫째는 교수가 뛰어난 것이니 정변지를 가까이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수순함이 뛰어난 것이니 복과 지혜의 무더기를 잘 모으기 때문이요,
셋째는 과를 얻음이 뛰어난 것이니 무분별의 지혜를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심은 환희지(歡喜地)라고 이르니, 환희의 뛰어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뛰어남은 무엇으로써 인을 삼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법과 중생과
짓는 것과 부처님의 체이니
이 네 가지가 평등해지면
그에 따라 환희의 뛰어남을 얻는다.
[釋] 네 가지의 평등이라 함은 첫째로 법이 평등한 것이다. 즉 법이 무아(無我)임을 통달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중생 평등이니, 자기와 남이 평등한 데 이르렀기 때문이다.
셋째로 짓는 것의 평등함이니, 남의 괴로움을 다 없애는 것이 자기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넷째로 부처님의 체가 평등함이니, 법계(法界)와 내가 구별이 없음을 능히 결정적으로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뛰어난 차별]
이미 뛰어난 인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뛰어난 차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나는[生] 지위와 원(願)의 지위와
또한 용맹함과 또한 정의(淨依)와
나머지 교묘함과 나머지 출리,
여섯 가지의 뛰어남이 이와 같다.
[釋] 제일의의 발심에는 다시 여섯 가지의 뛰어남이 있다.
첫째로 태어나는 지위의 뛰어남이요,
둘째로 원(願)의 지위의 뛰어남이요,
셋째로 용맹함의 뛰어남이요,
넷째로 정의(淨依)의 뛰어남이요,
다섯째로 나머지 교묘함의 뛰어남이요,
여섯째로 나머지 출리의 뛰어남 등이다.
[문] 이 여섯 가지는 무엇을 일러 뛰어나다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태어남이 뛰어난 것은 네 가지의 뜻으로 말미암고
원이 큰 것은 열 가지가 있으며
용맹하여 항상 물러서지 아니하고
정의(淨依)에서 두 가지의 이익이 나오며
교묘한 방편으로 나머지의 지위에 나아가고
출리하여서는 잘 사유(思惟)한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도리는
순서대로 여섯 가지의 뛰어남을 이룬다.
[釋] ‘태어남이 뛰어난 것은 네 가지의 뜻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첫째는 종자가 뛰어난 것이니 대승의 법을 믿어서 종자를 삼기 때문이요,
둘째는 낳아주는 어머니가 뛰어난 것이니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낳아주는 어머니를 삼기 때문이요,
셋째는 태장(胎藏)이 뛰어난 것이니 큰 선정의 즐거움으로 태장을 삼기 때문이요,
넷째는 유모(乳母)가 뛰어난 것이니 큰 자비의 장양(長養)으로 유모를 삼기 때문이다.
‘원이 큰 것은 열 가지가 있다’는 것은 열 가지의 큰 원은 십지경(十地經)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원을 냄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용맹하여 항상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은 능히 어려운 행을 행하여 길이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淨依)에서 두 가지의 이로움이 난다’는 것은 하나는 자기가 보리에 가까웠음을 아는 것이요, 또 하나는 남을 이롭게 하는 방편을 알기 때문이다.
‘교묘한 방편으로 나머지의 지위에 나아간다’는 것은 더 높은 지위에 나아가는 방편을 얻었기 때문이다.
‘출리하여 잘 사유한다’는 것은 여러 지(地)에 머무는 가운데 건립하는 법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을 일러 사유한다고 합니까?
[답] 건립하는 것의 분제(分齊)와 같이 분별하여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별로써 또는 무분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발심의 비유]
이미 발심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비유를 말하여 이 발심을 나타내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땅과 같고 깨끗한 금과 같으며
달과 같고 불이 더욱 타오름과 같으며
함장(含藏)과 같고 보배 상자와 같으며
바다와 같고 금강(金剛)과 같으며
산과 같고 약왕(藥王)과 같으며
벗과 같고 여의주(如意珠)와 같으며
해와 같고 아름다운 음악과 같으며
임금과 같고 창고와 같으며
길과 같고 수레나 마차와 같으며
샘과 같고 기쁜 음성과 같으며
흐름과 같고 또한 구름과 같으니
발심의 비유가 이와 같다.
[釋] 이와 같이 발심은 여러 비유들과 더불어 어떠한 뜻에서 서로 같은가?
[답] 비유에서 땅과 같다고 함은 최초의 발심이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을 능히 내고 가지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깨끗한 금과 같다는 것은 서로 응하는 발심이 이와 같이 이익되고 안락(安樂)함에서 물러서고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달과 같다는 것은 부지런한 데 서로 응하여 발심함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착한 법이 점차 더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더욱 타오르는 불과 같다는 것은 극의(極依)와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땔나무를 더하면 불이 치성(熾盛)하듯이 쌓인 행이 극(極)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함장(含藏)과 같다는 것은 단바라밀(보시바라밀)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재물을 두루 주더라도 또한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보배 상자와 같다는 것은 시바라밀(지계바라밀)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공덕의 법보(法寶)가 저기에서 좇아 나오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큰 바다와 같다는 것은 찬제바라밀(인욕바라밀)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온갖 어긋나고 거슬리는 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금강(金剛)과 같다는 것은 비리야바라밀(정진바라밀)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용맹스럽고 단단하여 파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산왕(山王)과 같다는 것은 선바라밀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물건들에게 동요되지 않아 어지럽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약왕(藥王)과 같다는 것은 반야바라밀(지혜바라밀)과 서로 응하는 발심이 또한 이와 같아서 미혹[惑]과 지혜의 두 가지 병을 능히 파괴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착한 벗과 같다는 것은 한량없음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어떤 경우라도 중생들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여의주와 같다는 것은 신통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바라거나 나타내고자 함을 따라 능히 성취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작열하는 해와 같다는 것은 4섭법(攝法)과 서로 응하는 발심이 또한 이와 같아서 해가 곡식을 성숙하게 하듯이 중생을 성숙하게 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같다는 것은 네 가지 걸림이 없는 말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법을 설하고 교화하여서 중생들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국왕(國王)과 같다는 것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능히 바른 길을 위하여 인을 파괴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창고와 같다는 것은 세 가지 취(聚)와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복과 지혜의 법재(法財)가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왕의 길과 같다는 것은 깨달음의 분제와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큰 성인이 먼저 행한 것을 남아 있는 자들이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수레나 마차와 같다는 것은 지(止)와 관(觀)과 서로 응하는 발심이 또한 이와 같아서 두 바퀴가 구족하여 안락하게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솟는 샘물과 같다는 것은 총지(摠持)와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듣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법이 다함없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기쁜 음성과 같다는 것은 법인(法印)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해탈을 구하는 자가 즐겁게 듣는 것이다.
비유에서 강물의 흐름과 같다는 것은 자기 성품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무생인(無生忍)의 도가 자연스럽게 흘러서 뜻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큰 구름과 같다는 것은 능히 세계를 이루는 방편과 서로 응하여 발심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아서 여덟 가지의 상(相)으로 도를 이룸을 나타내 보여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과 스물두 가지의 비유는 바로 발심에 비유한 것이니, 성자무진혜경(聖者無盡慧經)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발심하지 못한 자의 과실]
이미 발심의 비유를 말했으니,
다음은 발심하지 못한 자의 과실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로움을 생각함과 방편을 얻음과
뜻을 아는 것과 실지를 증득함,
이와 같은 네 경우의 즐거움들은
적멸에 나아가 향하게 되면 문득 버리게 된다.
[釋] 보살에게 네 가지의 즐거움이 있으니,
첫째는 이로움을 생각하는 즐거움이다. 말하자면 남을 이롭게 하기로 생각한 때이다.
둘째는 방편을 얻은 즐거움이다. 말하자면 선교(善巧)의 방편을 얻는 데 이르렀을 때이다.
셋째는 뜻을 아는 즐거움이다. 말하자면 대승의 뜻을 알았을 때이다.
넷째는 실지를 증득한 즐거움이다. 말하자면 인(人)과 법의 무아(無我)를 증득하였을 때이다.
만일 사람이 중생들을 버리고 적멸(寂滅)한 데 나아가 향하게 되면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보살의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미 발심하지 못한 것을 꾸짖었다.
그러므로 발심한 자를 마땅히 찬탄해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최초로 큰 마음을 발하였으니
끝없는 악에서 잘 보호하여서
착함이 더하고 자비가 더하기 때문에
즐거워도 기쁘고 괴로워도 기쁘다.
[釋] 만일 보살이 처음으로 큰 보리의 마음을 내었다면 그때에는 한없는 중생들이 의지한다. 그러기에 잘 보호하여 온갖 악을 짓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악한 길로 물러나 떨어지는 두려움에서 멀리 벗어나게 된다.
또는 착함과 착함을 더함이 있기 때문에 즐거움에 있어서 항상 기뻐하고, 자비와 자비를 더함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에도 항상 기뻐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 사람은 착한 길에서 물러나고 마는 두려움을 멀리 벗어나게 된다.
[발심으로 인하여 보호를 짓지 않음]
이미 발심을 찬탄하였으니,
다음에는 이 발심으로 인하여 보호를 짓지 않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남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여
자기를 잊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
자기를 위하여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
어찌 착하지 못한 업을 지으리오.
[釋] 간략하게 그 뜻을 보이겠다.
보살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다.
이로 말미암아 자기의 몸과 목숨을 잊고 남을 이롭게 하며,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
이 때문에 능히 중생에게 악한 업을 끊게 한다.
[퇴전하지 않는 마음]
이미 보호를 짓지 않음에 대해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퇴전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법을 관찰하기를 환(幻)과 같이 하고
태어남을 관찰하기를 동산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하면
이루어지든지 이루어지지 않든지
미혹[惑]과 괴로움 모두에 두려움이 없어지리.
[釋] 보살이 모든 법을 관찰할 때에 환인 줄 아는 것같이 하면 그 관이 성취될 때에는 번뇌에 있어서 두려움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보살이 자신이 나는 곳[生處]을 관찰할 때에 동산에 들어감과 같이 하면 그 관이 성취되지 못했을 때에도 고뇌에서 또한 두려움을 내지 않는다.
만일 이와 같은 자라면 다시 어떤 뜻이 있어 보리의 마음에서 물러서겠는가?
다시 게송으로 말한다.
스스로 꾸밈과 스스로 먹음과
동산의 땅과 희롱하여 기뻐함,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일이 있는데
슬퍼하는 자는 다른 승(乘)이 아닐는지.
[釋] 보살은 자기의 공덕으로써 자신을 장엄하게 꾸미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기쁨으로써 자신의 식사로 삼으며, 뜻을 지어 나는 곳으로써 동산의 땅을 삼고, 신통과 변화로써 유희와 기쁨을 삼는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일은 오직 보살에게만 있고 이승에게는 없다.
보살에게 이미 이러한 네 가지의 일이 있으니, 어떻게 보리심에서 물러서겠는가?
[고(苦)를 두려워하는 마음]
이미 물러서지 않는 마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고(苦)를 두려워하는 마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매우 부지런히 중생을 이롭게 하니
큰 자비로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
무간지옥(無間地獄)도 즐거운 곳으로 여기거니와
어찌 온갖 고통 있음을 두려워하리오.
[釋] 보살은 큰 자비로 체를 삼는다.
그러기에 매우 부지런히 남을 이롭게 하여 비록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들어간다 해도 놀며 즐기는 곳과 같다.
보살은 이와 같은데 다른 고통 속에서 어찌 두려움을 내서 이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물러서겠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큰 자비를 항상 마음에 두어서
남의 괴로움을 자기 괴로움처럼 여기네.
자연히 지을 것을 지어야 하니
권함을 기다린다면 매우 부끄러울 것이네.
[釋] 여러 보살들은 큰 자비가 항상 마음 가운데 있어서 만일 중생들이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보면 곧 스스로 괴로움을 느낀다. 이러한 도리도 마땅히 지을 것을 짓는다.
그러므로 만일 착한 벗이 권해 주게 되면 매우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중생들의 짐을 짊어지고
게으름을 피우면 추하여 뛰어남이 못되니
자신과 남의 결박을 풀기 위해서는
정진하기를 마땅히 백배는 해야 한다.
[釋] 보살이 발심하여 중생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갈 적에 늦추어 간다면 이는 추한 일이어서 제일 단정한 중생은 되지 못한다.
보살은 마땅히 생각하기를
‘만일 자기든지 남이든지 가지가지의 급한 결박이 있으니 말하자면 혹업(惑業)으로 생긴다.
이 결박을 풀기 위해서는 마땅히 백 갑절이나 정진하여서 저 성문들 이상으로 마땅히 지을 것을 지어야 한다’고 해야 한다.
「발심품」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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